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에 판매되었던 대한민국의 카레맛 스낵에 대한 내용은 비29 문서 참고하십시오.
Boeing B-29 Superfortress[1] |
1. 개요2. 제원3. 개발사4. 특징5. 실전6. 전쟁 이후7. 퇴역 후
7.1. 비행 가능 기체
8. 파생형9. 미디어 출연9.1. 영화, 드라마
10. 기타11. 둘러보기9.1.1. 웰컴 투 동막골9.1.2. 더 퍼시픽9.1.3. 스타워즈 시리즈9.1.4. 금강천9.1.5. Strategic Air Command9.1.6. 오펜하이머9.1.7. 아버지의 깃발
9.2. 게임9.2.1. 월드 오브 워플레인9.2.2. 엠파이어즈 근대사회의 여명9.2.3. 도미네이션즈9.2.4. 건쉽배틀9.2.5. 사이퍼즈9.2.6. 폴아웃 시리즈9.2.7. 시드 마이어의 문명9.2.8. 블룬스 TD 69.2.9. 배틀스테이션 시리즈9.2.10. 워 썬더9.2.11. 히어로즈 인 더 스카이
9.3. 만화 및 애니메이션9.3.1. 반딧불이의 묘(애니메이션)9.3.2. 전생했더니 슬라임이었던 건에 대하여 (애니메이션)9.3.3.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TVA9.3.4. 철인 28호9.3.5. 전쟁동화9.3.6. 뒤의 얼굴은 누우구?
9.4. 모형1. 개요
B-29 비행 영상 |
2. 제원
Boeing B-29 Superfortress | |||
전장 | 30.17m | ||
전폭 | 43.05m | ||
전고 | 8.46m | ||
승무원 | 기장(조종사), 부조종사, 항공기관사, 항법사, 무전사, 전탐사, 기총수 4명[5], 중앙 사격관제[6][7] 1명. 총 11명 | ||
익면적 | 161.54㎡ | ||
엔진 | 라이트 R-3350-23/23A 듀플렉스 사이클론 복열 18기통 공랭식 성형 엔진 (기당 2,200마력) 4기, 터보슈퍼차저 장비 | ||
자체중량 | 33,800kg | ||
전비중량 | 54,000kg | ||
최대 이륙 중량 | 60,560kg | ||
순항속도 | 350km/h | ||
최고속도 | 574km/h | ||
작전고도 | 10,200m | ||
항속거리 | 9000km | ||
작전반경 | 5,320km | ||
무장 | 12.7mm M2 브라우닝 중기관총 - 4연장 원격 포탑 1기[8] 12.7mm M2 브라우닝 중기관총 - 2연장 원격 포탑 3기 꼬리 포탑에 12.7mm M2 브라우닝 중기관총 2정[9] 각 폭탄창에 총합 9톤 이하의 각종 폭탄 | ||
무장(실버 플레이트) | 꼬리 포탑에 12.7mm M2 브라우닝 중기관총 2정[10] 10,000 파운드 경량-틀 호박 폭탄 1발 우라늄 원자폭탄 1발 플루토늄 원자폭탄 1발 |
3. 개발사
제1차 세계 대전의 종결과 뒤이은 태평양 패권 경쟁으로 미국과 일본은 서로를 가상적국 제1호로 인식하고 있었다. 1930년대 들어서면서 미일의 갈등은 커져만 갔고, 미군 내에서는 다가올 일본과의 전쟁을 대비하자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당시 미국령이던 괌이나 필리핀에서는 기존 미군 폭격기들로는 일본 본토를 폭격할 수 없었다. 당시 한창 개발이 진행 중이던 B-17이 실전배치되어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미군은 괌이나 필리핀에서 출격해 일본 본토를 폭격할 수 있는 초장거리 전략폭격기의 소요를 제기하게 되었다.이렇게 제기된 소요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독일이 유럽 대륙을 석권하기 시작하면서 더더욱 조명받기 시작했다. 안그래도 1939년 독일의 공군력 증강에 자극받아 찰스 린드버그가 헨리 아놀드에게 새로운 폭격기의 개발을 강력히 요청한 이후였다. 당시 미군이 원한건 400km/h의 속도로 9,100kg의[11] 폭탄을 4,292km 떨어진 목표에 던지고 오는 슈퍼 폭격기였다. 미 육군은 정식으로 개발에 착수, 업체들의 제안을 받았고 보잉과 록히드, 더글러스 3사가 응모했으나 록히드와 더글러스는 곧 포기, 최종적으로 보잉이 이 슈퍼 폭격기 개발 사업을 수주하고 시제기 납품 계약을 맺는다. 이때가 1940년 8월로, 일본 이전에 당장 전 유럽을 석권한 독일에 맞서 유사시 참전할 경우 북미 대륙에서 출격해 유럽 대륙을 폭격할 수 있도록 작전반경도 기존의 4,292km에서 5,000km대까지 상승하였다.
보잉이 제시한 설계도와 시제 테스트기에 만족한 미군은 1941년 5월, 보잉에 해당 폭격기 총 250기를 주문하였으며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이 참전하게 된 1942년1월에는 그 발주수량이 단번에 2배인 500기로 늘어났다.
4. 특징
하늘을 날아다니는 공중요새 B-29 뒤에서 날아오는 꼬꼬마 전투기들은 호위기인 P-51 머스탱이다. 이 사진은 전쟁 후반기에 미군 전투기들이 일본 본토 공습을 위해 비행하는 모습을 촬영한 것으로, 장거리 항법장치와 레이더가 없는 P-51을 B-29가 일본까지 유도하면 P-51들이 신나게 깽판을 치고 출격한 일본군 요격기들도 갈아버린 다음 다시 B-29와 합류해서 귀환하는 방법을 보여준다. B-29는 각 기체마다 항법장치와 항법사가 있었기 때문에 폭격 작전 외에도 전투기들의 공습 지원, 태평양에서의 구조임무 같은 길잡이 역할도 담당했다. |
우선 가장 큰 특징중 하나로서 B-29는 고고도 작전을 위해 가렛 에어리서치(Garrett AiResearch)사에서 만든 여압이 되는 승무원실과 조종석을 갖추었다는 점이다. 그 당시 보통의 항공기들은 항공기 내부에서 승무원들이 활동하였고, 당연히 이는 밀폐된 공간이 아니었다. 유럽 전선의 B-17만 해도 전기열선 내장 내복에 두꺼운 항공 점퍼와 방탄복을 입고도 꽁꽁 얼어가면서 비행하였으며, 사수 포탑의 틈새 사이로, 폭탄창이 열릴 때만 해도 그곳으로 차가운 바람이 쌩쌩 들어왔다. 산소가 부족한 고고도에서 밀폐가 되지 않으니 승무원들은 가뜩이나 춥고 힘든데 무거운 산소 탱크까지 짊어지고 다녀야 했다. 그중에서도 제일 뭣 같았던 자리는 다름아닌 하부 포탑[12] 자리였다. 다른곳은 그나마 공간이 어느정도 있고 활동도 가능해 조금이라도 옷을 더 껴입거나 움직일수 있었지만 하부 볼 포탑은 들어가기에도 꽉차는 자리였던지라 옷을 더 껴입는 것은 생각도 못했고 심지어 자리의 절반은 방탄유리 나부랭이에 나머지 반은 냉기를 뿜어대는 알루미늄 금속이었다.[13]
그러나 B-29는 보잉이 B-17의 민수형으로 승객실에 여압실을 채용했던 보잉 307을 만든 경험을 바탕으로 여압실을 갖춘 항공기로 설계되었다. 여압 캐빈을 탑재한 항공기들은 보잉 307을 포함해 JU86P도 존재했지만, B-29는 처음부터 여압 캐빈을 염두에 두고 설계되었다는 것이 특별한 점이었다.
B-29에서 여압 처리가 된 부분. |
B-29에서는 항공기관사가 온도와 산소를 조절해주었기 때문에 승무원들은 그냥 적당히 근무복 정도만[14] 입고도 작전이 가능했다. 일본은 전쟁 말기에 이 모습을 가지고 '미국도 물자가 궁핍해서, 비행복도 안 입히고 비행기에 태운다.'는 식으로 자국 국민들에게 선전했다고 한다. 물론 현실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B-29의 콕핏. 최악의 사태에 대비해 조종석 등 뒤에 방탄 장갑판이 설치되어 있다.[15] |
폭격기는 여객기와 다르게 동체 한가운데에 폭탄창이 있으므로 조종석과 승무원 공간[16]에 여압 탱크를 따로 설치하고 그 사이에 있는 폭탄창 위로 통로가 될 관을 연결하는 방식으로 설계하였다. 이는 엔진으로부터 연결된 배관으로 산소를 데워서 공급하는 기능도 겸했고, 환풍구이자 승무원들이 조종석과 승무원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는 통로 역할도 했다. 물론 통행을 하려면 이 파이프를 엎드려 가야 했지만, 폭탄창에 작게 만들어둔 좁은 통로를 두꺼운 항공 점퍼와 방탄조끼를 입고 산소탱크를 주렁주렁 달며 가는 것 보다는 그냥 편한 옷 입고 엎드려 가는게 훨씬 편한 일이었기에 문제로 지적되지는 않았다.
기체 중심부(주익 기부)에 위치한 폭탄창(Bomb Bay) 위로 길게 뻗은 파이프(“Air Duct")가 여압 공조 덕트이자 조종석과 승무원 공간을 잇는 통로이다. 보다시피 꽤 길다. 이 통로는 안쪽은 두꺼운 보온성 섬유로 마감처리하거나 기어다니기 편하라고 수건 여러 장을 덧대기도 하였다. |
주익 뒷부분에 위치한 승무원실. 침대와 변기가 있다. 열악해 보이지만 당시 이렇게 환경이 좋은 폭격기는 없었다. 상부 기관포 사수좌와 양현(좌우현) 기관포 사수좌도 볼 수 있으며(둥근 방탄유리 돔으로 덮인 부분), 중앙 상부 2연장 .50구경[17] 포탑도 보인다. 이 포탑 외에도 포탑이 3개 더 있으며(상부 2, 하부 2) 후미에는 2연장 .50 기관총에 20mm 기관포까지 달린 후미 포좌가 따로 있었다. |
그리고 B-29는 중앙제어식 리모콘 포탑을 채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여압 캐빈을 채용하면서 틈새가 있는 일반 선회 기총좌나 사람이 들어가는 터렛이나 볼 터렛을 넣을 수 없었기에 채용된 것인데, 사수가 잠망경으로 보고 쏘는 일반적인 리모콘 포탑과 다르게 B-29는 상단 포탑 2기와 하단 포탑 2기를 각각 한 사람식 맡아 한꺼번에 조종이 되는 방식의 중앙제어 체제 방식을 채택하였고, 또 이를 제어하는데 컴퓨터가 사용되었다. 제네럴 일렉트릭 사의 중앙 화력제어 시스템(General Electric Central Fire Control System)으로 물론 현대 기준으로 보면 그냥 계산기에 가깝지만 당시로서는 엄청난 것이었다.[19]
B-29의 컴퓨터는 사수가 조준기의 조준점을 타겟에 맞추고 조준점 밖의 원 둘래를 적기 날개에 맞추면 적기의 거리와 속도, 고도에 따른 대기밀도, 기온과 항공기의 속도, 중력, 탄도를 모두 계산하여 터렛의 실제 사격 위치를 맞춰주는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3만피트에서 250마일로 비행하는 B-29에서 발사된 총알은 약 36피트 정도 엇나가게 되며, 50구경 총알은 800야드 거리에서 14피트 가까이 하강한다. 여기에 적기의 속도가 400마일로 계산된다면 수평 110야드, 수직 14피트(4.6야드) 리드를 두고 사격하게 터렛을 조준시키는 식이다. 또 기체 전면의 사수가 화력통제관 역할을 하여 기체에 설치된 5개의 터렛 중 어떤 터렛이 어떤 사수의 조준경을 따라갈지 정할 수 있었다.
당시 B-29의 기총 사수들에게 지급되었던 매뉴얼의 표지. 미 육군은 “버튼만 누르면 알아서 맞는 컴퓨터총”이라고 자랑했으며 이는 심한 과장이 아니었다.
