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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선/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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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 ~ 대통령2.2. 사임 이후
3. 묘소

1. 개요

대한민국의 전직 대통령 윤보선의 일생을 서술한 문서.

2. 생애

2.1. 어린 시절 ~ 대통령

파일:윤보선 어린시절 사진.jpg
윤웅렬, 윤영렬 형제를 필두로 구한말에 유력 가문으로 떠오른 해평 윤씨 집안 출신이다. 윤영렬의 차남인 윤치소의 장남으로, 윤치호가 당숙, 윤치성윤치영은 숙부다. 해평 윤씨 문서로. 다만, 윤치영이 매우 늦둥이라 조카인 윤보선이 삼촌인 윤치영보다 1살 많다.

21세이던 1918년 상하이시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임시의정원의 최연소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이듬해 이시영, 신규식, 신익희의 권유로 영국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로 유학을 다녀왔다. 당시 별명이 "영국신사".[1]

귀국 이후에는 조선총독부 등 요로를 통해 집요한 협조를 강요받았으나, 석왕사에서 은신하며 일체 응하지 않았다. 게다가 부인과 사별하며 여식만 남겨두고 있던 터라 일본의 협박이 잘 먹히지도 못했다. 심지어는 문중회의에서 결의된 창씨개명을 홀로 거부하기까지 했다.[2]

광복 직후 한국민주당 발기인으로 참여, 활동한다. 미군정에서 농상공국 고문을 맡았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민주당 후보로 충청남도 아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서용길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제1공화국에서 1948년 12월 서울특별자유시장[3]에 임명되어 12월 13일 취임인사를 했다.#

1949년 6월 6일 제2대 상공부장관에 임명되어 서울특별자유시장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상공부장관에 재임하며 1949년 11월 30일 국회에 출석하여 광부들의 희생과 애국심을 언급하면서 "국내 석탄 사업이 전기 생산과 대한민국의 미래를 좌우하는 중요한 사업이다."라고 국회의원들에게 석탄 사업이 중요함을 설명했다. 그러나 대통령 이승만이 민주국민당을 멀리하자 상공부장관을 사퇴하였다. 상공부장관 사퇴 이후인 1950년 1월 12일 상공부장관 임기 동안의 아쉬움을 얘기했다.#

6.25 전쟁국민방위군 사건, 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나자 이승만과 결별하고 민주당 창당에 참여해 최고위원이 되었다.

4.19 혁명 이후 들어선 제2공화국에서 민주당 구파로 대통령을 역임했다. 하지만 당시는 의원내각제 체제였기 때문에 실권을 행사했던 총리에 비해 대통령의 권력은 많이 억제되어 있었고, 9개월 정도가 지난 후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을 일으켜서 대통령으로서 영향력을 가진 기간도 짧았다. 당시 실권은 민주당 신파의 장면 국무총리가 행사하고 있었다.

역임 1년여 만에 박정희5.16 군사정변으로 하야하려 했는데 당시 반응은 새벽에 보고받았던 "올 것이 왔다"였다. 대규모 유혈사태로 번지는 것을 우려한 나머지 주한미대사와 UN사령군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이한림 중장을 저지하고 사임의사를 밝혔다. 1962년 3월 22일, 윤보선 대통령은 하야했다.

임기 중 대통령 관저의 이름을 경무대에서 청와대로 바꿨고, 이는 제19대 문재인 정부까지 이어졌다. 아래에서 설명하듯 존재감 없는 대통령이면서도 후대로 이어질 자신의 흔적을 남긴 점에선 아이러니하다.

2.2. 사임 이후

파일:윤보선 말년?.jpg
대통령직 사임 이후 시간이 흘러 무궁화대훈장을 착용하고 있는 모습.

