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colbgcolor=#ffffff,#1f2023>임종국(林鍾國) |
본관 | 나주 임씨[1] |
출생 | 1929년 10월 26일 |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면 신당리 (현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말흘리 신당마을)[2] | |
사망 | 1989년 11월 12일 (향년 60세) |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순천향병원 | |
학력 | 재동심상소학교 (졸업) 경성공립농업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정법대학 (정치외교학 / 중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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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광의 기록만이 역사는 아니다."
"친일한 일제 하의 행위가 문제가 아니라 참회와 반성이 없었다는 해방 후의 현실이 문제였다. 이 문제에 대한 발본색원의 광정이 없는 민족사회의 기강은 헛말이다. 민족사에서 우리는 부끄러운 조상임을 면할 날이 없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남긴 유고 中
자신이 남긴 유고 中
대한민국의 문학평론가, 역사학자, 연구자. 친일반민족행위자 연구에 평생을 헌신하여 그 기초를 세우고 닦은 인물이다.
2. 생애
1929년 10월 26일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면 신당리(현 창녕군 창녕읍 말흘리 신당마을)에서 일제강점기 때 천도교 지도자를 역임한 아버지 임문호(林文虎)[3]와 어머니 경주 김씨 김태강(金泰強) 사이의 4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33년 가족 모두가 경기도 경성부로 이주하였으며, 1942년 재동심상소학교(현 서울재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공립농업학교에 진학하였다. 재학 중 태평양 전쟁이 종전되어 8.15 광복을 맞았으며, 이후 교사와 음악가, 경찰 등 여러 진로를 놓고 방황하였다.
1952년에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하였다가 경제적 사정 때문에 2년 후 중퇴하였다. 그후 이상 전집(총 3권)을 펴내며 문학평론가로서 자리잡나 싶었는데, 자료수집 과정에서 유명 작가들의 일제강점기 시절 친일 행적들을 발견하고, 이에 분노하면서 본격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연구를 시작하여 <친일문학론>을 저술하였다.
특이한 사실로는 아버지인 임문호가 바로 친일 부역자였다는 것이다. 임문호는 천도교 지도자였는데 수차례 일본의 식민지 정책 및 대외 침략 전쟁에 동참할 것을 선동한 행적이 있었다. 임종국 본인도 친일파에 대한 연구서인 <친일문학론>을 집필하던 도중 아버지의 이러한 행적을 알고 상당히 괴로워했다. 하지만 임문호 본인이 "(그 책에) 내 이름도 넣어라. 그 책에서 내 이름 빠지면 그 책은 죽은 책이다"라고 말하였단다. 그래서 결국 <친일문학론>에 아버지 이름이 들어가지만, 당시 시대 상황상 별다른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초판 발행했던 1,500부가 다 팔리는데 13년이 걸렸다고 하니... 그나마 1,000부는 일본에서 연구를 목적으로 구입했다고 한다.
이후 광적으로 친일 관련 자료를 모으는데 주력했는데 중학생이던 아들과 몇 달씩 도서관에서 자료만 모은 적도 있다고 하니.. 본인 스스로는 약 15년 간 자료수집을 했다고 얘기한다. 말년까지도 모은 자료들을 정리, 기록할 정도 얼마나 자료 수집에 열을 올렸는지 조선총독부 관보 35년분 2만 매를 전부 복사하였으며,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10년분은 일일이 필사하기까지 했다. 말이 10년분이지. 신문 10년분이다. 아무리 현대의 신문과 당시 신문의 볼륨이 다르다지만...... 그 자료를 바탕으로 친일파들의 이름, 생몰연대, 인물별, 단체별 주요 친일 행적을 메모한 '친일인명카드'는 훗날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4]
이후 친일파 연구를 계속 하다가 1989년 11월 12일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순천향병원에서 폐기종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사후 장례식에서 임종국의 유지를 받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설립되어 활동하고 있다. 임종국의 묘지는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신덕리에 있는 천안공원묘원에 있다.
