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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희(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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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희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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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문예공로훈장 수훈자
파일:프랑스 문예공로훈장.jpg
<colbgcolor=#002664><colcolor=#EDE4D3> 연도 <colbgcolor=#EDE4D3><colcolor=#002664> 2011년
수여 프랑스 문화부
이름 Jeong Hee Yoon
국적 Republic of Korea

역대 파일:bluedragonfilmawards_logo.png
파일:bluedragonawards3.png
여우주연상
제8회
(1971년)
제9회
(1972년)
제10회
(1973년)
윤여정
(화녀)
윤정희
(석화촌)
윤정희
(효녀 심청)
제9회
(1972년)
제10회
(1973년)
제11회
(1990년)
[1]
윤정희
(석화촌)
윤정희
(효녀 심청)
원미경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제30회
(2009년)
제31회
(2010년)
제32회
(2011년)
하지원
(내 사랑 내곁 에)
수애
(심야의 FM)
윤정희
()
김하늘
(블라인드)

역대 파일:daejongfilmawards_logo.png
파일:daejongawards.png
여우주연상
제7회
(1968년)
제10회
(1971년)
제11회
(1972년)
문희
(카인의 후예)
윤정희
(분례기)
고은아
(며느리)
제31회
(1993년)
제32회
(1994년)
제33회
(1995년)
심혜진
(결혼 이야기)
윤정희
(만무방)
최진실
(마누라 죽이기)
제46회
(2009년)
제47회
(2010년)
제48회
(2011년)
수애
(님은 먼 곳에)
윤정희
()
김하늘
(블라인드)

파일:백상예술대상로고(1).png
파일:baeksangartsawards4.png
영화 부문 여자 최우수 연기상
제5회
(1969년)
제6회
(1970년)
제7회
(1971년)
김지미
(대원군)
윤정희
(독 짓는 늙은이)
윤정희
(해변의 정사)
제6회
(1970년)
제7회
(1971년)
제8회
(1972년)
윤정희
(독 짓는 늙은이)
윤정희
(해변의 정사)
고은아
(고백)
제8회
(1972년)
제9회
(1973년)
제10회
(1974년)
고은아
(고백)
윤정희
(석화촌)
김지미
(잡초)

}}} ||
<colbgcolor=#005666><colcolor=#fff> 윤정희
尹靜姬 | Yoon Jung-hee
파일:윤정희.jpg
본명 손미자 (孫美子)
출생 1944년 7월 30일
경상남도 부산부[2]
(現 부산광역시)
사망 2023년 1월 19일[3] (향년 78세)
프랑스 파리
신체 160cm
배우자 백건우
자녀 딸 백진희(1977년생)[4]
학력 전남여자중학교 (졸업)
전남여자고등학교 (졸업)
조선대학교 (영어영문학 / 수료)[5]
우석대학교 (사학 / 학사[6])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연극영화학 / 석사[7])
파리 제3대학교 대학원[8] (예술학 / 석사)
종교 가톨릭 (세례명: 데레사)
활동 1967년 ~ 2010년[9]

1. 개요2. 생애
2.1. 영화배우 활동2.2. 알츠하이머 투병과 법적 분쟁2.3. 사망
3. 기타4. 출연 작품
4.1. 영화
5. 수상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영화배우.

2. 생애

본명은 손미자[10]로 1944년 7월 30일 부산에서 손창기와 박소순의 6남매 중 장녀로 출생하였다.

이후 광주광역시에서 성장, 전남여고우석대를 졸업[11]하였다.

2.1. 영화배우 활동

파일:20231209_141638.jpg
청춘극장에 오유경역으로 출연한 윤정희 (1967년)
대학 졸업 이후, 1967년 영화 청춘극장의 오유경 역할로 화려하게 데뷔했다.[12] 이후 남정임·문희와 함께 1960년대1970년대 대한민국 여자 영화배우 트로이카로 큰 인기를 얻었다. 청춘극장은 1967년 팔도강산 다음의 관객을 동원했다. 1968년에는 내시, 천하장사 임꺽정, 일본인 등으로, 1969년에는 독 짓는 늙은이, 팔도 사나이로 큰 인기를 끌었다. 물론 이는 일부분일 뿐 흥행한 영화는 이보다 많다.

