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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군의 역사 |
미군의 역사를 정리한 문서이다.
2. 건군
시작은 초라하였다.[2] 미국 독립전쟁 당시에 13개 주의 민병대들을 중심으로 대륙군(Continental Army)이라는 이름으로 창설되었는데, 원래 영국군 식민지 부대를 모체로 했던만큼 규모가 작은 군대였고 민병대 출신들도 섞여 있었던 만큼 전열보병으로서의 훈련 강도가 낮아서 본토에서 온 진짜배기 전열보병들인 레드코트에게는 깨지며 연전연패할 수밖에 없었다. 장비들은 대부분 영국군에게 구입한 브라운 베스 머스킷등의 장비들이거나 신대륙에 다수 풀려있던 구형 프랑스제 샤를빌 머스킷이나 켄터키 롱 라이플 정도였다. 이후 프랑스와 러시아 등 다른 나라에서 자금 지원을 해 주고 프로이센 왕국에서 온 장교들의 도움으로 규모가 불어나며 그럭저럭 군대 꼴이 잡힌 후 각 주의 의용군(minutemen), 그리고 해군을 동원해준 프랑스군과 연합하여 간신히 승리하였다.이후로도 신생국의 약소 군대라는 점은 그대로라서 1812년 미영전쟁이 벌어지자 영국군에 의해서 워싱턴 D.C.가 함락되어 백악관이 불타버린 전력이 있다. 콜 오브 듀티: 모던 워페어 2에서 워싱턴 D.C.를 배경으로 하는 미션에 나왔던 장면은 이미 미국 역사에서 존재하는 흑역사이다.
의외로 초창기 별로 볼 일 없던 시절 바르바리 해적을 토벌하고자 북아프리카로 원정을 간적도 있다. 어찌 보면 별 볼 일이 없던 시절이라 원정을 갈 수밖에 없었다. 해적들은 영국 선박을 건드렸다간 세계 최강 영국 해군이 출동하므로 뒷감당이 무서워서 건드리지 않았지만 신생국인 데다 타 대륙이 본거지인 미국 해군이 출동하진 않을 거라 믿고 미국 선박은 맘놓고 털었기 때문이다. 다른 열강들은 배가 털리면 그냥 몸값을 내주고 선원들을 돌려받곤 했지만 신생국에 그런 재정 여유도 없었고.
그러나 그 후 멕시코를 침략해 관광보낸 뒤 대규모 영토를 뜯어냈고 프랑스에게 루이지애나주[3], 러시아에서는 알래스카를 싼 값에 사들여 거대한 강대국이 되었으며, 남북 전쟁이 벌어지자 해군으로 남부의 통상로를 모조리 틀어쥐고 육군은 대규모 징집병을 동원, 철도로 급파해서 남군의 공격을 번번히 저지시키면서 승리를 거머쥔다.
이후 아메리카 대륙에 어떠한 나라든지 간에 간섭을 거부하는 먼로 독트린을 발표하고[4] 아시아-태평양으로 진출해 하와이와 스페인령 필리핀을 병합하고 청나라, 일본, 조선에도 간섭을 행했다.
심지어는 영국의 태평양 진출로를 막기 위해 캐나다 서부 해안선을 모조리 점령하려고도 했다. 이렇게 쭉 불간섭주의를 지키는 것은 제1차 세계 대전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미국의 연방정부가 가진 군대는 미국의 독립과정에서부터 영토확장, 세계대전 참전등을 통해 건국 이후 약 300년 동안의 역사동안 미국 내의 내전이건 미국 바깥에서의 분쟁이건 군사작전을 수행하지 않은 기간이 미국 역사 통틀어 10여년이 될까말까할 정도로 전쟁경험을 실시간으로 축적하고 있는 무지막지한 강군이 되었다.