대통령치곤 존재감이 참 없는 편이고 또 다른 미미한 존재감의 대통령 최규하와 함께 엮이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교과서에서는 제2공화국, 의원 내각제, 양원제 등으로 인해 그가 대통령이던 시절을 꽤 비중있게 다루는 편이다.[4] 따지면 또 지금과 달리 리즈 시절엔 나름 대중적 인지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던 게, 5대 대선, 6대 대선에 두 차례나 유력 후보로 출마해 박정희와 대통령 선거 대결을 했으며, 특히 5대 대선의 경우는 역대 대선 중 가장 표 차이가 적게 났다.[5] 여담으로 이때 윤보선은 과거 박정희의 남조선로동당 전력을 들춰냈고, 이에 박정희는 매카시즘(종북몰이) 하지 말라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반면, 박정희 측에서는 윤보선 일가[6]의 친일이력을 지적하였다는 점도 더욱 아이러니하다. 아무튼 윤보선의 색깔몰이로 정작 남부 지역에 해당하던 영호남과 제주도에선 윤보선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 투표 결과 남북 지역 대결 양상이 되기도 하였다.[7] 게다가 귀족적인 성향의 윤보선에 비해,[8] 소작인 농사꾼 자식임을 강조한 박정희에게 농민 표가 많이 간 탓도 있었다.[9]

첫 번째 대결에서 근소한 차이로 진 다음에, 그는 스스로를 정신적 대통령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이후로 정신적 지주 등 '정신적'이라는 말이 꽤 유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2번째 대선 도전에서도 낙선하며 체면을 구긴다. 그래도 5.16 정변 이후 해산된 민주당 구파(사실 5.16 직전에는 신민당) 세력을 규합하여 민정당을 창당하고[10] 총재로서 제법 오래 정치를 하긴 했다. 이후 민중당신한당에 몸담다가 신민당으로 통합. 1971년 신민당의 유진산 체제에 불만을 품고 탈당하여 국민당을 창당하였다. 유신시대에도 김대중 등과 함께 사회 원로로서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성명을 내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러나 전두환이 이끌던 제5공화국에는 상대적으로 호의적이어서 민주화 운동에 적극 나서던 14살 연하의 부인 공덕귀를 허탈하게 만들기도 했다. 당대에는 민주 진영에서 시대의 변절자 윤천지강[11]의 대표 '윤'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참고로 윤보선이 이러한 태도를 보인 것은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을 계기로 당시 운동권 사이에서 급속히 퍼져가던 반미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윤보선이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중도에 가까웠던 성향 때문에 민주당의 원로였음에도 불구하고 운동권 인사들에게 비난을 받아왔던 점도 무시할 수 없다.

반면 교회사학자 김명구 박사는 2011년에 낸 평전 <해위 윤보선>에서 김대중, 김지하 등 재야인사들의 석방에도 나섰던 점을 들면서 신군부에 협력한 사실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했다. 다만, 그의 비서를 지낸 조종호김정례 등이 민주정의당에 입당했고, 말년에는 노태우를 공개 지지 선언하기도 했다. #
파일:윤보선19801022.jpg
1980년 10월 22일 열린 제8차 헌법 개정안을 묻는 국민투표에 참석하여 인터뷰하는 모습.
파일:윤보선19900309.jpg
사망 4개월 전이었던 1990년 3월 9일 김영삼 당시 민자당 대표최고위원[12]이 윤보선 전 대통령의 자택으로 방문해 문병한 당시의 사진으로 공식상에 나온 생전 마지막 모습이다.
파일:윤보선 전 대통령 영정.jpg
윤보선 전 대통령 공식 영정

1986년부터 역사단체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현 민족사바로찾기연구원]를 발족해 초대 의장을 지내다 1990년 7월 18일 향년 92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어쨌거나 대통령을 지냈기에 국장이나 국민장과 현충원에 안장이 가능했지만, 그가 사망하기 전 현충원에 안장되는 것을 거부하여[14] 시신은 현충원에 안장되지 않았으며 장례 역시 가족장으로 치렀다.

