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일본 전국시대의 인물로 오다 노부나가를 섬겼던 것으로 알려진 흑인.2. 생애
원래는 이탈리아 예수회 소속 선교사 알렉산드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 1539 ~ 1606) 소유의 노예였다. 당시 포르투갈령 아프리카였던 모잠비크에서 발리냐노가 기항 당시 구매했는지, 아니면 인도에 들렀을 때 인도에서 구매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1581년 발리냐노가 노부나가를 알현했을 때 데리고 왔는데, 흑인을 신기하게 생각한 일본인들이 그를 보려고 하다가 인파가 몰려 부상자가 발생할 정도로 눈길을 끌었다고 한다.노부나가는 처음에는 피부가 검은 사람이 정말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해 몸에 무언가를 칠한 속임수가 아닌가 싶어 시종에게 그를 씻기도록 했다. 그러나 씻으면 씻을수록 피부가 더 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서 피부색이 검은 인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큰 관심을 보이고 발리냐노로부터 헌상받아 그를 가신으로 들였다. 야스케라는 일본식 이름은 이때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도쿄대학 사료편찬소 교수 가네코 히라쿠의 주장에 따르면, 신장공기의 한 판본에는 노부나가가 야스케에게 개인 저택과 태도를 하사하고 자신의 오도구모치(お道具持ち)[1]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도쿠가와의 가신이었던 마츠다이라 이에타다가 남긴 가충일기(家忠日記)에는 야스케를 보고 놀랐던 경험이 기록되어 있다. 나가시노 전투로 다케다 가문을 무찌르고 고슈 정벌에 성공한 노부나가가 도쿠가와의 영지를 시찰할 때 수행하는 야스케를 본 것인데, 소처럼 검은 피부를 가진 6척 2촌[2]의 장신이었으며, 나이는 26~27세 정도로 엄청난 괴력을 지녔다고 묘사하고 있다.
눈에 띄는 것을 좋아하고 신기한 것을 수집해 내보이기를 좋아했던 노부나가는 야스케를 데리고 대로를 걷거나 차력쇼를 펼치곤 했기 때문에, 당대의 그림이나 기록에서 야스케로 추정되는 흑인이 발견되기도 한다. 예수회에서는 본래 노예에 불과했던 야스케가 총애를 받자 "사람들이 노부나가가 이러다 야스케를 토노(성주)로 삼으려는 게 아니냐고 쑥덕거렸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러다가 혼노지의 변 때 다시 등장하는데, 선교사들의 기록에 따르면 야스케는 노부나가가 이미 죽은 상황인데도 끈질기게 싸웠지만, 투항을 권고받고 칼을 넘겨주고 붙잡혔다고 한다. 아케치 미츠히데는 사로잡은 야스케를 두고 "이 흑인은 동물이라 아무것도 모르고 일본인도 아니니 죽이지 말고 선교사들에게 넘겨라"(「黒奴は動物で何も知らず、また日本人でもない故、これを殺さず」)라고 명령해서 목숨을 건지고 남만사(南満寺)[3]로 추방당했다는 내용이 예수회 선교사들의 기록에 남아 있으며, 이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3. 야스케는 사무라이였나?
흔히 가신이라고 하면 오다 사천왕 같은 무장들을 떠올리기 쉽지만, 다이묘의 가문에 소속되어 주인을 섬기는 사람들 중에는 단순히 밥을 짓거나 빨래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에, 야스케가 실제로 당시 지배계층에 속한 사무라이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노부나가로부터 저택과 단도를 직접 하사받았고 전장에서 창을 들고 수행하는 역할이었다는 점과 '이러다가 토노(殿)[4]로 임명되는 거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야스케는 노부나가를 지척에서 지키는 호위무사로서 상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이미지가 퍼져 있다. 하지만 미디어에서 역사적인 인물들과 대등한 위치로 등장하는 것에는 설득력이 없는데, 야스케가 노부나가를 섬긴 기간은 고작 약 15개월으로, 충직했다고는 하지만 일본어나 겨우 통하면 다행인 사람이 무장 가신들과 같은 수준의 대우를 받았다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물론 노부나가의 인사 등용이 어마어마하게 파격적이었고, 드라마틱한 신분 상승이 흔했던 시대이기 때문에 하급 사무라이조차 아니었을 거라고 단정할 순 없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인종과 출신의 한계를 생각하면 어쌔신 크리드: 섀도우스에서처럼 값비싼 갑옷과 투구를 차려입을 수 있는 존귀한 신분이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하지만 21세기의 미디어에서 야스케의 독특한 이미지는 굉장히 구미가 당기는 캐릭터성이기 때문에, 노부나가 사망의 비밀을 풀거나 열쇠를 쥔 캐릭터로 등장하거나, 아예 당세구족을 갖춰입은 위풍당당한 사무라이로 그려지곤 한다. 이러한 창작물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노부나가의 흑인 호위무사라는 이미지가 널리 퍼지게 되었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미디어의 캐릭터 니즈에 따라 형성된 이미지에 가깝다.
