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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08 12:00:50

퓨리어스(항공모함)


1. 개요2. 함생
2.1. 새로운 경순양함(?)의 탄생2.2. 세계 최초의 항공모함2.3. 퓨리어스 출격2.4. 전간기 : 2단 갑판 항공모함2.5. 제2차 세계 대전
3. 평가4. 기타5. 관련 링크

1. 개요

HMS Furious(47)
퓨리어스는 커레이저스급 대형 경순양함 3번함이자, 세계 최초의 항공모함이다.

2. 함생

2.1. 새로운 경순양함(?)의 탄생

1915년, 제1 해군경 존 피셔 제독은 발틱 프로젝트를 구상했는데, 이건 발트 해까지 가서 독일 연안을 포격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화력이 우수하고 속도도 빠르고 항행성이 우수한 새로운 군함이 필요했는데, 영국은 한참 전쟁 중이었으므로 재무상이 "경순양함 이상의 거대한 배를 만들면 예산을 안 주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래서 피셔는 대형 경순양함을 만들어서 발틱 프로젝트를 실현시키려고 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커레이저스급 대형 경순양함이다.

그런데 커레이저스급은 아무리 봐도 경순양함이라고 불러줄 물건이 아니었다. 리나운급 순양전함을 기초로 설계한 데다가, 주포도 리나운급의 남는 포를 전용한 15인치 포였다. 경순양함과의 공통점은 장갑이 경순양함 수준으로 얇다는 것 뿐이고, 누가 봐도 명백히 순양전함이었다.

그래도 1번함 커레이저스와 2번함 글로리어스는 차라리 나았다. 영국은 3번함 퓨리어스를 만들면서 말도 안 되는 기행을 벌였으니, 그것은 바로 18인치 40구경장 포를 퓨리어스에 달자는 것이었다. 해군 역사상 이보다 더 거대한 포는 야마토급 전함의 18.1인치 포밖에 없지만, 야마토보다 더 무거운 포탄을 발사한다는 점에서 진정한 세계 최강이었다. 그러나 포가 너무 크고 무거워서 포탑에 1문만 장착했고, 이런 포탑을 앞뒤로 2개 달아놓은 것이 바로 퓨리어스였다.

언뜻 보면 기행같지만, 퓨리어스의 존재는 영국이 K2/K3급 순양전함G3급 순양전함, 그리고 N3급 전함의 주포를 제작할 수 있다는 근거가 되며, 이 구상안이 다른 국가의 페이퍼 플랜과는 실현가능성 면에서 차이가 꽤 컸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들 15인치를 쓰는 시절에 실제로 제작해서 진수된 18인치 주포 함선이 영국에 있다는 사실은, 재정난에 시달려서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을 타결시키는 것이 제일 간절했던 영국 정부가 마냥 미국과 일본에 비해 을에 입장에 있지 않고 협상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데 나름대로 도움이 되었다.[1]

당연히 이런 배가 경순양함의 범주에 들어갈 리가 없다. 무장과 대공포를 떡칠하여 무거워진 미국 최후의 경순양함인 우스터급 경순양함의 만재배수량은 17997톤에 불과한데, 18인치 두개랑 부포 몇개만으로도 퓨리어스는 무려 만재배수량 22890톤이라는 크고 아름다운 배수량을 자랑했던 것이다. 심지어 미국 최후의 중순양함인 디모인급 중순양함조차 만재배수량 21269톤에 불과하다. 심지어 이 녀석과 비교할 만한 게 순양함에서는 그나마 순양함이라 부르는 만재 34000여 톤의 알래스카급 대형순양함밖에 없다. 심지어 알래스카급도 1차대전기 함선들과 비교하면 전함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강하고 대응방어를 갖춘 데다 30노트로 쏘다닐 수 있으니 전함이라 우겨도 문제가 없다. 영국은 순양전함을 만들어놓고 경순양함이라고 사기를 친 것이다. 그래도 모가미급 중순양함처럼 다른 나라를 속이려고 사기를 친 게 아니라, 자국의 짠돌이 재무성을 설득하려고 그랬으니까 군축 조약에 전함으로 분류함에 따라 국제적 문제로 비화될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이 사양의 퓨리어스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일은 없었다. 1917년 7월에 후방 포탑 하나만 올려보고 한 발 쏴본 뒤, 바로 원 계획이 나가리가 되었다. 퓨리어스가 반동을 버티지 못했기 때문이다. 포신의 제작사인 Elswick 지역의 Armstrong Works는 15인치라고 대외적으로 위장하면서 포탑용 2문과 예비용 1문 합쳐 총 3개의 포신을 만들었는데, 딱 한 번 써보고 바로 퓨리어스의 건조가 일시 중단되는 바람에 붕 뜨게 되고, N3급 전함의 18인치 45구경장 주포 제작의 입찰에 참여하게 된다..

