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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17 11:50:02

윤영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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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fff> 윤영렬
尹英烈
파일:external/yunposun.com/tech72/data/board/photo/file_in_body/1/1121406609.jpg
출생 1854년 4월 15일
충청도 아산군 둔포면
(現 충청남도 아산시)
사망 1939년 11월 4일 (향년 85세)
경기도 경성부
(現 서울특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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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본관 해평 윤씨[1]
백웅 (白熊)
부모 아버지 윤취동, 어머니 안동 김씨
형제자매 2남 2녀 중 차남[2]
배우자 한진숙 (1851 ~ 1938, 1867년 결혼)
신덕경 (? ~ 1894, 첩)
이름 미상 (첩)
장복첨 (1902 ~ 1950, 첩)
자녀 장남 윤치오[A] (1869 ~ 1950)
차남 윤치소[A] (1871 ~ 1944)
삼남 윤치성[A] (1875 ~ 1936)
사남 윤치병[A] (1880 ~ 1940)
장녀 윤활란[A] (1884 ~ 1969)
오남 윤치명[A] (1885 ~ 1944)
차녀 윤노덕[A] (1889 ~ 1979)
육남(요절)[10]
칠남 윤치영[A] (1898 ~ 1996)
삼녀 윤씨[12] (? ~ ?)
팔남 윤치정[B] (1921 ~ ?)
사녀 윤길희[B] (1924 ~ 1973)
오녀 윤인희[B] (1927 ~ ?)
구남 윤치일[B] (1935 ~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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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기타4. 가계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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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말기 ~ 대한제국군인정치인. 윤취동의 아들이자 윤웅렬의 동생이며 윤치호의 숙부, 윤치영 전(前) 서울시장의 아버지, 윤치소의 아들인 윤보선 전(前) 대통령의 조부이다.

2. 생애

1854년 중추부지사를 지낸 윤취동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윤취동은 오랫동안 아들이 없다가 나이 40이 넘어서 첫 아들인 윤웅렬을, 나이 50이 넘어서 윤영렬을 낳았으니 엄청난 늦둥이인 셈이다.

그래서인지 아버지 윤취동은 65세로서 당시로서는 장수한 나이였지만 불과 9살의 나이에 부친을 여의였다. 그러나 부친이 땅을 구매하고 그 돈을 바탕으로 집안을 일으킬 밑천을 만들었기에 어린 시절이 불우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형과 마찬가지로 어린시절부터 기골이 강대해 무에 재능이 있었는지, 처음으로 글을 배운 그의 장인인 한치원도 무신이었다. 그러다 한치원의 주선으로 형과 함께 박규수 등 개화파 인사들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1878년 무과에 급재해 사헌부 감찰을 지내다 1881년 규장각 검서관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승진을 거듭하다가 1893년 내부참의에 이르렀다.

그러다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하자 조중양, 아들 윤치소 등과 함께 관군과 의병을 모아 농민군을 토벌하는 데에 참가했다. 이후 승진했으나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관직을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이후 관직에 다시 진출하여 이후 연안부사를 거쳐 구한 말에 강계부사 겸 방어사와 경기도 안성군수 겸 삼남토포사(三南討捕使)를 지냈다. 이때 그가 부임한 지역들에 횡횡하던 도적을 적극 토벌하였고, 안성군수 시절에는 조정에 적극 건의하여 세금을 탕감받아 주민들이 그의 선정비를 세우기도 했다. 이후 육군부위, 육군정위로 승진하였고 중추원 의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후 계속 승진하여 육군 참장, 자선대부까지 올랐으나 1906년 이완용에 의해 벌어진 군 숙청 와중에 면직되었고, 자선대부 직도 경술국치가 발생하자 때려치우고 일제의 귀족 작위 및 은사금도 거절하고 고향에 은거하였다. 1907년에는 기호흥학회에 가입해 교육 계몽 운동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일제에 협력하지 않으며 소신을 지켰고[17], 이 때문인지 말년에는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아들들에 의지해야 했다.[18] 충무공 이순신의 묘토가 일본인에게 매각당할 위기에 처하자 성금을 모아 이를 저지하기도 했다.

1939년 11월 4일 지병으로 사망했다. 묘소는 형 윤웅렬의 묘소 근처에 있다.

3. 기타

조카 윤치호일기에 따르면 학식이 모자라서 글을 못 읽지만 수완과 판단력은 좋았다고 평가된다. 1938년 조카 윤치창의 집에 초대받았을 때, 치창에게 "집이 돈에 비해 너무 큰 것 같지 않냐?"고 말했는데, 실제로 윤치창은 그후 얼마 안가 약속어음을 맺었다가 엄청난 빚을 지고 파산한 것이 그 증거다. 1867년[19] 한진숙[20]과 결혼해서 6남 2녀[21]를 두었다. 자식도 많이 낳고 장수[22]해서 1927년 회혼례도 올렸다.

4. 가계

5. 여담

여성 편력이 대단히 심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별명이 색마였다고 할 정도였다. 이 때문인지 여러 부인을 거쳤으며 자녀가 무지하게 많다. 총 20명이 넘는다.[23] 어릴 때는 15세, 늙을 때는 81세에도 아들을 낳았으니 말 다했다.
[1] 도제공파(陶齊公派) 20세손 ○렬(○烈) 항렬이다.
(족보(1)족보(2))
[2] 큰누나 해평 윤씨는 일반인, 작은누나 해평 윤씨 (1835 ~ 1920)는 시인, 수필가였으며 형 윤웅렬 (1840 ~ 1914)은 관직자였다.[A] 한진숙 소생[A] [A] [A] [A] [A] [A] [10] 신덕경 소생[A] [12] 이름 미상의 첩 소생[B] 장복첨 소생[B] [B] [B] [17]윤웅렬이 조선귀족 작위를 받아 친일파로 분류되었고 조카 윤치호는 민족계몽운동가로 활동하긴 했으나 말년인 1940년대에는 일제의 학도병 모집을 독려하는 등 빼도박도 못하는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었다.[18] 조카 윤치호는 자기 일기장에 윤영렬의 이런 삶을 윤영렬이 경제적으로 무능해서 그런 거라고 대차게 깠다.[19] 당시 13세. 다만 당시 기준으로는 조금 일찍 결혼한 편이지 아주 이른 편은 아니다.[20] 1851년생으로 남편 윤영렬보다 3살 연상이다.[21] 첩이 낳은 자식까지 합치면 9남 5녀지만 실제로는 더 많을 거라는 주변 사람들의 증언이 남아 있다. 그의 회고록에서 자식이 너무 많아 누가 누구인지도 모를 정도였다고 한다.[22] 2개월만 더 살았다면 50년대부터 40년대까지 모든 연대를 살 수 있었다. 조카 윤치호가 윤영렬의 자식들이 늙은 윤영렬을 잘 돌보지 않아 윤영렬이 말년을 빈곤하게 살았다고 자기 일기에 적은 바 있으니 자식들이 정성껏 돌보았다면 1940년대까지 살았을 수도 있었다.[23] 의친왕, 육종관(육영수의 아버지)와 더불어 자녀를 가장 많이 둔 인물로 손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