3.1. 사무라이가 맞다는 주장
야스케에 대한 의혹이 심해지자 일본의 역사학자이자 교수인 히라야마 유[5] 교수는 인터넷에서의 이러한 의혹에 대해 역사적 사료를 제시하며 야스케가 노부나가에게 사무라이라 부르기에 걸맞은 대우를 받았다는 점을 트위터를 통해서 설명하였다. #트위터 #1 #2이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면 야스케는 검증된 사료[6]를 통하여
이 조건을 만족하였기 때문에 충분히 사무라이라 칭할 자격이 있음을 설명하였다. 특히 당시 주군인 다이묘에게 태도를 하사받는 다는 것은 아주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지적하였다.일부에서 주장하는 야스케가 받은 도가 태도가 아니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야스케가 받은 도는 さや巻之のし付라 명시되어있으며 さや巻之のし付는 이 노시츠키는 금이나 은으로 장식된 고급 칼집이며 이것은 태도에 해당하며 또한 고사유원(古事類苑)에 이러한 종류의 칼은 무가만이 사용할수 있다는 문헌을 예시로 제시하였다.
또한 노부나가에 대한 역사서인 신장공기(信長公記)에는 다양한 판본이 존재하며 이러한 판본은 아직까지도 모든 내용이 총 취합되지 않았으며 일부내용은 세간에 공표되지 않은 사실도 있는데 이중 야스케가 받은 구체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며 다이묘로부터 이러한 하사를 받았으면 충분히 사무라이에 준할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트위터를 통해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야스케가 사무라이 내지는 충분히 그에 준하는 위치였다는 사실을 소수의 사료를 통해 확인되고 있으나 유비소프트에서 제작하는 일본을 무대로한 어쌔신크리드에서 일본인 대신 흑인이 주인공으로 나온다는 사실에 여론이 흥분되어 있으며 이로 인해 사실이 아닌 것까지 무차별적으로 퍼져나가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우려를 밝히고 있다.
다만 이 경우에도 검은 동물로 멸시당한 걸 보면 존귀한 신분같은 건 절대 아니였고[7], "오도구모치(お道具持ち) 로 임명했다", "괴력이 뛰어났다" 라는 역사적 기록을 근거로 아무리 높게 쳐도 호위무사로 보는게 맞고, 장수로 전장에 나갔다는 기록은 아예 없다.
그래서 야스케를 '사무라이' 라고 인정하더라도 어새신 크리드 쉐도우스가 비판을 피할 수 없는데, 아무리 높게 쳐도 노부나가의 호위 가신이라는 사람이 고위 사무라이만 입는 화려한 당세구족을 입고 있다던가, 이가의 난에 장수로 토벌을 파견받았다던가 하는건 절대 쉴드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대론자들은 야스케가 사무라이가 아니라 일개 御道具持ち라고 폄하하고 있으나 신장공기(信長公記)의 문헌에는 "依時御道具なともたさせられ候"라고 적혀있는데 이것은 그의 주 임무가 아니라 부수적 임무였음을 의미하고 있으며 오히려 이러한 임무를 그에게 맡겼다는 점은 그가 노부나가의 각별한 총애를 받는 인물이었음을 증명하는 내용이다. 실제로 당대의 다이묘들은 자신의 가신들에게 귀중품을 맡기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것은 오히려 그 가신이 다이묘의 총애를 받는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이것을 근습(近習)의 역할이라 하는데 이러한 역할은 가신들의 임무 중 하나였으며 이러한 역할을 맡는다고 아무도 그 가신을 御道具持ち라고 폄하하지 않았다. 또한 반대론자들은 야스케가 받은 것은 단도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야스케가 받은 것은 さや巻之のし付라 불리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무사들만이 사용하는 것이 허용된 고급스럽고 특별한 태도의 칼집이었다.
