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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설


파일:보관문화훈장 약장.png
보관문화훈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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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설
白年雪 | Baek Nyeon-seol
파일:백년설컬러사진.jpg
<colbgcolor=#808080><colcolor=#fff> 본명 이갑룡 (李甲龍)[1] → 이창민 (李昌民)[2]
출생 1914년 5월 19일[3]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면 예산리[4]
사망 1980년 12월 6일 (향년 66세)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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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본관 성주 이씨 (星州 李氏)[6]
가족 아버지 이형순, 어머니 김차악 [7]
형 이판용(1905년생)
배우자 심연옥(1957년 결혼)[8]
딸 이혜정
아들 이길영(1963년생) 외 5남 4녀[9]
직업 가수, 작사가
종교 불교여호와의 증인
학력 성주공립보통학교 (졸업)
성주농업보습학교 (졸업)
한양부기학교 (졸업)
데뷔 1939년 '유랑극단' 발매
경력 콜럼비아레코드사 전속작사가
태평레코드사 전속가수
대한가수협회 초대회장
서라벌 레코드사 창립자

1. 개요2. 생애3. 여담4. 대표곡

1. 개요

일제강점기에 주로 활동했던 가수. 본명은 원래 이갑룡(李甲龍)이었지만, 늘 이창민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다 결국 1964년에 정식으로 개명했다. 1950년대에 작사가로 활동할 때엔 향노(鄕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었다. 8.15 광복 이전의 작품이 현재 80여 곡가량 확인되고 있다. 남인수와 같은 시대에 그와 쌍벽을 이루는 인기를 누렸다.

2. 생애



1914년 5월 19일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면(현 성주군 성주읍) 예산리 414번지에서 아버지 이형순(李瀅淳, 1887. 6. 20 ~ 1948. 5. 19)과 어머니 김차악(1887. 4. 15 ~ 1918. 8. 3)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10]으로 태어났다.[11] 1922년 성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고, 1928년에 졸업했다. 1929년 성주농업보습학교(現 성주고등학교)에 입학해 1931년에 졸업했다. 이후 경성으로 가서 한양부기학교에서 2년간 공부하다가 은행과 신문사에서 잠시 근무했다고 한다.

한양부기학교를 졸업한 백년설은 애당초 가수가 되려는 생각은 없었다. 서울에 올라와 이름을 이갑룡에서 이창민(李昌民)으로 바꾸고 시와 희곡을 쓰며 문학에의 포부를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23세 때에 테너 안기영으로부터 시에 소질이 있음을 인정받아, 1936~1937년 무렵부터 콜롬비아레코드사에서 작사 활동을 하게 된다. 그 무렵부터 작사가 박영호, 가수 채규엽·박향림 등과 교류를 하기 시작하였다.
파일:청년시절_백년설.jpg
▲ 20대 시절의 백년설

백년설은 1938년 12월, 극작 공부를 하기 위해 일본에 가던 중, 태평레코드사의 문예부장 박영호 일행과 합류되어 일본에서 가요「유랑극단」[12]를 시험삼아 취입하게 되었다. 이 가요는 다음해인 1939년 1월에 발매되어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그는 가수가 되기로 결심하였고, 태평레코드사 전속 가수가 되었다.

