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6-07-26 18:25:49

문순득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문순득
文淳得
[1]
파일:IE001867513_STD.jpg
우이도 진리 선착장 동상
출생 1777년
전라도 진도군 흑산면
(現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신안군 흑산면)
사망 1847년 4월 27일(향년 70세)
본관 남평 문씨 월파공파[2]
천초(天初) 또는 대초(大初)
직업 어물장수 → 가선대부 종2품
1. 개요2. 생애
2.1. 1차 표류2.2. 2차 표류2.3. 통역을 하다2.4. 이후
3. 실록에 기록되다
3.1. '표해시말'에 기록된 똑같은 사건
4. 기타5. 매체에서
5.1. 역사스페셜5.2. 역사스페셜: 시간여행자

1. 개요

조선 후기의 인물.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천초(天初) 또는 대초(大初).

신안군 우이도(牛耳島)에 살면서 일대에서 홍어를 거래하던 어물 장수였다. 장사차 떠난 항해에서 풍량을 만나 류큐 왕국(유구국) → 스페인령 필리핀(여송) 루손섬포르투갈령 마카오청나라 광둥성을 거쳐 조선으로 돌아온 '표해시말'의 주인공으로 유명하며, 이후 특유의 비상한 머리와 외향성으로 표류 도중 모든 곳의 정보를 듣고 조선에 모든 사실을 전하며 조선 실학에 영향을 주었고, 통역으로도 활동했다.

2. 생애

1777년(정조 원년) 전라도 진도군 흑산면에 소속된 우이도(현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신안군 도초면 우이도리)[3]에서 아버지 문덕겸(文德謙, 1739~1796)과 어머니 창원 황씨(昌原 黃氏) 사이의 6형제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생환한 뒤 아버지 문덕겸은 1811년(순조 11) 조정으로부터 종2품 가선대부의 품계를 하사받았다.[4]

우이도 일대에서 홍어 장사를 하면서 평범한 삶을 살던 문순득이 조선왕조실록에 이름 석 자를 남긴 이유는 표류하면서 벌어진 파란만장한 여정 때문이었다. 아시아판 하멜 표류기라고 봐도 좋다.

2.1. 1차 표류

1801년 12월 24살의 청년이었던 문순득은 작은아버지 문호겸(文好謙)[5]과 마을 주민 4명[6]을 따라 흑산도에서 홍어를 사기 위해 태사도(太砂島)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났다. 뱃길에 능숙했기 때문에 흑산도를 멀리서 바라보았음에도 풍랑에 의해 도착하지 못했고, 제주도 또한 들어가지 못하였다. 이에 문순득과 그 일행은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돛을 펴고 어느 곳이든 도착을 한 뒤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자 하였다. 바다에서 표류하던 이들은 기적처럼 살아 1802년 1월 류큐 왕국의 '대도(大島)'[7]라는 곳에 표착했다. 다행히 현지인들은 표류자들을 잘 보살펴 주었고 문순득 일행은 그곳에서 매일 쌀과 채소를 받고 하루 넘어 돼지고기를 제공받았으며 병들면 의원이 와서 진찰해 주는 등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8개월 동안 류큐에서 생활한 문순득 일행은 류큐어를 배우고 현지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조선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알아냈는데 그것은 바로 중국으로 가는 류큐국의 조공선에 탑승해서 중국을 거쳐 조선으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802년 10월 류큐국에서 중국으로 가는 조공선에 몸을 실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그들의 계획은 완벽했고 다들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는 줄 알았으나…

2.2. 2차 표류

중국으로 가는 길에 또 풍랑을 만났으며[8] 이번에는 류큐 왕국보다 더 남쪽으로 떠내려가 스페인 제국 필리핀 도독령이던 루손 섬[9]에 표착했다. 선단은 진공선 2척과 호송선 1척 등 세 척이었는데 진공선 중 한 척과 호송선은 실종되어 버리고 문순득이 탄 진공선만 표착에 성공했다.

