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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0 17:14:07

김광진(가수)

<colbgcolor=darkslategray><colcolor=#fff> 김광진
金光辰 | Kim Kwang Jin
파일:김광진 흑백.jpg
출생 1964년 9월 17일 ([age(1964-09-17)]세)
인천직할시 동구
(現 인천광역시 동구)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77cm, 72kg
학력 영화초등학교 (졸업)
송도중학교 (졸업)
제물포고등학교 (졸업 / 26회)
연세대학교 상경대학 (경영학 82 / 학사)
미시간 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영학 / 석사)
가족 5남 2녀 중 막내, 배우자 허승경[1], 슬하 1남 1녀
병역 대한민국 육군 소위 복무만료 (석사장교)
종교 천주교 (세례명: 안드레아)
데뷔 1991년 노래 '그대가 이 세상에 있는 것만으로' 작곡
수상 1994년 가톨릭 문화대상 가요부문 수상
링크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대중음악인
2.1. SM엔터테인먼트 시절2.2. 더 클래식2.3. 개인 음악활동2.4. 음악적 평가
3. 금융인의 면모4. 가족관계5. 스포츠광
5.1. 키움 히어로즈의 열성 팬5.2. 그 외
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한국싱어송라이터. 잘 알려져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한국 가요사에 몇 안되는 밀리언셀러 가수 중 한 명이다.[2]

연세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하여 펀드매니저애널리스트로도 활동했다.

2. 대중음악인

어려서부터 음악을 꿈꿔 왔기에 연세대학교 재학 시절 MBC 강변가요제MBC 대학가요제에 출전했으며 전부 예선에서 광탈했지만 연세대학교 100주년 기념 교내 가요제에서는 동물원의 리더 김창기[3], 안치환을 각각 2~3위로 밀어내고 대상 수상자가 되었다.

2.1. SM엔터테인먼트 시절

1991년 한동준의 '그대가 이 세상에 있는 것만으로'를 작곡하면서 데뷔하게 된다. 동년 1집이 나왔으나 당시 역시 신인이었던 신승훈이 발라드계를 휘어잡았던 시절이라 철저하게 묻혔다. 본인도 이 앨범의 실패가 못내 아쉬웠던지 수록곡 <일보접근>, <멀리 있어도>, <엘비나> 등을 자신의 후기작에서 재취입하기도 했다.[4] 여담으로 당시 그의 소속사는 바로 'SM엔터테인먼트'. 현재 소속되어있는 가수들을 봐서는 믿기 힘든 사실이지만, 당시 사업방향은 아이돌 비즈니스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와 더불어 이수만포크송 가수 출신이라서 그런지 포크와 발라드 음악에 상당한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초기 SM엔 한동준도 있었고, 보아, 동방신기 등 아이돌을 전면에 내세울 때도 직접 추가열에게 찾아가 계약을 했다.

2.2. 더 클래식

그 후 자신과 데뷔 당시부터 키보드와 편곡 등으로 함께 했던 키보디스트 박용준과 함께 그룹 '더 클래식'을 결성한다.

1994년 1집 마법의 성을 발표하였다. 이 음반은 130만장이 팔리면서 초대박 인기를 끌게 된다. 가요톱텐 1위 후보, 삼성전자 CF은 삽입은 물론, 대학생이 가장 좋아하는가요 1위로도 선정되었으며, 수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 커버하였다. [5] 참고로 마법의 성페르시아의 왕자 2: 그림자와 불꽃을 모티브로 만든 노래다. 또 마법의 성 노래와 앨범 제작자는 가수 이승환인데, 아무도 더 클래식 앨범 제작을 안해줘서, 본인이 해줬다고 한다. 그탓인지 이때부터 이승환의 기획사 소속으로 활발하게 활동한다.[6]

1995년 더 클래식 2집에서 <송가>,<여우야>로 또 한 번 사랑을 받는다. <여우야>는 여러가수가 리메이크 했는데, 특히 슈퍼스타K에서 투개월이 부른 버전이, 차트석권을 하면서 인기를 누렸다. 지금도 음악팬들 사이에서 이 앨범은 한국 대중음악계가 다양성과 깊이 면에서 음악적으로 가장 성숙할 수 있었던 90년대가 낳은 웰메이드 가요 명반들 가운데 하나로 회자되고 있다. 특히 이 앨범의 타이틀곡이었던 <송가>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김광진이 쓴 곡으로 팬들에게 애청되기도 했다.

