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의 대내외 전쟁 · 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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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대만 해협 위기 ,1995 ~ 1996, | 중화인민공화국 | }}}}}}}}} |
제1차 국공내전 First Chinese Civil War | |||||
기간 | |||||
1927년 8월 1일 ~ 1936년 12월 26일 | |||||
장소 | |||||
중국 대륙 전체 및 부속 도서(티베트 제외) | |||||
원인 | |||||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공산당 탄압 중국공산당의 무력을 통한 국가 전복 야욕 | |||||
교전 국가 및 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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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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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 |||||
중국국민당의 전술적 승리, 중국공산당의 전력적 승리 | |||||
영향 | |||||
제5차 초공작전으로 인한 대장정 시안 사건으로 인한 제2차 국공합작 성립 |
1. 개요
1927년 8월부터 1936년 12월까지 중국 대륙에서 벌어진 국민혁명군과 인민해방군 간의 전쟁.2. 배경
쑨원 사후 장제스와 공산당의 갈등이 심해지는 가운데 1926년 3월 중산함 사건이 발생했고 장제스는 다수의 공산당원들을 체포, 자신과 적대적인 고문인 키산카를 추방하였다. 충격을 받은 왕징웨이는 프랑스 외유를 떠났고 장제스는 국민당의 영도자가 되어 북벌을 거행하게 되었다.국민당의 1차 북벌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장제스의 상황은 좋지 않았는데, 장제스의 자리를 노리는 탕성즈의 야망, 호락호락하지 않은 장제스를 견제하기 위한 영왕운동, 천도논쟁, 반장선전이 이어지면서 장제스와 공산당 및 국민당 좌파와의 관계는 매우 험악해졌다. 공산당은 장제스가 기회주의적 군인, 신흥 군벌, 군사 독재자라고 비판하면서 장제스를 제어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1927년 우한 국민정부가 설립되자 사법부장 쉬첸을 의장으로 하는 연석회의는 장제스의 상무위원회 주석직을 폐지하고 장제스의 여러 권한을 회수했다.
이에 장제스는 광서파와 힘을 합쳐 1927년 4월 12일 4.12 상하이 쿠데타를 발동함으로 청당을 실시하였고 4월 15일 광동파가 합세하여 4.15 광저우 쿠데타를 감행하였다. 우한 정부는 4월 17일 장제스를 제명하고 체포령을 내렸으나 장제스는 난징에서 난징 국민정부를 수립하여 왕징웨이의 우한 국민정부와 대립했다.
우한 국민정부는 국공합작을 유지하려 했으나 마일사변을 비롯한 국민당 우파 장교들의 반공 봉기가 이어지고 공산당이 직접 국민당 좌파와 연합하여 국민당 중앙 집행위원회를 장악, 개조하고 노동자와 농민을 조직하여 군대를 조직하며 우한의 우파 장교들을 처벌하라는 스탈린의 '5월 지시'가 내려오는가 하면 우한 정부가 믿었던 펑위샹이 장제스와 동맹하여 분공을 요구하자 결국 왕징웨이는 7월 15일 국공결렬을 선택하게 되었다.
3. 전개
3.1. 중공의 반란사주 및 노선 정립
국공결렬 이후 공산당은 우한 정부군의 동정에 동원된 장파쿠이의 2방면군에 소속된 윈다이잉 휘하의 친공산당 부대들을 빼내어 난창에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하려고 기도했다. 덕분에 11군 24사단장 엽정 휘하의 5개 연대, 20군장 하룡 휘하의 6개 연대, 주더의 교도단 2개 중대 등 1만 6천명의 병력과 차이팅카이의 부하 5천 명을 흡수하여 상당한 군세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렇게 확보한 군세를 바탕으로 1927년 8월 1일 공산당은 난창 폭동을 일으켜 저우언라이, 장궈타오, 리리싼 등을 국민당 혁명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하고 정부를 수립하였으나 국민당의 반격으로 난창의 소비에트 정권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잔존한 공산당 부대들은 마오쩌둥이 지휘하는 유격대와 합류했다.난창 폭동의 실패 이후, 공산당은 1927년 8월 7일 우한에서 구추백, 마오쩌둥, 쑤자오정, 장태뇌, 채화삼, 향충발 등 22명의 공산당 지도자와 코민테른 대표 비소 로미나제의 참석하에 8.7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8.7 긴급회의는 국공합작의 실패를 이유로 천두슈를 퇴진시키고 구추백을 총서기로 삼아 임시정치국을 결성, 노동자와 농민을 무장시켜 봉기를 촉구하는 새로운 당노선을 채택했다. 또한 반제투쟁, 계급투쟁, 사회혁명을 상호대리적인 것을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라 지적했다. 그러므로 국민혁명은 프롤레타리아의 헤게모니를 관철시키면서 진행되어야 하며 궁극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입장이 완성되었다. 또한 실패했던 난창기의의 정당성을 옹호했다.