3. 세계 대전
[5]사실 1차 세계대전까지의 미군은 지금의 지구경찰을 자처하는 미군같은 강군은 아니었다. 먼로 독트린 때문에 아메리카 반도에서만 놀다보니 나름 우수한 훈련을 거친 유럽열강의 선진 군사력과는 거리가 멀었고 상대할 적이라고는 추워서 사람 살기도 힘든곳인 캐나다나 나라꼴이 개판인 멕시코, 그리고 간헐적으로 반항하는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때려잡으면 그만이다 보니 뭔가 군대라기 보단 민병대에 가까웠던 것이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유럽이 밀리는 중임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문제는 유럽이 해결하라는 먼로 독트린을 고수하며 지켜보던 미국은 유럽에 군수물자를 팔며 꿀빨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영프군대가 미국의 군수물자 덕으로 식민지서 징집해온 군대들까지 무리없이 운용이 가능해져서 불리해진 독일은 영국, 프랑스로 향하는 선박을 침몰시키겠다며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벌이다 실제로 미국 선박을 격침했지만 우드로 윌슨 행정부는 통보만 했을 뿐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에 독일제국이 이웃국가 멕시코에게 미국을 공격해준다면 예전에 미국에게 빼앗긴 뉴멕시코, 텍사스 일대를 돌려주겠다는 내용이 담긴 치머만 전보 사건이 일어나자 지켜보던 미국은 결국 유럽전선에 참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위에서 설명했듯 한심했던 미군이 선진국들이 혈전을 벌이던 유럽전장에 뛰어들려고 하고 보니... 철모도 제대로 된 것 없이 카우보이 모자, 즉 캠페인 햇을 쓸 지경이였고, 전차야 원래 1차대전 도중에 나오기 시작한 물건이였으니 그렇다 쳐도 보병용 제식소총조차 영 신통한 것도 없고 그나마 쓸만했던 스프링필드 M1903은 급격한 숫적 팽창으로 숫자가 모자라다보니 영국이 리엔필드가 더 좋다 하며 내다버린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소총을 라이센스 양산해서 준제식으로 써야만 하는 상황까지 몰리게 되었다.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이야기지만 당장 유럽전선에 온 미군들은 프랑스와 영국이 주는 예비 장비와 참호전 교리에 의지해 싸워야 할 지경이었다. 미군의 제식장비론 참호전에선 버티지 못하고 독일군의 기관총 앞에 쓸려나갈 게 뻔했던 것이다. 그 쓰레기로 유명한 쇼샤마저도 원판인 프랑스군의 반원형 탄창을 사용하는 것보다 안정적인 견착을 할 수 있고 수직손잡이 위치가 탄창삽입구 앞으로 변경된 박스탄창을 사용하는 제식 탄종 사양을 받았더니 규격의 오차로 인해 그야말로 산업폐기물로 전락한지라 못써먹겠다고 쌍욕을 퍼부을지언정 울며 겨자먹기로 악으로 깡으로 참호전에서 쓸 수밖에 없었던 게 당시의 미군 사정이였던 것.[6] 그나마 다행인 점은 병력이 미칠듯이 부족했던[7] 유럽 연합국에게 하루에 1만명 씩 대서양을 건너오는 이 '미국 촌놈'들은 그 자체로 상당한 대체병력을 제공할 수 있었기에 병력부족에 허덕이던 영프연합군의 숨통을 돌리게 해주었다.[8]
그렇게 진짜 전쟁을 겪어보게 된 미군 수뇌부들은 동맹군인 영프연합군과 더불어 적군인 독일 제국군에게마저도 구식장비로 밀리다보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신형장비를 얻으려고 했는데 때마침 신이 미합중국에 내려준 것처럼 등장한 미국이 낳은 불세출의 천재 총기 기술자 존 브라우닝과 미국의 엄청난 민간 공업력과 생산력은 미군의 본격적인 재무장을 가능케 했고 나아가 전쟁으로 피폐해진 연합군에게 그야말로 바닥이 보이지 않을 장도의 막대한 물품을 대줄 수 있었기에 어쨌든 지지부진 그 자체로 흘러가던 끝이 보이지 않던 참호전 상황의 제1차 세계 대전을 협상국의 승리로 이끄는데 기여하긴 했다. 여담으로 당시 독일군들은 물자는 풍족한데 전투능력이 떨어지던 미군 장병들을 적이라기 보다는 걸어다니는 식량 주머니 정도로 취급했다고....[9]
다만 남북전쟁 이후 대규모 정규전을 치러본 적 없던 미군들의 한심한 작태 때문에 협상군 수뇌부들은 골머리를 앓았기에[10] 이후 미군 수뇌부는 이런 미숙련 징집병들도 제대로 싸울수 있게 해줄[11] 장전도 쉽고 빠르게 신병들을 교육시킬 수 있으며 화력도 우수한 장비인 자동소총(브라우닝 자동소총)과 반자동소총(M1 개런드, M1 카빈)을 개발, 채용하는데 힘을 쏟게 된다.
