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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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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좋아하는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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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한국갤럽이 창립 30주년을 맞이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인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알아보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조사 시리즈를 기획해 2004년부터 5년 주기로 발표하고 있다.
2004년
※ 2004년 한국갤럽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가수'를 선정.
1위 공동 2위 4위 5위
이미자 나훈아 조용필 현철
6위 7위 8위 9위 10위
태진아 신승훈 송대관 김건모 설운도
2009년
※ 2009년 한국갤럽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가수'를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장윤정 BIGBANG 태진아 이미자 소녀시대
{{{#!wiki style="margin: -16px -11px" 6위 7위 공동 8위 공동 10위
나훈아 조용필 현철 손담비 이승철 송대관 }}}
2014년
※ 2014년 한국갤럽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가수'를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조용필 이선희 장윤정 아이유 태진아
6위 공동 7위 9위 10위
EXO 이승철 이미자 나훈아 소녀시대
2019년
※ 2019년 한국갤럽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가수'를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방탄소년단 장윤정 나훈아 아이유 조용필
6위 공동 7위 9위 공동 10위
이선희 태진아 이미자 이승철 김연자
공동 10위 15위
이문세 홍진영 TWICE 박효신 남진
16위 17위 공동 18위
임창정 송가인 김건모 설운도 진성
21위 공동 22위
성시경 거미 BLACKPINK 잔나비
2024년
※ 2024년 한국갤럽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가수'를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임영웅 아이유 방탄소년단 나훈아 NewJeans
6위 7위 8위 9위 10위
장윤정 진성 영탁 송가인 BLACKPINK
11위 12위 13위 공동 14위
이찬원 성시경 김연자 김호중 조용필
16위 17위 공동 18위 공동 20위
이효리 전유진 IVE 이문세
공동 20위
이미자 이승철 장민호
같이 보기: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좋아하는 스포츠선수, 좋아하는 소설가, 좋아하는 탤런트, 좋아하는 영화배우, 좋아하는 가수, 좋아하는 노래, 좋아하는 예능인, 좋아하는 유튜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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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국화 시나위 김완선 백두산 부활
어떤날 이승철 임재범 유재하 소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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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영 015B 빛과 소금 윤종신 듀스
윤상 신승훈 강산에 김건모 N.EX.T
서태지와 아이들 이소라 김동률 박진영 솔리드
유앤미블루 토이 DJ DOC YB 패닉
H.O.T. 델리스파이스 윤미래 자우림 S.E.S.
이효리 크라잉넛 노브레인 드렁큰 타이거 god
보아 싸이 브라운 아이즈 다이나믹 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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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1E72><colcolor=#fff> 부활 2대ㆍ객원(8집) 보컬리스트
이승철
李承哲|Lee Seung-Chul
파일:20200514092526998qwzn.jpg
출생 1966년 12월 5일 ([age(1966-12-05)]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불광동
(現 서울특별시 은평구 불광동)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거주지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1]
본관 평창 이씨 (平昌 李氏)
신체 170cm[2]|67kg|A형
가족 부모님, 형, 누나
배우자 강문영(이혼)
배우자 박현정(1964년생, 2007년 결혼)
의붓딸 이진(1994년생)[3]
친딸 이원(2008년 7월 4일생)[4]
병역 대한민국 육군 방위병 소집해제[5]
학력 서울불광국민학교 (졸업)
서대문중학교 (졸업)[6]
대신고등학교 (졸업)
수원대학교 공과대학[7] (기계공학과 / 중퇴)
차량 캐딜락 에스컬레이드, 롤스로이스 레이스
종교 불교개신교[8]
소속사 MLD엔터테인먼트
(주) LSC [9]
데뷔 1986년 부활 1집
Rock Will Never Die
MBTI ENFJ[10]

1. 개요2. 경력3. 가창력4. 슈퍼스타K5. 김태원과의 관계6. 사건 사고7. 기타8. 표절 논란9. 개인 앨범
9.1. 대표곡
10.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가수.

1986년 밴드 부활의 보컬로 데뷔한 이래 솔로로 총 10장의 정규 앨범을 발표했다. 본인은 콘서트 홍보할 때 특유의 표현으로 '보컬의 신' 등을 내세우고 있는데, 실제 후술되어있듯 매우 수준 높은 가창력과 감성으로 인정받는 보컬리스트다.

2. 경력

부활의 2대 보컬이자 1집 보컬로 데뷔했다. 내막을 보면 부활의 1대 보컬이었던 김종서가 부활로 활동한 지 6개월도 되지 않아 탈퇴하게 되자[11] 김태원은 부활 공연의 팬이자 스텝 겸으로 따라다니던[12] 동생 이승철에게 새 리드보컬을 구해야하니 좀 도와달라고 했는데, 이승철은 본인이 보컬로 부활에 들어가고 싶다고 강하게 어필했다. 찾아봤는데 자신만큼 노래하는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여하튼 그래서 이승철에게 노래를 시켰는데 생각보다 잘 했고[13] 몇 차례 객원보컬 형식으로 함께 한 후에, 정식 멤버로 받아들이게 된다.

과거 이승철의 (아마도 싸이월드) 홈피엔 자신이 김종서의 후임으로 임명된 것은 어머니의 돈줄 때문이었다는 얘기를 농담처럼 적어놓은 적도 있으며, 해피투게더에 출연해서는 처음에는 거절당했으나 당시 교사였던 어머니에게 1년 연봉만큼의 돈을 빌려서 음악 장비를 준비했더니 받아주었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14] 그리고 이 때부터 이승철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활김태원, 이승철간 수십년에 걸친 복잡한 관계가 형성된다.

1986년[15] 1집 앨범을 발매했을 때부터 부활은 양홍섭 작사/작곡의 희야와 김태원 작사/작곡의 비와 당신의 이야기로 메가히트를 치게 되고, 당시 최고의 대중성을 지닌 록밴드로 떠올랐다. 다만 밴드 전체로 보면 다른 멤버에 비해 이승철이 얻는 관심이 거의 십중팔구에 달했다. 어느 정도냐면 부활하고 김태원은 몰라도 이승철 아는 사람은 수두룩할 정도. 예능에 김태원이 나왔을 때도 이승철이 밴드에 들었었냐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과장 좀 보태 당시엔 밴드 부활이 아닌 가수 이승철의 밴드인 것처럼 보일 정도로 멤버간 인지도 격차가 심했던 것. 당시 이승철은 귀공자처럼 잘생긴 외모 덕에[16] 팬레터와 선물을 보내는 여성팬들이 무척 많았으며, 노래 외에도 각종 TV/라디오 방송에 출연해서 수준급의 입담을 과시하며 아이돌급 인기를 누렸다.[17]

하지만 몇년 지나 김태원이 대마초 복용으로 인해 교도소에 가고, 이승철이 팀을 떠나면서 부활은 허무하게 해체된다.[18] 해체 당시 상황은 김태원과 이승철의 증언이 약간 엇갈린다. 김태원은 이승철이 떠난 것에 무게를 두는 반면 이승철은 매니저의 CF 출연료 착복을 원인으로 보고 있다. 다만 해체 당시에 상호 간 합의가 있었으며, 합의 내용 중에 부활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한 부분은 김태원과 이승철이 대체로 동일하게 회고하고 있다.[19]

이승철은 솔로로 데뷔하자마자 박광현의 프로듀싱을 받으며 1988년 솔로 1집 타이틀곡 '안녕이라고 말하지 마' 등의 히트로 곧바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나, 이후 대마초를 피우다 걸리는 바람에 구속되어 몇 년간은 방송 출연까지 금지당한다.[20] 그럼에도 방송 출연이 없는 악조건 속에서 꽤 인기를 유지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 기간에 개그맨 박명수가 이승철 흉내를 내고 다녔고, 그래서인지 잊혀지지 않았다고. 이승철 본인도 방송에서 박명수와 관련된 질문이 나올 때마다 자신을 흉내내주던 박명수에게 고마움을 표하곤 했으며, 박명수 역시 이승철 성대모사가 본인 직업에 도움이 되었기에 감사하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이후 이승철 딸과 박명수 딸이 같은 유치원에 다니기도 해 친해졌다고 한다. 후술되어있지만 박명수 음색이 의외로 이승철 삘이 있다.

이승철이 솔로로 잘 나가는 동안 부활은 한동안 침체기였다. 그러다 출소 후 아내의 도움으로 약을 간신히 끊은 김태원은 비운의 보컬로 불리는 김재기를 영입, 1993년 발매한 3집 타이틀곡 사랑할수록이 대박을 치면서 활동을 재개했다.[21] 만약 이승철이 3집까지 남아있었다면 '사랑할수록' 도 이승철의 곡이 되었을지도 모른다.[22] 이후 이승철은 2002년 부활과 재결합하여 8집 '새벽' 을 발매하는데, 타이틀 곡이 그 유명한 Never Ending Story다. 내막을 보면 2000~2001년 사이 이승철은 앨범 실패로 침체기를 겪고 있었고, 부활도 6, 7집이 흥행에 연달아 실패하며 위기 상황이었는데, 김태원과 이승철이 재결합하면서[23] 부활 보컬로 다시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다시 인기를 회복하며 이후 활동을 활발히 이어나갔다. 하지만 개인 활동에 대한 이견차 등으로[24] 8집을 끝으로 이승철은 다시 부활을 떠나 솔로 활동을 하게 된다.

