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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15:30:24

마닐라 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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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군의 전쟁범죄와 그로 인한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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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 マニラ大虐殺 (マニラ だいぎゃくさつ)
필리핀어 : Masaker sa Maynila
영어 : Manila massacre

1. 개요2. 필리핀의 저항3. 학살4. 일본군의 실책
4.1. 스페인 공사관 습격4.2. 독일인 클럽 습격
5. 종전 이후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필리핀 탈환전이 시작되자 저항하던 일본군필리핀 제2공화국 마닐라에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난징 대학살에 가려져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또한 수많은 민간인이 죽은 끔찍한 사건이다.

관련 기사: "탈출 불가능" 일본군 소장의 끔찍한 결심

2. 필리핀의 저항

미국은 자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에 대해 필리핀의 독립법을 성립하여 앞으로 독립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하여 1935년 11월에 독립준비정부가 발족하여 마누엘 케손필리핀 대통령으로 취임했지만 이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남방작전을 개시했고 1941년 12월 필리핀에 주둔한 미군을 몰아내고 마닐라가 있는 본섬을 점령했다. 결국 1942년에 일본군이 필리핀을 침공하고 마닐라가 일본군에 의해 점령되자 케손 대통령은 미 해군 잠수함 편으로 중앙은행의 금괴 및 주요 각료들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다.

1942년 4월 바탄 반도의 미군이 항복했고[1] 5월엔 코레히도르 섬에서 맥아더의 대행으로 총괄 지휘했던 웨인라이트 장군[2]의 수비군이 항복하면서[3] 필리핀에서의 미군의 저항은 멈췄으나 항복하지 않은 소수의 미군/필리핀군이 주축이 되어 게릴라 조직들이 생겨났고 곧 지역별로 유력하거나 명망 높은 필리핀인 인사들도 자체 조직을 세워서 비정규전으로 일본군과 계속 전쟁을 벌였다. 게다가 구관이 명관이라고 일제의 탁상행정[4]과 폭정[5]에 염증을 느낀 필리핀인들은 대개 지역별로 현지의 게릴라 조직에 가입, 활동하여 일본군을 괴롭혔고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필리핀에서 수천km 떨어진 연합군에 무전 접촉이 성공하여 미군 잠수함을 통한 교류로 인력 후송[6]과 물자 및 인적지원[7]을 받아서 장기간 연명이 가능했다.

일본군 또한 이들 게릴라 조직의 성장을 매우 경계했고 곳곳을 순찰하면서 토벌을 벌였다. 전파추적장치를 장착한 선박을 기동시켜 곳곳 섬들의 게릴라들의 무선기지를 찾아내고 내부 첩자를 심어두거나 본보기로 활동 가능성이 높았던 지역의 마을을 초토화시키고 잡힌 게릴라 남, 녀 포로들에게 잔인한 고문과 살해를 가하는 등 보복전을 벌였다.
그러다가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 1월 마닐라가 있는 루손 섬에 연합군이 상륙하여 2월 3일 미 육군 제1기병사단과 제37보병사단이 마닐라로 돌입했다. 일본 육군 제14방면군 사령관이던 야마시타 도모유키 육군 대장은 마닐라를 무방비도시로 선언하고 잔존부대는 루손 북부의 산악지대로 후퇴한다는 방침을 세웠지만 육군 제14방면군과 함께 현지 부대였던 일본 해군 제31특별근거지대 사령관 이와부치 산지(岩淵三次) 해군소장대본영은 마닐라 사수를 고집했기 때문에 마닐라 해군방위대를 중심으로 하는 이와부치 제독이 지휘하는 육해군 혼성부대가 마닐라에 남아 미 육군과 3주 이상 격렬한 시가전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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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부치 산지 제독(1895.3.2~1945.2.26)