1차대전에서 승리하고 전쟁특수가 사라지자 군축을 하던도중 세계 대공황이 터지면서 대규모 군대를 유지할 능력도 부족하고 필요도 없게 되어서 다시금 미군은 본토방위용의 소규모 군대로 줄어든다. 일례로, B-17 같은 대형 폭격기는 보통 적 본토 공격용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본토방위를 위해 해상에서 적 함대를 공격하는 초계기 용도로 처음 개발을 시작했던 것이다.[12]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해군의 세력유지는 계속되었는데 이는 세력을 확장하는 일본 제국과의 충돌과 함대결전을 대비한 것과 미국은 유럽, 아시아에서 오는 적대세력은 무조건 태평양, 대서양을 건너야했기 때문에 해상만 잘 지켜도 미국을 지킬수 있었다.
히틀러의 야욕으로 발발한 제2차 세계 대전에서도 영국 본토만 남기고 나치독일이 차지한 상황에서 영국에게 무기와 식량을 판매 및 지원하면서 먼로 독트린을 고수하며 전쟁에 참가하지 않되 영국마저 무너지면 큰일이라는 인식은 있었으나 뉴딜정책의 약발이 떨어지면서 경제가 다시 침체기에 빠졌던 미국이였고 이에 미국은 "경제가 먼저지 상관없는 전쟁에 참여하지 말자"는 국내 여론때문에 명분조차 없었다. 이런 미국에게 일본은 선전포고문을 공습 이전에 선포해야 했으나 영어 통번역 시간이 걸리는 바람에 공습 이후 선전포고문을 전하는 바람에 선전포고조차 없는 기습공격 모양새가 된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제대로 꼭지가 돌아 2차 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제2차 세계 대전 직전 39년 ~ 40년 시점의 미군의 육해군 총병력은 50만명을 넘지 않은, 당시 루마니아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나치 독일의 프랑스 침공의 결과로 파리 함락과 프랑스가 패배하면서 미국에 전운이 감돌았고 대비의 필요성을 감지한 미국 정계와 군부의 노력으로 평시에도 징병이 가능했던 선발징병법의 법안 통과와 주방위군의 현역 소집으로 진주만 기습이 발생한 41년 12월 시점에선 육군 170만명과 해군 32만명 등으로 군대 규모는 200만명을 넘었다. 그 후 일본의 선전포고도 없었던 기습에 격분한 미군은 막강한 자본으로 F6F 헬켓을 비롯한 신병기를 대대적으로 구매하고 생산력을 이용해 순식간에 세계 최대 규모의 군대로, 종전 시점인 45년 9월엔 병력이 1,221만명의 군대로 성장한다(…).[13][14]
물론 전쟁 초반에는 '1차대전을 겪은 장교들이 퇴역하고 전차, 항공기와 같은 냉병기 중심의 대규모 정규전을 해본 적이 없어서' 수차례 쪽팔린 경험을 거듭했고 생산라인 구축에 시간이 걸려서 초반에는 방어를 고수하고 시간벌기를 하였으나, 질 좋은 물량을 본격적으로 찍어내면서 전례없는 대규모 군대와 잘 정비된 순환근무 시스템, 1차 대전에서 보여줬던 유럽 군대보다 선진된 조직 편성 능력 덕분에 전투 경험이 차례차례 축적되자 곧 질적인 면에서도 연합군 타군은 물론 독일군도 앞질러 이내 승리의 주역 중 하나가 된다.[15]
과거 전쟁에서 미군의 활약들을 기록한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으면 여기 사이트에서 많은 사진들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 미군의 역사 속 기록사진을 보여주는 사이트이며 희귀한 사진, 영상자료들도 상당히 많이 뜬다. 미군의 전쟁사(AmericasMilitaryHist),트위터