1990년대에는 일각에서 라이벌로 평가받기도 하던 신승훈이나 김건모가 워낙 메가 히트를 치면서 앨범 판매량이나 음악 프로그램 1위 횟수 같은 대중성 측면에선 밀렸다는 평을 받았으나[25], 2000년대 이후엔 꾸준히 히트곡을 더하면서 롱런 측면에선 오히려 앞섰다. 물론 원체 신승훈, 김건모가 전성기 기준 메가 히트를 했던 탓에 총 판매량에선 여전히 밀린다. 여담으로 이승철과 신승훈은 절친이기도 하다. 단, 이승철의 경우 8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세대들에게 선호되는 보컬, 노래방용 노래를 많이 불렀고 잘 불렀다는 특징은 있다. 또한 이승철의 캐릭터성이나 뛰어난 가창력까지 더해 특정 세대의 대중적 선호도가 많이 높은 것은 맞으며 이런 것은 이 세대의 선호도 설문조사를 봐도 알 수 있다.

2000년대 이후부턴 동시대 가수들이 서서히 잊혀져가는 동안에도 꾸준히 히트곡을 내놓으면서 입지를 다졌다. 방송 활동도 동년배 가수들에 비해 훨씬 잦은 편. 또한 OST는 좋았다의 적절한 예시라고 할 수 있는 비천무의 '말리꽃' 이후로 영화나 드라마의 OST 분야에서도 '인연',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그 사람' 등이 호평을 받으며 좋은 성적을 냈다. 다만 2010년대 중후반 이후부턴 활동에 비해 예전만한 히트곡이 별로 나오진 않고 있다. OST를 제외하면 연간 차트에 든 노래는 2013년 나온 11집의 타이틀곡 My Love가 9위로 마지막이었다. 물론 그 나이에 히트곡 내는 게 어찌보면 더 대단하긴 하지만. 콘서트 활동은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왕성하다. 2016년 연 30주년 기념 콘서트 등은 높은 관중수와 더불어 지상파에서 녹화 방영하기도 했다.

3. 가창력

희야 말리꽃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My Love
라디오 방송 무반주 라이브 모음.

전성기 기준 국내 보컬계에서 Topclass 위치다. '희야', '비와 당신의 이야기', '안녕이라고 말하지마', '마지막 콘서트', '소녀시대', '오늘도 난', '오직 너뿐인 나를' 등을 비롯한 많은 히트곡을 통해 선보인 노래 실력으로 90년대부터 가창력을 논하는 자리에는 빠지지 않는 인물이었으며, 2002년 'Never Ending Story'나 2004년 '인연'의 대히트 이후 약고음 스킬까지 확실히 장착하며 '듣고 있나요',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그 사람' 등 한참 활동할 당시에는 '역대 최고의 보컬' 소리도 심심찮게 들었다.

사실 발성적으론 후술되어있듯 완전 정석 스타일은 아니지만 특유의 감성과 보컬 테크닉이 독보적이라 묻히는 수준. 이승철 가창의 최장점 중 하나는 '섬세함'이다. 또 수십 년의 가수 생활 동안 그의 라이브 실력이 기복이 크게 없다는[26] 점에서 의외로 김연우, 김범수처럼 성악에 가까울 정도의 정석적 실용음악 발성을 추구하는 가수들에 비해서도 라이브 안정성이 많이 떨어지거나 기복이 많은 편은 아니다.[27] 실제 이승철은 데뷔 시절 기준 현대적 보컬 테크닉을 따로 배운 적이 없음에도[28] 타고난 성대와 피지컬, 톤으로 이것을 커버친 재능이 뛰어난 가수다. 이승철 본인도 이를 느끼고 있는지 '가수는 타고나야 한다, 연습만 해서는 성공할 수 없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29]

아름답고 몽환적인 느낌 속에서도 쓸쓸함이 전달되는 발음 등이 이승철만의 독특한 감성을 불러 일으키는데, 보편적인 한국인의 정서와 매우 잘 맞는 느낌이고 이는 그가 국내 톱 가수의 반열에 이르게 되는데 일조하였다. 이게 표현이 애매한 거 같으면서도 맞는 것이 이승철의 강점이 '느낌을 잘 살린다'는 것이다. 미친듯한 고음을 내는 보컬은 아니지만 음과 음 사이의 음이동이 보통의 가수들보다 훨씬 섬세하고 가성 처리도 뛰어나 노래 부르는 맛이 깊은 편이다. 김범수가 일전에 얘기했듯이 "들을 때는 쉽게 부르는 것처럼 들리는데 막상 내가 하려고 하면 너무 어려운 노래가 이승철 노래다". 기술도 기술이지만 대중음악에 있어서 노래의 맛과 멋을 제대로 살리는 가수라 할 수 있다.

특유의 배음으로[30] 노래의 섬세한 부분을 특유의 억양과 리듬을 넣으면서도 멜로디적인 부분을 훼손하지 않고 표현한다. 이승철 노래에서만 느껴지는 특유의 '맛'이 있는데, 이것이 이승철이 부른 노래를 타 가수들이 불렀을 때 쉽게 느낌이 살지 않는 이유 중 하나. 다른 가수들이 이승철만의 느낌을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이다. 불후의 명곡2에 출연해서 본인이 직접 말한바에 의하면 한창땐 '마지막 콘서트'의 하이라이트 부분 "밖으로~ 나가버리고오오오오오오오~"를 46초까지도 끌어봤다고 한다.[31] 복식호흡은 이승철을 닮았다고 주장하는 박명수가 종종 흉내내어 '복식호통'을 치는 자신의 기믹으로 삼은 바 있다.

이승철 발성의 큰 특징은 약고음호흡 조절, 그리고 부드러운 성대접촉으로 정리할 수 있다.[32] 이승철은 라이브마다 3옥타브를 넘는 초고음을 질러대는 보컬은 아니다. 이런 고음을 질러대는 보컬들에 비해 2옥타브 초중반 영역에서도 발성적으로 그닥 권장하진 않는 후두를 살짝 높은 위치에 고정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긴 하다. 다만 너무 높은 위치는 아닌데다 그는 그 위치에서부터 시작해 목이 막히지 않고 소화 가능한 음역까지만 표현해내는데 주력해 역설적으로 그게 개성이 되기도 한다.[33] 확실한건 그 음역대에서 표현하는 내공만큼은 국내 최정상급이라는 것.[34]

호흡 조절 능력과 성대를 얇게 붙이는 능력은 최정상급이다. 사운드가 커지지 않는 상태로 부드럽게 성대접촉을 하며 2옥타브 중후반의 음역대를 깔끔하게 불러내는 것은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찾기 매우 어려운 수준의 능력이다. 성대를 얇게 붙이는 능력이 기본적으로 매우 출중하기 때문에 고음 능력이 그만큼 생성되는 것. 이에 더해 호흡을 적절히 사용하여 성대를 여닫는 능력은 가히 신들린 수준. 이를 반복하면서 목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표현을 완성하는 것이 이승철만의 보컬 스타일이다. 일반적인 보컬들이 지지음역[35]을 구현하기 위해 후두를 최대한 내리고, 연구개를 들어 협착을 방지한 상태로 얇게 유지된 성대를 강하게 붙인다면[36] 이승철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스스로 터득한 내공으로 본인의 단점을 극복하고 개성을 유지했다고 볼 수도 있다. 또 전성기때는 호흡 메니지먼트가 놀라울 정도로 탁월하여 길게 음을 뽑는(sustaining note) 능력이 대단했다. '마지막 콘서트'의 하이라이트에서 그 진면목을 확인 할 수 있다.

가끔 가다 유튜브 같은 곳을 보면 '원키로 자기 노래를 잘 부르지 않는 이승철은 과대평가된 가수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이승철 본인은 '녹음을 반음 높여서 한거다'라고 반박한다.[37] 물론 가수의 아우라를 느낄 수 있고 본인 콘서트에선 수십곡을 불러야 되는 라이브 공연과 달리 음악만 감상할 수 밖에 없는 음반의 경우, 타가수들도 일부러 한두 키를 높여서 녹음하는 경우가 실제로 있는건 맞다. 원키로 소화해서 감동을 준다면 그것도 좋지만, 1키나 몇 키 낮춰도 감정을 잘 살려서 청중들에게 감동만 줄 수 있다면 그것 역시 나쁘다고 할 수만은 없다. 들어서 좋으면 좋은 것이다. 프로 가수의 실력을 평가하는건 결국 듣는 이들의 몫이기 때문.[38]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고 콘서트에 몰려들면 그것이 대중가수로서의 훌륭한 능력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가성 사용 역시 이승철을 대표하는 키워드 중 하나다. 말그대로 가성을 진성과 함께 자유자재로 섞어 사용한다. 또 가성 외 반가성[39]도 잘 사용하는데, 호흡이 새어나가는 불안정한 소리가 아니며 안정적으로 자리가 잡힌 소리다. 종종 부드러우면서도 어딘가 살짝 날카로운 듯한 느낌의 소리가 나는 것도 바로 이 반가성 때문이다. 가성 사용과 관련해서 박한 평도 있지만, 이승철처럼 콘서트를 계속하는 공연 주력 가수가 발성을 못해서 그런 가성으로 처리한다는건 너무 가혹한 평가. 초창기 카랑카랑했던 고음 처리에서 현재의 부드러운 처리로 스타일이 바뀌었다고 보는게 맞다.