잉여가 된 포신은 사용할 장소를 정하지 못해서 해안포에 쓰자고 했다가, 결국 모니터 3척에 1개씩 올리기로 했다. HMS General Wolfe와 HMS Lord Clive 2척은 완성되어 실전을 치르고, 나머지 1척인 HMS Prince Eugen은 포를 교체해보지 못하고 1차 대전이 끝난다. HMS General Wolfe는 이 주포로 1918년 12월 28일에 벨기에에서 철도를 절단하기 위해 36,000야드(32,920미터) 거리의 포격을 수행한 기록을 남겼다. HMS General Wolfe은 81발, HMS Lord Clive은 85발을 쐈다.

하지만 모니터 함은 모니터 함이고, 영국 해군 역시 퓨리어스의 다른 용도를 찾아야 했다. 그래서 이 배가 완성되기 전에 항공 모함으로의 개조를 시작한다.

2.2. 세계 최초의 항공모함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uriousSP_89.jpg
1917년의 퓨리어스

퓨리어스는 1917년 6월 26일에 취역했는데, 18인치 포는 후방포탑에 하나 달려있었고 전방 포탑은 달지 않은 상태였다. 18인치를 못쓰는 배라는 것이 확실해지자, 전방 주포 자리에 대신 평갑판을 깔아놓고 여기서 함재기를 이착함시키게 되었다.

언뜻 생각해도 전방 갑판은 착함하는 비행기가 앞으로 전진하고 있는 배의 함교에 들이박거나 혹은 함교를 피해서 착륙해야 하므로, 대부분의 국가들은 이런 경우에 후방 갑판으로 배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퓨리어스가 전방 갑판에 비행 갑판을 올린 것은 순전히 18인치가 처음에 뒤에 달렸기 때문이고, 영국 해군의 군인들도 일단 날려보기 전에는 앞과 뒤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쉽게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파일:furious_plane.jpg
퓨리어스의 함재기

1917년 8월 2일, 에드워드 해리스 더닝 비행대장이 솝위드 펍 전투기로 퓨리어스에 착함하는 데 성공했다. 비행기의 이착함이 가능한 세계 최초의 항공모함이 탄생한 것이다. 그는 8월 7일에도 착함에 성공했으나, 같은 날 실시된 세 번째 시험에서 착함에 실패하며 순직하고 말았다.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착함 방법 탓이었다. 비행 중인 항공기와 퓨리어스의 속도를 비슷하게 맞춘 후 서서히 옆으로 움직여서 항공기가 비행갑판 위로 오도록 만들고, 그 상태에서 고도를 낮추어 착함한다. 배와 속도 차이가 날 경우 갑판 위의 수병들이 달려와서 수동으로 비행기를 세운다. 결국 사고가 잦을 수밖에 없고, 영국인들도 이 사실을 깨달은 후 다시 함선 개장 작업을 진행하기로 한다.

그러나 그러한 개장 작업이 이루어지기 전인 1917년 10월 16일 최초로 출격한다. 독일의 통상파괴전을 저지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독일 해군이 예상보다 빠르게 공격하고 이탈하면서 추격 임무는 실패했다.

2.3. 퓨리어스 출격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26304f1c4859fd188194c33564249135.jpg
1918년의 퓨리어스. 추락 방지용 그물이 설치되어 있다.

파일:파일:furious_plane2.jpg
1918년의 퓨리어스. 함교 후방의 안전용 그물이 보인다.

1918년 3월 15일에 퓨리어스의 개장이 끝났다. 후방의 주포 포탑을 떼어버리고 함재기 운용을 위한 엘리베이터 2대를 설치함으로서, 함재기 운용에 보다 적합하도록 만든 것이다. 함교와의 충돌방지를 위해 그물도 설치되었지만, 착함할 때는 최대한 느린 속도로 항모에 진입한 후 어떻게든 멈춰야 했다. 충분히 느려지지 않으면 그물이 찢어질 수도 있다는 사소한(?) 문제는 있었지만, 손으로 세우는 것보다는 나았다는 장점은 있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이 군인들을 만족시킬 리가 없었기에, 후속작인 아거스급 항공모함은 함수부터 함미까지 이어진 평갑판을 달게 되었다.