물론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후 1200만에 달하는 군대를 평상시에도 유지하기에는 힘이 드니까 미군은 빠른 군축을 감행하여 6.25 전쟁 직전에는 현재와 비슷한 150만 정도의 규모를 유지 하였다.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무시무시한 점은 유럽과 태평양 전역에서 양면 전쟁을 치르며 이걸 실제로 해냈다는 것이다. 웬만한 국가는 흉내도 내지 못할 일이다. 당장 독일은 미국/영국/소련을 상대로, 일본은 미국/호주/인도/중국을 상대로 2개 이상의 전선을 만든 상태에서 빠른 속도로 한계에 도달해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물론 독일을 상대로는 소련이 독소전쟁으로, 일본을 상대로는 중일전쟁에서 중국(국민당)도 싸우고 있던 상태였고, 2차 대전 기간 사망한 독일군의 80%는 소련군에게 죽은 것이고 일본군의 25% 가량(특히 육군 대략 40만명)은 중국군(중국군은 135만 이상 전사)에게 죽은 것이었다. 물론 독소전쟁과 중일전쟁의 배후에는 미국의 어마어마한 렌드리스가 있어서 가능했고[16], 미군과 영국군이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을 상대하고 독일의 항공력을 분산시킨 덕분에 동부전선에서 소련이 진격할 수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세계를 파시즘이라는 거대한 악으로부터 구원한 미국의 공로는 어마어마하다.
독일군을 상대하며 완성된 육군과 일본군을 상대하며 완성된 해군, 그리고 육해군 항공대 운용 경험을 살려 창설한 공군, 이렇게 완비된 현대의 미군은 6.25 전쟁에서 북한군을 압살했으나 방심으로 인해전술을 몰고오는 중공군에게 패퇴하기도 했으나 보병 행군경시를 고치고 포병화력을 늘려 다시 주도권을 잡아서 현 분단선까지 밀고 올라왔다. 그러나 중공군이 그 일대에 깊은 땅굴을 파고 요새화 함으로써 양측 교착상태에 빠졌는데 뒤에서 몰래 참전하던 소련이 공개적인 참전을 우려해 휴전하였다. 6.25이후 더이상 해외 전쟁에 참여 안하려 했으나 통킹만 사건으로 다시 분노한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도 뛰어들었고 여기서도 호되게 당하며 범죄가 일어나는 등 망신을 사고 자신들보다 약한 북베트남에게 최종적으로 패배하는등 망신을 당했으나 자동소총의 중요성과 헬기 기동전술, 밀림지형 전술교리를 확보해나갔다. 이렇게 냉전시대에 소련보다 아군을 더 확보하기 위해 친소련 국가의 적대세력을 도와주는 등 세계 각국의 분쟁지역마다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자유진영의 국익을 보호하는데 앞장섰고, 핵무기를 개발하고 각종 기상천외한 신병기를 뽑아내며 첫 위성발사에 자극받아 우주선을 띄워 닐 암스트롱이 달까지 가는 등 소련군과의 질적 격차를 벌이려고 꾸준히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모순과 너무 많은 군비, 아프간과의 뼈아픈 패배를 겪은 소련이 끝내 무너지며 냉전이 끝나고 평화 무드로 돌아간다. 이에 징병제도 우수한 병력자원을 모으기 위해 모병제로 전환, 무기도 군축을 하며 다시금 예전처럼 서방의 이익은 지키되 그 외에는 불간섭주의로 돌아가는 듯 하였으나 이번엔 이슬람 테러단체 알카에다가 벌인 9.11 테러가 터지면서 극대노한 미국은 아프간 전쟁-이라크 전쟁을 연달아 벌이면서 결국 여전히 미군은 전세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자유 세계를 선도하며 세계 각지로 전력을 투사하고 있다.
