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참여 멤버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리더 / 드럼 / 기타 : 배철수[1] | ||||
메인 보컬 | 구창모 (2~4집) | ||||
메인 기타 | 지덕엽(1집) | 김정선 (2집~9집) | |||
베이스 | 이응수 (1집) | 김상복 (2집~6집) | 이태윤 (7집~9집) | ||
드럼 | 오승동 (2집~6집) | 이건태 (7집~9집) | |||
키보드 | 이봉환 (1집~9집) | 이종욱 (7집~9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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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 bordercolor=#fff> | 송골매 Peregrine Falcon | }}} | ||
▲왼쪽부터 이봉환, 배철수, 구창모, 오승동, 김정선, 김상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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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00> 결성 | 1979년 | ||||
해체 | 1991년 | ||||
장르 | 하드 록, 팝 록, 팝 메탈, 재즈 록, 사이키델릭 록, 로큰롤, 하우스 음악, 유로댄스 디스코 등 | ||||
멤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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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79년에 결성한 대한민국의 록 밴드.
2. 역사
2.1. 1979~1991
<배철수> 송골매라는 밴드는 "연주력을 향상하기 위한 노력의 역사다" 전 그렇게 생각한다. |
당대 최고의 대학교 캠퍼스 밴드였던 한국항공대학교의 활주로 출신의 배철수를 중심으로 1979년 결성되었고, 1978년 제 2회 MBC 대학가요제에 출전했던 지덕엽과 이응수, 이봉환을 영입하여 시작되었다.[1] 송골매라는 이름은 항공대의 교조에서 따왔다.
대표곡으로, '모두 다 사랑하리', '세상만사','하늘나라 우리 님', '모여라' 등이 있다.
1970년대 말~1980년대 초반 한국의 청년문화는 1975년 대마초 파동 이후 가요 대탄압 때문에 전부 싹이 잘려 나갔다. 그래서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팝송을 들으며 음악적인 갈증을 해갈했고, 아마추어리즘에 입각한 그룹사운드가 성하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에 산울림, 송골매 같은 밴드들은 한국식 록음악을 본격적으로 선보였고, 이들은 당대 최고의 스타 가수 대접을 받았다. 즉, 한국 록 음악의 암흑기 때를 대표하는 인기 밴드였다.
1979년에 발매한 송골매 1집은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얻지 못했고, 1981년에 지덕엽의 군 입대와 이응수의 학업 문제로 탈퇴하여, 활동이 중단되었다. 이에 배철수는 평소에 알고지내던 블랙테트라[2] 2기 보컬 구창모와 기타리스트 김정선에게 전화하고 그 두 사람이 휴식을 취하고 있던 오색약수터라는 암자로 찾아가 영입을 제의하였다.
이 제의에 합의가 되어 배철수(보컬, 드럼), 이봉환(키보드), 구창모(보컬, 베이스), 김정선(기타) 이렇게 4인의 멤버로 클럽 등을 돌며 라이브 공연 위주로 활동하면서 2집 녹음을 진행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활동자금을 먼저 모으기 위해[3] 선입금을 받고 전속출연하기 시작한 나이트에서 해고당하고 말았다. 인맥으로 선배가 경영하는 라이브클럽에 고용되었는데 당시 라이브클럽에서 춤곡을 연주해줘야 되는데 하고 싶고 연습하던 장르가 아닌 장르를 연주하기에는 아직 연주력이 모자랐다. 사장이던 선배가 출장간 틈을 타 부사장이던 당시 송골매의 실력에 못마땅해 하던 동생이 매니저를 시켜서 해고했는데 이에 모자라다고 느낀 배철수와 멤버들은 당시 군복무를 하던 오승동[4]을 섭외했고,[5] 오승동의 친구였던 김상복(베이스)까지 영입하였다.
