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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0-21 17:13:35

천도논쟁

1. 개요2. 배경3. 전개
3.1. 우한 천도론의 대두
3.1.1. 강서전역3.1.2. 10월 연석회의3.1.3. 우한 천도 결정과 노산회의3.1.4. 임시연석회의의 출범
3.2. 난창 천도론의 대두
3.2.1. 장제스의 난창 천도론3.2.2. 연석회의의 반박3.2.3. 장제스의 우한 방문3.2.4. 장제스의 양보
3.3. 충돌의 격화
3.3.1. 장제스의 공격3.3.2. 우한의 공격3.3.3. 3중전회 예비회3.3.4. 2기 3중전회
4. 결과5. 참고문헌
5.1. 저서5.2. 논문
6. 관련 문서

1. 개요

국민혁명, 그 중에서도 국민당의 1차 북벌 시기 동안 1926년 말에서 1927년 초에 걸쳐 장제스와 국민당 좌파 및 중국공산당 간에 벌어진 천도 문제를 뜻한다. 이는 영왕운동과 겹쳐져 중국국민당 내부에 극심한 분열을 가져왔고 결국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로 폭발하게 된다.

2. 배경

1926년 3월의 중산함 사건으로 국민정부 주석 왕징웨이를 실각시키고 소련 고문 미하일 보로딘을 굴복시켜 당무정리안을 받아내어 국민당을 장악한 장제스는 중산함 사건 이전부터 주장해 왔던 북벌에 나서게 되었다. 1926년 7월, 장제스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으로써 북벌을 선포했고 탕성즈의 8군을 중심으로 호남, 호북의 우페이푸 세력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어 7월 14일 장사를 점령하고 9월 6일 한양, 9월 7일 한커우에 이어 10월 10일 우창을 점령하여 우한 삼진을 모두 장악함으로 호남과 호북에 대한 군사작전을 대부분 완료했다.

하지만 호남과 호북 공략 과정에서 원래 호남이 기반이었던 탕성즈는 휘하의 허젠, 이품선, 섭기, 하두인을 중심으로 장제스에게 군사적 영도권을 내놓지 않으며 호남, 호북에서의 군공을 독점하여 영향력을 강화하려 했다. 이는 북벌 이전부터 국권을 장악하려 했던 장제스에 대한 큰 위협이었다. 결국 호남과 호북의 지배권을 두고 장제스와 탕성즈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자 장제스는 탕성즈를 제어하기 위해 국민당 중앙당부 와 국민정부를 우한으로 천도할 것을 제안했다. 이는 탕성즈의 세력을 억누르기 위함이었다.

장제스의 제안에 따라 천도논쟁이 드디어 현안에 올랐지만 여기에 중산함 사건 이후 벌어진 영왕운동과 더불어 강성해지는 장제스의 정치, 군사적 영향력을 견제하려는 당권파와 중국공산당의 장제스 견제 운동이 벌어지면서 논쟁은 위험한 수위에 이르게 된다. 1926년 10월 15일 중앙위원회에서 보로딘은 탄옌카이와 장인걸에게 장제스의 비군사 부문 직책을 몰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왕징웨이에게 전권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반장운동은 더욱 거세졌다.

3. 전개

3.1. 우한 천도론의 대두

3.1.1. 강서전역

장제스의 천도 주장에 대해 중국공산당은 호북에 국민당 좌파의 세력이 약해 국민정부가 이전하면 국민정부가 우경화될 수 있다고 판단했으며 우한 천도는 장제스 등이 왕징웨이의 귀국을 막고 탕성즈를 억제하기 위한 술책이고, 만약 국민정부가 광동에서 벗어나면 광동이 공산당의 통제에서 이탈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에 천도에 대해 강력히 반대했다.

그러던 중 1927년 9월 장제스와 청첸쑨촨팡이 지배하는 강서성에 대한 공략을 시작했다. 국민혁명군은 초기에 9월 19일 난창을 점령하는 등 순조롭게 저닌했으나 쑨촨팡의 반격으로 장제스의 직계군인 1군 1사단의 반이 전사하고 난창을 빼앗겼다. 장제스는 10월 11일 난창에 대한 2차 공격을 감행했으나 실패하고 10월 16일 강서성에서 후퇴했다. 장제스의 군사적 기반인 직계군의 피해가 컸다는 것과 장제스의 명성에 손상이 갔다는 것은 장제스의 정치적인 영향력의 감소를 의미했다. 이에 장제스의 자리를 노리던 탕성즈는 장제스를 비웃으며 자신이 총사령관을 맡으면 강서성 뿐만 아니라 난징까지 점령할 수 있다고 떠벌렸고 사실 장제스는 하는 것이 없고 장제스의 군사고문 바실리 블류헤르가 모든 것을 다하고 있다고 소문을 퍼뜨리는 등 반장, 도장 분위기를 가중시켰다.

어쨌거나 강서성에서 국민혁명군이 후퇴하는 것은 국민정부 전체적 입장에서 큰 손해였기 때문에 국민정부는 일단 장제스를 원조하기로 했으며 우한 천도에 대해서 강력히 반대하고 있던 중국공산당도 강서의 상황을 낙관할 수 없으니 혁명 전체의 이익을 위해 장제스를 도와 그가 군사적 지위를 잃게 해서는 안된다고 결의하고 장제스를 돕기로 했다.

3.1.2. 10월 연석회의

이러한 분위기에 따라 1926년 10월, 광저우에서 열린 10월 연석회의는 국민정부의 우한 천도와 왕징웨이의 복직에 관해 논의했다. 연석회의는 10월 16일, 국민정부는 잠시 광저우에 두기로 결의하고 10월 20일 왕징웨이 복귀와 복직을 촉구하기로 결의했다. 연석회의는 <성정부 대 국민정부 관계결의안>을 통과시키면서 장제스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였으나 우한으로 수도를 이전하자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타협적인 결과를 내놓았다. 10월 21일 대리주석 탄옌카이가 독전 전문을 보내며 강서성 공격을 독려하면서 연석회의 결과를 통보했다.