4. 현재의 미군
현대의 미군은 전 세계를 활동영역으로 삼고 있다. 국력이 받쳐주는 까닭에, 자국민 보호나 이익문제로 관여해야할 때 전 세계 어디로든 가서 활동할 수 있다. 이미 1차 걸프전 때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사우디아라비아에 50만 가까운 병력을 집결시켜 출격한 사례가 있고, 아프가니스탄서도 수년간 전투를 지원하였다. 다른 나라는 실험과 훈련을 통해 데이터를 구축하고 장비를 강화한다면, 미군은 그와 비교할 수 없는 실전을 통해 데이터를 구축하고 장비를 강화한다. 이러한 점은 미군이 현대 군사과학의 선두주자가 될 수 있는 큰 배경이 되고 있다.영국, 독일, 이탈리아, 일본, 한국,
직접 주둔을 안 하고 있는 곳들도 군사문제로 협력하거나 혹은 미군 일부가 작전중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콜롬비아 같은 나라들은 내부 사정으로 인해 미군에게 국방과 내부치안마저 크게 의지하고 있다. 이래서는 미군의 영향력이 미치는 나라보다 영향력이 안 미치는 나라를 찾는게 더 빠를 듯.
2011년 현재 전세계 100여개국에 약 700개의 미군기지를 운영중이다. 한국, 독일, 일본처럼 대규모 전투부대가 주둔하지 않더라도 통신감청시설, 레이더기지, 비행장 등 소규모 기지는 세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2015년 용산기지와 동두천 및 의정부의 2사단 등 수도권내 미군이 평택기지로 통합되면, 평택은 미국 국내를 포함해서 세계 최대규모의 단일미군기지가 될 전망이다.
단, 소말리아는 예외다. 미군 데브그루와 맞먹는 델타 포스마저 GG친 그 곳은 인간이 사는 곳이 아니다. 킹왕짱 지구방위대 미군도 두손 두발 다 들고 나온 그곳엔 희망 따윈 없다. 물론 미국이 진심으로 한다면 못 이기는 건 아니지만 이겨도 소말리아 지형에 아무런 이익도 없고 가봤자 저항하는 군벌 민병대에 의해 피만 보는 곳이라서 철수한 거지만. 이는 영화 블랙 호크 다운을 보면서 느껴보도록 하자.[20]
5. 관련 문서
6. 문서가 있는 미군이 참전한 전쟁
[1] 위 그림 속 인물에 대해서는 엉클 샘 문서로.[2] 당시에 미국은 정규군이 아예 없다고 봐도 될 정도로 초라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3] 지금의 루이지애나주가 아니라 당시 북아메리카 중서부지역 전체를 말한다.[4] 먼로 독트린 자체는 남북전쟁이 벌어지기도 전에 5대 대통령이었던 먼로가 발표한 것이다.[5] 2차 세계대전 참전 이전까지 미군의 이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루니툰의 애니메이션. 그야말로 당나라 군대 그 자체의 모습을 보여주는 적나라한 풍자가 일품이다.[6] 미 육군이 미국 치고는 미터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집단인 것도 이때의 영향이다. 전장에서 가장 중요한 병과였던 포병이 프랑스군 포병대의 무기를 도입하며 프랑스군으로부터 프랑스식 교육을 받았기 때문.[7] 영국도 피해가 적진 않았지만 프랑스는 젊은 남자의 삼분의 일을 잃어버릴 지경이었다.[8] 이런 기반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미국인이 교육받아 프랑스군 항공대 조종사로 활약한 이야기 라파예트가 있다.