1997년 3집 <해피 아-워>를 마지막으로 해체하고, 1991년부터 시작했던 솔로 활동에 치중한다.
물론 1998년 김광진의 솔로 2집 <My Love My Life>를 비롯한 그의 모든 솔로 음반에서 키보드 연주 및 편곡은 박용준이 도맡아 진행했으므로 팀의 해체로 보기엔 무리가 따른다. 이후 김광진은 솔로 뮤지션 활동과 금융업을 겸하며 간헐적으로 활동했고, 박용준은 건반 세션 활동과 대학 강연을 중심으로 음악 활동을 계속 이어갔다.

2014년엔 무려 17년 만의 신보이자 첫번째 미니 음반 <Memory & a Step>이 발표되었다. 이 때가 더클래식 결성 20주년인 해이다. 1990년대의 주역들인 김동률, 토이 등이 비슷한 시기에 새 음반을 내놓으면서 더 클래식의 신작 역시 많은 매체에서 언급되었고, 이 무렵은 신작 발매 기념 콘서트도 개최해 한국대중음악의 황금기를 기억하는 음악팬들의 주목을 받았다.

2024년에는 더클래식 결성 30주년 기념으로 1994 더클래식 30주년 기념 콘서트를 서울과 부산에서 열었다. 아직도, 더클래식의 음악은 많은 후배가수들의 리메이크를 통해 대중음악계의 클래식 명반으로 알려지고 있다.

2.3. 개인 음악활동

더 클래식 이외에도 여러 가수들의 히트곡을 작곡해 주었는데 대표적인 노래는 이소라의 2집의 기억해줘, 1집의 처음 느낌 그대로, 이승환[7]덩크슛[8], 내게,<Radio Heave>,<흑백영화처럼>,<그가 그녈 만났을때 > [9],<제리 제리 고고>(Jerry Jerry Go Go)"[10], 한동준 3집의 사랑의 서약, 1집의 <그대가 이세상에 있는것 만으로도> 등이 있다.

1998년 자신이 과거부터 작곡해 온 노래를 모아서 타이틀곡의 <진심>이 실린 김광진 2집 《My Love, My Life》를 발표하였다.

2000년에는 또 하나의 명곡 편지가 수록된 3집 <It's Me>를 발표했다. 나는 가수다에서 BMK를 비롯하여 ,많은 가수틀이 커버했다.

2002년에는 동경소녀 [11]가 수록된 4집 《Solveig》를 발표하였다. 슈퍼스타K에서 버스커 버스커가 <동경소녀>를 커버하면서, 대중적으로 재평가는 물론, 많은 인기를 받았다.

2008년 1998년부터 10년간 그가 작업해 왔던 기존 곡들을 새로운 편곡과 함께 세 곡의 신곡과 더불어 수록한 5집 《Last Decade》를 발표했다.

2014년에 더 클래식으로는 17년 만에, 개인 활동으로는 6년만에 컴백했으며 더 클래식은 2014년 10월 13일 미니앨범 Memory & A Step을 발표했다.

2017년 4월 1일 신곡 <지혜>, <배다리>를 발표했다.

생업이 있다 보니 음악 활동에 많은 에너지를 쏟지는 못하는 모양. [12] 하지만 일을 그만둔 이후로는 주로 음악에 집중한다고 한다.

또한 2004년에는 박효신 4집 수록곡 <몰랐죠>, <니가 들려준 말> 등을 작곡 해주기도 했으며 성시경의 곡 <어디에도>도 작곡해 주었다. 2011년에는 슈퍼스타K3에 멘토로써 참여하기도 하고 아이유 2집 《Last Fantasy》에 참여하여 <별을 찾는 아이>라는 곡을 주고 피쳐링도 했다.