당시 루손은 조선이나 유구와는 왕래가 없는 섬이라서 루손 섬에서는 유구에서만큼의 대우를 기대하기 어려웠으며 실제로 루손 섬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함께 배에 탔던 중국인 15명이 물을 길러 나갔다가 6명이 현지인들에게 첩자로 의심되어 잡혀 갔다. 당시 필리핀 도독령남중국해 및 여러 곳에서 창궐한 해적들로 인해 해안가와 지방항구는 모두 닫고 마닐라 및 정해진 항구로만 무역선들을 받았는데 해안가에 십수 명의 수상한 외국 사람들이 있으니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루손섬 일대를 13일 동안 항해하였으나, 쉽게 상륙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하루 동안 섬에 정박하여 옷을 세탁하였고, 하루를 더 남쪽으로 가서 '일로미'[10]라는 곳에 도착하였다. 그 곳에 푸젠성 출신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사는 지역이 있었는데, 그곳에 의탁하여 지내게 된다.[11] 어쨌든 문순득 일행이 9개월 동안 일로미에 머물면서 마을 곳곳을 구경했는데, 그때 스페인인들이 만든 신묘(神廟, 파블로 대성당)를 방문하기도 했다.
신묘는 30~40칸의 긴 집으로 비할 곳 없이 크고 아름다웠으며 이로써 신을 모시는 대중을 대접하였다. 신상을 모셔 놓았다. 신묘 한쪽 꼭대기 앞에 탑을 세우고 탑 꼭대기에 금계(金鷄)를 세워 바람에 따라 머리가 바람이 오는 방향으로 스스로 돌게 하였다. 탑 꼭대기 아래 벽의 밖으로 크기가 같지 않은 종 4~5개를 걸어 제사와 기도 등 일에 따라서 다른 종을 친다.
루손섬에 머물던 문순득 일행은 조공선을 지휘하던 류큐 왕국 관리와 현지의 푸젠성 출신 거주민들간 사이의 갈등[12]으로 인해 문순득의 작은아버지를 비롯한 조선인 4명이 먼저 중국으로 출항하고, 문순득과 김옥문은 루손 섬에 남게 되었다.[13] 문순득은 또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으며, 일로카노어[14]루손섬의 풍속을 빠르게 익혔다.

류큐 왕국에서는 식량과 의료를 지원받으면서 나름대로 편하게 지냈던 반면, 루손섬에서는 약간의 지원을 받긴 했지만[15] 최대한 자기 힘으로 살아가야 했다. 문순득은 연날리기를 좋아하는 루손섬 사람들의 풍습을 보고 끈을 꼬아 그들에게 팔거나, 땔나무를 팔면서 생계와 용돈(술과 담배)을 해결했다고 한다.[16] 그리고 이렇게 생업 활동을 통해 착실하게 돈을 모아, 나중에 루손섬을 떠날 때 뱃 삯으로 대은전 12개를 지불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마냥 일만 한 것은 아니고, 그곳을 돌아다니며 풍속을 보고 관광도 하고 살았는데, 당시 인기 있던 투계를 구경하거나 현지 성당을 방문하는 등 다양한 체험을 하며 지냈다고 한다.

1803년 8월 루손에서 마카오 상선을 얻어타고 중국의 마카오로 이동했다. 문순득이 광둥성의 상선이 왔다는 소식을 어떻게 들었는지는 표해시말에 나오지 않지만 마카오 당국이 심문한 기록에 따르면 3월 16일에 '여송국왕'을 만났다고 한다. 다만 상세한 사정을 알지 못해 왕이라고 지칭한 것이고 실제로는 당시 필리핀 도독령의 총독이던 라파엘 마리아 데 아길라르 이 폰세 데 레온을 만난 것으로 추정된다.[17] 문순득이 '왕'이라고 묘사한 인물은 문순득과 중국인 표류민 일행을 심문하고 필리핀에 표류한 정황을 물은 후 돌아갈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주었다. 그렇게 송환 결정이 내려지고도 두 달이 지나고 마침내 5월 1일 그 광둥성 상선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고 바람의 때를 맞추기 위해 다시 3달 동안 기다린 후에 배는 1803년 8월 28일 비간의 항구를 출발했다.[18] 마카오에 정박한 이후 청나라의 승인을 거쳐 육로와 대운하를 통해 난징베이징을 거쳤고, 조선 사신단에 합류[19]하여 1804년 12월 조선한양에 도착하고 마침내 집을 떠난 지 3년 2개월 만인 1805년 1월에 고향인 우이도로 돌아왔다.