[9] 순무의 겨울을 겪으며 쫄쫄 굶은 독일 제국군에게 있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면서 닥돌만 해오는 주제에 병사 개개인이 고기 통조림과 군용 케이크 통조림 등등의 부식거리를 싸들고다니는 미군은 그야말로 하나만 잡으면 그날 하루는 포식할 수 있는 훌륭한 사냥감이였다.[10] 사령관이었던 존 조지프 퍼싱 조차 예외는 아니어서 초반에는 흡사 옛날 미국-스페인 전쟁이나 남북전쟁에서 그렇듯이 라인배틀마냥 독일군 참호 앞으로 무작정 병력 꼬라박기만 하다가 전쟁 초 영프연합군마냥 수많은 병사들의 피로 대가를 치르고서야 겨우 겨우 참호전 교리를 익혔다.[11] 스프링필드 M1903이나 스프링필드 크라그 M1898, 엔필드 M1917같은 볼트액션 소총들은 싸지만 신병이 사용하기엔 힘든 장비라서...[12] B-17C, D형같은 초기형 B-17 폭격기들을 잘 살펴보면 우리가 잘 아는 B-17G 형처럼 후방 터렛과 측면 기관총좌가 증설되지 않고 동체 양편에 관측창만 있는 상태였다.[13] 당시 미군의 병력은 육군 450만, 해군 400만, 육군항공대 240만, 해병대 47만, 항공전력, 해상전력, 기갑전력, 보급라인 등을 총 망라하면 같은 연합국인 소련, 영국, 중국은 물론 독일 일본 이탈리아도 쌈싸먹는 규모이다. 작전의 기본인 지상군 사단의 숫자는 92개 내외였다.[14] 여담으로 이 때 청년들이 대공황기에 성장해서 상태가 영 안 좋은 병사가 많아, 미군은 수백만명을 상대로 안경을 맞춰주고, 충치를 뽑고, 글을 가르치고, 심지어 같은 영어를 쓰는데도 지역별 방언차 탓에 회화가 제대로 안통해서 강사 수천명을 구해와 대대적으로 가르치는 등 거대한 규모의 전시준비 작업을 수행했다.[15] 특히 전차분야는 영국군은 미군으로부터 셔먼을 공여받을때까지 크루세이더 순항전차와 처칠 전차 시리즈가 주력 전차였고 미군의 셔먼전차, 울버린 대전차자주포가 들어오자 이에 자국에서 가장 강력한 대전차포를 장착한 셔먼 파이어플라이, 아킬레스를 만들어 독일군 전차에 대항이 가능해졌다. 영국이 유일하게 미군을 앞선 분야는 바로 특수전부대로 미국도 공수부대와 OSS 소속 특수작전단, 레인저 부대로 활약하긴 했으나 영국은 오랜역사의 코만도와 북아프리카에서 SAS를 창설해 추축군들을 괴롭혔다.[16] 다만 중국의 경우에는 랜드리스 비중이 체급에 비해 적은데다가 그나마도 약간의 공군과 인도에 주둔 중이던 X군을 제외하면 전쟁 후기까지만 해도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하던 실정이었다.[17]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철수했다.[18] 당장 동두천을 생각해보라. 별다른 산업도 없고 군인들 없으면 끝장이다. 그래서 미군기지 평택이전을 반대하기도 했다.[19] 미 해군이 있었던 수빅 기지 인근의 미 공군 주둔지 였던 클락은 당시 미군 휴양소가 있었고 현재도 이 시설들은 한국인들에게 골프와 관광 명소로 애용되고 있다.[20] 이쪽은 민병대의 무장과 시가전을 너무 과소 평가하였으며 빠르게 투입해 체포하고 빠르게 튄다라는 전제와 여러사정으로 본국으로부터 중장비 지원이 전혀 없었던 게 문제였다. 만약에 장갑차 브래들리나 주력전차인 M1A1 전차, 공격헬기 아파치나 최소한 코브라 등의 장비들이 동원되었다면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