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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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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fff><tablebgcolor=#fff> 파일:동아일보 아이콘.svg동아방송
東亞放送
Dong-A Broadcasting System
}}}
<colbgcolor=#008186><colcolor=#fff> 국가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방송망 독립방송국[1]
호출부호 HLKJ
주파수 792kHz
개국 1963년 4월 25일
폐국 1980년 11월 30일[2]
후신 KBS 라디오서울SBS AM 라디오(법적), 채널A(정신적)
본사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39
부서명 동아일보사 동아방송국

1. 개요2. 역사3. 언론통폐합으로 소멸4. 동아방송의 주지5. 동아방송국가6. 로고송 - <동아방송의 노래>7. 역대 간부
7.1. 방송국장7.2. 방송국장 대리7.3. 방송부국장
8. 역대 사원
8.1. 기자8.2. 아나운서8.3. 성우8.4. 프로듀서8.5. 엔지니어
9. 출신 인물10. 프로그램11. 기타12. 관련 문헌

[clearfix]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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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www.donga.com/230346-15-b.jpg

1963년부터 1980년까지 동아일보사 산하에 있었던 라디오 방송국의 통칭. 약칭은 DBS. 호출부호는 HLKJ, 출력 10kW, 주파수 MW 792kHz[3]였다. 특이하게도 이 방송은 독립 법인이 아닌, 동아일보 산하 부서 중 하나였다. 그래서 방송 총책임자의 직급이 사장이 아닌 국장이었다.[4]

케이블 매체인 동아TV와는 전혀 다르다. 동아TV는 동아일보사-동아미디어그룹과 전혀 별개인 여성/스타일(패션) 전문 채널. 해당 채널의 이름은 개국 당시 소유주였던 동아그룹에서 비롯되었다. 지금은 LF그룹 소속이다.

2. 역사

파일:external/dongne.donga.com/200910066451012w1-700x498.jpg
파일:external/www.museum.seoul.kr/img_07_97.gif
1970년대 중반경의 동아일보 사옥 모습(사진 오른쪽 귀퉁이). 지금은 없어진 송출탑이 보인다.

1963년 민간 신문사인 동아일보에 의해 개국된 민간 방송국이었지만, TBC에 비교해봐도 전국구급[5]이 아닌 수도권 라디오 지역 방송에 불과했다. 전국구로 방송을 할 계획이나 TV 방송 개국 계획도 있었지만, 당시 동아일보가 야당지였기 때문에 번번히 퇴짜만 맞았다고 한다. 주파수는 AM 792kHz였다.[6] 동아일보사 광화문 사옥의 한켠을 빌려 스튜디오를 꾸렸으며 이 때문에 1974년 서울 지하철 1호선 개통 이후 스튜디오에 특수 고무판을 깔았다고 한다.[7]

당시 송신소는 서울특별시 구로구[8] 개봉동에 있었으며, KBS로 넘어간 후에는 2010년에 폐쇄될 때까지 KBS 개봉송신소로 운용됐다.

개국 당시부터 BBC의 뉴스 시스템이던 '쿼터시스템'[9]을 도입하여 서울권역에서는 나름 청취율이 높았다고 한다. 특히 1965년 당시 KBS가 생까던 한일회담 반대 데모를 이 뉴스 시간을 이용해 15분마다 현장 중계차로 생중계하는 용자짓을 한 탓에, 박정희 정권에 제대로 찍힌다. 방송계 원로들 회고담에 따르면, 이 때문에 시범케이스 비스무레하게 해직기자 사태가 벌어진 게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 이처럼 DBS는 생중계와 용자짓이 전문이던 방송 색채를 띠고 있었다.[10] 이외에도 유명한 필화 사건으로는 1964년 소위 앵무새 사건이 있는데, '앵무새'는 당시 DBS의 논평 코너 제목이다. #앵무새 사건의 상세 내용 이 일로 고재연 제작국장 등이 계엄하에서 구속되고 최창봉 부장을 비롯하여 직원 6명이 재판에 넘겨졌으나, 5년 후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1974년에는 이웃 동아일보 기자들과 같이 '언론자유수호투쟁'에 동참하기도 하였다.

3. 언론통폐합으로 소멸


파일:external/f.ilwar.com/27609309g3nc140706269992.jpg
위 사진은 1980년 11월 30일 고별 방송날 사옥 앞에서 찍은 사진이라 한다. 뒤쪽으로 교보문고가 있는 교보빌딩이 보인다.