2.3. 통역을 하다

훗날 문순득은 제주도에 표류한 필리핀인과 조선 조정 사이를 통역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순조실록 12권, 순조 9년(1809년) 6월 26일 을묘 1번째 기사 ‘여송국의 표류인을 송환시키라 명하다.’에서 따르면, 1801년에 체류한 필리핀인에 대해 여송국(呂宋國: 필리핀)의 표류인을 먼저 중국의 성경(盛京: 중국의 도시 선양을 청나라 때 부르던 명칭)에 자문을 보내어 통보하였으나, 선양의 예부에서도 이를 파악하지 못해 지지부진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체류한 5명의 필리핀인은 언어가 통하지 않았고 단지 막가외(莫可外: 마카오)라는 지명만 기억하여 조선 조정은 그들과 소통할 길이 없었다. 청나라로 보냈지만 청나라에서도 모르겠다면서 다시 제주로 돌려보냈고 그 과정에 2명이 사고로 사망했다. 딱히 답이없던 조정에서는 그들이 조선어를 먼저 배우는 게 빠르다고 제주에서 지낼 것을 명했고, 그렇게 3명은 무려 9년의 세월 동안 제주에 묶여 지내면서 속절 없이 흘러가게 되고, 이 기간 동안 문순득이 출항 후 표류했다 3년 만에 귀국한다.

이때 조정에서는 문순득이 여송국에 체류했다는 사실을 주지하였고, 문순득을 제주도로 파송하여 통역을 명했는데 다행히 문순득이 현지에서 어깨 너머로 배운 일로카노어를 사용하자 대번에 알아들었다고 한다. 필리핀인들은 무려 9년 만에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 오열했다고 하여 문순득의 입장에서는 공감도 되고 측은하기도 했다. 또한 본인은 필리핀 자체가 다른 나라와 개방되어 교류가 잦고, 각 지역의 관리들이 어떻게든 소통을 시도하여 상대적으로 빠르고 불편하지 않게 조치될 수 있었으나 조선에서는 그런 제도와 의지가 매우매우 미비해 사실상 장기간 방치했다는 점을 비판했다. 여하튼 문순득의 통역에 힘 입어 그들을 본국으로 무사히 환송했다.

2.4. 이후

글을 많이 배우지 못한 상인이었으나[20] 총명하고 입담이 좋았다.[21] 문순득의 표류 이야기는 곧 주변 사람들을 통해 퍼져나갔다. 전 지구가 중국, 일본 같은 동북아시아 제국들이나 여진족·튀르크족 같은 중앙아시아계의 북방 유목제국들이나 인도 정도라고 생각했던 당시 조선의 하층민 백성들에게 문순득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신비롭게 느껴졌던 것 같다.

고향에 돌아와 다시 본업인 상인으로 돌아간 어느 날 다시 홍어를 거래하기 위해 흑산도에 들렀는데, 이때 흑산도에 유배 온 정약전을 만났다. 문순득은 정약전에게 풍랑을 만나 표류하며 보고 들은 바를 전해주었고 정약전은 그 체험담을 날짜별로 기록한 표해시말(漂海始末)이라는 책을 쓴다.[22] 문순득의 표류기는 정약전의 동생인 정약용에게도 전해졌으며 필리핀 도독령에서 사용하는 화폐의 유용함을 전해들은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조선의 화폐 개혁안을 제안했다. 정약용은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제자인 이강회(李綱會)를 우이도로 보내 문순득을 만나게 하였고 『운곡선설(雲谷船說)』[23]을 집필하게 했다. 알게 모르게 조선 후기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표해시말 집필을 계기로 정약전과 문순득은 우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정약전의 동생 정약용도 형을 통해 문순득의 친절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문순득이 아들을 낳았을 때 축하의 의미로 아들 이름까지 직접 지어 주었다고 한다.[24] 문순득은 정약전을 가족처럼 모셨는데,[25] 훗날 정약전이 유배지에서 사망하자 직접 극진히 장례까지 치러 주었다. 정약용도 문순득에게 형의 장례를 잘 치러 준 것에 대해 감사를 전하는 편지를 보냈다. 문순득으로서는 정약전이 본인의 호를 지어 주었고, 정약용이 본인의 아들 이름까지 지어 주었으니, 정씨 일가의 형제들과 매우 깊은 인연을 맺었다고 할 수 있겠다.