미군은 초기엔 심리전을 통해 일본군의 항복 및 철수를 권고했고 일부 구역에선 성과를 거두었다. 시가전 초기의 어느 거점에 일본군이 억류 중이던 3천명의 미국인[8]이 있었는데 제1기병사단 소속 장교 or 지휘관[9]이었던 브레디 중령은 해당 거점의 일본군과 교섭하여 일본군의 무사철수 보장을 조건으로 민간인 포로들을 무사히 넘겨받은 사례가 있다. 하지만 모든 거점이 이런 해피엔딩은 아니었고 대개 미군의 교섭 시도를 무시했다. 시가지 중심부의 어느 거점에선 일본군이 마닐라 시민 수천 명을 인질로 삼아 저항 중이었는데 미군측 전선 총지휘관 제14군단장 그리즈월드 장군이 일선으로 나와 직접 확성기로 설득을 외쳤으나 무반응이었고 오히려 학살의 조짐이 보이자 대기 중이던 미군 야포들이 수천발을 몇 시간 동안 퍼부은 결과 과반수의 인질들이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건 양반이자 시작에 불과했다. 미군은 마닐라 내부로 진입할수록 일본군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하자 영거리 포격으로 건물들을 하나하나 박살내기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수많은 마닐라 시민들이 건물과 함께 죽어나갔다. 또 이 과정에서 민간인들을 마구잡이로 살해하던 일본군들이 이를 목격한 미군에 의해 즉결처형되기도 했다.

여기까지야 시가전 공방 과정에서 흔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이고 민간인 처형도 일선 장병들이 흥분해 멋대로 벌인 짓이며 즉결처형까지 이루어졌으니 큰 문제는 없었으나 시가전 도중에 취합된 정보 및 해당 전투가 종결된 3월 3일을 전후로 사후조사를 하면서 뜻밖의 사실이 드러났다.

3. 학살

그것은 시가전 과정에서 발생된 포격, 폭격, 유탄에 맞아 사망한 희생자보다 일본 육해군의 마구잡이식 방화와 냉병기에 찔려 죽은 희생자가 더 많았던 것. 당시 마닐라 시내에 있던 약 70만 명의 시민들 중 대략 10만명이 이렇게 희생됐으며 이는 필리핀에서 벌어진 전투들 중에서도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대규모였다. 한마디로 일본군은 미군의 화력에 쫓기는 와중에도 마닐라 시민들에게 화풀이를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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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에게 살해된 필리핀 민간인 일본군은 살해할 때 다음과 같이 팔을 뒤로 묶어 놓고 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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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에 깔린 채 사망한 어린아이 일본군에 의해서 철저하게 파괴된 건물

결국 이러한 무자비하고 잔인한 대학살로 인해 마닐라에 있는 건물의 30%가 파괴되었고 민간인 약 125,000명이 학살당했다. 위의 사진들은 전후 남아 있는 기록 중 일부에 불과한 사진이다.

사건의 가장 큰 책임자인 이와부치 제독은 마닐라 함락 직전인 1945년 2월 26일 마닐라의 인트라무로스(Intramuros)에 위치한 자신의 사령부 건물에서 수류탄으로 자폭했으나 시신 훼손이 심각해 이와부치 제독의 시신은 식별이 극히 힘들었다고 한다. 사후 중장으로 1계급 특진했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 학살에 가담하기는커녕 오히려 대민 지원을 한 부대가 있었는데 놀랍게도 삼대오물로 유명한 도미나가 교지 장군이 이끌던 육군 제4항공군이었다.[10] 이들은 자신의 주둔지 인근에 일본 육해군 부대의 민간인 학살 시도에 대해 이를 중단하지 않으면 아군이라고 해도 공격하겠다고 엄포를 놓으며 저지했다.