3. 저서
- 《이상 전집 1~3》 (1956)
- 《친일문학론》 (1966) - 임종국의 대표작
- 《흘러간 성좌》 (1966)
- 《발가벗고 온 총독》 (1970)
- 《한국문학의 사회사》 (1974)
- 《한국사회풍속야사》 (1980)
- 《정신대 실록》 (1981)
- 《일제침략과 친일파》 (1982)
- 《밤의 일제침략사》 (1984)
- 《일제 하의 사상 탄압》 (1986)
- 《한국문학의 민중사》 (1986)
- 《친일논설선집》 (1987)
- 《일본군의 조선침략사 1~2》 (1989)
- 《일제 침략과 친일 마적단》 (1991)
- 《실록 친일파》 (1991)
- 《친일, 그 과거와 현재》 (1994)
- 《한국인의 생활과 풍속 1~2》 (1995)
- 《여심이 회오리치면》 (1995)
- 《빼앗긴 시절의 이야기》 (1995)
- 《또 망국을 할 것인가》 (1995)
- 《여인열전》 (2006)
4. 여담
재야사학자로서는 이례적으로 주류 역사학계로부터도 인정받는 드문 경우에 속한다. 본래 재야사학은 역사학의 비전공자들이 주로 뛰어드는 관계로, 사료에 대한 아전인수격 해석을 하거나 뇌피셜이 들어가는 등으로 유사역사학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많은데[5], 임종국은 방대한 양의 사료를 수집하고 이를 하나하나 꼼꼼히 분석하는 정성을 들이면서 그런 위험을 피해갔기 때문이다[6]. 물론 대한민국의 역사학자인 한홍구[7]가 지적했듯이, 아직까지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연구는 이들 개개인에 대한 신상털기 수준에 그친다는 한계는 있으나, 이 정도 수준까지라도 기반을 다져놓을 수 있었던 건 임종국의 공로가 매우 크다.친일파 연구로 인해 채명신 장군과 만난 일화가 있다. 채명신의 처조부[8]는 일본군에 비행기를 헌납할 정도의 거물 친일파인 문명기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채명신 부부가 사실 확인을 위해 찾아왔는데, 임종국이 내민 증거 자료를 확인한 뒤 이를 인정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이 일은 훗날 채명신이 간도특설대 출신인 백선엽의 원수 추대를 반대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친일파라는 평가를 받아온 김홍집에 대해, 숙연한 최후에 대해 언급하며, 친일을 인정하면서도 또한 애국자라고도 평가했다. 여느 친일반민족행위자와는 다르게, 자신의 영달이 아닌 조선의 개화를 위해서 일본과 손을 잡았을 뿐이라서 매국노라고 평가할 부분이 없기 때문이다[9].
사후에 정운현이 《임종국 평전》을 출간하였다. 그의 일생은 물론, 가족들과 지인, 친지들의 증언을 통해 생전의 그의 모습을 생생히 살펴볼 수 있다.
임종국은 조정래의 소설 한강의 후반부에 한인곤과 같이 나오는 그 인물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는 세 명의 실제 인물이 등장하였는데 그것이 전태일과 임종국 그리고 김진홍 목사이다.[10] 당연히 당대 역사 인물들의 실명이 거론되지만 중심 인물로 묘사한 것은 이 세 명.
《임종국 평전》에 실린 가족들의 증언에 의하면, 성품은 완벽주의에 가까웠던 듯 하다. 글을 쓸 때 만큼은 굉장히 까탈스러운 편이었는데, 특히 그가 중요한 원고를 쓸 때에는 그의 여동생들은 물론 심지어 어머니조차도 큰 소리를 내기가 어려워 함부로 화장실가는 것도 꺼렸다고. 집안에서 조금이라도 소음이 들리면 벌컥 화를 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2016년 11월, 그를 기리는 조형물이 천안 신부공원에 건립되었다. #
[1] 절도공파 29세 종(鍾) 석(錫) 항렬.[2] #[3] 족보명 임문규(林文圭).[4] 하지만 오류가 있기도 했다. 그가 쓴 자료 중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이갑성을 친일파로 기록했는데, 이는 사실무근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결국 이갑성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출판한 친일인명사전에서 제외되었다. 이 부분은 이갑성 및 민족문제연구소 항목 참조. 이 부분은 어디까지나 '시대의 한계 및 자료 미비에 의한 오류' 정도로 보는 편이 맞다. 어떤 역사책도 실제 역사적 사실을 한 점 오류도 없이 담아낼 수는 없을 뿐더러(당장 관련 자료가 후대에 가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경우가 역사 연구에서는 상당히 많다), 국가나 단체가 아니라 개인이 혼자서 연구해서 낸 성과에 그 정도 오류도 없는 것이 이상하다.[5] 환빠나 노론 음모론자들이 대표적인 경우에 속한다.[6] 이렇게 방대한 양의 사료를 입수해 상세한 분석을 하는 것은 역사학자들에겐 기본 중의 기본이다만, 재야사학자를 자칭하는 유사역사학자들이 이것조차도 똑바로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보니, 임종국이 이런 면에서 진짜 제대로 된 재야사학자로 평가받을 수 밖에 없다. 일례로 노론 음모론으로 유명한 이덕일은 종묘를 가리키는 한자(廟)조차 엉뚱하게 해석하는 수준으로 한문 독해에 대한 기본 지식조차 없어서, 국문학자인 정병설에 의해 이 사실이 뽀록나고 뼛속까지 탈탈 털린 바 있다.[7] 한국의 현대사 연구로 유명한 학자이자 북한사 연구의 권위자로, 한국 좌파 진영의 주요 인사로 활약하기도 했다.[8] 부인의 할아버지[9] 실제로 김홍집은 실각 이후에 망명을 권유하는 일본 측에, "나는 조선의 총리로서, 내 나라 사람들의 손에 죽겠다."며 퇴짜를 놓고는 담담히 죽음을 맞은 바 있다.[10] 뉴라이트의 주도자인 그 김진홍이다. 청계천 천막 교회 시기와 두레마을 운동 벌일 때에는 지금의 김진홍이 될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