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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11:19:02

나가시노 전투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80px-Battle_of_Nagashino.jpg
▲나가시노 전투 상황을 그려낸 병풍.[1]
1. 개요2. 전쟁 전
2.1. 신겐의 죽음2.2. 오쿠다이라 부자의 배반
3. 전쟁 발발
3.1. 오쿠다이라 사다마사우주방어3.2. 간발의 차이로 지원군의 도착3.3. 결전의 맛보기, 도비노스 산 전투3.4. 카츠요리의 공격 명령과 다케다 군 괴멸
4. 전쟁 이후5. 다른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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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長篠の戦い
덴쇼 3년 5월 21일(1575년 6월 29일), 미카와 북쪽의 나가시노 성(현재 아이치현 신시로시 나가시노)을 둘러싼 다케다 카츠요리의 1만 5천과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3만 8천의 군사 사이에서 일어난 전투. 연합군이 대승하였다. 이 전투의 본격적인 결전 장소가 성 앞의 벌판이었던 시타라가하라(設楽原, 設楽ヶ原)였기 때문에, '나가시노 시타라가하라 전투(長篠設楽原の戦い)'라고도 부른다.

2. 전쟁 전

2.1. 신겐의 죽음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어 도토미(시즈오카현 일대) 북쪽의 지배권을 확보한 다케다 신겐은 파죽지세의 기세로 도쿠가와 가문의 영지를 공략하며 기세를 떨치고 있었다. 오다, 도쿠가와 연합은 일 대 일로 비교하면 다케다보다 전력이 강했지만 서, 북, 동 삼면으로 노부나가 포위망이 펼쳐져 있어 다케다에 모든 군사력을 집중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렇게 도쿠가와 가문은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주력 병력을 거의 잃은 상태였고, 끝이 나는 듯했는데...[2]

신겐이 1573년, 52세의 나이로 급사한다.[3] 신겐의 죽음으로 다케다 군은 발이 묶이게 되었고, 도쿠가와 가문과 오다 가문은 그 사이에 노부나가 포위망을 정리하고[4] 다케다와 결전을 벌일 전력을 모을 수 있었다.

2.2. 오쿠다이라 부자의 배반

1573년 8월, 다케다 가신단 중에 하나였던 오쿠다이라 사다마사(奥平定昌)는 아버지 사다요시의 제안으로 다케다 가문을 배신하고 도쿠가와 가문에 항복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크게 기뻐하여 장녀인 가메히메를 보내어 사위로 삼고 다케다 가문으로부터 함락시킨 지 얼마 안된 키타미카와(北三河)의 나가시노 성에 사다마사를 파견하고 다케다 군의 침략에 대비케 했다. 이에 신겐의 뒤를 이은 다케다 카츠요리는 재정비의 시간을 가진 후, 2년 뒤인 1575년에 1만 5천의 군사를 친히 이끌고 출진해 나가시노 성을 포위했다.

3. 전쟁 발발

3.1. 오쿠다이라 사다마사우주방어

당시 나가시노 성 안에서는 500명의 군사밖에 없었으나, 성의 구조가 3중 해자를 설치한 난공불락이라 다케다 군도 성을 포위한 채 시간만 흘러가고 있었다. 당시 다케다 군에는 땅굴을 파는 데 능한 부대가 있어 성 밑으로 굴을 파서 침입하려고 했으나 사다마사는 그것을 예측하여 수비병도 굴을 파서 땅속에서 양군이 마주쳤다는 일화도 있다.

하지만 결국 30배가 넘는 적을 당해내지 못하고 외곽성과 거기에 있는 군량고까지 함락당한다. 이에 사다마사는 부하인 아시가루 토리이 스네에몬을 도쿠가와 측에 지원군을 요청하는 사자로 파견했다.[5]

이에야스는 동맹군이었던 오다 가문에게 구원군을 요청했고, 오다 노부나가 역시 5월 13일 3만의 군사를 친히 이끌고 미노(美農)의 기후 성을 떠나 도쿠가와의 본성 오카자키 성에 도착했다.

3.2. 간발의 차이로 지원군의 도착

오다 군 3만과 도쿠가와 군 8천은 나가시노 앞 시타라가하라 평원에 도착했다. 노부나가는 이 곳을 결전지로 정하고, 철포대를 중심으로 수비하면서 다케다 기마대를 공격하는 전술을 짜고, 3중 울타리를 치고 다케다군을 기다렸다고 알려졌는데 새롭게 발견된 조사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알려진 평원에 울타리를 치는 방식이 아니라, 지형을 이용해 산에 해자를 파고 다케다 군을 유인할 요새를 만들었다고 한다.