우리도 우리의 그런 인기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 였다. 당황스러우면서 적지 않은 부담을 느꼈다. (인터뷰 중) |
1983년에 발표한 송골매 3집은 전작에서의 인기를 또 한 번 실감하듯 '처음 본 순간' 과 '아가에게', '빗물', '한줄기 빛' 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여담으로, 1983년 젊음의 행진에서 무대를 펼칠 때 배철수 인생의 마지막 무대가 될 뻔했던 위험한 방송사고가 있었다. 자세한 사항은 이 항목 참고. 그러나 그런 위험을 겪었음에도 동경가요제에 참가하고 싶었던 배철수는,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3일만에 퇴원하여 일본으로 가 멤버들과 만나 동경가요제에 참가하였다. 세간의는 그의 행적을 보며 "진정한 뮤지션은 열정 하나 만으로 아픔을 뒤로하고 가요제의 참석하였다. 우리도 배철수라는 뮤지션의 대한 열정을 인정하고 본받아야된다."라고 배철수의 대한 이슈와 찬사가 이어졌다.
1980년대 초반 송골매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냐면, 당시 송골매를 주연으로 한 영화가 줄줄이 개봉되었을 정도였다. 1982년작 "갈채", 송골매의 모두 다 사랑하리(1983)
"구창모의 보컬이 참으로 아깝다고 생각하였다. 그를 붙잡고 설득을 하였지만, 밴드의 현실과 구창모씨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아까웠기 때문에 그를 말릴수는 없었다. 사이가 그 후 조금 소원해졌지만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화해하여, 각자의 히트곡을 들고 나와 서로를 응원하고 아직까지도 우린 송골매의 일원으로 생각한다라고 생각하여 가요계 생활때도 친하게 지내왔으며, 세월이 지나 지금은 둘도없는 단짝 친구다. (배철수 인터뷰 중)"
그러나 1984년 당시 기획자로부터 솔로 가수 제의를 받은 구창모가 탈퇴하면서 4집활동에 적신호가 켜진다. 이후 송골매의 리드보컬은 배철수가 맡게 된다. 4집에서 히트곡이었던 "난 정말 모르겠네"는 당시 영미권에서 유행하던 뉴웨이브 사운드의 곡이다. 듀란 듀란이나 컬처 클럽 등의 뉴웨이브/신스팝 사운드가 아니라, Go Go's나 Men At Work와 같은 뉴웨이브/Pop rock 계열의 스타일이다. 1982~1983년에 영미권에서 인기가 많았던 시운드이다. 그 당시만 해도 신스팝 계열과 Pop rock 계열의 뉴웨이브가 공존하던 과도기적 시대였다. 실제로 기타 리프와 곡 분위기가 초기 뉴웨이브를 대표하는 호주 뉴웨이브 밴드 "Men At Work"와 흡사하며, Go Go's의 밝은 뉴웨이브 분위기도 든다. 1980년대 미국을 대표하는 락 밴드 "Huey Lewis & The News"의 분위기도 느낄 수 있다. 1984년 당시 기준으로 꽤 트렌디한 뉴웨이브 곡이다.
"그룹을 하는 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안타까워요. 우리나라에서 밴드 음악은 비주류 음악이라 활성화가 잘 안 되고 락음악이 밴드로써 활성화 되는 방법을 항상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능력이 조금 부족하다. 무언가 그룹사운드가 다른 나라와 비교해 굉장히 저평가 되는 부분이 많은데 무엇보다 지금 계신 여러분이 도와주셔야 되죠, 다음 앨범을 내어 음악을 하면 좀 더 강하고 무거운 음악을 하고 싶다. '1986년 100분쇼 가요대상 수상자 배철수 인터뷰 중 "
1985년에 발표한 송골매 5집은 라원주, 이응수의 지원을 받아 한국적 가락의 시조 창법의 "하늘나라우리님 2" 를 받았지만, 무언가 대중들이 좋아할만한 음악은 아닌거같다는 배철수 의 생각의 의해 "배철수가 편곡하여" 비교적 메탈도 아닌 그렇다고 말랑말랑한 가요적 락이 아닌 비교적 강력한 하드 락 사운드의 하늘나라 우리님 1 을 발표하여 '하늘나라 우리님'이 「가요톱10」에서 1위를 차지하면서 그당시 떠오르던 락의 시초라고 불리던 "들국화 밴드"를 대적하여 서로의 위치에서 양분하여 락장르의 인기를 책임지고 지탱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가 사실상 마지막 전성기였다.
