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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5 21:29:15

헨드릭 하멜

<colbgcolor=#000000><colcolor=#FFF>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서기관
헨드릭 하멜
Hendrik Hamel
파일:external/farm5.static.flickr.com/5022587122_8ed1de7226.jpg
그의 고향인 네덜란드 호린험에 세워져 있는 '헨드릭 하멜'의 동상
출생 1630년 8월 20일
네덜란드 공화국 호린험
(現 네덜란드 왕국 호린험)
사망 1692년 2월 12일 (향년 61세)
국적
[[네덜란드 공화국|]][[틀:국기|]][[틀:국기|]]
직업 서기, 선원
조선 이름 남하면

1. 개요2. 생애
2.1. 조선에서의 삶2.2. 《하멜 표류기2.3. 조선과 일본의 외교 분쟁
3. 대중매체에서4.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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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헨드릭 하멜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서기 겸 선원이다.

1653년(조선 효종 4년)부터 1666년(조선 현종 7년)까지 조선에 살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하멜 표류기》라는 책을 써낸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에서는 '하멜'로 알려져 있지만 네덜란드어로는 '하멀'에 가깝다.

2. 생애

2.1. 조선에서의 삶

건축가의 아들이고, 그의 대부가 시장(市長)이었으며, 300휠던짜리 집을 살 정도로 부유했던 인물이다.

고향 호린험(Gorinchem)[1]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후 1650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입사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당시 기준, 어마어마한 규모의 회사주식회사개념을 만든 곳이었다.

1653년 상선 스페르버르호(Sperwer, 네덜란드어로 '새매')에서 회계 및 서무(Bookkeeper)로 일하며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제주도 부근에서 폭풍을 만나 표류했고, 제주도에서 몇개월간 억류되었다. 이때 머무른 폐주 광해군유배되었던 집이라고 한다.[2] 당시 제주목사(155대)[3]이자 하멜의 일을 처리한 이는 태호 이원진(李元鎭, 1594-1665)인데 반계 유형원의 스승이자 성호 이익의 당숙되는 사람으로, 그가 제주목사 시절 저술한 《탐라지》는 조선 중기 제주도의 문화를 연구하는 데 필수 사료로 대접받고 있다.
"배 한 척이 고을 남쪽에서 깨져 해안에 닿았기에 대정 현감(大靜縣監) 권극중(權克中, 1621~?)과 판관(判官) 노정(盧錠)[4]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보게 하였더니,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배가 바다 가운데에서 뒤집혀 살아 남은 자는 38인이며 말이 통하지 않고 문자도 다릅니다. 배 안에는 약재(藥材) · 녹비(鹿皮) 따위 물건을 많이 실었는데 목향(木香) 94포(包), 용뇌(龍腦) 4항(缸), 녹비 27,000이었습니다. 파란 눈에 코가 높고 노란 머리수염이 짧았는데, 혹 구레나룻은 깎고 콧수염을 남긴 자도 있었습니다. 그 은 길어서 넓적다리까지 내려오고 옷자락이 넷으로 갈라졌으며[5] 옷깃 옆과 소매 밑에 다 이어 묶는 끈이 있었으며 바지는 주름이 잡혀 치마 같았습니다.[6] 왜어(倭語)를 아는 자를 시켜 묻기를 ‘너희는 서양키리시탄(吉利是段)인가?’하니, 다들 ‘야야'(耶耶)[7]하였고, 우리나라를 가리켜 물으니 고려(高麗)라 하고, 본도(本島)를 가리켜 물으니 오질도(吾叱島)라 하고, 중원(中原)을 가리켜 물으니 혹 대명(大明)이라고도 하고 대방(大邦)이라고도 하였으며, 서북(西北)을 가리켜 물으니 달단(韃靼)이라 하고, 정동(正東)을 가리켜 물으니 일본(日本)이라고도 하고 낭가삭기(郞可朔其)라고도 하였는데, 이어서 가려는 곳을 물으니 '낭가삭기'라 하였습니다.
제주목사 이원진의 치계(馳啓), 《효종실록》 11권, 효종 4년 8월 6일 무진 2번째기사

