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스탈린의 편지에 나오는 가공의 전쟁.국공내전의 확장판이자 중국과 북한이라는 동아시아의 두 사회주의 국가를 지도상에서 지워버린 핵전쟁이며, 동아연방이라는 국가가 세워지는 계기가 된 전쟁이기도 하다.
동북아전쟁이 발발한 원인과 그 뒤에 있는 미국과 소련 두 초강대국 지도자들 간에 맺어졌던 은밀한 연결고리의 실체를 밝혀나가는 것이 소설의 주요 테마일 정도로 중요한 사건이다.
2. 동북아전쟁의 전개과정
2.1. 발단
1950년 6월 27일, 유엔에서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를 열어 25일에 북한의 침공을 받은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 결의안을 표결에 부친다. 그런데 여기서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소련이 반대함에 따라 유엔군의 한국 참전이 불가능해지게 된다.[1] 그리하여 유엔군 대신 달랑 미군 혼자만 한국을 돕기 위해 한반도에 투입된다.1년 뒤인 1951년 3월, 미 전략공군사령부[2]의 사령관 커티스 르메이 중장은 공군특별수사국 빌 프리먼 대령의 보고서를 받고 큰 충격을 받는다. 사령부의 핵전략입안[3]에 참여하는 물리학자 존 타우너가 소련의 첩자라는 것이었다. 타우너는 수사국에 체포된 뒤에 자신이 빼낸 자료를 영국 MI6(비밀정보부)의 워싱턴 주재 책임자 킴 필비에게 넘겼다고 자백했다. 타우너는 심문 후 검찰에 넘겨질 것이라는 프리먼 대령의 말을 듣고 르메이 사령관은 검찰에 넘기지 않는 대신에 이중간첩으로 만들도록 지시한다.
이 시기 더글러스 맥아더 미 극동군 총사령관[4]과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사이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파국으로 치닫는다.
그런데 4월 10일 아침, 아침 늦게 백악관 집무실에 들어선 트루먼 대통령에게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심각한 표정으로 중대한 일이 발생했다면서 장시간에 걸쳐 보고한다. 그 보고의 내용은 다름아니라 스탈린의 심복인 라브렌티 베리야가 조만간 일본을 비밀리에 방문할 것이고, 그의 회담 상대는 맥아더로 해 달라는 내용의 암호전문을 주미 소련대사를 통해 백악관에 보냈다는 것이었다. 또한 베리야는 전문에서 "지난 3월 24일에 귀국의 맥아더 원수는 적의 최고사령관과 만날 의향이 있다고 기자회견에서 밝혔는데, 현재 한반도에서 싸우고 있는 공산군의 최고사령관은 펑더화이나 김일성이 아니라 나 베리야요"라고 밝힌다.
보고가 끝난 뒤, 이튿날에 집행될 예정이던 맥아더의 해임이 무기한 연기된다. 오랫동안 맥아더의 해임을 주도했던 애치슨은 빡친 나머지 그날 밤 폭음을 했다가 다음날 아침 서재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된다. 사인은 과로로 인한 심장마비였다.[5] 그리고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변화가 시작된다.
2.2. 전개
한편 트루먼이 자신의 해임을 취소했다는 소식과 자신을 그렇게 미워하던 애치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맥아더는 Olleh! 곧바로 맥아더는 신임 국무장관이 된 존 포스터 덜레스[6]와 접촉하여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둘은 중국 국공내전에서 중국국민당이 패배하도록 내버려둔 애치슨의 뒷담화를 하면서, 일본군을 부활시키기로 합의한다. 일본에는 전투경험이 풍부한 수백만 명의 실업자들이 있는데, 아직 청장년층인 이들은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이나 이승만의 한국군보다 유능하므로 한국전쟁에 투입시키는 게 이득이라는 것이었다. 덜레스는 일본의 비무장을 명시한 일본 헌법 제9조, 이른바 '평화헌법'도 재고하겠다고 밝힌다.4월 23일 밤 9시, 도쿄 하네다 공항에 소련의 일류신 여객기 한 대가 착륙한다. 여객기에서 내린 베리야는 맥아더의 최측근이 찰스 윌로비 미 극동군사령부 소장과 함께 리무진을 타고 도쿄 외곽의 한 별장으로 가 맥아더를 만나 회담을 나눈다.
회담 자리에서 "왜 미국 국무장관을 제쳐놓고 자신을 대화상대로 선택했느냐?"는 맥아더의 질문에 베리야는 "스탈린과 나는 미국 정치인보다는 같은 군인[7]인 맥아더를 믿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왜 자신을 만나러 왔냐?"는 맥아더의 질문에는, "소련이 미국에 적대적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러 왔다"고 밝힌다. 그러자 맥아더는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소련이 미국에 적대적이지 않다고?!"라는 반응과 함께 "무슨 개소리임? 지금 한반도에서 니네 시다바리들이 전쟁 일으킨 거 뻔히 아는데?"라고 쏘아붙인다. 그러자 베리야는 "작년 10월에 마오쩌둥이 스탈린에게 한국전에 참전할 테니 비행기 달라고 했는데, 지금 소련 비행기가 한반도에 나타난 적 있음?"[8]이라면서 "소련은 중공군이 한국전에 참전하는 거 별로 원하지 않았고, 이 전쟁이 제3차 세계 대전으로 번지는 것도 원치 않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휴전하자고 이러는 거임?"이라는 맥아더의 질문에 "휴전 그거 먹는 건가요? 우리는 소련과 미국의 평화를 바라며 스탈린은 전쟁을 통해 평화를 구축하고 싶어한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맥아더의 질문에 "더 얘기하고 싶으면 소련으로 오삼"이라고 대답하고 베리야는 소련으로 돌아간다.