노농무장화를 통한 무장폭동을 일으키는 것을 당면과제로 삼는다는 방침에 따라 공산당은 도시에서 노동자를, 농촌에서 농민을 무장화하여 폭동을 일으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마오쩌둥도 8.7긴급회의의 결정에 따라 임시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어 후난에 파견, 후난 추수폭동을 지휘했다. 그리고 계획대로 9월에는 후난, 후베이, 장쑤, 광둥 등지에서 추수폭동이 발생하였는데 공산당의 기대와 달리 준비부족과 농민들의 소극적인 반응으로 난관에 직면했으며 국민당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모두 토벌당하고 말았다. 마오쩌둥도 이때 후난성 전적위원회를 구성하여 장사 노동적위대, 농민자위대를 동원하여 장사를 공격했으나 중도에 포기하고 퇴각하였다. 이에 당중앙은 마오쩌둥을 우경군사기회주의자라 비판하며 임시정치국 후보위원 자리에서 정직시켰다.
취추바이는 추수폭동의 실패는 노선의 오류가 아니라 마오쩌둥을 비롯한 일선 간부들의 지도에 오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1927년 11월 상하이에서 열린 확대회의에서 마오쩌둥과 펑공다를 비롯한 책임자들을 징계하고 12월 11일 광저우 폭동을 일으켰지만 폭동 주도자 장타이레이가 전사하는 등 참혹한 피해만을 입었다. 5만 8천에 달했던 공산당원은 1만명으로 격감하는 등 중국 공산당의 피해는 격심했다.
폭동 실패 이후 패잔병들은 홍군으로 재편되었다. 우선 주더의 부대가 공농혁명군 제1사로 개편되었고 동랑의 부대가 공농혁명군 제2사로 개편되었다. 추수폭동에서 패퇴했던 마오쩌둥도 1927년 9월 29일 강서성 영강현 삼만현에서 벌어진 삼만개편[2]에 따라서 잔존 병력을 공농혁명군 1군 1사단 1연대로 개편했고 부대 내부의 규율을 정리했고 각 부대에 당 조직을 설치하여 당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이후 1928년 5월 공산당은 군사공작대강을 발표, 공농혁명군을 모두 홍군으로 개칭하고 당대표제에서 정치위원제로 전환했다. 이후 광저우 기의 때 홍군이란 명칭이 정식으로 사용되었고 도시를 노린 기의들의 잇단 실패에 일찍이 호남농민운동시찰보고 등을 올리며 농촌 중심 혁명을 주장했던 마오쩌둥은 자신의 전략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여러 공산부대들과 국민당 내부에서 숙청된 부대들이 합류함으로 홍군의 규모는 확대되었다. 1928년 1월엔 주더가 후난에서 국민당과 싸우다 퇴각하여 마오쩌둥에 합류함으로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졌으며 홍군 제4군이 결성되었다. 마오쩌둥은 1927년부터 1929년까지 정강산 투쟁을 통해 국민정부군에 대한 투쟁을 전개하며 유격전 전략의 유용성을 입증해보였다.
1928년 6월 28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중국공산당 6차 당대회는 취추바이를 총서기에서 실각시키고 샹중파를 새로운 총서기로 선출하였다. 하지만 샹중파는 특색없는 인물로 중국 공산당은 실질적으로 중앙군사부장 저우언라이와 중앙상무위원 겸 조직부장이며 샹중파의 비서장인 리리싼이 중국 공산당을 영도하게 되었다. 한동안 중국 공산당은 당조직 재건과 혁명역량 확보를 위해 무모한 무장투쟁을 회피하고 농촌근거지 확대에 주력하였다. 저우언라이는 공산당의 역량을 회복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설정했으나 리리싼은 1929년 중동로 사건 이후로 좌경화되어 국민정부의 도시를 상대로 하는 총폭동 노선을 주장하게 되는데 이것을 리리싼 노선이라고 한다.
리리싼은 1930년 창사 폭동을 일으켜서 도시에서의 혁명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1930년 9월 중국 공산당 제6기 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가 소집되었다. 코민테른에서 파견한 구추백과 저우언라이가 중심이 된 3중 전회에서 리리싼의 전국적 총봉기계획과 홍군의 도시진공계획을 중지할 것을 결정했고 리리싼의 모험주의적인 전술상 과오를 비판하며 도시가 아니라 농촌에서 혁명활동을 하여 차차 도시를 포위하자는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고 기존의 도시 쟁취 전략을 시정하기로 했다. 하지만 잠시나마 창사를 점령하기도 했던 전과 때문에 공산당은 리리싼을 중심으로 꽤 견고하게 조직된 상황인지라 리리싼의 노선상 과오는 크게 비판되지 않았고 리리싼 노선에 대한 비판을 억제하는 양상이 보였기에 리리싼을 모험주의적이라 불신했던 코민테른은 1930년 11월 16일 리리싼의 원칙적 과오를 지적하는 서한을 발송했다. 코민테른은 리리싼을 트로츠키적인 경향을 보여주는 원칙적 과오를 저질렀다고 비판했고 혁명의 불균등발전에 대한 인식 미비,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과소평가, 혁명무장력에 대한 과신으로 무모한 무장봉기를 획책해 중대한 손실을 저질렀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코민테른의 지적에 중국 공산당은 1930년 11월 말 중앙정치국회의를 개최하고 3중전회의 결정을 수정하여 리리싼 퇴진을 결의했다. 그리고 1931년 1월의 4중전회에서 왕밍, 진방헌, 심택민 등의 스탈린동방노동대학과 손일선중국노동대학을 나온 국제파, 소련유학파가 당권을 잡고 차 당대회 노선을 재확인, 농촌에서 홍군을 건설하고 토지혁명을 통해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해 도시지역의 노동운동과 당조직을 재건한다는 방침을 강조했다.