B-29의 후미 부분. 요격기를 공격하기 위한 후미 포대가 보인다. 50구경 기관총 2문과 20mm 기관포 1문이 장착되어 있다. 이 기관포는 무게 때문에 초기형에만 장착되었으며, 나중으로 갈수록 B-29의 기총과 방탄판은 쓸데없다고 판단되어 제거되고 그만큼 연료나 폭탄을 더 싣게 된다. 요격/대공 방어 수단이 쓸모 없다는 것은 성능이나 효과가 없어서가 아니라, B-29를 상대할 일본군의 대공 방어망이나 요격기들이 점점 줄어들었다는 의미이다. 후미 부분은 총좌만 여압 처리가 되어 있고 나머지 승무원 구역과 연결된 공간은 여압 처리가 되어 있지 않아 고공 비행 중에는 이동이 불가능했는데, 이 때문에 유사시 측면 사수가 후미 터렛도 사격할 수 있도록 사통 시스템이 연결되어 있었다. 실제로 B-29 전투 보고서를 보면 기체 중앙부 터렛보다 후미 터렛이 격추한 적기가 더 많았기 때문에[20] 후미 터렛의 존재 가치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
원래 B-17 및 B-24 등에 달린 폭격기 선회기총좌는 각각 한 사람씩 달라붙어야 하고, 조준과 리드는 기총수의 감에 맡겨야 하는데다 허리 기총좌는 뚫린 큼지막한 구멍으로 찬 바람이 휭휭 달려들고,[21] 동체 하방의 볼 터렛이나 상방의 선회기총좌는 그 큼지막한 크기 때문에 항력을 발생시키는 등 이래저래 문제가 많았다. 그러나 이것이 B-29에 와서 사수들이 중앙에서 각 터렛을 제어할 수 있는 중앙제어식 터렛으로 발전, 조준장치의 도움을 받는 사수가 다수의 터렛을 동시에 제어하여 하나의 목표에 집중포화를 퍼부을 수 있도록 개량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 터렛 자체의 크기가 줄어들면서 항력이 줄어드는 부수 효과를 낳았고, 또 사수들이 노출되거나 방탄 유리로 보호받는 다른 포탑들과 달리 사수들은 훨씬 두껍고 강철로 된 폭격기 동체 안에서 의자에 앉아 편한 자세로 조준을 하게 되니 사수들의 생존성이 증가하는 효과도 있었다.
또 B-29는 비행성능도 좋았다. 많은 포탑과 여압실 때문에 무겁고 커진 덩치, 그리고 수많은 폭탄을 탑재될 폭격기였음에도 불구하고 3만 피트가 넘는 최대고도, 5,000km가 넘어가는 작전행동반경, 덤으로 최대속도가 570km/h, 순항속도 350km/h 등등, 2차 대전에 실전 투입된 중(重)폭격기들 중에서는 최고의 비행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미국만이 보유한 원시적인 레이더 연동 대공포를 제외한 타국의 대공포로는 요격이 거의 불가능했다.
이러한 성능의 핵심에는 출력이 2200마력(1640kW)에 달하는 Wright R-3350 Duplex-Cyclone 18기통 공랭식 성형엔진이 있었다. 이 갓 만들어진 엔진은 다른 엔진들보다 출력이 컸고 크기도 작은 편에 마그네슘을 대거 사용해 가볍다는 큰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게 4기가 장착되었으며 엔진 자체 출력으로나, 합산으로나 당대의 폭격기 중에서는 최강이었다. 또한 이 4기의 엔진들은 커다란 제네럴 일렉트릭 사의 트윈차저[22]가 달려 있어서 고고도에서도 엄청난 성능을 내주었다. 일본은 B-17D를 노획하여 거기에서 나온 터보차저를 복제하려 들었지만, 고온과 고압을 견디는 동시에 고속으로 회전하는 터빈을 만들기에는 당시 일본이 가진 합금 기술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23]
보통 항공기들은 엔진의 쓰로틀과 흡입구 압력을 조절해가며 터보차저 회전 속도까지 조절해 주는 것이 번거롭고 어려운 조작이기도 했고, P-38처럼 조작을 잘못하는 순간 과급기와 엔진과의 불균형이 일어나 엔진을 꺼뜨리는 사고도 발생할 수 있었는데, 엔진이 4기나 되는 B-29라면 신경쓸 것이 너무 많아지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B-29는 전자 제어식 과급 시스템을 갖추어 조종사가 쓰로틀 아래에 달려 있는 다이얼만 돌려주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자동으로 조절되었고, 심지어 조종사가 급격한 쓰로틀 조작을 할 경우 터보가 과속하는 걸 막고 자동으로 조절해 주는 장치까지 있었다. 이러한 트윈차저와 더불어 NACA에서 풍동실험을 거쳐가며 설계된 공기 역학적인 엔진 나셀(엔진 동체)와 더불어 강력한 성능을 자랑하는 엔진이 폭격기에 속력과 성능을 크게 올려줄 것이라 기대되었다.
그러나 이 엔진은 폭격기에 본격적으로 장착되기 전부터 냉각이 잘 안되는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다시 풍동 실험을 거치며 엔진 흡입구 형상을 좀 더 공기가 잘 모여들게 다듬고 속도를 위해 장착된 커다란 프로펠러 스피너를 삭제하는 조치를 취했지만, 엔진 자체가 성능 대비 작게 만들기 위해 부품들을 꽉꽉 넣고 가볍게 만들기 위해 여기저기 마그네슘 합금을 사용하는 바람에 엔진이 과열되기도 쉽고 과열되면 바로 불타오르는 일이 잦았다. 시제기도 비행 테스트 도중 위의 문제로 추락했다. 급히 엔진 커버를 더 잘라내 엔진에 더 많은 공기가 들어가도록 개량이 이루어졌지만 미봉책에 불과해서 B-29의 항공기관사들은 항상 엔진 온도에 신경을 써야 했다. 사실 이 문제 때문에 B-29의 개발이 지연되었으며, 보잉도 개발이 급한 걸 알았기에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아에 액랭식 B-29 연구를 시작하게 되나 이쪽은 트윈차저를 다는 게 문제가 커서 개발에 난항을 겪게 된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 본토 폭격을 위한 B-29를 하루라도 빨리 납품받아야 했기에 보잉이 고민하게 기다릴 여유가 없었고, 그냥 그 엔진이라도 달아서 납품하도록 하고 엔진의 내구도는 75시간마다 엔진을 교체하는 것으로 해결하게 된다.
물론 여기서 75시간마다 교체한다고 해서 엔진을 정말로 75시간 정도만 쓰고 재활용 쓰레기로 녹여버리지는 않았다. B-29의 엔진 정비 주기는 매 25시간마다 실린더 분해정비, 매 75시간마다 전체 분해정비를 거치고 그렇게 정비를 완료한 엔진은 다시 B-29에 장착시켰다. 물론 아무리 정비해서 다시 쓴다고는 해도 이런 장거리 폭격기의 엔진을 고작 75시간밖에 연속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건 10회도 출격 못하고 엔진을 계속 들어내야 한다는 이야기이니 엄청난 부담이긴 하다. 아무리 F4U 콜세어의 R-2800 더블 와스프 엔진이 내구성이 좋았다지만 오버홀주기(TBO)가 3천시간이었다.[24]
아무리 경제력이 넘치는 미국이라 해도 고출력 엔진 4기를 수시로 갈아줘야 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지만 초장거리 폭격이 가능한 유일한 기체다보니 포기할 수 없었으므로 정비반에게는 여러므로 악몽이었다고 한다.[25] 그러다보니 상대국인 독일의 6호 전차 티거마냥 B-29를 정비하기 위해 대규모의 정비반을 동원했으며 엔진 실린더 조율사 같은 전문적인 직책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다면 미국은 이미 2,000마력의 출력을 자랑하는 프랫&휘트니 R-2800 더블 와스프 엔진을 왜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사실 R-2800을 듀플렉스-사이클론 R-3350와 비교하면 출력이 200마력 떨어지기는 해도 더 가벼워서 추중비는 약간 더 좋지만 유럽전선에서 P-47, F6F, F4U, B-26, PV-1, C-46에 의해 43년이 돼서야 검증되었으며, 또 B-29 설계 시점에 이미 많은 기체에 공급이 예정되어 있어 물량이 충분할지도 확신이 없고 B-29 자체 또한 트윈차저 설계[26][27]가 이미 R-3350에다 맞춰저 있었고, 떨어지는 200마력 또한 4기의 엔진을 단다는것을 생각하면 결코 적은 양이 아니었기에 아예 반려된 것으로 추정된다.[28]
사실 보잉도 이 엔진 문제를 어떻게 해볼려고 B-17에 액냉식 앨리슨 엔진을 넣은 XB-38 사례처럼 B-29에 트윈차저를 장착한 P-38, P-39, P-40에 넣었던 앨리슨 엔진을 2개로 합친 24기통 W형 V-3420-11 앨리슨 수랭 엔진을 달은 XB-39를 테스트를 시도했다. 다행히 사고가 있어서 영 좋지 못했던 XB-38과는 달리 XB-39는 성공적으로 시험 비행이 끝이 났으나, 문제는 수랭식 엔진에 과급기를 넣는 조화가 영 좋지 못했던 미군답게 수랭식 엔진에 트윈차저를 다는 것도 문제가 생겨서 계속 지연이 되었으며, 사실 테스트 또한 트윈차저 없이 진행이 된 것이였다. 이 트윈차저 문제는 결국 R-3350을 장착한 B-29가 1944년 전투에 투입될 때조차도 해결이 안되어 프로젝트가 취소되는 결말로 이어진다.[29][30]
방어력도 꽤나 신경 써서 상당히 튼튼했던 기종이기도 하다. 당시 7.7 mm 기총은 이미 2차대전 초기에 일찌감치 화력부족 판정을 받고 주요 참전국의 전투기 무장에서 제외되었으나, B-29의 상대였던 일본의 경우 전쟁 초기의 주력기들을 제때 대체하지 못하는 통에 계속 유지하고 있었고,[31] B-29는 미국제 기종답게 맷집도 좋아서 7.7mm 기총 따위는 그냥 씹어버리고, 20mm 기관포에 대한 내탄능력도 우수했다[32]. 여압 캐빈은 0.5인치(12.7mm) 두께의 알루미늄 합금으로 제작되었다. 개발 당시에 주요 부위에는 12.7mm 중기관총도 모자라 20mm 기관포를 쏴가면서 테스트했고, 테스트 막바지에는 아예 연료에 모의폭탄까지 꽉꽉 채워넣은 전투중량의 B-29를 크레인으로 들었다 떨어뜨리는 식으로 기체의 강도를 측정하기도 했다. 실제로 해상에 불시착했던 B-29 한 대는 기체가 부러지기는 커녕 온전하게 착수했고 오히려 여압장치 때문에 부력이 유지되었는지 그냥 해안가로 떠밀려왔다고 한다. 또한 맨해튼 프로젝트 당시 8,000 파운드의 무게의 원자폭탄 프로토타입을 운송하다가 폭탄창 내부에서 폭탄이 분리된 사고가 있었는데, 이 또한 폭격기에 큰 손상을 입혔지만 무사히 귀환했다고 하며, 귀환뒤에 수리되어서 다시 헌역으로 복귀했다고 한다.[33]]
또 잘 안 알려진 사실이지만 B-29는 미군이 만들었던 당대 가장 진보된 오토파일럿 장치를 갖추고 있었다. 기존의 자동 조종 장치는 직선 및 수평 비행을 유지하는 데에 그쳤지만 C-1이라고 불리는 이 오토 파일럿 장치는 바람이라든지 비행 편차가 발생하면, 즉시 이를 감지하고 편차까지 수정하는 기능까지 있었다. 그 덕에 B-29는 거의 완벽하게 수평, 수직을 유지하면서 비행할 수가 있었다.
이런저런 난점과 그 극복을 위해 시도한 여러가지 조치로 인해, B-29의 개발과 운용 전체에 든 비용은 원자폭탄 만드는 데 든 돈보다 많다는 소리도 있다. 이게 마냥 틀린 말은 아닌것이, 맨해튼 프로젝트가 20억 달러 정도 소요됐는데 B-29는 개발 프로젝트가 진행될 때 아직 완성도 안 된 개발 단계에서 미 육군 항공대가 B-29 1,600대를 선주문을 때려버렸다. 이때 미 육군 항공대의 요청액이 10억 달러였는데, 개발과 실전배치, 양산 과정에서 비용이 불어나서 최종 약 30억 달러 남짓이었다고 한다. 미국이 2차 세계대전 때 단일 프로젝트에 가장 큰 돈을 때려박았던 게 이 계획이었다.