회담 내용을 보고받은 트루먼 대통령도 베리야의 말에 숨은 의도를 정확히 파악은 못하지만, 일단 맥아더를 소련에 보내기로 한다. 마침 그 자리에 있던 덜레스 국무장관은 죽은 애치슨을 까대면서 "애치슨 그 개객기가 맥아더랑 각하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들려고 한 거임"이라면서 장제스의 국민혁명군과 구 일본군의 참전 떡밥을 슬쩍 던지고, "각하 또 대통령 해먹으려면 맥아더 해임 노노. 그러다가 각하가 X됨"이라면서 트루먼을 꼬드긴다.
베리야와의 회담 이후 맥아더는 요시다 시게루 일본 총리와 장제스 대만 총통을 만나 구 일본군과 국부군을 한국전쟁에 참전시키도록 요청(OR 협박)한다.
1951년 5월, 스탈린은 작년 말에 미 전략공군사령부에 심어놓은 첩자로부터 받은 미 공군의 최신 핵전략보고서를 읽고 충격에 빠진 이래 매일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51년 현재 소련이 가진 원자폭탄은 겨우 13발뿐인데, 미국은 600발이나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핵전쟁이 일어나면 소련이 일방적으로 쳐발릴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미국이 수소폭탄을 개발한다는 소식까지 날아와 그야말로 패닉 상태.
결국 스탈린은 한국에서 미국이 패배하면 제3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것이며, 미국이 선제 핵공격을 하면 소련은 이를 막을 길이 없었으므로 차라리 미국의 한반도 지배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베리야를 일본으로 보내 맥아더와 회담을 하도록 한 것이었다.
6월 2일, 미 극동군사령부의 언론검열관들은 한국 전선에 관해 낙관적으로 쓴 기사는 모조리 삭제하고 그런 기사를 쓴 기자는 추방해버렸다. 또한 맥아더가 정기적으로 발표하는 코뮈니케[9]를 비관적인 단어들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CIA(중앙정보국)나 기타 정부기관들이 미 극동군의 정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등 언론통제를 실시했다.
덜레스 국무장관은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하면 일본마저 적화될 우려가 있으므로 동맹국 간의 협력을 강화하고 국방예산을 대폭 확대하겠다고 발표한다. 또한 극동군사령부의 정보 조작에 속은 언론들은 정부가 강력한 대책을 세우라고 촉구했다. 공화당 의원들은 한국전선에 원폭을 사용하라고 촉구했고, 민주당 의원들은 국민혁명군과 영국군을 동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극동군사령부에서 어떻게 해야 일본군을 한국전선에 투입할 수 있을지 결론이 나지 않던 차에, 맥아더는 요시다 총리로부터 평화헌법을 어기지 않고 일본군을 투입할 수 있는 좋은 해결방안을 찾았다는 전화를 받는다. 그 해결방안이란, 일본인 청년 50만 명을 미국 이민자로 만들어 미국으로 보내면 미국에서 그들에게 시민권을 주고 자원입대하는 형식으로 미군에 편입시키는 것이었다.
6월 13일, 스탈린은 유엔의 소련 대표인 야곱 말리크를 통해 미국에 휴전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동시에 김일성과 마오쩌둥에게 비밀전문을 보내 공산군이 승기를 잡았으므로 휴전회담 제의를 거절하라고 지시한다.
15일, 맥아더는 국방장관에 취임한다. 16일에 맥아더 국방장관은 이틀 전 공산군 지휘관들이 미한연합군의 휴전회담 제의를 거절했다고 발표한다. 덜레스 국무장관은 기자회견에서 미국은 한국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공산군을 물리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맥아더는 합동참모회의에 참석했을 때 전략공군사령관 르메이 중장에게서 예의 간첩 얘기를 듣게 된다. 그 얘기를 들은 참석자들의 표정은 일그러졌으나, 르 메이는 이중간첩을 이용해 소련측에 넘어간 진짜 정보(드롭샷 작전, 셰이크다운 작전) 2개 외에 추가로 가짜 정보[10]를 흘렸다는 말을 듣고 안심하며 웃음을 터트린다. 그러나 오마 브래들리 합참의장만은 르메이가 터무니없는 계획으로 자칫 소련을 크게 자극해 전쟁을 초래할 수도 있는 월권 행위를 저질렀다고 화를 낸다. 그러나 르 메이는 그건 단지 이중간첩을 이용한 기만전략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브래들리는 더 화를 내며 르메이가 셰이크다운 작전조차 처음에는 합동참모본부에 보고하지 않다가 간첩사건으로 문제가 되니까 나중에 보고했다면서, 핵무기를 공군이 독점하기 위해 이런 짓을 벌인다고 비난했다. 회의가 소란해지자 맥아더는 르메이 편을 들면서 분위기를 진정시킨다.