1979년 10.26 사태12.12 사태의 혼란 속에서도 각계의 개헌 논의와 3김의 등장으로 1980년대를 열게 된 동아방송은 이때를 기회로 잡아 TV국과 지방국을 추가로 신설하고자 하여 기술부와 송신소 간부들로 구성된 기술대책팀을 꾸려 부산, 대전, 대구, 광주 등 8개 도시를 현지답사케 한 뒤 1980년 1월 4일에 김상만 회장과 이동욱 사장, 김상기 부회장이 최규하 대통령을 찾아가 지방국 및 TV국을 설치해 달라고 요청한 바 있었다. 마침 동아방송의 새 보금자리가 될 여의도 별관[11] 증축도 활발히 이루어지자 회사 전체가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었으나, 5.17 내란 이후 언론검열이 강화되었고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11월 15일 발표된 언론통폐합에 의하여 끝내 물거품이 되었다.

결국 1980년 11월 12일에 동아일보 김상만 회장과 이동욱 사장은 보안사로 끌려가 수사관의 강압에 따라 지장을 찍어 방송국을 내놓아야 했고, 같은 해 11월 30일 언론통폐합으로 인한 신방겸영 금지에 따라 동년 12월 1일 KBS로 강제 통합되면서 KBS 제4방송으로 개칭했다.[12] 17년 7개월 동안의 DBS의 역사를 마감하는 방송인들의 회한은 11월 30일 오전 8시부터 한 시간 동안 방송된 자사의 간판 프로그램이던 <DBS 뉴스쇼>의 고별 방송으로 집약되었다. 이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은 정경부장 최종철 기자는 끝부분에서 눈물을 삼키는 음성으로 아래와 같은 멘트를 내보냈다.
동아방송의 보도의 공과 과(過)는 후세의 평가에 맡기려 합니다. 그러나 후세에 동아방송의 기자들이 무엇을 했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격동의 한 시대를 정의의 편에 서서 열심히 성실하게 뛰었다고 말하려 합니다. 동아방송의 18년사는 분명히 한국 언론사에 비록 짧지만 굵게 기록된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이 순간 동아방송 기자들은 손때 묻은 취재수첩에 여백을 남긴 채 일단 덮으면서 애청자 여러분이 저희들에게 주신 격려와 성원, 그리고 질책까지도 귀중한 보람으로 마음속 깊이 간직하려 합니다. DBS 동아방송 17년 역사의 종지부를 찍으면서 저희 동아방송 기자들은 청취자 여러분께 고별의 인사를 드립니다. 애청자 여러분의 가정에 행운과 건강이 항상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1980년 11월 30일 오전 8시 55분 58초. 여러분이 그토록 아껴주신 동아방송의 <DBS 뉴스쇼>의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DBS 뉴스쇼> 고별방송 현장을 지켜보던 동아방송의 기자들은 뉴스가 끝나자 눈이 벌개진 채 한일관으로 몰려가 아침부터 소주를 마셨고, 프로듀서와 기술자들은 방송이 끝난 텅 빈 스튜디오에서 소주와 맥주, 막걸리 등을 섞은 이른바 통폐합주를 마시며 울분을 터뜨렸다고 한다.

1990년에 KBS의 조직이 축소되고 해당 주파수가 SBS로 넘어가게 되자, 동아일보는 SBS 라디오 개국 직전인 1990년 11월 27일[13] 자사의 신문만화 <나대로 선생> 3115회를 통해 도둑(노태우 정부)이 훔친 라디오를 태영건설에 넘겨 주는 표현을 통해 노태우 정부의 민영방송 운영사 선정을 비판했다. 동아일보는 11월 19일에 국가와 KBS를 상대로 KBS에 강제 합병된 DBS를 돌려 달라는 소송을 제기했고, 11월 21일 자 사설 <동아방송의 원상회복>을 통해 동아방송은 본래 주인인 동아일보에 돌려 달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당시 공보처 장관인 최병렬은 "라디오는 DBS가 쓰던 것이지만 무선국 허가는 1년 단위로 재허가하게 되어 있고, 인쇄매체는 방송매체를 겸업할 수 없다."는 답변을 했다. 이에 동아일보 측은 11월 30일 자 사설 <동아방송 빼앗긴 10년>에서 "동아방송의 원상 회복은 짓밟혔던 언론자유를 되찾아 불행했던 자유를 되찾고자 하는 것이며 원상회복 뒤에는 사적 소유 대신 국민주주에 의한 국민의 방송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라고 하여 원상회복 뒤의 DBS의 향후 진로에 대해 밝혔으나, 결국 돌려받지 못한 채 주파수는 바로 SBS로 넘어가 버렸다. 그런 고로 이 주파수는 SBS 라디오가 방송되어 오다가, 2022년 11월 SBS의 AM 운용 휴지 선언과 동시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한편 호출 부호제주방송으로 넘어갔다.[14]