5. 실전
5.1. 태평양 전쟁
일단 좀 늦게 개발되다보니 미 육군 항공대에 배치되어 실전 투입된 것은 1944년 부터이다.[34]B-29가 빨리 실전 투입된 이유는 사실 미 국방부와 육군 항공대가 전쟁의 빠른 종결을 위해 B-29 계획이 승인되자마자 1,600대를 선주문을 하는 바람에 이 폭격기에만 맨해튼 프로젝트보다 더 큰 30억달러를 썼기 때문이다. 이렇게 큰 돈을 질렀으니 B-29의 가장 중요한 개발 이유인 일본 본토 폭격 목적을 달성하고, 일본 본토에 궤멸적 피해를 입힐 정도로 본전을 뽑으려면[35] 어떻게든 실전에 최대한 빨리 투입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보잉사는 기존 B-17과는 달리 테스트 비행을 거의 생략하고 실전 배치를 서둘렀으며 그 과정에서 엔진문제, 당시 생소한 제원의 폭격기라는 변수로 인해 초기 미군 폭격기 조종사들이 탑승을 보이콧했다. 이때 B-29 테스트에 관여했던 폴 티비츠 중령[36]은 신뢰도를 문제삼아 저항하는 미군 폭격기 조종사들을 납득하게 하려고, 여성 조종사를 테스트 파일럿으로 투입한다. 여성도 B-29를 조종할 수 있다면 그들도 받아들일 것이라는 이유로 당시 미국에서 흔치 않던 여성 조종사 도라 도허티와 도로테아 무어맨을 투입해 테스트 비행을 실시했고, 이 두 여성이 성공적으로 테스트 비행을 마치고 미 육군 항공대에 B-29 조종 자격증을 취득함으로써, 폭격기 조종사들의 불안감을 날리고 B-29에 탑승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을 그린 다큐멘터리가 PBS에서 방영되었었다. #
유럽 전선에서는 이미 B-17과 B-24가 나치 독일을 충분히 갈아버리고 있었기 때문에 B-29는 양산될 때마다 그 어마어마한 항속거리와 폭장량, 고고도 비행능력을 이용하여 일본을 공격하는데 집중되었다. 상술한 대로 B-29의 존재 이유 자체가 항속거리와 폭장량이었기 때문. 원래 39년 소요 제기가 있었을때까지 이렇게 심각하게 생각을 안 했었는데, 진주만 공습을 맞고 나니 미국 입장에선 반드시 복수해야되는데, 둘리틀 특공대때 동원한 B-25라는 굉장히 위험천만하고 가성비가 안나오는 작전이 아닌한 당시 미국 어떤 항공기도 일본 본토까지 때릴 수 있는 항속거리가 안나왔다. 그래서, 진주만 공습이 터진 이후의 B-29는 "설계도면 나오면 무조건 띄워!"라는 긴급명령이 떨어지며, 공밀레를 총동원해 시제기가 나오자마자 바로 제식 채용되고 상술한대로 선주문을 띄웠다. 당시 미국의 전장에서 최고의 항속거리와 고공 비행능력이 필요한 전장은 오직 일본 본토뿐이라 B-29는 사이판, 티니안, 괌 탈환 이후 태평양 전역에 거의 몰빵했고, 그 성능으로 전쟁 후반의 판도를 일방적인 미국의 구타로 바꾼 것이 B-29이며, 이 시기에 영국에는 기만을 목적으로 1기가 전개된적이있다. 이미 B-17과 B-24, 영국 왕립공군의 랭커스터가 신나게 때려부수고 있으니 투입해도 별 이점이 없었다.[37]
미국의 전략가들은 어디에서 B-29를 출격시켜 일본을 공격할지를 연구했다. 별별 후보지가 다 있었는데 나중에 개발되는 마리아나 제도를 비롯해서 인도, 필리핀, 만주, 대만, 시베리아도 있었다. 특기할만한 계획으로는 알래스카의 알류샨 열도를 기지로 개발해서 일본을 치자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1942년~1943년 알류샨 전투를 치르면서, 이 동네는 전투를 치르기는커녕 사람 사는 것조차도 적절치 않은 곳임을 깨닫고 B-29 운영계획을 포기했다.
그 다음으로 인도를 B-29 기지로 활용하자는 계획이 실제로 추진되었다. 처음에는 인도에서 뜨다가, 그 뒤에는 중화민국 청두로 옮겨가고, 인도를 후방기지로 삼고 중국을 전진기지로 하여 일본을 치려는 계획이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위협 때문에 육지와 해상으로는 마땅한 보급로가 없었고, 남은 방법이라곤 인도에서 히말라야산맥 일명 '험프'(hump)를 넘어 중국 청두로 항공 보급하는 방법뿐이었다. 폭탄과 기름은 물론이고 기지 병력들이 쓸 화장지조차도 하나하나 항공 보급을 하려다보니 당연하게도 가동율이 처참하게 낮았다. B-29 1기가 폭격임무 출격을 하기 위해 같은 B-29가 6회 이상의 험프 수송을 해야 한다는 분석이 나올 정도로 비효율적인, 그러나 다른 선택지가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또한 당시 히말라야 산맥 험프를 넘는 항공 보급로는 그 자체로 대단히 위험해서 비전투 손실이 적지 않았다.[38] 타임라이프 제2차 세계대전 B-29의 일본폭격 편에서는 험프 수송을 이렇게 묘사한다. "험프는 단지 높은 봉우리였을 뿐만 아니라, 험상궂은 날씨의 번식처였다. 혹독한 추위와 갑작스런 폭풍 그리고 급작스런 낙하 현상은 마치 바윗돌로 비행기를 하늘에서 내리치는것 같았다." 험프 수송이 시작된 초기 수개월 간 손실은 무려 B-29 12기였으며 여기에 당시 비행단이 보유한 C-46 수송기 절반 손실이 더해진다.[39] 손실이 이렇게 심각했으니 당시 추락한 항공기의 잔해만으로도 항로를 잡을 수 있었다는 카더라가 나돌 지경이었다. 험프 수송비행이 얼마나 위험하고 힘들었던지 이 물자수송 비행 임무는 전투 비행과 똑같은 영예가 주어졌으며, 험프 수송 비행을 무사히 마치면 B-29의 노즈 아트에 폭격 임무와 동일하게 표시를 할 수 있었다. B-29 기수에 낙타가 표시되어 있으면 험프 수송비행 임무 1회를 뜻한다. 폭탄 1개 그림은 당연히 폭격임무 1회다.
1944년 인도 주둔 중인 B-29 "Eddie Allen"[40](일련번호 42-24579)의 기수 노즈아트 |
폭격 임무 23회와 더불어 험프 수송(낙타) 10회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일본기 3회 격추 킬마크는 덤이다. 당시 미군기들은 일본기 격추 표시를 욱일기로 하는 것이 관행이었다.[41]
인도-버마를 지나는 도로인 이른바 '레도 공로'는 1945년에나 제대로 기능했고, 그나마 매우 험악한 지형 때문에 제대로 운용하기 힘들었다. 거기에다 일본군의 직접적인 위협에 작전기지가 노출되었다. 일본군이 대륙타통작전을 감행해서 중국 남부 해안마저 장악하고 내륙으로 달려들기 시작하면서 B-29 기지가 일본군의 작전권에 들어가 버린 것. 이를 막을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은 조지프 스틸웰을 위시한 미군 참모진의 오판 때문에 정예부대이자 유일한 전략 예비대인 Y군 및 클레어 셰놀트의 중미연합공군을 버마로 보낸 상황이었고, 여기에 자체 역량 부족이 겹친 결과 말 그대로 대패했다. 마침 마리아나 제도가 미국의 손에 들어오면서, 미국은 B-29 운용 기지를 태평양 쪽으로 옮길 계획을 세운다.
미군은 1944년 일련의 전투들을 통해 괌, 사이판, 티니안 등 태평양 북마리아나 제도의 주요 섬들을 손에 넣는다. 이에 미군은 얼씨구나 하고 인도,청두에 있던 B-29들을 이곳으로 옮겨 배치하기 시작한다. 당연히 폭격기만 배치해서는 될 리가 없었기에, 미국은 이들 섬에 원래 있던 일본군의 허접한 비행장을 새롭게 개발하고 거기다 그 옆의 빽빽한 밀림까지 깔끔하게 밀어버리면서 불과 몇달만에 거대한 비행장을 깔아버린뒤 B-29를 줄줄이 띄우는 신기를 보여준다. 여기에다 해군의 쇼미더머니급 해상 보급로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험프 수송같은 비효율적인 작전은 필요가 없었으며, 수송선들이 B-29 운용에 필요한 거의 모든 물자들을 날라와서 기지마다 가득가득 쌓아올리고 있었기에 가동율이 크게 오를 수 있었다.
1945년 초 티니안 섬 북부 비행장(North Field). 불과 몇달 전까지 조그마한 일본군 비행장이었고 그 주변은 열대 밀림이던 곳이다. 미국은 괌에도 사이판에도 이와 똑같은 거대 비행장을 깔았다. 이 확장 공사로 인해 1945년 당시 티니안 섬 북부 비행장은 미국 본토를 포함하여 세계에서 가장 큰 비행장이었다.
중국보다는 괌, 사이판 등이 훨씬 일본 땅에 가까웠기 때문에 당연히 여기서 발진하는 B-29 폭격기들은 연료는 아끼고 폭탄을 더 많이 실을 수 있게 되었다. 초기에는 유럽 전선처럼 정밀 조준 폭격을 실시했다. B-29의 성능을 살려서 더욱 더 높은 고도에서. 그런데 제트기류라는 뜻하지 않는 복병을 만나면서 폭격 성공률이 낮아졌다.[42] 그 때문에 초기 개판이었던 폭격효과로 인해 일본 본토 국민들은 폭격이 언제 오나 하며 날짜를 꼽아가며 기다리고 있었으며, 폭격이 오면 그걸 구경하고 있었다. 그렇게 된 원인은 대본영의 엉터리 선전 덕분이다. 그래서 이후에는 이런 조준 폭격 대신 커티스 르메이[43]의 소이탄 작전으로 무려 336대의 폭격기가 참가한 도쿄 대공습과 같은 융단폭격이 시작되면서 일본의 대도시들은 전부 불바다가 되어버린다. (이때 X자로 소이탄을 뿌려서 도쿄가 불바다가 되었다.) 1944년 7월 사이판이 함락되고, 4개월동안의 사이판 정비,비행장 건설등을 통해 기지를 완성해 일본 본토 폭격이 가능하게 된 1944년 11월부터 본토 폭격을 시작해, 4개월 정도의 시행착오를 거친 후[44] 1945년 3월 도쿄 대공습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서 확실한 공습 작전 성공 공식을 찾고, 종전까지 르메이의 B-29 부대는 일본 본토 전역에 골고루 폭격을 했다.
폭격기가 자기 폭탄에 맞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안전하다. 유럽 전선에서 초창기에 빽빽한 컴뱃 박스를 이루고 폭격할 시기에는 실제로 위에서 떨군 폭탄에 맞아 추락한 B-17들도 있었다. 때문에 그 이후로는 모든 폭격기들은 폭격 직전에 고도를 똑같이 맞춰 이전과 같은 불상사를 방지하려 했다. 당장 윗 사진도 실제로는 모두 같은 고도에서 투하하는 장면으로 촬영 각도 등의 문제 때문에 이렇게 보이는 것 뿐이다.
폭격이 계속되자 그동안 일본 군부의 일방적인 선전만 듣고 이를 별 의심없이 받아들이던 일본 국민들은 점점 동요하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일본 군부의 통제에 반발하는 심리가 은연 중에 확대되어갔다. B-29의 폭격은 일본의 생산능력과 국민들의 전의에 큰 악영향을 끼쳤으며 이는 유럽 전선에서 독일에 대한 공습보다 더 극적인 효과를 보였다.
B-29의 활약에는 일본의 열악한 방공능력도 한몫했다.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 조기 경보 능력이 없다시피 했다.
일단 지리적인 조건에서 이미 불리했는데, 태평양 방향의 일본 본토 바깥에 조기 경보용 레이더를 안정적으로 설치할 수 있는 땅이라고는 본토와 마리아나 사이에 있는 이오지마 같은 일련의 섬들뿐이었다. 그러나, 일본 해군이 박살나고 미군이 일본 근처의 섬을 하나둘씩 점령하기 시작하자 일본은 조기 경보능력을 잃어버림과 동시에 미군에게 활주로를 제공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또한 기본 장비인 레이더의 성능은 참전국 중 최악이었기에 거대한 폭격기조차 멀리서부터 탐지할 수 없었고,[45] 지금까지 이어지는 일본 관료제의 경직성 때문에 공습 경보와 요격 명령의 전파속도마저 느려서 경보가 울리는 시점에서는 이미 B-29들이 머리 위에 와 있기 일쑤였다. 레이더 성능이 부족하던 일본은 조기 경보를 위해 이오지마와 같은 일련의 섬이나 조기 경보 목적으로 태평양에 띄운 어선 등에 의존했는데, 이오지마와 같은 섬이 상실되고 재해권까지 뺏기면서 활용이 불가능해졌다.
- 요격기의 능력이 부족했다.
B-29가 고고도 폭격을 하던 시절에는 B-29의 작전고도까지 올라가서 제대로 작전을 할 수 있는 기종이 얼마 없었다. 해군의 제로센 같은 것들은 어떻게 올라오다가도 엔진 성능도 모자라고 연료도 떨어져서 혼자 추락하기 일쑤였고[46] 육군 항공대의 경우도 Ki-61 히엔이 수랭엔진을 갖추어 그나마 고도 10,000 m 까지 올라갈 '수는' 있었지만[47] 대전 말기 일본의 상황이 나날히 악화되면서 그리 많은 수가 생산되지도 못하였고 부품의 품질부터가 형편없어서 카탈로그상의 성능에 훨씬 못미치는 상황이 심심찮게 벌어졌다.
B-29가 저고도 정밀폭격으로 방침을 바꾸면서 고도를 2~3,000m로 낮춘 뒤는 어찌저찌 따라붙을 수는 있게 되었으나, 이제는 고질적인 화력 부족이 발목을 잡았다. 거기에다 전쟁 후반기에 들어서 심각해진 본토의 공업능력 저하는 전투기 자체의 신뢰성과 성능을 제대로 갉아먹었다. 게다가 연료 수급 상황마저 열악해졌고, 전투기들을 운용하는 조종사와 정비사들의 자질도 수준 이하로 떨어진 상황이었다.
