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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28 18:57:51

김한준(군인)

파일:태극무공훈장 약장.png
태극무공훈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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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태극무공훈장 부장.png
||<tablewidth=100%><table bgcolor=#fff,#191919><tablecolor=#373a3c,#ddd><width=20%> 1950
더글라스 맥아더
미 육군원수 ||<width=20%> 1951
이근석
공군준장 ||<width=20%> 1951 1953중복수훈
백선엽
육군대장 ||<width=20%> 1951 1953중복수훈
정일권
육군대장 ||<width=20%> 1951
심일
육군소령 ||
1951
이명수
육군일등상사
1951
김용식
육군일병
1951
홍재근
육군일병
1951
홍재근
육군일병
1951
김용배
육군준장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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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준장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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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중장
1951
김홍일
육군중장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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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중장
1951 1953중복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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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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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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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준장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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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중장
1952 1953중복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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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중장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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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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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중장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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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육군대장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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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대위
1953
김한준
육군대위
1953
김용배
육군대장
1953
민기식
육군대장
1953
임충식
육군대장
1953
한신
육군대장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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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소장
1953
이성가
육군소장
1953
이용문
육군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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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소장
1953 1954중복수훈
강문봉
육군중장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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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중장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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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중장
1953
백인엽
육군중장
1953 1954중복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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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중장
1953
유재흥
육군중장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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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중장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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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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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대위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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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대위
1954
김경진
육군중령
1954
김웅수
육군소장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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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소장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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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소장
1954
임선하
육군소장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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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
최득수
육군이등상사
1954
김옥상
육군일병
1954
조재미
육군준장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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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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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중장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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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
정긍모
해군중장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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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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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1
김금성
공군준장
1961
국군무명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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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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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강재구
육군소령
1966
이인호
해병소령
1967
송서규
육군대령
1967
채명신
육군중장
1967
지덕칠
해군중사
1967
정경진
해병대위
1967
신원배
해병소위
1968
최규식
경무관
1968
이익수
육군준장
1968
최범섭
육군중령
1970
이세호
육군중장
1972
이무표
육군대위
1972
임동춘
육군대위
1975
찰스 B. 스미스
미육군중령
1980
전두환(취소)
육군대장
2002
장철부
육군중령
2006
김영옥
미 육군대령
2011
조달진
육군소위
2015
윌리엄 스피크먼
영 육군병장
2021
에밀 카폰
미 육군대위
2023
랄프 퍼켓
미 육군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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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김한준
金漢俊
출생 1929년 2월 8일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완주군
사망 2012년 4월 29일
군사 경력
복무 대한민국 육군
1947년 ~ 1956년
최종 계급 대위
참전 여순사건
6.25 전쟁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이다. 425고지 전투에서 현장 지휘관으로서 박격포를 활용한 육박전으로 1개 대대를 섬멸하여 국군의 마지막 승리를 이끌었다.

2. 생애

1929년 2월 8일 전북 완주에서 태어났다. 열 아홉살인 1947년 4월 국방경비대에서 지원하여 입대하였고, 200명의 입대 동기생 중 일등병에서 하사로 진급하는 12명에 선발되었다. 그 후 여순사건의 진압에 참전하였으며, 6.25 전쟁 당시에는 7사단 8연대의 소속으로 평양입성 및 압록강을 향한 국군의 북진에 참전하며 풍부한 현장전투와 지휘 경험을 쌓았고, 개천-비호산 전투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1950년 11월 15일 육군 소위로서 현지에서 임관되었으며 이후 3년간 전쟁의 전 기간 동안 7사단 8연대 휘하의 소대장과 중대장으로서 최전선에서 참전했다.
1953년 7월 13일 중공군은 정전협정이 막바지, 5개 군 15개 사단을 국군 제2군단 전면에 배치하는 7·13 대공세를 시작했으며, 김한준 대위와 1중대가 사수를 명받은 화천 북방의 425고지는 금성천 방어선의 핵심인 별우지구의 서쪽 방어와 동시에 제8연대 방어선의 핵심인인 602고지의 동쪽 능선까지 맡고 있는 요충지였다.

중공군은 1953년 7월 20일 07시 약 8,000발에 달하는 122mm포의 지원을 앞세워 1개 대대 병력으로 전방에 출현하였다. 적과 치열한 교전을 치른 김한준의 중대는 적에게 포위된 상태에서 탄약과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에서 포위망을 뚫고 탄약 등 보급로를 개척하기 위해 중대원 가운데 경험이 풍부한 7명을 선발한 임시특공대를 파견해 적의 공격 축선을 측방에서 공격하여 보급로를 개척하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2개 중대의 중공군이 다음날 0시 45분을 기해 제1대대 전면을 향해 재차 공격을 가해왔다. 김한준의 1중대는 소수의 인원으로 적의 기습적인 공격에 맞서 백병전을 감행하여 격퇴하였고, 425고지 전면의 적진에 아군의 지원초격이 시작되었다. 이후 김한준 대위는 직접 진두지휘하여 적과 거리를 30야드까지 밀접하게 하였고 각 소대장과 같은 위치에서 박격포를 활용해 전진 육박전을 전개하였다. 1시간 30분에 걸친 전투 끝에 후퇴하는 중공군을 섬멸하고 돌출고지를 06시에 완전히 탈환하였다. 제1대대는 사흘간의 격전을 통해 470명의 적군을 사살하고 21명을 생포하였으며, 60mm 박격포 7문, 체코식 기관총 22정, 3.5인치 로켓포 4문 등의 무기를 획득하는 전과를 올렸다.

김한준 대위가 이끈 425고지 전투의 승리는 금성천 방어선을 안정적으로 유지했을뿐 아니라 사단의 주보급로를 확보해 당시 대한민국의 중요한 전력공급원이던 화천댐을 사수 할 수 있었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425고지 전투의 공훈으로 김한준 대위는 1953년 10월 13일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고, 1956년 5월 30일 전역하였다.

이후 2012년 4월 29일 향년 83세로 별세하였으며, 장례는 육군장으로 엄수되었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