2.4. 음악적 평가

보컬이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다는 일부의 의견이 있지만 저음이 두 세배 더 어렵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고음 처리의 매끈함은 따라올 가수가 몇 안 된다.

특유의 어눌함 속에 진정성이 담겨 있으며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멜로디가 돋보인다. 또한 최근에는 화려한 기교가 넘치는 가요계 분위기로 인해 담담함과 진정성으로 노래하는 가수가 없어 김광진의 보컬이 다시금 재평가를 받고 있다. 음악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유재하를 매우 존경한다. 그의 데뷔 앨범에도 유재하에게 헌정하는 곡 <너를 위로할 수가 없어>가 수록되었으며, 1997년에 나온 유재하 추모 앨범에도 더 클래식으로 참여,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을 불렀다. 기교 없는 보컬에 담백한 편곡으로 추모 앨범 수록곡 중 유재하 원곡에 가장 근접한 정서를 담아냈다는 평가다.

싱어송라이터이지만 작사는 그의 아내인 허승경이 하는 경우도 꽤 많다. 그의 가장 대표적인 곡인 <편지>도 허승경의 작품이며, 김광진의 1인 기획사 '캐슬 엔터테인먼트'의 사장이기도 하다.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둔 아빠로 이런 아들 바보, 딸 바보의 심리가 음악에서 표출되기도 했다. <행복을 주는 노래> 뮤비라든가 <유치원에 간 사나이>에서도 접할 수 있다.

정말 동네 회사원 아저씨처럼 외모도 평범하다. 게다가 방송용 의상을 협찬 받아 입는 일도 거의 없다고 한다. 그래서 5년간 얼굴 봤던 이웃에게 이런 굴욕을 당하기도 한다.# 아무리 담담히 적어도 나름대로 상처였는지 열린음악회 출연하면서도 일침을 놓는 소심한(?) 면모도 있다.#
`

3. 금융인의 면모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미시간 대학교에서 MBA 과정을 밟았다. 그리고 펀드매니저 겸 애널리스트로서도 상당히 유명하다.

이미 1995년 더 클래식으로 활동할 때 삼성증권에서 1997년까지 근무하였다. 2001년에는 연예인 최초로 CFA 자격을 취득하여[13] 연예인 재무 분석사 1호로 불렸고, 이듬해부터 자산운용사에 들어가 2010년대에는 동부자산운용의 투자전략 본부장으로 일했다.[14] 이 때문에 취업 시즌 각 대학의 기업 설명회에 종종 등장했다. 특히 모교인 연세대학교에는 100% 확률로 등장해 '마법의 성'을 부르곤 했다. 그리고 자신의 그룹 이름을 딴 '동부 더 클래식 투자신탁 펀드'를 운용하고 있었으나, 2014년경부터 방송과 음악을 위해 그만둔 상태. 이 무렵에 더 클래식을 재결성하였다. 더 이상 금융인으로 복귀할 마음은 없다고 한다.

KBS 해피FM에서 아침 출근길 경제프로인 '김광진의 경제포커스'를 진행했었다. 참고로 이 프로그램의 전임 진행자는 "시골의사"로 유명한 박경철이었다. 2013년 4월 6일 "경제포커스"는 봄 개편으로 종방되었으며, 현재는 박은영 아나운서의 "당신의 아침"이 방송 중이다. 이후에는 변정수의 대타로 2016년 12월에 잠깐 DJ를 맡은 게 가장 최근에 라디오를 맡은 것.

2015년 6월 18일에 진행한 박명수의 라디오쇼에서 일을 그만둔 지 꽤 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주식은 계속한다고 한다.