어쨌든 여러 일화를 볼 때 비범한 기억력과 외국어 습득 재능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문자를 익힐 기회가 적고 외국과의 교류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던 조선 시대의 평민이 그랬다는 것이 더 놀라운 점이다. 박연의 사례나 하멜의 사례를 보아도 그렇지만 보통 표류해서 다른 나라에 뚝 떨어진 외국인들은 그 나라의 말을 익히는데 상당한 시간을 소요하며 이는 현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상술한 일화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제주도에 표류한 필리핀인들은 장장 9년 동안 자신들의 국적도 해명하지 못 하는 상태였지만 고작 3년 만에 류큐어일로카노어를 능숙하게 배워서 귀국하였고 귀국한 후에도 일로카노어 통역을 할 정도로 숙달된 실력이었다는 걸 보면 가히 외국어 마스터 달인으로 불려도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언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고 표류국에서 언어와 생계수단을 빠르게 배워 적응하며 살았던 것을 보면 굉장히 강한 생활력을 가지고 매우 강한 강철 멘탈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이며 연고도 없는 외지에서 생판 모르는 외국인에게 말을 걸고 언어를 배웠을 테니 대단히 외향적이고 친화적이며 붙임성이 좋았을 법한 성격도 짐작할 수 있다.[26]

조정에서는 1835년(헌종 원년) 문순득의 공을 치하하여 가선대부 종2품 공명첩을 하사했다고 한다.[27] 비록 조정에 돈을 내고 받은 명예직이기는 하지만, 고위직에 해당되는 어마어마한 벼슬을 얻긴 한 셈이다. 그야말로 인생살이 새옹지마. 이후에도 천수를 누리다가 1847년(헌종 13) 4월 27일에 향년 70세로 세상을 떠났다.

정리하자면, 문순득은 19세기 초에 오키나와, 필리핀, 마카오 세 나라를 최초로 여행하고 온갖 나라 사람들과 마주해 본 조선인이라고 할 수 있다. 문순득의 표류는 개인적으로는 불운이었지만 그 덕분에 많은 이가 필리핀서양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되었다. 특히 정약용정약전, 이강회 등 실학자들의 세계관 확대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3. 실록에 기록되다

1801년(순조 1년) 8월[28]에 5명의 외국인이 제주도표류한 일이 있었는데 조선 조정에서는 이들과 말이 통하지 않아 어느 나라에서 온 사람들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일단 북경으로 보내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지만 청나라에서도 이들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른다고 하여 조선으로 되돌려 보냈고, 그 과정에서 두 명이 병들어 죽고 세사람 만이 남았다. 그래서 그 세 명이 그대로 제주도에 정착하여 살고 있었다.

그러다 6년 후인 1807년, 조선에 표착한 유구국 사람 궁평(宮平)이 이들과 대화한 끝에 여송국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29] 이에 제주관청에서 해당 표류인들을 궁평과 같이 고향으로 돌려 보내려고 했는데, 궁평을 비롯한 유구국 사람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과 같이 귀환하기 곤란하다면서 거절하였다. 그러면서 송환 절차가 미뤄지던 차에, 그 유구국 사람들만이 따로 배를 타고 되돌아 가게 되면서, 제주도에 남겨진 여송국 사람들은 송환이 무산되어 잊혀졌다.