표현력은 가히 장인의 수준이다. 보통 이승철에 대한 수식어로 라이브의 황제라는 단어를 많이 언급하는데, 하나의 프레이즈를 부르더라도 그 안에서 적절한 강약조절을 보여준다. 특히 앞에서 언급한 호흡조절과 성대접촉을 기반으로 볼륨조절과[40] 밴딩, 비브라토 등 정말 다양한 스킬을 섞어 노래를 지루하지 않게 만든다. 심하게 말하면 벌스만으로 이루어진 노래를 부르더라도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고 할 정도로, 노래 표현력에 있어서는 경지에 올라선 모습을 보여준다. 더욱 놀라운건 이러한 표현력을 위에서 언급한 고음역(Bb4 ~ B4)에서도 잘 잃지 않는다. 이런 점들이 이승철의 보컬을 호평하게 만드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성량이나 음역의 경우 톱급은 아니지만 충분히 평균 이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간과하기 쉬운 것이, 이승철 노래는 초고음은 잘 없는 반면 대부분의 음역 자체가 2옥 중후반 파사지오에 걸리는 곡들이 많다. 당연히 이 구간들을 길게 부르는 게 초고음 한 번 찍고 오는 것보다 더 어려울 뿐 더러, 이승철은 파사지오 구간을 가능한 부드럽게 연결하는 게 장점이라 청중들이 듣기 편하다.

즉, 이승철의 장점은 어떤 하드웨어적인 요소보다도 본인이 사용 가능한 어떤 음역에서든 목이 좁아지지 않고 소리가 편하게 나오는 그러면서도 미성을 잘 살리며 섬세함을 잃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팝메탈이나 초고음을 내지르는 가수가 감성을 갖춘 케이스라기 보다는 감성 가수가 괜찮은 음역대와 테크닉을 갖춘 케이스로 보면 된다. 또 곡 해석력이 뛰어나서 슬픈 노래라고 무작정 흐느끼지 않고 절제와 분출을 조절하는 컨트롤 능력이 탁월하다.[41]

이런 면에서 봤을 때 이승철은 어떻게 보면 유독 팬들의 지지세가 강한 가수 중 한명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가수들은 각자 여러 장점들이 있는데, 이승철의 경우 한국 대중들이 좋아하는 발라드적인 미성을 부드럽게 잘 활용하면서도[42] 한편으론 음악적인 탐구심이나 학구열이 풍부한 매니아층의 지지도 어느정도 받는 중간쯤 되는 포지션을 제법 잘 지키고 있다. 실제 이승철의 음반은 소위 말하는 대중성, 작품성, 매니아 지향점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고 있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43]

국내에서 가왕이란 호칭으로 불리는 조용필이 인정한 보컬이기도 하다. 90년대 쯤 "조용필의 뒤를 이어서 누가 공연계의 제왕이 되겠느냐?"는 질문에 조용필이 답하면서 한 말로 "그래도 승철이가 느낌을 좀 살리지 아마?". 일반 대중들의 인식 속엔 여전히 포스트 조용필로 이승철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으며[44] 이것조차 세월이 지나서 포스트 이승철을 논하는 시대가 왔다. 대중들 사이에선 김나박이 등이 흔히 거론된다. 허나 정작 이승철은 tvN 현장토크쇼 택시에 나와 포스트 이승철로 친구 신승훈을 지목했다. 또한 임재범은 라이벌로 꼽을만한 가수로 이승철과 조관우를 꼽기도 했다. 본인은 범, 이승철은 매, 조관우는 뱀처럼 노래한다고 표현했다. 칭찬에 인색한 임재범 성격을 감안하면 칭찬에 후한 편인 조용필에 비해 어찌보면 더 희소성 있는 칭찬일지도 모른다.[45]

부활 데뷔 초에는 락보컬이었고[46] 현재의 음색과는 달랐다. 미성이면서도 허스키했고, 쇳소리까지 냈다. 사실 지금도 '소녀시대' 같은 곡들을 부를 땐 쇳소리가 난다.[47] 그래도 타고난 미성이었던지라 1집 수록곡인 '인형의 부활' 같은 경우는 '연주는 좋은데 보컬 목소리가 너무 애다'라는 평도 들었다. 허나 들어보면 알 수 있듯 지금의 이승철 목소리와는 다른 매우 긁는 탁한 목소리를 내긴 했다.[48] 그러다 부활 당시 보여줬던 날카로운 미성에서 이후 파워가 붙은 1990년대~2천년대 초중반엔 가창력이 절정에 달했고, 이후부턴 목소리와 사운드를 경량화하기 시작했다. 물론 2010년대까지도 진가성을 적절히 섞어쓰면서 수준급 보컬 능력을 보여줬다.

지금도 리즈 시절과 비교할 시 그렇다는 거지 가수로서의 가창력은 여전히 뛰어난 편으로 감성은 여전하고 음역대도 아직 2옥 라 이상은 거뜬하게 올리는 중. 이젠 본인도 가창력을 전면으로 드러내기보다는 편하게 감정을 살리는 방향을 목표로 하는 듯 한데, 2010년대 중반 인터뷰에서 대중과 가수 본인이 선호하는 창법에 대해 괴리감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한 적도 있는걸 보면 일부러 바꾼 측면도 있는 듯 하다. 팬에 따라선 오히려 지금의 창법을 선호하는 경우도 있으니 결국 취향 차인듯.

미성이라서 잘 부른다는 평가를 하는 사람도 있으나, 미성은 단지 타고난 음색일 뿐 유지하는게 공짜로 그냥 되는 건 아니다. 유영석, 윤종신 등처럼 활동 초기 미성으로 평가받던 가수들의 전성기와 지금이 얼마나 다른지 상기해보자. 타고난 미성만으로 노래하는 가수는 중년의 나이대에 망가지기 쉽다. 물론 미성으로 타고났더라도 이승환이나 신승훈처럼 관리만 잘하면 오래 가기도 한다. 애초에 목소리가 변한다는 것 자체가 성대에 '상처'를 입히면서 노래를 불렀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결국 케이스 바이 케이스. 그러니 성대 수술까지 해야했던 유영석의 경우나 적극적으로 술, 담배를 하면서 목소리가 변하는 과정이 여실히 드러난 윤종신의 경우처럼 확실한 경우가 아니라면 함부로 속단하거나 적용하지는 말자.

과거 한땐 녹음시, 곡의 분위기에 맞게 술 한 잔 걸치고 한번에 갔다고 한다. '말리꽃' 등. 그런 탓인지 정박에 익숙한 사람이 듣기에는 미묘하게 박자가 빠르거나 느리다는 인상을 받기도 한다. 호불호가 갈릴수도 있지만, 이승철 특유의 매력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다만 이것도 옛말. 11집 인터뷰 당시 밝힌 바로는 과거의 원테이크 녹음 방식을 버리고, 여러번 끊고 다시 들어가면서 녹음하는 방식을 선택했다고 한다.

2008년 김연우, 박선주 등의 보컬 트레이너 10명을 대상으로 한 시대별 국내 최고의 남녀 보컬리스트 설문조사에서 1990년대 부문 김건모, 임재범에 이어 3위, 2000년대 부문 1위를 차지했으며, 같이 진행한 시대/성별을 막론한 최고 보컬리스트 부문에선 조용필의 뒤를 이어 2위를 차지했다. 간발의 차로 임재범이 3위. 또한 음악전문가 20인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가장 노래 잘하는 가수' 부문에서는 조용필의 뒤를 이어 2위. 임재범이 3위였다. '기술적 능력이 뛰어난 가수' 부문에서는 단독 1위, '감성적 능력이 뛰어난 가수' 부문에서는 김광석, 김현식, 김동률과 함께 공동 1위를 차지했다. 2011년 월간조선에서 대중문화·음악평론가 12명을 대상으로 한 노래 잘 부르는 가수 설문조사에선 80년대 이후 데뷔가수 중 임재범과 함께 공동 1위를 차지하였다.[49] "감성과 파워가 조화됐고, 기교와 음정, 성량 등 3박자를 고루 갖춰 록부터 발라드까지 무리 없이 소화해 내는 라이브 황제"라는 평. 2011년 문화일보에서 조사한 '지난 20년 국내 최고의 가수' 설문조사에서도 조용필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이렇듯 부활 때부터 지금까지, 40여년 가까운 가수 인생 동안 수도 없이(...) 구설수에 시달렸으면서도 꾸준히 음반/방송/콘서트 활동을 계속하고 있고, 인기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그의 보컬 스킬이 그만큼 대중들한테 어필한다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2015년 콘서트 순위 2위였다. 1위는 싸이. 가수들의 꿈이라는 전국콘서트를 그것도 해외도 겸해서 오랜 시간 꾸준히 열고 있는 걸 보면 대단하다.