조정에서는 이들을 한성으로 올려 보내도록 명령했다. 실록에는 "그들 중에는 퉁소를 부는 자도 있었고 발을 흔들며 춤추는 자도 있었다."도 있었다고 적고 있다. 잠시 제주에 머물던 하멜은 일행들과 함께 수도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이때부터가 기나긴 억류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이들보다 먼저 조선에 표류해 아예 조선에 정착한 얀 야너스 벨테브레(박연)가 이들의 통역으로 오게 되어 만남을 가졌다. 박연은 오랫동안 조선에 머문지라 네덜란드어가 상당히 서툴렀고, 다시 능숙히 네덜란드어를 구사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하멜과 일행은 송환 의사를 박연에게 전달했으나 박연은
"한번 여기 들어오게 되면 쉽게 나갈 수가 없으니까 포기하라"

라는 절망적인 답을 해줬다. 하멜은 효종에게도 일본으로 가게 해 달라고 간청했으나 결국 기각되어 훈련도감에 소속되었다.

이게 '이방인을 외부로 보내지 않는다'는 쇄국정책에 따라 억류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조선 시대에는 이방인에게도 예와 체통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표류해 온 외부인은 송환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단적으로 하멜보다 80여 년 전에 표류해 왔던 서양인명나라를 통해 송환한 적이 있고, 정조때는 영국 함선 프로비던스호가 부산항에 왔을 때 물자와 식량까지 챙겨서 돌려보낸 적이 있었다.

이들보다 30년 전인 인조 때에 표류해온 같은 네덜란드인 박연도 원래대로라면 명나라에 보내 줬겠지만 당시 명나라의 정세가 혼란하여 명나라로 보내지도 못했고, 일본을 통해 송환하려 했으나 당시 기독교 탄압 중이던 일본 에도 막부는 박연이 키리시탄이라는 이유로 "키리시탄 안 받아요"라고 거부하여[8] 그는 조선에 정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북벌이라는 특이한 상황 속에서 벌어진 하멜과 박연의 억류가 조선시대를 통틀어 매우 예외적인 사례였던 셈이다.

당시 조정에서 대외적으로 청나라에 대한 북벌(北伐)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하멜 일행은 군사 기술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조총을 개량하는 등 조선에서 살게 되었다는 설이 널리 알려졌지만 실제로 기술자들은 표류 과정에서 익사해 다 죽었고, 이들에겐 별다른 기술이 없었다.

하멜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과 같이 조선에서 탈출한 일행 중 서양식 배를 만들 수 있는 선박 제조 기술자, 그리고 장거리 항해에 필요한 기술을 가진 이 등 다양한 기술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다만 당시 조선 정부가 화포 기술 외엔 관심이 없었고, 무엇보다 중국과 일본을 제외하면 국제 정세를 너무 몰랐던 탓이 크다. 그리고 하멜은 항해사였다. 처음에 이들을 써먹으려던 조정은 별 수 없이 이들을 훈련도감에 배속시켜서 효종의 친위대로 썼다. 이는 중앙정부의 눈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하멜이 두 차례나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고 알려졌기도 하지만, 하멜이 탈출을 시도한 것은 한 번뿐이었다. 먼젓번에 있었던 두 차례의 탈출 시도 중 첫 번째 탈출은 제주도에 표류한 지 얼마 안되어 어부들의 어선을 탈취해 시도한 것인데 하멜은 포함되지 않았었고, 탈출을 시도한 자도 다섯 명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유럽의 범선과 항해술이나 조종법이 다른 조선 배는 타본 적이 없어 기술 미숙으로 결국 잡히고 말았다. 청나라 사신 일행에게 뛰어드는 일도 하멜은 직접 가담은 하지 않았고, 그가 직접적으로 가담한 탈출 시도는 최후에 일본으로 탈출한 것뿐이다.