자사 성우들언론통폐합 이후 KBS 성우극회와 통합되었다.[15]

동아일보사는 2009년 미디어법 개정에 따른 신방겸영 허용 뒤 2011년에 종합편성채널 채널A를 개국하여 다시 방송에 진출하였다. 다만 라디오 방송국인 동아방송과 TV 방송국인 채널A는 서로 방송 매체가 다르기 때문에 개국 당시 TBC의 후신임을 적극적으로 어필하였던 JTBC와는 다르게 대내외적으로 후신으로 여겨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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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동아방송의 주지

5. 동아방송국가

작사는 시인 조지훈, 작곡은 김성태가 맡았다.
(1절)공중에도 길이 있다 온 세계에 통하는 / 새 소식 새 마음이 퍼져오고 퍼져가고
이 길에 손을 잡고 보람찾는 우리들 / 외치리라 민중의 소리 민중의 염원

(후렴)동아방송 동아방송 밝아오는 강산에 / DBS DBS 울려가는 누리에

(2절)높은 성벽 잠긴 문도 뚫고 넘는 이 소리 / 새 시대 새 희망을 알려주고 깨쳐주고
어둠을 헤치고 빛을 찾는 사람들 / 노래하자 자유와 평화 인류의 소망

6. 로고송 - <동아방송의 노래>

이 로고송은 동아방송국 측이 자체 제정하였다.
(1절)언제나 새 소식은 동아방송 동아방송 / 즐거운 음악도 동아방송 동아방송
1230 DBS 동아방송 DBS / 꿈 실은 메아리 동아방송 동아방송

(2절)정답고 재미있는 동아방송 동아방송 / 우리가족 다 모여 동아방송 동아방송
1230 DBS 동아방송 DBS / 언제나 다이알은 동아방송 동아방송

7. 역대 간부

7.1. 방송국장

7.2. 방송국장 대리

7.3. 방송부국장

8. 역대 사원

8.1. 기자

8.2. 아나운서

기수 입사년도 남성 여성
경력 1963년 김남호 · 김인권 · 김주환 · 이규영 · 전영우 · 최귀영 · 최승일 · 한경희 성선경 · 윤미자
1기 김동건[28] · 우제근 · 원창호 · 천재영 신선자 · 이화영 · 최충자 · 한순옥
2기 1964년 원예종 · 유영옥 · 최문정
3기 1965년 박광희 · 이동운 · 전순식 김인옥 · 최경자 · 최희자
5기 1967년 나동규 · 조동오 김영자 · 서정숙 · 윤소자
6기 1968년 박정희 김기경
7기 1969년 김덕렴 · 한현수 이경자
8기 1970년 유재관 · 홍명진 · 조돈승 강영희 · 박창옥 · 이선미 · 임수진
10기 1972년 김광진 · 정철의 김연진 · 최남경
11기 1973년 이재민 맹경순
13기 1975년 오성근 우종란
14기 1976년 손석기[KBS·통폐합][30] · 최윤락[KBS·통폐합] 김정희 · 송명신 · 양은숙 · 이미경 · 임선희 · 현옥[KBS·통폐합] · 홍승애
16기 1978년 송지헌[KBS·통폐합] · 전윤표 · 채수일 김은정[34] · 김진순 · 이미선[KBS·통폐합]
17기 1979년 김신환[KBS·통폐합] 나정희 · 이숙영[KBS·통폐합] · 임옥자[KBS·통폐합] · 함명혜

8.3. 성우

8.4. 프로듀서

8.5. 엔지니어

9. 출신 인물

본 방송국 출신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훗날 MBC 사장을 지낸 최창봉 전 부국장이 있으며, 아나운서나 진행자로는 <유쾌한 응접실>의 진행자였고, 이후 수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역임한 전영우와 시나리오작가 유한철, 프리랜서 아나운서 송지헌, 그리고 현재 SBS 러브FM[42] <이숙영의 러브FM> MC 이숙영, 스포츠 캐스터로 유명한 우제근, 손석기 아나운서가 있고, PD로는 이형모(전 KBS 부사장), 김학천[43], 하인성[44], 기자로는 이정석, 이병도, 최재호, 박창현, 신상래, 최동호, 장순재, 최종철, 하금열, 김기덕[45] 등이 있다. 그리고 가요무대로 유명한 김동건도 동아방송 출신이며, TBC를 거쳐 1973년부터 KBS 아나운서로 근무했다.