다만 2018년에 성대 폴립 제거 수술을 받은 이후 가성이 힘들다고 하는 등 꼭 성대수술 뿐만이 아니라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기량이 점차 떨어져가는 건 어쩔 수 없다. 확실히 이후 가성이 불안정하거나 기존 곡에 가성 파트를 진성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게 더 힘들지 않나 근데 본인이 2021년 '옥탑방의 문제아들'에 나와 한 발언을 보면 지금도 가성은 예전만큼 잘 나오진 않고 첨엔 목소리 자체도 잘 안 나와 힘들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레이저로 성대 근육 조직을 탄탄하게 만들어서인지 키 자체는 젊은 시절마냥 다시 올라갔다고 하는 거 봐선 일부러 진성을 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2022년 울랄라세션과의 서쪽하늘 무대에서 원키를 올리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4. 슈퍼스타K

엠넷슈퍼스타K 시리즈에 지속적으로 심사위원으로 출연. 특유의 독설 판정으로도 유명하다. 일반적으로 칭찬 또는 '취향을 타는 것 같다'는 식의 말들을 앞에 깔아둔 뒤, 마지막에 '제 점수는요' 하면서 뒤통수를 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자기가 아니다 싶으면 아닌 스타일인 듯. 2009년 슈퍼스타K 시즌1 결승에 불참했는데 이를 두고 자신이 반대하던 서인국이 결승에 올라가서 빡쳐서 안 나왔다는 루머까지 있었을 정도.

2010년 슈퍼스타 K2 2차 본선이 있기 며칠 전엔 이승철의 녹음실이 침수되기도 하였다. 큰 피해는 없었지만, 그로 인해 빗속에서를 부른 존박이 피해봤다는 소문이 있다. 실제로 평소보다 별로였다고 평한 장재인의 점수가 89점이였고, 잘했다고 평한 존박의 점수가 89점이였다. 응?

K2 방송 종료 직후인 2010년 11월 15일 음주운전을 하다가 걸려 K3에 합류할지 여부가 불투명해진 적도 있었지만, 어찌어찌 K3에 합류했다. K3에 오면서부터는 '특유의 독설'이 많이 사라진 컨셉으로 과거에 비해선 부드러운 평가를 했는데, 독설 안 하니 재미 없어졌다고 되레 다시 해달라는(...) 일부 네티즌들도 있었다.

K4에선 가끔 잉여력이 대폭발했는데 대표적으로 이승철 관련 가장 유명한 짤방이라 할 수 있는 어서 와 장면이 나온 시리즈이기도 하다. 그 외 참가자 김민준이 김광진의 편지를 부르자 "야 노래 좋다. 그거 누구 노래냐?"라고 하여 옆에 있던 싸이를 당황시키기도 했다.

K5는 시리즈 자체가 역대 최악의 시리즈였다는 혹평을 받고 걍 잊혀졌다. 그래도 지나치게 낮은 점수와 혹평, 막말로 논란이 되었던 이하늘과 지나치게 점수를 퍼 주었던 윤종신에 비하면 정상적인 심사위원였다는 평..

K6에도 출연했다. 그래도 K5보단 성공해서 체면치레는 한 셈. 그리고 빠졌다

K7에서는 이승철이 빠지고 성시경으로 교체되었다. 뉴스룸에서 본인이 밝힌바론 다년간 심사위원을 하면서 독설을 내뱉다보니 '넌 얼마나 잘부르나 보자'(...)라는 일부 시선이 부담도 좀 됐고, 그래서 월드투어도 하는 김에 좀 더 콘서트 무대에 집중하고 싶어서 하차했다고. 이후 라디오스타에서 밝히길 원래 자기 계약은 K5까지였는데, K5가 폭망해서 그래도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단 생각에 K6까지 출연했는데 K6는 그래도 제법 괜찮게 끝나서 하차했다고.

참고로 슈스케2, 슈스케3에선 마지막 엔딩에 '그 사람' 등 항상 이승철의 노래가 삽입되어 화면에 흘러나와 탈락자의 슬픈 감정을 더욱 증폭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슈스케4 마지막 결승전에선 이승철이 직접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완창한건 아니지만 생방송에 진출했던 모든 참가자들이 이승철 노래 '아마추어'를 부르는 이벤트가 있었다. 그런데 우스갯소리로 이 때 이승철의 노래에 감동한 시청자들이 결승전 문자투표에 이승철이라고 보낸(...) 경우도 꽤 있었다고 한다. 이승철과 아마추어 참가자들의 차이를 실시간으로 모든 시청자들이 느끼게 된 케이스.

5. 김태원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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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특히 김태원)과의 관계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나쁘기만 한 것이 아닌 복잡한 애증관계로서 그의 인생사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 얄궂게도 김태원의 음악을 가장 잘 표현하는 보컬은 이승철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기 때문에 더더욱 이 둘의 관계는 미묘함과 아쉬움으로 점철 돼 있다.[50]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주제로 간혹 팬들 간 키배가 벌어지는 것을 보면 둘의 관계는 그야말로 음악팬들에게 거대한 떡밥. 기억과 증언으로만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시기에 벌어진 일이기도 하고 서로에 대한 직접적인 비난을 삼가고 있는 만큼, 각자의 팬의 시각과 해석이 강하게 반영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더더욱 불타는 주제기도 하다.

부활이 처음 찢어질 때도 밴드 내 알력 다툼으로 인한 잡음이 있었고[51], 이후 8집으로 다시 뭉쳐 활동할 당시에도 이승철이 팀명을 '부활'이 아닌 '이승철 with 부활'로 쓰는 바람에 둘이 또다시 결별하는 계기가 됐다. (정확히는 공식활동이나 공식명은 부활이었지만 이승철의 개인활동에서 저런 이름을 썼다.) 부활을 거쳐갔던 보컬들 중에서도 유독 인기가 있고 솔로로도 꽤 오랜 기간 성공했던 경험이 있는 이승철이라 개인보단 밴드가 우선이라는 식의 이상주의적 성향이 있던[52] 김태원과 부딪히는 것은 어찌보면 예정된 수순이라 할 수 있었다.

과거에는 서로의 말에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며 받아 치는 경우도 간혹 있었지만, 현재는 서로의 관계가 끊임없이 따라 오는 운명 같다며 거의 해탈한 경지. 그리고 이후에도 아예 연락을 끊은 정도는 아닌 듯 하다. 위 사진처럼 김태원의 삶을 조명한 2010년 12월 드라마 '락락락'의 기자회견장에 나타나 김태원과 웃으며 악수하는 등 나름 화목한 모습을 보여줬다.[53] 이승철의 말로는 본인과 김태원의 관계는 세간의 인식처럼 견원지간은 절대 아니고 가끔씩 연락도 한다고 하며[54], 김태원도 이승철과의 좋았던 추억을 나름 훈훈하게 증언하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시간이 지나 감정이 많이 누그러 지고 서로의 성격 차이도 이해하기 때문에 최소한의 인연의 끈을 유지하고 있다고 봐야 할듯.

두 사람 다 겪어본 부활 드러머 채제민에 의하면 서로 굳이 연락은 하지 않지만, 마주친 자리에선 잘 지낼 수 있는 사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서 지금은 만나지 않으면 싸우지 않는 걸 깨달은 사이.(...)

6. 사건 사고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989년 10월, 대마초를 피운 혐의로 구속되어 보석금을 내고 빠져나왔으나 1990년 10월에 다시 대마초를 피우다 적발되어 구속되었다. # 이 사건으로 1991년 2월 상습적 마약복용으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아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 재미있는 건 이후 이승철이 2000년대 예능 무릎팍도사에 나와 당시 신해철[55] 100분 토론 같은 곳에서 주장하던 대마초 비범죄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강호동이 물어보니, '걔 미쳤나 봐'라는 식으로 우스갯소리를 했다는 것이다.

1996년 9월 전부인 강문영씨가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부인을 치료하려고 부축하던 의사를 갑자기 이유도 없이 폭행하고 전치 4주의 피해를 입혀 고소당했다. #

2010년 10월 음주운전으로 불구속 입건되어 면허취소 당했다. #

2014년 11월 9일 일본에서 입국거부를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 일본 출입국 관계자는 대마초 경력을 문제 삼았지만, 이승철 본인은 과거 일본에 별 문제 없이 드나들다가 갑자기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독도에서 열었던 음악회 때문에 일종의 괘씸죄가 적용된 것 아닐까 하는 주장도 했다. 이에 정부에서는 일본 대사를 불러 입국거부 사태에 대해 항의했다. # 이후 이승철은 한일관계가 개선되길 바란다고 밝히며 독도 콘서트에서 불렀던 통일송 '그날에'를 12일 네이버 블로그를 신설하고 무료로 배포했다. 해당 블로그.