여러가지 정치적인 이유를 제외하더라도, 강서성이 국민당의 손에 들어오지 않은 상태에서 우한으로 천도하는 것은 군사적으로 모험이었기 때문에 이때 우한 천도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 자체는 당연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장제스는 상당히 큰 타격을 입었는데 왕징웨이와 친분이 없던 주페이더에게 군사 보충을 요청했을때 주페이더가 영왕복직을 요청할 것을 먼저 요구하는 일이 있기도 했다. 장제스는 이 요구에 크게 놀랐고 이 시기에 영왕운동에 대해 찬성하는 것으로 입장을 선회한 후 10월 22일 우한 천도를 다시 주장했다. 하지만 10월 28일에 폐막된 연석회의는 잠정적 불인정이라는 결론을 바꾸지 않았다.

11월 19일, 장제스는 장런제와 탄옌카이에게 전문을 보내 당 중앙이 빨리 우창으로 천도하지 않으면 정치, 당무가 발전할 수 없으며 혁명의 신근거지도 공고해질 수 없다고 주장하며 중앙당부와 국민정부를 우한으로 옮기기 전까지는 자신이 우한에 갈 수 없다고 하였다. 11월 중, 장제스는 "중국 혁명은 세계혁명의 개시", "불평등 조약의 폐지.", "장차 통일중국에 소비에트 정체 채용." 등의 연설을 하면서 소련과 중국공산당의 지지를 촉구하였다.

3.1.3. 우한 천도 결정과 노산회의

그러던 중 10월 말에 공산당원 덩옌다와 월계군벌 장파쿠이도 우한 천도를 요청하기 시작했다. 또한 소련 군사고문 테루니는 미하일 보로딘에게 보낸 보고에서 "두세명의 중앙집행위원이 우한에 와서 위원회를 성립시키지 않으면 당권 확보가 어렵다."고 보고하면서 우한 천도를 촉구했다. 이에 따라 11월 초, 광동의 국민당 중앙정치회의는 국민정부와 중앙당부의 우한 이전을 결정하고 광동성정부 개조에 착수, 11월 26일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임시회의에서 중앙당부와 국민정부를 우한으로 이전한다는 것을 정식으로 결정했다.

한편 중국공산당은 11월 8일 난창이 다시 국민혁명군의 손에 들어오고 강서 전선이 안정화되자 장제스에 대한 협조 노선을 번복하고 다시 장제스의 군사적 권위를 약화시키는 데에 집중했다. 11월 18일, 중국공산당은 국민정부의 우한 천도와 호북성 정보 조직 문제에 관한 의견을 발표하며 우한 천도를 적극 지지하는 것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여기에는 그간 중국공산당으로부터 나쁜 평가를 받아오던 탕성즈가 소련과 중국공산당에 친근하게 굴면서 대중운동과 삼민주의 지지를 천명하여 공산당의 호감을 산 것도 한몫했다. 마침 호남에서는 활발한 노농운동이 전개되고 있는데 중국공산당은 우한 천도가 이러한 혁명 고양기와 더불어서 혁명의 신근거지 마련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11월 16일, 외교부장 대리 천유런, 교통부장 쑨커, 재정부장 쑹쯔원, 사법부장 쉬첸, 쑹칭링, 미하일 보로딘 등이 광동을 출발하여 우한으로 향했다. 이들은 12월 1일 총사령부가 있는 난창에 도착하였다. 12월 6일 장제스는 우한 천도는 유익무손하다고 크게 만족을 표했다. 12월 7일 쑨커, 쑹칭링, 보로딘, 쉬첸 등은 장제스와 노산회의를 개최, 쑨촨팡 토벌과 장쭤린의 연계, 노농운동의 완화, 토지문제 해결을 위한 기초로서 농민운동의 긍정적 수행, 재정통일, 주석제도 폐지, 장제스의 제의에 의해 영왕복직을 결정했다. 이날 장제스는 우한천도가 매우 중요하며 조속히 준비하는 것에 합의했다. 하지만 노산회의 결과는 국민당 우파와 국민당 좌파 모두에게 시원치 않은 내용이었기 때문에 좌파와 우파 모두 뒤로는 불만족을 표했다.

3.1.4. 임시연석회의의 출범

12월 5일, 국민정부 및 중앙당부는 광동에서 직무정지를 선언했다. 12월 10일 우한에 도착한 보로딘, 쉬첸, 천유런, 쑹칭링 등 국민정부위원들은 보로딘의 제의로 12월 13일 국민당 중앙집행위원 및 국민정부위원 임시연석회의를 성립시키고 국민정부가 우한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우한의 연석회의가 최고직권을 행사한다고 결의했다. 장제스 역시 정무와 당무를 보아야할 조직의 필요성을 부인할 리는 없으므로 12월 20일 덩옌다에게 전문을 보내 "주석 명의로 우한 연석회의를 소집하여, 임시정치회의를 만든다."고 우한 연석회의의 조직에 동의를 표했다.

하지만 임시연석회의는 국민당의 당 규약에 근거하지 않았으며 중앙당부의 승인을 받은 바도 없고 장제스의 합의를 거친 일도 없으며 국민혁명군 총사령부의 권한을 제한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크게 논란이 될 소지가 다분했다. 게다가 원래 친밀했던 사이었던 보로딘과 장제스의 사이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보로딘은 장궈타오에게 "국공분가의 시기가 왔다."고 하면서 장제스와 결렬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장제스가 연석회의를 인정한 것 역시 어디까지나 임시적인 조치로서의 인정이지 자신의 머리 위에서 군림하는 조직의 등장을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연석회의가 기존의 최고의결기구인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회 주석 직위를 가지고 있던 장제스의 권위와 권한을 완벽하게 무시하는 것이라는 것이 드러나자 장제스는 즉각 연석회의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게 되었다.