그는 언제나 백의민족의 기상을 지니고 싶다는 꿈과 포부를 담아 스스로 예명을 '백년설'이라 붙였다. 1940년에는 뒷날 그의 대표곡이 되는 「나그네 설움」, 「번지 없는 주막」등을 발표하면서 남인수와 함께 당대의 대표적인 가수로 등장하게 된다. 이때 나온「번지 없는 주막」·「산 팔자 물 팔자」 음반에서부터 우리나라에서 '대중가요'란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백년설은 자신이 소속된 태평레코드가 운영난으로 인해 일본기업에 예속되게 되자, 1941년 12월 파격적인 대우를 해준 오케레코드사로 이적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는 「고향설」(1942), 「아주까리 수첩」(1942) 외에는 큰 인기곡을 낳지 못하였다. 그의 대표곡 대부분 「고향 길 부모 길」 「두견화 사랑」 「일자일루」 「석유등 길손」 「어머님 사랑」「산 팔자 물 팔자」 「한 잔에 한 잔 사랑」 「만포선 길손」 「비 오는 해관」 등은 태평레코드사에서 탄생된 것 들이다. 이런 가요들로써 당시 백년설은 1940년대를 대표하는 남자 가수로 활동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인기를 모은 남인수, 김정구, 진방남의 목소리가 또랑또랑한 편이라면, 백년설은 음정을 흔들어 구수하면서도 듣는 이에게 국권을 잃은 겨레의 심정을 잘 어루만져 주는 듯한 독창적인 호소력이 특징이다. 듣는 이에게 친근한 한국의 얼을 담은 맛을 주는 백년설의 창법은 서민적인 취향의 노래와 잘 어울려 오랫동안 절대적인 인기를 유지하였고, 민족의 가객으로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백년설은 8.15 광복이 되던 해 9월, 대구에서 <봉화가극단>을 조직하여 연극 「깃발을 흔들던 날」을 공연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해방 후 최초로 공연된 연극이다. 이듬해에는 김해송이 이끄는 유명한 KPK 악극단에 특별출연하기도 하며 절정의 인기를 누렸다. 6·25 전쟁 후에는 일제강점기 시절 자신이 군국가요를 불렀다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껴, 가수로 활동하기 보단 목재사업, 고아원 운영과 같은 자선사업에 몰두하였고, 경향신문 동경지사를 경영하기도 하였으나 사업 활동은 그의 본령이 되지는 못하였다. 그 이후에도 다시 음반을 내기 시작하였으나, 이전보다는 가수 활동이 부진했다. 1953년에는 서라벌레코드사 설립, 1956년에는 대한레코드작가협회 감사, 평화신문사의 사업국장, 1958년에는 센츄리레코드사 문예부장 등 사업에도 관여, 백민영화사 창설, 한국가수협회를 창립하여 초대 회장을, 1963년에는 한국연예단장협회장을 지냈다. 1963년 7월에 은퇴공연을 하며 공식적으로 가수 생활을 끝냈다.[13]
파일:은퇴공연_백년설.jpg
▲ 1963년 은퇴 공연 中 그의 모습

1967년부터 1970년까지 경향신문 일본지사장을 맡았다. 1970년대 중반에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었지만 극적으로 회복했다. 1978년 9월 백년설은 자제들의 초청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가서 이민생활에 적응하다가 식도암[14]으로 1980년 12월 6일에 향년 66세로 사망했다.[15] 사후 성주 성밖숲에 있는 그의 노래비와 그의 모교 교정에 흉상과 노래비가 세워졌다. 2002년에는 대한민국 문화훈장 보관장이 추서되었다.

2.1. 일제강점기 활동

백년설은 본래 독립투사로 옥사한 형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성주농업보습학교 시절 일본인 교사가 급우를 폭행한 데 항의해 동맹 휴학을 주동하다 일경에 끌려가 고초를 겪는 등 항일 의식이 강했던 사람이었다. 히트곡인 '나그네 설움'과 '번지없는 주막'의 가사가 '망국의 한'을 표현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불려가 엄청난 고문을 당한 것은 물론이고 지방공연 때는 형사들이 동행할 정도로 요주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백년설은 ‘나그네 설움’, ‘번지없는 주막’, ‘복지만리’ 등을 유행시키면서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 반열에 올랐고, 이러한 인기를 바탕으로 일제는 그를 침략전쟁의 선전에 이용했다. 백년설은 1941년 태평양 전쟁지원병으로 참여할 것을 독려하는 노래를 불렀다. 2008년에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명단의 음악 부문에 선정되었지만 이후에 그의 이름은 친일명단에서 삭제되었다. 심의 기각 결정의 배경은 "첫째, 단체 소속인 전속가수의 경우 소속 단체의 요구를 뿌리치기가 어렵고, 둘째, 이창민(백년설)은 대중음악 가수로 ‘혈서지원’ 등 군국가요를 부른 사실과 기타 친일행위가 인정되기는 하지만, 당시 대중가수가 지니는 사회적 위상이 상대적으로 낮았다는 점이 참고돼 기각한다"고 했다. (출처: 백세시대)

