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dd,#000><colcolor=#000,#ddd>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 Houston Stewart Chamberlain | |
출생 | 1855년 9월 9일 |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 햄프셔 포츠머스 사우스시 | |
사망 | 1927년 1월 9일 (향년 71세) |
바이마르 공화국 바이에른주 바이로이트 | |
직업 | 철학자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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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과 독일의 철학자이자 작가. 독일 민족주의와 푈키셔 내셔널리즘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영국 햄프셔에서 태어난 그는 작곡가 바그너에 대한 애호 때문에 독일로 이민을 갔으며, 1916년에는 독일 시민권까지 얻었다. 그는 바그너 사망 25년 후인 1908년 12월에 바그너의 딸 에바 폰 뷜로와 결혼했다.
2. 생애
자세한 내용은 휴스턴 스튜어트 채임벌린/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3. 사상
자세한 내용은 휴스턴 스튜어트 채임벌린/사상 문서 참고하십시오.4. 평가 및 영향
그의 저서 <19세기의 기초(The Foundations of the Nineteenth Century)>는 출간된 지 10년 만에 6만부, 1914년까지 10만 부, 1938년까지는 25만 부 이상이 판매되어 당시의 베스트셀러였다고 할 수 있다.<기초>의 성공으로 체임벌린은 대중 사이에서 유명해졌다. 독일 내 개신교 다수 지역의 많은 고등학교 교사들이 <기초>를 학생 필독서로 지정하기도 했다. 또한 보수주의 및 자유주의 성향의 신문들은 <기초>를 매우 높이 평가했다.
<기초>의 1911년 영어 번역본은 언론 및 지식층 사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스펙테이터 지에서는 "이 책은 뛰어난 학식의 기념비"라고 찬양했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이 책을 읽고 체임벌린과 친구가 되었다. 두 사람은 자주 서신을 주고받으며 교류하는 사이였다.
푈키셔 내셔널리즘 지지자들은 <기초>를 두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책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및 친유대 성향 매체들은 <기초>가 비이성적이고 강박적인 반유대주의로 가득하다고 비판했으며, 미국의 좌익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체임벌린이 극단주의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5. 여담
- 네빌 체임벌린의 가족이라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 원래 천주교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으나 20세기에 들어 입장을 바꿨다.
- 예일 대학교 및 존스 홉킨스 대학교 등에서 강의 요청이 들어오기도 했으나 정작 체임벌린은 미국과 같이 문화적, 정신적으로 타락한 국가를 방문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