이후 연석회의 주석에 사법부장 쉬첸이 선출되었고 연석회의 구성원에 쉬첸, 쑨커, 쑹쯔원, 덩옌다, 오옥장, 쑹칭링, 천유런, 둥비우, 왕법근, 탕성즈, 우수덕 등이 선출되었으며 보로딘은 총고문이 되었는데 이들 대다수가 반장파이거나 중국공산당원이었다. 특히 연석회의 주석 쉬첸은 공산주의를 지지하며 장제스를 반대하는 국민당 좌파였다. 이어 1926년 12월 13일 한커우에서 개최된 중국공산당 중앙 특별회의에서 총서기 천두슈가 왕징웨이를 복직시켜 장제스의 권한을 제한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덩옌다가 주임으로 있는 국민혁명군 총정치부도 연석회의 성립 직후 기존의 장제스 옹호 구호를 중앙 옹호로 바꾸면서 반장 태도를 보였다.

12월 15일 개최된 2차 연석회의는 중앙당부와 국민정부가 모두 우창에 있음을 선언했고 1월 3일의 9차 연석회의에서 보로딘의 "혁명세력의 발전으로 중앙집행위원회 전체회의의 소집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수용하여 3월 1일 우한에서 3중전회를 개최하겠다고 결정했다.

3.2. 난창 천도론의 대두

3.2.1. 장제스의 난창 천도론

한편 장런제, 탄옌카이, 허샹닝 등 우한으로 이동하던 중앙집행위원과 국민정부위원 2진이 난창에 도착했다. 이들은 원래 우한으로 가야 했지만 장제스는 이들을 설득하여 난창에 잔류하게 했다. 특히 2진의 중요 인물인 당중앙 상무위원회 주석 대리 장런제는 보로딘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중국공산당과 국민당 좌파는 장런제 등의 절강계와 대립하는 사이었기 때문에 장런제는 장제스에게 국민당 내부의 여러 반장 운동에 대한 소식을 전해주었을 것이라로 추정된다. 특히 10월 15일 중앙위원회에서 보로딘이 장제스의 비군사적인 권한을 몰수하자고 주장했다는 것에 대해서 장제스는 장런제를 만나서야 비로소 듣게 된 것이다. 또한 급속히 팽창된 국민혁명군의 급료 지불 문제 때문에 장제스는 재정통일을 주장하고 있었다. 군비가 권력인 상황에서 자신이 재정권을 장악함으로 국민혁명군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려는 것이 장제스의 일관된 움직임이었다.

허나 장제스의 권한을 약화시키려는 연석회의는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거기에 지나치게 과격한 노농운동과 조계지 무력회수를 포함한 혁명외교[1]에 대해 불안감을 가지던 장제스는 우한 천도에 대해서 반대로 선회하게 되었다.

1927년 1월 1일, 장제스는 난창에서 난창 군무선후회의를 개최하여 군의 통일성을 강조하고 난창을 근거로 안휘, 절강, 강소로 북벌을 할 것을 제안했다. 이에 블류헤르, 덩옌다, 탕성즈는 열강과의 충돌에 대한 우려와 장제스가 부유한 절강, 강소 지역을 장악하는 것에 대한 경계심 때문에 모두 반대했지만 이미 허잉친을 비롯하여 장제스 계열의 부대는 상하이와 난징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장제스는 국민혁명군을 사단 본위로 개편하여 장차 군장 제도를 없애고 군사부를 설치해 군사부가 전군을 관할할 것을 제의했다. 하지만 탕성즈 등 다른 군장들이 이를 반길 리는 만무했다.

1927년 1월 3일, 우한에서 3중전회 개최가 결정된 날, 난창에서 열린 중앙정치회의 6차 임시회의에서 장제스는 "현재의 정치, 군사상의 편리에서 볼 때 중앙당부와 국민정부를 잠시 난창에 둔다."고 결의하고 3월 1일 난창에서 중앙집행위원회 전체 회의, 즉 2기 3중 전회를 소집하여 그때 국민정부의 소재지를 결정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난창 천도론을 주장했고 이로 인하여 우한을 수도로 지지하는 연석회의와 본격적으로 충돌하게 되었다.

3.2.2. 연석회의의 반박

하지만 연석회의는 우한 천도는 이미 결정된 사안이며 한커우 사건으로 외교가 긴장되어 있고 우한이 재정의 중심지이니 난창으로 천도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1월 6일 쉬첸, 쑹칭링, 천유런은 국민정부와 중앙당부는 정한 대로 우한으로 와야 한다면서 난창 천도를 공표하면 "민중이 필경 놀라고 우한 대국은 영향을 받을 것"이라면서 난창 천도 결정 사실을 비밀로 해줄 것을 장제스에게 요청했다. 실제로 난창 천도론에 대해 우한 시민들은 장제스가 영국을 두려워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다. 천유런은 다음과 같이 장제스에게 전문을 보냈다.
최근 영국조계의 점령은 안으로는 민심에 순응하고, 밖으로는 위신을 높였다. (...) 중앙의 영수가 반드시 정치의 중심지에 와야 비로소 적에게 전승할 수 있다.

하지만 1월 7일 난창의 정치회의는 국민정부와 중앙당부 소재지를 난창으로 확인하고 우한에 정치회의 우한분회 조직을 결의했다. 같은날 우한의 연석회의는 "지점 문제에 대한 의결은 중앙집행위원회 전체회의의 결정에 의해야 하고, 결정이 안된 시기의 우한정국은 유지될 필요가 있다."라고 입장을 발표하면서 천도 문제는 국민당 2기 3중전회를 개최해서 결정하고 그 이전에는 우한 연석회의를 취소할 수 없다고 밝혔다. 쉬첸도 "만약 난창에 정부가 설립되어 2개의 중심이 있다면, 영국 조계회수에 대한 대응이 곤란하다.(...) 난창의 중앙위원이 긴급히 우한으로 오도록 촉구한다. (...) 비록 잠시 영국조계를 회수했으나, 아직 충분히 순조롭다고 할 수 없다. (...) 난창으로 옮기면 영국측에게 위축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일뿐만 아니라 민중들이 크게 살망하게 되는 바이다."고 입장을 밝혔다.