또한 야스케는 "被成御扶持"라고 하여 다이묘에게 직접 봉록을 받았다는 묘사가 있는데 단순한 도구모치나 하인은 다이묘에게 직접 봉록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표현 자체가 나올 일이 없으며 "私宅等迄被仰付"라는 것은 개인 저택을 하사받았다는 의미인데 일개 도구모치 수준에서 다이묘에게 직접 하사받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또한 야스케가 '성씨가 없으니 사무라이가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전국시대때 성씨가 없었음에도 사무라이 내지는 그에 준하는 신분을 가진 자들이 다수가 존재했다는것을 알지도 못하고 하는 주장이다. 전국시대 일본에서는 성씨의 유무가 반드시 사무라이 신분을 결정짓는 절대적인 요소는 아니었다.
이는 시나노 치사이군[8]의 역사적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케다 신겐은 자기 지역의 부하 영주들에게 이쿠시마 아시지마 신사 기청문(生島足島神社起請文) 라 불리는 충성 서약서의 제출을 명했는데 이중에는 코이즈미 타쿠미노스케 무네사다의 혈판[9] 기청문과 함께 그의 8명의 가신의 혈판도 같이 찍혀있는데 8명의 가신에게는 '성'이 없었다.
平介(血判)、惣二郎(血判)、四郎右衛もん(血判)、弥六郎(血判)、藤右衛門尉(血判)、忠介(血判)、藤三(血判)、半右衛門尉(血判)[10] 으로 이 성씨가 없는 이 8명의 가신들도 엄연히 사무라이로 인정받고 있었다.
이 문서는 당시 일본 사회에서 성씨의 유무보다는 실제 역할과 대우가 신분을 결정하는 데 더 중요했음을 시사하며 사무라이는 반드시 성씨를 가진다는 고정관념과 현실은 거리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당시의 일본에는 토노하라(殿原)라고 불리는 존재가 존재했는데 이들은 사무라이 신분임에도 성이 없었는데 이 신분에 대해 백성들은 토노 또는 가타라는 표현으로 호칭했다는 사실이 존재한다.이들은 일반 백성보다 높지만 아직 고위급 사무라이에는 미치지 못하는 신분으로 아직 성씨를 하사받지 못한 하급 사무라이나 지방 유력자에게 붙이는 호칭이지만 일반 백성급하고는 엄연히 차이가 존재하는 신분이었다. 다만 야스케 같은 경우에는 "토노가 될지도 모른다" 라고 백성들이 말했다는 설이 예수회의 기록에 있을 뿐 토노는 아니였다.
이처럼 사무라이는 이 처럼 사무라이는 계층 안에서도 다양한 격차가 존재했음에도 반대론자들는 고위급 사무라이의 특징만을 예로 들며 '야스케는 사무라이가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무엇보다 당시 전국시대때는 사무라이는 계층 자체가 현대인이 생각하는 것만큼 고정된 형태가 아니며 다이묘가 '너 오늘부터 사무라이다'하면 그냥 사무라이가 되는 것이다. 가신급 사무라이는 그만큼의 역사와 인정이 필요하지만 그 정도 수준이 아니라면 당장 내일이라도 평민을 사무라이로 임명할수 있는 권한을 지녔다. 애초부터 사무라이가 반대론에서 주장하는'사족'이라는 것조차도 사무라이=사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에도시대때 정립된 것으로 전국시대때는 사무라이 계층으로의 편입이 후기 시대때보다 더 실용적이고 유연하게 임명되었음을 모르고 하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전국시대때는 실용적인 이유로 능력만 있으면 다양한 계층에서 다이묘가 인재를 선발해 사무라이로 임명하는 경우가 잦았고[11] 그 이전 시대에 '사족' 계층이라 함은 공가를 의미하는 것이지 사무라이를 의미하는 개념은 아니었다.
3.1.1. 반론
다만, 야스케가 칼과 저택을 받았다는 기술이 『노부나가공기』의 전본 중 존경각 문고본에서만 확인되는 점은 유의할 필요가 있다.
오다 노부나가 연구로 알려진 도쿄 대학 사료 편찬소 교수 가네코 타쿠씨에 의하면, 존경각 문고본은, 오타 우이치의 후예로 가가번 마에다가를 섬긴 가가 오타가에 전해진 자필본을 오타 야자에몬 카즈히로(우이치의 4대 후)가 교호 4년(1719년)에 서사해 마에다가에 진상한 것이라고 한다(카가 오타가에 전해진 우이치의 자필본은 화재 때문에 소실).
이상의 전래 경위로 볼 때 존경각 문고본은 일정한 신뢰성을 지닌 사본으로 볼 수 있지만, 미조가 칼과 저택을 받았다는 기술이 서사과정에서 덧붙여졌을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다.