19일, 맥아더는 흑해 연안에 있는 소련의 휴양도시 소치에서 스탈린과 만나 회담을 가진다. 회담에서 스탈린은 소련과 미국이 불가침조약을 맺자고 제안하지만, 맥아더는 많은 나라들이 불가침조약을 맺고도 전쟁을 벌였다고 지적하면서 더 이상 소련이 공산주의를 수출하지 말도록 요구한다. 그러면서 맥아더는 앞으로 소련이 한국전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 상호불가침 조약의 전제라고 못박으면서 미국이 중공을 꺾고 중국 대륙을 차지해도 소련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냐고 묻는다. 이에 스탈린은 한국전에는 절대 관여하지 않을 것이지만 대신 소련도 얻고 싶은 게 있다고 하면서, 단지 '얻고 싶은 것'을 아직 정하지 못했으므로 조만간 알려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소련과 미국의 실무진이 오가며 비밀회담을 진행하여 양쪽의 전제조건이 충족되면 불가침조약을 맺기로 하자고 합의한다.
25일, 인민해방군이 지난 춘계공세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고 주춤하자 마오쩌둥은 스탈린에게 치는 전보에서 소련의 대대적인 지원을 재촉한다. 이에 스탈린은 7월 5일 전보에서 중국군의 군비증강을 지원해줄 테니 저우언라이 중국 수상을 크렘린으로 보내 논의하겠다고 밝힌다.
7월 13일 오전, 오키나와에서는 일본계 미국인이라고 쓰고 (구)일본군이라고 읽는 일본인 군단인 미11군 사령부 창설식이 거행된다. 미11군의 총사령관직에는 맥아더의 심복인 찰스 윌로비가 임명된다. 맥아더와 트루먼은 불과 6년 전에 적이었던 군대가 훌륭한
16일, 스탈린은 크렘린에서 저우언라이와 만나 중국군에 대한 대규모의 군비증강과 100명의 군사고문단 파견을 약속한다. 물론 알다시피 이건 스탈린의 페이크였다. 스탈린은 미국과 손잡고 국공내전을 다시 일으켜 상당기간 지속시킬 생각이었다. 수억 인구의 중국이 통일되고 통일중국이 한반도를 적화시킨다면 패권을 추구하면서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에 대들 것이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 군사고문단 100명은 중국의 군사기지와 작전 등을 염탐하기 위해 보낸 것이었다.
한편 맥아더는 소강상태에 들어간 중부전선을 시찰하면서 방심하고 있는 적군에게 강력한 타격을 먹일 계획을 궁리한다.
2.3. 절정
8월 8일, 제주도 동남쪽인 표선 일대에 대규모의 비행장들이 신설되기 시작한다. 원래 거기 살던 주민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한다. 비행장 건설과 동시에 빨치산 토벌을 위해 한라산에 한국군 1개 사단과 경찰 3000명이 투입되고, 모든 민간인들에 대한 신원확인 작업이 실시된다.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3만 명의 토착민과 피란민들이 육지로 강제 이송된다.서귀포항 부두엔 거대한 접안시설이 건설되는 등 미군전용 항만으로 재개발된다. 21일, 제주도 비행장에 삼중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공장이 들어선다. 그 공장에서는 '특수폭탄'을 조립하기 위한 비밀공장이었다. 한편 B-36기 7대가 백령도로 날아가 백령도 벌판에 세워진 표적에 모의 폭탄을 떨어뜨리는 훈련을 실시한다.
9월 2일 크렘린, 베리야는 스탈린이 또 미치광이 짓을 한다는 걸 깨닫는다. 베리야는 미국과의 거래가 무사히 끝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고 해도 스탈린이 사악한 거래를 영원한 비밀로 감추기 위해 실무자인 자신을 반드시 죽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베리야는 지난 10여 년간 조금씩 모아놓은 스탈린의 치부를 드러내는 자료들을 자신의 목숨이 스탈린으로부터 위협받을 때 자신을 지키는 무기로 쓰기로 한다.
9월 9일, 스탈린과 트루먼은 크렘린과 백악관 사이에 놓인 직통전화를 통해 대화를 나눈다. 스탈린은 전화 통화에서 소련이 중국 대륙을 미국에 넘기는 대신 미국은 소련에게 서독을 넘겨달라고 요구한다. 2차대전 종전 후 서독은 미국의 원조로 경제가 회복되고 한국전쟁 특수로 수출이 급증해 산업자본을 축적하기 시작했는데, 미국, 영국, 프랑스가 독일의 재무장을 추진하기 때문에 소련 인민들이 불안해 한다고 밝힌다. 13일, 트루먼은 클레먼트 애틀리 영국 총리와 전화 통화를 하여 스탈린과 거래한 사실을 알려준다. 애틀리는 독일을 소련 지배하에 들어가게 놔두면 다음은 프랑스 차례라면서 화를 낸다. 그러나 트루먼은 스탈린이 미국의 핵전력에 쫄아서 미국과 중국의 싸움에 끼어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중국과의 전쟁에서 핵무기를 사용할 것이라고 밝힌다. 어차피 스탈린이 중국 대륙에 간섭하지도 않을 것이고, 또한 미국 공화당 정치인들은 원폭 개발 후 정권을 잡지 못해 안달이 나 있는데[11], 자신이 물러나고 공화당이 2년 후에 이 전쟁에 다시 나선다면 그때는 소련의 핵무기도 100개가 넘어 제3차 세계 대전으로 번질 것이 분명하므로 지금이 가장 좋은 찬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독일이 소련에 넘어가는 것에 대해 영국이 양해해달라고 부탁한다.
15일, 르메이 중장은 제주도에 2주째 머물면서 폭격계획을 진두지휘한다. 그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이후 6년만에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폭탄을 다루면서 중국과 북한을 석기시대로 되돌린다는 목표 때문에 환희에 가득 찬다.