3.2. 국민당의 공산당 사냥
국민당은 총 5차례의 초공작전을 개시하는데 초기에는 홍군을 토비로 업신여긴 국민혁명군의 오만과 전술적 미숙, 저우언라이가 지휘하는 공산당 스파이들의 활약과 홍군의 지형지물을 이용한 유인전술에 휘말려 오히려 많은 무기만 잃고 실패하여 홍군의 세력은 크게 확장되고 1931년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할 정도였다. 더군다나 1931년 만주사변과 1차 양광사변, 1932년의 제1차 상하이 사변, 1933년의 열하사변 등의 외환까지 겹쳐 국민당은 공상당 토벌에 전력을 다하기 힘든 상황이었다.제5차 초공작전에서 장제스는 한스 폰 젝트를 위시한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의 조언을 받아들여 공산당이 장악한 지역으로 섣불리 진군하는 것을 자제하고 요처마다 콘크리트 토치카 진지를 건설하면서 야금야금 전진하면서 공산당의 밥줄이자 정보원 역할을 하던 민간인들을 강제로 이주하게 하고 소금을 비롯한 필수 물자의 유통을 차단하는 전술을 채택하기에 이른다. 이를 위해 장시성 내부에만 3만 2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도로와 철도를 건설하는 등 보급망 혁신이 이루어졌고 홍군을 회유하기 위한 선전용 포로수용소도 지어졌다. 거기에 중화기와 공군까지 동반한 국민당의 토치카 전술은 게릴라전으로 물리치기 굉장히 어려운 것이었고 국민당은 몇 달에 걸쳐서 차례차례 홍군의 거점을 점령하면서 차례로 여러 소비에트들을 분쇄해나갔다.
그와중에 전 행정원 부원장 천밍수와 그의 측근인 19로군의 지휘관 차이팅카이, 복건성장 장광나이가 복건사변을 일으켰다. 하지만 전략적으로 복건의 중화공화국을 방치한 것은 치명적인 실수였으며 중화공화국이 멸망하자 장제스는 그동안 토벌에 가장 미온적이던 복건마저 장악함으로 토벌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고 소극적이던 광동파 천지탕, 광서파 바이충시, 리쭝런 등도 토벌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됨으로써 중화소비에트공화국에 대한 공세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를 통해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이 멸망하고 중국공산당은 기존의 근거지였던 중국 동남부의 장시성을 떠나 약 1년에 걸쳐 중국 서북부 산시성으로 대장정을 가야만했다.
3.3. 항일여론에 의한 초공작전 중단
2만 5천리의 대서천 끝에 마오쩌둥은 1935년 11월에 수천으로 줄어든 병력을 이끌고 섬서성에 도착했다. 마오쩌둥은 공산당 중앙대표 주리치와 곽홍도를 좌경 기회주의자로 몰아 숙청하고 공산당 내부 우파로 몰려 숙청 위기였던 유지단, 고강 등을 석방하여 산시성의 홍군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당시 홍군은 물자 부족과 장제스의 위협에 시달리며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이에 마오쩌둥은 당시 반장파들이라면 궁지에 몰렸을 때 모두 외쳤던 항일 카드를 선택, 1936년 2월 21일 동정항일을 선포하고 옌시산이 지배하는 산시성을 침공하는 것을 돌파구로 선택했지만 실패했다.7군자 체포 사건 이후 장제스는 양후청과 장쉐량에게 6차 초공작전을 실시할 것임을 통보했지만 이들은 시안 사건을 일으켜 장제스를 사로잡아서 국공합작을 요구함으로써 제1차 국공내전은 끝나게 된다.
4. 관련 문서
- 중산함 사건(1926.3.20)
- 4.15 광저우 쿠데타(1927.4.15)
- 4.12 상하이 쿠데타(1927.4.12)
- 마일사변(1927.5.21)
- 국공결렬(1927.7.15)
- 난창 폭동(1927.8.1~1927.10.4)
- 8.7 긴급회의(1927.8.7)
- 추수폭동(1927.9.9~1927.9.15)
- 정강산 투쟁(1927.9~1929.1)
- 광저우 폭동(1927.12.11~1927.12.13)
- 리리싼 노선(1928-1930)
- 창사 폭동(1930.7.27~1930.10.4)
- 초공작전
- 복건사변(1933.11.20~1934.1)
- 대장정(1934~1936)
- 동정항일(1936.2)
- 7군자 체포 사건(1936.11.23)
- 시안 사건(1936.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