백년설이 몸담은 오케레코드도 비록 설립자인 이철이 친일파 인맥으로 큰 것은 사실이나 그 역사를 보면, 일본인 앞에선 '을'의 위치였음을 알 수 있다. 백년설이 친일 가요를 녹음했을 때는 일제강점기 말기로, 이철이 권한을 잃고 일본인의 간섭이 심해졌던 시기다. 따라서 소속 가수들은 '을'도 못되는 '병', '정'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백년설이 순수히 자신의 의지로 일제를 옹호하는 노래를 불렀다기보다는 일제의 압력에서 어쩔 수 없이 불렀다고 보는 것이 위 민족문제연구소의 삭제 사유인 것.

하지만 많은 일제 시대 기록이나 행적들이 그렇듯 백년설이 본인의 친일적 행보에 대한 판단 근거를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단정짓기는 힘들다. 때문에 백년설 같은 당시 가수들의 친일 행적을 야마구치 요시코(중국명 리샹란)[16]가 했던 그것과 같다고 보아야 할지, 아니면 전두환 시절에 '아! 대한민국' 같은 관제 가요를 부른 정수라 같은 가수의 사례와 비슷하다 보아야 할지, 혹은 일종의 강제징용이거나 북한 김씨 왕조 치하 연예인의 경우와 유사하다 볼 수 있는지는 좀 더 구체적인 연구를 통해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이다.

3. 여담

1980년대에 건설부장관, 내무부장관, 대구직할시장을 역임하였던 성주군 출신의 이상희 전 장관이 한때 백사모 (백년설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회장을 맡으며, 백년설의 인생을 알아보기 위해 전국에 있는 백씨의 지인들 수십 명을 직접 만나 그의 인생경험과 철학, 가치관들을 알게 된 그는 백년설이란 인물에 대한 깊은 감동을 받고, 그가 한때 일제강점기 시절에 불렀던 일본 군가 때문에, 그의 인생전체가 친일파로 매도되고 있는 것 같은 사회 분위기를 개탄하고 그의 인생을 재조명해서 《오늘도 걷는다마는》[17]이라는 그의 전기를 집필하여 출판하기도 하였다.

고향인 성주군에서 전국노래자랑이 개최될 때마다 백년설이 언급된다.

4. 대표곡


[1] 본명이 이갑용(李甲勇)이라는 설도 있다.[2] 족보상 이창민(李昌).[3] 성주이씨대동보 4권 912쪽에는 11월 19일생으로 등재되어 있다.[4]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예산리 #[5] 말년에 미국에서 살기는 했지만 국적은 끝까지 대한민국이었다.[6] 문열공파 21세손 ○용(○龍) 항렬.(족보)[7] 선산 김씨[8] 아내의 노래 등을 부른 가수이다.[9] 전처의 자녀들까지 포함. 심연옥 소생은 1남 1녀.[10] 3남 1녀 중 셋째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11] 성주 성밖숲성주고등학교에 백년설 노래비가 있다.[12] 〈유랑극단〉과 관련된 그의 일화로, 이 곡을 받아 처음으로 연습을 할 때 가사는 단지 1소절만 있었는데,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활용하여 즉석에서 가사를 완성하고 노래연습을 마쳐 취입을 했다고 한다. 이는 그의 독보적인 가수의 행보를 열게 된 계기가 되었다.[13] 은퇴공연 이후 1973년에, 오아시스레코드에서 부탁해서 <백년설 독집>을 냈다.[14] 담낭염이란 말도 있다.[15] 일설에 따르면 더 생존할 수 있었는데 종교적 수혈거부로 사망하였다고 하는 말도 전해진다. 백년설이 50년대부터 심취했던 여호와의 증인에서는 다른 사람의 피가 몸으로 들어오는 것을 교리를 어긴다고 여겨 수혈거부로 죽는 신도가 꽤 있다.[16] 중국인으로 위장해 군국주의 선전 활동을 펼친 일본인 여가수. 히키아게샤.[17] 나그네 설움의 가사 첫 소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