다만 제주도에서 전라도로 이송되던 중에 군졸들이 죄다 배멀미로 골골거리자, 이 맥주병들을 바다에 처넣고 배를 탈취할까?라고 고민했으나 군졸들이 배의 탈취를 걱정하여 하멜 일행을 4척에 배에 나눠 태운 것도 모자라 다리와 팔 하나씩을 나무 기둥에 묶어두어서 포기하였다고 한다.

하멜 일행은 왕명에 의해 한양으로 이송되었고, 그 과정에서 하멜은 자신이 들른 조선의 고을들에 대해 많은 기록을 남기며 그가 상륙한 이 신세계에 대해 꼼꼼히 기록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나중에 《하멜표류기》의 기초 자료가 된다. 1개월여 간의 여정 끝에 한양에 도달한 하멜은 효종을 알현했다.

하멜은
"조선인들은 우리를 괴물로 여겼다."
라고 기록했다. 동시에 조선인들은 하멜의 이목구비와 하얀 피부를 신기해했다고 한다. 반면에 조선은 하멜 일행 외에 다른 서양인을 보고는 '면철'(面鐵), 즉 '녹슨 철빛 얼굴'을 가졌다고 기록한 적이 있다. 즉, 서양인은 붉은 피부를 지녔다고 기록한 것이다.

당시 신분을 가리지 않고 하멜 일행은 화젯거리였고, 너도나도 구경하러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건 하멜 일행의 생김새가 사람이 아니라 괴물 같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인데, 조선인들은 하멜 일행의 생김새를 희화화하며 이야깃거리로 삼았다고 한다. 괴물 취급받던 하멜 일행에게 동정심을 느낀 사찰의 승려들이 그들을 잘 대해주었기 때문에 하멜 일행은 승려들과 가장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그 외에 그들은 대갓집에 불려다니며 네덜란드 노래와 춤을 보이는 일 따위를 해 식량을 얻었고, 대갓집 하인들이 주인의 명령이랍시고 속여서 이들을 불러내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그의 동료 두 명이 군졸로 있다가 청나라의 사신이 조선에 왔을 때 지나가는 길에 무단으로 뛰어들어 자신들의 송환을 청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들은 헨드릭 얀스[9]와 포수인 헨드릭 얀스 보스라는 자들로 각각 '남이안'과 '남북산'이라는 조선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헨드릭 얀스 보스가 호소하는 데도 불구하고 네덜란드 말을 모르는 청나라 사신들이 "뭐야, 이것들은?" 하고 멀뚱히 있자 사태가 이상함을 느낀 헨드릭 얀스는 잽싸게 튀어버렸으나 곧 체포되었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에는 한 명의 범행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승정원일기》에 한 놈은 현장에서 잡히고, 한 놈은 달아났지만 체포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청나라 사신들에 대해 하멜은 이렇게 기록했다. 먼저 청나라 사신들을 '타르타르'(혹은 타타르)라 적었다. 하멜은 청나라를 이렇게 불렀다. 아시아에서는 유목민족들과 교류가 잦은 편이라 비교적 여러 유목민족들을 정확하게 구분해서 거란족, 말갈족, 여진족, 몽골족 등으로 다르게 불렀지만, 유럽은 유목민족과의 교류가 거의 없어서 구분하지 못했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유럽 동부에서 주로 활동하는 유목민족들을 그냥 싸잡아서 '타타르'라고 불렀다. 예를 들어 러시아가 몽골 지배를 받던 시절에는 '타타르 러시아'라고 불렀다. 청나라는 유목민족인 만주족이 세운 나라이므로 유럽인들은 중국이 타타르의 지배를 받는다고 여긴 것이다. 또 하멜에 따르면 이 사건이 일어나자 조선 조정이 불안해했다고 서술했다. 청나라 사신들이 네덜란드인들을 보고 스페르베르 호가 표류한 후 조선이 취한 30만 냥에 달하는 재물을 청나라가 조선에 요구할까봐 불안해했다는 것이다. 조선 조정에서는 무엇보다 화란인들로 구성된 부대를 조선에서 조직하고 있지 않은가 하고 청나라에서 의심할까봐 매우 두려워했다고 저술하고 있고, 《조선왕조실록》도 비슷한 맥락이다.

