자이들리츠 작전 러시아어: Операция «Зейдлиц» 독일어: Operation Seydlitz | ||
제2차 세계 대전중 동부전선의 일부 르제프 공방전의 일부 | ||
▲ 전선 상황 | ||
날짜 | ||
1942년 7월 2일 ~ 12일 | ||
장소 | ||
르제프-뱌지마-스몰렌스크로 이어지는 소련군의 반원 모양 돌출부 | ||
원인 | ||
독일 국방군의 후방 안정화 및 전선 단축 시도 | ||
교전국 | [[틀:깃발| | ]][[틀:깃발| ]][[소련| ]]|
지휘관 | [[틀:깃발| (칼리닌 전선군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이반 마슬렌니코프| ]] (제39군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세르게이 소콜로프| ]] (제11기병군단 사령관) | ]][[틀:깃발| ]][[이반 코네프| ]][[틀:깃발| (중부 집단군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하인리히 폰 비팅호프| ]] (제9군 사령관 대리) | ]][[틀:깃발| ]][[귄터 폰 클루게| ]]
결과 | ||
나치 독일의 승리 | ||
영향 | ||
독일 국방군의 소련군 돌출부 제거 및 후방 안정화 성공 중부 전선 고착화 | ||
전력 | 제39군 / 제11기병군단[1] 약 54,000명 제22군/ 제41군[2] 약 87,000명 | |
피해규모 | 약 61,000명 야포 500문 전차 200대 | 약 5,000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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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자이들리츠 작전은 1942년 중부 전선에서 독일군의 마지막 주도적 공세이며 독일군이 하노버 1,2 작전으로 후방의 파르티잔과 소련군 공수부대들을 처리하는데 성공한 뒤 돌출부 후방의 소련군을 포위섬멸하는데 성공하면서 전선의 길이를 크게 단축시키고 중부전선의 방어를 공고히 하면서 전황을 고착화시키는데 성공했다. 이 여파로 소련군은 독일군의 하나뿐인 보급로인 스몰렌스크-뱌지마-시쵸브카-르제프 철도를 더이상 위협할 수가 없게 되었다. 또한 독일군이 모스크바를 향한 마지막 공세 시작점으로서 르제프를 중요시한 만큼 소련군에게도 뱌지마 돌출부는 르제프의 독일군을 제거하기 위한 공세를 위해 매우 중요했는데 이 돌출부가 사라지면서 소련군은 가을과 겨울에 실시한 공세[3]에서 독일군의 돌출부를 제거하는데 실패하게 된다.2. 1942년의 르제프 전선
1942년 겨울에 소련군의 대규모 반격으로 전선은 북쪽부터 독일군의 데미얀스크 돌출부, 소련군의 벨리키예루키-토로페츠 돌출부, 독일군의 르제프-뱌지마 돌출부로 이어지는 직선거리 대비 굉장히 비효율적이고 매우 긴 전선이 형성되었다. 따라서 1942년 봄 동안 이 구역은 양측에게 엄청나게 중요한 지역이 되었는데 소련군 입장에서는 여전히 독일군이 모스크바 코앞에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독일군 입장에서는 이미 후퇴 시기를 놓친 상황에서 밀려나다가 간신히 방어라인을 만들었는데 전선 길이를 줄이자고 더 물러나면 도대체 어디서 방어선을 형성해야하는지 답이 없는 상황이었다.따라서 봄 동안 소련군은 이 두 돌출부를 제거하기 위해 공세를 펼쳤으나 공세 능력이 이미 소진된 상태였기에 독일군은 이를 모조리 막아냈고 이어서 독일군도 반격 작전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최초 구상은 남북의 돌출부에서 협공을 가해 토로페츠의 소련군을 모두 가둬버리는 노드폴 작전을 구상했으나 각각의 돌출부도 간신히 유지하는 상황에서 이는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더군다나 1942년 하계 공세는 남부집단군이 주공이 되면서 중부집단군은 4기갑군을 포함해 휘하 20개 군단 중 5개 군단이 차출됐고 기갑전력의 30%가 남쪽으로 이동했다. 보충도 원활하지 않아서 보병사단들은 9개 보병대대, 4개 포병대대에서 6개 보병대대, 3개 포병대대로 감편됐다. 이에 클루게는 이미 히틀러의 관심이 떠난 노드폴 작전을 취소하고 하노버 작전과 자이들리츠 작전을 새로 구상했다. 하노버 작전은 4기갑군의 구역을 인수한 4군이 뱌지마 남쪽의 소련 파르티잔과 공수부대들을 정리하는 작업이었으며 2단계로 계획됐다.