사실 그녀는 단순하게 인기가 많은 데에 그치지 않고 폭 넓은 배역 폭을 보여줌으로써 영화사에 굵직한 기여를 했다. 한 블로거의 말에 의하면, 당시 젊은 여배우가 맡는 통상적인 역할은 '청순가련형'과 '요부형' 이 두 가지 역할이 대부분이었는데, 윤정희의 경우에는 이 두 역은 물론이고 백치미까지 능숙하게 연기했다고. 단순히 트로이카들과 비교해도 이 차이가 두드러지는데, 하이틴 스타와 같은 통통 튀는 발랄한 역을 연기한 남정임, 우수에 빠진 눈매로 비련의 여인을 연기했던 문희에 비해 폭 넓은 역을 맡았다. 또 그녀의 이미지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지적인 세련미이다.

그러나 문희미워도 다시 한번의 흥행 이후, 1969년 벽속의 여자, 꼬마신랑 등을 대거 흥행시키며 1970년대부터 윤정희를 능가하여 조금 위축된 감을 보여줬다. 하지만 1971년 문희와 남정임이 은퇴한 반면 윤정희는 결혼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활동했다. 1976년에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결혼했고, 이듬해 딸 백진희를 낳았다. 부부 금슬은 굉장히 좋은 편이었다고 한다. 1977년에는 야행이 그 해 흥행 영화 5위권 안에 들어가며 저력을 보여줬다. 당시에는 영화 말고 드라마가 크게 성장했는데, 윤정희는 드라마에서도 활약을 한 적이 있다.

그러다가 1981년, 자유부인 '81이 그해 흥행 1위 영화가 되면서 남정임, 문희가 이미 이룬 영화 1위 흥행 여배우 자리에 뒤늦게나마 올랐다. 1987년에는 위기의 여자로 흥행을 했으며, 1994년에는 만무방으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후 잠시 활동을 중단했다가 만 66세였던 2010년에는 영화 ""로 청룡영화상과 대종상의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본인의 진가를 다시 한 번 입증했다. 후술하겠지만 이후로는 알츠하이머 투병 때문에 이 영화 이후 사실상 은퇴했으며, 심지어 해당 영화를 촬영하던 당시에도 알츠하이머 초기 증상으로 인해 대사를 적어놓고 촬영에 임했다고 한다.

1967년부터 2010년까지 43년 동안 대종상 여우주연상 3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3회, 백상예술대상 여자 최우수연기상을 3회 수상했다.

2.2. 알츠하이머 투병과 법적 분쟁

2019년 11월 중앙일보백건우 인터뷰를 통해 윤정희가 10여년째 알츠하이머 투병 중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 현재 심각한 상태라고 전했다. 현재 그녀를 돌보고 있는 친딸 백진희 씨에 따르면 현재 친딸인 자신도 알아보지 못하며, 왜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냐고 한다고 한다.

2021년 2월 5일, 청와대 국민청원에 '외부와 단절된 채 하루하루 스러져가는 영화배우 윤정희를 구해주세요'라는 제목의 청원글이 올라왔다. 노컷뉴스, 머니투데이. 해당 청원에는 관리자에 의해 실명이 가려진 상태지만, 언론 기사의 설명을 보면 윤정희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청원자는 "2019년 4월에 남편 백건우와 딸이 서울에서 치료를 받던 윤정희를 파리로 끌고 갔다.", "현재 윤정희는 본인의 집에서 쫓겨나 파리 외곽의 아파트에서 홀로 알츠하이머 및 당뇨병 투병 중이다."라며 "백건우는 아내를 만나지 않은 지가 2년이 훨씬 넘었고, 아내의 병 간호도 못 하겠다면서 형제들한테 떠넘긴 지가 오래다."라고 주장했다.

다만 이 소식을 접한 네티즌들 사이에선 "프랑스에 살고 있는 개인 가정문제에 국가가 나서야 하나", "남편과 딸도 있는데 왜 형제들이 나서느냐"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파이낸셜뉴스), (한국경제), (MBN) 2018년 그랜드 캐니언 추락 사고 당시 사고 유학생의 치료와 이송을 도와 달라는 내용의 청원이 올라왔던 것과 비슷하다.

2월 7일, 백건우의 소속사인 빈체로는 "해당 청원의 내용은 거짓이며, 윤정희는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내용의 반박 입장문을 발표했다. # 백건우 측에 따르면 윤정희의 알츠하이머가 심해져 2019년 초 윤정희가 모친상을 당하여 귀국했을 때 한국에서 요양원 등 머물 곳을 알아봤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너무 유명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결국 프랑스 오케스트라 단원인 친딸 백진희 씨 파리 집 근처에 거처를 마련하여 간호사들과 함께 돌보고 있다고 전했다.