가네코씨는, 흑인의 이름을 「야스케」라고 하는 1차 사료인 「이에타다 일기」텐쇼 10년 4월 19일조(전게)에 의거해 오타 카즈히로가 창작했다고 하는 견해도 불가능하지 않다, 라고 지적하고 있다(가네코 타쿠 「오다 노부나가라고 하는 역사-- 「노부나가기」의 저편에」츠토세이 출판). 만일 이 견해에 따르면, 야스케의 성에 관한 기재가 없다고 하는 의문도 해소된다.
야스케가 무사(사무라이)에게 추심됐다는 설의 근거는 존경각 문고본 노부나가 공기뿐이어서 야스케를 흑인 사무라이라고 단정하는 데는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
ただし、弥助が刀と屋敷を与えられたという記述が、『信長公記』の伝本のうち、尊経閣文庫本にしか確認できない点には、留意する必要がある。
織田信長研究で知られる東京大学史料編纂所教授の金子拓氏によると、尊経閣文庫本は、太田牛一の末裔で加賀藩前田家に仕えた加賀太田家に伝わった自筆本を太田弥左衛門一寛(牛一の4代あと)が享保4年(1719年)に書写して前田家に献上したものだという(加賀太田家に伝わった牛一の自筆本は火災のため焼失)。
以上の伝来経緯から、尊経閣文庫本は一定の信頼性を持つ写本とみなせるが、弥助が刀と屋敷を与えられたという記述が書写過程で付け加えられた可能性は否定できない。
金子氏は、黒人の名前を「弥介」とする一次史料である『家忠日記』天正十年四月十九日条(前掲)に依拠して太田一寛が創作したという見方も不可能ではない、と指摘している(金子拓『織田信長という歴史――「信長記」の彼方へ』勉誠出版)。仮にこの見方に従えば、弥助の名字に関する記載がないという疑問も解消される。
弥助が武士(侍)に取り立てられたという説の根拠は、尊経閣文庫本『信長公記』のみであり、弥助を「黒人のサムライ」と断定するのには慎重であるべきではないだろうか。
呉座 勇一, 『アサシン クリード』弥助問題に関する私見, 2024.07.22
저자 정보: 고자유우이치,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조교. 1980년, 도쿄도에 태어난다. 도쿄대학 문학부 졸업. 동대학 대학원 인문사회계 연구과 박사 과정 수료. 박사(문학). 전공은 일본 중세사. 현재 국제 일본 문화 연구 센터 조교. 『전쟁의 일본 중세사』(신조선서)로 가도카와 재단 학예상 수상. 『오닌의 난』(중공신서)은 47만부 돌파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다른 책 『일규의 원리』(지쿠마 학예문고), 『일본 중세의 영주일규』(사문각 출판)가 있다.#
야스케의가 사무라이였다는 근거로 들고 있는 대부분의 자료는 신장공기(信長公記)의 존경각문고본(尊経閣文庫本)을 근거로 하고 있다. 신장공기(信長公記)는 전국시대에 오타 규이치가 작성한 저서로 전국시대에 관련한 수많은 내용을 담고 있지만 원본은 이미 소실되어 없어지고 다양한 판본이 전해저 내려오고 있다. 그 중 존경각문고본(尊経閣文庫本)은 1573년 전국시대가 종료된이후 한참이나 지난 교호(享保) 4년 즉 1719년에 만들어진 판본으로 150여년이 지난 이후에 만들어진 판본으로 기존의 여러 판본과는 다른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있다. 신장공기의 여러 판본 중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되는 것은 천정본(天正本) 내지 에도시대 초기 시대 버전의 판본들이라고 한다. 오다 노부나가 연구로 알려진 도쿄 대학 사료 편찬소 교수 가네코 타쿠씨에 의하면, 존경각 문고본은, 오타 우이치의 후예로 가가번 마에다가를 섬긴 가가 오타가에 전해진 자필본을 오타 야자에몬 카즈히로(우이치의 4대 후)가 교호 4년(1719년)에 서사해 마에다가에 진상한 것이라고 한다(카가 오타가에 전해진 우이치의 자필본은 화재 때문에 소실).
이상의 전래 경위로 볼 때 존경각 문고본은 일정한 신뢰성을 지닌 사본으로 볼 수 있지만, 미조가 칼과 저택을 받았다는 기술이 서사과정에서 덧붙여졌을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다.