어떤 방향이건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이 도착했다는 사실을 들은 다케다 가문은 군사 회의를 열었다. 다케다 4명신이라 불리던 바바 노부하루, 나이토 마사토요, 야마가타 마사카게 등은 철수를 주장하였으나, 카츠요리는 결전을 강행한다. 사실 신겐의 미카와 진공 당시는 오다가 전체적인 가용 병력 면에서는 신겐보다 우세했으나 "노부나가 포위망"으로 불리는 적들을 상대하느라 신겐의 거의 올인에 가까운 대군을 막을 병사가 없었다. 그러나, 신겐 시절과 달리 지금은 오다 노부나가가 교토와 오우미를 모두 정리한 상태였고, 서쪽이 정리가 됐으니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은 결전을 걸고자 가용 병력을 모두 끌고 왔다. 반대로 연합군과의 결전을 예상못한 다케다 군은 수적으로 불리했기 때문에 철수가 당연한 선택이었으나 카츠요리는 굳이 결전을 선택했고, 그 대가는 참혹했다. 국정은 몰라도 군사적으로는 재능이 있다는 평을 받은 가츠요리가 굳이 결전을 택한 이유에 대해서도 많은 추론이 있었는데 어차피 장기적인 경제력, 군사력으로 너무 밀려있어 여기서 철수하더라도 전황이 좋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게 아니냐는 의견이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시간이 지나봐야 더 불리해지니 여기서 올인해 뒤집어 보려는 시도였다는 것이다.[6][7]

3.3. 결전의 맛보기, 도비노스 산 전투

5월 20일 밤, 도쿠가와 군 사카이 타다츠구의 동미카와 무리, 오다 군 가나모리 나가치카의 500 철포 부대로 이루어진 3000명의 군사[8]가 은밀히 도요 강을 도강하여 능선을 타고 남쪽으로 들어가, 새벽녘에는 다케다 군의 나가시노 포위의 요점 도비노스 산의 성채를 기습 공격하였다, 도비노스 산 성채는 본성과 4개의 성채로 이루어진 요새였으나, 농성하던 사다무사 군대 + 후방의 4000명의 연합군에 의해 포위 공격을 당해 농성하던 다케다 병력 모두가 전멸한다. 이로 인해 다케다 군은 주요 무장인 다케다 노부자네를 포함, 여러 유명한 무장들을 많이 잃고, 퇴로까지 차단당하고 만다.

3.4. 카츠요리의 공격 명령과 다케다 군 괴멸

5월 21일 이른 아침, 도비노스 공방전 결과 퇴로를 차단당한 것을 인지한 다케다 군은 전방의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을 선제 공격하여 일대 결전을 벌인다. 전투는 낮 즈음까지 계속 되었고, 연합군의 압승이었다. 연합군도 6,000명의 희생자가 생겼지만 다케다 군은 무려 12,000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연합군의 사상자는 대부분 하급 졸병인 아시가루(足軽)들이었던 데 비해(특히 오다 군), 다케다 군은 다케다 4천왕 중 3명(바바, 야마가타, 나이토), 사나다 노부츠나, 마사테루 형제(사나다 유키무라의 큰아버지), 쓰치야 마사쓰구 등 다케다 24장으로 일컬어지는 유력 무장과 사무라이들을 거의 잃게 되었고, 이 손실은 괴멸적인 것이었다. 카츠요리는 간신히 퇴로를 뚫어 고후로 퇴각하는 데 성공하지만 나가시노의 패전은 곧 다케다 가 몰락으로 이어진다.

이 전투에서 노부나가는 3,000명 철포 부대를 1,000명씩 한 조로 나누어 교대로 발사하여 재장전의 시간차를 없애는 삼단 발사 전법을 시전하여 다케다 기마대를 전멸시켰다는 속설이 있으나 당시 3,000정이라는 철포수[9]와 3단 발사 전법에 대해서는 명확한 근거가 없다. 애초에 3단 발사 전법은 에도 시대 소설에서 처음 나온 이야기다. 사실로 확인 가능한 것은 철포를 중점적으로 운용했다는 것과 다케다 군의 돌격을 막아내기 위해 울타리가 사용되었다는 것 정도. 3천명의 철포 부대가 있었다면, 그 이후에도 오다 군은 그들이 활약해야 하지만, 그런 역사적 사실은 없다. 최근에는 3천명의 철포 부대의 3단 쏘기나[10][11] 다케다 가의 기마 군단도 후대의 창작이라는 설이 유력시되고 있다. 다케다 가의 기마 군단에 대한 기록도 신장공기에 나오는 기록이고, 정작 다케다 가의 기록에는 기마 군단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나마 기마가 나오는 다케다 신겐에 관한 기록물은 코요군칸 정도로 여기에는 대놓고 '말에 타는건 대장과 그 주변 무장뿐이고 부대내에 7~8명'이라는 기록 밖에 없다.[12][13][14][15]