그로부터 몇 년 뒤인 1809년, 비로소 그들에 대한 실제 송환이 이루어질 때 이 사건이 다시 실록 기록에 등장하는데, 해당 기록에 '문순득'의 이름과 일화가 정식으로 인용된다. 이것이 조선왕조실록에 문순득의 이름이 등장한 유일한 기사이다. 해당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송국(呂宋國)의 표류인(漂流人)을 성경(盛京)에 이자(移咨)[30]하여 본국(本國)으로 송환(送還)시키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신유년(1801년) 가을 이국인(異國人) 5명이 표류하여 제주(濟州)에 도착하였는데, 알아들을 수 없는 오랑캐들의 말이어서 무엇이 어떻게 되었다는 것인지 분별할 수가 없었다. 나라 이름을 쓰게 하였더니 단지 막가외(莫可外)라고만 하여 어느 나라 사람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자관(移咨官)[31]을 딸려서 성경(盛京)으로 들여보냈었는데, 임술년(1802년) 여름 성경의 예부(禮部)로부터도 또한 어느 나라인지 분명히 알 수 없다는 내용의 회자(回咨)[32]와 함께 다시 되돌려 보냈다. 그런데 그 중 1명은 도중에서 병이 들어 죽었다. 그리하여 우선 해목(該牧)[33]에 머무르게 한 다음 공해(公廨)[34]를 지급하고 양찬(粮饌)[35]을 계속 대어주면서 풍토를 익히고 언어를 통하게 하라고 명하였는데, 그 가운데 1명이 또 죽어서 단지 3명만이 남아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나주(羅州) 흑산도(黑山島) 사람 문순득(文順得)이 표류되어 여송국에 들어갔었는데, 그 나라 사람의 형모(形貌)와 의관(衣冠)을 보고 그들의 방언(方言)을 또한 기록하여 가지고 온 것이 있었다. 그런데 표류되어 머무는 사람들의 용모와 복장이 대략 서로 비슷하였으므로, 여송국의 방언으로 문답(問答)하니 절절이 딱 들어맞았다. 그리하여 미친 듯이 바보처럼 정신을 못 차리고서 울기도 하고 외치기도 하는 정상이 매우 딱하고 측은하였다. 그들이 표류되어 온 지 9년 만에야 비로소 여송국 사람임을 알게 되었는데, 이른바 막가외라는 것 또한 그 나라의 관음(官音)[36]이었다. 전라 감사 이면응(李冕膺)과 제주 목사 이현택(李顯宅)이 사유를 갖추어 아뢰었으므로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乙卯/命呂宋國漂人, 移咨盛京, 送還本國。 先是, 辛酉秋, 異國人五名, 漂到濟州, 而鴂舌聱牙, 莫辨魚魯。 寫其國名, 只稱莫可外, 未知爲何國人。 移咨入送于盛京, 壬戌夏, 自盛京禮部, 亦未能確指何國, 回咨還送。 而一名在塗病故矣。 命姑留該牧, 給公廨, 繼糧饌, 使之習風土, 通言語, 其中一人又故, 只餘三名。 至是羅州 黑山島人文順得, 漂入呂宋國, 見該國人形貌衣冠, 其方言, 亦有所錄來者。 而漂留人容服, 大略相似, 試以呂宋國方言問答, 則節節脗合。 而如狂如痴, 或泣或叫之狀, 甚可矜惻。 漂留已爲九年, 而始知爲呂宋國人, 所謂莫可外, 亦該國之官音也。 全羅監司李冕膺、濟州牧使李顯宅, 具由以聞, 有是命。
순조실록 12권, 순조 9년(1809년) 6월 26일 을묘 1번째 기사
위 순조 9년인 1809년 실록 기록에는 '9년 만에 비로소 그들이 여송국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고 적혀 있지만, 실제로는 순조 7년인 1807년에 유구국 사람 '궁평'의 통역을 통해 그들이 여송국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는 기록이 이미 실록에 있다. 따라서 해당 순조 9년 기록은 착오인 것으로 보인다.