19일, 스탈린은 알렉산드르 판유시킨 주미 소련대사에게 자신이 보내는 암호 편지를 대사가 백악관을 방문해 직접 트루먼에게 읽어줄 것을 지시한다. 대사 앞에서 트루먼의 보좌관이 이를 베껴쓰는 것은 가능하지만, 편지가 극비임을 감안하여 그들에게 편지를 넘기지 말도록 한다. 20일, 전날 저녁 스탈린의 암호 편지를 해독한 판유쉬킨 대사는 오전 10시 30분 백악관을 방문해 트루먼 대통령 앞에서 편지를 영어로 읽는데,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통령 각하.
각하께 마지막 제물을 드리지요. 1951년 10월 1일 18시 정각에 베이징 주재 소련대사관에서 소비에트 정치국이 주최하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축하 만찬이 열리오. 중국의 최고위급 인사들이 대거 참석해 내달로 예정된 소련의 군수물자 원조에 사의를 표할 예정이오.
소련 측 참석자는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정치국원, 라자르 카가노비치 정치국원,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
중국 측 참석자는 다음과 같소.
중앙정치국 서기: 마오쩌둥, 류사오치, 주더, 저우언라이.
중앙정치국 위원: 천원, 펑전, 둥비우, 린보취, 장윈톈, 캉성, 서남국 제1서기 덩샤오핑, 중남국 제1서기 겸 중남군구사령관 린뱌오, 화동국 제1서기 라오라이쉬, 화궈펑, 장칭.
얼마나 먹음직스럽소? 각하께 바치는 화려한 만찬을 위해 나의 충직한 부하들을 축하사절단으로 보내 중국 수뇌부를 몽땅 끌어 모았소.
이날 천안문 광장에서 열리는 건국기념행사보다 고위급 인사들이 휠씬 많소. 이들이 한꺼번에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중국 대륙에서 미군의 작전은 소풍나들이가 될 것이오. 소련대사관의 위치는 천안문에서 북동쪽으로 7킬로미터 떨어진 동직문 근방에 있소.
중국의 심장부로 들어오는 발해만은 천혜의 요새요. 랴오둥반도의 끝인 다롄과 산둥반도의 끝인 웨이하이, 발해만의 가운데 도시 톈진의 방공망은 소련공군의 책임하에 운영되오. 이날 소련 공군이 탄 비행기 50대가 발해만에서 비행훈련을 할 것이오. 미군기가 톈진 입구까지 소련기로 오인될 수 있다면 미군폭격기는 베이징 하늘에 10분이면 도달하오.
이날 오전 7시 중국 동북지역의 소련공군 비행단은 합동 비행훈련을 이유로 연변의 차오양촨 비행장과 무단강에 있는 3개 비행장에 집결할 것이오. 이날 중국내 배치된 모든 소련공군은 미 공군의 작전에 일절 대응하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베를린 시간으로 이날 오전 6시까지 독일연방공화국에서 연합국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는 바이오.
첨부한 군사기지 자료는 지난달에 파견된 100명의 군사고문단이 각 지역을 돌며 확인한 것이오. 며칠 전까지 확인된 최신자료이니 신뢰하길 바라오. 러시아가 조차하여 건설한 뤼순과 다롄항은 미군의 작전구역에서 제외해주시오. 세계 평화는 우리 손에 달려 있소.
행운을 빌겠소. 필리포프[12]
소련 측 참석자는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정치국원, 라자르 카가노비치 정치국원,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
중국 측 참석자는 다음과 같소.
중앙정치국 서기: 마오쩌둥, 류사오치, 주더, 저우언라이.
중앙정치국 위원: 천원, 펑전, 둥비우, 린보취, 장윈톈, 캉성, 서남국 제1서기 덩샤오핑, 중남국 제1서기 겸 중남군구사령관 린뱌오, 화동국 제1서기 라오라이쉬, 화궈펑, 장칭.
얼마나 먹음직스럽소? 각하께 바치는 화려한 만찬을 위해 나의 충직한 부하들을 축하사절단으로 보내 중국 수뇌부를 몽땅 끌어 모았소.
이날 천안문 광장에서 열리는 건국기념행사보다 고위급 인사들이 휠씬 많소. 이들이 한꺼번에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중국 대륙에서 미군의 작전은 소풍나들이가 될 것이오. 소련대사관의 위치는 천안문에서 북동쪽으로 7킬로미터 떨어진 동직문 근방에 있소.
중국의 심장부로 들어오는 발해만은 천혜의 요새요. 랴오둥반도의 끝인 다롄과 산둥반도의 끝인 웨이하이, 발해만의 가운데 도시 톈진의 방공망은 소련공군의 책임하에 운영되오. 이날 소련 공군이 탄 비행기 50대가 발해만에서 비행훈련을 할 것이오. 미군기가 톈진 입구까지 소련기로 오인될 수 있다면 미군폭격기는 베이징 하늘에 10분이면 도달하오.
이날 오전 7시 중국 동북지역의 소련공군 비행단은 합동 비행훈련을 이유로 연변의 차오양촨 비행장과 무단강에 있는 3개 비행장에 집결할 것이오. 이날 중국내 배치된 모든 소련공군은 미 공군의 작전에 일절 대응하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베를린 시간으로 이날 오전 6시까지 독일연방공화국에서 연합국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는 바이오.
첨부한 군사기지 자료는 지난달에 파견된 100명의 군사고문단이 각 지역을 돌며 확인한 것이오. 며칠 전까지 확인된 최신자료이니 신뢰하길 바라오. 러시아가 조차하여 건설한 뤼순과 다롄항은 미군의 작전구역에서 제외해주시오. 세계 평화는 우리 손에 달려 있소.
