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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승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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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훈장 무궁화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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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교육가·독립운동가
1969
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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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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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법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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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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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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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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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이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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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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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총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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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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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인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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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학자
1996
장기려
의사
1998
고흥문
국회의원
1998
주영하
교육인
2000
이건희
기업인
2002
김재준
종교인
2002
문창모
의학자
2006
김희수
의학자, 교육인
2006
이종욱
의사, WHO 사무총장
2006
정재헌
법조인
2007
권영우
교육인
2007
장훈
체육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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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이영덕
국무총리
2010
조용기
종교인
2010
황장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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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이태석
종교인, 의사
2011
김준엽
독립운동가, 교육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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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2012
김평우
법조인
2012
정몽구
기업인
2013
남덕우
국무총리
2015
권광중
법조인
2016
이근
의사
2017
박한철
법조인, 헌법재판소장
2017
반기문
외교관, UN사무총장
2017
양승태
법조인, 대법원장
2018
김종필
국무총리
2018
노회찬
정치인
2018
박재갑
의사
2018
이석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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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조규광
법조인, 헌법재판소장
2018
한승헌
법조인, 감사원장
2018
정세균
국회의장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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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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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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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김박
기업인
2023
자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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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2·10대 법무부장관
권승렬
權承烈 | Kwon Seung-ryul
파일:권승렬.png
<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출생 1895년 5월 14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現 경상북도 안동시)
사망 1980년 9월 30일 (향년 85세)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한양아파트[1]
본관 안동 권씨[2]
재임기간 초대 법무부차관
1948년 8월 7일 ~ 1948년 10월 30일
초대 검찰총장
1948년 10월 31일 ~ 1949년 6월 5일
제2대 법무부장관
1949년 6월 6일 ~ 1950년 5월 21일
제10대 법무부장관
1960년 4월 25일 ~ 1960년 8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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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부모 아버지 권영진, 어머니 김해 김씨
형제자매 이복형 권승록[3]
친형 권영욱
남동생 권영훈, 권영준
자녀 아들 권오식
학력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일어부 / 졸업)
주오대학 전문부 (법과 / 졸업)
약력 연백군청 서기
한국민주당 발기인
사법요원양성소 부소장
반민특위 특별검찰부장
초대 법무부차관
초대 검찰총장
제2대 법무부장관
제10대 법무부장관
상훈 국민훈장 무궁화장(1980년 추서) }}}}}}}}}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법조인이자 초대 검찰총장. 법조 관료이자 항일 변호사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민족대표 33인의 1인으로서 독립유공자인 권동진이 그의 재종숙(再從叔, 7촌 숙부)이다.

2. 생애

1895년 5월 14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현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아버지 권영진(權英鎭)과 어머니 김해 김씨 사이의 5형제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908년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일어부에 입학하여 1911년 졸업하였으며, 1922년 일본 주오대학 전문부 법과에 입학하여 1926년 수석 졸업하였다.

1915년 조선총독부 판임관견습시험에 합격하였으며, 1916년 황해도 연백군청에서 판임관견습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고 1918년부터 1920년까지 연백군청 서기로 근무했다.#

그러다가 1920년 돌연 관리생활을 그만두고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주오대학 전문부 법과에 입학했으며, 주오대학 재학 중이던 1925년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남은 학업을 마치기 위해 학교로 돌아가 1926년 주오대학 법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귀국하여 그 직후부터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1926년에는 경성부, 1928년에는 황해도 해주에 사무소를 개업했으며, 1930년부터는 다시 경성부로 돌아와 1946년까지 변호사로 활동했다.

변호사 개업 직후에 김병로·허헌·이인 등과 함께 일본인변호사회와의 통합을 끝까지 반대하였다. 또한 독립운동 관련 사건에 대해서는 무료로 변론했는데, 특히 조선공산당 사건 당시 검거된 조선공산당원의 담임변호사로 변론을 맡아 공판과정에서 사법권 침해, 고문경찰관 고소, 재판장 기피 문제 등으로 연일 재판소 당국과 설전을 벌였다. 또한 피고인들의 건강문제 및 자유로운 공판을 위한 보석문제를 끈질기게 요구하여 재판소 당국자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후일 '간도공산당사건'의 핵심인물들에 대해서도 무료변론에 나섰다.

