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cography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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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집 송골매 신곡모음 (1979) | 2집 송골매 II (1982) | 3집 송골매 III (1983) | 4집 송골매 4 (1984) | 5집 송골매 5 (1985) | |
6집 송골매 6 (1986) | 7집 송골매 7 (1987) | 8집 Song Gol Mae 8 (1988) | 9집 송골매 9 (1990) |
1. 마지막 앨범과 밴드 해체
" 나는 음악을 그만둬야 되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잠시 쉬고 음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을뿐이었다.{{{#!wiki style="text-align:right"
- 배철수 인터뷰}}}" 우리나라에서 최소한 앨범 10장 정도 내는 밴드가 있다는걸 보여주고 싶었다. 고생고생해서 오긴했지만 나름대로 그것의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wiki style="text-align:right"
- 배철수 인터뷰}}}" 이때쯤 되니까 가요계의 흐름과 트렌드가 무서울정도로 바뀌고 있었다. 뭐랄까? 우리팀의 해체는 생소했지만 약간 엉뚱하게 흘러갔다. 맴버들도 내심 이시기에 "각자의 길" 에 대해 아마 생각했을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대중들에게 밴드로써 들려줄수 있는것을 다 들려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제 비전이 없는거다.{{{#!wiki style="text-align:right"
- 배철수 인터뷰}}}" 이시기때 쯤엔 이 가요계의 저변이 댄스 음악이 밴드를 압도하던 시절이었다. 밴드로서의 우리가 먹고살고, 대중들이 원하는건 유로피한 댄스음악을 하길 원했다. 춤을 추고 노래하는사람, 혹은 전자음악을하는 사람들은 '메이저'가되고, 밴드음악은 약간 '마이너' 스러운 그런 존재가 됐다. 시대적 수명을 다했다고 느낀것이다.{{{#!wiki style="text-align:right"
- 이태윤 인터뷰}}}1991년 봄에 여의도에 있는 은성회관에 갈비집에서 배철수 형이 고기를 사주시면서 송골매 맴버들과 회식하였는데, 이때 약간의 "전별금"을 나눠주시고 "오늘부터 송골매 해체한다."라고 선언하였다. 그때 가장 기억에 남는건 갑자기 철수 형이 "야, 이태! 거기까지밖에 못 키워줘서 미안하다."라고 말씀하셨다. {{{#!wiki style="text-align:right"
- 이태윤 인터뷰}}}2. 요약
1. 송골매 후기 라인업(신송골매) 역사상 가장 완벽한 연주와 다양한 음악을 보여줌.2. 자니윤쇼의 영향을 받아 연주력과시와 오프닝같은 연주를 보여줌.
3. 2집, 3집, 5집 과 같은 음악 스타일을 후기 라인업(신 송골매) 의 연주스타일로 다시 연주하여 들려줌.
4. 자니윤 쇼의 고정출연 및 인기와 구창모와 같이 라디오 오디션 선발을 통해 배철수가 라디오 DJ로 데뷔함.
5. 전성기 시절 처럼 혹은 전성기와 같은 2명에 보컬을 내세우며 추가적으로 다른 맴버들도 보컬로 구성을 꾸밈.
6. 타이틀곡 "모여라", 라디오 전파로 들려오는 "사랑하는이어 내죽으면" 이 조금 히트함.
7. 배철수가 라디오 DJ, 나이트 클럽, 방송활동 을 병행하면서 팀을 활동했음.
8. 송골매라는 타이틀이 있지만, 인기와 히트곡을 별개로 밴드 시대적 사정 과 리더의 고민이 다소 무리가 생김.
9. 이 시기부터 음악의 흐름이 엄청나게 변하기 시작함, 직접연주 보단 미디어나 기계의 소리를 추구, 연주도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춤을추며 노래를 부르는 것, 그와 별개로 기성세대 나 트로트, 잔잔한 음악이 다시뜨기 시작함 으로써 밴드의 메리트가 흔들려짐.
10. 송골매 해체와 배철수의 DJ로 전념함.