3.2.3. 장제스의 우한 방문

난창 천도가 난황에 부닥치자 장제스는 1월 10일 직접 난창 천도론에 대해 우한을 설득하는 것과 군비 문제를 비롯한 각종 군사문제를 통합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난창을 출발하여 1월 11일에 우한에 도착했다. 1월 12일 자신을 환영하는 우창의 환영대회에 참석하여 연설했다.
"내가 오늘 처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한 민중에 의한 최초의 조계 회수의 대성공을 공축한다는 것이다. (...)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최후의 승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단결하여 중국국민당을 옹호하고 당의 지휘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한커우의 조계지 회수는 국민당이 영도한 결과이다."

이는 민중운동을 칭찬하는 듯 하면서도 국민당의 영도를 강조하면서 과격한 노농운동에 대한 비판이 담긴 내용이었다. 다음날인 1월 13일 한커우 각계 총사령 환영 대회에서 우한 연석회의 위원 첨대비(詹大悲)가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오늘 혁명영수를 환영하는 우리들의 성대한 환영회는 마친 한커우 영조계의 회수시기에 거행하는 것으로 3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 장 총사령이 (...) 우한 민중을 한커우 영조계 회수로 나가게 지도할 수 있어, 불평등조약 취소의 발단이 되어 쑨원 총리의 뜻을 이을 수 있다. 둘째, (...) 우리들의 혁명영수가 민중을 계속 영도하려고 노력하여, 잔여군벌을 숙청하고 일체의 조계를 회수하길 희망 (...) 셋째, 현재 반혁명파, 가혁명파, 불혁명파가 (...) 비록 여러 유언비어로써, 도발하고 혁명의 연합전선을 파괴하려 하나, 우리의 장 총사령과 혁명영수가 영원히 우리를 인도하고 지도하여 견고한 혁명중심을 건설하고, 군벌, 제국주의와 모든 반혁명파를 타도하여 국민혁명을 완성하길 희망한다."

이는 장제스의 우한 방문을 우한 천도에 대한 인정으로 이으려는 연석회의의 의도가 담긴 연설이었지만 장제스는 이에 호응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현재 한커우 영조계는 이미 민중의 역량에 의해서 회수되어 외교상 공전의 승리를 획득할 수 있었다. 다만 회수 이후 우한 민중의 역량이 기득의 승리를 보장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승리를 보장하기 위한 요건은 3가지이다. 1. 우한 공농상학계는 마땅히 단결해야 (...) 2. 우리의 이번 외교방침은 마땅히 영 제국주의 단독에 대한 것 (...) 3. 우리를 압박하는 것은 각국의 제국주의이지 외국인이 아니다. (...) 상인은 완전한 자본가가 아니기에 우리의 상계동지를 결코 구축할 수 없고, (...) 상계동지는 공농양계 동지에 대해 마땅히 특별한 우대를 해야 한다. (...) 내가 이상에서 말한 것을 총괄하면 첫째, 외교승리의 보장을 위해 반드시 각계가 일치단결한다. 둘째, 농공총상학병각계는 단결하여 정부의 지휘를 받는다. 셋째, 각계는 단결하기 위해 모두 중국국민당에 가입한다. (...) 이번의 외교 승리! 영조계의 회수! 중국이 80여년간 받아온 역사와 민국이 성립된 15년 내의 역사상 가장 영광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제국주의의 간섭에 대비해 민중운동이 국민당의 영도 아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었다. 이에 1월 13일의 환영대회에서는 기존에 우한 천도를 주장하던 장제스가 난창 천도로 선회한 것을 비난하는 야유가 터져나오기도 했고 보로딘은 환영연회석상에서 "일부 혁명군이 노동자, 농민들을 압박하고 공산당에 반대한다. (...) 그러면 우리들 쪽에서는 그를 타도할 방법을 구해야만 할 것"이라고 발언하여 장제스 타도를 암시했다.[2]

1월 15일의 13차 연석회의는 난창 정치회의의 결정에 따라 우한 연석회의를 해체하고 정치회의 우한분회 조직을 따를 것인지를 논의했는데 회의 결과 연석회의 존치가 결정되었다. 이날, 한커우에서 우한 각계 및 각 당부 대표 400명이 참가하여 장제스 환영회가 열렸는데 이날 각계 대표는 장제스에게 조속한 우한 천도를 촉구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각계에서 당부와 정부와 우한에 오길 요구하는데, 나는 마땅히 중앙에 전달하여 각계의 희망이 충분히 만족될 수 있도록 정하겠다."라면서 자신은 군사의 진전에 따라 옮겨 다니기 때문에 주재지를 정할 수 없다고 밝힘으로 우한 천도에 대한 반대를 돌려 표현했다.

1월 17일, 장제스는 우한에서 회의를 소집했는데 우한 측은 이것이 연석회의의 일부라 주장하고 장제스는 중앙집행위원회 임시회의라고 주장하고 있다. 장제스는 상하이, 난징 공격 계획에 대해서 보로딘과 의논했지만 보로딘은 장제스에게 상하이에 가지 말라고 요구할 뿐이었다. 결국 장제스는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고 난창으로 돌아와야 했다.