철포를 중점적으로 사용했다도 다시 살펴봐야 할 점이 있다. 오다 노부나가가 2km 마방책을 세운건 나가시노에 유적이 발견되어 사실로 확인되었다. 또한 전투 사망자들의 비석이 세워 졌는데 이 비석의 위치가 마방책으로 부터 500m 거리 남짓이다. 문제는 그 당시 철포의 성능으로는 100m 밖 표적도 맞추기 힘듦다.[16]] 철포로 인한 대량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면 비석이 마방책 20m 위치에 있어야 한다. 이는 철포보다는 근접전에 의한 사망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가시노 전투를 묘사한 그림들 역시 철포가 아닌 근접전 과정에 사망한 것으로 묘사되어있다. 또한 나가시노에 역사박물관이 있는데 이걸 만들 때 나가시노 주변에 대대적인 발굴 작업이 있었다. 그러나 이 발굴 당시 나온 탄환의 수는 겨우 12발이었다. 만약 3천정의 철포가 쓰였다면 12발 이상의 탄환이 발굴되어야 한다. 이때문에 일본의 역사학자들도 오다 노부나가에게 대규모 철포부대는 없다고 본다.

그리고 히데요시가 가신한테 쓰게 한 《신장공기》에 쓰인 10,000명 이상 다케다 군이 죽었다는 기록도, 제3자의 기록인 다문원일기[17]에 의하면 1,000여명 정도고, 도쿠가와 가문의 공식 기록에 의하면 주도한 쪽은 도쿠가와 측이고 오다 노부나가 군은 거들 뿐이었다라는 등[18] 지금까지 알려진 나가시노 전투 자체에 대한 의문점이 많다.

애초에 나가시노 전투에 임하는 양군 간의 전력에는 꽤나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연합군 쪽의 천재적인 전략으로 승리한 것이라고는 하기 힘들다. 그런 점에서 결전을 택한 카츠요리가 어리석었다 할 수 있다. 이미 오다군은 산을 깎아 성을 만들어 기마 부대가 돌격했을 때 협공할 수 있도록 진영을 구축했다. 이때문에 다케다 가의 가신들도 나가시노에서 싸우는것을 반대했으나, 카츠요리가 공격하다가 패배했다.

이후 극소수의 병사로 일만여 다케다 대군을 막아내며 나가시노 성을 끝까지 지킨 오쿠다이라 사다마사는 노부나가에게 포상으로 이름 한 자(信)를 하사받아 오쿠다이라 노부마사(信昌)라 이름을 고치게 되었다. 오쿠다이라 노부마사는 훗날 나가쿠테 전투에서는 이케다 소뉴의 사위인 모리 나가요시[19]와 대회전을 펼쳐서 승리하기도 한다.[20]

4. 전쟁 이후

나가시노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은 다케다 가문이었으나 오히려 이 전투에서 카츠요리와 껄끄러운 관계였던 고참 가신단이 전멸하였기 때문에 다케다 가문은 카츠요리 체제로 빠르게 재편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병사의 질은 떨어지나 나가시노 전투 직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토도우미 침공에 2만명에 가까운 병사를 동원할 수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주변 다이묘들은 나가시노의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빠르게 혼란을 진정시키고 병사들을 모은 카츠요리를 경계하여 다케다에 대한 직접 공격보다는 내부 공작 등을 통한 공략으로 전환하게 되었으며 오다-도쿠가와에 의한 다케다 정벌은 나가시노 전투 이후 7년 후에 진행되게 된다.

카츠요리는 이후 궁지에 몰린 나머지 철천지 원수였던 에치고(越後, 오늘날의 니가타현)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와 동맹을 맺는다. 하지만 이로 인해 동맹이었던 사가미의 호죠 가문과 사이가 나빠지게 되고[21] 북쪽을 제외한 모든 방향에서 협공을 당하게 된다.