이러다보니 당연히 제대로 된 요격 전략이나 전술을 펼칠 수가 없어진다. 제각기 요격에 나선 전투기들은 12.7mm가 덕지덕지 달리고 후방에는 20mm까지 장착된 B-29의 우람한 방어화력에 공중분해당하기 일쑤였고, 나중에는 하다하다 궁여지책으로 카미카제까지 동원되는 판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P-51 머스탱 같은 강력한 전투기들이 호위기로 붙기 시작하자, 일본 육, 해군 전투기들의 손실은 급증하였고, 원폭을 맞기 얼마 전 시점에는 사실상 방공에는 손을 놓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아예 건드리지도 못한 건 아니어서 1945년 4월 28일 제로센을 타고 단독으로 B-29 1기를 격추한 이와모토 테츠조나, 1945년 5월 25일 저녁에서 26일 새벽 사이 J1N 겟코로 B-29 5기를 격추한 해군의 쿠라모토 쥬조(倉本十三) 상등비행병조(B-29 총 6기 격추 2기 중파)와 Ki-45 토류로 격추 기록은 세운 육군의 카시이데 이사무(樫出勇) 항공대위(B-29 7기 격추), Ki-44로 6대를 격추시킨 요시다 요시오 대위[48] 등 일부 조종사들은 어찌어찌 격추시키기는 했다. 일본의 항공기에 의해서 격추된 B-29는 74대로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유럽 전선에서 영국이나 독일이 보여준 방공능력과 비교하면 참담한 수치다.[49]
- 대공포가 부족했다.
일본은 '신주불멸'[50] 운운하며 본토의 대공화기 개발과 배치를 등한시한 탓에 B-29가 들이닥치던 시점에서 B-29에 대해 유효한 대공화기는 소수의 독일제 대공포의 복제품들뿐이었다. B-29의 작전고도인 9,000~10,000m에 크게 못미치는 사거리였으니 고고도 작전시 위협도 안되고, 대공포탄에 근접신관이 없어 저고도에서 효율적이지도 않았다. 그나마도 계속된 공습에 차츰 소모되어갔고, 전쟁 말기의 미군 조종사들은 일본군의 대공포를 아예 없는 존재로 여기기에 이르렀다. 물론 그렇다고 피해가 없었던 건 아니고 일본 본토 공습 과정에서 54기가량이 대공포에 의해서 격추되었다고 한다.
- 파일럿이 부족했다.
전쟁 후반 일본은 안 그래도 요격기 성능이 형편없기까지 했던데다, 아군의 대공방어도 글러먹은 상태에, 그놈의 카미카제에 쓰느라 숙련된 조종사도, 신참 조종사도 한참 모자랐다. 거기다 상대방은 그 반대여서, 허구한 날 폭탄 맞고 포격당하고 자살공격하다가 털리는 상태였다.
- 이를 알면서도 고칠 생각도, 능력도 없었다.
신이 지켜주는 나라니 운운하면서 본토 방어를 등한시한데는 그동안 일본이 태평양에 외따로 떨어진 섬나라라 반드시 육군과 해군이 동시에 들어와 상륙작전을 하지 않는한 일본 본토에 올라가는 것조차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해군이 막지 못하면 상륙만 저지해도 일본 본토 방어가 가능했고, 그나마도 가장 가까이 있는 한반도외에는 일본 본토를 쉽게 드나들 군사력을 가진 나라가 지난 수천년간 없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타국에 공격받아 본토가 불탄다는 사태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었다. 원나라의 일본원정때도 상륙한 여몽연합군은 규슈지역 일부에서만 전진했을뿐 혼슈에는 근처도 못왔다. 그때문에 메이지 유신이후 본토 바깥에서 전쟁에 개입하거나 전쟁을 일으켜서 몇번이나 경제위기를 타개하다보니 일본인들은 내전이 아닌이상 전쟁을 돈벌이정도로 쉽게 생각하는 사회 분위기가 만연했고, 설사 국력 차이가 한참 나는 미국에 선빵을 날려도 절대국방권이 있는한 이렇게 멀리 있는 본토가 맞을 일은 없으니 준비를 잘 해서 잘 막고 한번만 잘 싸우면 우리가 이기거나 미국이 먼저 협상할거라는 근거없는 낙관론이 팽배했었다. 진주만공습 이후 불과 4개월만에 받은 둘리틀 특공대의 폭격이 그 자체로는 심각한 피해를 입히지 않았지만 자신들이 믿고 있던 대전제가 깨졌음에도 B-29가 본격적으로 작전을 시작하면서 몇달간 시행착오가 있었다는 이유로 또다시 근거없는 낙관론에 빠졌고 그때문에 또다시 방어할 생각은 안하고 결전준비,가미카제등에만 몰두하며 상술한 허접한 본토의 대공능력 강화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다가 결국 뜨거운 불맛을 제대로 보고 말았다. 도쿄가 불바다가 되고 나서야 뒤늦게 그들을 지켜주는 신 따위는 압도적인 돈과 기술으로 제압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미 그때는 늦었고 수많은 도시가 폭격으로 갈려나갔다. 몇달의 시행착오끝에 정답을 찾은 르메이와 육군 항공대는 당연히 성공방식을 일본 전역에 동원해 골고루 폭탄을 퍼부었다.
한편, B-29들은 본토 폭격외에도 주요 도시들에 대한 공습의 와중에 일본 근해에 대해 기뢰 부설 작전도 실시했는데 작전명이 Starvation(기아)이었다. 당시 일본의 물자 이동량 중 큰 비중을 가졌던 해상 수송을 사실상 마비시켜 전쟁 말기의 일본을 말 그대로 굶겨죽였다. 일벌레인 르메이와 30억짜리 무기를 놀려두기 싫은 높으신 분들, 특히 가미카제때문에 골치아프던 니미츠는 전략폭격외에도 가미카제를 원천봉쇄하기 위한 규슈 비행장 전술폭격도 퍼부어 일본 항공기가 제대로 뜰 여력조차 주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작전으로 B-29는 그 불멸의 이름을 역사에 영원히 남기게 된다.
B-29 "Enola Gay" 일련번호 44-86292 티니안 North Field 주둔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리틀보이 투하 |
B-29 "Bockscar" 일련번호 44-27297 티니안 North Field 주둔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 팻맨 투하 |
특기할 만한 점이라면 B-29에 대한 작전지휘권은 태평양함대 사령관 미 해군원수 체스터 니미츠 제독이나 태평양방면 지상군 총사령관 육군원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같은 지역사령관이 아닌 총사령부격인 합동참모본부에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 작전권은 육군 항공대 대장 헨리 아놀드가 주도했다. 그래서 기뢰부설작전 시행시에도 니미츠는 B-29를 운용하던 20폭격사령부에 직접 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합참에 동원을 요청해야 했다. 전략무기로서의 성격이 강했던 B-29의 특성을 반영한 편제였는데, 이는 종전 후 미 육군 항공대가 육군으로부터 독립하여 미합중국 공군으로 거듭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5.2. 한국전쟁
한국 전쟁 때에도 B-29는 대활약을 펼쳤다. 당시 B-29들은 주로 일본의 요코타 기지(横田基地)[51] 또는 오키나와 가데나 기지에 주둔하고 있었고, 동해만 건너면 바로 한반도였기에 폭격 작전에는 최상의 환경이었다.한국전쟁 초기 가장 유명한 작전으로는 1950년 8월 16일 낙동강 전선에서의 '융단폭격'을 꼽을 수 있다. 낙동강 전선 교착상태에서 오키나와 가데나 공군기지를 발진한 B-29들은 왜관 상공을 거쳐 낙동강 서쪽 구미~약목 구간 5.6㎞ × 12㎞ 직사각형 구역에 집중폭격을 가했다. 이때 투하한 폭탄은 무려 960톤, 3,234발로 북한군에게 실질적인 피해는 물론이고 지휘부에 매우 큰 정신적인 충격을 가했다고 한다.[52]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료 p.63. 1950년 겨울까지 미군은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UN군이 북진을 시작하면서 B-29는 일본에서처럼 마음 놓고 북한 전역을 불바다로 만들기 시작했다. 북한 지역은 일본인들이 지어놓은 산업기반들이 많았는데 모조리 잿더미가 되었고, 휴전 당시에는 평양시에조차 멀쩡한 건물이 달랑 2곳만 남았을 정도였다고 한다.[53] 실제 미 공군은 한국전쟁 동안 2차대전 당시 유럽 전선에 투하한 것보다 더 많은 폭탄을 비좁은 북한 지역에 퍼부었다. 원산시도 너무 많이 두들겨 맞아서 원산폭격이란 말이 탄생할 지경이었으며, 이때 제대로 당한 북한은 그 이후로 지금까지도 평양이나 기타 요지에 방공망을 촘촘히 깔아놓는 대공 전략을 취하고 있다. 요컨대 B-29는 태평양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한국전쟁에서도 폭격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한 사람들에게는 아주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B-29는 태평양 전쟁 후반에 일본 상공을 제 집 드나들듯 폭격한 것처럼 북한 전역을 낮이건 밤이건 마음대로 오가며 방심하고 있었다.
"특히나 미그기에게는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꼬리를 내줘선 안된다. 공산군이 가진 이 경쾌한 은빛 제트기는 작은 덩치인 주제에 37mm 대포와 23mm 기관포 2문을 갖췄고, 그것들이 불을 뿜으면 제아무리 큰 비행기라도 순식간에 박살나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이 무기가 쏘아대는 테니스공만 한 불꽃에 맞아 동체가 두동강나는 B-29를 직접 목격하고 몸서리친 일도 있었다. 하물며 내가 탄 세이버는 한 발만 명중해도 날개가 꺾이거나 공중분해될 것이다." - 브루스 힌튼 중령
그러나 공산군이 제트전투기인 MiG-15를 투입하면서 사정이 달라진다. 게다가 공산군은 일본과는 달리 소련으로부터 레이더를 구입하여 북한 지역 곳곳에 레이더 기지를 설치하여, B-29의 접근을 사전에 포착할 수 있었다. 1950년 후반부터 만주 접경 압록강 지역 상공에서 출현하기 시작한 MiG-15기들은 B-29에 대해 혹독한 통행세를 요구했다. MIG-15들은 기껏해야 20mm 기관포를 장비했던 2차대전 일본군 전투기와는 차원이 다른, 중폭격기 요격용으로 개발된 대구경의 37mm 기관포를 장비하고 있었고, 대 프로펠러 전투기 추적에 맞춰져 있던 B-29의 기총 조준기들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력과 기동력을 자랑했다. 덕분에 B-29는 제대로 이들의 먹잇감이 되어 우수수 털려나갔다. 결국 28대의 B-29를 상실한 끝에 "이대로 가다가는 B-29 폭격기 편대 전멸 예상"이라는 보고에 따라 그제서야 주간폭격이 중단되었고, 1951년 11월 이후로 B-29의 모든 폭격작전이 야간폭격으로 전환되었다.[54] 한국전쟁 중반 이후 시점의 B-29 폭격기들을 보면 동체의 하부가 검은색으로 도색되어있는 경우가 많은데, 야간폭격을 위한 위장도색이다.[55]
참고로 B-29가 야간폭격으로 전환된 뒤 공석이 된 주간폭격기 자리는 속도가 상대적으로 빠른 B-26이 꿰찼다.[56] 또한 폭장량은 상대적으로 낮지만 제트기라 속도가 빨랐던 F-84 썬더제트 역시 주간 CAS 임무에 투입되었다.
B-29 "Ace in the Hole" 일련번호 44-61872, 일본 요코다 기지 주둔, 1952년 |
이 사태는 당시 개발이 진행중이던 후계 폭격기 개발사업에도 영향을 끼쳤으며 이에 따라 최종 개발된 것이 B-52 스트라토포트리스다.
그나마 전면 개입에 소극적이었던 스탈린이 당시 공산군 공군의 주축이던 소련 공군으로 하여금 후방인 평양 이북 지역에서만 활동하도록 지침을 내렸기 때문에 전선 부근에서는 유엔군인 확실하게 제공권을 잡고 있었고 전선이 교착되어 38선 부근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주된 전황을 이루던 한국전쟁 중후반부터는 야간에 일단 폭탄을 적재하고 뜬 다음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전선 상공을 비행하면서 지상의 요청에 따라 목표에 폭탄을 투하하는, 오늘날로 치면 근접항공지원(CAS)과 유사한 폭격작전을 많이 수행했다.[57]
한국전쟁 B-29편제중 특이한 점은 기존의 전투비행단/비행단들이 미 공군으로 독립후 Group에서 Wing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나 581 통신/보급 Wing을 제외하면 전부 2차대전 편제인 Group으로 운용된 점이다. 이들은 전략공군사령부에서 파견된 장교들이 배속된 FEAF(극동공군)에서 하위제대인 Bomb wing을 구성하지 않고 FEAF bomber command 아래에서 Group과 독립 squadron으로 운용되었다.
B-29 운용부대(98 Bomb Group은 예하 4개대대, 나머지 Bomb Group은 예하 3개대대 구성)
FEAF bomber command 가데나 - 19 Bomb Group
FEAF bomber command(전략공군) - 22 Bomb Group, 92 Bomb Group, 98 Bomb Group, 307 Bomb Group,
31전략정찰대대, 3레이더조정분견대, 10레이더조정분견대, 512기상정찰대대,
56전략정찰대대, 514기상정찰대대, 54기상정찰대대, 2구조대대, 34구조대대, 37구조대대,
43공중급유대대, 91전략정찰대대, 581통신보급 Wing.