결국 조정에서 청나라 사신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먹여 이 일을 무마시키고 이들은 투옥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낙심한 나머지 음식을 거부하다 곧 죽었다고 하고 하멜은 이들이 참수된 것이 아닐까 하는 추리만 남겨놓았다. 어쨌든 탈출 소동은 조정을 경악하게 만들었고, 하멜 일행을 몹시 불순하고 위험한 놈들로 인식하게 되었다. 범행에 가담하지 않은 '33명'에게 전부 곤장 50대를 선고하여 매운 맛을 보여주려고 했다. 처음에 표류한 사람은 36명인데 한양으로 올라가기 위해 배를 타고 전라도에 상륙한 지 얼마 안 되어서 파울루스란 사람이 죽어 35명이 된 것이다.

하지만 효종이 이들은 도둑질을 하러 조선에 온 것이 아니라고 변호하여 장형은 피했지만 곧이어 그해 8월에 청나라 사신이 또 오게 되면서 조정엔 비상이 걸렸다.

조정에서는 이 자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하여 조선말을 잘하는 세 명에게 또 남만인들이 상륙했으니 통역으로 차출하라고 거짓 지시를 내려 전라도 해안으로 보내 사실상의 인질로 삼고, 하멜 일행과 청나라 사신들과의 대화 매개체를 박탈했다. 청나라 사신들은 곧 돌아갔지만 조정에선 이들을 마땅히 죽여야 한다는 논의가 매우 거셌다. 그들의 직속 상관인 이완은 이들을 조선 병사들과의 결투를 붙여 죽을 때까지 싸우게 하면 외국인들을 무고하게 죽였다는 말은 듣지 않을 거라고 하는 등 아예 명예로운 죽음이라는 방법을 주장하며 이들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했고, 대다수의 조신들도 그들을 죽일 것을 청했다.

이때의 상황이 심각하여 벨테브레이는 하멜에게 당신들이 만약 앞으로 3일만 더 살 수 있으면 살아남을 것이라 전했을 정도였다. 그 말은 앞으로 3일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는 경고로 해석된다. 위기의식을 느낀 하멜 일행은 때마침 그들 숙소를 지나는 인평대군(효종의 동생)에게 그들의 사정을 호소하며 살려줄 것을 간청했고, 동정심이 든 인평대군과 효종은 그들을 강력히 변호하며 전라병영으로 유배보내는 것으로 벌을 마무리지었다. 하멜도 기록에 국왕과 국왕의 동생 덕에 우린 목숨을 건졌다고 저술해놨다.

이때 일행 중 일부는 조선인 처까지 구해 자식까지 낳았다고 추정된다. 사학자들은 그들의 배우자가 무당이나 과부 같은 소외된 여자들일 것이라 추측한다. 이들은 남만인이라 모두 '남(南)씨' 성을 하사 받았다. 하멜의 조선 이름은 '남하면'이었다. 일행 중에는 자식이 있었다고 하며 '병영 남씨'라고 해서 현재도 그 후손들이 남아있다는 얘기도 있는데 의령 남씨에 별보로 편입된 상태라는 얘기도 있으며, 남일도 병영 남씨라는 얘기가 있다. 다만 후자의 경우에는 신빙성이 있는 얘기인지는 다소 의문이다.

처음엔 전라병영에서 7년 가량 지냈다. 현재 전라남도 강진군 병영면에는 당시 전라병영성이 복원되어 있으며 이와 함께 병영성 동문 맞은 편에 하멜 기념관을 지어 역사문화관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하멜은 전라병영에 도착한 직후, 성벽과 돌담을 쌓는 노역에 시달렸다고 하는데, 지금도 인근 민가에는 이들 일행이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네덜란드 스타일의 돌담이 남아있다.[10] 강진군은 매년 4월 중순에 강진 전라병영성 축제를 개최한다.