행운을 빌겠소. 필리포프[12]
편지를 다 읽은 주미 소련대사는 트루먼에게 러시아어로 된 중국과 북한의 군사자료를 주고 돌아간다. 맥아더는 베리야와 전문을 주고받은 뒤 르메이에게 작전을 실행할 것을 명령한다.
그리고 폭격 목표가 공개되는데...
중국내 26개 도시
베이징 시, 톈진, 상하이, 창춘, 산하이관, 충칭 시[13], 푸저우, 난징, 선양, 하얼빈, 안둥, 정저우, 우한, 광저우, 난닝, 청두, 쿤밍, 시안, 항저우, 지난, 칭다오, 시닝, 란저우, 구이양, 창사, 난창.
드디어 10월 1일, 중국의 해안도시들을 타격하기 위한 B-47 폭격기[14] 여러 대가 날아올랐다. 베테랑 조종사 데이비드 번스 대령이 탄 B-47기는 베이징의 소련대사관을 타격하기 위해 오후 5시 15분에 날아오른다.베이징 시, 톈진, 상하이, 창춘, 산하이관, 충칭 시[13], 푸저우, 난징, 선양, 하얼빈, 안둥, 정저우, 우한, 광저우, 난닝, 청두, 쿤밍, 시안, 항저우, 지난, 칭다오, 시닝, 란저우, 구이양, 창사, 난창.
오후 6시, 베이징 주재 소련대사관에서는 중소 양측이 무기 무상지원 문서에 서명한 후 만찬이 벌어지고 있었다. 만찬이 한창 무르익을 무렵 시내에서 경계경보 사이렌이 울린다.
6시 29분, 만찬이 중지되고 참석자들은 지하대피소로 피신하기 시작한다.
6시 31분, 4톤에 달하는 무게에 히로시마 때보다 3배나 강력한 원자폭탄이 B-47기의 탑재실을 빠져나갔다. 원폭은 500미터 상공에서 폭발한다.
폭발지점으로부터 반경 10킬로미터 이내는 쑥대밭이 되었고, 시민 50만 명이 즉사했다. 폭발의 지상원점(ground zero, 그라운드 제로)인 베이징 주재 소련대사관 주위에는 깊이 10미터, 지름이 120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구멍이 생겼다. 스탈린의 눈밖에 났던 소련 인사들과 중국 고위급 인사들은 흔적조차 남지 않고 사라졌다.
맥아더는 르메이의 보고[15]를 받은 뒤 미8군 사령관에게 전화해 미8군과 한국군 전 병력에게 방사선 방호복을 입히고 적진에 들어가 생존자들을 소탕하도록 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을 기해 미11군과 대만의 국민혁명군을 중국 동해안에 상륙시킬 계획을 세운다.
10월 2일 백악관은 오전 8시 미군이 중국 대륙과 한반도에 41발의 원자폭탄을 투하했다고 발표한다. 미11군 50만 명이 랴오둥반도와 산둥반도 해안에 상륙했고 대만의 국민혁명군 63만 명이 상하이 해안과 광저우 해안에서 상륙작전을 벌였으며, 미군은 한국군 56만 명과 연대해 동북아전쟁을 조속한 시일 내에 종결시키겠다고 발표한다.
한편 유럽에서는 동독 전투경찰대(KVP) 7만 명과 소련군 20만 명이 서독 일대를 점령했다는 소식이 날아든다. 독일 주둔 미군 4개 사단은 중국작전을 위해 미리 철수했으며,[16] 서독에 주둔한 영국군과 프랑스군도 공산군이 침공하자 출병을 거부하고 본국으로 철수해버렸다고 한다. 3만 명의 독일연방경찰대는 소총만 들고 싸우다 궤멸되었다. 트루먼은 작금의 긴급사태를 논의하기 위해 스탈린과의 회담을 요청했으며, 애틀리 영국 총리와 플레맹 프랑스 총리는 트루먼의 무책임과 스탈린의 탐욕을 맹비난했다.
10월 5일, 평안남도 순천에 머물던 펑더화이 중공군 사령관은 지난 4일간 베이징과 연락이 두절되고 한반도에 터진 원폭으로 중국지원군과 북한군이 거의 궤멸되자 실의에 빠지게 된다. 그는 스탈린이 중국의 통수를 쳤다는 걸 깨닫고 분노에 찬다.
2.4. 결말
동북아전쟁이 종전된 뒤인 1952년 5월 5일, 장제스 총통과 맥아더는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각국의 수반들과 미군 지도자들, 수십만 인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자유중국의 수복을 선언하는 연설을 한다.맥아더는 향후 2년 6개월간 중국 대륙을 지배하는 미군정장관으로 임명된다.
원폭투하로 민간인 사상자도 1250만 명에 이르렀고, 1930만 명이 방사능에 오염되어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원폭 희생자들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는 폭동이 중화민국의 여러 도시에서 일어났으나 국민혁명군에 의해 진압된다.