가네코씨는, 흑인의 이름을 「야스케」라고 하는 1차 사료인 「이에타다 일기」텐쇼 10년 4월 19일조(전게)에 의거해 오타 카즈히로가 창작했다고 하는 견해도 불가능하지 않다, 라고 지적하고 있다(가네코 타쿠 「오다 노부나가라고 하는 역사-- 「노부나가기」의 저편에」츠토세이 출판). 만일 이 견해에 따르면, 야스케의 성에 관한 기재가 없다고 하는 의문도 해소된다.
야스케가 무사(사무라이)에게 추심됐다는 설의 근거는 존경각 문고본 노부나가 공기뿐이어서 야스케를 흑인 사무라이라고 단정하는 데는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
ただし、弥助が刀と屋敷を与えられたという記述が、『信長公記』の伝本のうち、尊経閣文庫本にしか確認できない点には、留意する必要がある。
織田信長研究で知られる東京大学史料編纂所教授の金子拓氏によると、尊経閣文庫本は、太田牛一の末裔で加賀藩前田家に仕えた加賀太田家に伝わった自筆本を太田弥左衛門一寛(牛一の4代あと)が享保4年(1719年)に書写して前田家に献上したものだという(加賀太田家に伝わった牛一の自筆本は火災のため焼失)。
以上の伝来経緯から、尊経閣文庫本は一定の信頼性を持つ写本とみなせるが、弥助が刀と屋敷を与えられたという記述が書写過程で付け加えられた可能性は否定できない。
金子氏は、黒人の名前を「弥介」とする一次史料である『家忠日記』天正十年四月十九日条(前掲)に依拠して太田一寛が創作したという見方も不可能ではない、と指摘している(金子拓『織田信長という歴史――「信長記」の彼方へ』勉誠出版)。仮にこの見方に従えば、弥助の名字に関する記載がないという疑問も解消される。
弥助が武士(侍)に取り立てられたという説の根拠は、尊経閣文庫本『信長公記』のみであり、弥助を「黒人のサムライ」と断定するのには慎重であるべきではないだろうか。
呉座 勇一, 『アサシン クリード』弥助問題に関する私見, 2024.07.22
저자 정보: 고자유우이치,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조교. 1980년, 도쿄도에 태어난다. 도쿄대학 문학부 졸업. 동대학 대학원 인문사회계 연구과 박사 과정 수료. 박사(문학). 전공은 일본 중세사. 현재 국제 일본 문화 연구 센터 조교. 『전쟁의 일본 중세사』(신조선서)로 가도카와 재단 학예상 수상. 『오닌의 난』(중공신서)은 47만부 돌파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다른 책 『일규의 원리』(지쿠마 학예문고), 『일본 중세의 영주일규』(사문각 출판)가 있다.#
도쿄대 사료편찬소 교수 가네다 타쿠의 주장에 따르면, "존경각문고본은 최초의 원본에 가까운 연대에 쓰여진 것이며, 전해지지 않은 친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또한 그보다 앞서 "후대의 사본이나 자필본으로 사소한 에피소드를 깎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지적"하기도 하여, 존경각문고본에 후대에 가필 내지 각색이 된 부분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또한 그 가필, 각색된 부분이 노부나가의 영웅상을 강조하거나 드라마성을 더하거나 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온전한 사료로서 받아들이기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존경각문고본의 신빙성에 대한 문제는 일반 네티즌들의 주장이 아니라, 마찬가지로 전문 역사학자인 쿠레자 유이치도 조심스럽게 지적하는 부분이다. #기고글 쿠레자도 존경각문고본의 사료로서의 가치는 인정하고, 존경각문고본의 내용으로 보자면 야스케를 사무라이로 보는 것은 무리가 없다고 하지만, "야스케가 무사(사무라이)라고 추정할 만한 근거는 신장공기 존경각문고본 뿐이므로 야스케를 흑인 사무라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덧붙인다. 정확히 말하면 쿠레자 유이치의 주장은 "야스케는 사무라이가 아니다"가 아니라 "야스케가 사무라이였는지, 아니었는지 둘 다 단정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장공기(信長公記)의 존경각문고본(尊経閣文庫本)을 근거로 사무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유리한 판본을 근거로 가져와 확대해석을 하며 본인들에게 불리한 판본의 내용은 무시하고 있다.