그러다가 현종때 찾아온 극심한 흉년으로[11] 나주, 순천 등으로 그룹을 나누어 이배했는데 하멜은 여수전라좌수영으로 가게 되었다[12] 그를 인계받은 전라 좌수사 이도빈(李道彬, ? ~ ?)은 네덜란드인들을 후히 대접해주며 한 달에 2번씩 있는 점호를 빼곤 모든 노역을 면해주었다. 또한 네덜란드어를 배우고 자주 연회를 베풀며,
"확 일본으로 배타고 달아나는 게 어떻겠냐"

고 탈출을 종용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하멜도 그의 말에 큰 자극을 받게 되었다. 하멜은 "좋은 사람(이도빈 좌수사)을 부임시켜 주신 데 대해 하나님께 감사했다"라는 기록도 남겼다. 이도빈은 하멜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두루 아끼는 사람이었는지, 좌수사시절 백성들이 선정비를 세웠을 정도이며, 훗날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냈다.[13]

또한 전라병영에서 지내는 동안 근처의 승려들과 아주 잘 지냈다고 한다. 유교 사회에서 배척을 당하는 승려들이 이역만리에서 괴물 취급 당하는 하멜 일행에게 동정심과 동병상련을 느껴서 자주 교류하고 네덜란드의 얘기도 듣고 했다고 한다.(출처 <역사저널 그날>, -네덜란드 청년 하멜, 조선에 표류하다- 편)

그러던 중 전라 좌수사가 총 네 번 교체되어 하멜은 다섯명의 수사를 겪게 되는데 앞서 언급한 이도빈과 이들이 마지막으로 만난 좌수사인 정영(鄭韺, 1610 ~ 1679)을 빼고는 네덜란드 인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이도빈이 물러난 이후, 부임한 자는 네덜란드인들을 부려먹으려고 작정을 했는데 심장마비로 급사하여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그 후임으로 온 사람도 네덜란드 인들을 착취하려는 생각은 마찬가지라서 새끼줄을 꼬아내라는 등 요구를 해댔다. 하멜 일행은 우리는 새끼줄을 꼴 줄 모른다고 하여 수사가 부여한 노역을 회피하는 한편, 저 자는 우리를 톡톡 털어먹으려고 작정한 자이며 우릴 못살게 굴 것이 틀림없다며 탈출을 결심하게 된다. 마지막 좌수사 정영의 경우,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싸우다 부상을 입자, 인조가 곤룡포를 찢어 상처를 감싸줬다는 일화가 있는 인물로, 하멜이 도망간 일로 인해 큰 문책을 받지는 않았는지, 전라 좌수사 이후 경상 우병사 등의 직위가 계속 내려졌으나 모두 사양하고 고향에 내려가 여생을 보냈다.

하지만 수사들이 딱히 인종차별을 했다는 언급은 없다. 다만 뒷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하멜 일행을 쥐어짜내려고 한 것이 문제일 뿐 뇌물로 관직을 사고 백성들을 수탈해 그 비용을 충당하는 세태는 조선시대 관료제도의 고질적 병폐이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하멜 일행에게 잘 대해준 이도빈과 정영은 맡은 일도 게을리 하지 않고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던 반면, 하멜 일행을 괴롭힌 관료들은 전형적인 탐관오리라 일반 백성들도 싫어했다.

탈출 계획은 매우 치밀했는데 그들은 우선 배를 구하기 위해 그동안 모은 돈으로 친해진 이웃사람의 이름으로 동네 어부의 어선을 사게 되었는데 이 동네 어부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되고 거래를 무르려고 하자 원래 가격의 2~3배의 가격을 더 주어 간신히 배를 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몇년 동안 이 배를 이용해 바닷길로 장사를 하며 좋은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고, 1666년 드디어 8명의 일행들과 함께 극적으로 탈출해서 일본 나가사키 데지마에 도착했다. 이 때 모두 온 것은 아니라서 8명은 조선에 그대로 남은 상태였다.