1950년 10월 미군의 핵폭격 이후 중국에서 가장 높은 지도자가 된[19] 펑더화이는 조선지원군 총사령관 명의로 스탈린에게 전문을 보내 긴급군사지원을 호소했으나 냉담하게 거절당했다. 그는 패잔병 3만 명을 이끌고 헤이룽장성 변방의 우수리 강을 통해 하바롭스크로 잠입하려다가 소련군의 공격을 받고 부하 4000명을 잃고 만다. 그 사건 이후 펑더화이는 스탈린을 증오하기 시작했고 스탈린을 추종하는 소련파[20]를 숙청하기로 마음먹는다. 만주 북방에서 외몽골 북방을 따라 위구르의 톈산산맥까지 4500킬로미터의 참담한 제2의 대장정을 9개월간 강행했다. 낮에는 미군기의 폭격이 있었으므로 밤에만 행군했다. 그들은 1952년 7월 천신만고 끝에 톈산산맥에 도착해 연 중앙위원회에서 펑더화이를 주석으로 선출했다. 펑더화이가 주도한 중앙위원회에서는 한국전쟁에 참전해 중국을 패배로 내몬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를 비롯한 35명의 지도자들을 영구제명 처분했다.[21] 또한 동북지방의 지도자인 소련파 가오강을 간첩으로 몰아 숙청하고 김일성도 소련파였으므로 냉대했다.
그리고 1952년 8월 21일, 김일성과 그의 심복들은 군사재판에 서게 된다. 김일성의 반대파였던 박헌영 일파 측이 김일성이 전쟁의 책임을 져야한다고 주장하자, 김일성의 심복들은 "박헌영도 전쟁 책임 져야함"이라고 반박하면서 설전이 벌어지지만 박헌영 측에게 간단히 재반박된다. 위기를 느낀 김일성이 박헌영을 만나 용서해달라고 사정하지만 박헌영은 쌩깐다. 무력감을 느낀 김일성은 내각수상직과 조선인민군총사령관직을 박헌영에게 넘겨준다.
김일성의 사형 판결 소식을 들은 이승만 측에서는 자기들에게 김일성을 넘기면 500만 달러라는 거금을 주겠다고 제안하나 박헌영 측은 김일성을 넘기면 이승만이 영웅이 될 것이라며 그냥 무시하고 사형시키자 하고, 9월 27일 사형 소식이 전국에 전해지자 온나라가 들끓었고 김일성 허수아비가 서울시청 분뇨차에 매달려 돌아다녔으나 분노한 시민들이 한바탕 돌을 던지고 욕을 하여 사람들에 가로막혀서 분뇨차가 움직이지도 못했을 정도라고 한다.
한편 도망가던 김일성이 평안북도 삭주에 내팽개친 김정일과 아이들은 고아 신세가 된다.[23] 그런데 경무대에 미국 알래스카 케치칸에 사는 43세의 인디언 왈라스 헤지호그가 이들을 불쌍하게 여겨 자신이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주겠다고 하여 입양을 희망하는 편지가 도착한다. 그는 불쌍한 아이들을 훌륭한 물개 사냥꾼으로 키워보겠다는 포부를 밝혔으며, 경무대는 김일성의 자식들이 한국에서 성장하기 힘들다는 판단에 입양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답변한다.
11월 4일, 미국 워싱턴 D.C.에서는 해리 트루먼이 대선에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를 압도적인 차로 누르고 3선 대통령에 오른다.[24][25]
한편 맥아더는 조국인 미국에서 그야말로 살아있는 신이 되었다. 미국인들은 맥아더라는 이름만 들어도 "우훗, 멋진 사람!"이라고 느낀다고 답했으며, 리틀 록에 있는 맥아더의 생가는 애국의 전당으로 성역화되었으며, 워싱턴 D.C.에는 그의 이름을 붙인 거리가 생겨났다. 호주에서는 맥아더의 날을 공휴일로 지정했고 영국 신문은 맥아더를 넬슨 제독에 비유했다. 수많은 아이들에게 맥아더의 이름이 붙었고 맥아더 글라이드라는 춤도 생겼다. 몬태나 주의 인디언들은 "지혜로운 독수리 추장"이라는 이름을 헌정했다. 맥아더에 관련된 상품은 모조리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1953년 2월 28일, 소련 모스크바에 있는 블리즈나야 별장에서 스탈린은 최측근인 말렌코프, 베리야, 흐루쇼프, 불가닌을 초대해 파티를 연다. 이튿날 새벽 4시 파티가 끝나자 거나하게 취한 스탈린은 경호책임자에게 자기가 호출할 때까지 수면을 방해하지 말라고 지시한다. 평소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던 스탈린이 밤늦게까지 일어나지 않자 불안해진 경호책임자가 3월 1일 밤 10시에 침실로 들어가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진 스탈린을 발견한다. 그날 밤 말렌코프 등 측근 네 사람은 스탈린의 발작을 알았으나 이튿날 낮에야 별장으로 달려갔고 오후가 돼서야 의사를 불러 의식을 잃은 스탈린을 돌보게 했다.
그런데 베리야는 우선 스탈린 동지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나머지 셋도 동의한다. 스탈린이 회복된다 하더라도 그들은 환자를 제때 돌보지 않았다고 숙청될 것이고, 본인 허락 없이 치료를 해도 숙청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3월 4일 공산당중앙위원회 비상회의가 소집되었다. 여기서 중앙위원회는 스탈린이 깨어나지 못하면 각료회의 의장인 말렌코프가 스탈린의 자리를 승계하도록 결정한다. 그리고 회의 참석자들은 말렌코프의 집으로 몰려가 Olleh!!!!! 하면서 한바탕 파티를 벌인다.
그런데 3월 5일[27] 새벽, 스탈린은 블리즈나야 별장 침대에서 혼자 조용히 일어난다. 알고 보니, 의사와 미리 짜고 연극을 한 것이었다! 당연히 스탈린은 네 사람이 했던 말을 다 듣고 있었고 당연히 네 사람을 숙청했다.