7. 기타

의외라면 의외로, 이승철의 대신고 1년 선배인 이태윤 말에 의하면 대신고 시절 별명이 "대신고 댄싱머신" 이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 높은 인기에 힘입어 1992년 박찬욱 감독의 데뷔작달은… 해가 꾸는 꿈이라는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는 감독의 의사와 관계없이 '당대 인기있는 (지금으로 치면 일종의 아이돌) 스타를 주연으로 해야 영화가 흥행할 것'이라는 제작사의 입김이 들어간 캐스팅이었고[56] 박찬욱 감독의 자서전 등에 따르면 이승철이 열의는 있었는데, 워낙에 스케줄이 바쁘다 보니 촬영장에 오긴 왔는데 그 날 뭘 찍는지도 모르고 왔다고 하며 그나마도 목소리는 다른 사람이 후시녹음했다.[57] 그리고 이승철 말에 의하면 개봉 첫 날에는 극장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등 상당히 흥했다고 하는데, 결과적으론 쫄딱 망했다고 한다.[58] 박 감독 본인도 흑역사로 생각하는지 모 인터뷰에서 시간만 되면 이 영화 비디오를 전부 다 없애버리고 싶을 정도라고 농담 삼아 말한 적이 있다.

작사, 작곡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싱어송라이터는 아니지만, 신인 작곡가들을 기용하면서 대중의 트렌드를 꾸준히 쫓아간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인연' 등처럼 본인이 직접 작사한 곡도 있긴 하다.

과거 싸이월드가 유행할 때, 방명록에 댓글을 일일이 달아주는 편이었다. 심지어 민감한 부분을 건드려도 '허허' 웃거나, 맞대응해줬다. 귀찮지 않냐는 물음에 투데이 두자릿수 찍는 것보다는 낫다고 답했는데, 이에 사람들은 멘탈甲 승철신이라는 별명을 선사했다.

이승철 노래의 특징이 듣기엔 편안해보여 부르기 쉬울 거 같은데, 정작 불러보면 목 막히는 경우가 많다 보니, 이승철이란 이름에 대비하여 저승철이라는 별명도 일각에선 쓰인다.

이수만과도 친분이 있으며 이승철의 노래 소녀시대를 그 노래와 이름을 이수만이 빌려가서 걸그룹을 만들고 그 걸그룹이 그 노래를 리메이크하도록 해줬다.

알고보면 일전부터 기부 등 금전적 선행을 꾸준히 한 편이다. 아프리카 지역의 학교 설립에 30억을 쾌척하기도 했고, 100여명의 심장 질환병이 있는 아이들을 돕기도 했다.

2006년 12월 16일 무한도전에서 박명수유재석이 이승철에게 전화를 많이 못 하는 이유로 "어? 어어어...그래...어어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거 때문이라고 밝혔다. 질문이 이어져야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는데 대답만 간단히 해 무안해진다고 한다.

이승철의 음원을 두 키 낮춰서 틀면 박명수의 목소리가 나온다. 말이 필요없다. 들어보자. 말리꽃 음원 다운. 박명수가 이승철의 노래를 모창하면서 노래연습을 했기 때문에 어찌 보면 이상할 것도 없다. 때문인지 유튜브 영상 중엔 상기된 이승철 노래 2키 낮춘 영상을 박명수가 부른 노래랍시고 제목 낚시를 하는 영상도 있다. 웃긴 건 진짜 속아서 박명수가 이렇게 노래 잘했냐고 감탄하는 사람도 종종 있다는 것. 반대로 박명수의 음원을 두 키 높혀서 틀면 이승철의 목소리와 비슷해진다. 실제로 라디오 방송본인 유튜브에서 불렀다. 반응은 목소리에 똥과 꿀이 공존한다는 평이다.

2010년대 나는 가수다가 처음 방영될 때 부정적인 의견을 비췄으나, 입장을 바꿔서 "나가고 싶다"라고 언급을 하였다가 다시 입장을 바꿔서 "노래자랑질"하고 싶지 않다고 언급했다. 당연히 까였다. 본인 왈 25년 음악 인생을 그런 콘테스트에 나가서 테스트 받고 싶지는 않다고. 이걸 두고 슈퍼스타K의 심사위원으로서 다른 사람의 음악 인생을 평가하는 입장에 있는 게 모순이 아니냐는 견해도 있지만 전문성을 지닌 음악인으로서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것과 나가수의 청중평가단 시스템을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일부에선 대중 음악가로서 이승철은 대중들에 의해 평가가 결정되는 운명을 갖고 있으며 그런 대중의 평가를 불신하는 것이 오만하다고 비판하기도 했지만, 가수들을 일렬로 경연시킨 뒤에 100여명이 채 안되는 청중들의 일시적인 호오의 감정에 따라서 탈락자를 추려내는 나는 가수다의 시스템이 어떤 대중 음악가의 성과를 제대로 반영할 수 있는 잣대가 될 수 있느냐에 대한 의문과 함께, 차라리 이승철이 지금까지 낸 히트곡의 숫자를 세어보는 게 더 정확한 평가가 될 것이다라고 반박하는 의견도 있었다. 다만 당시 이승철은 그런 걸 떠나 말 바꾸기 때문에 비판받은 측면도 있었다.

나가수 발언으로 욕을 먹긴 했지만, 임재범이 한창 나가수에서 활약할 때 디씨에선 '임재범vs이승철'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8~90년대에 1~20대들이 할만한 논쟁을 21세기에 네티즌들이 다시 한 셈이다. 실제 둘은 지금도 시대를 대표한 보컬 레전드로 묶이고 있는데, 사실 음색이 미성과 허스키로 원체 달라 라이벌보단 그냥 둘 다 들으면 좋은 보컬 레전드에 더 가깝다.

보통 인기를 얻고 어느 정도 위상이 쌓이면 방송 활동을 접고 콘서트에만 집중하는 많은 가수들과 달리, 워낙 수다떨기를 좋아해서인지(...) 젊은 시절부터 상대적으로 방송이나 예능 출연이 잦은 편이다. 2016년 라디오 스타에서 밝히길 청취률 순위 1~20위권 라디오 방송을 전부 꿰고 있으며 '일기장' 홍보를 위해 모두 출연할 예정이라고 한다. 실제로 전부 나가진 않았지만 두시탈출 컬투쇼, 배철수의 음악캠프 같은 인기 방송은 물론이고 김현정의 뉴스쇼 같은 아침 뉴스까지 다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초창기 시절 자신의 보컬을 부끄러워하는 듯한 발언을 방송에서 몇 차례 하기도 했다. 누군가를 따라하기만 하던 시절이라고 평하기도 했다.[59] 1집 수록곡인 '인형의 부활'도 본인이 듣기엔 부끄러웠는지 수줍어하는 모습을 한 연예 정보 프로그램에서 보이기도 했는데 '태원이형이 목 긁고 기합 좀 넣고 그러면서 불러보라고 자꾸 시켜서 막 악써서 불렀던 곡이었어요'라고 하기도 했다. 실제 이승철은 데뷔 초만 해도 자기가 노래 못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60]

1990년대 당시 최고의 인기를 달리던 탤런트 강문영과 결혼해서 스타부부로 인기를 얻었지만 얼마 못 가 이혼했다. 이후 강문영은 한 잡지 인터뷰에서 '그는 나와 결혼하였지만 사실 이미 음악과 결혼한 상태였다.'는 발언을 했다. 이승철의 가정에 대한 무관심을 표현했던 것으로 보인다.[61]

와인 애호가다. 2016년 마리텔김구라 와인 편에 나와 말한 바에 의하면 1990년대쯤부터 마시기 시작했는데, 이때만 해도 와인 가격이 물가 대비 워낙 비싼 편이라 "꼴값 떤다, 재수없다"는 인식이 좀 있었는데 요즘에는 와인에 대한 수요가 굉장히 많이 늘었다고 기뻐하기도 했다.

과거엔 담배도 피웠지만, 2000년대 접어들면서부턴 10년 넘게 금연 중이라고 한다.

본래 앨범만 나오면 불교식 기원도 지내고 이승철 본인이 다니던 주지에게 가장 먼저 앨범을 주고 본인 콘서트에 스님은 공짜(!)라는 이색 이벤트도 하던 불자였으나, 크리스천인 지금의 아내를 만난 후 가족은 같은 종교로 뭉쳐야 한다는 생각에 개종했다. 아내, 아이와 함께 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있으며, CCM리메이크해서 부른 곡들도 제법 있다. 나중에 라디오 스타에서 개종한 얘길 하며, 곡 홍보 활동을 위해 불교방송에도 매니저가 갔는데 그곳 관계자가 "이승철씨 개종하지 않았어요?"라고 물어 그렇다고 하자 불교계의 큰 손실이라고 했다고 한다.[62]

2016년 데뷔 30주년을 맞이했다. 이에 앞서 2015년 5월 29일 인터뷰 영상과 2016년 6월 9일 2번에 걸쳐서 SBS 나이트라인 초대석에 출연하여 인터뷰 하였으며영상, 9월 26일 30주년 소감에선 이제 음악이 뭔지 알아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사실 40주년, 50주년 하는 선배님들도 있는데 30주년이라고 거들먹거리는 것 같아 뭔가 부끄럽다고 한다. 이후 MBC에서 30주년 기념 콘서트를 그의 인터뷰와 함께 녹화 방영해주었다.

