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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2 20:09:46

야오원위안

<rowcolor=black,white> 야오원위안
姚文元

(1931 ~ 2005)
왕훙원
王洪文

(1935 ~ 1992)
장춘차오
张春桥

(1917 ~ 2005)
장칭
江青

(1914 ~ 1991)
파일:요문원.jpg
중화인민공화국 중앙문혁소조 소조원
중국 공산당 정치국 위원
한문 姚文元
한국식 독음 요문원
영문 Yao Wenyuan
출생 1931년 1월 12일
중화민국 절강성 소흥시
사망 2005년 12월 23일 (향년 74세)
중화인민공화국 상하이시
국적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svg
학력 후신고등학교
직업 언론인, 정치가
종교 무신론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해서파관 사건2.3. 전면내전 시기2.4. 문화대혁명 중반기2.5. 비림비공운동2.6. 덩샤오핑 공격과 1차 천안문 사태2.7. 최후의 발악2.8. 몰락과 말년
3. 여담4.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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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가, 언론인. 악명높은 4인방의 일원이며 장칭과 합작하여 해서파관 사건을 일으킴으로 문화대혁명의 서막을 올린 인물이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931년 절강성 소흥시에서 좌익작가 야오펑쯔의 아들로 태어났다. 야오원위안의 아버지인 야오펑쯔는 시인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1930년에 상하이에서 좌익작가연맹을 설립하고 집행위원을 맡은 거물 인사였다. 1931년에 야오원위안이 태어나자 야오펑쯔는 한살이 된 야오원위안을 데리고 루쉰을 찾아가 문안을 드린 적이 있는데 야오원위안은 이를 두고 자신이 루쉰을 만난 적이 있다고 자랑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1933년 12월, 야오펑쯔가 톈진에서 체포되었다. 야오펑쯔는 중국국민당 기관지인 중앙일보에 <야오펑쯔, 공산당 탈당 선언>이라는 전향서를 쓰고 '과거의 잘못을 참회하며 지난날의 정치적 입장을 버리고 공산당을 탈당해 삼민주의 기치 아래 서기로 결정했다.'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국공내전이 한창이던 1948년 10월, 후신고등학교에 다니던 야오원위안은 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공청단 상하이시 루완구 노조위원회 선전부 부부장, 루완구 당위원회 선전부 교육과장 등을 역임하면서 공산당원의 길을 걸었고 이 시기부터 여러 집필활동을 하였으며 1955년에는 후펑 타도 운동에 참가했다. 야오원위안이 유명해진 것은 1957년 2월 6일, 문회보에 <교조와 원칙 -야오쉐인 선생과의 토론>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야오쉐인은 마오쩌둥의 총애를 받던 문단 원로 작가였는데 겨우 26세의 야오원위안은 야오쉐인에게 문예창작 방법에 대해 도전을 한 것이었다. 또한 야오원위안은 6월 10일 문회보에 <녹이비고도복우감>이란 글을 발표, 문회보의 편집방법이 잘못됐다고 정면으로 비판했다. 마오쩌둥은 야오원위안의 글을 보고 감탄하여 그 글을 인민일보에 전재할 것을 지시, 6월 14일 야오원위안의 글이 인민일보에 실리게 되었다. 덕분에 야오원위안은 반우파 투쟁의 영웅으로 등극하여 전국적인 인물이 되었다.

이후 해방일보 편집위원, 잡지 맹아의 편집위원 등을 하며 상하이의 대표적인 문예 평론가이자 언론인이 되었다.