퓨리어스는 1918년 5월부터 함재기를 싣고서 순찰임무에 투입되었다.

1918년 7월 19일, 퓨리어스는 톤더른 공습을 감행했다. 역사상 최초로 항공모함이 적의 육상기지를 공격한 것이다. 난데없는 공습에 독일인들은 충격과 공포에 빠졌고, 독일군의 비행선 격납고 2개가 박살나고 비행선 1대가 파괴되는 등의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이런 개념을 발전시킨 것이 타란토 공습진주만 공습이다.

2.4. 전간기 : 2단 갑판 항공모함

함급 제원
함명 HMS 퓨리어스
배수량 기준 22,900톤. 만재시 26,500톤
흘수선 기준 전장 224.1m
갑판 기준 전장 239.8m
전폭 26.8m
흘수선 8.3m
보일러 야로우 증기터빈 보일러 유지
출력 67,000 kW (약 9만마력)
최고속도 30노트
항속거리 10노트로 7,480해리
무장 BL 5.5인치 Mk.I 부포 10문
QF 4인치 Mk.V 대공포 6문
함재기 36기
승무원 736명+항공대
장갑 갑판장갑 51~76mm으로 강화, 나머지는 동일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커레이저스급은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 의거하여 해체 위기를 겪는다. 그러나 주력함을 항공모함으로 개장하면 해체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항이 있었기에, 커레이저스와 글로리어스도 퓨리어스처럼 항공모함으로 개장되게 된다. 그러나 퓨리어스가 맨땅에 헤딩한 덕에 아거스급 항공모함 같은 보다 진보된 모델들도 출현한 터라, 퓨리어스도 전방 평갑판 + 함교 + 후방 평갑판이라는 이상한 구조를 개선하기로 했다.

1925년에 퓨리어스의 개장이 끝났다. 만재 배수량 26500톤에 폐쇄식 2층 격납고를 갖췄으며 36대의 함재기를 탑재할 수 있었다. 속도는 30노트에 달했으므로 충분히 1선급 항공모함으로 뛸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2층 격납고 때문에 무게 중심이 위로 올라간 데다가, 함재기도 36대여서 자매함들의 48기에 비하면 적은 편이었다. 연돌이 함의 측면에 위치했는데, 뜨거워진 연소가스가 관을 타고 이동하면서 격납고 뒤쪽에 열기를 골고루 전달하는 구조가 문제였다. 이래서는 격납고 요원들이 고생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영국은 퓨리어스로 새로운 모델을 실험해본 덕에, 아크로열급 항공모함이라는 현대적인 항공모함을 설계할 수 있었다.

1925년 이후 퓨리어스는 다양한 함재기의 이착함 실험과 그에 따른 개장을 실시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냈으며, 1938년에는 구축함과의 충돌사고로 경미한 손해를 입기도 했다.

2.5. 제2차 세계 대전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921a0f3d76f600a398e8e063bcdb9343.jpg
1942년의 퓨리어스

퓨리어스는 노르웨이에 독일군이 침공하자 곧바로 전투에 투입되었다. 독일군의 공습으로 손상을 입기도 했고, 노르웨이의 금괴를 영국으로 실어나르는 등 부지런히 뛰었다. 그러나 자매함인 커레이저스와 글로리어스는 제대로 활약해보지도 못하고 독일군의 공격으로 침몰했다.

노르웨이 작전 이후 퓨리어스는 항공기 수송임무에 투입되었는데, 목적지가 하필이면 몰타였다. 독일군이 몰타를 얼마나 눈엣가시로 여겼는지를 생각해보면, 퓨리어스의 임무는 단순한 수송이 아니라 적에게 집중공격을 받고 있는 위험지역으로 돌격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퓨리어스는 독일군의 공습도 받고, 적기를 격추하기도 하면서 부지런히 비행기를 몰타로 날라서 몰타 방위에 도움을 주었다. 1942년 8월 3일부터 시작된 페데탈 작전에도 참가했으며, 영국군은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보급선단을 몰타에 밀어넣는 데 성공했다. 퓨리어스가 보낸 전투기들이 대활약을 하면서 몰타 항공전에서 연합군은 확고하게 우세를 점했고, 추축국의 수송선단은 박살났으며 보급이 끊어진 독일 아프리카 군단은 무너져내렸다.