일본은 철저한 조사를 통해 이들이 선교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되자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으로 인계했고, 하멜은 네덜란드가 일본에 강력히 요청하면 남은 8명의 사람들도 모두 송환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리하여 네덜란드는 일본을 통해 조선에 송환을 요구했고, 일본도 네덜란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며 조선에서도 이득을 얻어낼 기회라고 판단하여 조선에 송환을 요구하게 되었다.

공식적인 요청 이전에 물밑 접촉이 벌어졌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 물밑 접촉에 이르러서야 조선은 네덜란드인 8명이 탈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곧 조정에 보고 되었고 사건이 벌어지고 몇 달이 지났는데도 지방관들에게 탈출 사실이 보고 되지 않고 일본을 통해 알게 된 사실에 조정은 분개하고 조사를 지시했다.

일본은 이들을 송환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정보라도 더 얻어내려고 치밀하고 집요하게 심문했다. 나가사키 부교가 당시 하멜에게 던진 질문은 모두 54가지로 "하멜 너는 어느 나라 사람이며 어디에서 오는 길인가"로부터 시작해서 난파된 지점, 하멜이 타고 있었던 배의 대포 수, 배의 화물, 한양으로 압송된 연유 등 기본적인 사항들에 대해 묻고는 더 나아가서 조선의 산물, 군사장비, 군함, 종교, 인삼 등 세세한 정보들까지 체계적으로 질문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그들이 14년 동안 조선에 머무르며 보고 들은 정보를 단 하루만에 캐냈다. 또한 조선에는 그들을 송환해주는 대가로 통상에 관한 이익을 더 얻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일본 측이 과거 박연의 송환을 거절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끝나버린다. 또 남은 8명에 대한 송환은 조선으로서도 이들을 데리고 있을 명분이 빈약해서 결국 네덜란드로 송환하기로 했다.

돌려보낼 때 중간 집결지에서 좋은 옷을 입혀 보내야 조선의 체면이 안 깎인다는 의견이 조정에서 진지하게 논의되었고 결국 이들은 옷을 지급받고 귀국하게 되었다.[14]

하멜 일행은 이들이 송환되기 전에 이미 일본을 떠났는데 13년간의 임금을 지급받기 위해 동인도 회사에 보고서를 작성했고 이것이 《하멜표류기》이다. 동인도 회사는 13년만에 돌아온 이들에게 거액의 돈을 주기 싫어서, 항해중 실종 당일부터는 근무자가 아닌 것으로 간주하고 대신 2년치의 임금을 제시했다. 다만 살아남은 사람 중 한 명[15]은 8명이 송환될 때 이미 죽었다고 해서 돌아오지 못했는데, 사실은 살아있는데 송환을 거부했고 이를 받아들인 나머지 일행들이 입을 맞춰 계속 조선에 남았다는 설이 있다.

2.2.하멜 표류기

귀국한 하멜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13년간 받지 못한 임금을 청구했고, 이에 대한 증거로 써서 낸 것이 바로 《하멜 표류기》였다. 이 《하멜 표류기》는 크게 <표류기>(漂流記)와 <조선 왕국기>(朝鮮王國記)로 구성되어 있다.

<표류기>는 네덜란드를 떠난 이후, 조선에서의 억류 생활을 거쳐 다시 귀국할 때까지 일어난 일들을 기록한 일지이며, 난파 경위, 조선에 표박한 이후 하멜 일행이 겪은 체험과 감상이 연대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왕국기>는 조선의 지리, 풍토, 산물, 정치, 군사, 형법 제도, 종교, 교육, 교역 등 하멜이 조선에서 체류하면서 보고 들은 조선에 대한 각종 정보들을 기록한 것이다.