3.1. '표해시말'에 기록된 똑같은 사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해당 사건이 문순득의 '표해시말'에도 똑같이 기록되어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실록에는 제주도에 남겨진 표류인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고, 문순득의 '표해시말'에는 제주도에서 도망친 표류인 생존자의 증언이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자세한 상황은 이러하다. 문순득이 조선으로의 귀환을 위해 루손섬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여 오문를 거쳐 광둥성의 남해현[37]에 도착했을 때, 우연히 현지인으로부터 어떤 사람 두 명을 소개 받게 되었다. 문순득이 그들과 대화를 하였는데,[38] 흥미롭게도 그 이야기가 다음과 같았다.
"그 지방 사람이 이국인 두 사람을 데리고 왔다. 이국인이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안남인이며, 고려의 풍속은 좋지 않다"고 했다. 내가 무슨 까닭이냐 물으니 대답하기를, "가경 6년[39], 오문을 내왕하는 여송인과 짝이 되어 장사를 하는데, 30명이 배를 타고 가다가 바람을 만나 조선 지방의 큰 섬에 닿았는데, 다섯 사람이 물을 길으려 육지에 올라갔는데, 섬사람에게 해코지를 당했다. 우리는 두려워서 닻을 올려 일본 지방으로 피했는데, 사람들은 모두 익사하고 우리 두 사람만 살아서 일본 사람의 호송에 힘 입어 남경에 이르러 여기에 와서 본국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내가 생각건대, 신유년 11월, 집에 있을 때 들었는데, 배 한척이 제주에 와서, 다섯 사람이 육지에 내려서, 문정(問情)을 하고자 붙들었는데, 뱃사람들이 다섯 사람을 버리고 돛을 펴고 가버렸다. 다섯 사람의 얼굴은 칠을 한 것 같고, 언어 문자는 통하지 않으며,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알지 못했다. 안남인이 전하는 바가 필시 이 일인 것 같다."
즉, 문순득이 광저우에서 우연히 현지 상인 두 사람을 만났고, 그 중 안남국 사람과 대화를 하였는데, 알고 보니 이 상인들이 바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바로 그 '여송인 제주도 표류 사건'의 일행이었다는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문순득이 고향에 있을 때 들었던 해당 사건에 대해 퍼뜩 떠올리고 이것이 동일한 사건이라고 추론하면서, 본인 추측에 대한 합리적 근거를 조목조목 대었다는 것이다. 문순득이 '표해시말'에 기록해 놓은 추측의 근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제주에 표착했던 사람들이 광둥성을 일컬어 '막가외'라고 했는데, 이는 여송국 사람들이 오문을 부를 때 똑같이 쓰는 말이다. 둘째, 그 사람들의 얼굴에 칠을 한 것 같다고 했는데 여송과 오문에는 간혹 얼굴에 칠을 한 것 같은 사람이 있다. 셋째, 여송의 풍속은 귀인의 머리는 모두 뒤로 늘어뜨려 동자처럼 하고 검은 비단으로 얽어 묶는 것인데 제주에 표류한 이들도 그랬다. 넷째, 그들의 머리털이 양털 같다고 했는데 얼굴이 검은 여송인의 머리털이 그러하다. 다섯째, 다섯 사람이 해를 입은 까닭에 도망했다는 이야기가 당시의 일과 들어 맞는 게 그 증거다. 여섯째, 제주에 표착했던 사람들 특유의 의복과 머리에 쓰는 관 모양이 여송국의 풍속과 같다.
문순득은 그리고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내가 유구에 표류했을 때, 나도 모르게 이 사람을 위하여 하염 없이 눈물을 흘리며 울었는데, 하물며 내가 나그네로 떠돌기 3년, 여러 나라의 은혜를 입어 고국으로 살아돌아왔는데, 이 사람은 아직도 제주에 있으니, 안남, 여송인우리나라를 어떻게 말하겠는가. 정말 부끄러워서 땀이 솟는다."
문순득 본인이 류큐 왕국으로 표류 했을 때, 제주도에 표류했다는 그 여송국 사람들 이야기가 문득 떠올라, 그들의 처지와 본인을 동일시 하며 슬픔에 잠겼던 일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여러 나라의 은혜를 입어서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그 여송국 사람들은 아직도 고향으로 돌아 가지 못하고 여전히 제주도에 머무는 처지인 것이 비교가 되어, 그 이방인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못하는 조선인으로서 큰 부끄러움을 느겼던 모양이다. 어쨌든 문순득이 조선으로 귀환을 한지 약 4년 후에 결국 그 여송국 사람들도 다행히 청나라를 통해 귀환을 하게 된 것으로 해당 사건이 마무리 되었다.

덧붙이자면, 조선 후기 실학자인 정동유라는 사람이 당시에 바로 그 표류 여송인들을 제주도에서 직접 만나 인터뷰를 하고, 그 내용의 일부를 본인의 저서 '주영편(晝永編)'에 남겨 놓은 기록이 있다. 이 책에는 그 표류한 선원들 이름과, 그들에게서 채록한 그들 언어의 숫자 발음을 기록해 놓았는데, 스페인어 표현과 일치한다.[40] 즉, 그들은 스페인어 지식이 있는 루손섬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4. 기타

5. 매체에서

5.1. 역사스페셜

홍어장수 표류기, 세상을 바꾸다!
KBS 2009.08.08.
* 2009년 8월 8일에 방송된 역사스페셜에서도 이를 다루었다.

5.2. 역사스페셜: 시간여행자

조선 홍어장수 문순득, 신세계 표류기
KBS 2026.07.19.