송지헌이숙영은 1979년에 동아방송의 아나운서로 입사했다가 1년 만에 언론통폐합으로 KBS로 이적했다. 송지헌은 <생방송 전국은 지금>, <추적 60분>, <생방송 심야토론> 등을 각각 진행했고, 이숙영은 아침 라디오 방송인 "FM 대행진"을 진행하며 레전드로 남았다. 손석기는 두 사람보다 3년 빠른 1976년에 입사했으며, 훗날 동아방송의 AM 주파수를 받아서 새로 개국한 SBS 라디오의 개국 알림 방송을 진행했다.

기자들 중 최동호는 통폐합 후 KBS로 이직해 1981~1986년 및 1993년에 두 차례 KBS 뉴스 9 앵커를 지내며 이름을 날렸고 부사장까지 승진했다. 마지막 <DBS 뉴스쇼> 앵커 최종철도 폐국 후 동아일보사로 발령나 체육부장, 도쿄지사장, 출판국 부국장, 심의실장 등을 맡다가 1992년 SBS로 이직해 보도본부장, 전무이사, SBS 문화재단 이사 등으로 재직했다.

10.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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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기타

채널A가 개국하기 이전, 동아일보사에서 과거 동아방송의 콘텐츠를 가지고 재방송 위주 인터넷 방송을 운영한 일이 있으며, 채널A 개국 이후에는 홈페이지 업데이트를 전혀 하지 않고 있다.[46] 하지만 페이지 자체는 아직 남아 있으며 dbs.donga.com으로 접속 가능하다.

