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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8 18:07:36

유지인

유지인 주요 수상 이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역대 파일:daejongfilmawards_logo.png
파일:daejongawards.png
여우주연상
제17회
(1978년)
제18회
(1979년)
제19회
(1980년)
고은아
(과부)
유지인
(심봤다)
정윤희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파일:백상예술대상로고(1).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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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부문 여자 최우수 연기상
제15회
(1979년)
제16회
(1980년)
제17회
(1981년)
김자옥
(목마 위의 여자)
유지인
(심봤다)
정윤희
(사랑하는 사람아)

파일:동양방송 로고_White.svg 연기대상 최우수 여자 연기상[1]
장미희
(1978년)
유지인
정윤희
(1979년)
(한국방송공사언론통폐합으로 합병으로 인한 폐지)

}}} ||
<colbgcolor=#871B4D><colcolor=#FFFFFF> 유지인
兪知仁|Yoo Ji-In
파일:유지인.jpg
본명 이윤희(李允熙, Lee Yoon-Hee)
출생 1956년 3월 9일[음력] ([age(1956-03-09)]세)
경상남도 사천군 삼천포읍, 남양면
(現 경상남도 사천시 삼천포읍, 남양면)
거주지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 반포자이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60cm[3], 50kg, 235mm
학력 중앙대학교사범대학부속여자고등학교 (졸업)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연극학 / 학사)[4]
중앙대학교 대학원 (예술학 / 석사)
데뷔 1974년 영화 '그대의 찬 손'

1. 개요2. 생애3. 출연 작품
3.1. 영화3.2. 드라마3.3. TV3.4. 라디오3.5. 광고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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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상상오락관 유지인 출연.jpg
▲ KBS1 '상상오락관' 中
파일:고수의 비법 황금알 유지인 출연.jpg
▲ MBN '고수의 비법 황금알' 中
대한민국배우이며, 입벌미소(리며 짓는 미소)[5]가 아름다운 여배우다. 정윤희, 장미희와 더불어 197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 중 하나다.

2. 생애

1956년 3월 9일(음력 1월 27일) 생. 경상남도 사천군에서 이상갑과 정정순의 4남매 중 둘째로 출생,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데뷔 당시 그의 아버지는 육군 대령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73년 TBC(현 JTBC) 탤런트 14기로 입사했지만, 정식 데뷔는 1974년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한 이후에 했다. 당시 대학생 대상 잡지에 표지 모델로 나선 사진이 눈에 띄어 연방영화사와 주간한국이 공동으로 모집한 신인배우 모집에서 2,300:1의 경쟁률을 뚫고 1974년 영화 ′그대의 찬 손'으로 데뷔하였다. 인기 작가 강신재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었는데, 유지인이라는 예명도 주인공 '지인'의 이름에서 비롯됐고 흥행에도 비교적 성공한다.[6]

1975년 TBC 드라마 님이 성공하고 <쥬단학화장품>(현<한국화장품>)의 전속 모델이 되면서 스타덤에 오른다.[7] 이후 1977년까지 매년 1~3편의 영화에 지속적으로 출연하였고 77년 TBC 드라마 <서울야곡>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같은 해 TBC 드라마 <청실홍실>의 주연인 장미희·정윤희와 함께 신트로이카를 구축, 브라운관과 영화계를 이끄는 대스타로 성장한다. 1978년 영화 <마지막 겨울>도 흥행에 성공하면서 흥행 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지고 1979년 흥행 1위를 기록한 <내가 버린 남자>를 비롯해 <26 x 365 = 0>, <청춘의 덫>[8], <불행한 여자의 행복>, <가시를 삼킨 장미>, <심봤다> 등의 영화들을 히트시켰다. 이 중 <심봤다>로 트로이카 여배우 중 최초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79년을 완전히 자신의 해로 만들었다.

정윤희가 나는 77번 아가씨로 대표되는 백치미를, 장미희가 겨울여자로 대표되는 청순미를 앞세웠다면, 유지인은 대학생이라는 신분에서 풍겨지는 도시적인 이미지가 강했다.

1980년에 제작된 이두용 감독의 <피막>으로 한국영화사상 최초로 3대 국제 영화제 중 베니스국제영화제 본선에 진출하며 한국영화 세계화의 초석이 된다.