1953년 10월 9일,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미소 간 평화협정을 체결해 동서냉전을 타개하고 영구적인 평화구축의 발판을 마련한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과 이오시프[28] 스탈린 소련공산당 서기장을 1953년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발표한다.
1954년 4월 25일, 자유중국의 수도 베이징[29] 중난하이[30] 미 군정청 회의실에서 소수민족 5개국 연방 결성을 위한 13번째 회담이 열린다.[31]
연방 결성의 가장 큰 난관이 영토문제였는데, 여기서 만주족 대표로 참석한 푸이[32]가 "청나라가 다스리던 영토 중에 양쯔강 이남만 양보해줄게"라고 고집을 부린다. 그러자 맥아더는 "헐, 님아. 민주주의 도입하면 대의정치(입헌군주제) 할 건데 1000만 명도 안 되는 만주족을 또 수억 명이나 되는 중국인한테 갖다바칠 셈임? 그냥 동북 3성으로 만족하셈"이라고 반박하고, 한 달 뒤 맥아더의 주장이 받아들여진다. 장제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후 티베트가 칭하이성[33]을, 한국이 만주국으로부터 간도[34]를 가져간다.
맥아더는 최종안을 제시하여 "한국, 만주국, 내몽골국, 위구르국, 티베트국은 자치공화국으로 민족적 전통을 유지한다. 하지만 국방과 외교는 5개국 연방의 이름으로 행사한다. 동아시아연방(동아연방)이 정식 국호이다. 연방대통령은 각국이 순번제로 5년간 맡는다. 서로 간의 인적교류와 경제협력은 단계를 밟아 강화한다"고 발표한다. 마지못해 이를 인정하는 장제스에게 맥아더는 "중국 수복하는 데 도움 준 일본 청년군대(미11군) 살 곳이 필요한데, 칭다오 한 200년만 조차한다?"면서 확인사살을 가한다. 또한 웨이하이는 미국령이 된다. 동아연방 초대 연방대통령은 동아연방 5개국 대표 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이승만이 참석자들의 만장일치로 맡게 된다.
이후 중국에서의 미군정이 끝나고 동아연방이 세워지게 된다. 맥아더는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미국령 웨이하이에서 여생을 보내기로 하고 죽어서 그곳에 묻히게 된다.
[1] 실제로는 이날 소련 대표가 참석하지 않았다. 소련은 당시 안보리 상임이사국이었던 중화민국(대만)이 중국을 대표할 수 없다면서 무기한 불참하고 있었다.만약 소련이 안보리에 참석했다면 당연히 거부권을 행사했을테고, 유엔군 파병없이 미국 단독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도 소련이 안보리에 참석할 가능성은 없었는데, 애초에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힘을 본 이후 미국과 직접 대립하는 모양새를 불편해했던 이오시프 스탈린이 중화민국 문제를 명분으로 UN군 파병 문제를 다룰 때 불참함으로써 기권할 것을 지시했다는 것이 소련 붕괴 후 기밀문서 해제로 밝혀졌다.[2] 미국의 핵 전력을 담당하는 기관이다.[3] 전략공군사령부는 1949년 5월 취항한 최신형 B-36기 수십 대를 이용한 '드롭샷 작전(Operation Dropshot)'을 세웠는데, 이 작전은 무려 300개의 원자폭탄(그것도 히로시마 때보다 업그레이드된!)을 소련의 100개 도시에 투하하여 소련 인구의 70%를 단번에 몰살시킨다는 계획이었다. 또한 미 군부는 중공군이 한국전에 참전하자 전쟁의 배후조종자인 소련에 대한 총력전 계획인 '셰이크다운 작전(Operation Shakedown)'을 수립했다. 이 작전에 따르면 전락공군사령부는 중국에 핵공격을 가하면 즉시 소련과의 전면전이 일어나기 때문에 미국의 메인 주, 래브라도, 아조레스 제도, 괌, 영국의 기지에서 출격한 폭격기들이 동시다발적으로 100개 이상의 원폭을 소련 도시에 투하한다는 작전이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소련에게 미래는 없다![4] 원래 역사에서 이 시기의 맥아더는 '미 극동군 총사령관 겸 유엔군 사령관 겸 일본 점령 연합군 최고사령관(GHQ)'의 3개의 관직을 겸했던 인물이지만, 소설 속에서는 소련 유엔 대표의 거부권 행사로 한국에 유엔군이 파병되지 못했으므로 유엔군 사령관 대신 미 극동군 총사령관이라고 칭하고 있다.[5] 실제로 애치슨 국무장관은 냉전 초기에 유럽을 중시하는 외교정책을 폈다. 당시 애치슨은 오마 브래들리에게 “우리는 지금 엉뚱한 나라를 상대로 싸우고 있는 겁니다. 진짜 적수는 소련인데 얼토당토않게 중국과 대치하고 있잖아요."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그리고 그 유럽 중시 외교정책 때문에 나온 것이 바로 애치슨 라인이었다![6] 대일강화조약을 주도한 외교통으로 아시아 우선 전략을 주장했고 강경한 반공주의자였다. 실제 역사에서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정부에서 국무장관이 된다.[7] 베리야는 소련군 원수 계급을 지닌 군인이다. 