또한 지난 2019년 윤정희의 친동생 3인이 윤정희의 배우자인 백건우와 친딸 백진희 씨에 대한 재산, 신상 후견인 지위 이의 신청을 프랑스 법원에 제기하였다가 패소한 사실이 알려졌다. 2019년 9월 프랑스 1심에서 패소했고, 파리고등법원에 항소하여 2020년 11월 최종 패소했다. 파리고등법원은 "손미자(윤정희의 본명)가 배우자 및 딸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현재 그녀는 안전하고 친숙한 환경에서 안락한 조건을 누리고 있다."고 판단했고, "배우자와 딸이 그녀에게 애정을 보이지 않으며, 그녀가 적절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있고 금전적 횡령이 의심된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판결로 인해 백건우와 백진희씨의 후견인 지위가 법적으로 유지되었다. #

2월 9일, 윤정희의 동생인 손병욱 씨는 중앙일보를 통해 백건우 측의 입장문을 반박했다.# 우선, 프랑스에서 진행된 윤정희의 후견인 선정 재판에 대해서는 "백진희는 프랑스 시민이지만, 같이 후견인 신청을 한 윤정희의 세 형제는 외국 국적이라서 불리하게 진행됐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리고 돈 때문에 이번 분쟁이 벌어졌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우리 형제들은 (스스로) 살아가는 데 문제가 전혀 없다"면서 "직계 가족이 있는 형제 명의의 재산을 어떻게 노릴 수가 있나. 가능하기나 한가"라고 반박했다.

일단 현재까지 상황을 정리해 보면 백건우와 윤정희의 친정 집안 사람들 간의 윤정희의 후견인 문제로 생각 이상으로 오랫동안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9월 7일 해당 사건을 MBC PD수첩이 다루었다.# 윤정희의 후견인은 윤정희가 윤정희의 형제자매를 비롯하여 그동안 교류해왔던 사람들과의 만남 및 소통을 제한했다.

서울가정법원 가사 51 단독 장진영 부장판사는 2022년 3월 24일 윤정희 씨의 딸인 바이올리니스트 백진희(45) 씨의 신청을 받아들여 후견인을 백건우 씨로 판결했다. 손병욱 씨는 이에 불복해 항고했으나 기각되었고, 2022년 11월 재항고하여 그녀의 사망 직전까지 대법원에서 소송이 계속되고 있었다.

2.3. 사망

2023년 1월 19일 현지시간 오후 5시[13], 프랑스 파리에서 남편과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향년 78세로 사망했다. 기사

그녀가 세상을 떠나면서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인 '성년후견인 소송'은 법적 판단 없이 종료될 전망이다.

백건우에 따르면 그녀는 딸 백진희의 바이올린 소리(연주)를 들으며 꿈꾸듯 편안한 얼굴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30일 뱅센[14]의 노트르담 성당에서 장례 미사를 드렸으며, 국내로 시신을 운구하지 않고 현지에서 화장한 후 안치했다.#

이와 별개로 여의도성당에서는 위령미사가, 뉴욕에서 분향소가 차려졌는데(#) 이는 윤정희의 형제자매들이 주도한 거라 백건우는 여기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내비췄다. 장례식 당일에도 윤정희의 막내동생인 손미현 씨가 형제자매들을 대신해서 찾아왔지만 백건우, 백진희 부녀와는 단 한 차례의 대화도 없었다. 손미현 씨도 고인과 혈육임에도 불구하고 백 씨 부녀가 알려주지 않아 수소문 끝에 찾아왔다며 서운한 감정을 드려냈다.#

3. 기타

1963년 미스 전남 미로 미스코리아에 참가했다.

한때 일가족이 북한으로 납북될 뻔한 큰 위기도 겪었다. 자세한 내용은 백건우 항목 참고.

TV로 생중계되었던 2006년 제27회 청룡영화상 시상식으로 오랜만에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는데, 등장과 동시에 울먹거리더니 당시 뇌물수수로 수감되어 있던 절친한 동료 배우 신성일을 선처해달라는 매우 적절치 못한 발언으로 엄청나게 비난받은 적이 있다. 사석이었다면 딱히 문제가 될 일이 아니었지만 문제는 엄연한 공적인 자리에서 저런 말을 했다는 것. 지금까지도 신성일은 한국 영화계에서 전설적인 배우로 대우 받지만 어쨌거나 범법 혐의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공석에서 그런 말 했다가 그를 도와줄 의도였는데 오히려 더 대중들에게 범법자의 낙인 찍힐 수 있다.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요즘 영화배우가 있느냐"면서 영화와 TV를 오가며 활동하는 후배 배우들을 비판하였는데, 정작 그 자신도 1972년 TBC드라마 사모곡에 출연한 적이 있다.