어쨌든 하멜은 네덜란드로 되돌아온 이후로도 선원 일을 계속해 서인도 제도에 갔다왔다는 기록과 평생 미혼으로 살았다는 기록이 있지만 자세히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는 불명이다. 참고로 하멜과 그 일행들이 청구했던 임금의 경우, 처음에 신청한 그룹에게는 배가 침몰하면 일 안한 걸로 간주한다면서 2년치의 봉급만 인도적인 차원에서 주고 씹어버렸다.

반면 하멜 등 7명의 2차 그룹에게는 13년치의 봉급을 지급했다. 이유는 《하멜 표류기》가 너무 뜨면서 동인도 회사에서 조선에 대한 관심이 지대해져서 그랬다고 한다. 《하멜 표류기》는 불티나게 팔려 순식간에 불역본, 독역본, 영역본이 나왔으며 17세기에 나온 책이 1885년까지 계속 판을 찍어냈다.

이후 《하멜 표류기》는 조선에 대한 지리, 언어, 풍속 등을 유럽에 소개하는 가장 대표적인 책으로 알려졌다. 이전까지 서양인들에게 조선이라는 나라는 악어괴조가 사는 아프리카 같은 신비한 곳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비단 조선뿐만 아니라, 아시아 국가에 대한 인식이 거의 이랬다. 21세기에도 한국이 동남아 정글이고, 한국인들이 쿵푸와 기체조를 즐긴다고 아는 사람이 있다. 인터넷TV도 없던 17세기에는 동양에 대한 온갖 판타지가 난무했다. 그러다가 이 책을 통해 조선이 더 자세히 알려졌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는 《하멜 표류기》를 보고 일본과의 교역보다 조선과 직접 교역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일본은 네덜란드에서 사온 물건을 조선에 팔면서 이익을 남기고 있었다. 그래서 "코리아 호"라는 배까지 만들어 직접 무역을 하려고 했으나. 일본이 조선과의 무역 이익을 남기기위해 "네덜란드가 직접 조선과 무역을 하려고 시도할 경우 일본과 네덜란드의 교류는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강력하게 압박하여 동인도회사는 조선과의 무역을 포기하게 된다. 그래서 실은 일본의 방해를 피할 꼼수도 부릴 겸, 나가사키를 방문하는 조선 상인이나 사신들을 대상으로 간접 무역을 했다.

조선에 대한 악평이 보이는 등 우리에겐 다소 비우호적으로 서술되어 있는 편인데, 13년 동안이나 억류돼있었으니 좋은 얘기는 거의 없다.

이를 위해 "조선 여자와 결혼해 아이까지 생겼다"라는 불리할듯 싶은 이야기도 제외했다. 물론 옆에 있었던 다른 선원 및 지인들이 기록하거나 문답한 내용에는 있었다. 사실 창창한 22세부터 36세 중년이 되도록 10년 넘게 여기저기 이송다니며 각종 부역에 동원되는, 사실상 노예나 다름없는 삶을 살게 한 조선에 대해 우호적인 관점을 가질래야 가질 수가 없었을 것이다.[16]

하지만 표류 직후, 우리는 이교도들에게 기독교도로서 무색해질 정도의 후한 대접을 받았다고 저술하는 등 호의적인 내용도 많다. 더불어 평생 미혼이었다. 조선에서 맺어진 처와 자식에 대한 감정도 실려있는 듯 보인다. 메마른 내용들로 가득한 <표류기>의 내용들 중 이상하리만치 감정이 실려있는 부분이 있다. 전라도 유배순천, 나주 등으로 이배할 것을 명받자
"우리가 어떻게 기반을 마련했는데 떠나라니!"
라며 한탄하는 내용이다.