1927년 신간회 본부 및 경성지회 간부로 활동하고, 광주학생항일운동으로 구속된 학생들의 변론을 담당했다. 1928년 1월 『조선일보』에 조선총독부의 한국인에 대한 인권침해를 지적했다가 구속된 조선일보사 주필 안재홍과 편집인 백관수에 대해 김병로·허헌·이인 등과 함께 변론을 맡았고, 1929년 6월에는 중국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된 여운형을, 1932년에는 마찬가지로 상하이에서 체포된 안창호의 변론을 맡았다.

이외에도 '해주고등보통학교 비밀결사 사건', '동방무정부주의자동맹 사건', '조선일보지국장 폭행사건' 등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의 독립운동 및 사상문제에 관한 변호를 도맡았다.

1945년 8.15 광복 직후에는 한국민주당 발기인, 사법요원양성소 부소장, 과도정부의 사법부 법제처장을 역임하였다. 1948년 사법부차장을 맡았으며, 제헌 헌법 제정 당시 참고안으로 소위 권승렬안을 제출하였다. 이 안이 제헌 헌법에 미친 영향은 크지 않으나, 국호를 '조선'이라고 하고 '인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던 유진오의 초안과는 달리, 제헌 헌법이 국호를 '대한민국'이라고 하고 '국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된 데에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승만 정부가 출범하자 초대 검찰총장, 초대 법무부 차관을 지냈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을 때는 특별검찰부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법무부 장관 재직 시절 경찰들한테 수모를 겪은 적이 있는데, 여순반란사건 때 경찰이 정치적 뒷배를 믿고 항명을 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꽤 복잡한데, 기술하면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

해방 이후, 미군정청은 친일 경찰들을 대거 고용하였고, 이들은 자신들이 살기 위해 적극적인 반공주의를 채택하여 좌익 인사는 물론 자신들에게 거슬리는 사람, 심지어는 민간인까지 마구잡이로 잡아다 검찰에 넘겼다. 이 당시 일하던 검사 중에 박찬길이라는 검사가 있었는데, 이 박찬길 검사는 억울하게 잡혀온 사람들을 무혐의로 풀어주고, 지나치게 민간인을 괴롭히는 경찰공무원을 처벌하였다. 그중의 대표적인 사건이 산에서 벌목하던 인물이 경찰을 보고 놀라서 도망가자 총을 쏜 후, 다시 쫓아가 확인사살까지 해버린 사건이었다. 경찰은 이 사람을 빨갱이로 몰았지만 박찬길 검사는 해당 경찰공무원을 처벌했고, 이 행위에 대해 친일 경찰들은 박찬길 검사에 대한 증오심을 품었고, 박찬길 검사를 적구, 즉 빨갱이로 지칭하여 죽일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다.

그렇게 여순반란사건이 터지자, 경찰은 대피하였다가 검사국 명에 의해 출근하는 박찬길 검사를 잡아다가 반란 혐의를 뒤집어 씌운 뒤, 재판 절차도 생략하고 총살해버렸다. 이 사건은 당연히 권승렬 장관의 귀에도 들어갔는데[4], 권승렬 장관이 윤치영[5] 당시 내무부장관에게 해당 경찰 처벌을 요구하자, 당시 해당 지역에 근무하던 일개 총경이 항명한 것이다. 독재 정권 시절 경찰이 정치 권력과 결탁해 권력의 주구가 되어 폭주한 대표적인 사례이며 박찬길 검사 살해범 처벌은 그렇게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후 1949년부터 1950년까지, 그리고 1960년 등 두 차례 법무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1957년부터 1960년까지 한국법학원장을 지냈다.

1980년 9월 30일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한양아파트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했으며, 국민훈장 무궁화장(1등급)이 추서되었다. 상훈기록 성명란에는 '권승열'로 기재되어 있다.


[1] #[2] 대동항렬 제정 전에 태어난 관계로 추밀공파 수(脩)2계 34세 승(承) 항렬이다. 다만 작은형이 대동항렬을 써서 이름이 권영욱(權寧旭)이고, 아들 이름이 35세 오(五) 항렬을 써서 이름이 권오식(權五軾)이다. #[3] 전모(前母, 재취(再娶)의 자식이 그 아버지의 전처를 이르는 말.) 경주 김씨의 소생이다.[4] 참고로 검찰은 이때 힘이 없는 조직(법보다 주먹이던 시절이었다.) 이어서 자기도 빨갱이로 몰려 총살당할까봐 소리도 못 냈다고 한다.[5] 윤치영은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이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