2018년 5월에 방탄소년단빌보드 200차트 1위를 하자 "앞집 주민으로서 플래카드 붙여야 하나?"며 자랑스러워했다.#

2018년 후반 성대 폴립 제거 수술을 했다고 밝혔다.

2019년 10월 25일부터 신상출시 편스토랑에 평가단 자격으로 출연했다.

2020년 11월부터 2021년 1월까지 방송한 엠넷의 오디션 프로그램 캡틴에 심사위원으로 출연, 슈퍼스타K6 이후 6년 만에 엠넷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나오게 되었다.

2021년 7월 15일부터 우리가 사랑한 그 노래, 새가수에 심사위원으로 출연했다.

한 인터뷰에서 가수김현식을 스승처럼 생각한다고 밝힌 바 있다. 직접적으로 가르침을 받거나 조언을 들은 적은 없지만 그의 음악을 듣고 카피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2023년 심형탁 결혼식에 하객으로 참석했다가, 심형탁이 이승철의 곡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를 부르다 감정에 북받쳐 울음을 멈추지 못하자 '그만 울어'라며 본인이 대신 불러줬다. 어쩌다보니 축가를 한 셈.

2024년, 예능 미우새에 스페셜 MC로 출연해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않고 다 쓰거나 기부하고 죽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딸들에게도 유산 대신 유학은 보내주겠다며 공부는 원없이 시켜줄테니 이후엔 알아서 살라고 했다고.#

가수 이승철의 외조부가 대신고 설립자이며 큰외삼촌은 대신고 교장, 작은외삼촌은 중학교 교감, 부친은 대신고 학생주임, 모친은 대신고 서무과 직원이었다. 설립자 손주라고 점심시간 때 학교 밖에서 짜장면을 사먹거나 친구들과 외출도 하는 등 특권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승철이 재학시절 다른 고교들은 9교시까지 하는 반면 수요일은 5교시 수업만 해서 수요일이 토요일 같았으며 시장에서 어묵 먹고 소주 한 잔씩 마셨다고 밝혔다.

8. 표절 논란

본인이 불렀던 여러 곡들이 표절 확정 혹은 표절 의혹을 받았다. 다만 알아둘 것은 이승철은 싱어송라이터가 아니며, 아래 언급된 곡들 역시 대부분 이승철이 작곡한 곡이 아니라 본인이 부른 곡일 뿐이다. 유일하게 본인이 작곡했다고 실린 '친구의 친구를 사랑했네'도 등록 형태가 문제인거지 이미 리메이크곡임을 여러차례 밝혔다.

9. 개인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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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대표곡

개인 앨범의 대표곡들과 부활 앨범으로서의 대표곡 포함.