'야스케가 때로는 도구운반을 했으니 평소에는 귀중품을 맡았다 이는 야스케가 총애를 받았다는 뜻이며 이것이 사무라이였다는 증거'라고 주장하며 신장공기(信長公記)의 "依時御道具なともたさせられ候"라는 기술을 가져오고 있지만 이는 때때로 도구를 운반하는 부수적 임무를 하였다는 내용일 뿐 본래에 하던 역할이 무엇인지에 관하여는 아무런 기술이 없다. 이 문장 하나만을 근거로 평소에는 더욱 중요한 일을 했을것이라는 주장은 근거가 없는 추측일 뿐 평소에는 귀중품을 맡았다 그러니 총애를 받는 사무라이였을 것이다 라는 주장은 과도한 확대해석이다.
또한さや巻之のし付는 태도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며 그 근거로 『고사유원(古事類苑)』『무가명목초(武家名目抄)』등을 들고 있으나 정작 신장공기(信長公記)에는「御太刀御のし付御はきそへいさや巻の熨斗付也」라는 구절이 있어 이때는 태도가 아닌 脇差를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점을 놓고 보았을때 さや巻之のし付는 전국시대에 태도, 와키자시 사야마키등의 다양한 타치 혹은 단도에 쓰이던 말이며 사무라이 설을 주장하는 히라야마 유도 이를 부정하지 않으며 단지 태도에도 쓰이던 단어이기 때문에 태도라고 주장하며 이를 지적당하자 태도인지 아닌지보다는 노부나가에게 받았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하는 중이다. #트위터
마지막으로 사무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저택을 하사받았다는 점을 근거로 들기도 하지만 수많은 신장공기(信長公記) 판본 중에서도 오직 존경각문고본(尊経閣文庫本)에서만 저택을 하사받았다는 기술이 있을 뿐 다른 판본에는 그러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사무라이였다고 주장하기에는 다른 판본에는 그렇지 않다라는 주장에 반박하지 못한다. 백보양보하여 다른모든 판본이 틀렸고 150년이나 지난 후에 만들어진 존경각문고본(尊経閣文庫本)만이 옳다고 가정하여도 이를 근거로 사무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신장공기(信長公記) 11권에 텐쇼 6년(야스케를 만나기 3년전인 1579년)에 스모선수 1500여명을 모아 경기를 시키고 그중 14명에게 태도와 의복,저택,녹봉을 하사하였다는 기록을 비추어 보아 #트위터야스케보다도 좋은 대우를 받은 이들도 당연하게도 사무라이가 되는것이라는 주장이다.
4. 야스케의 인식 변화
4.1. 일본에서의 인식 변화 과정
근대까지 야스케는 이렇다 할 전공이나 기록도 없었던 만큼, 오다 노부나가의 기행을 대표하는 엑스트라 정도로만 회자되었다. 하지만 1968년에 출간한 동화인 쿠로스케(くろ助)에서 노부나가에 대한 충심을 간직하는 사무라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을 시작으로, 1971년에는 대문호 엔도 슈사쿠의 동화 쿠론보(黒ん坊)에서 마음씨는 착하지만 방구와 똥을 발사하는 유치한 주인공으로 등장하면서 그 역사적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야스케는 인종차별적인 시선 안에서 특이하고 어리숙해 보이는 캐릭터로 그려졌다. 동화의 주인공으로서 교훈을 얻을 만한 긍정적인 성격이 묘사되기는 했지만, 멋진 무장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그러다가 1992년작 NHK 대하드라마 노부나가 KING OF JIPANGU와 1996년작 히데요시에서 괴력을 갖춘 충직한 부하로 등장해 일본 전국의 시청자들에게 짧지만 강렬한 이미지를 남기면서 본격적으로 만화나 게임 등의 미디어에 감초처럼 등장하게 된다.
이후 바사라 2에서는 선글라스를 쓰고 영어로 말하는 래퍼 중간보스 캐릭터로, 백병무자에서는 밥 샙을 모티브로 한 괴력 레슬러로, 효게모노에서는 노부나가 암살의 비밀을 추적하는 괴력의 사무라이로 등장하는 등, 자연스럽게 노부나가의 '괴력을 가진 측근 흑인 호위무사' 캐릭터성이 정착되면서 일본인들에게 익숙한 흑인 사무라이 캐릭터 이미지를 어필하게 되었다. 2010년대에 이르러서는 신장의 야망이나 인왕 같은 대형 게임에서도 야스케가 중요한 사무라이로 등장하면서 "흑인 사무라이를 대표하는 인물"로 활용되고 있다.