3.2.4. 장제스의 양보

우한 측의 태도의 강경함만을 확인하고 난창에 돌아온 장제스는 1월 21일과 1월 22일, 난창에서 중앙정치회의를 소집하여 우한의 각 기관이 공산당과 그 추종자들의 조종을 받고 있으며 법적 근거 없이 중앙집행위원회와 국민정부위원연석회의가 공산당에게 장악되어 있다면서 비난하고 우한연석회의의 개회 정지를 결의하고 연석회의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한편 이전의 결정처럼 우한정치분회 설치를 요구했다. 또한 1월 25일, 덩옌다에게 총정치부 선전과장 주대걸이 공산당원이니 임명을 취소하라고 덩옌다에게 요구하며 총정치부가 발행하는 혁명군일보가 허위선전을 하고 있으니 개조할 것을 지시했다. 또한 장제스는 덩옌다에게 총사령부 참모장을 제안했으나 덩옌다는 장제스를 비난하며 이를 거절했다. 우한 연석회의도 장제스의 요구를 거부하고 편지, 전보, 사람을 파견해 난창에 있는 중앙집행위원들과 국민정부위원들에게 우한으로 오도록 촉구하며 영왕운동을 다시 활성화했다. 반면 장제스는 장즈중을 우한에 파견해 덩옌다 등을 자신의 편으로 회유하고자 했다.

1927년 2월, 장제스는 우한의 연석회의 취소 반대 전문에 대해 회답을 보내 자신이 우한 연석회의의 성립 시에 이를 찬성했고, 우한 연석회의 성립 후 한커우, 구강의 영국 조계지 회수와 같은 외교적 성취, 재정통일 실시, 호남금융 정리, 교통행정 개선 등의 혁명의 기초적 성과가 이루어졌으며 연석회의가 당과 국가의 지위를 증진시켰다고 인정하면서도 난창에 이미 당중앙이 있으니 중앙당부와 국민정부의 이전 전에 최고직권을 행사하겠다고 결의한 우한 연석회의는 취소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이로써 사실상 논쟁은 수도가 어디냐의 문제보다는 연석회의의 합법성 여부와 우한에서 재기하는 군사독재 타도로 변해버렸다. 따라서 연석회의의 입장도 강화되었고 쉬첸은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임시연석회의는 본래 당규약에 의해서 조직된 것이 아니고, 혁명의 이익상에서, 혁명의 요구에 의해서 조직된 것이다. (...) 한커우 영조계의 회수 문제는, 만약 임시연석회의가 없었다면, 외교부가 어떻게 교섭했겠는가? 장제스 동지가 전문을 보내서 외교부의 교섭승리를 치하했을 때, 그것이 임시연석회의가 한 일임을 몰랐는가? 그것이 당의 지도를 받아서 한 일이라고 생각 못했는가? (...) 연석회의는 합법적 기관이다."

보로딘의 경우, 아예 영국과의 조계회수서명을 연기시키려 하면서 연석회의의 정치적 무기인 조계지 문제를 최대한 활용하려고 했다.[3]

조계지 문제 문제와 자신이 우한 천도에 초기에 찬성했다는 점에서 명분상 밀린 장제스는 2월 8일 난창에서 3중전회를 개최한다는 결정을 취소하고 절강성에서의 북벌이 정리된 다음에 기일을 잡아 소집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절강에 이어 상하이로 전선을 확대하면서 자신의 세력 확대를 꾀했고 2월 8일 난창의 정치회의는 연석회의 주석 쉬첸을 주미 대표로 임명해 미국으로 보내고 다이지타오를 주소 대표로 임명해 소련으로 보내기로 결정하여 쉬첸과 다이지타오를 교환하자는 제스처를 보냈다. 또한 2월 8일 정치회의는 중앙당부와 국민정부의 우한 이전을 결정, 2월 10일 중앙당부는 한커우에, 국민정부는 우창에 설치하기로 결정했다.[4] 장제스가 우한의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논쟁은 일단락된듯 보였다.

하지만 우한은 2월 9일 국민당 고급간부회의를 개최하여 민주실행, 독재반대 등을 주장하며 3중전회를 한커우에서 개최할 것을 결정하고 오옥장, 덩옌다, 쉬첸, 쑨커 등 5인으로 행동위원회를 결정하여 영도기관으로 삼아 장제스가 군사독재를 시행한다고 비판했다. 2월 16일 25차 연석회의는 중앙집행위원회 감찰위원과 후보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확대연석회의를 개최하여 우한 연석회의를 종결하기로 결의했다. 이쯤되면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의 의도는 기존의 장제스를 적당히 견제하는 선을 넘어 아예 장제스를 지도부에서 배제시키려는 수준에 이르렀다.