몰타로 비행기를 운송하는 임무를 끝낸 후 퓨리어스는 횃불 작전에 참가했으며, 적 비행장을 공습하는 등 활약했다. 1944년에는 노르웨이의 독일군 기지를 공습했으며, 1944년에는 티르피츠 사냥 작전인 텅스텐 작전과 굳우드 작전에 참가했다. 이때 퓨리어스는 경사갑판 비슷한 구조물을 임시로 설치했으며, 이것이 스키점프대의 기원이 되었다. 이 공격은 티르피츠에 손상을 입혔지만 격침에는 실패했고, 작전 종료 후 영국 해군은 공군에게 티르피츠 격침 임무를 넘기게 된다. 영국 공군은 톨보이아브로 랭커스터 폭격기에 싣고 3차례에 걸친 공격 끝에 티르피츠를 침몰시켰다.

그러나 영국군은 1944년 9월 15일에 퓨리어스를 예비역으로 돌렸다. 이제 신형 항공모함들도 많이 취역하고 있었으니 더 이상 퓨리어스 같은 노령함을 혹사시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퓨리어스는 제2 차 세계대전에 참가한 커레이저스급 항공모함 중에서 유일한 생존함이 되었다. 세계 최초의 항공모함이므로 보존가치는 충분하고도 남았지만, 영국은 돈이 없었기에 1948년에 스크랩되었다.

3. 평가

세계 최초의 항공모함이라는 것만으로도 퓨리어스의 가치는 매우 높다. 항공모함의 출발점이자 조국을 위해 몸바쳐 싸운 수훈함으로서, 퓨리어스는 함생 내내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프랑스의 베아른급 항공모함이 형편없는 성능 때문에 항공기 수송선으로 전락한 것과, 일본 최초의 항공모함 호쇼가 연습함 노릇만 한 것에 비하면 어마어마한 성과였다. 함재기의 이착함 기술부터 스키점프대까지, 수많은 항공모함 관련 기술과 노하우를 정립하는 데 있어 퓨리어스의 공로는 대단히 크다. 화려한 전과는 없을지 몰라도, 자신보다 신품인 항공모함들조차 제대로 활약하지 못한 현실에 비춰볼 때 퓨리어스는 정말로 훌륭한 군함이었다.

4. 기타

퓨리어스의 제2 형태는 함교 앞에 평갑판을 달고, 함교 뒤에 주포 포탑을 다는 이상한 외양이었는데 항공전함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퓨리어스가 그런 기괴한 외모를 가졌던 이유는 어디까지나 세계 최초의 항공모함이기 때문이었다. 항공모함에 주포탑을 달면 안 된다는 상식이 아예 없던 시절의 일이라서 그렇게 된 것이고, 착함사고가 발생하자 곧바로 전방 평갑판 + 함교 + 후방 평갑판이라는 제3 형태로 개장되었다. 퓨리어스를 항공전함이라고 부르면 안 되는 이유가 그것이다. 기묘한 것은 일본군이 이세급 전함을 항공전함으로 개장하면서 전방의 주포탑을 남겨두고, 함교 후방에 평갑판을 깔았다는 점이다. 퓨리어스의 앞뒤를 뒤집은 것 같은 외모였지만, 이런 식으로 만들면 함재기를 착함시킬 수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생긴다는 교훈을 까먹은 처사였다. 결국 이세급 항공전함들은 제대로 함재기를 운용해보지도 못하고, 미끼 역할이나 수송선 노릇이나 하다가 격침되었다.

퓨리어스의 최종형태는 폐쇄식 2층 격납고와 2층 갑판인데, 이걸 본 일본은 아카기카가를 항공모함으로 개장하면서 상당부분 참고했다. 문제는 쓸데없이 3단 갑판을 만드는 바람에 공간낭비와 이착함 난이도 상승 등의 문제가 생겼다는 점이다. 특히 카가는 퓨리어스의 연돌을 베끼는 바람에 연돌이 격납고 후방을 골고루 가열시키면서 바다 독수리 꼬치구이 제조기라는 별명을 얻고 말았다. 그래도 얘들은 일본 최강의 항모부대인 1항전으로서 활약했으니 이세급보다는 나았다.

5. 관련 링크

영문 위키피디아 퓨리어스
[1] 참고로, 영국만 18인치를 개발한 것은 아니다. 후에 미국도 탈조약형 전함에 쓸 18인치를 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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