중학교 동창의 회고에 따르면 소녀 시절에도 복도에서 마주치면 뒤돌아서 다시 볼 정도로 예뻤다고 한다.

인기 절정이던 20대 시절 의외의 부업을 한 적이 있다, 다름아닌 통닭집 운영. 워낙 바쁜 일정 탓에 경영은 어머니가 맡아서 하였으나 엄연히 '사장'은 윤정희였다. 가게의 주인이 톱스타 윤정희인 데다 음식의 맛도 좋아서 한동안 성황리에 운영되었다고.

영화감독 이장호의 회고에 따르면 자신이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에서 연출부 막내로 있었을때, 다른 여배우들은 다들 콧대가 높고 여기요 저기요하며 하대했지만 윤정희만은 이장호의 이름을 기억하고 존칭을 써주며 잘 대해줬다고 한다. 자신보다 낮은 위치의 사람들에게도 잘 해주는 따뜻한 성품이 드러나는 대목.
파일:20100812000861_0.jpg
앙드레 김과 함께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

4. 출연 작품

4.1. 영화

<rowcolor=#fff> 연도 제목 배역 관객 수(명)
1967년 청춘극장 오유경 206,000
강명화 강명화 100,000
안개 하인숙 136,000
1968년 내시 자옥 320,400
천하장사 임꺽정 152,000
일본인 118,000
장군의 수염 102,000
1969년 독 짓는 늙은이 옥수 136,627
1977년 야행 현주 135,047
1979년 사랑의 조건 오미경 48,563
1981년 자유부인 '81 선영 287,919
1994년 만무방 주인여자 14,502
2010년 [15] 양미자 218,898

5. 수상

<rowcolor=#fff> 연도 시상식 부문 작품
1967년 제6회 대종상 신인상 청춘극장
제5회 청룡영화상 인기여우상
1968년 제4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신인연기상 안개
1969년 제6회 청룡영화상 연기여우상
1970년 제7회 청룡영화상
제6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 독 짓는 늙은이
영화부문 애독자인기상
1971년 제7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 해변의 정사
영화부문 애독자인기상
제10회 대종상 여우주연상 분례기
제14회 부일영화상 첫경험
제8회 청룡영화상 인기여우상
1972년 제8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애독자인기상
제18회 아시아-태평양 영화제 인기여우상 무녀도
제9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석화촌
인기여우상
1973년 제16회 부일영화상 여우주연상 석화촌
제9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
영화부문 애독자인기상
제19회 아시아-태평양 영화제 여우주연상 궁녀
제10회 청룡영화상 효녀 심청
인기여우상
1974년 제10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애독자인기상
1975년 제11회 백상예술대상
1992년 제12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주연상 눈꽃
1994년 제32회 대종상 만무방
2010년 제47회 대종상
제31회 청룡영화상
제4회 아시아태평양 스크린 어워즈
제11회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2011년 제37회 LA비평가협회상 여우주연상
제13회 시네마닐라 국제영화제
2018년 제38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공로영화인상


[1] 잠정 중단, 1990년에 재개.[2] 성장은 광주광역시에서 했다.[3] 현지시간 기준. 대한민국 시간 기준으로는 1월 20일이다.[4] 프랑스 국적자로 프랑스에서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슬하 1남을 두었다.[5] 2학년까지 마쳤다.[6] 고려대로 통합된 구 우석대학교를 말한다. 집안 사정으로 조선대 영문과를 중퇴 후 3학년으로 편입하여 졸업했다.[7] 석사 학위 논문: 영화사적 측면에서 본 한국 여배우 연구: 1903-1946년을 중심으로[8] Université de la Sorbonne Nouvelle.[9] 2010년 영화 이후로 활동을 중단했다.[10] 배우 금보라와 본명이 같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에서 맡은 배역 이름(양미자)과도 같다.[11] 언급된 우석대는 고려대학교로 통합된 구 우석대학교를 말한다. 당초 윤정희는 조선대학교 영문과를 다녔지만, 집안 사정으로 2학년까지 마치고 중퇴한 후 해당 대학교에서 3학년으로 편입한 후 졸업했다.[12] 지금 이 영화는 원본이 소실되었으나 중국어 더빙이 남아 있다.[13] 대한민국 기준으로는 1월 20일 오전 1시이다.[14] 일드프랑스 발드마른 주에 속한 도시[15] 1994년 만무방 이후 출연작이자 유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