3. 급격한 시대적 변화와 배철수의 선택
송골매 9집은 비교적 가장 잘할 수 있는 그런 연주와 노래를 하였다. 아마 자니윤쇼의 영감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한다. 좋은 선택이었을까? 7집, 8집에 비해 앨범 전체적으로 예전에 미쳐 지나갔던 송골매 느낌의 곡들이 많이 수록된 것이다. 2~3집에서 5집까지의 모습이지만 연주력까지 뛰어나게 된다면 아마 송골매 9집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7, 8집 이후 회귀했지만 시대적 한계상 송골매 밴드의 한계가 급격하게 오게된다. 9집의 연주력은 송골매 역사상 가장 잘하고 매끄럽게 연주했다고 생각한다. 가창력은 조금 부족할지언정 맴버들이 전체적으로 노래를 부르고, 연주력은 뛰어났지만 대중의 입맛과는 멀어져 있었다.
굉장히 이들은 지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채롭게 연주를 하였지만, 전자악기 앞에서 사운드적인 한계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보컬의 배철수, 서브보컬의 이태윤은 서서히 변해가는 가요계 흐름과 맞지 않는 그런 보컬이었다. 그러기엔 그들도 트렌드가 늙었기 때문이다. 강력하고 거친 메탈 밴드가 아니였지만 비교적 젋은 사운드의 보컬로 또 어떨 땐 애잔한 보컬로써 폭넓은 사랑을 받았지만, 그것도 과거가 된것이다.
또한 "자니윤쇼"가 나름 발판이 되었을까? 배철수는 어찌저찌 "라디오 DJ"로 데뷔하여 송골매 밴드와 방송활동을 병행하면서 9집 활동을 하였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 그 사람도 변화할 필요도 있다. 그래서 배철수는 선택해야 되었다. 팀을 그래도 끝까지 밀고 가느냐, 자신의 길을 가느냐. 그는 이제 음악을 생산하고 들려주는 사람보단 음악을 듣고 설명하고 전달하는 사람이 된것이다. 그리하여 송골매 9집을 마지막으로 밴드는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밣게 되고, 하늘을 날던 하드록 밴드 송골매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비행을 멈추게 된다.
배철수의 본격적인 활동을 1978년부터라고 보면 1991년까지 14년간의 활동을 한 것이니 결코 짧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1990년은 배철수가 시작했던 박정희 말기를 지나 전두환 정권도 끝나고 일단 공식적으로는 민주화가 달성된 시기였다. 한국사회의 극심한 변화의 속도를 보자면 송골매가 오래 버틴 것이다. 조용필조차도 실질적으로 이 시기 즈음에 인기가수로서의 일선에서는 내려왔으며 극소수의 트로트 가수를 제외하면 전부 다 이 시기를 전후로 가요계 세대교체가 되었다.
전자악기, 댄스음악, 춤, 화려한 무대구성, 흑인음악, 교포들의 본격적인 귀환, 넉넉한 용돈의 시작으로 인해 청소년 위주로의 가요계 개편, 시티팝 계통, 본격적인 발라드 중흥기 등등 이 시기의 변화는 도무지 하나로만 잡아내어 말할 수 없는 여러가지 요소가 있었다. 그 시절을 기억하거나 연구했다면 이 1990~1991 시기에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모조리 물갈이가 된 것을 알 수 있다.[1]
" 나는 처음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다. 음악에 이제 지쳐 있었을 시기에 우연치않게 라디오 DJ를 시작하면서 "음악을 처음" 시작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느끼게 되었다. 아 나는 진행하는 것에 적성에 맞는 사람이구나, 음악을 만들고 발표하고 연주하는것 보단 그 음악을 전달해주고 소개해주는 그런 타입이 나한텐 굉장히 맞는구나라고 다시한번 느끼게 된것이다. 물론 음악할 때도 좋았지만 난 MC가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wiki style="text-align:right"