1986년에 발표한 송골매 6집은 특별한 히트곡이 없었는데 1986년은 백두산, 시나위, 부활이 데뷔를 한 해이고 헤비메탈의 르네상스였던 시기이기에 큰 빛을 보지 못한다. 다시 말하자면 파이가 많이 갈렸다는 것인데 장르 불문하고 빠른 비트를 좋아하는 중도층들을 주현미의 돌풍이 휩쓸어갔고 댄스음악도 서서히 인기장르로 떠오르게 되었다. 락의 지지층들이 헤비메탈 쪽으로 많이 옮겨갔다는 것이고, 같은 출신의 밴드인 "다섯손가락" 서럼 서정적이면서 조금더 풋풋한 약간 감성적인 8비트 그룹, 밴드지만 춤을 추면서 노래도 하고 악기도 비교적 이질적이지만 단순한 연주와 외모도 말끔한 이미지의 그룹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송골매에게 도전하는 신그룹들이 송골매의 입지와 트렌드를 위협하던 시절이었다. 또한, 6집 역시 별달리 대중들의 관심을 끌 만한 곡은 없었다.
결국, 이러한 부진과 음악적 갈등으로, 2집 때 영입했던 김상복(베이스)과 오승동(드럼)이 팀을 떠나게 되었고, 그러자 배철수는 노래라면 몰라도 연주에서만큼은 최고의 밴드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종욱(키보드), 이태윤(베이스)[9], 이건태(드럼)[10]를 영입하게 된다.
"음악이라는 게 연주력만 좋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클럽에서는 우리 팀의 연주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한다고 칭찬했지만, 중요한건 "음악에 대한 정신, 곡에 대한 애정"이 필요하다고 음악을 접을 때쯤에 깨닫게 됐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 난 음악에 대한 재능이 조금 부족하구나" 그래서 굉장히 많이 내 자신에 대해 회의적이고 지쳐있던 시기였다. (배철수 인터뷰 중)"
멤버 재편 후 발표한 7집에서는 다소 강했던 사운드를 뒤로하고 보컬의 락적인 음역과 가다듬어진 연주력을 과시하기 위해 키보드, 신디사이저 리프를 적극 활용한 "웅장한 사운드를" 추구하여 '새가 되어 날으리'[11]가 어느 정도 인기를 끌었다.
1988년 5월에 8집 앨범을 발매하였다. 그러나 이미 송골매가 더는 대중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태윤이 부른 '외로운 들꽃'이 조금 히트되어 송골매의 체면을 살려 줄수 있었지만, 송골매 스타일의 음악 추구와 보컬면의 잔잔함은 이태윤이 아닌 원년 맴버들의 빈자리를 추구하였고 다소 어울리지 않는 발라드곡은 불후의 명곡이 되어버린다.
