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田荒
논과 밭이 황폐해지는 것.2. 戰況
전쟁의 실제 상황.3. 戰惶
두려워서 떠는 모습.4. 錢荒
디플레이션. 특히 18세기 초 조선시대에 나타난 화폐 부족 현상으로, 대동법을 통해 화폐의 가치가 큰폭으로 성장하면서, 일부 부자들이 더이상 쌀이 아닌, 화폐를 재산축적의 수단으로 여겨 유통시키지 않고 쌓아두며 발생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폐의 발행량이 가치 상승세를 따라가지 못하는 문제가 나타났다. 이는 당시 동북아시아 국가들의 국제 무역이 경색되면서 당시 조선 조정에서 충분한 양의 구리 광석을 교역에서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1] 이를 '악화가 양화를 몰아낸다'는 그레샴의 법칙에 빗대면 시중에 있어야 할 악화조차 공급 부족으로 씨가 말라서, 그 악화가 축적의 수단이 되고,[2] 이에 따라 화폐 경제가 붕괴되어 물물교환 경제로 회귀한 셈이다.18세기 후반 인도와 동남아시아산 구리 광석이 동북아시아 지역에 유통되면서 구리의 국제 시세가 크게 떨어졌고 조선에도 많이 유입되었다. 1820년대를 전후로 상평통보 주조가 활발해졌고 곧이어 전황이 해소되었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 이익의 폐전론과 박지원의 용전론이 주장되기도 했었다.
5. 유희왕의 카드군, 전황
삼국지, 특히 적벽대전을 모티브로 한 카드군이다.#!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전황(유희왕)#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if 문서명 = 문서명 != null ? 문서명 : calleeTitle
의 [[전황(유희왕)#|]] 부분을}}} 참고하십시오.[1] 구체적인 직접적 원인으로는 에도 막부의 구리 수출 통제책이 꼽힌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 중국(명, 청)과 일본 사이의 국교 단절로 공식적인 교역이 중단된 상황에서 교역이 지속되던 조선은 양국 사이의 중계무역을 통해 구리와 은 등을, 특히 구리는 화폐로 활용할만큼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으나, 1720년 청과 일본 간의 직접 교역이 재개되면서 조선이 담당하던 중계무역의 비중이 감소하고, 일본산 은의 유통 경로가 청으로 다변화되었으며, 청의 은 수요 증가 때문에 조선의 은 확보가 어려워지거나 하는 등 기존의 대일무역 조건이 변화하였으며, 이러한 변화가 구리 수입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있다. # #[2] 시기는 조금 뒷 시기이지만, 허생전에서의 변씨가 허생에게 보유한 1만 냥을 대출해주는 것이 그러한 거부의 화폐 축적 상황을 빗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