왜 비밀경찰 엔카베데의 총수가 원수 계급을 겸하고 있냐 하면, 소련에서는 경찰이 군대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8] 실제로 스탈린은 소련 공군의 직접적인 지원을 하려고 하지 않았고, 설사 한다 해도 고작 압록강과 두만강 근처에서만 소련 공군이 작전을 수행하도록 명령했다. 이유야 미국이 무서우니까.[9] 문서로 발표하는 공식 성명.[10] 6.25 전쟁에서 전황이 불리해진 미군의 강력한 무력수단을 동원한다. 소련이 한국전에 참전한 중공에 병력이나 무기, 군사정보를 제공하면 전략공군사령부가 소련의 군사기지와 도시에 대대적인 핵공격을 감행한다는 내용이다.[11] 실제로 당시 공화당 정치인이나 지식인, 미군장성들 중 상당수는 미국이 한국전선뿐만 아니라 소련 및 공산권 국가에 선제 핵공격을 가해 공산주의의 위협을 사전에 예방해야 한다는 이른바 예방전쟁을 신봉하고 있었다.[12] 스탈린이 비밀문서 등에 썼던 필명이다.[13] 중일전쟁 당시 중화민국의 임시수도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중일전쟁 때 여기서 활동했다.[14] 원래 미군은 B-36기를 쓰려고 했으나, 베리야가 전문을 통해 날개 길이가 일류신-28기보다 네 배가 커서 의심받을 수 있으므로 이전부터 쓰던 B-29 폭격기를 띄우도록 부탁했는데, 미군 측에서는 성능이 낮은 B-29 대신 비슷한 크기의 B-47기를 보내기로 결정한 것이다.[15] 난닝에서는 도시 상공의 구름층이 두꺼워 구름 위에서 투하했는데 적중했으며, 난징에서는 폭격기가 대공포에 맞아 격추 중 상공에서 폭발했다는 등의 내용이었다.[16] 실제 역사에서는 냉전기 미국의 최우선권은 유럽 대륙이었으며 동북아는 부차적이었다. 중국 대륙이랑 한반도를 소련에 내주고 일본만 지킬 수 있으면 지켰지 유럽의 중추부인 서독은 꼭 지키려했다. 작중에서는 정반대로 최우선이 아시아고 유럽은 영국과 프랑스만 지키면 지켰지 서독은 소련에 내준 것.[17] 중국의 내몽골자치구를 말한다. 이 당시 몽골은 사회주의 국가였지만 한국전쟁에 참전하지도 않았고, 중국 영토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마 소설 속 배경인 2010년 현재의 동아연방에 소속되어 있는 '몽골국'은 냉전 이후에 새로 가입한 듯하다.[18] 안 그러면 중국이 반발할 테니까(...).[19] 다른 지도자들이 다 죽었기 때문이다.[20] 김일성 일파가 여기에 들어간다.[21] 그런데 펑더화이도 중공군의 참전을 지지했던 인물이다. 뭥미? 다만 소설 속에서 자신이 한국전쟁 참전에 반대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장면이 있긴 하다.[22] 실제로 박헌영은 김일성에 의해 엉터리 재판으로 처형당했다.[23] 특히 김정일은 아버지한테 두들겨 맞았던 트라우마로 인해 발바닥을 물어뜯는 괴상한 버릇이 생겨 버렸다고 한다.[24] 실제로는 공화당 후보였던 아이젠하워가 당선됐다.[25] 프랭클린 루스벨트 이후로 미국 수정헌법 제22조는 대통령의 3선을 금지하고 있으나, 발의 당시의 현직 대통령에게는 적용하지 않는다는 단서조항이 있다. 따라서 발의 당시의 대통령이었던 트루먼은 3선 금지조항의 적용대상이 아니었다. 실제 역사에서는 스스로 불출마했을 뿐이다. 린든과 트루먼을 비교해보자면, 트루먼은 승계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2번 출마가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수정헌법 제22조 단서에 따라 3선 금지조항이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선거에 다시 나갈 수 있었지만 스스로 포기한 것이고, 린든은 수정헌법 제22조의 적용을 받기는 하나 승계임기가 2년 미만이라 2회 출마가 가능했던 상황에서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만약 트루먼이 수정헌법 제22조의 적용을 받는 대통령이었다면 승계임기가 2년이 넘기 때문에 더 이상 출마할 수 없었다.[26] 혹시 문책이 있을까 두려워했던 흐루쇼프 때문에 베리야가 선서를 통해 확인하기로 한 것이다.[27] 이날은 스탈린의 공식사망일이다.[28] 책에서는 오타가 나서 '이시오프'로 표기되어 있다.[29] 국민당이 대만으로 쫓겨나기 전 중화민국의 수도는 난징이었다.[30] 중국 베이징 시의 중심부 시청 구, 자금성의 서쪽에 인접한 지구이다. 중국 정부와 중국 공산당의 본부, 요인의 관저 등이 있다.[31] 1953년 3월에 중국분할안이 공개된 후 장제스를 비롯한 국민당 고위층이 이에 결사반대했으나, 맥아더 군정장관이 "그럼 군정 끝나면 다른 애가 중국 통치하게 해줄까?"라고 협박했다고 한다.[32] 2차대전 이후 전범으로 감방에 처박혀 있던 걸 데리고 왔다고 한다.[33] 티베트 대표인 젊은 달라이 라마가 칭하이성이 원래 '암도'라고 불리던 티베트 땅이라고 주장해서 가져간다.[34] 간도 문서에도 나와 있는 간도 수복파의 근거를 기반으로 한 이승만의 주장으로 한국이 가져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