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ffffff,#1f2023> | 한국FM방송 韓國FM放送 | }}} | ||
<colcolor=#fff> 악칭 | BBC | ||||
국가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
채널 구분 | 지상파 라디오 | ||||
운영 유형 | 민영방송 | ||||
설립 | 1971년 | ||||
개국 | 1971년 4월 25일 | ||||
폐국 | 1980년 11월 30일[1] | ||||
본사 소재지 | 경상북도 대구시 수성구 범어동 31-2[2] | ||||
방송망 | 동양방송 네트워크 | ||||
채널 | 라디오 | 한국FM방송 (HLCB-FM, FM 89.7MHz) | |||
방송품질 | 파일럿 톤 방식 스테레오 | ||||
후신 | KBS대구 FM |
[clearfix]
1. 개요
당시 시보 언론통폐합 이후 시보[3]아래 언급된 다른 민방들의 자료가 '사실상 없음'을 감안할 때 이례적이고 희귀한 편이다.
1971년 경상북도 대구시(現 대구광역시)[4]에서 사업가 이광영이 창업 후 개국한 FM라디오 방송국. 약칭은 'BBC'.
당시 동양방송과 유일하게 제휴하였던 지역 FM라디오 방송국이었으며, 시보음 역시 동양FM방송과 공유하였다. 방송 운용 당시의 호출부호는 HLCB-FM[5], 주파수 FM 89.7MHz, 출력 1kW였다. 연주소는 개국 당시 옛 런던제과(현재의 LF 동성로점) 자리에 있었다가 1973년 무림제지가 인수한 후 1975년에 범어동 대구지방법원 건너편 수강빌딩[6]으로 이전하였다. 송신소는 당시 전기협회 연감에서 '동성로'로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구 연주소에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언론통폐합 후 KBS대구 FM이 되면서 팔공산으로 송신소가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7]
1980년 전두환 정권 초기 신군부에 의거 강제 시행된 언론통폐합 조치에 따라 당시 제휴 네트워크 협정 관계에 있었던 동양방송, 서해방송, 전일방송과 동시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한국FM방송으로 운용되던 주파수 FM 89.7MHz는 KBS 대구방송국(현 KBS대구방송총국)으로 흡수되어 현재까지 KBS대구 FM 방송(본사에서는 KBS 1FM으로 취급)으로 쓰이고 있다.[8] 다만 한국FM으로부터 넘겨받은 HLCB-FM 호출부호는 KBS대구 FM에서도 쓰다가 90년대 후반기 이후 2000년 포항CBS 개국 이전에 당초 KBS 대구방송국에서 쓰던 것에 맞추어 HLKG-FM으로 변경되었다. 언론통폐합 당시 시보를 들어보면 HLCB-FM을 호출부호로 썼던 것을 알 수 있으며 1997년 전기연감[9]에서도 KBS대구 FM의 호출부호가 HLCB-FM으로 수록된 것을 볼 때 적어도 90년대 후반기까지는 HLCB-FM 호출부호가 KBS에서 전면 사용됐던 것은 확실하다. 또한 출력도 현재의 5kW까지 증강했다.[10]
2. 역대 대표이사
- 이광영 (1971~1973)
- 이무일 (1973~1980)
3. 여담
- 이 방송국이 개국할 수 있었던 배경이 당시 제7대 대통령 선거의 부산물이었는 주장도 있다. 이 방송국이 개국했던 1971년 4월 25일 오후 2시에 수성천변에서 김대중 당시 신민당 대통령 후보 연설이 있었고, 오후 3시에 대구시민운동장에서 이 방송국 개국쇼가 있었다고 한다. 이때 신성일 등 인기 연예인들이 출연했다고 하니 당연히 선거유세보다 이쪽으로 끌릴 수밖에 없었다고 하고, 이에 이것이 선거유세 방해용이란 의심을 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 3S정책이 의외로 오래된 정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본사 출신 방송인으로는 '대구 DJ 1호' 김진규, 도병찬 DJ, 윤일재 PD, 이종건 아나운서 등이 있다.
- 동양방송 문서의 여담 문단에도 서술되어 있듯 1970년대 후반에 동양방송 TV중계 시험전파를 송출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다른 지방총국에서 TV중계를 몰래 하다가 관계자들이 끌려가는 일들이 흔했다고 한다.[11] 이로 인해 당시 경상북도 대구시와 김천시 등지에서 동양방송 TV가 수신되는 신기한 일이 일어났으며 특히 1977년 파나마에서 개최됐던 홍수환의 타이틀전 중계방송을 서울까지 가지 않고도 시청했고[12], 유지인 등 당시 동양방송에서만 볼 수 있었던 인기 탤런트들을 영접하는 영광을 누렸다고 한다. 다만 실외 안테나를 설치해야 깨끗하게 시청할 수 있었으며 이에 당시 앞산 기슭 주민들은 당시 500원씩 거둬 모아서 산꼭대기에 안테나, 부스터, 동축 케이블 1km를 가설하고 사설 중계소를 몇달간 운용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도 있다.#[13][14] 그리고 이 시기에 경상남도 거창군에서도 동양방송을 시청했다는 증언이 있다. 이는 비록 FM방송만 했지만 동양방송 TV도 허가만 난다면 얼마든지 즉시 개국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다.[15]
4. 관련 문서
[1] 언론통폐합으로 KBS대구방송총국에 흡수[2] 수성구가 동구에서 분리되었던 시기는 1980년 4월 1일, 경상북도 대구시가 대구직할시로 승격된 시기는 1981년 7월 1일[3] 앞에 있는 시보와 성우가 똑같으며, 이때만 해도 HLCB-FM을 호출부호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4] 1981년 대구직할시로 승격[5] 현재 포항CBS의 호출부호다.[6] 현재는 이 빌딩 1층에 파리바게뜨가 있고, 다른 층에는 변호사, 법무사 사무실들만 있다. 이 건물이 방송국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7] 한국FM 이후 대구지역 FM방송 중에서는 대구극동방송이 최초로 팔공산 이외의 지역에 송신소를 설치했다.[8] 2001년 개편 이전까지는 2FM 방송도 송출하기도 했다.[9] 당시 KBS대구 2TV(현 HLQH-DTV)의 호출부호도 HLCB-TV였다.[10] 언론통폐합 직후 초창기에 3kW이였다가 나중에 5kW로 증강했을 것으로 추측된다.[11] 일종의 해적방송인 셈이다.[12] 이 당시에 (정부 직할)부산시 등 지방의 권투 팬들은 새마을호를 타고 서울특별시로 올라가서 현지 다방에서 중계방송을 시청하고 다시 돌아갔다고 한다. 물론 당시 부산의 경우 동양방송 TV 지역국이 있었지만 생방송을 볼수 없었다.[13] 현재 앞산전망대가 있는 비파산에 이 사설 중계소가 설치되었고 일부 대명9동 주민들이 여기서 수신한 동양방송을 시청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도 그럴것이 비파산이 있는 대명9동 지역이 당시 대구의 부촌들 중 하나였던 데다가 산꼭대기 중 동네와도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14] 이마저도 1980년에 들어서는 전파가 약해졌는지 자주 시청하지 못했다고 한다.[15] 이외에도 야간에는 광주의 전일방송의 원거리 수신을 통해 동양라디오까지 청취가 가능했을 것이다. 전일방송의 출력은 20kW로 당시로서는 상당히 강력했고 경상북도 일부 지역까지 가청권역으로 두었다. 따라서 당시 대구에서는 동양방송 TV/라디오/FM 모두 청취 및 시청이 가능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