3. 묘소

파일:external/www.poongsoojiri.co.kr/5cbdf4aca8bbf415e7cc52596eaf078a225651.jpg
파일:external/www.segye.com/aa0330-45-2.jpg
충남 아산시 음봉면 동천리에 위치한 해위(海葦)[15] 윤보선(尹潽善) 대통령의 선영.[16]

윤보선은 유서에서 화장해 봉하마을에 작은 비석 하나만 세워 달라 한 노무현, 현충원에 묻힐 수 없게 된 노태우, 전두환과 함께 현재까지 국립현충원에 묻히지 않은 4명의 대통령 중 한 명이다. 자신이 독재자로 규탄했던 박정희와 같이 묻히는 것을 원치 않았다는 점을 내세웠다. 대신 노무현, 노태우 묘역과 함께 제 3호 국가보존묘지로 지정되어 있어서 사실상의 국립묘지 대우를 받는다.[17] 굳이 차이가 있다면 안장비를 국가가 부담하는 국립묘지와 달리 유족들이 부담해야 하는 정도.

온양온천역에서 240번을 타고 동천2리에서 내리면 입구가 있다.


[1] 이때 피아트 컨버터블을 구입해서 타고 다녔는데 전교생 중 유일하게 자동차를 가진 학생이라 동양에서 온 왕자님으로 오해받았다고 한다. 당시 한국은 물론이고 서유럽권에서도 자가용 보유하면 잘사는 집안이었던 시절이었다. 당장 1980년대까지만 해도 자가용은 부의 상징이였는데, 1920년대는 말할 필요도 없다.[2] 가문의 창씨는 이동(伊東, 이토)이었다. 친일행위가 존재한 윤치호는 '이동치호'로 창씨개명했는데, 사람들은 '이 똥 치워'라고 조롱했다.[3]서울특별시장[4] 다만, 교과서에서 이 시절을 일컫는 말은 장면 내각이고, 그가 대통령이던 시절의 업적 대부분이 그냥 장면이 한 일로 나온다. 대한민국에서 유일무이하게 국무총리한테 실권, 인지도가 모조리 밀린 대통령인 셈이다.[5] 득표율 차는 1.5%차로, 득표율 차가 0.8%였던 제 20대 대통령 선거보다 조금 더 난다.[6] 숙부, 당숙들이 일제에 부역하였고, 당장 부친 윤치소도 조선총독부 간부로 역임했다. 당숙 중에 윤치호도 있다.[7] 서부경남, 전남 지역은 남조선로동당 유격대의 활동으로 피아를 구분 없이 숱한 인명이 사라진 지역이었다. 특히 전남의 경우 한국전쟁 기간 정규군과의 교전도 없었는데 가장 많은 민간인 사상자를 냈다. 제주도는 4.3 사건의 여파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5대 대선에서는 이 세 지역(전남 57.2%, 경남 61.7%, 제주 69.9%)의 박정희 득표율이 경북(55.6%)보다 높았다. 사실 이땐 대구경북에서 오히려 반이승만 성향의 좌파 세력이 위력을 떨치던 시기였다.[8] 약간 결벽증 비슷한 증세도 있었다는 얘기가 있지만, 확실하진 않다.[9] 지역주의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1980년대 후반 이전 선거 양상은 여촌야도 현상이 강해, 시골 지역에선 박정희 지지율이 더 나오고, 대도시 지역에서는 윤보선 지지율이 더 나오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지역적으로 일반화하긴 매 선거마다 패턴이 달라 애매하다. 참고로 이런 상황은 이농현상으로 시골 인구가 급감하자 많이 약해진다.[10] 풀네임 자체가 민정당이다. 제5공화국민주정의당과는 전혀 다른 정당.[11] 윤보선, 천관우, 지학순, 강원용.[12] 훗날 대한민국 14대 대통령[] [14] 박정희랑 같이 안장되기 싫어서 그렇다는 설이 있다.[15]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영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 스승인 신규식이 지어준 것으로 "바닷가 갈대는 바람에 휘날려도 꺾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바다 '해'와 갈대 '위'를 썼다. 위키피디아 내용[16] 또 역장이라고 하는데, 조상산소 윗쪽에 후손의 묘라는 뜻이다.[17] 나머지 대통령들 묘지는 국립묘지라서 자동으로 보호되나 국가보존묘지는 특별법으로 보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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