[1] 조선왕조실록에 文順得으로 기록되었지만 오자이다.[2] 순질공파-경숙공-옹-강진-월파공파 27세 순(淳) 항렬. 문재인 전 대통령의 6대조 뻘이다.[3] 4선 국회의원을 지낸 한화갑도 우이도 출신이다. 1640년(인조 18) 남평 문씨 문일장(文日章, 1637~1678)이 도초도에서 우이도로 옮겨와 살게 된 뒤로부터 우이도에 남평 문씨들이 세거하기 시작했다. 문순득은 문일장의 증손자다.[4] 당시 받은 공명첩이 현재도 6대손 문채옥 집안에 남아 있다.[5] 표해시말 기준. 다만 남평 문씨 인터넷대동보에 따르면 문순득의 작은아버지로는 문성겸(文成謙)·문현겸(文顯謙)이 있으며 문호겸(文謙)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작은아버지가 아닌 5촌 당숙으로 등재되어 있다.[6] 표해시말에 따르면 같이 간 마을 주민은 이백근(李白根), 박무청(朴無碃), 이중원(李中原), 김옥문(金玉紋)이었는데 이 중 김옥문은 나무를 하는 어린 아이였다.[7]가고시마현 아마미오섬(奄美大島)이다. 1802년 당시에는 일본 사쓰마 번이 점령해 실질적으로 통치했으나 형식상으로는 류큐 왕국 영토로 남겨두었다.[8] 간단한 추측을 하자면 이 일대는 여름과 가을에 태풍이 자주 발생하거나 북상하는 곳이다. 19세기와는 기후가 크게 다른 지금도 마찬가지다. 운이 지독하게 나쁘게도 출항하고 태풍을 두 번이나 만난 걸로 생각된다.[9] 당시 중국에서는 여송국(呂宋國)으로 표기했다.[10] 현재의 비간(Vigan) 지역. 이른바 일로카노어를 쓰는 지역이다. '표해시말'에는 '일로미', 또는 '일로꼬'라는 두 표현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11] 수십 호의 푸젠인 가구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닐라에는 3000호의 푸젠성 사람이 살고 있다더라고 기록했다.[12] 류큐 왕국 관리는 체류비 일체를 부담해야 하고 정부간의 일을 처리해야 하므로 빠른 출항을 원했고, 푸젠성 출신 현지 거주민은 바람이 잦아드는 계절까지 기다리기를 원했다. 그리고 장기간 기거를 하면 그들에게서 숙박비를 더 받을 수 있다는 심산이었다.[13] 이 4명도 중국을 통해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며 청나라 예부에서 이 4명과 후에 도착한 문순득 일행을 조사한 문서가 아직도 남아 있다. 이때 먼저 떠난 조선인 일행은 1804년 3월에 조선으로 귀국했다.[14] 루손 섬 북부 지역에서 쓰이는 언어였으며 필리핀에서는 나름대로 꽤 쓰이는 언어다.[15] 루손섬 현지에 정착한 푸젠성 교포 3세인 어느 부자에게서 쌀과 금전을 지원 받았으며, 다른 사람들로부터 쌀과 고기를 받기도 했다.[16] 비간의 역사학자 안토니오 플로렌티노는 문순득이 중국인들과 함께 건축 현장에서 나무 다듬는 일을 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당시 비간에서는 큰 주택들이 건설 중이었기 때문에 나무를 잘 다루는 사람들은 일감이 많았고 비간 사람들은 목공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그 일은 외국인들이 맡았다고 한다.[17] 본래 식민지총독들은 자국의 군주의 권한을 대행하는 인물이라서, 현지에서는 거의 왕이나 다를 바 없는 절대권력을 행사했는데, 당연히 외국인들의 입장에서는 왕으로 오해할 만도 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일제강점기만 해도 역대 조선 총독들은 한반도를 철권통치했고, 창씨개명이 실시될 때 조선 총독으로 부임한 미나미 지로(南次郎)를 보고 지방에 살던 어떤 남(南)씨 성을 가진 남자가, '종씨가 보위에 오르셨다'면서 문안인사를 드린답시고 경성부까지 온 사례도 있었던 것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18] 뱃삯으로 대은화 12개를 지급했으며 식사도 각자 해결해야 했다.[19] 이전의 표류자들도 베이징에 집결해 조선 사신단을 따라 귀국하는 게 일종의 매뉴얼이었다.[20] 청나라에서 조사하였을 때 본인이 써서 가지고 있던 문서가 있었다는 내용이 있는 걸 보아 아예 문맹은 아니었다. 어쨌든 자기 이름 석 자는 쓸 수 있지만 책을 집필할 정도까진 아니었던 듯하다.[21] 이강회는 유암총서에서 "비록 문자에는 능한 것은 아니나 사람됨이 총명함과 재능이 있다"는 평을 하였다.