4. 가족관계

집안이 인천에서 유지로 유명하다. 덤으로 고학력에 의사 집안이기도 한데, 아버지인 김관철 씨는 인천에서 가장 유명한 소아청소년과 의원인 지성소아청소년과[15]의 원장으로 있었으며, 평양의전을 졸업하였다고 한다. 김광진이 어렸을 적에는 인천에 소아과가 2개밖에 없었다고 한다. 김광진을 포함하여 슬하에 5남 2녀를 두었다. 김광진의 형제들도 모두 학벌이 좋으며, 그 중 2명이 의사다. 그 중 김관철 원장의 3남인 김광섭 씨가 현재 아버지를 이어서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로 봄소아청소년과[16]를 운영 중이다. 연세대학교서울대학교를 갈 수 있는 수학 점수가 못 나와서 간 거라고 한다. 1979년 장학퀴즈 주장원에 올라 장학금을 받았으며 '진심' 뮤직비디오의 도입부에서 당시 영상을 확인할 수 있다. 아버지는 2010년 4월, 향년 93세에 돌아가셨다고 한다.[17]

5. 스포츠광

5.1. 키움 히어로즈의 열성 팬

트위터에서의 히어로즈 사랑[18]

인천 출신이자 야구부가 있는 제물포고등학교를 나온 관계로 삼미 슈퍼스타즈 시절부터 팬이었으며, 그게 현재의 서울 히어로즈로 이어진 듯하다. 히어로즈 창단에 전신이 된 현대전신전신전신 팀을 프로야구 원년 시절 때부터 응원해 온 것이니, 가히 넥센의 진퉁 성골 팬. 구 연고 팀인 현대 유니콘스의 연고지 이전 후 인천 야구 팬들은 인천의 새 연고 팀이자 신생 팀 SK 와이번스를 응원하는 팬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를 차마 버릴 수 없었던 팬들로 양분되었는데 이 중 김광진은 후자였던 것.[19] 그리고 해체된 현대 유니콘스를 인수하여 재창단한 키움 히어로즈를 지금껏 응원하고 있는 것이다. 원년 삼미 시절부터 해서 팀 선수들을 응원한 게 히어로즈까지 쭉 이어졌으니 팀에 대한 애착 역시 상당할 수 밖에. 스스로를 "히어로즈 지킴이"라고 밝힐 정도.
롯데 자이언츠는 행복한 구단이라는 생각입니다 세상에 롯데팬들만큼 열정적으로 응원해주는 팬들은 없읍니다 삼미때부터 꼴치팀을 응원했던 인천팬인데 삼미의 후신이 넥센이라 저는 도저히 SK를 응원할수가 없더라구요 그맘 이해하시나요 — 김광진 (@kjclassic) 2010년 7월 20일
황재균 선수도 강한 어깨외 30홈런이 가능한 선수라 흔치 않은 선수입니다 롯데팬분들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 김광진 (@kjclassic) 2010년 7월 20일
롯데 선수들도 좋은 선수들이군요 김시진 감독이 투수조련을 잘하니 넥센에 득이 되는 트레이드 일수도 있겠네여 — 김광진 (@kjclassic) 2010년 7월 20일
아. 정말 넥센 응원하기 힘드네 황재균 롯데로 트레이드야. 유망선수 다 팔고 어떡하라구. 증말 — 김광진 (@kjclassic) 2010년 7월 20일
황재균이 2010년 롯데 자이언츠트레이드 됐을 때 트위터로 본인이 밝혔다.

트위터로 넥센 히어로즈의 야구 이야기를 종종 하는 편이며, 야구 읽어주는 남자에도 출연한 적이 있다. 네이버 밴드넥센 히어로즈 팬 모임에도 가입했다!

심심하면 강정호넥센 히어로즈에 관련된 트윗을 올리면서, "할 게 많은데 아직 못 끊고 있다"고 투덜댄다.

크리스 코글란과의 충돌로 인한 큰부상으로 강정호가 시즌을 마감하자, 펑펑 울었다고 한다.

엘넥라시코에 대해서는, "희망을 본다"고 짤막하게 언급하였다.

2015년 준 플레이오프에서 목동 3차전 시구를 하게 됐다. 그래도 노래와 달리 3차전에서는 에이스 밴헤켄을 앞세워 이겼다.

자신의 명곡인 사랑의 서약이 히어로즈의 응원가인 나의 사랑 히어로로 개사되어 쓰이고 있기도 하다.