12. 관련 문헌


[1] 하술하겠지만 방송구역 확장 시도가 번번히 좌절되면서, 언론통폐합으로 KBS에 넘어갈 때까지 수도권 독립 민영으로 남았다.[2] 언론통폐합으로 인한 폐국.[3] 1978년 이전에는 1230khz였다가 790kHz로 바뀌었다.[4] 동아방송보다 1년 먼저 생겨나 같은 날 문을 닫았던 동양방송은 라디오와 TV가 각각 독립법인으로 출발했다가 1974년 중앙일보와 완전 통합됐다. 물론 독립자본으로 세워진 매체들이었지만, 이후 삼성그룹에 인수된 것이다.[5] 전국구라 해봤자 동양방송의 경우 TV는 수도권과 부산권, 라디오는 수도권과 호남권(광주, 군산), 영남권(대구)에만 방송되던 네트워크. 동양방송은 부산에 직할국을 세우고 호남권의 전일방송, 서해방송, 영남권의 한국FM방송과 제휴했다. 부산에서 시작한 MBC서울 본사를 개국하고 지방 민영방송들을 계열화하며 단일 브랜드로 큰 것과 차이를 보인다. 이렇게 된 이유는 동양방송이 당시 TV방송국 가운데서는 정부 통제에서 그나마 자유로운 방송사였기 때문에(완전히 자유로웠다는건 아니다.) 동양방송에 전국방송 허가를 내주지 않아서 그렇다.[6] 개국 당시 주파수는 1230kHz였으나 해당 주파수에 다이얼을 잡기 힘들고 외국 라디오 방송이 섞여나오는 혼선이 빚어지는 등 수신 상태가 나빴다. 결국 1966년 12월 4일부터 790kHz로 주파수를 변경했고 1975년 10월 국제전기통신연합이 라디오 주파수 간격 재배정(기존 10 kHz → 아프로-유라시아, 오세아니아 9 kHz/아메리카 10 kHz)을 결의한 이후 1978년 11월 23일부터 792kHz로 바뀌게 된다. 송신소가 인접해 있었던 동양방송도 비슷한 이후로 630 kHz로 주파수를 변경했다.[7] 서울 1호선은 개착식으로 지어져서 심도가 얕았고 전철의 진동이 그대로 사옥으로 전해졌다. 특히 지하 1층 윤전기가 문제여서, 현재의 청계천 옆자리에 신사옥이 지어지기 전까지 근 20년간 동아일보가 충정로에 있었던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8] 동아방송이 존속했던 시절에는 영등포구였다.[9] 라디오로 매 시각 15분마다 뉴스를 방송한다.[10] 소위 '조중동'으로 색채가 바뀌어 버린 지금도 보수 3사 중에서 제일 돌직구 이빨을 심하게 까는 신문사가 동아일보다.[11] 현 더샵아일랜드파크. 여의도 KBS 본관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이다. 동아방송이 폐국되자 방송국으로 쓰려던 건물의 용도를 문화센터로 바꿨는데, 이것이 사설 평생교육기관인 동아문화센터였다. 동아문화센터는 2004년 마포구로 이사를 갔고 문화센터가 있던 건물은 바로 철거돼 주상복합 아파트가 새로 지어졌다.[12] 정확히는 1980년 12월 1일 KBS 제4방송으로 개칭하였으나, 1981년 9월 7일 KBS 라디오서울로 다시 개칭한 것이다.[13] SBS의 설립 당시 법인인 주식회사 서울방송이 세워진 지 약 2주 정도 후였다.[14] 단, 넘어갔다는 건 영상 매체(TV, DMB)뿐이고 음성 매체(라디오)는 KBS제주 2TV의 대역 HLQC를 부여받았다.[15] 신성호 성우는 언론통폐합에 반발하여 KBS 합류를 거부하고 1980년 11월 30일 동아방송에서 나갔고, 1982년 MBC 성우극회로 이직했다.[16] 이후 동아일보 부사장, 사장, 상임고문, 비상임고문 역임. 2002년 작고.[17] 이종우 전 고려대 총장의 장남. 이후 동아꿈나무재단 이사장 역임.[18] 전 동아일보 사회부장, 편집국장. 폐국 이후 연합통신 상임감사 역임. 2005년 작고.[19] 이후 서울중앙방송국장, 한국방송공사 초대 부사장, 공연윤리위원회 위원장, MBC 사장 역임. 2016년 작고.[20] 1978년까지 아나운서실장 겸임.[21] MBC 시사제작1부장, OBS 부사장을 역임했다.[22] 언론통폐합 후 MBC를 거쳐 1991년 SBS로 이적 후 사장까지 역임했다.[23] 제주 출신으로 퇴사 후 고향 제주에서 신민당 후보로 출마했다 낙선했다. 그러다가 KBS로 이적해서 KBS 종합뉴스 초대 앵커를 지냈다. 1981년과 1996년에도 선거에 출마했다 낙선했다.[24] 언론통폐합 후 KBS로 이적했다가 1994년 YTN 이적 후 사장까지 역임했고, 한국케이블TV협회장을 지냈다.[25] 언론통폐합 후 KBS로 이적[26] 언론통폐합 후 KBS를 거쳐 1991년 SBS 이적.[27] 언론통폐합 후 MBC를 거쳐 1991년 SBS 이적.[28] 1964년 동앙방송(TBC)를 거쳐서 1973년 KBS 이적.[KBS·통폐합] KBS로 통폐합된 아나운서.[30] 1991년, SBS 아나운서로 이적해 SBS 라디오의 개국 알림 방송을 진행했는데, 이때 쓰인 주파수 792kHz는 손석기의 친정인 동아방송이 쓰던 주파수이다.[KBS·통폐합] [KBS·통폐합] [KBS·통폐합] [34] 언론통폐합 후 KBS라디오 리포터로 활동. 1990년 서울교통방송(TBS) 이적. 1991년 실종 후 생사 불명.[KBS·통폐합] [KBS·통폐합] [KBS·통폐합] [KBS·통폐합] [39] 배우 사미자의 넷째 오빠.[40] <동아일보사사> 3권 역대 사원명단상 1970년 입사로 기재.[41] 체신부 출신.[42] 공교롭게도 SBS 러브FM의 AM 주파수는 동아방송이 썼던 주파수다.[43] 초대 한국교육방송공사 사장, 국제방송교류재단 사장, 건국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역임.[44] 원래 라디오 PD였으나 언론통폐합 후 KBS로 배치되어 1984년부터 편성PD직으로 전직해 외화 더빙을 맡았다.[45] 동양통신 기자 출신으로, 언론통폐합 후 KBS로 넘어가며 뉴욕특파원, 외신부장, <뉴스센터 700> ~ <KBS 뉴스광장> 앵커 등을 맡았다. 이후 대통령비서실 공보비서관, 부경대학교 초빙교수 등 역임.[46] 신문-방송의 겸영이 법적으로 금지되던 시절에 과거 동아방송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려고 의도적으로 만들었다. 실제로 언론통폐합에 대해 강하게 디스하고 있는 내용을 해당 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참고로 이 시기 중앙일보도 비슷한 성격의 사이트가 중앙일보 내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