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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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0년대 들어 성북동 재벌촌의 단독주택으로 이사하였다. 이승철의 표현에 따르면 맨해튼에서 뉴저지로 이사한 기분이라고. 여담으로 이전 거주한 한남더힐 전에는 분당구 이매동 아파트에 거주했다.[2] 본인은 자기 같은 체형을 마라도나 몸매라고 디스하고 다닌다(...).[3] 현 부인과 전 남편 사이에서 태어났다.[4] 미국에서 태어난 시민권자. 2019년 크리스마스 콘서트에서 차녀와 함께 팝송 You raise me up, Someday at Christmas를 듀엣으로 불렀으며, 한 인터뷰에선 이승철이 '원이는 기도를 영어로 한다'라고 자랑한 적도 있다. 늦둥이라 이쁜 모양.[5] 제72보병사단 전투방위 출신, 일명 송추방위.[6] 현재 폐교되었다.[7] 現 혁신공과대학.[8] 결혼(정확하겐 재혼) 후 아내를 따라 개종했다. 한 인터뷰에선 재혼 후 낳은 딸인 원이가 기도하는 것도 영어로 한다고 자랑을 늘어놓기도 했다. 참고로 여배우 강문영과의 초혼은 사찰에서 치러졌으며, 당시의 이승철은 독실한 불자였다. 다만 개종한 것과는 별개로 어머니 제사는 모신다고 한다.[9] 매니지먼트 업무 등을 제외하고는 전국투어 콘서트를 비롯하여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다.[10] 불후의 명곡에서 밝혔다.[11] 1985년 언더그라운드 무대에서 활발하게 공연 활동을 했지만 1986년 부활 1집 앨범이 나오기 전에 탈퇴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상당수 대중들은 이승철이 부활의 1대 보컬인줄 아는 경우가 많다. 탈퇴한 이유는 매니저와의 불화 때문이라고. 다만 김태원이 김종서가 시나위로 잘된 이후에 라면 박스 들고 부활 숙소 놀러오기도 했다는 거 보면 멤버들과의 불화는 없었던 듯 하다. 실제로 부활을 떠나고 잘됐는데 질투 같은 건 없었냐는 질문에 부활보단 시나위의 음악과 더 잘어울려서 여러모로 잘됐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하기도 했다.[12] 부활 초기 멤버 이태윤의 고등학교 후배이기도 했다.[13] 이승철이 김태원에게 처음 인정받은 노래가 딥 퍼플의 Soldier of Fortune이라고 알려져있는데, 사실 처음 부른 노래는 송골매어쩌다 마주친 그대라고 하며 Soldier of Furtune은 얼마 지난 후에 불렀다고 한다. 2003년에 부활 8집 발매 이후 가진 콘서트에서 김태원과 이승철이 Soldier of Fortune을 콘서트에서 부르면서 앞 멘션을 통해 이 곡을 둘이 처음 만났을 당시에 가장 처음 불렀던 곡처럼 말하기는 한다. 이 라이브의 멘션 때문에 Soldier of Fortune이 오디션 첫곡인 것처럼 알려진 듯. 공연 멘션을 재밌게 하려다보니 이런 멘션이 나온 듯하다.[14] 다만 그 당시 밴드는 투자 같은 걸 해주던 소속사 없이 마음이 맞는 멤버끼리 뭉쳐서 시작하는 방식이 대다수였으므로 각자의 돈으로 본인의 장비를 준비해서 공연을 다니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고(게다가 부활 이전 김태원 언급 등을 보면 당시 밴드마스터가 돈 들고 날라 돈 대신 악기를 카바레 업주에게 뺏기기도 하는 등 고생이 꽤 있었다고 한다), 같은 맥락으로 이승철도 보컬로 참여하려면 본인의 마이크와 스피커를 준비해야 했던 것이다. 신디사이저도 사들고 갔다고 한다. 하여튼 당시 매니저의 회고록에 따르면 총 40여만 원의 장비를 구입했다고 하는데, 당시 이 돈은 20대 초반 사회인에겐 제법 큰 돈이긴 하지만 교사의 한달 월급보단 못한 돈이기 때문에 연봉 드립은 이승철이 착각했거나 예능상 과장한 측면이 있어보인다. 아니면 당시 이승철 본인 연봉을 가불한 모양.[15] 밴드 자체는 디엔드로 1984년부터 시작되었고, 본격적인 앨범 준비는 1985년부터로 부활이란 팀명도 이때 갖게 되지만, 85년 말 이승철이 합류해 1집 앨범이 발매된건 1986년이다.[16] 이승철이 살이 찐 시절 모습을 기억하는 팬들은 이승철이 미남이라고 하면 의아해하기도 하지만, 체중 관리 적당히 하고 패션과 헤어스타일 등에 신경을 쓴 이승철은 미남이다.[17] 이런 상황에 대해 훗날 김태원은 질투는 하지 않았다고 본인 유튜브 채널에서 증언했다. 다만 한 명에게 인기가 몰리는 것이 밴드 관점에선 좋지 않았다는 첨언도 덧붙였고, 부활 해체 이후에 '더 게임'이 이승철을 겨냥한 작명이었다고 하는걸로 보아, 그 당시에는 어느 정도 경계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18] 1987년 2집 발매 이후 활동 도중 김태원이 교도소에 들어갔고, 팀 활동이 불가능해지며 해체를 선택했다.[19] 이는 이후 당시 매니저였던 백강기씨가 본인의 블로그에서 부활을 해체하면서 더이상 부활이라는 밴드 이름은 쓰지 않고, 김태원은 '더 게임'으로(훗날 2020년 김태원이 유튜브 채널 김태원클라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하도 당시 상황이 안 좋다보니 자기를 떠난 이승철과 게임한다는 심정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불순한 의도가 섞여있었기에 당연히 앨범이 잘 안됐던 것 같다고 자조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승철은 솔로로 활동하기로 합의봤다라고 포스팅한 바 있다. 합의가 이루어진 것 자체는 사실이라고 봐야 할듯. 단, 이승철은 손무현과 '걸프렌드'라는 그룹을 결성했다가 이후에 솔로로 데뷔했고, 김태원도 2집 게임이 망하고는 3집부턴 다시 부활이란 이름을 쓰게 된다.[20] 그리고, 대마초 혐의로 구속된 뒤 보석으로 풀려난 뒤에도 끊지 못하고 다시 상습적으로 약을 했다가 다시 재범으로 구치소로 끌려가게 되었는데, 일명 똥꼬쇼(...)라고 불리는 치욕적인 신체검사를 당한 이후가 되어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독하게 약을 끊게 되었다고 한다.[21] 김재기는 3집 녹음 도중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고, 동생인 김재희가 보컬 자리에 들어와 3집 활동을 했다.[22] 2002년 재결합 활동 당시 이승철이 콘서트와 방송에서 커버한 적은 있다.[23] 당시 부활 보컬이었던 이성욱은 훗날 예능 남자의자격에서 밝히길, 아내에겐 본인의 의지로 밴드를 떠났다고 했지만 사실은 이승철의 합류로 자신이 잘린거라고 밝혔고, 김태원도 당시 자신이 재물에 눈이 멀어 리더로 이성욱을 탈퇴시켰다고 방송 내내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시 미사리 라이브 카페촌에 가면 부활 출연이라고 써놓고 이성욱만 출연하는 곳이 있었는데, 김태원이 부활만 보고 시시비비를 따지러 들어갔는데 부활 이성욱이라고 써져있는 모습을 보곤 미안함에 사용하세요 하고 나왔다고 한다.[24] 참고로 이때 이승철은 부활 '객원 보컬' 겸 8집 '제작자'였다. 즉, 일종의 사장이었던 것. 때문에 수익도 이승철이 일단 다 거둬들인 후 멤버들에게 분배하는 형태였다고 하며, 이른바 '이승철 with 부활'도 이런 시각차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25] 90년대 이승철은 대마초 사건 등으로 방송 활동을 꾸준히 하지 못했고 앨범도 생각보단 적게 냈다. 그와중에 노래도 '방황'이나 '오늘도 난'처럼 기존 발라드 문법과는 좀 떨어진 댄스풍의 노래를 타이틀곡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26] 물론 세월에 따른 기복은 어쩔 수 없다. 결국 후술되어있듯 이승철도 2018년 성대 폴립이 생겨 수술을 받게 된다. 그래도 관리를 나름 잘했는지 2020년, 55세의 나이에 발매한 신곡 ‘내가 많이 사랑해요’ 같은 노래에서도 A4~C5에 이르는 고음역으로 도배된 악보를 무리없이 소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27] 오히려 김연우는 그렇게 목 관리 한다는데도 나가수 이후 콘서트량이 늘어서인지 어느 순간 성대가 나가 한동안 공연 자체를 못한 적도 있었다.[28] 오늘날 믹스보이스 등으로 표현되는 현대 실용음악의 주류적 발성법은 미국의 유명 보컬 트레이너 세스릭스가 책을 펴내고 인터넷 시대가 도래한 2000년대 이후에나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묘하게 이승철이 발성적으로 변화를 추구하기 시작한 것도 이무렵 전후 쯤부터. 물론 나이가 들면서 스스로 터득해 바뀐 것도 있을 것이다. 비와 당신의 이야기 부활 1집과 8집 버전을 비교해보면 창법 변천사를 어느정도 알 수 있다.[29] 물론 그렇다고 이승철이 타고난 능력만 믿고 연습을 안한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연습은 기본인거고, 노래로 돈 벌어먹고 살 정도의 재능은 어느정도 타고나야 된다는 것을 강조한 것. 예를 들어 음색, 성종, 성량 같은 부분이 그럴 것이다. (그나마 성량은 마이크 기술의 발달로 예전보단 한계가 줄어들었다.) 그 외 박자감이나 리듬감, 음압, 음정 정확도 같은 부분은 연습 고하에 따라 늘릴 수도 있는 부분. 음역은 제대로 된 방법으로 연습하면 늘릴 순 있는데 어느 정도 늘릴 수 있냐는 개인차가 있다.[30] 김태원에게 하도 된소리 발음을 한다고 지적을 받아서 힘을 빼고 발음하던 것이 굳어졌다고 한다. 예를 들자면, 네버 엔딩 스토리의 후렴구는 고음 구간에 발음하기 어려운 ㅡ, ㅣ가 유난히 가사에 많이 나온다. "만나게 되 영화와 같은 들이"(2옥타브 라♯(A♯4)), "대이기에"(2옥타브 솔♯(G♯4)) 등. 이승철은 이 구간을 본인만의 스타일로 맛깔나게 부른다.[31] 하지만 지금은 20초 하기도 힘들다고. 다만 과거에도 보통 한 2~30초 정도 내질렀다. 2002년 부활 콘서트에서도 30초 정도 끌었다. 폐활량은 키우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사실 들이는 노력에 비해선 성악가나 일반인이나 큰 차이는 없다고 한다. (물론 아예 없다는건 아니다.) 얼마나 효율적으로 쓰느냐의 차이다.[32] 다만 약고음의 경우 처음부터 쓴건 아니고 90년대부터 부분적으로 쓰기 시작하다 2000년대 들어 정착한 케이스. 2004년 '신의 질투'를 들어보면 알 수 있다. 이전까진 오히려 타고난 성대와 피지컬을 믿고 지르는 스타일에 가까웠는데, 사실 취향차라 이때를 더 선호하는 케이스도 있지만 발성적으론 약고음이 더 희소성 있기에 이를 따라하려는 사람들도 많다. 다만 그렇다고 약고음만 파거나 선천적 피지컬 능력만 믿고 발성 훈련을 등한시하다간 오히려 강하게 질러야 할 곡은 나이가 들수록 못부르게 되거나 성대가 상할 수도 있기 때문에 결국 둘 다 연습하는게 좋다고 할 수 있다.[33] 물론 진성 기준이고, 가성으로는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3옥타브 중반까지도 부드러운 반가성이 가능하다. 또 ‘소녀시대’같은 화끈한 록 곡에서는 A5(3옥타브 라) 샤우팅을 보여주기도 했다.[34] 이 문단에서 언급하는 “목이 막히지 않고 가능한 음역”이란 2옥타브 시 정도까지라는 의견도 있다. (다만 2020년 발매한 '내가 많이 사랑해요'에선 성대 수술 덕분인지 최고음 3옥타브 도(C5)도 찍긴 했다.) 그리고 2옥타브 초반부터 후두의 높이가 올라가는 경우에도 대략 2옥타브 시까지 음색을 잃지 않고 낼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이승철의 성대가 좋다는 것에 대한 반증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테너 그것도 수위권 테너의 성대를 갖고 있다고 추정된다. 