"자니윤쇼를 보고 음악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고 그때 엄청 감동을 많이 받았어. '베이직 베이스 TV 채널에 이건태 출연편에서 언급'
1989년부터 1990년까지 1년 동안 KBS에서 방영했던 '자니윤 쇼'에서 하우스 밴드를 맡았다. 이는 88 올림픽 메인광장에서 개최된 외국 선수들을 위한 이벤트에 송골매가 출연하여 연주할 때 자니 윤과의 첫 만남에서 나중에 자니 윤이 토크쇼를 하게되면 음악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 자니윤쇼의 1년간 고정출연 때문에 대중에게 송골매가 나름대로 아직까지 그들의 인기가 건재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기도 한다.(배철수 효과가 은근히 먹혔기 때문....) 그로부터 1년 후 자니윤쇼가 폐지되며 자연스럽게 9집 앨범 발표와 배철수가 라디오 DJ의 길로. 어쩌면 계기가 되는 발판이 되기도 한다. '자니윤쇼 첫회 라이브', '자니윤쇼 마지막회 라이브'
물론 이 시기 때쯤에 구창모와 다시 뭉쳐 새로 앨범 제작을 논의 중이라는 소리가 들렸다. 방송에서도 몇번 같이하고, 클럽에서도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같이 무대 설 때도 있었으니. 무엇보다 다시 한번 대중이 그 둘이서 같이 무대 서는 걸 보고 싶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저물어가는 송골매와 구창모의 바쁜 일정과 훗날 그가 가요계를 떠나게 된 계기가 되는 사건 탓에 그 둘은 기약없는 약속만 남긴 채 각자의 활동을 마무리 하는 단계로 간 걸로 생각되어 다소 아쉬운 부분으로 남았었다.
1990년에 발표한 마지막 앨범 9집에서는 '모여라'라는 히트곡을 냈다. Huey Lewis & The News 풍의 블루스 록과 뉴웨이브를 기반으로 한 팝 록 사운드이다. 중간의 기타 솔로는 1980년대 중후반의 글램 메탈을 연상시킨다.
쉿! 모였으면 뒤돌아가! (송골매 9집의 모여라 끝부분에서) |
이후 송골매의 프론트맨이었던 배철수가 본격적으로 라디오 DJ를 맡게 되고, 뮤지션으로서의 행보를 접으면서 밴드는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게 된다.
배철수의 언급에 따르면 당시 생활과 창작이 양립이 되지 않는 아이러니에 직면해 있었다고 한다. 방송 무대를 나가야 홍보가 되고 몸값이 올라가고, 또 그 홍보와 몸값을 바탕으로 밤무대를 뛰어야 밴드 생활이 유지되고... 그런데 그렇게 365일 밤무대를 뛰다 보면 연구할 시간도 적고 새로운 영감과 창작력 역시 솟지 않는다고 한다.[12]
무엇보다 90년대 이후부터는 가요계의 트렌드가 밴드가 아닌 댄스음악의 흐름으로 서서히 변해가고 있었기 때문에 DJ이나 댄스음악 그룹은 '메이저'가 됐지만 밴드는 '마이너' 흐름으로 바꿔었기 때문에 라이브보단 전자음악을 선호하는 추세로 바뀌게 되었다고... 밴드들이 먹고 살기 위해선 가요나 락음악보단 댄스음악이나 유로댄스음악을 연주해야만 했다.[13] 솔로로 나가기엔 턱없이 부족하고 시대의 흐름은 너무나도 가혹하게 바뀌어 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박수칠 때 잘 떠난 케이스.
참고로, 1991년 여의도 은성갈비에서 배철수님이 맴버들에게 약간의 전별금을 나눠주고 해체했다.
마치 "모여라"의 가사처럼(이태윤의 "베이직 베이스TV)"
2.2. 2022 재결성
2022년 하반기(9월 11일~12일) 양일 간 서울 콘서트를 시작으로 '열망'이라는 타이틀의 전국 투어를 예고하였다. 38년 만에 구창모가 재합류했으며, 베이시스트 이태윤이 음악감독을 맡는다. 송골매의 오랜 팬들은 물론이요, 한국 대중 음악에 관심이 지대한 이들에게까지 큰 화제를 모았다.
70세를 목전에 둔 노령화는 어쩔 수 없지만, 연륜으로 기량을 커버하며 2시간 30분을 꽉 채우는 배철수, 구창모, 이태윤의 스킬에, 양일 총합 2만 관객이 뜨겁게 열광했다. 서울콘의 흥행 덕에 11월까지 진행되는 전국 투어도 예매 문의가 증가했다.