한편 B-29의 개량형인 B-50의 정찰기 형인 RB-50도 한국 전쟁에서 활약 했는데, 91전략정찰대대에서 기존 RB-29를 대체해 운용되어 북한 상공을 날기 시작했다.
6. 전쟁 이후
전쟁 이후 B-29는 전략 폭격기 자리에서 물러나 표적 예인기나, 수송기(CB-29), 해상구조기(SB-29), 훈련기(TB-29)나 정찰기(RB-29), 공중급유기(KB-29), 날씨 관측기(WB-29)등 다양한 형식으로 개조되어 여생을 보내게 된다. 특히 SB-29는 아래에 투하식 보트를 달고 해상 구조기로서도 사용되었고, 일부 B-29는 개조되어 AN/APS-20C 레이더를 장착해 조기 경보 시스템을 시험하게 되는데 이는 나중에 EC-121 워닝 스타의 개발로 이어진다.그러나 그마저도 B-29를 개량한 B-50으로 대체되며 1960년대초 기점으로 전부 퇴역하게 된다.
B-17은 퇴역 이후 산림청에 들어가 소방 비행기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한것과 다르게 B-29는 금방 퇴역 처리됐는데 아마 전략 폭격기였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엔진 유지보수 문제로 금방 퇴역했으리라 추측된다.[58]
7. 퇴역 후
4,000대 가까이 생산되었지만 시간이 많이 흐르다 보니 폐기처분된 것이 많다. P-51 머스탱 같은 단좌 전투기들은 비행 애호가들이 개인적으로 소유하는 경우라도있지만, B-29 같은 거대한 4발 엔진 폭격기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엔진 유지 보수 관리하기가 크게 까다로운 기체인 까닭도 있을것이다.2020년 현재 외형이 온전하게 보존되어 남아있는 B-29 기체는 총 26기이다. 이 중 미국 내에 전시되어 있는 기체가 24기, 그리고 미국 이외의 국가에 전시된 것은 단 2기로서, 1기는 영국, 1기는 바로 한국에 있다. B-29가 미국 외의 국가에 전시되어 있는 건 한국과 영국 뿐이다.[59] 그만큼 귀한 기체다.
영국에 있는 기체는 덕스포드(Duxford) 제국 전쟁 박물관 분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보잉 랜턴 공장 생산분으로 한국 전쟁에 참여한 기체이기도 하다.
한국에 있는 기체는 1972년에 미 공군이 기증한 것으로서 보잉 위치타 공장 생산분(일련번호 45-21739). 현재 경남 사천 항공우주박물관에 있다. 기증받을 당시 시대가 시대인만큼 "통일호"(Unification)이라는 이름을 새로 붙였다.
경남 사천 항공우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B-29 |
이후 전쟁기념관이 용산에 따로 개관하면서 주관 기관 간 인수협상이 틀어지는 바람에 우여곡절 끝에 경상남도 사천시의 항공우주박물관으로 이전 전시되어 있다. 여의도에 있던 시절에는 비행기 내부도 전시 공간으로 꾸며져 있었으며 관람객이 비행기 내부에 들어가 구경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는데, 현재는 그렇지 않은 듯하다.[61]
7.1. 비행 가능 기체
실제 비행이 가능한 기체는 정말 희소한데, 2022년 기준으로 단 2기, FIFI 및 Doc 뿐이다.'FIFI'(일련번호 44-62070)는 미국의 민간 항공기 수집단체인 CAF(Commemorative Air Force)가 복원하여 소유하고 있는 기체이다. 보잉이 워싱턴 렌튼 공장에서 제작한 FIFI는 1953년에 인도되었고 TB-29A으로 전환되었다가 1958년에 퇴역한 기체다. 그 뒤론 차이나 레이크 해군 무기 시험장에서 반쯤 버려진 상태로 있었다가 CAF가 복원하여 처음엔 거의 폐품 상태였던 걸 간신히 살려놓은 것이다.
현재 비행 가능한 기체인 'FIFI'
'Doc'(일련번호 44-69972)는 1945년 3월 워싱턴 렌튼 공장에서 미국 육군에 인도되었고 1951년 레이더를 장착하는 개조를 받고 뉴욕 그리피스 공군기지에서 활동하다가 후에 표적 예인기로 사용되었고, 1956년 FIFI와 마찬가지로 차이나 레이크 해군 무기 시험장에 버려지게 된다. 곧 탄도 미사일 시험 타겟으로 갈려나갈 예정이였으나 'Doc friends'라는 비영리 단체에서 기체를 인수, 수리해서 비행가능한 상태로 복원한 것이다. 2016년 7월 17일 초도비행을 마쳤다.
비행 가능한 2번째 기체인 B-29 'Doc'
비행이 가능할 수도 있었던 기체가 하나 더 있었다. 'Kee Bird'(테일 넘버 45-21768)라는 기체인데, 북극으로 왕복 비행하라는 임무 맡았으나[62] 도중에 악천후을 만나 그린란드에서 불시착 하여 버려졌던 기체이다. 안타깝게도 복원 과정 중에 화재가 발생해서 그대로 전소되었다.
택싱 시험 도중 보조 동력 발전기의 연료 펌프가 고장나 복원 단체는 발전기 위에 다른 연료통을 달아 연료가 아래로 내려와 발전기에 가도록 해결하였는데, 문제는 택싱하면서 기체가 흔들리니 이 연료통이 흔들리면서 사방에 연료를 뿌리고 결국 가열된 발전기에 연료가 흩뿌려지면서 불이 붙어 화재가 발생해 손 쓸 세도 없이 동체 후방으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이후 불탄 잔해는 그 자리에 계속 방치되어 있다.
발견 당시의 "Kee Bird" | 복원 도중 화재로 불타서 버려진 현재의 "Kee Bird" |
Kee Bird 복원과정과 화재사고가 발생하는 순간을 담은 유튜브 영상[63]
구글 지도로 검색하면 해당 항공기 잔해가 버려진 위치가 나온다. #
8. 파생형
8.1. 실버 플레이트 (핵 폭격기 사양)
Silverplate B-29 |
사실 실버플레이트라는 코드 네임은 정식명칭은 아니고 그냥 관계자들이 실버플레이트라고 불리던걸 그대로 가져와다 붙인것이라고 한다. 이에 관해 상세한 설명은 없지만, 한때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이 영국 처칠 총리한테 비밀리에 방문하기 위해 풀먼 침대 객차중 하나를 개조하는 기밀 프로젝트가 진행된적이 있었는데, 이 객차를 높으신분들이 타게 끔 개조한다고 비싼거 떡칠한다고 은도금에 비유해 실버 플레이트라고 불리었었고, 나중에 B-29에 탑재할 원자폭탄 이름이 리틀보이(루즈벨트)와 팻맨(처칠)라는 코드네임이 붙었는데 이게 B-29를 탑재하게끔 개조하는 프로젝트가 풀먼 침대 객차 개조 프로젝트가 생각난다고 정부 관계자들이 그냥 비슷하게 이름 붙여 불렀다는 소리가 있다.
실버 플레이트들은 주로 509 혼성 비행단에서 운용되었으며 일반 B-29와는 차이가 있었다. 가변피치 프로펠러 등 많은 신기능이 들어갔고, 또한 기존 B-29에 장착되었고 문제가 많았던 라이트 듀플렉스 사이클론 엔진의 냉각성능이 개선되었으며 최신의 연료분사와 메나폴드를 장착한 가장 최신형이 장착되었다. 또 두가지 유형의 핵무기를 탑재할수 있게 폭탄창이 개조되었으며, 흔들림 방지 장치가 있는 H 프레임 구조로 강화되었고, 또 기존의 느린 유압식 폭탄창이 아닌 신속 투하가 가능하게 끔 빠르게 열리고 닫히는 공압식 폭탄창 문을 장착하였고[67] 영국제 이중 전자식 G형 폭탄 장착 및 F형 신속 투하 장치가 장착되었다.
이 신속 투하 밎 장착장치는 영국이 톨보이와 그랜드 슬램이라는 무겁고 크고 아름다운 폭탄들을 운용하는데에 사용한것이였으며, 이를 장착한 이유는 첫번째 실버플레이트인 B-29-5-BW-42-6259[68]가 원자폭탄 프로토타입중 하나인 씬맨을 이송하던 도중 갑자기 폭탄이 분리되어서 폭탄창이 개발살나 하마터면 폭격기와 폭탄까지 날려먹을 뻔한 대형사고[69]가 벌어졌기 때문이였다.[70][71]
그리고 핵폭탄의 무게가 거의 10,000파운드에 가까웠웠고 핵무기 투하로 인한 일반형보다 높은 고고도 비행을 위해 후미 기관총좌를 제외한 모든 무장을 제거하고 심지어 장갑판도 일부 떼어냈다. 일반형 B-29와 외견상으로 가장 큰 식별점은 기체 후미 총좌를 제외하고 기체 상부/하부/측면의 모든 총좌(터렛)가 제거되어 있다는 것. 덕분에 기존 B-29보다 워낙 높게, 빠르게 날아다녀서 원자폭탄 투하 임무 말고도 정찰이나 기상 임무 같은 다른 임무 맡은 실버플레이트 폭격기들은 일본 전투기에게 경미한 피해를 입은 단 한대를 제외하곤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단, 이들은 정찰이나 기상 말고도 폭격임무도 수행했었다. 소위 '호박폭탄' 이라고 불렸던 폭탄들을 투하했었는데, 제식명칭은 10,000파운드 경량틀 폭탄(10,000 Lbs Light-case Bomb)[72]이다. 이 호박 폭탄은 둥근 뚱뚱한 크기에 노란색으로 칠해져[73] 있었으며, 속에는 물과 콘크리트, 아스팔트와 고폭탄으로 채워져 있었다고 한다. 이 호박폭탄은 고베,우베,도쿄,후쿠시마 같은 주요 일본 거점에 투하되었다고 한다. 호박폭탄의 생김새에서 짐작했지만, 사실 이 폭탄은 팻맨의 훈련탄으로 팻맨과 똑같은 무게와 배분을 가지고 있었다. 팻맨이 워낙 무거웠던 관계로 훈련이 필요했었고 각 폭격기들은 고도 30,000피트에 레이더나 육안 방식을 통해 투하를 연습하고, 투하후 회피기동도 연습하였다. 예전에 제트기류 때문에 고고도 폭격 명중률이 개판난적도 있었기에 폭탄이 어떤 방식이 어떤 날씨와 기후에 명중률이 올라가는지도 측정하였다. 많은 실버플레이트들이 이 폭탄을 투하했고, 에놀라게이와 복스카 또한 호박 폭탄을 이용한 폭격을 실시하였다고 한다. [74]
한편 총 65대의 B-29가 실버 플레이트 사양으로 생산되었다고 하며, 전쟁 이후 B-50이나 B-36같은 신형 폭격기가 나오자 몇대는 B-50이나 TB-29로 개조되었고 남아있었던 16대의 실버플레이트는 예비기로 보관되다가 B-47의 배치로 폐기되었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건 에놀라 게이와 복스카뿐 밖에 없다.
참고로 실버플레이트가 포탑이 없어서 B-29보다 저렴할거 같지만, 실질적으론 가변피치 프로펠러나 신속투하장치 같은 영국제 수입산 부품이 들어간 것 때문인지 더 비쌌다고 하며, B-29 개량형인 B-50과 B-36 일부 또한 핵폭격을 위한 개조가 이루어졌는데, 새들트리(Saddletree)라는 코드명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훗날 핵폭탄이나 수소폭탄들이 일반적인 전투기에 탑재가 가능할 정도로 크기가 작아지고, B-47이나 B-52 같은 폭격기들도 특별한 개조 없이 핵폭탄을 운용할수 있게 설계되자 이런 핵폭탄 투하 사양 개조나 코드명은 없어졌다.
8.1.1. 에놀라 게이
B-29 "Enola Gay" 일련번호 44-86292, 티니안 North Field 주둔,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리틀보이 투하 |
미 육군 제509 혼성비행단(BG) 제393 폭격비행대대 소속 B-29의 애칭. 원자폭탄을 투하한 기체로서 B-29 중에서 가장 유명한 네임드 기체다. 자세한 것은 에놀라 게이 문서 참고.
8.2. B-50
B-29의 엔진을 교체하고 소소한 부분을 개량한 형식이다. 2차 대전 이후에 생산이 시작되어 한국전쟁까지 생산되었다. 그리고 공중급유기 버전인 KB-50은 베트남 전쟁 초기까지 이용되었고, 기후 정찰용인 WB-50은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정찰기의 활동을 보조했다. 수송기 버전인 C-97도 있었고, 이를 여객기 버전으로 개수한 보잉 377 등이 있다.기존에 문제 많았던 엔진을 프렛 앤 휘트니 R-4360 와스프 메이저로 교체해 XB-44라는 이름으로 테스트 되었고, 테스트가 성공적으로 끝나자 정식 채택되었다. 본래는 B-29D 라는 형식명을 받을 예정이였으나 모종의 이유로 B-50이라는 명칭을 받게 된다. 자세한건 문서 참조.