2.3. 조선과 일본의 외교 분쟁

조선에서는 십수 년간 하멜을 데리고 있었으면서도 하멜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조차 관심이 없었으나 당시 일본스페인, 잉글랜드, 네덜란드와의 교류를 통해 서양 사정을 파악하고 있었다.[17] 일본은 하멜이 조선을 탈출해서 건너오자 그 날 조사를 통해 하멜의 국적과 소속은 말할 것도 없고 하멜이 조선에서 보고 들은 모든 정보를 죄다 캐냈다. 일본은 조선에게 "하멜 등은 화란인으로[18] 일본의 속국민[19]들인데 어찌하여 일본에 인도하지 않고 멋대로 억류하고 재물을 강탈했느냐"고 항의하여 외교적 문제로 번지게 된다. 조선에서는 "말이 통하지 않고 일본인도 아닌데 우리가 어떻게 이들이 일본으로 가는 것을 원했다는 것을 알았겠냐"며 적당히 무마하려 했다. 하지만 철저한 조사를 통해 이들이 조선에게 일본으로 가고자 한 사실을 분명히 밝혔고 박연이라는 네덜란드어를 거의 까먹은 통역까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조선은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곧 적절한 '반박 사례'를 찾게 되는데 바로 벨테브레가 처음 조선에 왔을 때 조선에서 왜관을 통해 네덜란드로 돌려보내려 했는데 일본에서는 벨테브레가 키리시탄이라는 이유로 거부했던 사실이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조선이 이걸 들이밀면서 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20]

3. 대중매체에서

4. 같이보기



[1] 로테르담 동쪽에 위치해있으며 강진군과 자매결연 관계이다.[2] 물론 광해군은 이미 오래 전에 사망고인이었다.[3] 1651년(효종 2) 7월부터 1653년(효종 4) 10월 재임[4] 이 사람은 경신대기근 때에 제주목사를 맡고 있었고, 제주가 초유의 대기근 앞에서 겪었던 말도 못할 참상을 제주도민들과 함께 아주 생생히 체험했다.[5] 더블릿(doublet) 또는 저킨(jerkin) 같은 복장으로 추정된다.[6] 브리치즈(breeches)나 이와 유사한 복장으로 추정된다.[7] Ja(=영어 Yes).[8] 그때 마침 네덜란드와의 사이도 별로 안 좋았다.[9] 스페르버르호의 1등 항해사로 선장이 표류 중 사망했기 때문에 생존한 인원들 중 최선임자였다.[10] 돌담을 지그재그식으로 교차해서 쌓았다.[11] 경신대기근. 이 시기는 조선뿐 아니라 전 세계가 소빙하기로 고통받던 시기였다.[12] 오늘날 여수시에서는 이를 기념하여 하멜로라는 도로명을 지었고 종포해양공원에 하멜 등대, 하멜 전시관 등을 세웠다. 한편 그가 갔던 전라좌수영 터에는 진남관이 세워져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13] 후에 그의 아들도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냈으나, 당파싸움에 휘말려 귀양을 갔다가 결국 사형당했다.[14] 체면은 어차피 모든 문화권이 중시한다.[15] 요리사 얀 클라에천(Jan Claeszen, 1620 ~ 1661)으로 추정됨[16] 또한 하멜 표류기의 목적 자체가 동인도회사에 임금을 청구하는 것이었으므로, 최대한 고생했던 내용으로 써야 유리했다.[17] 서양에 대한 경계심이 커지면서 스페인, 잉글랜드와의 교류는 잠정 중단했다.[18] 조선은 "아, 걔들이 화란이라는 나라의 사람들이었냐? 근데 거기는 어디여?"하는 반응이었다.[19] 당시 일본은 조선에 네덜란드를 자국의 속국으로 왜곡 선전하여 조선과 네덜란드의 접촉을 철저히 막고 있었다. 물론 조선 또한 네덜란드가 일본의 속국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딱히 외교적으로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았는지 그냥 무시하고 넘어갔다.[20] 더 이상 이 문제로 조선하고 갈등을 원치 않았던 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츠나는 당시 정무담당 가신들 에게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 지으라고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21] 집 모양의 미니어쳐 술병으로 네덜란드 전통 증류주인 예네버(Jenever)가 들어 있다.[22] 제주, 한양, 동래, 덕원, 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