2.3. 2023 40년만의 비행
2023년 1월 21일 KBS2 TV에서 2023 설 대기획 송골매 콘서트 40년만의 비행을 방송한다.2023년 4월 21일 ~ 23일(토~일요일) 올림픽공원 케이스포돔에서 송골매 열망 앵콜공연을 한다.
3. 송골매 앨범 역대 평가 요약
송골매 밴드를 모르시거나, 음악은 알지만 자세한건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기존의 송골매 앨범의 평가를 요약하여 한줄평가로 만들어짐. 앨범과 음악을 듣기전 이 한줄요약을 한번씩 읽어보고 찾아듣거나 음악을 들어보면 많은 도움이 된다. 읽어보는 걸 추천한다.3.1. 송골매 1집
" 우리나라 한국식 록음악을 표현한 밴드 "한국적인 가락과 리듬을 대중가요에 접목시킨 기념비적 앨범
3.2. 송골매 2집
" 록과 팝음악의 조화로운 음악의 만남이자 최고의 히트작 "한국적인 록음악과 감성적인 팝음악의 청춘을 주제로 한 밴드
앨범의 곡 전체적으로 리프의 명작들로 가득함.
3.3. 송골매 3집
" 록음악을 대중가요의 안방으로 삼은 밴드이자, 밴드 전성기 히트작 "" 투박함과 감미로운 보컬의 조화와 프로이면서 아마추어의 연주 실력이 유니즌 방식으로 연주 하면서 자신들의 색깔과 캐릭터가 진해지고, 자리잡힘. 송골매 시절 가장 완벽했던 전성기 앨범 "
3.4. 송골매 4집
" 다소 부족한 음악이지만, 자신들만의 음악을 시도해본 실험적인 앨범 "" 연주적인 부분은 아직까지도 부족한 면이 많으나 보컬적인 면과 음악적인 참신한 시도가 많이 느껴진 앨범 "
3.5. 송골매 5집
" 기존의 펑기한 리듬감이 사라진 대신 비트감이 강해진 마지막 히트작 "" 기존의 조금 가요적인 부분의 사운드를 뒤로하고, 그렇다고 너무 강력하고 시끄러운 헤비메탈도 아닌 강력한 하드락 으로 음악적 노선을 추구함, 트윈 보컬체제 에서 메인보컬로 바뀌며 밴드 음악이 남성적인 음악으로 바뀜. 조금 토속미가 진해짐. "
3.6. 송골매 6집
" 기존의 밴드의 이미지를 탈바꿈 하기위해 여러 장르를 시도해본 앨범 "" 여러가지의 음악장르를 시도하려고 조금 노력한 앨범이지만, 자신들만의 색깔을 잃어버린 느낌이 없지않은 느낌이 조금 듬, 송골매 역사상 앨범이 실패했다고 느껴진 앨범."
3.7. 송골매 7집
" 젊고 빠르고 이슈가 강한 사운드에서, 웅장하고 중후한 무거운 사운드를 추구하기 시작한 신송골매의 새로운 앨범"" 맴버 교체후 뛰어난 연주자들을 멤버로 영입함. 다소 전작의 배철수 식 투박한 창법 보단, 하드록적인 팝 메탈 의 흐름으로 고음을 도전함, 여기서부터 한국적인 스타일에서 영어로된 곡도 삽임하는 등 헤비메탈 음악도 도입하기 시작함으로 서 연주력이 돋보임."
3.8. 송골매 8집
" 기존의 송골매의 트윈보컬과 메인보컬이 있었던 포지션을 뒤로하고, 따로 메인 보컬이 없이 맴버들이 보컬에 참여한 실험적인면과 맴버들의 화려한 연주실력이 돋보이는 세련된 앨범"" 연주력이 조금 돋보이는 느낌이 들며, 맴버들이 새로운 도전을 한다고 느껴지지만, 그로인해 기존의 송골매의 이미지가 없어진 느낌이 있다. 그러나 정말 연주력 하나는 높은 점수를 줄수있는 부분의 앨범이라, 그의 따른 현상으로 보컬보단 연주자들을 세션맨이나 뮤지션으로 성장하게 나름 트레이닝이 된 앨범이라고 평가된다."