다만 위의 사례들은 어디까지나 역사적 인물 야스케를 모티프로 한 창작물 속의 캐릭터로, 실제 역사에서 야스케가 사무라이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현실과는 명백히 선을 긋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창작물의 이미지의 영향인지 2008년부터는 일본어, 2012년에는 영어 위키피디아의 야스케 문서에 그가 사무라이였다고 기록하기 시작하면서[12], 출처불명의 미화가 추가되는 등, 미디어의 "오다 노부나가의 측근인 유력 사무라이"라는 이미지가 마치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퍼지게 되었다.
이처럼 인터넷을 통해 야스케가 사무라이였다는 해석이 검증된 정설인 것처럼 세계적으로 퍼지게 되었지만, 어쌔신 크리드: 섀도우스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면서 블랙워싱 논란과 본격적인 역사 왜곡 논란이 점화되면서 사무라이설에 의문이 가해지면서 '야스케는 사무라이가 아니라 노예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반론 또한 제기되고 있다.
4.2. 토머스 록클리 사건
일본의 니혼대학 법학부 비상근 교수였던 토머스 록클리(Thomas Lockley) 같은 사람들은 이러한 무책임한 야스케 사무라이설 추종과 거짓 역사를 덧붙이는 방식으로 숟가락을 얹어 유명세를 얻었다. 영문 위키백과에 Tottoritom이라는 닉네임으로 자신의 미래 저서를 예약인용하는 등[13]의 방법으로 셀프선전해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2019년에는 야스케를 다룬 'African Samurai: The True Story of Yasuke, a Legendary Black Warrior in Feudal Japan'[14] 라는 소설을 역사서인 것처럼 발매해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서양에서 주목을 받았다. 이로 인해 록클리는 야스케 전문가로 불리며 여러 매체에 등장했으며, 심지어 일본 방송에서도 소개되었다.록클리는 CNN의 2019년 인터뷰에서 뻔뻔하게 자작 소설 속의 내용을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오다는 야스케의 피부가 검은 것을 보고 수호신 다이코쿠텐이라고 여겼다[15]' 라고 말했으며, 기록에는 없는 '야스케를 위해 잔치를 열고 우대했다' 는 내용을 서술하였다.
또한 저서에서 야스케를 노예로 부렸다는 원죄를 예수회가 아니라 당시 일본엔 흑인 노예가 유행이었다며 아무 근거도 없는 주장을 날조해 떠넘기기도 했다.
밑줄 친 부분만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예수회는 청빈의 맹세를 하여 노예제를 반대했으며" "현지 명사들 사이에서는 기독교인이건 아니건 권위의 상징으로 흑인 노예를 부리는 것이 유행했다." |
이렇게 '일본에서 흑인 노예가 유행하고 있었다'고 쓰면서, 동시에 '일본에서는 흑인이 신처럼 숭배되고 있다'고 모순된 내용을 주장하고 있는데, 해당 주장은 일본에 있는 불상이 검은색이기 때문이라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근거로 삼고 있으며 출처 문건까지 보면 그의 초월적 역사 해석을 알수 있다.
후지타 미도리(藤田 みどり)의 책 아프리카 "발견" - 일본에서 아프리카관의 변천(アフリカ「発見」―日本におけるアフリカ像の変遷, 2005)의 내용 | |
야스케 관련 | (야스케를 살려준 이유에 대한 개인적 견해)피부색이 다르다 한들, 말도 어느 정도 하고, 마지막까지 주인을 위해서 싸우는 종자의 모습을 보고, 죽이는게 딱하다고 느꼈을 지도 모른다. |
흑인 인식 관련 | 당시 일본인의 흑인관은 '흑인을 보고 놀라고 즐거워 했다' 이상으로는 알 수 없다. 보고 즐거워한 것이, 그 모습을 보고 모욕하는 감정을 동시에 가졌는지는 불명하다. |
이 책을 '인용'한 토머스 록클리의 저서의 내용 | |
미츠히데가 야스케를 죽이지 않은 것은 당시 일본에서는 흑인이 신처럼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일본의 불상이 검게 칠해진 것에서 알 수 있다. |