8.3. Tu-4
기술력 부족으로 폭격기 개발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소련이 일본으로 폭격하러 가던 도중에 소련 영내에 불시착한 미군 B-29를 억류하여 분해 후 역설계를 통해 복제 생산한 중 폭격기. 장비들이 소련제로 바뀌고 일부 성능이 개량되었다. 문서 참조.8.4. 보잉 377
B-29의 수송형인 C-97의 베이스로 만들어진 민간 여객기. 문서 참조.9. 미디어 출연
B-29가 등장하는 미디어 일람 |
9.1. 영화, 드라마
9.1.1. 웰컴 투 동막골
미군의 폭격기로 나온다.9.1.2. 더 퍼시픽
9화에서 오키나와를 점령하고 타 지역으로 이동할 때 저공비행하는 모습을 잠깐 볼 수 있다.
9.1.3. 스타워즈 시리즈
가장 인기있는 우주선 중 하나인 밀레니엄 팔콘의 조종실 디자인이 B-29의 것을 따 온 것이며, 기체에 있는 레이저 총구 역시 B-29를 모티브로 한 것이다.9.1.4. 금강천
2020년 중국영화인 금강천에서는 야간에 네이팜탄을 투하 중공군 진지를9.1.5. Strategic Air Command
영화에서 수송기형 C-97과 공중급유기 KC-97이 나온다.9.1.6. 오펜하이머
직접적으로는 등장하지 않으나, 작중 등장인물들의 언급으로 간간히 나온다.[75]9.1.7. 아버지의 깃발
이오지마 전투를 소재로 한 영화로, 영화 후반부 이오지마 섬이 점령된 직후 엔진이 파손된 B-29 폭격기가 연기를 내뿜으며 이오지마에 간신히 착륙하는 장면이 나온다. 왜 이오지마 전투가 벌어졌는지를 함축적으로 표현한 장면. 이는 실제 사례를 각색한 것으로, 실제 이오지마에 처음 착륙한 B-29는 이오지마 비행장에서 일본군과의 전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착륙했다.9.2. 게임
9.2.1. 월드 오브 워플레인
C형이 미국 8티어 프리미엄 폭격기로 등장한다.9.2.2. 엠파이어즈 근대사회의 여명
미국 진영의 2차 세계대전 생산 가능한 특수유닛으로 등장한다. 주 무장은 핵폭탄이며, 한발만 투하할 수 있다.[76] 대신 가격이 비싸다는게 단점. 독일의 V2 로켓과 같은 슈퍼무기 포지션이다.[77]9.2.3. 도미네이션즈
글로벌 시대의 두 번째 폭격기로 폭격기 Mk 4, 5, 6이 등장한다.자세한 내용은 폭격기(도미네이션즈) 문서 참고하십시오.
9.2.4. 건쉽배틀
4티어 폭격기로 나온다. 자동 기관포가 달려있어 돈벌이에 좋은 기체로 꼽힌다.9.2.5. 사이퍼즈
제너럴 웨슬리의 궁극기가 B-29 전략폭격이다.9.2.6. 폴아웃 시리즈
- 폴아웃: 뉴 베가스: 부머들이 넬리스 공군 기지에 보관된 B-29와 미드 호에 빠져있는 B-29를 수리해서 후버 댐 전투에서 뉴 캘리포니아 공화국이나 카이사르의 군단에게 시원하게 폭격을 퍼붓는다. 옛날부터 부머들의 꿈은 B-29를 타고 하늘을 날아 야만인들에게 폭격을 퍼붓는거라고 했다. 그러나 앞서 설명했듯이 엔진의 수명이 짧아서 주기적으로 오버홀을 해줘야되는데 기술자도 재료도 없는 황무지에서는 그게 불가능에 가까우니 아마 짧은 시간내에 다시 버려질듯하다.
- 폴아웃 4에선 주인공의 독백 인트로에 등장하여 핵을 투하한다. 다만 미익의 외형이 H 모양으로 바뀌어있다.
9.2.7. 시드 마이어의 문명
- 문명 5에선 원자폭탄을 투하할 때 등장한다. 핵미사일이 나오기 전의 유일한 핵 투발수단으로, 유닛 이름은 원자폭탄이지만 거점 도시에서 B-29가 발진해 핵 폭격을 하는 애니메이션이 쓰인다. 엄연히 소모성 유닛인 원자폭탄의 사용 연출일 뿐이므로 돌아온 B-29에 재래식 폭탄을 실어 재사용하거나 할 수는 없다. 오직 추가로 핵무장을 진행해야만 다시 뜰 수 있다. 다만 다음 시대의 핵미사일이 도시 외에 미사일 순양함과 핵잠수함에 탑재 가능한 것과 달리, 원자폭탄은 도시를 제외하면 오직 항공모함에만 탑재 가능하다. B-29를 발진시킬 수 있는 항공모함이 있을 리 없지만 어쨌든 핵잠수함에 탑재시키는 것보다야 현실적이긴 하다.
9.2.8. 블룬스 TD 6
원숭이 에이스의 2번째 경로 중 하나로 등장, 그라운드 제로라는 핵투발이 연상되는 필드 광역기를 갖고 있다. 여기서 한단계 더 업그레이드하면 차르 봄바를 투하할 수 있다.9.2.9. 배틀스테이션 시리즈
연합군 중폭격기로 등장한다.9.2.10. 워 썬더
미국 4랭크 폭격기로 등장한다. 최초 게임에 추가되던 시점에는 미쳐돌아가는 폭장과 떡칠된 방어기총으로 진정한 공중요새가 뭔지 보여주었으나 기관포 강화, 기관총 강화, 폭격기들의 내구성 전체적 하락 등 계속되는 폭격기 죽이기 정책으로 인해 20 mm급을 초과하는 기관포 세례를 받고 몇 초 사이에 불덩어리로 화하는 신세가 되어, 배다른 자매인 Tu-4와 함께 괜히 수리비만 눈 돌아가게 비싼 뒷방 퇴물로 전락해 버렸다.9.2.11. 히어로즈 인 더 스카이
미국 폭격기 트리 92레벨 , 102레벨 , 120레벨 기체로 각각 등장한다. His 온라인 내에서 실제 방어무장이 제대로 구현된 몇 안되는 기체다.9.3. 만화 및 애니메이션
9.3.1. 반딧불이의 묘(애니메이션)
9.3.2. 전생했더니 슬라임이었던 건에 대하여 (애니메이션)
시작 장면에 B-29 폭격기 편대가 대규모 무차별 융단폭격을 가하며 등장한다.[81]9.3.3.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TVA
등장인물인 카누카 클랜시의 할아버지가 B-29 폭격기의 기장인 미군 장교로서 6.25 전쟁에 참전하였다가 중국군의 남하를 저지하는 출격에서 전사하였다.9.3.4. 철인 28호
모든 거대로봇물의 시조인 철인 28호도 B-29에서 따온 명칭이다. 사실 이 철인28호는 패색이 짙어지던 전쟁 말기에 B-29를 요격하기 위한 병기로 만들었다고 한다.9.3.5. 전쟁동화
일본 본토 공습을 메인으로 한 작품이라 B-29가 시도때도없이 나온다.9.3.6. 뒤의 얼굴은 누우구?
역시나 후반부에 하늘을 메울 정도로 다수가 나타나서 도시를 폭격한다. 결국 주인공의 가족은 이 폭격으로 몰살당한다.9.4. 모형
9.4.1. 후지미
1/144 스케일로 발매한게 전부.[82] 그런데 재현한 모습이 에놀라 게이와 도쿄 대공습이란 게 아이러니. B-24나 B-25도 존재한다.9.4.2. 아카데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폭격 기체(애놀라 게이와 박스카)를 재현한 1/72 스케일. 의외로 일본에서 아주 대박으로(!) 팔렸다고 한다. 기본형도 매상은 나쁘지 않았지만 핵폭격기는 특히 대박이었다고.[83] 미제 모노그람 1/48 빅스케일 B-29 역시 핵폭격기 마킹이 제일 인기 좋았다고. 그리고 레딧엔 어느 양덕이 이 키트를 이용해 Tu-4로 재현한 게시물이 있다.10. 기타
- B-29 생산공장이 있던 도시 중 하나가 바로 그 유명한 오마하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떨어트린 에놀라 게이도, 박스카도 모두 오마하에서 생산되었다.
- 일본을 폭격한 기체이자, 한국전쟁에서도 쓰였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유명한 편이다. 나이 80을 넘어 90을 바라보는 노인 분들 중 '삐이구', '삐이십구'라는 이름으로 기억하고 계시는 분들이 종종 있다. 심지어 이름을 따온 과자도 있었다.
- 넉넉한 폭장량 덕에 작은 비행기를 탑재할 수도 있었다. 이 덕에 대전 이후 척 예거, 스캇 크로스필드 등으로 대표되는 로켓 추진 초음속 비행 연구는 물론이고 기생 전투기 연구에도 애용되었다. 물론 한국전 이후 점점 퇴역하면서 B-52로 대체되었으나 B-52는 의외로 가늘기 때문에 결국 날개 한 쪽에 비행기를 매달고 불균형한 상태로 날아야 했고 여러 엔지니어와 테스트 파일럿들은 B-29 다시 불러오라고 성화를 댔다고 한다.
- 기생 전투기 일화 관련해서 더글러스사의 로켓 추진 비행기 프로토타입을 하부에 장착하고 운반하던 일이 있었는데, 엔진문제로 악명높은 B-29 아니랄까봐 4개의 엔진중 3개가 폭발해 동체에도 파편을 뒤집어 쓴 일이 생겼었다고 한다. 다행히도 조종사와 부조종사의 노력으로 1개의 엔진으로 무사히 착륙하는데 성공하였는데 이때 부조종사는 훗날 달에 첫 발을 디딘 닐 암스트롱이였다고 한다.
-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 군정 당시 독도 폭격 사건에 동원된 기체이기도 하다. 당시 미군은 독도를 폭격 연습장으로 사용하였는데, 폭격 예정을 사전에 고지하지 않아 독도에서 어업을 하던 한국인이 백 명 가까이 희생된 사건이 있었으며 미군의 상습적인 독도 폭격이 독도의 강치 멸종에 일조했다고 보는 저작도 있다. 다만 강치는 일제강점기에 멸종하지 않았고 1950~60년대까지 상당한 개체가 남아있었기에 독도 폭격으로 인한 강치 멸종 운운은 그냥 그런 주장이 있구나 정도로 받아들이면 된다.