3.9. 송골매 9집
" 송골매 후기 라인업(신송골매) 역사상 가장 완벽한 연주와 다양한 음악을 보여준 마지막 작품 "" 2집, 3집, 5집 과 같은 음악 스타일을 후기 라인업(신 송골매) 의 연주스타일로 다시 연주하여 들려준 느낌으로 록음악과 팝음악을 넘나들면서, 자신들이 추구하려고 하였던 음악을 하였던 앨범이라고 느껴짐, 먼가 다시 트윈 보컬적인 면과 초기 전성기 시절의 음악장르 리스트같은 음악들이 연주력이 아주 뛰어난채 배치돼있음. "
4. 역대 라인업
- 1집 - 배철수(드럼/보컬), 이봉환(키보드), 이응수(베이스), 지덕엽(기타)
- 1집 - 2집 과도기 - 배철수(드럼/보컬), 이봉환(키보드), 구창모(보컬/베이스), 김정선(기타) #
- 2집 ~ 4집 - 구창모(리드보컬), 배철수(기타/보컬), 김정선(기타), 이봉환(키보드), 김상복(베이스), 오승동(드럼)
- 5집 ~ 6집 - 배철수(기타/보컬), 김정선(기타), 이봉환(키보드), 김상복(베이스), 오승동(드럼)
- 7집 ~ 9집 신 송골매 - 배철수(기타/보컬), 김정선(기타), 이봉환(키보드), 이종욱(키보드), 이태윤(베이스/보컬), 이건태(드럼)
- NEW 송골매 2010 - 이봉환(키보드/보컬), 김정선(기타), 최승찬(키보드, 보컬), 정준교(베이스), 고중원(드럼)
- 재결성 송골매 열망 2022 - 배철수(기타/보컬),구창모(보컬), 이태윤(베이스/보컬), 이성열(기타)/함춘호(기타, 방송라이브 한정), 전달현(기타), 박만희(키보드), 안기호(키보드), 최태완(피아노)
5. 디스코그래피
Discography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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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집 송골매 신곡모음 (1979) | 2집 송골매 II (1982) | 3집 송골매 III (1983) | 4집 송골매 4 (1984) | 5집 송골매 5 (1985) | |
6집 송골매 6 (1986) | 7집 송골매 7 (1987) | 8집 Song Gol Mae 8 (1988) | 9집 송골매 9 (1990) |
5.1. 음악적 장르 시도
비교적 생각보다 많은 음악적 도전을 하였기에 줄여서 요약했다.- 1. 하드 록 : 송골매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장르로써 주로 배철수가 음악적으로 많은 도전을 하였다. 록과 메탈의 중간 경계에서 배철수가 자기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했다. 비교적 트윈기타 (리듬, 리드 기타)를 주로 연계하며 연주함.
- 2. 팝 록 : 역시 송골매하면 떠오르는 장르로써 구창모가 추구하는 음악 스타일이었다. 좁게는 펑크한 음악부터 넓게는 휭키한 흑인풍 리듬을 구사하는 아주 다양한 스타일을 추구했다. 음역대를 주로 높게 잡고, 주로 이 장르에선 베이스를 메인 을 두고 뒤에 악기들이 배경이 되는 연주법을 추구함. 추후 3기 맴버인 베이스 이태윤이 조금더 음악적인 면에서 추구하기도 하였다.
- 3. 글램 메탈 : 송골매의 3기 라인업부터 시도했다. 비교적 기타나 베이스 보단, 키보드, 신디사이저 리프를 적극 활용하면서 전주나 도입부분이 끝나면 달리는 곡으로 기타연주와 베이스, 드럼 의 빠른비트가 진행한다. 비교적 쭉가다 훅 올라가는게 특징, 가끔 배철수, 이태윤이 시도하였으며, 키보드 이봉환이 주로 이런곡을 시도하였다.