한 동안 닮고 싶은 여성상 1위와 연예인 소득 1위 자리를 지켰다. 당시 유지인의 인기를 알 수 있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북한 김정일의 처조카 이한영1982년 한국으로 망명한 직후 본 광고판에서 유지인을 알아본 것. 지금과 다르게 80년대 초반에는 북한사람이 한국의 연예인을 안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시절이었다. 이는 이한영이 평양에 있는 김정일의 관저에서 유지인의 출연작을 접했기 때문으로 밝혀졌다. 또 다른 여배우들과 달리 스캔들이 단 한 번도 없었을 정도로[9] 사생활이 깨끗한 배우였지만 2008년 이 모 배우와 불륜설이 터졌었다.[10] 또한 지성미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배우답게 윤정희에 이어 여배우 중 두 번째로 석사 학위를 취득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70년대 후반 TBC 전속 탤런트인 장미희, 정윤희와 함께 여배우 트로이카를 이루어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1986년 결혼과 함께 연예계에서 은퇴, 16년 만인 2002년 이혼과 동시에 전격 복귀했다. 다만 2022년까지도 어느정도 주연급 연기자로서의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는 장미희와는 달리 소위 말하는 막장 드라마의 조연급으로 캐스팅이 고정되어 아쉽다는 사람들이 많다. 공백이 거의 없이 꾸준히 활동했던 장미희와는 달리 커리어가 끊겼다가 다시 시작하는 셈이라 그런것도 있다. 그나마도 2016년 이후로는 배우로서의 활동이 없어지고 MBN의 알토란 정도가 유일한 활동이였으나 그마저도 프로그램 개편과 함께 하차했다.

유지인이 한창 활동하던 시기에는 후시녹음이 보편적이어서 매력적인 목소리를 위해 성우를 기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유지인은 자신의 목소리를 많이 활용하는 편이었다. 80년대 들어서까지 성우를 대용하기도 한 다른 여배우와 달리, 유지인은 79년 영화인 가시를 삼킨 장미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그대로 썼다.

유지인의 인터뷰에 따르면, 어릴 때부터 워낙 털털한 성격이라 정윤희와 장미희가 트로이카로 한참 치열할 때 본인은 발만 담그고 거기서 좀 물러서 있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3. 출연 작품

3.1. 영화

제목 상영일자 관람인원 배역
마지막 겨울 1978.09.17 122,459명 소희 역
26 x 365 = 0 1979.02.17 178,239명 최수희 역
사랑의 조건 1979.03.16 48,563명 수연 역
내가 버린 남자 1979.05.03 239,715명 명숙 역
청춘의 덫 1979.08.18 176,744명 윤희 역
가시를 삼킨 장미 1979.09.28 75,757명 장미 역
불행한 여자의 행복 1979.11.01 92,549명 명자 역
심봤다 1979.11.30 56,503명 나온보 처 역
바람불어 좋은 날 1980.11.27 100,228명 명희 역
별들의 고향 3 1981.09.12 49,338명 수경 역
도시로 간 처녀 1981.12.03 7,400명 문희 역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1984.09.29 128,450명 수지 역

3.2. 드라마

3.3. TV

3.4. 라디오

3.5. 광고

4. 여담



[1] 당시에는 대상이 따로 없었고, 최우수 남자·여자 연기상이 최고의 상이었다.[음력] 1956년 1월 27일생.[3] 공식 프로필 키이지만, 1981년 작 도시로 간 처녀에서 등장하는 모든 여배우를 키로 압살하고 남배우에게도 지지 않는 키인 것으로 보아 의도적으로 줄여 표기 한 것으로 보인다. 공식 프로필 키 162cm인 금보라보다도 최소 5cm이상은 크다.[4] 예술대학 연극영화과가 안성으로 이전된 시기는 1982년이다.[5] 맨 위의 프로필 사진 참조.[6] 안타깝게도 이 영화는 필름이 남아있지 않다.[7] 전속 모델이 된 계기가 좀 슬프다. 원래 모델이던 배우 문경희(1954~1975.7.27)가 향년 21세로 사망하면서 생긴 빈자리에 유지인이 들어간 것. 당시 문경희는 정소영 감독이 발탁한 TBC 출신의 유망 신인이었으나 동년 7월 광고 촬영을 마치고 상경하던 도중 충청남도 천안시의 한 국도에서 빗길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하였고, 당시 동승했던 남성 이 모씨는 중태에 빠졌다. 결국 문경희의 사망 사건은 연예계 내에서 교통사고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 배경이 되었다.[8] 후에 80년대 트로이카의 일원이 되는 원미경이 대형 신인으로 주목받은 영화이기도 하다.[9] 정윤희장미희만 해도 큰 스캔들이 제법 있었다. 그나마 장미희의 경우 카더라에서 끝났지만 정윤희는 소문의 상대와 결혼까지 했다.[10] 사실 확인이 안 된 루머이긴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이 시점에서 유지인은 이미 이혼했으니 유지인 쪽의 문제는 아니다.[11] 이후 사명을 해찬들로 변경하였고, 2006년 CJ제일제당에 인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