- 보잉이 이 폭격기를 개발할 당시, B-29에 랜딩 기어를 만드는데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당시엔 B-29의 무게를 견딜만한 타이어와 랜딩 기어가 없었기 때문이였다.[84] 안 그래도 엔진 문제 때문에 골치 아픈 보잉은 머리를 감싸메던 도중, 이를 간단하게 해결하였는데 의외로 기존 B-17 랜딩 기어가 꽤나 여유있게 설계되어 B-29의 이륙중량을 버틸수 있다는 결과가 나와서 이를 그냥 바퀴 한짝 더 달아 조금 보강해 붙이는 걸로 해결하였다. 나름 개발 시간도 아끼며 새로 부품 공장을 만들 필요도 없이 B-17의 부품도 재활용하고 정비사나 메뉴얼 그대로 쓸수 있었다는게 큰 장점. 다만 엔진교체로 이륙중량이 크게 늘어난 B-50에선 랜딩 기어를 다시 만들어야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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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발기 | 727 | - | |
4발기 | 707 | 747(-100 · -200 · SP · -300 · -400 · -8 · 특수목적용) | |
초창기 모델 | 247 · 307 · 314 · 377 · 367-80 | ||
개발 중단 / 개발 중 | 2707 · 7J7 · 소닉크루저 · NMA | ||
군용기 | |||
훈련기 | T-7 | ||
전투기 | P-26 · F-15E/EX · F/A-18E/F | ||
전자전기 | EA-18G | ||
폭격기 | B-9 · B-17 · B-29 · B-47 · B-52 | ||
수송기 | C-135 · C-137 · VC-137 · VC-25 · C-32 · C-17 · C-40 | ||
조기경보기 / 지휘관제기 | OC-135 · RC-135 · WC-135 · EC-135 · E-3 · E-6 · E-8 · E-767 · E-4 · E-7 | ||
공중급유기 | KC-97 · KC-135 · KC-767 · KC-46 | ||
대잠초계기 | P-8 | ||
무인기 | MQ-25 ·MQ-28 | ||
헬리콥터 | CH-46 · CH-47 · A/M/EH-6 · AH-64D/E | ||
개발 중단 / 컨셉 / 실험기 | YC-14 · X-32 · X-48 · YAL-1 · B-1R · F-15SE · 팬텀 레이 | ||
인수 합병 및 공동 개발 | |||
맥도넬 더글라스의 항공기 · F-22 · B-1 · V-22 · 디파이언트 X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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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의 소련군 항공병기 | |||||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0px -11px" | 겨울전쟁 및 소련-일본 국경분쟁 및 제2차 세계 대전 소련군의 항공기 | ||||
전투기 | 복엽 전투기 | <colbgcolor=#fefefe,#191919>I-15, I-15bis, I-153 | |||
전투기 | I-16 이삭, Yak-1, Yak-7, Yak-9, Yak-3, MiG-1, MiG-3, LaGG-3, La-5, La-7, La-9A, La-11A, Pe-3 | ||||
폭격기 | 경폭격기, 공격기 | Po-2, Il-2, Il-10, Su-2, Su-6, Ar-2, Pe-2, SB, Yak-2, Yak-4 | |||
中폭격기 | DB-3, Tu-2, Yer-2 | ||||
重폭격기 | TB-3, Pe-8, Tu-4A, Fw 200A, Do 215m | ||||
랜드리스 항공기 | 미국 지원 항공기 | P-40C, P-40E-1, P-39 '코브라', P-63 킹코브라, P-47, P-51m, A-20, B-25, B-24, C-47, T-6, GST 카탈리나 | |||
영국 지원 항공기 | 허리케인, 스핏파이어, 호커 타이푼m, 햄든, 스털링, 모스키토 | ||||
공중항공모함 | 즈베노 프로젝트 | ||||
수상기 | Ar 196 | ||||
노획 기체 | 나카지마 I-97, Fw 58, Fw 190D, Bf 109G, Me 262, Fi 156, B-17, B-29, Ba 349, Ar 196, Si 204, Me 410 B-2/U4, Ju 352A | ||||
기타 항공기 및 시제기 | I-15GK, I-153GK, I-15bis TK, I-153TKm, I-15bis DM, I-153DM, I-153UD, I-153P, UTI-26, TB-6, I-180, I-185, Il-20, LaGG-1, Yak-15A, MiG-9A,La-15, La-152, Su-9(1946), TIS MA, BI | ||||
※ 무기대여법으로 공여받은 기체는 소련식 표기로 기재하였다. 윗첨자m:소수 도입, 윗첨자A: 전후 도입 | }}} {{{#!wiki style="margin-top: -30px; margin-bottom: -10px; letter-spacing: -0.9px; font-size: 0.82em" | ※둘러보기 : 러시아·소련군의 운용장비 | 항공병기 | }}} }}}}}} |
냉전기 미합중국 공군 항공기 둘러보기 | |||||
{{{#!wiki style="margin:-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colbgcolor=#005a99> 미합중국 공군 United States Air Force, USAF | ||||
지상 공격기 | A-1, OV-10, F-105, | ||||
제공 전투기 | <colbgcolor=#005a99> 1세대 | F-80C, F-84, F-86A/F, F-86E-6-CAN | |||
2세대 | F-100A/C/D, F-101A/B/C/D, F-102A/B/C, F-104A/C, F-105B/C/D, F-106A/B, | ||||
3세대 | F-4C/D/E, F-5A/B/E, F-111A | ||||
4세대 | F-15A/B/C/D, F-16A/B/C/D | ||||
5세대 | ATF, | ||||
폭격기 | B-26, B-29, B-36, B-45, B-47, B-50, B-57, B-58, B-66, | ||||
수송기 | 전술 수송기 | C-12, C-23, C-54, C-119, C-123, C-130 | |||
전략 수송기 | C-124, C-141A/B, C-5A/B, C-17A | ||||
공중급유기 | KC-135A/B/D, KC-10A | ||||
다목적기 | C-130 | ||||
훈련기 | T-33, T-37, T-38 | ||||
정찰기 | RB-57D, U-2S, SR-71A, RF-4C, RF-16, RC-135, RB-52B/C | ||||
전자전기 | EB-66, EF-111 | ||||
조기경보기 | E-3 | ||||
공중지휘기 | E-4, EC-135 | ||||
회전익기 | UH-19 | ||||
실험기 | VZ-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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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진은 후술될 'FIFI'(일련번호 44-62070) 기체다.[2] Tu-95는 적진이 아닌 시험 목적으로 투하한 것이다.[3] B-29를 운용하는 조종사, 승무원 및 정비장병들도 입문단계부터 전용 양성과정을 두고 육성했다고 한다.[4] B-29가 일본 핵폭격으로 워낙 유명해서 잊기 쉽지만, B-29가 일본 본토에 뿌린 재래식 폭탄은 총 14만 7천 톤이었다. 지옥이란 표현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당시 이 폭격기는 일본인들이 저승사자처럼 두려워하던 존재였으며, A6M이 일본 군국주의의 폭주를 상징한다면, B-29는 그 종말을 상징했다고 할 정도로 많은 의미를 갖던 기체였다.[5] 좌/우측(동체 후방 하부 포탑 담당), 상부(동체 후방 상부 포탑 담당), 꼬리 방어사수, 좌측 혹은 우측에 예비사수 한명[6] 동체 전방 상하부 포탑 담당+폭격수[7] 유사시 스위치 하나 당기는거로 상부 방어사수에게 동체 전방의 상부 포탑의 제어권을 줄수 있다. 동체 하부도 동일. 스위치 한번 당기면 좌측 혹은 우측의 예비 방어사수에게 제어권이 넘어간다. 이 모든게 가능했던게 당시로써는 고성능의 사격제어 시스템 덕분. 꼬리를 제외한 모든 사수에게 하나가 쥐어졌다.[8] 모델에 따라 기수 상단에 위치한 포탑은 2연장이기도 하다.[9] 초기형은 20mm AN/M2 기관포도 1문을 추가로 장착하였으나, 이마저도 운용될때 제거되었다.[10] 핵 폭격기에서는 꼬리 포탑을 제외하고 포탑이 모두 제거되었다.[11] 당시 현역이던 B-25가 1.3톤, B-17이 약 7.8톤의 폭장량을 가졌던 걸 감안하면 상당히 많은 폭장량이다.[12] 일명 "볼 터렛(Ball Turret)". 대부분 동체 중앙에 달린다.[13] 영하의 기온에 차를 세워두고 해뜨기 전 새벽 즈음 차 안에 앉으면 금속이 내뿜는 냉기가 얼마나 차가운지 알 수 있다. 그나마 자동차는 이런저런 내장재가 달라붙어있지만 이건 그런 것도 없이 차가운 중기관총과 사수석 뿐이다. 2차대전 미 육군 항공대 폭격기 승무원들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 '마스터스 오브 디 에어'에서도 동체 하부 볼터렛 사수가 추워 죽겠다며 꺼내달라는 장면이 나온다.[14] 말 그대로 "비행기 조종사" 하면 떠올리는 적당한 셔츠에 긴 바지.[15] 당시엔 요격기의 기총과 대공포 등이 폭격기에 실질적인 위협을 가했기 때문에 이런 방탄 처리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다. B-17의 경우 B-29보다 방탄판이 훨씬 많았으며 포좌 사수들은 방탄복과 헬멧을 착용하고 싸웠다. 허나 B-29부터는 요격기와 대공포가 폭격기에 큰 위협을 가하지 못하기 시작했다. B-29 기체 자체가 내탄성이 우수한데다, B-29가 3만 피트(약 9,100m) 고도로 높게 날아다녔고, 시속 354마일(시속 570km)라는 아주 빠른 속도로 비행했으며, 일본의 대공 방어 능력이 열악했기 때문이다(당대 일본 제식 전투기 중 B-29의 순항고도까지 올라올 수 있는 게 히엔 하나 뿐이었다). 손실된 414대의 B-29 중 일본군에게 격추된 것은 147대에 불과했을 정도다. 나머지 손실은 고장이나 사고가 이유였다. 때문에 B-29는 설계부터 방탄판을 적게 실었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그나마도 떼어내고 그만큼 폭탄을 더 싣고 이륙했다.[16] 리모콘 포탑을 조작하는 사수들과 추가의 통신병이 이 부분에 탑승하며, 조작 부분 뒤에는 승무원들을 위한 휴식용 침대까지 달려 있었다. 다른 폭격기나 심지어 B-29보단 좀 작더라도 엄연한 대형기인 B-17조차 상상도 못할 부분.[17] M2 브라우닝 중기관총. 즉 포탑이 아니라 총탑이라 부를 수도 있다.[18] 다만 이런 파이프로 연결되는 여압캐빈은 B-36 이후 폭격기엔 적용이 되진 않았다. 폭격기에 기총 사수들이 없어져 후미에 승무원들을 태울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19] 컴퓨터란 이름 자체가 계산하는 기계를 의미하고 본래의 개발 목적을 안다면 당연한 것이긴 하다. 대전 중반을 넘어서면서 도크에 들어갔다 나온 미군함들 역시 레이더+사격통제장치와 연동되는 전동식 대공포 마운트를 채용했다. 나중에 그걸 공여받은 대한민국 해군은 쓸 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20] 일본 전투기들은 낮에는 폭격기 전방에서, 밤에는 후방에서 공격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21] 이런 방식의 허리 기총좌들을 가진 미군 폭격기들의 후기 생산형들의 경우 총안구를 뚫은 방풍창으로 이 구멍을 막는 개선이 이뤄졌지만 총안구나 여타 틈새로 외부 공기가 들어왔으므로 바람만 좀 덜 들이친다 정도로 그쳤다. 사실 볼 터렛이나 상부 터렛도 움직여야 하는 구조 때문에 틈새 사이로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건 마찬가지였다.[22] 터보차저와 슈퍼차저를 합쳐 만든 이중 과급기.[23] 비록 시대가 지나 제트기의 시대가 오면서 이런 형태의 과급기들은 필요가 없게 되었지만 이 고속으로 회전하는 터빈 만드는데 일가견이 생긴 제네럴 일렉트릭은 제트엔진 터빈을 만드는 일에 활용하며 지금도 꾸준히 제트엔진을 만들고 있다.[24] 독일의 He 177은 엔진의 부적절한 설계로 인하여 뜨거운 배기가스가 빠져나오는 곳으로 윤활유가 떨어져 화재의 위험이 매우 컸고 이후 아예 엔진을 교체해서 이 문제를 완화시키지만 근본적인 냉각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다. 전후 영국의 롤스로이스 기술진이 이 설계를 보고 경악해서 다임러-벤츠에서 설계를 이렇게 했을 리가 없다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25] 당시 B-29는 전시 비상 출력을 2분 정도 사용 할수 있었는데, 이걸 사용하면 안 그래도 좋지 못한 엔진을 더 무리하게 돌린 거였으니 정비반 입장에선 훨씬 끔찍한 악몽이였을 것이다.[26] 트윈차저는 터보차저 배관과 인터쿨러까지 달아야 하기에 엔진 나셀이나 배기구 설계를 완전히 바꿔야 했다. P-47 동체가 정면에서 보면 아래가 좀 튀어 나와 있고 B-29 자체도 엔진 나셀이 둥근 B-17과 다르게 아래쪽에 툭 튀어 나와 있는 계란형이 되어 있는 까닭이다. 또한 트윈차저를 달은 P-38은 이런 이유 때문에 후기형까지 V형 앨리슨 엔진을 고집하게 된다.[27] 사실 기체 설계를 거기 맞춰서 고치면 될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설계 변경을 하여 R-2800을 넣은다 한들 거기에 따라오는 이득이 없었거나 오히려 더 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성능이나 수급문제를 떠나 애초에 결전병기의 성격 + 신기술 투입의 예외라고 봐야 한다. 