게다가, 가신 간의 단결이 그리 튼튼한 편이 아니었던 다케다 가에서는 많은 소속 무장들이 모두 오다, 도쿠가와 가문 측에 성을 바치고 항복하였다. 다케다씨는 원래 중앙 집권이 아닌 호족 연맹의 맹주였다. 신겐 이전에도 다 쪼개져 있었고, 신겐이 활약해서 잠시 합쳐놓은 불안정한 상태였다. 이런 와중에 기대했던 우에스기 측의 원군도 우에스기 내부의 혼란으로 인해 늦어져서, 3월 4일에 원군 출진을 명령하나, 3월 11일 원군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출발한 시점에서 이미 타케다 카츠요리가 텐모쿠산에서 자결하며 타케다는 멸망했다. 우에스기 역시 타케다에 대규모 군사지원을 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나가시노에서 다케다가 크게 무너진 마당에 에치젠 방면에서 밀고 들어올 오다군도 문제였고 카게카츠, 카게토라의 상속 싸움으로 내부 결속도 느슨해졌으며 당연히 국력도 소진했다. 게다가 여기서 카게카츠가 승리하면서 호죠군이 코즈케 방면으로 쳐들어 올 대비도 해야했다. 결국 키소(매제), 아나야마, 오야마다 등의 다케다 소속 장수들이 하나하나 제 살 길을 찾기 위해 배신해서 카츠요리를 추적하는 절망적인 상황하에, 카츠요리는 덴모쿠 산으로 쫓겨 들어가 향년 36세로 가족들과 함께 할복, 험난했던 생애를 마감하며 센고쿠 다이묘로서의 다케다는 멸망했다.

다케다 가문 종가는 이렇게 멸망했지만 다케다 가문 자체는 전국시대 이후에도 명맥이 이어졌다. 다케다 신겐의 차남의 자손들이 살아남아 그 후손이 에도 시대에 막신이 되어 영지를 받았고, 현재 야마나시현에 있는 다케다 신사는 그 후손들이 운영하고 있다.