[22] 정약전은 문순득에게 '천초(天初)'라는 별호도 지어주었다. '(이런 경험을 한 것은) 조선 땅에서 네가 처음'이라는 뜻이다. 정약전이 문순득의 체험담을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남평 문씨 족보를 보면 문순득의 자가 대초(大初)인데, 아마 이와 연관이 있는 듯하다.[23] 문순득이 견문한 류큐 왕국, 마카오, 중국, 필리핀 등에서 얻은 선박 제조법을 위주로 하고 표류한 서양 선박의 제도까지 첨부하였다. 특히 저들의 선박과 조선의 선박을 비교하여 서술함으로써 그 우열을 드러나도록 하여 조선 선박의 특징까지 부각되어 보인다. 중간 중간 친구인 이청의 견문과 견해를 소개하기도 하면서 조선 선박의 취약성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저술인데 선박 제조법에 관해 조선시대에 쓰인 전문적인 저술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바 없기 때문이다.[24] '표해시말'에 보면, 정약용이 문순득의 아들 이름을 '여환(呂還)'이라고 지어 주었다고 적혀 있다. 아마도 여송(呂宋)에서 돌아왔다는 의미인 듯하다.[25] 정약전이 문순득보다 19살 연상이어서, 거의 문순득의 아버지 뻘이었다.[26] 류큐 왕국에 1차 표류했을 때 류큐와 조선에는 표류민을 본국으로 송환해 주는 상호 조약이 이미 있었다. 다만 당시 류큐는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어서 중국을 거쳐서 송환해 주었다고 한다. 어찌 됐든 류큐어를 그렇게 절박하게 익히지 않았어도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는 뜻이다(출처: 역사 스페셜). 거기다 현지에 조선어 통역사까지 있었다고 하니 간절해서 류큐어를 익혔다기보단 문순득 본인이 소통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던 것 같다.[27] 현재도 당시 하사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파일:문순득 공명첩.jpg이 6대손 문채옥의 집에 남아 있다.[28] 양력 9월이다. 문순득이 물고기를 사기 위해 배를 탔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한 끝에 유구국에 표착하기 3개월 전이다.[29] 이때 궁평이 1802년에 중국인 32명과 조선인 6명이 자기 나라로 표류해 온 일이나 이들이 중국 복건성으로 가는 배를 탔다가 또 풍랑을 만나 루손 섬으로 표류한 일을 언급하는데, 날짜와 표류 장소를 따져 볼 때 바로 문순득 일행 이야기일 확률이 높다.[30] 외국에 외교 문서를 보내거나 문의하는 행위[31] 일종의 외교관[32] 답신[33] '해당 행정구역'이라는 뜻. 여기서는 제주도를 의미한다.[34] 관공서 또는 그 부속 건물[35] 식량[36] 발음[37] 현재의 광저우[38] 기록의 맥락상, 현지 통역관의 도움을 받아 대화를 한 것으로 보인다.[39] 순조 1년인 1801년 신유년이다.[40] '주영편'을 보면, 하나는 '운안'(uno), 둘은 '너슈'(dos), 셋은 '드레시'(tres), 넷은 '과들우'(cuatro), 다섯은 '싱쿠'(cinco), 여섯은 '서이시'(seis) 등으로 적혀 있다.[41] 비간으로 비정한 이유는 그 당시 마카오로 가는 상선의 존재 유무, 일로카노어 사용 등이 있으며, 무엇보다 신묘를 묘사한 내용이 비간에 있는 파블로 대성당과 완벽하게 일치했기 때문[42] '19세기 초 문순득의 표류경험과 그 영향', 최성환[43] 문순득이 최초의 사례는 아닌데, 효종 시기에 전라 좌수사를 지낸 이도빈이 당시 조선에 표류해온 네덜란드인헨드릭 하멜 일행들에게서 네덜란드어를 배운 것이 한국인유럽 제어를 익힌 최초의 사례다.[44] 물론 워낙 낡고 오래되었다 보니 현대식 구조물로 벽과 지붕을 무너지지 않게 감싸 두었다.[45] 전남 신안군 지도읍 송도선착장에도 동상이 세워졌기 때문에, 총 2군데에 있었지만, 현재 송도선착장의 동상은 철거된 상태이다. 네이버 거리뷰 기준으로 2023년 11월 촬영본에는 없으며, 2020년 9월 거리뷰에서는 동상을 확인할 수 있다.[46] 문순득이 어렸을 때 코다유가 러시아로 표류했고 코다유가 일본으로 귀국한 뒤 10여 년 후에 문순득이 필리핀으로 표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