4. 일본군의 실책

4.1. 스페인 공사관 습격

학살이 정점에 달했던 2월 23일 어떤 건물에선 방화와 함께 사람들을 대검으로 찔러서 대략 70명의 사람들이 사망했는데 물론 이 정도 규모는 당시 마닐라에서 평범한 수준이라 얼핏 봐서는 그닥 특별해 보이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 건물이 다름 아닌 에스파냐국[11]의 영사관, 즉 스페인외교공관이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국기까지 당당하게 내걸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비록 에스파냐국이 중립국이라고는 하지만 엄연히 추축국과 친한 세력이었던 데다 당시 친일, 친적이었던 중립국들도 잇따라 연합국에 가담하던 상황[12]에 에스파냐는 일본이 가진 정말 몇 안 되는 우호적인 국가 중 하나였다. 한마디로 외교적으로 보았을 때 에스파냐 영사관은 그야말로 개막장 속에서도 절대로 일본이 건드려서는 안 될 곳이었다. 그러나 현지인들의 피에 취해 있던 일본군에게는 그런 게 없었는지 몇 안 되는 우호국의 외교 공관까지 쳐들어가 학살하는 희대의 정신나간 일을 벌인 것이다. 즉, 학살은 적국이든 우방국이든 아주 공평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이상한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13]

당시 주필리핀 스페인 대사 호세 델 카스타뇨 박사는 본토의 정치적 상황이 그랬던 만큼 골수 친프랑코 성향을 띄었고 프랑코 정권 내에서도 친독 인사로 유명했던 라몬 수녜르 계열 인사였으며 이 사건 전만 해도 오히려 지극히 자연스러운 이념적, 지정학적 이유로 추축국이 이길 듯했던 대전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의 힘을 통해 필리핀에서 에스파냐의 영향력을 회복할 수 없나 고민할 정도로 친일, 반미 성향을 띄었다. 이렇게 전혀 생각도 못 했던 방식으로 우호국으로 생각했던 일본한테 사실 일본 입장에서도 전혀 득 될 게 없는 방식으로 발등 찍힌 에스파냐 측에선 이 학살 소식을 알게 되자 분기탱천했고[14][15] 결국 4월 11일에 벌어진 이 학살극으로 인해 에스파냐는 일본과의 관계를 끊어 버렸다. 아무튼 일본은 그렇게 유럽에 몇 남지 않은 우호적인 외교 채널을 제 발로 걷어차 버린 셈이다. 그리고 아무도 의도하지 않은 결과지만 이 학살 이후 공사관 자산과 현지에 남아있고 살아남은 에스파냐 교민들의 재산 등을 복구하기 위해 절실하게 필요한 미국의 협조를 구하는 과정에서 당연히 친독색을 뺄 필요가 있었던 에스파냐 측에서 수녜르계 파벌을 2인자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갑자기 독일과 관계를 정리하는 등 피상적으로나마 프랑코 정권이 약간이나마 온건하게 누그러지는 나비 효과까지 초래했다.

4.2. 독일인 클럽 습격

당시 마닐라는 스페인 제국의 식민 통치가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았고 미국의 한창 태평양 진출 요충지이기도 해서 상당한 외국인 사업자, 노동자 커뮤니티가 형성된 국제도시였는데 진짜 학살 과정에 아무것도 눈에 뵈는 게 없었는지 동맹국인 나치 독일하켄크로이츠 깃발이 당당히 걸린 마닐라 독일인 클럽에도 처들어가서 당당하게 건물에 불을 지르고 탈출하려는 사람들은 총살하는 방식으로 800명 가량이나 학살했다.출처는 스페인의 주요 일간지 ABC(스페인어) 당시 20여 명 가량의 일본 군인들이 독일 클럽 내 여성들을 노소를 가리지 않고 강간했으며 소녀 한 명을 강간하고 살해한 뒤 시체를 훼손하고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였다고 한다.#

5. 종전 이후

전후 마닐라에서 학살 혐의 책임자로서 야마시타 장군이 마닐라 군사재판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그는 필리핀에서 시가전이 시작될 시점에는 사령부를 이미 철수했고 학살을 주도한 건 이와부치 제독 이하 해군 육전대와 이와 함께한 육군 병력 일부를 중심으로 한 패잔병들이었다. 전범재판에서 야마시타 장군은 학살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고 주장했고 재판에서 인정됐으나 예하부대의 학살에 대한 상급자로서의 책임 소재로, 마쓰이 이와네와 동일한 혐의까지 면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가장 큰 책임자였던 이와부치 제독이 자살하여 그 대신 책임을 질 인물이 필요하기도 했던 것 역시 야마시타 장군의 처형에 영향을 미쳤다.

