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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9 09:32:30

에드사 혁명

피플 파워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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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개
2.1. 마르코스의 독재2.2. 니노이 아키노 암살2.3. 1986년 대선2.4. 쿠데타2.5. 마르코스의 최후
3. 영향4. 여담5. 관련 문서
<colbgcolor=#0035a9> 에드사 혁명을 주제로 한 노래
Handog Ng Pilipino Sa Mundo (필리핀인이 세상에 준 선물)

1. 개요

에드사 혁명은 1986년필리핀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으로, 20년간 지속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독재정권을 몰아내는 결과를 낳았다.

필리핀에서는 시위가 벌어진 도로의 이름을 따 EDSA 혁명이라고 한다. EDSA는 Epifanio de los Santos Avenue로 마닐라 교통의 중추 역할을 하는 도심 고속도로다. 영미권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는 피플 파워(혁명)가 있고 2월 혁명이나 노란 혁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후자는 시위대가 노란 리본을 상징으로 사용한 것에서 비롯된 명칭이다.

1980년대에 처음 벌어진 일련의 시위를 1차 에드사 혁명, 2001년 같은 자리에서 재현된 조지프 에스트라다 퇴진 시위를 2차 에드사 혁명으로 구분한다.

2. 전개

2.1. 마르코스의 독재

1965년에 권좌에 오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그 어떤 정권보다 더 많은 도로를 지었다고 자부할 정도로 극적인 경제 개혁을 이끌었다. 이에 힘입어 1969년 대선에서 세르히오 오스메냐 주니어[1]를 61퍼센트로 찍어누르며 필리핀 역사상 처음으로 재선에 성공했다. 정권 2기에 들어선 마르코스 정부는 수많은 인권 탄압과 부정부패를 일삼으며 독재의 길을 향해 걸어갔고 니노이 아키노가 이끄는 상대 진영 필리핀 민주당에 의해 엄청난 비판을 받아야만 했다. 이 시기에 경제가 파탄나면서 사회가 양극화되고 급기야 필리핀 공산당이 무장 투쟁단체인 신인민군대를 창설하기에 이른다.[2]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민다나오에서 모로해방전선까지 들고 일어났다.

마르코스는 1972년에 사회 안정화라는 빌미로 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령 선포 당시 거수 투표 방식으로 통과시킨 것도 모자라 의회 해체, 반정부 언론 축출, 정치적 경쟁자들을 향한 집단 체포 명령 등 민주주의에 반하는 야만행위가 벌어졌다. 필리핀 자치령 시절 만든 1935년 헌법은 마르코스의 장기 집권을 이뤄줄 개정 헌법으로 바뀌어 1973년 95%의 찬성표를 받고 통과되었다. 냉전이 한참이었던 시기에 필리핀 내 미군기지를 계속 사용할 것을 수락한 마르코스는 미국 정부의 든든한 지원까지 받게 되었다.

2.2. 니노이 아키노 암살

1978년 숙적 니노이 아키노LABAN[3], 인민의 힘이라는 당을 만들어 총선에 출마했으나 아키노 자신을 포함한 모든 후보가 낙선했다. 캠페인 기간 내내 위험을 무릅쓰고 비판의 목소리를 낸 아키노는 심장 수술을 명분으로 미국으로 떠나면서 필리핀 입국 금지를 선고받았다. 국민을 위해 나라로 돌아오고자 한 아키노에게 영부인 이멜다는 경고장을 날리고 여권 발급을 거부했지만 아키노는 계엄령(Martial Law)과 포트 보니파시오 감옥(Port Bonifacio)에서 따 온 가명 Marcial Bonifacio로 여권을 발급받고 필리핀으로 가는 중화항공 여객기에 올랐다. 그리고 1983년 8월 21일 마닐라 국제공항에 도착한 아키노는 현장에서 암살당했다.