- 4. 재즈 록 : 베이스 이태윤이 주로 시도하였다. 다소 엉성해 보일 수 있는 슬랩 주법을 적절한 난이도와 컨트롤로 조금 더 대중적으로 연주하며 노래를 시도하였다. 특히 드럼과 베이스의 합을 조화롭게 리듬을 주로 하며, 송골매 후기 라인업이 프로다운 연주력을 가지는데 기여하였다. 물론 이 부분에서 배철수도 나름 추구하기도 했다.
- 5. 사이키델릭 록 : 활주로 때부터 송골매에 이르기까지 추구하던 한국적인 록 음악을 추구하는데 많은 시도를 하였다. 특히 특유의 리프와 토속미가 가득한 배철수를 보컬로 추구하며 각 앨범에 1곡씩은 꼭 시도하고, 그걸 다른 장르와 결합하여 곡을 발표하기도 했다. 들리는 소리와는 다르게 의외로 따라하기에는 난이도가 조금 있다.
- 6. 로큰롤 : 전반적으로 6집까지 모든 사운드와 기본적인 연주 흐름은 이 장르를 주로 하였다. 그리고 각 앨범마다 꼭 하나씩 있는 송골매의 특유의 로큰롤을 수록하였다. 초기엔 구창모도 자주 활용하였지만, 후에 갈수록 배철수가 활용 하게 된다. 그리고 의외로 배철수가 좀 더 이쪽이 더 잘맞는 느낌도 있다.
- 7. 하우스 음악 : 자니 윤 쇼에서 거의 대부분 연주하였다. 이를 통해 송골매 3기 일명 '신송골매'가 우리나라에서 연주를 가장 잘하는 밴드로 인식되기도 한다.
- 8. 유로댄스 디스코 : 주로 클럽이나 야간 업소에서 연주했으며, 가끔 방송에서 연주하였다. 아무래도 가볍지만 춤을 추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기에 웅장하고 강렬한 연주를 하였다. 그러나 다소 연주력에 비해 보컬이 배철수다(...).아무튼 이 장르를 통해 연주력은 인정하였지만, 자기들의 음악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더 많은 장르를 시도하였지만, 음악적인 실험 도전보단 흥행과 트랜드의 흐름이 다소있어 요약하여 여기까지만 설명하였다.
6. 대표곡
1집 : 세상만사,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길지 않은 시간이었네 (배철수 보컬)2집 : 어쩌다 마주친 그대, 모두 다 사랑하리 (구창모 보컬), 그대는 나는, 세상만사 (배철수 보컬), 내 마음의 꽃/길지 않은 시간이었네 (구창모/배철수 보컬)
3집 : 처음 본 순간, 아가에게, 꽃씨 (구창모 보컬), 빗물, 한줄기빛, 승무 (배철수 보컬)
4집 : 난 정말 모르겠네 (구창모 보컬), 작은 입술 (배철수 보컬)
5집 : 하늘나라 우리님 1 , 어쩌다 한번은 (배철수 보컬)
6집 : 오해, 사할린의 겨울 바람 (배철수 보컬)
7집 : 새가되어 날으리, 인생이란 이름의 열차 (배철수 보컬)
8집 : 외로운 들꽃, 어이하나 그대여 (이태윤 보컬)
9집 : 모여라, 사랑하는 이여 내 죽으면 (배철수 보컬), 그대 떠난 이른 아침, 부가루 (이태윤 보컬)
7. 가요 프로그램 1위
8. 수상
- 1982~1985년 MBC 10대 가수 가요제 10대 가수상
- 1982년 KBS 가요대상 로크그룹상
- 1983년 KBS 가요대상 로크그룹상
- 1984년 KBS 가요대상 로크그룹상
- 1985년 KBS 가요대상 로크그룹상
9. 기타
80/90년대에 인기 개그프로그램 이였던 유머일번지의 후기 오프닝[14]도 송골매가 작곡하여 연주하였다.9.1. 송골매 디럭스 (2010)
