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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10-28 12:12:48

모리 나리토시

모리 란마루에서 넘어옴
파일:300px-Mori_Ranmaru-Utagawa_Kuniyoshi-ca.1850-_from_TAIHEIKI_EIYUDEN.jpg

1. 개요2. 생애3. 여담4. 창작물에서

1. 개요

모리 나리토시 (森成利)[1]
(1565년 ~ 1582년 6월 2일)

일본 전국시대 때의 무장으로 관정중수제가보(寛政重修諸家譜)에는 이름이 나가사다(長定)로 되어 있으며 이외에도 나가야스(長康)가 진짜 본명이라는 이야기가 존재하지만 그가 활약했던 당시의 문서를 살펴 보면 대부분 나리토시(成利)로 적혀 있기 때문에 현재 나리토시를 본명으로 인정하고 있다.

아명 역시 란(乱)과 란마루(蘭丸) 그리고 란포시(乱法師) 등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모리 란마루(森蘭丸)[2]라는 아명이 가장 유명하고 현대에 접어 들어서는 이 모리 란마루라는 이름이 본명으로 추측되는 모리 나리토시의 사용 빈도를 능가하고 있다. 다만 당시의 사료에는 모두 란(乱)으로 기록된 걸 보면 란(蘭)이라는 문자가 들어간 것은 후세의 창작으로 보이고 본 성은 미나모토 씨로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 모리 요시나리#의 삼남이라고 한다.

2. 생애

노부나가의 시동으로 그와 중도 관계를 가지면서 우대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중도 관계가 아니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그의 부친인 모리 요시나리를 대신해서 노부나가가 양부 역할을 했다는 설[3]도 존재하며 란마루라는 이름은 노부나가의 시동을 맡았을 때 물려받은 이름이고 이전의 시동에게도 란마루란 이름을 내려준 것으로 보아 노부나가가 대대로 시동에게 붙인 이름으로 추정된다.

1582년 타케다 정벌에 공헌하여 미노국의 이와무라 성[4]의 성주로 임명됐지만 같은 해에 일어난 혼노지의 변 당시 노부나가의 명으로 혼노지에 불을 지른 후 아케치 미츠히데군의 진입을 막다가 야스다 사쿠베라는 무장에게 살해당한다.

현대에 나오는 창작물에서는 주로 노부나가가 가장 가까이 한 인물로 묘사되지만 당시 정계에서는 유력하게 인식된 적은 없고 중대한 임무도 맡겨지지 않았으며 노부나가 휘하에서 활동한 기간도 2년 밖에 되지 않아서 지금의 이미지는 모리 가문의 선전이라는 추측도 존재한다.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는 노부나가의 명령을 전달하고 수행했던 젊은 사무관 정도가 적절하다는 이야기가 많다.

3. 여담

오다 노부나가와 관련된 세 가지의 일화가 있다.

모리 나리토시가 어렸을 때 귤 광주리를 나르고 있었는데 오다 노부나가가 이 모습을 보고 귤 광주리가 무거워 보이니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당부했지만 그 직후 바로 모리 나리토시가 넘어져서 오다 노부나가가 크게 웃었는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모리 나리토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판단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일부러 넘어졌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오다 노부나가가 문을 닫고 오지 않은 것 같아서 모리 란마루에게 문을 닫고 오라고 명령을 하여 그가 문의 상태를 확인하니 분명하게 닫혀 있었다. 하지만 모리 란마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을 열었다가 소리가 들리도록 닫았다고 하는데 이 역시 상술한 이야기와 같이 오다 노부나가의 위상을 위해 닫혀 있던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아버렸다고 하는 이야기다.

어느 날 오다 노부나가가 모리 란마루에게 천하에 대하기 어려운 것이 하나 있다고 얘기하자 모리 란마루는 그것이 시라타카 정(白鷹町 즉 현재의 야마가타현)을 의미하냐고 물었다. 이에 오다 노부나가는 생물이라고 대답했고 그제서야 모리 란마루가 자신이냐고 반문하자 오다 노부나가는 크게 웃었다고 한다.

모리 란마루는 오다 노부나가가 소중히 여기던 후도 유키미츠라는 단도를 하사 받았다고 하는데 훗날 혼노지의 변에서 모리 란마루가 죽고 난 이후에는 코쿠라 번(小倉藩)의 오가사와라(小笠原) 가문이 입수하였다고 한다.

결정판도설·전국갑주집(決定版図説・戦国甲冑集)에서 모리 란마루의 구족(森蘭丸の具足)으로 기재된 것이 있지만 이 구족은 일본 갑주 사학 연구회 회장을 역임하고 있는 다츠오가 히코네에서 발견하여 가와고에의 미술 상인 오쿠다이라 나가요시에게 건넨 것으로 두 사람 모두 해당 갑주를 공표할 때 "우리들이 발견하고 넘겨 받은 물품은 무명의 갑옷"이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다.

이이 다츠오는 그의 저서에서 "조금이라도 신빙성이 있으면 좋겠다"라고 서술하고 있고 모리 란마루의 것으로 나온 것에 상당한 불쾌감을 가진 것 같다. 더불어 발견 당시에는 갑주의 명의 등은 없었으며 어떤 경위로 모리 란마루의 구족이라는 명칭이 생겼는지 알려진 바가 없다.

창작물에서는 주로 모리 란마루나 그냥 란마루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대개 쇼타 속성을 지닌 어린 미소년으로 등장한다.[5]

4. 창작물에서

항목 참조


[1] 삼성리[2] 삼란환[3] 모리 요시나리는 시바타 가츠이에보다도 먼저 노부나가를 섬긴 노신이었고 노부나가가 가장 힘들었던 노부나가 포위망 시기에 지원이 끊긴 최악의 상황에서도 아자이와 아사쿠라 연합군에게 필사적으로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노부나가가 그의 전사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 모리 나리토시가 비록 가신의 자식이지만 노부나가가 양부의 역할을 맡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4] 카네야마 성의 성주였다는 설도 존재한다.[5] 실제로 주군이었던 오다 노부나가와 신분 관계를 넘어서 친분이 깊기도 했고 나이 차이가 아버지와 아들 수준이었기 때문에 전사와 아이 기믹을 탑재하고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