마르코스의 입지가 흔들리던 차에 아키노의 암살은 전국민에게 충격을 줬고 마르코스 정권에 대한 총체적 의심과 불만으로 번졌다.[4] 1980년대 들어 필리핀 경제는 나락을 쳤고[5] 빚을 져 가면서 유지시키던 성장률도[6]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급해진 마르코스는 1984년 진상조사위를 꾸렸지만 마닐라 대주교가 참여 제안을 거절하고 조사 결과를 부정하는 등 불난 집에 기름붓는 결과만 낳았다. 의도와 반대로 아키노를 위한 정의(JAJA)라는 단체가 설립되고 필리핀 대학교 학생회를 비롯한 지식인 계층이 반발하기 시작했다.

변화를 눈치챈 미국이 필리핀 정부를 압박하자 마르코스는 원래 1987년 예정된 대선을 자신의 입맛대로 1년 당겨서 치른다고 발표[7]했다. 마침 비상시를 대비해 대표자를 고르던 민주화 진영은 이런저런 논의 끝에 니노이 아키노의 부인 코라손 아키노를 대선 후보로 임명했고 이 둘은 마침내 1986년 대선에서 격돌하게 되었다.

2.3. 1986년 대선

1986년 2월 7일 열린 대선에서 기괴한 결과가 연출되었다. 민주진영의 감시자 역할을 맡은 국가자유선거운동(NAMFREL)은 전체 선거구 70%에서 코라손 아키노가 승리했다고[8] 발표했지만 정작 선거위원회(COMELEC)가 내놓은 결과는 마르코스의 당선이었다.[9] COMELEC과 NAMFREL은 각각 마르코스의 53% 득표 당선과 아키노의 52% 득표 당선을 주장했다. 선거 당일 투표소에서 수많은 폭력과 조작행위가 발생했고 급기야 선거위원회 전산 담당자 30명이 마르코스에 유리하도록 개표를 조작했다고 폭로하면서 집단 파업을 선언했다. 이 파업 사건은 시위의 촉매제가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상황이 급격하게 반전되면서 필리핀 대주교가 비난 성명서를 내고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불편한'[10] 결과[11]라고 비판하면서 시위에 불을 지폈다. 2월 15일 COMELEC에서 마르코스를 당선인으로 발표했지만 의원 50명이 집단으로 파업하며 반대했다. 결국 마르코스는 말라카냥궁에서, 코라손 아키노는 산후안의 연회장인 클럽 필리피노 그린힐스(Club Filipino Greenhills)에서 대법관 클라우디오 티행키[12]의 입회 하에 취임 선서를 하면서 두 후보 모두 서로 다른 장소에서 취임 선서를 벌였고 마르코스 소유의 기업에 대한 불매운동까지 확산되었다.[13] 결국 리카르도 비달 필리핀 추기경이 교회의 이름으로 성명을 냈는데 "국가가 국민을 위해 악을 물리치는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면 종교계가 앞장서 도울 막중한 도덕적 책임을 가진다"는 내용이었다. 한마디로 마르코스 정부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고 선언한 셈. 기독교 국가인 필리핀에서 교회가 가지는 영향력은 어마어마한 데다 "모든 교회 신자와 신심 깊은 사회구성원 각자의 판단"이 필요하다며 "목소리를 내고 잘못된 것을 고칠 시간이며 잘못된 것이란 구조적인 문제기에 고치는 방법도 절차를 따라야" 한다고 짚었다. "선거의 경우 이는 온전히 사람들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의도를 분명히 한 건 덤.

2.4. 쿠데타

다음날 2월 16일 루네타 공원에서 코라손 아키노 주도로 인민의 승리(Tagumpay ng Bayan) 시위가 열렸다. 마르코스 정권에 대한 시민 불복종 운동을 독려했는데 이때 참석한 사람이 자그마치 200만명에 달한다. 아키노는 세부까지 날아가 전국적인 반마르코스 운동 독려에 나섰다. 필리핀군 장성들마저 마르코스에 등을 돌리고 쿠데타를 준비[14]하던 차 이 소식이 마르코스 귀에 들어가고 쿠데타를 모의한 장성을 체포해 버렸다. 이에 반발해 훗날 대통령이 된 피델 라모스가 수감된 군인들을 돕기 위해 자리에서 물러났다.