- 배철수 인터뷰}}}" 음악을 그만둔 건 아니었다. 그냥 이래저래 바쁘고 힘들게 움직이던 밴드 생활의 피로를 느껴 잠시 쉬고 다시 음악을 한다고 생각했었으니 말이다. 근데 라디오 DJ 를 6개월 버텼을 땐 비교적 내 적성에 맞는구나라고 느꼈고, 이게 2년쯤 지나니까 확실하게 느껴졌다. "아 난 음악적인 재능이 남들보다 2% 부족하구나" 이렇게 생각한 것이다. 물론 송골매 후반기 때 활동하면서 비슷하게 생각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음악을 아예 그만둔다는 생각을 안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어느 시점에서 난 완전히 음악활동을 과감히 접었다. 라디오 DJ 활동과 MC에 더 집중하기 위해서, 내가 좋으니까. 살아있다고 느꼈던 거 같다.{{{#!wiki style="text-align:right"
- 배철수 인터뷰}}}" 모여라" 라는 곡이 있다.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히트 한곡이 있다. 내가 직접 "작사", "작곡", 나머지 맴버들이 모여 "편곡" 한 노래다. 근데 이시기에 노래를 발표하게 되면 검열을 무지하게 잡았다. 가사 하나하나의 신경을 써야 될 시절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새로 만들어야 되니까, 근데 "모여라" 라는 곡이 왜? 검열이 돼서 발표를 하지 못하는 상황도 오게된다. 나는 직접 심의 위원회에가서 "가사를 끝까지 들어봐라 모였으면 돌아서 가라고 하지 않느냐? 이것은 결국 해체의 의미다" 라고 설득하여 우여곡절 끝에 "모여라" 라는곡을 타이틀로 발표할 수 있었다. 참 그때 생각해 보면 표현의 자유가 좋지 않았던 시절이었다.{{{#!wiki style="text-align:right"
- 배철수 인터뷰}}}" 뭐 지금도 구창모씨와 다른 맴버들과 송골매 밴드를 다시 재결합 하자는 의견의 시작과 역사는 80년대 후반에 밴드 활동할때도 많이 나왔었다, 아니 아마 그때부터 시작된거같다. 이 모여라 앨범 이전에도 구창모씨와 다시 송골매의 재결합에 대해 이야기가 오간적이있다. 물론 재결합에 대해 생각한적도 있다. 나도 그렇고 창모씨도 그렇고 각자 음악의 대해 나름대로 지쳐있던 시기였으니까. 나같은 경우도 내가 하고 싶고, 부르고 싶은 음악은 못하고, 하지만 사람들이 좋아하는 혹은 우리를 보러와주는 손님들을 위한 음악만 했으니까, 물론 창모씨도 막상 우리팀을 나가서는 자기음악보단 성인 취향의 음악만 불렀으니.... 그래서 클럽에서도 같이 무대에 설때도 있고, 방송 출연도 몇번하고 그랬으니까 서로의 음악이 그립다고 해야되나? 물론 대중들이 다시한번 우리둘이서 같이 활동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으니까. 뭐 이때쯤엔 인기를 생각하기 보단, 서로가 아마 여기서 조금이라도 힘들어지면 활동에 대해 깊은 고민을 생각할정도로 많이 지치고 외롭고 뭐 힘들었다. 물론 구창모씨가 나보다 더 외로웠을수도, 나는 그래도 같이 다니니까 (웃음), 뭐 아무튼 그래서 구창모씨 와 재합류를 해서 앨범을 내든 아님 잠깐이라도 같이 활동하게 프로잭트 앨범이라도 같이 해볼려고 많은 노력을 조금한거같다. 근데 흩어진 사람들끼리 무엇을 모여서 다시한다는건 참으로 진짜 어려운일이다. 나같은 경우도 송골매라는 타이틀이 있고, 맴버가 바뀌는 와중에 클럽도 그렇고 자니윤쇼에서도 1년간 고정출연하면서 연주력이 많이 좋아졌지만, 그때쯤 되니까 사람들은 우리의 노래보단 우리의 연주만 보고 내가 하고싶은 음악보단 싫어하고 하기싫은 음악만 하니까 어쩌면 2집 3집 5집때보다 힘들면 더 힘들었지 더 좋아질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창모씨도 아마 자기는 그렇다 쳐도 비교적 잘 활동하고있는 밴드에 불쑥다시 들어가서 피해만 준다고 생각할수도 있고 또 같이한다고 해도 또다른 부담감과 기대감, 그리고 그의 충족여부에 따라 박수가 될수도 있고, 비난이 될수도 있으니까. 외람된 예기지만, 우리팀의 새로들어온 막내 맴버 "베이스 이태윤"이라고 귀여운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베이스도 곧잘하면서 노래도 창모씨보단 아닐지언정 특유의 미성이 있었다. 처음 그친구가 인사하러 오고 바로 합주하고 연주할때가 있었는데 그때 그의 모습을 보고 " 태윤아 앞으로 우리 형들하고 멋지게 활동 해보자" 라고 내가 말하였다. 