이후에도 자주 트위터로 히어로즈 구단에 대한 감정을 업뎃하고 있다. 말로는 야구끊는다 하면서 트위터로는 활발히 야구얘기를 하는 전형적인 야빠 모습을 보여 웃음을 주고 있다. 2017년 이후로는 트위터를 그만두고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을 주로 사용했다. 2022 시즌에 2년만에 히어로즈 관련 피드를 올렸다.

혀갤에서는 광진이형, 팡진이형, 광진아재 등으로 불린다. 예전에 히어로즈 페이스북 라이브 방송에서는 "오늘 졸라 잘했다" 라는 채팅을 쓴 것이 개념글에 올라 갔으며 다음 날에는 "오늘은 말 조심 해야지" 라는 채팅으로 혀갤을 눈팅함을 암시하기도 했다.

5.2. 그 외

그 외에도 농구를 좋아하며, 출신에서 알 수 있듯이 모교인 연세대학교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를 좋아한다. 농구 팬이라는 특성에 애널리스트 경력을 살려서인지, 2015년 새로 방송을 시작한 KBS의 스포츠 이야기 운동화 2.0스포츠 대작전에서 신용산 어벤저스의 단장으로 출연하고 있다. 일회성이 아닌 패널로 TV출연은 극히 드문 일인데다, 방송 전엔 나머지 다섯 단장의 입담에 밀려 병풍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조곤조곤하면서도 할말 다 하며 방송 분량도 뽑아내고 있고, 좀체 트레이드나 FA를 하지 않는 믿음의 농구를 펼치면서도 승률도 좋은 편이다. 본인도 방송 출연 이후 KBL과 방송에 대한 트윗이 부쩍 늘어난 것을 보면 재미있어 하는 듯.[20] 농구 편의 최종우승자인 홍진호가 우승상품인 NBA티켓을 김광진에게 양도했다. 본인은 스케줄 때문에 못 가기에, 우승에 큰 도움을 준 사람에게 주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농구편이 종영되고 스포츠 대작전은 야구편을 방영하지만, 김광진은 하차했다. 트위터를 통해 김광진은 올해는 스포츠를 끊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제물포고등학교 26회 졸업생이다. 제고 7년 후배 김구라[21]가 진행하던 김구라의 가요광장에 출연한 적이 있다. 당시 김광진은 동부자산운용의 "동부 더클래식 진주찾기 주식펀드"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펀드명만 보고 김구라는 김광진의 펀드 대신 김광진이 근무하던 회사의 다른 펀드에 가입했다가 손실을 입었다고 라디오에서 밝힌 바 있다. 김광진은 김구라가 여러 프로그램에서 활동하는 것을, 김구라는 김광진이 음악인과 금융인 두 마리 토끼를 다 쫓는 모습을 서로 칭찬했다.

아내인 허승경 씨 역시 인천(송림동)이 고향이다. 둘은 누구보다도 배다리의 옛 모습을 잘 기억하고 있어서 아내가 작사, 남편이 작곡한 노래 '배다리'를 통해 당시의 추억을 잘 풀어 내었다. 아버지께서 세우신 병원도 그쪽에 있었고.

당시 인천에서 가장 큰 병원이던 '지성소아과' 김관철 원장의 7명(5남 2녀) 자녀 중 막내다. 아버님은 인천 사람 2명 중 1명은 지성소아과에 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소문난 명의였다고 한다. 2009년 10월 모친상, 2010년 4월 부친상을 당했다. 장남 김광윤(개인사업), 차남 김광호(안동여성병원 소아과 과장), 3남 김광섭(지성소아과 원장), 4남 김광선(슈타이너 교육예술연구소장), 5남 김광진, 맏사위 박성호(미국 거주), 작은 사위 김동주(세란병원 치과 과장) 등이 있다.

1989년 장은투자자문에 들어간 뒤 삼성증권과 벤처플러스캐피탈, DB자산운용 등에서 20여 년간 일했다. 더클래식 활동 중에도 직장생활을 하고 있던 터라 여의도에서 정장에 서류가방 들고 거래처 사람들에게 CD를 돌렸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나이가 들 수록 산울림김창완과 상당히 닮아가고 있다.