2월 22일 저녁 6시 30분 경 후안 폰세 엔릴[15]과 피델 라모스가 국방부 청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마르코스 정권 지지를 철회한다고 발표했다. 분노한 마르코스는 공개적으로 멍청한 짓 그만하라며 엔릴에 전화를 걸었지만 엔릴은 그대로 씹어 버렸다. 이에 마르코스는 엔릴과 라모스를 체포하는 데 방해되는 모든 필리핀인을 짓밟는다는 선전포고와 다름없는 발언을 했다.

베리타스 라디오를 통해 추기경의 메시지가 방송되었는데 에드사 대로에 모여 반군에 지지를 보내고 음식을 나누자는 음성이었다.[16][17] 그리고 이것이 민주화 진영을 위한 신의 한 수가 되었다.[18]

2월 23일 월요일 예상과 달리 엄청난 인파가 에드사 대로로 몰려들었고 가족 모두가 거리로 나와 축제 같은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거리 공연이 열리는가 하면 한쪽에서는 즉석 예배가, 다른 한쪽에서는 바리케이드 공사가 벌어졌다. 현장에 나온 모든 사람이 베리타스 라디오에 채널을 고정하고 노래를 따라 불렀다. 오후가 되자 쿠데타 상황이 실시간으로 중계됐고 이를 막기 위해 나온 해병대 병력마저 발포 없이 후퇴해 버렸다.

그러나 2월 24일에는 첫번째 충돌이 발생했는데 리비스 지역에서 진압을 시도하던 해병대가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을 발포했다. 이로써 아기날도 기지가 정부군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같은 날 필리핀 공군 15전투비행단 소속 헬리콥터 한 대가 명령을 거부하고 시위대 근처에 그대로 착륙해버렸고 두 대의 공군 소속 헬기가 항거에 동참했다. 이에 사기가 오른 엔릴과 라모스는 쿠데타에 동참할 것을 독려했다. 그리고 이때 갑자기 마르코스가 말라카냥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시민들이 환호하기 무섭게 또다시 방송에 등장한 마르코스는 절대 물러나지 않는다며 쉽사리 항복하지 않을 것을 시사했지만 반군은 방송국을 습격해 마르코스의 연설 방송이 중단되고 뒤이어 반군 시민들이 스튜디오에 앉아 4번 채널은 다시 시민을 위해 방송합니다라는 멘트를 날렸다. 이때를 기점으로 100만명이 넘는 시위대가 에드사 대로에 모여들었다. 당시의 4번 채널이 바로 국영 방송사인 PTV이다. 오후에 접어들면서 반군 헬기가 정부군 물자를 파괴하고 말라카냥에 로켓 공격을 시도했으나 약간의 피해에 그쳤다. 이 과정에서 필리핀군 대부분이 반군에 합류했다.[19]

2월 25일 정부군 소속 저격수 무리와 반군 사이 라디오 송전탑을 둘러싼 유혈 충돌이 있었는데 반군 헬리콥터가 저격수를 처리하면서 종결되었다. 이후 상술하듯이 코라손 아키노가 필리핀 대통령 당선을 선언하며 그린힐스에서 간소화된 취임식을 가졌다.[20] 이를 본 마르코스는 말라카냥궁에서 자신만의 취임식을 열면서 맞불을 놓았지만 외국인 초대 손님이 단 한 명도 오지 않았다. 궁전 발코니에 선 이멜다 마르코스는 '반군 뱀새끼 잡아라!'를 외치는 지지자들 앞에서 마르코스 부부 내외를 상징하는 노래 당신 덕분에(Dahil Sa Iyo)를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순간은 마르코스가 필리핀 대중 앞에 나선 마지막 순간이 되어 버렸다.

2.5. 마르코스의 최후

이른 새벽부터 미국 의회 관계자에 전화를 걸어 백악관의 도움을 청한 마르코스는 깨끗하게 정리하세요라는 답변을 듣고 크게 실망했다. 쿠데타를 주도한 엔릴에게 자기 자신과 가족의 안전한 탈출을 부탁하고 미국 공군 소속 HH-3E 구조헬기에 탑승해 앙헬레스의 클락 공군기지로 도주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마르코스는 고향 일로코스 노르테에서 이틀만 머무르자며 간곡히 요청했지만 레이건은 이를 칼같이 거절해 버렸다. 온갖 금은보화를 들고 을 거쳐 하와이로 날아간 마르코스는 다시는 필리핀 땅을 밟지 못하고 사망했다[21].