그래서 내심 맴버들에게 기회를 주기위해서도 있고, 이태윤이를 제2의 구창모로 한번 키워볼려고 8집의 타이틀곡을 내주었다. 근데 만족은 쓰러울지 언정 나름대로 그친구도 많이 힘든 부분도 있었던거 같다. 뭐 설명하자면 길어서 여기까지만 말하겠다. 물론 나중에 그친구는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 조용필과 위대한탄생에서 베이스를 치니까. 아무튼 근데 이런 케이스와 같이 이제는 송골매와 구창모는 별개의 상황에서 앞써 예기한 변화에 대해 대중들이 별로 선호하지 않았고, 물론 우리도 쫌 겁도 먹었고 두려움도 있는거같다. 아니나 다를까 나는 얼마후에 밴드를 해체하고 DJ 로 전념하고, 구창모씨도 개인적인 사건과 사업으로 인해 떠나게되고 이미 재결합의 가능성은 먼미래로 가게 된것이다. 그래서 각자 활동에 전념하면서 " 언젠가 우리가 다시 모여서 밴드를 같이하자" 라고 시작된것이다. 이게 아마 역사에 시작인것이다.(웃음) 물론 지금도 재결합에대해 만날때마다 예기중이다. 언젠간 마지막으로 꼭 무대에 같이 오를것이다. {{{#!wiki style="text-align:right"
- 배철수 인터뷰}}}" 내가 생각한 송골매라는 밴드는 "연주력을 향상 시키기 위한 노력의 역사다" 라고 생각한다. 마치 회색 분자처럼 너무 위도 아니고 그렇다고 너무 아래도 아닌 그저 쭉 중간에만 머물러 있던 그런 밴드였다고 생각한다. " 밴드가 오랫동안 유지되기 위해 어떤 과정과 노력, 그리고 변화가 있었는가?" 라고 쉽게 생각하면 그렇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인생의 전부"였다고 생각한다.{{{#!wiki style="text-align:right"
- 배철수 인터뷰}}}4. 총평
송골매 9집에 들어서 나름대로 앨범의 분위기가 다시금 옛날 송골매가 가지고 있던 소울? 이랄까? 아니면 가지들이 추구하던 그런 "색"을 찾아서 활용하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대단히 히트를 했다고는 못했지만,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나름 히트했던 철학적인 뜻이 담겨있는 가사의 "모여라" , 송골매의 골수팬들의 눈물을 훔쳤던 "사랑하는 이어 내죽으면", 나름대로 송골매의 보컬로써 이름을 알리던 이태윤의 "그대떠난 이름아침", "새맑음 ", "그이름", 아이돌 밴드그룹 들의 드럼 세션을 거친 드럼 이건태의 "부가루" 라는 곡들처럼 자신들이 해야되고 가지고있는 "색"을 후기맴버들이 2집,3집,5집을 발표하게되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든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니윤쇼" 의 고정 출연하여 방송 하우스 음악을 연주하게 되면서 송골매 밴드 자체의 연주력을 보여줘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INTRODUCTION" 을 삽입하여 시그널(테마) 음악을 산입 하여 연주력을 과시하게 된다. "자니윤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아마도 이 9집앨범은 대한민국에서 송골매가 가장 연주를 잘한다는것과 송골매라는 밴드가 아직 살아있구나를 한마디로 저력을 보여준다. 송골매 후기 라인업에서 비교적 가장 좋다고 생각된다.타이틀곡: 모여라, 그대 떠난 이름아침
추천곡: 모여라. 그대떠난 이름아침, 사랑하는 이어 내죽으면, 부가루, 그이름, 새 맑음, INTRODUCTION
[1] 심지어 1980년대 극후반에 정점을 찍었다 할 정도로 인기인이었고 젊었던 변진섭, 김완선 등도 1992년 이후에는 확연히 내려갔다. 음악계에서 더 오래 버틴 극소수의 사람들, 김종서도 92년 이후에도 A급 가수였지만 예전만 못했다. 살아남았다는 것도 김종서를 제외하면 신해철, 이승환, 김현철 등 거의 88~89년 사실상 89년에 데뷔한 그 몇몇 동년배들만이 살아남았을 뿐이다. 고등학생 때 데뷔한 이승철은 좀 일찍 데뷔한 예외긴 하지만... 그 외에는 김태원처럼 전면에 나서는 보컬이라기보다는 좀 작곡가나 프로듀서에 가까운 애매한 케이스의 인물들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