실제로 미국이 전시 체제에 돌입하고 국방비가 대폭 증가하면서 전시 특수로 탄생한 신무기 체계의 연구 개발, 양산에 성과가 컸지만 한편으로는 기존의 체계도 대거 활용하여 비용절감과 조기생산을 위한 노력도 어마했다.[28] 아마 보잉도 훗날 더블 와스프의 개량형인 와스프 메이저를 장착한 B-50을 제작한걸 생각하면 생각을 안 했던건 아닌데 후술할 XB-39에서 나오듯이 그냥 처음에 비슷한 공랭인 R-2800 대신 완전히 다른 수랭 앨리슨 V-3420을 사용하는 게 낫지 않겠나 하고 결론 짓게 된거라 그렇게 된 것일 수도 있다.[29] 보잉은 어떻게든 엔진을 바꿔 볼려고 이후 R-4360 와스프 메이저를 탑재한 B-29를 XB-44란 이름으로 실험하게 되고 이는 꽤나 성공적이여서 B-29D, B-50라는 이름으로 채용이 된다.[30] 라이트 듀플렉스 사이클론 엔진은 B-32 또한 애먹이게 만들기도 했으며 옆동네 록히드 컨스텔레이션 시리즈 또한 과열로 고생시켜먹었다.[31] 물론 주무장으로는 일단 20 mm 기관포를 달아주기는 했다.[32] 안에 여압이 되는 튼튼한 캐빈이 있어서 이게 맷집을 좋게 만들었다는 소리도 있다.[33] 심지어 해당 폭격기 42-6259는 44년말에 착륙 사고로 손상되었지만, 그 뒤로도 48년까지 테스트베드로 마르고 닳도록 사용되었다.[34] 그래도 동시에 개발되던 B-32보다는 일찍 투입되었다.[35] 진주만 공습의 치욕을 갚아주지 못한채 종전을 맞을 경우, 정치적으로 큰 역풍을 맞을 수밖에 없다.[36]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사람이다.[37] 다만 시간이 지난 뒤 1950년, 보유중인 폭격기의 노후화와 신규 폭격기의 개발 지연으로 당장 핵 폭격기가 필요했던 영국 공군이 1950년 B-29를 '워싱턴 B.1 (Washington B.1)' 이라는 제식명으로 87기를 도입했다. 그러나 불과 2년 만에 캔버라 폭격기가 등장했고, 사고로 손실된 기체나 호주로 보내진 2기를 제외한 전량이 1952년 미 공군으로 반환되면서, 남아있는 워싱턴 폭격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38] 항공기가 엄청나게 발달한 현재도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가는 항공편은 사실상 없다.[39] 라이프, WORLD WAR II B-29의 일본 폭격, p. 54.[40] 에디 앨런(Eddie Allen)은 보잉의 유명 테스트 파일럿이자 설계자이다. 그는 B-29 설계와 제작에 직접 관여하였고 무엇보다 원형 제1호기로 B-29 처녀비행을 성공시킨 사람이다. 에디 앨런은 1943년 2월 원형 제2호기 시험비행을 하던 중 엔진 화재로 인한 추락으로 사망하였다. 본 기체는 그를 기리기 위해 보잉 직원들이 돈을 모금하여 미 육군항공대에 기증한 기체다. 총 24회의 전투임무를 수행하였으며 1945년 전투비행 중 심하게 손상되어 티니안 기지로 귀환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그 뒤로 다시 이륙하지 못했다. 티니안 섬에는 에디 앨런 기체의 잔해가 남아있다.[41] 미군 최고의 에이스 리처드 봉 같은 경우 자신의 애기를 욱일기 킬마크로 도배하고 다녔다. 유럽전선에서 활약한 개비 가브레스키 같은 경우에는 하켄크로이츠 수집가다.[42] 일본 상공은 편서풍중에서도 가장 강하고 변화가 심하다는 제트기류가 발생하는 지역이다. 그 당시 일본에서도 극소수의 기상 전문가들만이 알고 있었고 미국 과학계는 제트기류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다.[43] 그래서 커티스 르메이는 이전의 조준 폭격 전술에 대해 강한 비판을 가하면서도, 전임 지휘관이자 조준 폭격 작전을 주장하고 이를 시행한 인물인 헤이우드 핸셀 소장 본인에겐 비판을 가하지 않았다. 르메이는 핸셀의 능력 문제가 아니라 전술 자체의 한계라는 것을 인식했던 것이다.[44] 초창기 시행착오는 제트기류 외에도, 하늘을 확실히 덮는 수준의 B-29 물량 확보 부족과 GPS의 부재로 선도기의 충분한 선도없이는 폭격 타겟팅이 불가능한 미 육군 항공대의 초장거리 폭격작전 경험부족, 레이더 기능의 강화, 이오지마의 확보 이후 뜨게 된 저고도 호위기인 P-51의 투입가능등이 영향을 미쳤다.[45] 인재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무려 1926년에 '야기-우다 안테나'라는 선구적인 지향성 안테나 기술이 발명되었으나, 일본군이 적에게 전파를 쏘는 건 자기 위치를 적에게 알리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후속 연구를 막아버렸다. 그러나 문제는 개발자인 야기 교수가 영국에도 특허를 냈다는 점이었고, 연합국은 이 기술의 진가를 진작 알아보고 2차 세계대전 내내 써먹었다. 때문에 레이더 관련 기술에서 연합국에 비해 크게 뒤쳐지게 된다.[46] 당시 목격한 미국 조종사의 말로는 무서운 기세로 올라오는가 싶더니 에프킬라 맞은 모기 마냥 갑자기 연료 부족으로 뚝하고 떨어져 버렸다고 한다. 그만큼 제로센 자체가 문제가 많았었다.[47] 일본 육군의 기체 중 이 고도에서 전투가 가능한 기체는 히엔 뿐이었다. (太平洋戦争研究会 2001, pp. 62-63) Ki-84 하야테가 더 고성능이지 않은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카지마 호마레에도 터보슈퍼차저 같은 설비는 없기 때문에 고고도 성능에는 특출난 구석이 없다. 2단 3속 과급기를 장비한 고고도 배리에이션 NK9A가 있었지만 A라는 기호에서 보이듯 가장 먼저 개발된 버전임에도 프로토타입을 벗어나지 못했다.[48] 나중에 5식전으로 기종을 전환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투입될 기회는 없었다고 한다.[49] B-29는 유럽 전선에 배치된 B-17, B-24보다 고성능인데다가 B-29가 본격적으로 일본을 공습하기 시작할 무렵이면 미군의 폭격 교리 자체도 완성단계에 돌입한 상황이었다. B-29가 본격적으로 일본을 두들기기 시작하는 게 1944년 중반쯤인데 이 무렵이면 유럽전선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미 8공군의 월간 소티 대비 손실률은 1%까지 떨어지게 된다.1943년에는 심할 때는 6.6%까지도 기록했다. 하물며 독일보다 상황이 더 떨어지는 일본이다. 1% 손실이라 독일군이 성과를 많이 못냈을 것 같지만 전쟁기간 동안 독일군은 랭커스터와 B17, 24에게 두들겨 맞고 머스탱에게 농락당하면서도 미 육군항공대 폭격기 9949대 영국 왕립 공군 폭격기 11965대, 전투기의 경우 영국군 10045기, 미군 8045기를 격추했다.[50] 신이 계신 나라는 사라지지 않는다(망하지 않는다)' 라는 뜻인데, 결과는 다들 아는데로 핵폭탄을 맞았다.[51] 현재도 주일미군의 기지로 사용되고 있다.[52] 출처: 백선엽, '군과 나'.[53] 보통문과 초가집 1채.[54] 사실 이 부분은 제2차 세계대전기의 일본 본토 공습 때도 마찬가지였다. 도쿄 대공습 문서 참고.[55] 다만 이러한 야간 도색은 이미 1945년 경부터 일부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에서 주간 폭격 피해가 워낙 컸기 때문에 야간폭격으로 전환하면서 이러한 도색이 한국전쟁 당시 B-29에서 더 많이 보인다.[56]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안잉도 이 기체가 투하한 소이탄에 의하여 사망했다.[57] 2020년 개봉한 중국 영화 금강천을 보면, 주간에는 B-26이, 야간에는 B-29가 중공군 진지를 공습하여 무수한 피해를 입히는 장면이 나온다.[58] B-17 또한 60년대 까지 이용되다가 엔진 부품 수급 문제로 퇴역하게 된다.[59] B-52 폭격기도 미국 외에 전시된 것은 영국과 한국 뿐이다. 사실 베트남도 한 대가 있긴 한데 베트남 전쟁때 격추당한 잔해다.[60] 또한, 1편에서 악역으로 등장하는 루카 군단의 우주선 내부 씬은 당시에도 B-29와 함께 전시되었고 지금도 같이 전시중인 C-124 내부에서 촬영되었다.[61] 본문에서 언급된 조종석에서 우뢰매를 촬영했던 심형래와 천은경에 따르면 크기에 비해 실내가 비좁아서 고생했다고 하는데 이 문제 때문인 듯 하다. 반면에 내부가 비교적 넓은 VC-54, C-123, C-124는 전시공간으로 쓰이고 있다.[62] 북극으로 비행하고 귀환하라는 임무인데, 일급 기밀 임무로 분류돼서인지 별다른 사항은 존재하지 않는다.[63] 영상을 보면 지상 활주가 가능할 정도까지 복원이 완료되어 있었다.[64] 팻맨과 리틀보이와 씬맨. 후술할 내용이지만, 씬맨은 공기 역학적으로 너무 불안정하게 투하되는 문제가 있어서 개발 도중 취소 되었다.[65] 그로브스가 괜히 랭커스터를 제안한게 아닌게 그 당시엔 B-29가 개발중에다가 워낙 신기술이 들어가 불안정하고 엔진 문제 때문에 크게 지연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훈련때라도 랭커스터를 사용하자고 하였으나 아놀드 장군은 B-29에 들어간 돈이 많다며 또 다시 거절했다.[66] 사실 미국의 자존심 문제도 있었을거란 추측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보자면, 랭커스터가 최대 고도가 B-29의 통상 작전 고도인 9,000m 보다 훨신 낮은 수준인 6,500m 밖에 안되었고, 최대속도도 B-29에 비하면 100Km 이상 낮았기에 핵폭탄 투하하고 급강하해서 여파를 피하려고 해도 속도와 고도가 낮아 휘말릴 위험성이 클거라는 나름 현실성 있는 이유도 있었다. 게다가 랭커스터는 만재중량이 되면 최고 고도와 속도가 훨신 낮아졌다고 한다.[67] 이는 폭격후 폭격기가 재빨리 폭탄창을 닫고 급강하하여 여파에 벋어날수 있게 위한 조치였다.[68] 1943년 라이트 공장에서 나오자 마자 개수되었으며 5.2m짜리 긴 길이의 씬맨을 운송하기 위해 2개의 폭탄창 중간에 막힌 부분 없이 아에 일체형 폭탄창으로 개조했다는 차이점이 있다.[69] B-29의 폭탄창에는 연료탱크와 여압을 위한 산소탱크가 위치해 있었다. 폭탄이 분리되 하나라도 건드려서 폭발이라도 했으면 대참사가 벌어졌었을것이다.[70] 안 그래도 투하시 불안정하다는 문제를 지니고 있었던 씬맨은 이 사건뒤로 아예 폐기된다.[71] 42-6259은 사고 뒤에 라이트공장으로 운송되어 수리되어 다시 헌역으로 복귀해 팻맨과 리틀보이같은 원자폭탄들을 나르는데에도 사용되었다.[72] 일본에선 선전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1톤폭탄이라고 불렸다. 10,000파운드는 약 5톤 정도 되서 천지차이다.[73] 공장에서 갓 나온상태는 노란색이였다고 하며, 폭격기에 장착하기 전, 야전에 올리브색으로 칠했다고 한다.[74] 호박폭탄은 훈련탄이긴 했어도 나름 일본 공장같은 주요 거점을 노려 폭격했고, 그래도 폭약이 들어가 있는 5톤짜리 폭탄 아니랄까봐, 주변 일대를 날려버려서 의외로 효과적이였다고 한다.[75] 초반부 B-29가 소련에서 발생한 낙진을 검출했다는 언급이 나오며, 후반부 트리니티 실험 준비 단계에서도 B-29가 실제 원폭을 투하할 때 폭발지점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어야 안전한지를 실험하기 위해 실험장 주변에 조명을 밝혀야 한다는 주장에 자칫하면 폭격기가 폭발 여파에 휘말릴 수 있어 위험하다고 오펜하이머가 반대 주장을 하는 장면이 있다.[76] 체공중 폭탄을 1발만 투하(게임 시스템상 B-29를 포함한 폭격기 전부 다 폭탄 투하 이후 연료가 0으로 바뀌며 공항으로 돌아온다. 공항이 없는 경우 그자리에서 폭발한다.)할 수 있으며, 이후에는 강제로 공항으로 복귀한다.[77] 2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 독일과 함께 핵폭탄 포지션을 겸하지만 데미지는 5000이 낮은 20000이며, 범위도 상기한 둘(V2와 프랑스 폭탄은 45)과 달리 35로 다소 작다. 그러나 저러나 웬만한 건물과 유닛은 다 부서진다.[78] BR 6.0 이상부터 나온다. 스폰 포인트 2500점 이상을 모아야 사용 가능하며, 이륙 후 신관을 작동시켜 투하하면 된다. 다만 무적은 아니라서 적군이나 아군한테 공격당해 추락하기도 한다.[79] 이는 나중에 마호로매틱 오프닝 장면에서도 다시 한 번 오마주된다. 마호로가 날아오는 미사일을 피하며 박살내는 장면이다. 안노 히데아키는 이 만화에 나오는 전함들의 작화 역시 담당했다.[80] 안노 히데아키는 에반게리온 시리즈로 유명 감독이 된 이후에도 한 번 더 "비행기가 나오는 장면은 내가 그리고 싶습니다!" 라며 미야자키 하야오를 찾아갔다가 난데없이 덜컥 목소리 주연을 맡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바람이분다다.[81] 이는 그 당시 시대고증에 맞는 장면이기도 한데, 동북아 상공에 부는 제트기류 때문에 정밀폭격을 시도할 때마다 번번이 맞추지 못했기 때문에, 민간인 보호고 나발이고 다 집어치우고 아예 온 도시를 폭탄 스팸질로 뒤덮어 갈아엎는 무식한 방법으로 대응해야만 했었다. 참고로, 그걸 하도록 한건 다름아닌 커티스 르메이였다.[82] 보통 일반적으로 항공기 프라모델의 절대강자로 하세가와가 꼽힌다. 게다가 발매 당시 후지미는 비싼 가격에 그닥 좋지 않은 품질로 악명이 높았었다. 비슷한 경우로 엔터프라이즈(CV-6)가 일본에서는 타미야에서 워터라인 시리즈로 발매한 게 전부인 것을 들 수 있다. 사실 타미야는 조립성도 품질도 모두 좋은 편이다. 가격이 조금 비싸서 문제지.. 반면 후지미는 좀 저렴한 편이나 지느러미도 많고 조립성이 떨어진다.[83] 각 기체, 에놀라 게이와 박스카의 노즈아트와 테일마킹, 그리고 1/72 동 스케일의 원자폭탄 리틀 보이와 팻 맨이 포함된 구성이다.#[84] 현재에도 기술적으론 A380 같은 항공기보다 몇배나 큰 항공기를 만들순 있지만 못 만드는 이유가 이륙중량과 속도, 착륙시 충격에 버틸 랜딩 기어를 만들기 어렵기 때문이다.[85] 폭격기로 루프기동, 스파이럴 다이브, 급강하, 임멜만 턴, 롤, 수평급선회, 배면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