2010년 키보디스트였던 이봉환이 보컬이 되어 '송골매 디럭스'라는 이름으로 재결성되었지만 반응은 '배철수랑 구창모 없이 무슨 송골매냐'는 분위기. 게다가 팬카페와 관련해서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다. 다음은 현재 카페를 양도한 카페지기 심연(深緣)의 마지막 메일 전문.최대한 감정을 억제하며 카페를 양도하려 맘먹었고 진행중에 있습니다. 헌데 내막을 모르는 회원들이 대부분이기에 대강이라도 해명을 해야 제가 떠난 이후에 구구한 억측들이 생기지 않을 것 같아 작별인사겸 말씀드립니다. |
[1] 이응수는 원래 항공대 재학생이었고 이봉환은 항공대 출신은 아니었지만(경희대 출신) 배철수와는 경희고등학교 동기로 오랜 친분이 있었다.[2] 홍익대학교 스쿨 밴드[3] 악기비용, 연주실 비용 등[4] 블랙테트라 2기 앨범에 참여한 적은 있으나 해변가요제 참여 멤버는 아니었다.[5] 오승동은 당시 캠퍼스 출신 밴드에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프로의식을 가지고 한다는 말을 듣고 마음을 돌렸다고 한다.[6]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리프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곡이다. 이 곡으로 1982년 가요계를 석권했다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7] 당시 엄청난 블록버스터 영화이자 흑인 주연으로 흥행을 거둔 첫 번째 영화였던 "Shaft"의 주제곡이었다. 얼마나 이 당시 임팩트가 컸으면 이 영화 이후 흑인 주연 영화가 대폭 늘었고 노래 자체는 1990년 심슨 가족에서도 패러디되었다. 리사와 바트가 카라오케에서 "Theme From Shaft"를 부른다. Theme From Shaft에서도 첫 부분에서 특유의 기타 리프를 쓴다. 그 곡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펑키한 디스코 넘버로, 1978년~1979년 즈음의 디스코 곡들과 비슷하다.[8] 1982년 당시 한국에서 흑인 음악을 소개하고 히트시키던 아티스트는 송골매와 조용필 정도다. 사랑과 평화는 78년, 79년 이후 사실상의 휴지기에 들어갔고 나미가 영원한 친구를 발표하기는 했는데 외국인 멤버들이 귀국하면서 한동안 흑인음악 스타일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 외에도 이은하의 밤차, 아리송해, 혜은이의 새벽비 등 70년대 후반쯤에 이런 디스코, 펑크 느낌의 가수들이 있긴 했는데 82년에는 거의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송골매와 조용필 외에는 히트하질 못했다. 앞서 말한 혜은이도 82년 앨범 중에 흑인 음악이 있긴 한데 사람들이 잘 모른다.[9] 부활(밴드)의 전신인 디 엔드의 베이스 주자였다.[10] 이 셋은 송골매 활동 후 위대한 탄생에서 같이 활동하게 된다.[11] 이 노래는 '높은음자리'의 멤버 김장수가 작곡했다.[12] 배철수가 했던 말은 아니지만, 당시에 이런 밤무대를 뛰다 보면 결국 관객들이 좋아하는 넘버를 하게 되고 그 스타일의 연주를 하게 되기 때문에 뽕삘이 물들게 되고 앨범을 만들려고 할 때 뭔가 새로운 것을 해 보고 싶어도 도무지 뽕삘을 뺄 수가 없다고 한다.[13] 사실 이건 송골매 시절 항상 그랬다. 선진국이 되거나 어느 정도 선진국에 가까운 시기에 한국이 돌입하고 나서야 최정상의 밴드 몇몇이 밴드만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14] 1988년 연말부터 적용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