구체적으로 진행된 조사에서 파울로 대학에서는 994명 살해, 북부 묘지에서는 2,000여 명 처형, 산차고 감옥에서의 집단 살해 등이 극동군사재판에서 주장되었다. 그러나 일본 우익 진영에선 마닐라 시민의 죽음은 미군과의 전투시 휘말려 사망한 것으로 미군의 폭격과 사살도 있었다고 주장했다. 더불어 야마시타 장군은 자신은 관련이 없다며 모르는 사실이라고 주장했고 실제로도 직접적인 연관성은 증명되지 않았다.

일본 우익들은 미국이 마닐라 대학살이라는 것을 날조하여 일본에게 대학살의 책임을 뒤집어 씌웠다고 주장해 가면서[16] 이 대학살 사건을 축소하고 은폐하려는 움직임만 보인다. 당연하지만 미국 역시 학살의 원인을 자국 탓으로 돌리는 소리에 대해서만큼은 가만히 안 있고 적반하장이라면서 으르렁거린다.

물론 필리핀에서도 일본 우익의 주장은 당연히 근거가 없다고 본다. 라몬 막사이사이 대통령을 비롯한 필리핀 정계인사와 장교들은 당시 일본군에게 맞서 싸웠고 이 학살로 가족과 터전을 잃고 항일 게릴라에 가담한 이들도 많았다. 또 이들은 미군과 손잡고 일본군에 맞서 싸웠으니 일본 우익이 미국 탓이라고 외치는 소리도 전혀 귀담아 듣지 않는다. 이들이 나중에 필리핀 정계, 군직에 몸담은 상황에서 저런 소리를 받아들일 리 없다. 의미없는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는 건 확연한 역사적 사실이고 단지 이 사건이 우발적 사건이었느냐 계획적 학살이었느냐만 논의의 여지가 남아 있는 정도다.