보컬트레이너 박선주도 그녀의 책에서 이승철이 일반인들보다 높은 성대를 가지고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 헌데 이런 미성들은 보통 성량이 빈약한 경우가 많은데, 이승철은 성량도 꽉 차있다는게 장점.[35] 목에 무리가 가지 않게 발성할 수 있는 음역.[36] 이 경우 모음 순화, 발성 교정 등의 과정을 거치며 보컬의 개성이 줄어들 수도 있다는 리스크가 존재한다.[37] 반대로 한 키를 낮추는 경우도 간혹 있다. 서태지의 7집 수록곡 10월 4일이 그 예인데, "앨범 전체가 한 곡처럼 들리도록 했다"라는 말로 보아 앞뒤의 곡과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려고 한 걸로 보인다.[38] 다만 당사자는 나가수 당시, 프로 가수의 라이브를 대중들에게 평가 맡길 순 없다는 식의 이유로 출연을 고사했는데 이게 모순된다는 지적도 있으나, 사실 나가수 대중이란건 결국 100여명 남짓한 관객들이라 관련 전문가의 평이나 음반이나 음원, 콘서트 동원력 등으로 평가받는 것하곤 좀 다르긴 하다.[39] 사실 느낌상 반가성이라고 칭하는 것일 뿐이지, 성대가 붙는 것 자체가 이미 진성이긴 하다.[40] 마이크와 입 간의 거리를 조절하기도 한다.[41] 다만 이 부분은 절친 신승훈이 농담 삼아 디스를 한 적이 있는데, 본인노래가 끝나고 여운을 주지만 이승철은 성격이 급하다보니 바로 웃으면서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해서 감동을 깬다고 한다.[42] 예를 들어 앞서 언급됐던 헤비메탈의 경우 크래쉬의 보컬 안흥찬 등이 소위 네임드인데, 이런 보컬들은 헤비메탈로 딱히 분류하지 않는 한 대중평론가들이 언급하는 보컬 순위 같은 곳엔 언급도 잘 안 된다. 대중성이 극도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한편, 가수 성시경이 2020년대 초반 본인 유튜브에서 보컬 순위 따위에선 잘 언급되지도 않는 쿨의 이재훈을 한국에서 가장 노래 잘 하는 사람 중 하나로 생각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80, 90년대는 물론 00년대까지도 인터넷 아마추어 평론가들이 주로 보는 가창력 기준은 사실 이승철과 잘 부합하는 미성 락발라드류가 많았다. 때문에 이재훈과 같이 히트곡이 제법 있는 대중성 있는 가수도 보컬적으론 팝과 댄스 장르를 한다는 이유로 가창력 순위에선 거의 언급도 안해줬던 것이다. 반면 성시경의 경우 아마도 그의 장르가 팝발라드 장르이기 때문에 쿨의 이재훈을 고평가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43] 다만 이게 역으로 비교적 안전한 길만 걷는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이승철 본인은 2014년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대중가수'가 잃지 말아야 할 자세로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가 아닌 대중들이 듣고 싶어하는 노래를 하는 것"이라는 취지의 말을 한 바 있는데, 때론 일부 음악가들이 예술가 모드에 너무 심취해 대중성과 멀어지기도 하는데 반해, 이승철은 이런 부분에선 장사꾼이냐는 식의 일각의 비판은 받을지언정 나름의 소신을 가지고 유연한 자세를 보인다고 볼 수도 있다.[44] 2010년대 초중반까지도 음악평론가나 실용음악과 학생들 설문조사에선 이승철이 거론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45] 재미있는건 오늘날에도 이 둘은 라이벌처럼 엮인다는 것이다. 물론 둘의 음색부터가 미성과 허스키로 원체 차이가 나서 라이벌보단 걍 둘 다 들으면 좋은 보컬 장인들이라고 보는게 더 맞을듯. 서로도 서로의 보컬을 호평해서, 임재범은 상기했듯 이승철을 매에 비유했고, 이승철도 자긴 전달력이 좋은거지 목소리는 임재범같은 목소리를 가지고 싶었다고 인터뷰한 적도 있었다.[46] 다만 당시에도 부활 특유의 락발라드풍 노래로 인기를 끈 것이지 하드락과는 크게 대중적 접점은 없었다.[47] 약고음시에도 허스키가 함께 묻어나오는 편.[48] 이승철 왈 김태원 형이 요구해서 하긴 했는데 본인은 그 목소리 별로 안좋아한다고 훗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49] 80년대 이전 데뷔가수는 1위 조용필, 2위 송창식.[50] 상당수 부활 팬들은 밴드를 두번이나 탈퇴하며 팀을 위기로 몰아넣은 이승철을 원망하면서도, 다시 한번 부활에서 이승철이 노래 부르는 것을 바라는 모순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만 봐도 김태원과 이승철 간 관계가 얼마나 복잡한 것인지 가늠할 수 있다.[51] 다만 김태원은 이때 해체가 본인의 문제, 즉 대마초 복용으로 인한 구속이 계기였다고 인정했다. 이승철이 거의 모든 인기를 휩쓸어 가면서 밴드 내에서 목소리가 커진 것도 사실이지만 본인의 입건으로 인해 밴드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 결정적이었다고 보는 듯. 사족으로, 김태원 왈 초창기엔 둘이 사귀냐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꼭 붙어다녔다고 한다.[52] 그 외 김태원은 부활 보컬들을 혹독하게 녹음시키기로 유명한 프로듀서이기도 했다. 박완규 등도 학을 뗄 정도. 그나마 2000년대 이후엔 좀 느슨해졌다고 한다.[53] 헌데 이때 이승철이 음주운전 때문에 자숙하고 있을 때라, 당시 멘토로서 대중들의 인기를 얻던 김태원과 함께 하는 모습으로 나쁜 여론을 희석시키려 한다는 일각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54] 김태원은 본인 유튜브 채널에서 8집 활동, 즉 2002~2003년 이후로 만나거나 연락한 적이 없다고 밝혔는데, 이 말은 이승철의 말이나 상기한 2010년의 대면과 상충되므로, 진지하게 정기적으로 만난 적은 이후 없다는 식의 대답이라 봐야 할 듯 하고, 반대로 말하면 김태원 입장에서는 짧은 마주침이나 연락은 딱히 만남이라고 여기고 있지 않는 듯 하다.[55] 부활 팬클럽 부회장 출신이기도 해서 이승철과도 친분이 있었다.[56] 당시에는 이런 사례가 꽤 많았다. 특히 히트곡과 동명의 영화가 제작될 경우가 그랬는데 전문적으로 연기를 배우지 않았음에도 히트곡을 부른 가수가 캐스팅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또 대중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아이돌 스타를 캐스팅해야 더 많은 관객을 끌어모을 수 있다는 판단도 이 배경에 들어간다.[57] 당시까지만 해도 성우로 후시녹음하는게 일상적이었다. 정확히는 동시녹음으로 전환기에 있었는데 이 영화는 워낙 저예산이라 후시녹음이 된 듯. 이승철 본인은 이 후시녹음에 대해서 다소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는데, 영화가 잘 안 된 이유 중 하나로 추정하며 꼽기도 했다.[58] 다만 이 작품은 흥행과는 상관없이 당시 한국 영화로서는 새로운 시도를 한 작품이기도 해서,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류승완 감독이 이 영화를 보고 반해 박찬욱의 제자로 들어가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59] 카더라 통신에 의하면 당시 이승철은 데이비드 커버데일을 동경해 딥 퍼플 곡을 자주 커버했고, 부활 오디션도 딥 퍼플의 'solider of fortune'으로 봤다...고 하지만 상술되어있듯 사실 처음 부른 노래는 송골매의 '어쩌다 마주친 그대'였다고 한다. 김태원은 그에게서 김수철의 비브라토를 느꼈다고 평하기도. 하지만 데이비드 커버데일을 동경했던건 사실이라 솔로 활동 당시에도 방송에서 화이트 스네이크의 곡을 커버하기도 했다.[60] 이건 장르 때문에 실제로 그렇게 느낄 수도 있는 부분이다. 이승철이 언더그라운드에서 밴드 생활을 하던 때는 시나위와 백두산 등을 위시한 강한 사운드를 중심으로 하는 헤비메탈 음악이 유행하던 시기였고, 이 시기의 걸출한 보컬인 김종서나 임재범 같은 보컬들은 이런 강렬한 사운드 사이에서도 무시무시한 성량과 샤우팅을 자랑하며 그 명성을 드높이던 때였다. 이승철은 특유의 배음과 세밀한 감정표현, 완급조절이 특기인 보컬인데, 이런 보컬은 당대 록음악에는 크게 어울리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20대 초반의 어린 이승철이 강한 사운드의 록음악만을 하며, 상대적으로 샤우팅 창법에 능한 보컬들과 자신을 비교하다보면 자신이 노래를 못한다고 느낀 것도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 (그 외 김태원의 프로듀싱 스타일이 원체 보컬을 쪼는 스타일이다보니 자신감이 떨어졌을 수도 있다. 덕분에 더 창법 연구를 하면서 발전한 것도 있겠지만.) 물론 메이저 데뷔 이후엔 이승철의 그것이 더 대중성 있는 창법이다보니 인기스타가 된다.[61] 다만 이후 이승철은 재혼해 지금도 잘 살고 있지만, 강문영은 안타깝게도 다른 남자와 또 이혼해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62] 다만, 2020년 3월 25일 방송된 KBS 2TV '도올학당 수다승철'에서 개신교임에도 자신은 어머니의 제사를 모시고 절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종교를 떠나서 그게 어머니에 대한 예의이고 도리"라고 생각한다고. # #[63] 다만 조성은 차이가 있는데 소리쳐는 내림라장조(D flat major)이며 Listen to My Heart는 라장조(D major)로 소리쳐에 비해 반음이 높다. 다만 Listen to My Heart의 기본 조성은 다장조로 후렴구에만 조바꿈이 이루어졌다. 더군다나 Listen to My Heart의 마지막 후렴구 구간에서는 내림마장조(E flat major)로 반음이 올라간다.[64] 박명수가 모창을 많이 했던 곡이기도 하다.[65] 그래서인지, 2002년 이승철이 다시 부활에 합류했을 당시 윤도현의 러브레터에서 이 노래를 부르면서 도중 눈물을 흘릴 정도로 노래가 비는 구간이 발생하자 김태원이 대신 불러주기도 했다. 이때 이승철이 김태원 사연 때문에 눈물을 흘린건지는 긴가민가한 부분.[66] 이에 대해서 얘기해보자면, 매니저와 소속사 대표 사이에 타이틀곡의 선정에 대한 의견 대립 끝에 결국 소속사 대표의 의견대로 '첫 사랑'을 택하게 되었다.[67] 이 곡은 2018년 드라마 하나뿐인 내편 OST로 리메이크 되었다. 푸른거탑에서도 에피소드 이름으로 쓰였는데, 매 화마다 개그가 넘치는 푸른거탑에서 유일하게 슬픈 에피소드다. 사실 이 곡이 더 유명해진 건 노무현 전 대통령 관련 영상에 이 곡이 쓰였기 때문도 있다. 실제 이승철도 그래서 인기가 더 있었던 곡이라고 언급한 적도 있으며, 2018년 봉하마을 추도식에는 직접 참석해 이 곡을 부르기도 했다.[68]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울면서 가창하는 방송사고를 냈다. 재미있는건 이승철 과거 "1류(가수)는 자기는 아무렇지도 않는데 듣는 사람이 감동하는 것이고, 2류는 본인과 듣는 사람 둘 다 감동하는 것이고, 3류는 듣는 사람은 감동 안하는데 본인만 감동하는 거"라고 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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