3.3. 충돌의 격화

3.3.1. 장제스의 공격

2월 18일 장제스는 우한에 전문을 보내 "전선의 사태발전과 국민정부군이 현재 전진하는 것에 비추어, 국민정부는 난창에 잠시 주재하는 것이 지휘하기에 가까운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군사상의 이유로 난창 천도론을 다시 주장했다. 2월 19일과 21일, 장제스는 난창에서 연설을 행해 우한의 비난에 일일이 반박하며 자신이 제국주의의 지원을 받아 혁명을 배반할 이유가 없으며 당권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불법적인 연석회의를 없애 중앙집행위원회와 정치위원회의 권위를 존중해야 하며 독재는 자신이 아니라 쉬첸이 하고 있다고 비판했으며 또한 자신이 영왕운동에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있으며 국공합작에도 반대하지 않지만 공산당도 혁명의 일부분이므로 혁명의 지도자로서 공산당의 잘못에 대해서 관여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당권제고와 당권집중이 필요하다고 하나, 당권은 본래 최고의 것이고 본래 집중된 것 (...) 만약에 당권의 분권이 있다면 그것은 한커우의 연석회의이다. 연석회의는 근거가 없다. 만약에 당권을 제고시키려면, 한커우의 연석회의를 취소해야 한다. (...) 한커우의 연석회의는 서산회의와 무슨 차이가 있는가? (...) 나는 단지 쉬첸이 독재제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근거도 없는 한커우 연석회의의 주석이 되어 당의 명령을 받지 않는다. (...) 개인적 감정으로써 나머지 동지를 배척하는 것은 진정한 당원이라고 생각할 수 없고 본당의 부패분자일 뿐이다."
2월 21일 연설, 쉬첸과 연석회의에 대한 비판.
"왕정위 동지와 중정의 관계는 수족과 같아서, 우리는 가장 친애하는 동지 사이라고 할 수 있다. (...) (왕징웨이의 복직의) 유일한 장애는 현재 많은 사람들이 고의로 어떤 분위기를 만들어 그가 돌아오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 만약에 왕징웨이 동지를 구실로 나 중정을 배척하려하거나, 나 중정을 타도하는 무기로 삼으려 한다면, 이는 결코 왕징웨이 동지의 복귀에 좋은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 두 사람의 약점을 이용하여 우리들 국민당 영수가 단결하지 못하게 이용하는데 불과하다."
2월 21일 연설, 영왕운동에 대한 입장.
"현재 중정이 공산당 동지에 대하여 신용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들의 경향을 반대한다는 난언이 있는데, 사실은 그렇게 얘기할 수 없다. 중정은 공산당에 반대할 수 없고, 물론 중정은 공산당을 부조(扶助)해왔다. (...) 그러나 만약 그 당원의 강횡(强橫)한 사실이 발견되면 나는 반드시 그것을 정죄하고 제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 공산당은 중국 혁명세력의 일부분이다. 그래서 공산당원의 좋지 못한 점이 있으면 나는 제재할 책임이 있고, 또한 그 권력이 있다."
2월 21일 연설, 공산당에 대한 입장.

또한 2월 22일 난창에서 중앙정치회의가 소집, 정식천도 전에 우한에서 중앙당부와 국민정부의 명의로 업무를 시작할 수 없다고 우한에 통보하였으며 2월 23일 허잉친바이충시가 군사회의를 소집, 국민혁명군을 3로로 나누어 상하이와 난징을 공략할 것을 결정했다.

3.3.2. 우한의 공격

2월 21일, 우한에서 확대연석회의가 소집되었고 국민당 중앙당부와 국민정부 정식업무 개시를 결정하고 3월 1일 한커우에서 3중전회를 개최할 것임을 확인했다. 2월 24일, 쉬첸은 당의 영도기관을 통일하여 군사, 재정, 외교를 당이 지도할 것, 군사위원회를 회복하여 군사영수를 당의 지휘에 두어야 한다며 장제스를 공격했다.
"구당 운동은 본래 자전의 보편적 요구이다. (...) 그러나 장제스 동지는 구당이 그 자신 개인을 공격하는 것이라 여겨서 매우 나에게 노해 있다. (...) 당 내에는 단지 개인의 능력만이 보일 뿐 당의 권위가 보이지 않아 (...) 이는 장차 혁명행동이 반혁명의 행동으로 되는 것을 피할 수 없게 하는 것이고, 반대로 말하면 그가 장차 반혁명을 혁명이라 할까 두렵다. 장 총사령이 비록 권한이 있으나, 다만 군사지휘권이 있는 것이지 당의 전면에 나서서 당을 운용할 수는 없다. (...) 당이 행동의 자유가 없는 것 (...) 중국국민당이 진정 실패하는 원인은 곧 여기에 있는데 오늘 우리가 당을 개조하는 것은 이 결점을 개정하려는 것이다."
"연석회의는 합법적 기관이다. 이유는 1. 연석회의를 조직한 각 위원회는 중앙당부와 국민정부의 선발대로 우한 도착 즉시 일부 업무를 개시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고 2. 국민정부 및 중앙당부가 정식업무를 개시하기 전에 선발대는 시동 임시조치를 위해 혁명이익의 손실을 피해야 할 책임이 있고, 3. 북벌 기간 중에 우한 연석회의의 위원수가 가장 많았고 4. 연석회의는 영조계지 회수를 실현하여 당과 국가에 큰 공적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중앙군사정치학교 우한분회 학생들이 장제스에게 항의편지를 보내 장제스가 당권을 무시하고 중산함 사건을 저질렀으며 불법적으로 상무위원회 주석제를 만들어 장런제와 천궈푸로 하여금 권력을 독접하게 했고 왕정팅황푸를 통해 제국주의와 타협하고 왕징웨이의 복직에 반대한다고 비난했다. 이에 장제스는 조목조목 반박하며 유언비어와 중상모략에 현혹되지 말라고 맞섰다.

2월 24일, 중국공산당은 둥비우의 주재 하에 호북국민당당원대회를 우한에서 개최하여 구당을 주장하며, 우한 천도를 주장하고 '반동분자'를 공격하면서 신군벌타도의 노래를 군중대회에서 합창하게 하는 등 반장운동에 열을 올렸다. 2월 26일, 장제스는 보로딘을 이 모든 것의 배후로 여기고 중앙정치회의 명의로 코민테른에 전문을 보내 보로딘을 총고문에서 해임하고 귀국시킬 것을 요청하며 카를 라데크레프 카라한을 대신 보내줄 것을 청했다. 보로딘도 이에 맞서 장제스는 이미 신군벌로 변질되었다고 비난하며 리쭝런에게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자리를 제안하는 등 국민혁명군 내부에서 반장 세력을 규합하려 했다.

3.3.3. 3중전회 예비회

2월 24일 왕징웨이의 심복 천궁보가 조정을 위해 우한으로 와서 천밍수 등을 2월 25일 난창에 보내 장제스와 면담하게 했다. 장제스는 3중전회 개최를 며칠 연기하자고 제의했고 2월 27일 우한의 중앙상무위원회 78차 회의는 장제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3중전회를 3월 7일로 연기했다.