3. 영향

대만한국 등 다른 아시아 국가의 민주화 운동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는다. 언론의 자유를 되찾고 비민주적이던 1973년 헌법을 폐기한 것도 가시적인 성과다. 더불어 냉전 말엽 독일 재통일구 소련 국가의 독립 과정에서 직간접적으로 에드사 혁명을 벤치마킹한 부분이 있다.

4. 여담

5. 관련 문서


[1] 세르히오 오스메냐의 아들[2] 신인민군대는 반공주의 스탠스를 취하면서 미국의 지원을 얻고자 한 마르코스에 의해 해산되었지만 지금도 일부 세력이 남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3] 약자를 그대로 읽으면 타갈로그어로 싸움 혹은 항쟁이라는 뜻이 된다.[4] 당시 마르코스가 병상 신세를 졌던 점도 한 몫 했다고 한다.[5] 심지어 1984년에는 -7%, 1985년에는 -6.9%의 엄청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6] 그것도 대개 5%대에 불과했다. 1973년, 1976년 각각 8.8%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보인 적이 있긴 하나 일시적인 수준이었고, 1974년에는 3.4%로 떨어지기도 했다.[7] 이는 먼저 손봐 둔 개정 헌법이 있어 가능했다.[8] 아키노 7,835,070표, 마르코스 7,053,068표로 약 78만표 차이[9] 마르코스 10,807,197표, 아키노 9,291,761표[10] 원문 표현은 disturbing[11] 이때 정확히는 눈치를 보면서 '그런데 잘못은 양쪽 다 했다'는 말을 남겼다.[12] Claudio "Dingdong" Ong Teehankee, 1918-1989[13] 주식시장 기록을 경신하면서 엄청난 낙폭을 보였다고...[14] 원래 계획은 말라카냥궁을 습격해 마르코스 부부를 체포하고 남아 있는 지지 세력을 저지하기 위해 공항과 군부대, 고속도로를 봉쇄하는 것이었다.[15] Juan Ponce Enrile, 1924~. 마르코스가 상원의원이었을 시절부터 마르코스의 개인 법률 문제를 전담했으며 1970년부터 1986년까지 무려 16년간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고(다만 1971년에 4개월 가량 상원의원 출마를 위해 국방부 장관을 사임해서 마르코스가 임시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적이 있다.) 마르코스의 계엄령 준비에 매우 적극적으로 관여한 마르코스의 최측근이었다.[16] 악명높은 정부군에 민간인이 맞서기란 역부족이라고 생각한 이들이 대다수였지만 종교계 인사 다수가 현장으로 나와 지지를 보냈다.[17] 정부군이 새벽부터 방송국을 찾아가 통신선을 끊는 등 메시지를 차단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18]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도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을 필두로 한 가톨릭계가 크게 기여했다. 특히 김 추기경은 그 직위의 특권 중 하나인 바티칸 시국 시민권을 결정적인 순간들에 내세워 당시 군부독재 정권의 탄압을 여러 차례 물리친 바 있다. 최고위 성직자인 추기경에게 위해를 가했다가는 전 세계 가톨릭교회의 엄청난 비판을 살 수밖에 없기 때문이며 김 추기경도 이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19] 후일 공개된 녹취록에 정부군 각료 파비안 베르와 이야기를 나누던 마르코스가 다급한 목소리로 발포하지 말라고 다그치는 부분이 있다. 대통령궁 복귀는 고사하고 사태가 커지는 것을 막는 데 급급했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다.[20] 이때 자리에서 함께한 엔릴은 장군으로 승진했다.[21] 하와이에서 가서도 마르코스는 용병을 동원해 코라손 아키노를 납치할 계획을 세우려는 대화를 했고 그 녹음이 공개되면서 구설수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