이는 무엇을 참고했는지도 알 수 없는 내용이며, 출처문건은 그저 자신의 주장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그 외에도 '야스케의 후손이 있다' 라면서 타마키 미츠야[16]라는 인물을 제시하지만 그 근거는 단순히 '얼굴형이 아프리카인 같다' 정도밖에 없으며, 야스케가 노부나가의 목을 들고 달아났다라는 일화는 자칭 오다 노부나가의 직계 43대손이라고 주장하는 개인이 운영하는 박물관[17] 관장의 노부나가의 데스마스크의 일화를 일본판에서는 "자신을 오다가문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어느 집에서"라고 소개하지만, 영어판에서는 "오다가문에 전해지는 일화"라고 소개하면서, 야스케가 일본의 역사를 바꿨다고 주장하는 등, 일본인의 검증을 받는 일본판과 영어판의 내용이 다르게 서술하여, 해외에서는 "일본에서 검증받았다는 타이틀"로 내용을 진짜 역사적 사실인 양 강의하는 행보를 보였고,[18] 수상쩍은 이론들에 대한 검증이 시작되고 위와 같은 행적이 밝혀지자, 지적으로 인해 오히려 유명해져서 좋다면서 자신의 새로운 책을 홍보하는 뻔뻔한 태도를 보였지만#, 계속되는 검증 끝에 오랜 세월 해왔던 자신의 자작극이 들통나자, 인터넷에서 모든 흔적을 지우고 잠적했다.[19]
5. 대중매체
자세한 내용은 야스케/기타 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6. 관련 문서
[1] 전장에서 창을 들고 따라다니는 가신.[2] 율령제 붕괴 후 길이의 기준이 지방마다 중구난방이라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대략 180 초반~후반의 장신으로 추정된다.[3] 전국 시대 일본에서 가톨릭 교회를 부르던 이름. 좁게는 예수회만을 지칭하기도 한다.[4] 토노는 사무라이들 중에서도 특별히 존귀한 영주의 신분인 자에게만 허락되는 칭호기 때문에, 야스케가 사무라이로서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이러한 우려를 사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5] 일본의 역사학자로 다수의 역사서적을 집필했으며 일본의 역사 대하 드라마인 '사나다마루', '어떻게할래 이에야스' 에 대한 고증담당을 맡기도 야나마시 현립대학의 교수를 역임하고 있다[6] 신장기(信長記). 신장기는 신장공기와 같은 책이다.[7] 애초에 토노가 될지도 모른다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는 건 토노급은 절대 아니였다는 거다.[8] 현재의 나가노현[9]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낸 지장.[10] 히라노스케(혈판), 소지로(혈판), 시로에몬(혈판), 야로쿠로(혈판), 후지에몬노조(혈판), 추스케(혈판), 토조(혈판), 한에몬노조(혈판)[11] 특히 야스케의 주군인 노부나가는 일반 농민층에서 조차 사무라이를 선발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렇게 선발된 것이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 하지만 야스케와 달리 키노시타 도키치로는 제대로 하시바 히데요시란 지위에 어울리는 성과 이름을 받았다.[12] 그 전까지는 하인 내지는 몸종이라고 서술하고 있었다.[13] 2015년에 자기가 쓴(?) 2016년 논문을 인용했다.[14] 일본판 제목은 노부나가와 야스케, 혼노지에서 살아남은 흑인 사무라이(信長と弥助 本能寺を生き延びた黒人侍)이며 2017년에 발매되었다.[15] 이건 애초에 말이 안되는게, 이름에 흑(黑)이 들어갔을뿐이지 다이코쿠텐의 피부가 검은 색인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오다는 철저한 무신론자였다.[16] 1863년 시모노세키 전쟁 직전에 프랑스로 떠났던 조슈번의 사절단 일행 중 한 명으로, 사진은 프랑스에서 찍혔다.[17] 민간 박물관 자체는 큰 문제될 게 없으나 문제의 박물관은 애초에 역사 박물관이 아닌 자연사 박물관이며, 시설조차도 그냥 가정집에 엉성하게 표본과 그림들을 걸어놓은 수준이고, 이외에서 자신을 천황계라든가 히미코의 후손이라고도 주장하는 여러 타이틀을 주장하는 그냥 동네에 이상한 할아버지 집이다.[18] 심지어 이 '검증'이라는 부분도 순 거짓말이다. 당사자인 키리노 사쿠진은 "토마스의 소설을 출판할때 번역자인 후지씨가 저한테 역사적 자문을 구했는데 저는 그때 질문에 답한게 다입니다. 역사적 사실검증같은 거창한걸 한적은 없어요." 라며 트위터에서 밝혔다.[19] 그 와중에 뒤에서는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에서 야스케 페이지의 편집작업을 하고 있었다. 편집일 2024년 7월 16일에는 브리태니커 측에서 개입하여 야스케를 사무라이로 명시하는 서술을 따옴표를 추가하여 더 중립적으로 변경하면서 어쌔신 크리드: 섀도우스에서 촉발된 역사 왜곡 논란이 있었다는 서술을 추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