[1] 미군 역사상 가장 규모가 컸던 집단항복이라고 전해진다. 7만 6천명의 장병이 항복했는데 이 중 미군은 1만명 안밖이었고 나머진 필리핀군이나 당시 필리핀은 독립 이전이라 별 차이는 없다. 이때 일명 '죽음의 행진'이 벌어졌는데 이것이 바로 바탄 죽음의 행진이다.[2] 맥아더가 호주로 도피했을 때 그는 여전히 필리핀에서 맡았던 사령관 임무를 지속하려고 했지만 여러가지 문제로 현지 지휘의 어려움은 불가피했고 이에 보완책으로 지휘권을 몇등분하여 필리핀 거점 곳곳의 미군 장성들에게 일정 위임하고 자신은 간접적으로 그들을 조율, 지휘하려 했으나 곧 미국 본토의 군 수뇌부에선 웨인라이트 장군(육군 소장)을 중장으로 진급시켜 맥아더의 대행 역을 부여하고 맥아더는 이후 전쟁 중반까지 맡은 보직 남서태평양 전구 사령관으로 임명되고 호주 방어및 전구 내의 연합군 반격을 위한 준비에 몰두했다.[3] 그때까지 항복했던 것은 루손 섬을 위시했던 중, 북부 지역이었고 비사야 섬과 민다나오 섬으로 대표되는 남부지역의 미국/필리핀군은 여전히 저항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웨인라이트 장군에게 항복조건으로 모든 필리핀 지역의 저항 중지 및 항복을 요구했고 웨인라이트 장군은 라디오 방송으로 항복을 명령했으며 그의 부하장교/장성들이 저항거점들을 돌면서 대면으로 명령했다.[4] 대표적으로 사탕수수 밭을 엎고 미국으로부터 수입할 수 없게 된 목화를 재배하게 했다. 하지만 이는 필리핀의 식생과 맞지 않았고 그 결과 한 해 농사를 망친 필리핀인들이 반발하자 일제는 이를 무력 진압했다.[5] 구리 광산에 필리핀인들을 징용시켜 넣었다. 하지만 경계가 느슨한 틈을 타 자꾸 도망가자 도망자 색출과 더불어 가족들을 인질로 잡고 서로의 감시를 유도하기도 했다.[6] 현지의 의료수준으로 치료를 할 수 없는 게릴라 중상자들이나 수용소에서 탈출한 연합군 포로들 외 기타 요인들은 사전 약정된 지점에서 잠수함을 타고 호주로 후송되었다. 논픽션 소설 더 퍼시픽의 주인공 쇼프너 중령도 이런 경우였다.[7] 주로 미군의 특수부대원들로 개념이 희박했던 당시엔 맥아더 사령부에서 편성, 직속된 비정규전 부대였다. 게릴라 조직의 지휘나 인적 보강 및 일본군에 대한 체계적인 타격을 위해 전쟁 기간 내내 계속 잠입했다. 그외 소수의 게릴라 지도자들은 호주로 가서 훈련을 더 받고 돌아오기도 했다.[8] 대다수는 전쟁 전부터 체류했던 민간인이었다.[9] 마닐라에 가까워짐에 따라 당시 미군은 각종 지원부대를 배속시킨 몇개의 대대급 T/F부대를 편성하여 마닐라 진입을 위한 목적으로 전개시켰다.[10] 도미나가 장군은 탈영의 신역사를 쓸 만큼 무능과 무책임이 하늘을 찌르고 결전에 나설 용기도 없던 사람이라 그렇지 인륜까지 저버린 인물은 아니었다. 중국에서도 이시이 시로와 그의 부하들과 토의했을 때 "세균전을 벌이겠다고? 야 이 미친놈들아!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거기 있는 민간인들은? 그들은 사람도 아니냐?"라고 호통친 일화도 있다.[11] 현 스페인 왕국 이전 프랑코 시절의 스페인국을 뜻한다.[12] 대표적인 경우가 튀르키예.[13] 데즈카 오사무의 걸작 아돌프에게 고한다에도 나오는 내용이지만 파시즘이든,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세상에서 정말 무식하기 짝이 없는 놈들은 어디든지 있는 법이라 일단 법적으로 동맹국인 독일 시민으로서 일본에서 자란 주인공 아돌프 카우프만이 주변 사람들한테 "난 니들이 싫어하는 그 영미가 아니라 독일 사람이라고"라고 호소해도 주변 사람들이 "어쨌든 양코배기는 양코배기 아니냐?"라며 괴롭히는 장면이 나온다. 이걸 생각하면 당장 상부란 놈들도 도덕성과는 별개로 가치 판단을 일절 배제한 군인, 정치인으로 봐도 노답 꼴통들이 이리 차고 넘쳤는데 실제로 학살을 자행하는 일선 병사들이 스페인인이냐 미국인이냐 안 따지고 그냥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들을 보이는 족족 무작정 학살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14] 다만 이 사건을 접한 후에도 에스파냐에서는 '그래도 일본과의 외교 관계는 유지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논란도 있었다. 자국민 학살이 발생했는데도 이럴 정도로 당시 에스파냐에서는 일본을 우호적으로 대하고 있었다.[15] 당시 에스파냐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카우디요스페인 내전에서 승리하니 그 히틀러무솔리니제2차 세계 대전을 터뜨렸고 이들의 외교적 압력에 따라 좋든 싫든 간에 파시스트 2중대로 분류되어 연합군은 이미 에스파냐를 가상적국 취급하고 이웃나라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던 공화파 잔당을 지원하며 에스파냐도 추축국과 절연할지를 고민할 정도로 외교적 고립 중에서도 최악의 고립 상태에 있었다. 이러니 아무리 이런 사건이 터져도 에스파냐 당국 입장에서는 몇 안 되는, 특히 아시아권에서는 유일한 우방국이라 할 만한 일본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던 것.[16] 다만 이들도 왜 수많은 민간인들이 대검에 찔리거나 참수된 채 한 곳에 몰려 죽어 있는지에 대해선 그럴듯한 설명조차 하지 못하고 우연 혹은 날조라며 부정하기 급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