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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08:40:58

팔라완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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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전쟁범죄와 그로 인한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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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자 약 5,700여 명[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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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기소 피의자, 재판 전 사망자 포함. 공식적으로는 이들은 무죄이다.
[2] 개별 사건의 중복 피고인까지 합계되었으며, 이 밖에 추축국 피점령지 내 부역자, 기소유예자가 포함된 수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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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전개4. 이후

1. 개요

1944년 12월 14일, 당시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필리핀 제2공화국 팔라완 섬에서 벌어진, 일본군에 의한 미군 포로 집단학살 사건. 그 수법이 잔혹하고 악랄한 데다 이 학살이 포로를 수용 및 보호하라고 만들어진 포로수용소에서 일어난 학살이라 더 유명하다.

2. 배경

팔라완 섬에 포로수용소가 생긴 것은 1942년 중반의 일이었다. 일본군은 팔라완 점령 후 섬에서 가장 큰 푸에르토 프린세사(Puerto Princesa)의 경찰대 막사를 활용하여 소규모 포로 수용소를 만들었다. 이후 바탄 반도 등에서 포로로 잡힌 미군 2백여 명이 선박편으로 옮겨와 이 수용소에 수감되었고 강제노역에 처해졌다. 일본군은 쇠약해진 포로들을 다시 돌려보내고 건장한 포로들로 충원하여 이곳에서 노역을 시켰고, 방공호와 참호선 등을 축조했다.

3. 전개

1944년, 레이테 만 해전과 동시에 미군이 필리핀으로 돌아오면서 필리핀 전역의 일본군들은 공포에 휩싸인다. 포로수용소를 관할하고 있던 2항공사단 131대대 지휘관은 임박한 미군의 상륙에 대비하여 포로들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 상부의 지시를 요청했다. 2항공사단장 테라다 세이치 중장은 다시 상급부대인 4항공군 사령관 도미나가 교지와 논의한다.[1] 논의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불분명하나, 논의 후 테라다 중장은 아래와 같은 지시를 내린다.
적의 상륙이 임박했다고 판단되고, 포로들이 이에 호응할 기미가 보이면 즉시 처분하라.
사실 이 명령부터가 매우 애매했다. 포로가 탈출을 시도하거나 반란을 일으킬 경우 제네바 협정에 의거 그 순간 포로 신분이 상실되고 전투원으로 성격이 바뀌기에 사살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조치다. 문제는 명령문 자체가 탈출이나 반란을 일으켰을 때를 규정한 것이 아니라 '호응할 기미가 보이면'이라는 매우 애매모호한 상황을 규정했다는 것이다. 현장 지휘관 입맛대로 해석할 여지가 있는 명령이었고, 이는 결국 팔라완 학살의 참극을 불러 일으키는 단초가 된다.

12월 14일, 일본군은 수용소의 포로들을 다른 지역으로 이감 시키기 위해 포로들을 빼내어 이동을 시작했다. 바로 그 찰나에 공습경보가 울렸고, 일본군들은 포로들을 급히 방공호 속으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일본군은 좁은 방공호 문을 틀어막은 후 휘발유를 붓고 불을 질렀다.

놀란 미군 포로들이 탈출을 시도했으나 일본군은 탈출하는 포로들을 향해 총격을 퍼부어 사살했다. 결국 미군 대다수는 그 좁은 방공호-슬프게도 본인들이 노역으로 만든 그 방공호- 속에서 대부분 불에 타 죽고 일부는 탈출하다 일본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 150명의 포로 중 139명이 그렇게 죽었으며, 기적적으로 탈출한 11명의 포로들은 팔라완 섬 내의 필리핀 게릴라들의 도움을 받아 은신할 수 있었다.[2]

4. 이후

탈출한 포로와 이들을 보호한 게릴라들의 정보 보고를 통해 이 대학살을 알게 된 미군은 즉시 충격과 분노에 휩사였다. 때문에 미군 지휘부는 즉시 별도의 작전 계획을 수립, 그동안 입수한 정보를 토대로 확인된 필리핀 내 포로수용소들에 대한 일련의 구출 작전을 최우선적으로 실시하게 된다. 해가 바뀌어 1945년 1월에서 3월에 걸쳐 미군은 필리핀에 산재한 포로수용소 다수를 급습하여 수천 명의 포로를 해방 시켰다.

그리고 2월 28일, 미군이 팔라완 섬에 상륙했다. 일본군 수비대는 순식간에 격 파당했고, 4월 22일 섬 전체가 미군의 손에 들어왔다. 푸에르토프린세사 탈환 직후부터 미군은 탈출 포로들의 증언을 토대로 학살지 인근을 조사했고, 암매장된 포로들의 유해가 발굴되었다.

발굴된 유해 139구 중 123구는 이후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의 제퍼슨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생존자가 있었기에 비교적 일찍 알려진 학살이라 종전 직후부터 미군은 이 학살에 연루된 전범들을 이 잡듯이 찾았고 그 중 상당수가 기소되었다. 그러나 필리핀 전역에서의 학살에 대한 최고책임자로서 야마시타 도모유키마닐라 대학살 건으로 이미 부하들의 죄를 덤터기 쓰고 교수형에 처해진 데다가, 학살 부대의 직속상급부대인 4항공군 사령관 도미나가 교지만주 전역에서 소련군에 포로로 잡힌 터라 조사가 불가능했다. 대신 2항공사단장 테라다 세이치가 종신형을 선고 받았고, 기타 학살 가담자들은 2~12년형을 선고 받았다.[3]

현재 학살 장소에는 플라자 카르텔이라는 공원이 조성되었고, 공원 내에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비 및 조형물이 세워졌으며, 학살 당시 사용된 방공호가 보존되고 있다.
[1] 이때 도미나가 교지는 술(위스키)과 마약에 취한 상태였다.[2]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면 30여 명이 해안가로 탈출을 시작했는데 일본군의 총격으로 많은 수가 사망하였고 11명만이 바다에 뛰어들 수 있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포로 생활로 약해진 체력 속에 최대 8시간동안 수영을 해야 한 이도 있었고 심지어 상어에 물린 이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가까스로 정글에 숨어들어 약 3주간 일본군의 수색을 피해 섬 반대편에 있는 필리핀군 진지에 도착했는데 기적적으로 11명 모두 살아남았다고 한다.[3] 여러 가지 주장이 나오는데 그중 하나는 술과 마약에 취한 도미나가 교지가 내린 명령에 크게 불만을 품고(애당초 테라다는 도미나가를 매우 혐오했다.) 중간에 지시를 조작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게 사실이라도 도미나가 교지의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닌데, 포로 대우 같은 중요한 일을 앞두고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직무유기라는 것. 다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설이다. 정작 도미나가는 이후 풀려났고 일본으로 와서 살다가 죽었는데 그가 이런 학살에 관여했다든지 뭔가 책임이 있다면 미군 측이 결코 가만 놔둘 리 없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