하노버 1,2 작전이 마무리되면 9군이 르제프-뱌지마-스몰렌스크로 이어지는 반원형 모양의 소련군 돌출부를 제거할 예정이었다. 이 돌출부가 제거되면 르제프 후방의 보급로가 안정화되는 것은 물론이고 전선의 길이도 크게 단축할 수 있었다. 5월 말부터 시작된 하노버 작전이 한 달만에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서 9군은 7월 초에 공세를 시작하기로 계획했고 북쪽의 23군단과 남쪽의 에제벡 집단이 소련군의 후방으로 침투해 포위섬멸하기로 했다. 작전 자체는 9군 사령관 모델이 수립했지만 5월 23일에 파르티잔의 습격으로 치명상을 입어 모델 대신 비팅호프 기갑대장이 사령관 대리로 작전을 진행할 예정이었다. 소련군의 돌출부에는 칼리닌 전선군 소속 39군과 11기병군단이 있었으며 좌익에는 22군, 우익에는 41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3. 전투 서열
3.1. 독일군[4]
- 중부 집단군 ( 사령관 : 귄터 폰 클루게 원수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제9군 ( 사령관 대리 : 하인리히 폰 비팅호프 기갑대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제23군단
- 제129보병사단
- 제110보병사단
- 제1기갑사단
- 제102보병사단
- 제5기갑사단
- 제86보병사단
- 에제벡 집단
- 제2기갑사단
- 제197보병사단
- 제246보병사단
- 제46기갑군단
- 제20기갑사단
- 제14차량화보병사단
- 제87보병사단
- 제328보병사단
}}}
}}}
3.2. 소련군[5]
- 칼리닌 전선군 ( 사령관 : 이반 코네프 상장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제39군 ( 사령관 : 이반 마슬렌니코프 중장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제21근위소총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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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56소총사단
- 제262소총사단
- 제357소총사단
- 제373소총사단
- 제381소총사단
}}} - 제11기병군단 ( 사령관 : 세르게이 소콜로프 대령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제18기병사단
- 제24기병사단
- 제46기병사단
- 제82기병사단
}}}
}}}
4. 전개
독일군의 북쪽 공세를 담당한 것은 올레니노에서 공세를 시작할 23군단의 1기갑사단과 102,110보병사단이었고 남쪽 공세를 담당한 것은 군단급 부대인 에제벡 집단의 2기갑사단과 197,246보병사단이었다. 여기에 추가로 하노버 작전을 마치고 올라올 5기갑사단과 3기갑군에서 차출한 20기갑사단이 추가로 투입될 예정이었으며 46기갑군단 소속 4개 보병사단이 전선을 유지하고 14차량화보병사단이 예비로 대기중이었다.▲ 독일군의 공세 진행도 |
7월 2일에 독일군의 공세가 시작됐지만 서쪽 그룹의 1기갑사단은 첫 날 거의 전진하지 못했다. 이에 독일군은 동쪽 그룹의 5기갑사단을 투입했으나 역시 진격은 지지부진했다. 우선 날씨가 습하고 비가 언제올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며 전역이 워낙에 광활하고 울창한 숲이라 소련군의 위치 파악이 불가능하여 국지적인 반격에 대처하기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4일이 되자 독일군은 22군과 31군 사이를 돌파하는데 성공했고 이어서 14차량화보병사단을 투입했다. 돌파 자체는 매우 힘들었지만 일단 돌파에 성공하자 전황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독일군은 2제대로 46기갑군단의 20기갑사단과 87,328보병사단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투입했다. 같은 시각, 2일에 같이 공세를 시작한 에제벡 집단의 2기갑사단 선봉대는 소련군을 계속 우회하여 벨리에 도달한 상태였고 5일에 1,2기갑사단이 만나면서 포위망이 완성됐다.
독일군은 포위망을 유지할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포위망을 완성하기 전부터 내부의 적을 소탕하기 위한 작전을 시작했다. 20기갑사단의 공세로 포위망은 2개로 나눠졌고 후방이 차단되면서 소련군은 붕괴되었다. 코네프는 39군과 11기병군단에게 탈출을 명령했다. 1941년과 달리 소련군은 침착하게 대응하면서 생각보다 많은 부대가 탈출하는데 성공했으나 39군과 11기병군단은 괴멸되어 해체됐고 22군과 41군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5. 결과
소련군의 보고에 따르면 12일까지 칼리닌 전선군의 손실은 61,722명이며 독일군은 13일까지 37,000명, 7월 말까지 44,000명의 포로를 잡았다고 보고했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11기병군단이 17,623명 중 손실이 14,830명으로 말 그대로 전멸했으며 39군 역시 36,331명 중 23,647명의 손실이 발생해 곧바로 해체됐다. 측면을 보호하던 22군은 51,837명 중 9,343명, 후방의 41군은 34,997명 중 13,902명의 적지 않은 손실이 발생했다.독일군의 경우 9군의 보고서에 따르면 7월 1일부터 10일까지 전사 979명, 실종 125명, 부상 3,894명으로 약 5,000명의 손실이 발생하여 전술적으로 압도적인 승리였으며 전략적으로도 소련군이 뱌지마 남쪽에서와 달리 훨씬 광활한 지역임에도 게릴라 작전을 펼치지 못하고 섬멸되었으므로 후방을 안정화시키는데 성공했다. 소련군은 더이상 스몰렌스크-뱌지마-르제프로 이어지는 철도를 위협할 수 없게 되었고 스몰렌스크-올레니노 도로가 독일군에게 넘어가면서 보급 사정이 크게 개선되었을 뿐 아니라 중부집단군은 남쪽에서의 공세로 인해 더 이상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전선을 단축시켜 귀중한 예비대를 확보할 수 있었다.
6. 여담
- 주코프와 코네프의 회고록에 따르면 스탈린은 이 돌출부에 있는 병력들을 철수시키기를 원했다고 한다. 포위당할 위험이 크기 때문인데 어지간해선 철수를 용인하지 않는 스탈린이 보기에도 3면이 포위된 이 돌출부가 위험해 보였던 것 같다. 그렇지만 코네프는 우리가 돌출부가 부담스러운만큼 상대도 긴 전선이 부담스러울 것이고 병력에서 소련군이 우위에 있으므로 독일군이 더 부담스러워 할 것이라며 주코프의 지지를 받아 돌출부를 유지했다. 실제로 독일군이 공세를 펼친 것은 전선 단축을 위한 것도 있지만 이 돌출부가 독일군의 후방을 매우 위협하여 포위당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유지시킬 수만 있다면 좋은 판단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독일군이 먼저 공세를 펼쳐 돌출부를 제거하는데 성공했으므로 스탈린의 선택이 더 나았던 드문 경우가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