2월 27일 장제스는, 영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총사령관직을 사직하겠다고 표명하며 영왕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또한 3월 3일 난창의 66차 중앙정치회의는 우한의 3중전회 참가를 결정했는데 다만 3중전회를 3월 12일에 개최할 것을 결의했다. 이는 우한과 바로 단절할 수 없는 장제스의 상황 속에서 장제스가 절강, 강소를 장악하고 난징을 점령한 이후 난장 천도를 고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5] 장제스는 3중전회 참가 결정에 따라 난창의 국민당 중앙집행위원들이 우한으로 떠날 때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그들(연석회의)이 나를 기다려 3월 12일 개회하면 성의가 있는 것이나, 만약 그 전에 거행하면 허위임을 알 수 있다."

3월 6일 탄옌카이, 허샹닝, 리례쥔, 천궈푸, 정유분 등의 위원들이 한커우에 도착했다. 이날 3중전회 예비회가 소집되어 장제스 참석 여부를 놓고 논쟁했다. 탄옌카이장제스와 장런제, 주페이더 등이 하루나 이틀이면 우한에 도착할테니 위원들 모두 우한에 도착한 후에 3중전회를 개최할 것을 주장했으나 우한 측에서는 반대했다. 특히 팽택민은 또 다시 3중전회를 연기하는 것은 착오라고 비판했으며 오옥장도 한두 사람 때문에 개회를 못하는 것은 안된다고 주장했다. 운대영도 대놓고 당권제고를 운운하며 장제스 때문에 연기할 수 없다고 장제스를 콕 집어 반대했다. 표결 끝에 3월 7일에 예비회, 3월 8일에 제안위원회, 3월 9일에 제안심사회, 개회는 3월 10일에 하기로 결정하고 주석단에 탄옌카이, 쑨커, 쑹칭링, 쉬첸 등을 선출했다. 이날 마오쩌둥과 우수덕이 3중전회 기간 중 장제스가 장악하고 있는 중앙정치회의의 개회를 정지시켜 장제스의 방해를 근본적으로 차단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3월 7일의 예비회에서 탄옌카이는 서산회의의 예를 거론하며 참석인원의 법정 정족수 문제를 지적했다. 하지만 오옥장은 서산회의와 3중전회를 동시에 거론할 수 없다고 이를 반대했다.

3.3.4. 2기 3중전회

파일:국민당 제2차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jpg
우한에서 열린 국민당 제2차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

3월 10일 마침내 3중전회가 거행되어 3월 17일 종결되었다. 3중전회는 총 28개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는데 중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3월 10일 당의 지도기관 통일에 대한 결의안, 중앙집행위원회 군사위원회 조직 대강안이 통과되어 중산함 사건 이후 설치된 주석제가 폐지되고 9인으로 구성된 상무위원회 대체되어 장제스의 당내 권한을 크게 약화시켰다. 정부에서도 주석직이 폐지되고 5인의 상무위원과 28인의 위원으로 대체되었고 정치회의 주석직도 폐지되어 15인 위원으로 대체되었다. 또한 3월 15일 군사위원회 총정치부 조직대강안, 3월 17일 국민혁명군 총사령 조례안이 통과되어 국민혁명군 총사령부를 폐지하고 군사위원회로 대체하였다.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은 기존의 임면권과 지휘권을 박탈당했고 통수권을 중앙집행위원회에 책임 진다고 명문화했다.

장제스는 군사위원회 위원, 국민정부 위원 및 왕징웨이, 탄옌카이, 쉬첸, 오옥장, 천궁보, 쑨커, 담평산, 구멍위 등과 함께 상무위원에 선출되었으나 장런제, 천궈푸 등 장제스의 측근들은 모두 배제된 상황이었다. 허샹닝은 아예 2중전회에서 장런제를 선출한 것이 잘못이었다고 비난하며 장런제에게 투표하지 말 것을 독려했다. 또한 3월 10일 통과된 중앙집행위원-국민정부위원 임시연석회의 결의의안을 통해 연석회의를 합법으로 승인하고 3월 13일 통과된 통일혁명협력안은 국공양당이 민중운동과 국내소수민족운동을 공동으로 책임지는 문제를 규정하고 국민정부, 성정부에 중공당원의 참여와 국민당 대표의 코민테른 파견을 규정하여 2중전회에서 통과된 당무정리안을 부정하고 중국공산당의 지위를 격상시켰다.
혁명민중을 영도하여 제국주의에 진공하여 한커우와 구강의 영국조계를 회수한 결과, 국민정부의 지위는 제고되고, 불평등조약을 폐지시키는 해방운동은 초보적 승리를 거두어, 실로 임시연석회의가 혁명의 요구에 적합한 것임을 증명하기에 족하다. 이 임시연석회의가 현재 비록 종결되었으나 본 전체회의는 그 결의한 바의 의안이 계속 유효함을 인정한다.

그외에 3월 16일 통과된 대전국인민선언, 대농민선언 등은 민중운동을 강조하고 있었다. 이후 쉬첸은 폐회사를 통해 대단히 만족스럽다고 소감을 발표했고 장제스와 우한의 싸움에서 장제스는 명실상부하게 패배한 것으로 보였다. 장제스는 이에 대단히 불쾌감을 느껴 회의 도중에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회 주석과 정치위원회 주석직을 사임하겠다는 의사를 통전하고 4월부터 중앙에서 지급하기로 한 군비를 3월 15일부터 지급해달라고 요구하는 등 자신의 불만을 드러냈다. 이 와중에 공산당이 노공부장과 농정부장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국공 양당의 연석회의 설치가 이루어지면서 당내 합작이 당외 합작으로 격상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오옥장, 임조함 등은 장제스가 일본, 봉천군벌과 결탁하고 있다는 괴소문을 살포하며 장제스 비난 공작에 나섰고 3중전회 폐막 이후 3.18 시위를 조직하여 도장 운동을 전개했다. 일련의 조치와 행위들은 명백히 공산당의 약진과 장제스의 통수권 약화를 기도한 것이었고 당연히 장제스와 국민당 우파는 대노했다.