6. 관련 문서


[1] 김광진의 대표곡 편지의 실제 여주인공이다. 김광진이 작곡한 '기억해줘', '동경소녀' 등의 곡은 허승경 작사로 한국저작권협회에 등록되어 있다.[2] 이는 김광진이 90년대 밀리언셀러를 찍은 앨범 마법의 성 활동 당시 그룹 더 클래식으로 활동해 김광진 본명은 몰랐던 사람도 제법 있었기 때문도 있어보인다. 더 클래식 자체가 방송 활동을 활발히 하는 팀도 아니었으니 더 그랬다.[3] 현재 정신과 의사도 겸하고 있다.[4] '그대가 이 세상에 있는 것만으로'는 훗날 1998년 솔로 2집에서 편곡이 가미되어 재수록된다.[5] 다만 더 클래식으로 알려져 있다보니 김광진이 개인 음악활동 할때도 정작 더 클래식 보컬이 김광진이었는줄 모르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6] 하지만 당시에는 가수가 제작자를 한다는 것을 안 좋게 보던 시기라서, 이승환은 본인이 제작했다는 것도 제대로 못 말하고 다녔다고 한다.[7] 1993년에 발표된 스튜디오 정규 3집인 My Story에 김광진의 곡만 세 곡이다.[8] 후렴구는 이승환이랑 같이 만들었지만 정식으로 작사/작곡은 김광진으로 발표되었다. 그런데 이 곡이 어이없게도 금지곡이 된 적이 있었다.#[9] 본인 2집의 '잘 지내나요'에 새로운 가사를 붙였다.[10] 이 노래는 더 클래식 1집에 실려 있다. 당시 이승환의 소속사에서 더 클래식 1집이 나왔기에, 이승환이 몇 곡에서 객원가수로 힘을 보탰다. 하지만 이승환 스스로도 거의 본인의 정규 앨범에 실린 노래급으로 생각하는지 콘서트 때마다 빠지지 않는 곡. 위대한 로큰롤 피아니스트 제리 리 루이스에게 바치는 신나는 로큰롤 넘버다.[11] 노래 제목을 '사요나라 도쿄소녀'로 하려다 왜색이 짙다는 얘기를 들을까봐 그냥 '동경소녀'로 했다고 한다.[12] 하지만 '회사의 어린 여직원에게 자신이 가수였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서 앨범을 냈다'는 농담을 한 적은 있다.[13] 취득 당시 라디오에서 김광진 본인이 밝히길 대한민국에 CFA 자격보유자가 약 50명이라고 했다.[14] 회사 상품을 홍보하는 자리에서 본인이 발매할 음반을 같이 홍보한 적이 있는데 옆에 있던 김광진의 상급자 임원이 '가수가 회사에서 부르는 노래를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회사 생활과 음악 활동을 병행하는 점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며 칭찬한 적이 있다.[15] 동구 금곡동 소재, 현 유유기지 동구청년21[16] 청라국제도시에서 지성소아청소년과를 이어 운영했으나 고향인 동구로 다시 돌아왔고 동구 송림동 소재인 봄소아청소년과를 인수받았다.[17] 1917년생이다. 김광진은 1964년생으로, 아버지 나이 48세에 얻은 늦둥이다.[18] 2014년 10월 21일 황정민의 FM대행진 4부에 출연했는데, 진행자와의 인터뷰 도중 이 페이지를 언급하며 "대체 누가 이걸(본인이 넥센 팬이라는 사실을) 적은 건가요?" 라고 말하기도. 종종 이 페이지를 즐겨보시나보다.[19] 전자의 대표적인 케이스는 제물포고등학교 후배이기도 한 개그맨 염경환지상렬. 여담으로 지상렬, 염경환의 제고 동창인 개그맨 김구라는 엉뚱하게도 삼성 라이온즈 팬이라고 한다.[20] 방송에 따르면 자기도 자기이지만 아들도 좋아하는 듯. 학원을 다녀오면 늘 아빠 선수들의 경기 기록을 챙긴다고.[21] 김구라의 제물포고 33회 동기로 지상렬염경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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