5. 다른 매체에서


[1] 오른쪽이 다케다 군, 왼쪽이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이다. 유명한 그림이지만, 나가시노 전투 100년 후인 에도 시대에 그려진 그림이라, 현대에 새롭게 발견된 학설과는 맞지 않는다.[2] 당시 미카와가 뚫리면 바로 오와리였기 때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패하게 되면 다케다의 강군이 바로 오와리에 쳐들어가게 되므로 아자이-아사쿠라 연합에 발이 묶인 상태였던 오다 노부나가에게 있어서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3] 지병의 징후가 있긴 했지만 전쟁터에 나설 정도의 건강은 유지했기에 병사라는 이야기와 함께 전투 중에 적군이 쏜 유탄에 맞아서 사망했다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망에서는 적의 성에서 들려오는 피리 소리를 감상하였는데 며칠간 비슷한 장소에서 감상하다가 그를 노린 총탄에 당했다는 전개를 취하였다. 영화 카게무샤에서도 피리가 나오고 병사가 낮에 미리 돌을 달아서 위치를 잡아놓은 총으로 저격을 하는 이야기로 진행된다.[4] 애시당초 기습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아자이-아사쿠라 연합은 오다의 적수가 아니었다.[5] 토리이 스네에몬은 어찌어찌 포위망을 탈출해 도쿠가와 군까지는 당도했지만, 아군에게 지원군이 온다고 알려주러 다시 돌아오는 도중에 다케다 군에게 잡혀 끔살당한다. 다케다 군이 그를 잡아서 "나가시노 성에 대고 지원군이 오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해 오쿠다이라 군을 항복하게 만들면 살려준다."라고 하자 오히려 나가시노 성 앞에서 큰 소리로 "지원군이 곧 온다!"라고 외쳐 책형에 처해지는데, 일본에서는 전형적인 무사도 미담으로 유명하다. 한편 이런 행동에 감격한 다케다 군의 무사인 오치아이 사헤이지 미치히사가 사형대에 묶인 스네에몬을 그린 깃발을 자신의 가문의 하타지루시로 삼았는데, 실물이 현재까지 전해 내려온다.[6] 사실 오다 가의 본거지인 오와리는 평야를 끼고 있어서 굉장히 비옥한 땅이었고 그에 비해 다케다의 가이, 시나노 땅은 군마가 많아서 군사적으로 유리한 점은 있어도 전체적으로 그리 부유한 편이 아니었다.[7] 여기서 물러나봤자 어차피 그 다음 전투는 다케다 영지에서 치르게 될 것이 뻔한 상황이기도 했다. 이제까지 다케다 신겐은 전쟁시 자국 영지 내에서 싸운 적이 없었다는 것이 자랑일 정도였으니 이렇게 되면 영지민들의 사기가 매우 저하될 것이 뻔했으므로 차라리 외지에서 싸우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8] 신장공기(信長公記)에 의하면 4000명[9] 당시 철포는 엄청나게 비쌌다. 철포 1정의 가격은 아시가루 1년치 봉급과 비슷.[10] NHK에서 나가시노 전투 특집으로 3단 쏘기를 재현했었다. 일제 사격을 해야하나, 사수들의 숙련도가 일정하지 않아서 발사하는데 오래걸리는건 똑같았다.#[11] 원래 화승총이라는 물건은 워낙 장전에 시간이 많이 걸려서 보통 3분에 1발이면 양호하다고 할 정도였다. 그리고 각 영지마다 화승총의 수는 그리 많지도 않았던 데다가 유연화약을 사용하기 때문에 명중률이 그리 높다고 하기도 어려웠다. 물론 오다 가문에서는 다른 가문보다 훨씬 많은 화승총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것이 승패에 영향을 끼친 것 자체는 사실이긴 하다.[12] 이 짤막한 기록도 코요군칸이 사료로서 신뢰성을 의심받는 책이어서 책의 저자인 코사카 마사노부조차 실제 저자인지 후세의 가탁인지도 의심스러운 상황이다.[13] 당시 일본에서 많이 군마로 쓰인 키소 지방의 말은 제주도 조랑말보다도 작은 품종이고 지구력이 어떻든 뛰는 속도가 어린 애가 뛰는 속도 정도의 속터지는 속도였다고 한다. 영상 속에 나온 키소 지방의 말의 다 큰 성체가 163cm 여성의 키와 비슷했다. 따라서 대규모 기마 부대를 만들 가치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 근거의 하나로는 에도 시대 내내 메이지 이후에도 제대로 된 우정 사업이 실시되기 전까지도 '비각'(飛脚)이라고 해서 사설 택배업자들이 고용한 사람이 발로 달려서 전국으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심지어 일본에 본격적인 기마대가 등장한 시기를 서양의 큰 말이 수입되어 들어온 메이지 유신 이후로 보는 견해도 있다.[14] 일본은 메이지 유신쯤 되어서야 편자를 사용했다. 그전까지는 편자를 사용하지 못 해 짚신으로 편자의 역할을 대신했다. 조선 통신사로 일본을 간 조엄의 해사일기에도 편자가 없다고 기록되어있으며, '왜인이 말을 길들이는 데까지는 익숙하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고 기록했다.[15] 아직까지 일본 전국시대에서 기마 부대의 비율은 미지수이며, 이래저래 말은 많지만 확실한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편제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기마의 %가 다른 문명권에 비해 적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것도 고급 병종인 기마 부대를 펑펑 뽑을 만큼의 돈이 없고 난세인 전국시대라면 그 숫자가 무척이나 적었을 것이다.[16] NHK에서 실험한 결과 50M라면 숙련된 사수가 10발 전부 명중 시켰으며, 전원의 명중률을 합산하면 평균 73.3%의 명중률을 보였다. 그러나 100M에는 명중률이 10% 정도로 떨어졌다.#[17] 나라현에 위치한 절 흥복사(고후쿠지) 승려가 쓴 책인데 나가시노 전투에 대한 기록이 존재한다.[18] 단 도쿠가와 측의 기록은 이에야스를 띄워주려는 기록이라 신빙성이 떨어지는 편이다.[19] 오다 노부나가의 시동으로 유명하며 혼노지에서 사망한 모리 란마루의 형[20] 오쿠다이라 노부마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위이기도 했기 때문에 사위 vs 사위 대전에서 승리해서 기세를 올리기를 바라서 노부마사를 선봉으로 내세웠다고 한다. 실제 노부마사는 유능한 장수이기도 했고.[21] 우에스기 가문은 겐신 사후 두 양자 카게카츠, 카게토라(호조 우지야스의 아들)가 에치고의 수호 자리를 두고 내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다케다 가문은 카게토라를 지지하지 않고 카게카츠를 지지하여, 결국 카게카츠가 승리했으니, 호죠 가문의 뿔이 돋힌 건 당연한 일.[22] 다케다, 도쿠가와, 오다 어느 진영으로 플레이하느냐에 따라 조금씩 양측 병력이 달라진다. 가령 오다로 플레이할 경우 도쿠가와 6000명 + 오다 8000명 = 14000명 vs 다케다 6000명.[23] 여기서 일부러 카츠요리의 병력을 1로 둔뒤 첫턴에 사격받고 져버리는걸로 나가시노 전투를 아예 일어나지 않게 하는 꼼수도 있다.[24] 사실 적에 철포대가 있고 아군은 붙어야되는 기마대인지라 유인도 그다지 효율적이진 못하다.[25] 게다가 전투 당일은 맑게 개어서 조총운용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이쯤되면 날씨가 일방적으로 노부나가 쪽을 편들어 준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