다만 3월 13일 결의안 발표로 장제스를 제거할 것을 주장한 공산당과 달리 우한의 국민당 좌파들은 장제스를 완전히 제거하려는 수준은 아니라서 허샹닝은 여전히 "장제스 동지의 군사책임이 매우 중해서 (...) 내 개인 의견으로는 왕징웨이 동지 및 탄옌카이 동지 두 사람에게 당무를 책임지게 하는 것이 비교적 적당하다."라고 하는 등 여전히 국민당에 필요한 인물로 인식되고 있었다.

4. 결과

3월 20일, 왕징웨이, 탄옌카이, 쑹쯔원, 쉬첸 등 5인이 국민정부 상무위원에 취임하여 정식으로 우한 국민정부가 성립되었다. 이 시기 장제스는 북벌과 정쟁을 동시에 해야 하는 상황 때문에 극도의 피로와 긴장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아내 천제루에게 "앞에는 호랑이가 다가오고 뒤에는 늑대가 버티는데 몸에 창살을 맞은 한 마리의 말"과 같다고 자신의 상태를 표현했다. 그러던 중 3중전회의 결정이 담긴 전보를 받게 되자 장제스는 무척이나 격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전보를 한쪽으로 내던졌다. 천제루의 회고록에 따르면, 장제스는 두 주먹으로 자신의 머리를 치며 책상 위의 꽃병을 깨뜨려 버리고, 간이 의자에 쓰러져 고개를 숙이고 흐느꼈다고 한다. 한 시간여 동안 장제스는 미친 사람처럼 굴었다. (...) 그는 책상을 쾅쾅 치고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며 노골적으로 보로딘을 저주했다.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170~171 페이지.

장제스는 즉각 이러한 조치의 이유를 설명해줄 대표를 파견해달라고 우한에 요청했다. 이에 허샹닝이 장제스를 찾아와 왕징웨이의 편지, 반장 전단지를 보여주면서 우한에서는 그를 새로운 군벌로 비난하고 있다고 전했다. 장제스는 폭발했다.
천제루는 분노로 추하게 창백해진 남편의 얼굴과 필사적으로 꽉 쥔 손을 보았다고 기록했다. 만일의 경우가 두려워 그녀는 침실로 미끄러지듯 들어가 옷걸이에 걸려 있는 권총집에서 총을 꺼내 승마화에 감추어 두었다. (...) 장제스는 비몽사몽인 상태로 일어나 침실로 갔다. (...) 천제루가 썼다. "극도의 증오와 격노가 맹렬하게 용솟음치면서 냉정한 판단 능력은 죄다 박살 나고 말았다. (...) 그는 노발대발해서 거품을 문 채 의자 위에서 여행 가방 두 개를 세차게 끌어내려 안에 담긴 것들을 모조리 바닥에 쏟아부었다. 하지만 권총은 없었다. 랴오 부인과 내가 문간에 서서 부들부들 떨고 있을 때 그가 분노에 차 소리쳤다. '내 권총 어딨어?' 나는 그의 두 눈이 기묘하게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나는 흐느끼기 시작했고, 랴오 부인은 필사적으로 그를 진정시켰다. '내 권총 어딨어?' 그는 절망해서 되풀이했다. 새파란 얼굴과 부르르 떠는 손이 보였고 (...) 연이어 정신 착란을 일으킨 듯 길길이 날뛰었다. 그는 탁자 위의 물건들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가구를 마구 부숴버렸다." 랴오 부인이 한손으로 그의 팔을 붙잡으며, 지금 버릇없는 아이처럼 굴고 있다고 말했다. 이 집은 그의 소유가 아니고, 게다가 남의 물건을 파손하는 것이라고 일깨워 주기도 했다. (...) "그러자 그는 갓난아이처럼 울음보를 터트리더니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그날 오후와 밤 내내 그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군사 업무도 모조리 중지했다., 그는 아무도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하인도 방 밖에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171~172페이지

하지만 이튿날 장제스는 안정을 되찾고[6] 상하이-난징 공략을 재개했으며 즉각 3중전회 무효를 주장하며 중국공산당과 쉬첸, 천궁보 등을 친공분자로 비판했고 리스쩡, 구잉펀, 등택여 등 우익 인사들도 3중전회를 보이콧하고 난창으로 향했다.

결국 외교, 재정, 혁명관 등 전 방향에 걸쳐 좌파와 대립하던 장제스는 3월 말의 난징사건과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해임 이후 무력을 동반한 청당이 불가피하다고 여기고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

5. 참고문헌

5.1. 저서

5.2. 논문

6. 관련 문서

6.1. 국민혁명



[1] 예컨대, 1927년 1월 3일의 한커우 참안 이후 연석회의는 영국에게 24시간 내에 군대를 철수시킬 것을 요구했고 영국이 굴복하면서 영국군이 철수했다. 이어 군중이 영국 조계지를 점령하면서 한커우 조계지가 회수되었고 1월 6일 구강의 영국 조계지도 무력으로 회수되었다.[2] 보로딘은 1월 11일에도 "현재 건국대강에서 말하는 군정시기에 대하여 많은 오해들이 있다. 군정시기에는 군사행동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민중운동도 있어야 하고 군사행동과 민중운동은 상호보완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고 강연했는데 이 역시 장제스에 대한 비난이었다.[3] 한커우와 구강 조계지의 정식 반환은 결국 2월 19일과 2월 20일에 각각 행해졌다.[4] 리쭝런도 2월 9일, 장제스를 만나 당무문제는 군사문제가 일단락 된 후 다시 엄밀하게 정리하는 것이 타당하다."며 일단 천도문제를 긍정하라고 요구했다.[5] 하지만 장제스는 동시에 허잉친에게 전문을 보내 공산당의 상하이 혁명정부조직을 취소하라"고 엄명했다.[6] 천제루 회고록에 따르면, 권총이 있었다면 자살했을 것이라고 장제스가 인정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