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무조건 항복(無條件降伏 / Unconditional surrender)은 패전국이 승전국의 요구 일체를 이의없이 무조건적으로 수용하여 항복하는 행위이다.2. 상세
당연하지만 패전국으로서는 일반적인 항복보다 더 까다롭다. 따라서 무조건 항복은 승전국의 강요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패전국들, 특히 4개국에게 분할 점령당한 나치 독일과 원자폭탄을 투하당한 일본 제국이 무조건 항복을 한 사례로 유명하다. 일본의 항복 문서 참고.무조건 항복이라는 용어는 근대에 등장했지만, 그 이전에도 무조건 항복이라는 개념 자체는 있었다.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무조건 항복은 원수(元首), 즉 부족장, 맹주, 왕 등의 신병과 생살여탈권의 인도, 또는 무장 해제에 국한되어 있었지만 통수권이 분립하고 있는 근현대 국가에서의 무조건 항복의 판단 요건은 쉽지 않다. 또한 전시 국제법하에서 근대 이전의 의미에서의 무조건 항복과 투항은 성립하지 않는다. 미국의 국제 관행법을 정리한 전시법 안내서(야전 매뉴얼 <FM27-10> - 육전법(The Law of Land Warfare))에서는 무조건 항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무조건 항복은 군대 조직을 무조건(without condition) 적군의 관할하에 둔다. 양 당사국에 의해 서명된 문서를 나눌 필요는 없다. 전시 국제법에 의거, 제한에 따라 적군의 관할하에 있는 군대는 점령국의 지시에 복종해야 한다."'
<FM27-10> - 육전법(The Law of Land Warfare), 제 478조
다만 이 경우엔 무조건 항복에 의한 전투 종결은 국제법의 제한을 받기 때문에 교전 귀결 의한 전투 종결보다 엄중한 것은 아니다.<FM27-10> - 육전법(The Law of Land Warfare), 제 478조
3. 의미상 구분
무조건 항복은 군사적 의미와 정치적 의미로 구분된다고 한다. 군사적 의미는 병력과 무기 따위의 일체를 조건없이 승자에게 내맡기고 항복하는 것을 말하고, 정치적 의미는 패전국이 조건없이 승전국의 정치적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는 것을 일컫는다. 예를 들면, 일본 제국의 무조건 항복은 1945년 7월의 포츠담 선언에 의거해 이루어졌으므로 군사적으로는 무조건 항복에 속하지만 정치적인 무조건 항복은 아니라는 얘기가 있다.[1]4. 사례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추축국들 -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 이들 중에서 나치 독일이랑 일본 제국은 끝까지 저항하다가 본토가 쑥대밭이 되고 결국 버티지 못하고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것으로 유명하며, 이로 인해 무조건 항복이라는 용어를 알게 된 사람들이 많다.
이 지경까지 간 이유는 이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어설프게 독일과 휴전협상 정도로 종전을 해줬더니 배후중상설이 불거져나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세계 대전이 벌어진 관계로 이에 크게 데인 연합군이 다시는 그런 헛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무조건 항복하든지 아니면 다 죽든지를 내걸고 전쟁에서 패배한 추축국들의 본토에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가했기 때문. 물론 이렇게 본토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는데도 피해가 덜한 지역에서 배후중상설이 튀어나왔다는 걸 보면 이마저도 부족했다는 평이 나온다.* 627년 한다크 전투 당시 무함마드는 메디나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도시를 침공하고 이들에게 무조건 항복을 할 것을 강요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역사에서 최초로 무조건 항복을 강요한 사례이다. 무조건 항복이라는 용어가 국제법상에서 정식으로 등장하기도 전에 일어난 셈.[2]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도 1814년에 동맹군에게 관광당하기 직전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할 것을 강요받은 적이 있다.
- 남북 전쟁 - 이 사례는 '무조건 항복'이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등장한 계기가 되었다. 1862년에 남군의 장군이었던 사이먼 B. 버크너(Simon B. Buckner)가[3] 포위군 사령관인 율리시스 S. 그랜트에게 휴전 제안을 했으나 "'무조건' 만을 항복의 조건으로 인정한다."고 응답하였고, 한 신문사가 이를 보도하면서 Unconditional Surrender라는 용어의 소개와 함께 공식 이니셜로 US를 제창하여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 셔먼 장군 역시 무조건 항복만을 요구하여 별명이 무조건 장군이었다.
[1] 출처: doopedia, 무조건 항복 문서.[2] 다만 유대인들은 무조건 항복에 응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했고, 빡친 무함마드는 그 도시의 모든 남성들을 처형할 것을 명령했다고 한다. 무함마드의 잔혹함을 들어 깔 때 자주 제시되는 일화이다.[3] 이 양반은 1823년생인데, 아들 사이먼 볼리바 버크너 Jr. 는 1886년생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육군중장으로 오키나와 전투에서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