2.2. 해서파관 사건

이후 야오원위안은 극좌적 입장에서 문단의 원로들을 닥치는대로 공격하는 사냥견과도 같은 인물이 되어 류사허, 쉬마오궁, 펑쉐펑, 아이칭, 바진, 딩링 등 문단의 원로 작가들에게 닥치는대로 공격을 퍼부었고 이 때문에 몽둥이란 뜻의 곤자라는 별명이 붙었고 베이징에 리시판이 있다면 상하이에는 야오원위안이 있다는 뜻인 북이남요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그러던 중 1965년 5월, 루완구 공위 선전부부장이자 해방일보 편집위원 겸 문예부주임을 맡고 있던 야오원위안은 장칭의 호출을 받게 된다. 장칭은 베이징 부시장이자 역사학자인 우한이 쓴 <해서파관>이라는 경극이 개인경작을 선호하는 <단간풍>의 배후에 있다고 지목하면서 비판하기 위한 문장가를 찾고 있었다. 장칭은 원래 베이징의 문장가인 리시판을 찾아갔으나 리시판이 장칭의 주장을 억지로 여겨 들어주지 않자 상하이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상하이 시장이자 극좌파인 커칭스는 자신의 정치비서 출신이며 상하이 문교서기인 장춘차오에게 야오원위안을 장칭에게 소개시켜주라고 지시했다. 이렇게 만나게 된 장칭, 장춘차오, 야오원위안 3인은 <암탉 한마디와 병아리 두마리>로 불리는 조직을 결성, 펑전 공격을 위한 포문을 준비하게 되었다. 장칭은 1965년 마오쩌둥이 상하이를 방문했을 때 야오원위안을 마오쩌둥에게 소개하는 등 그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1965년 여름, 야오원위안은 해방일보에 논문을 써야 한다면서 부편집장에 말한 후 병을 핑계로 휴가를 요청하여 요양원에 칩거, 해서파관을 공격하는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한다>의 집필에 들어갔다. 11월에 집필과 마오쩌둥의 검수까지 완료한 야오원위안은 11월 10일자 문회보와 11월 12일자 해방일보에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한다>를 발표했다. 야오원위안은 대약진 운동 실패 이후 중국 곳곳에서 몰아닥치는 '우익적 풍조', 즉 개인경작을 선호하는 '단간풍'과 1959년 루산회의에서 실각한 펑더화이를 복권시켜야 한다는 '번안풍'이 우한이 지주 계급 국가를 미화하고 혁명을 불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계급 조화론을 설파했기 때문이라면서 해서파관을 독초로 맹비난했다
1961년은 바로 우리나라가 잇따라 3년 자연재해로 잠시 경제적 곤란을 겪고 있을 때였다. 제국주의, 가국의 반동파와 현대 수정주의가 반중국 분위기를 고조시킨 상황에서 우귀사신들이 '단간풍'과 '번안풍'을 불어댔다. 그들은 단간의 우월성의 바람을 불어대며 경제회복과 퇴전을 요구했다. 이것은 바로 인민공사를 해체하고 지주와 부농의 죄악통치를 회복하려는 것이다. 그들은 무슨 말도 안되는 '평원옥'을 내세워 그들의 이익을 대표하는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려 무산계급 전정에 대항하기를 바란다. 그들을 위해 불평을 감싸 안고, 그들을 위해 번안을 해 다시 집정하게 하려고 한다. 단간풍, 번안풍, 퇴전, 평원옥은 바로 당시 자산계급이 무산계급의 독재와 사회주의 혁명투쟁의 초점을 반대한 것이다. <해서파관>은 이런 계급투쟁 형식의 반영이다. <해서파관>은 향기를 풍기는 향화가 아니라 하나의 독초다.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하다>의 일부

베이징 시장 펑전은 이를 학술논쟁이며 지방지에 실린 한 의견일 뿐이라며 축소하려 했지만 야오원위안의 배후에 있던 마오쩌둥이 야오원위안을 지원사격함에 따라 인민일보에도 게재되었으며 화동국 서기 웨이원보의 조력으로 산동성과 강소성의 신화일보, 복건일보, 안휘일보, 강서일보 등에도 속속 게재되었다.

2.3. 전면내전 시기

파일:1967년요문원.jpg
1967년 4월, 알바니아를 방문한 야오원위안, 왼쪽은 엔베르 호자.

해서파관이 일으킨 돌풍은 급기야 1966년 5.16 사건을 통해 베이징 시장 펑전, 정치국 후보위원 루딩이, 부총리인민해방군 총참모장 뤄루이칭, 중국공산당 중앙판공청 주임 양상쿤 등이 반당집단으로 몰려 참혹하게 숙청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1966년 5월 16일, 마오쩌둥은 기존의 문화혁명 오인소조를 해체하고 새롭게 중앙문화혁명소조를 결성하라고 지시했고 정치국의 결의에 따라 천보다를 소조장으로 하는 중앙문혁소조가 성립되었다. 부소조장은 장칭이 맡았고 장춘차오의 천거로 문혁소조에 합류하게 된 야오원위안은 캉성, 장춘차오와 함께 소조 고문이 됨에 따라 문화대혁명의 최고 지도부로 등극하게 되었다. 이후 상하이시 위원회 제2서기로 임명되었으며 장칭을 원조하여 장칭의 적을 광대들이라고 부르며 맹렬하게 비난했다.

1966년 베이징 8월 폭풍 사건이 몰아닥치면서 류사오치덩샤오핑이 비참하게 실각했고 전국각지에서 홍위병이 결성되었다. 야오원위안은 경제위기 해결을 위해 비정규적 도입을 실시한 노동부장 리리싼을 난타하여 자살하게 만들었으며 1966년 11월 상하이 방직공장의 젊은 노동자인 왕훙원이 상하이 노동자 혁명 조반 총사령부, 약칭 공총사를 설립하여 과격한 대자보를 붙이고 안팅역을 점령하여 철로 운행을 30시간이나 중지시키는 만행을 저지르자 이를 크게 혁명적 행동이라 크게 칭찬했다.

1967년 1월에 야오원위안은 장춘차오와 함께 상하이 1월 폭풍 사건을 일으켜 상하이 코뮌을 수립하는 등 1967년부터 본격화된 탈권현상의 시초가 되었다. 하지만 상하이 1월 폭풍 사건은 마오쩌둥의 재가를 받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마오쩌둥으로부터 그렇게 되면 나라 이름도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중화코뮌으로 바꿔야 하나?란 비아냥을 듣는 등 결과가 좋지 않았다. 이 일로 천보다, 장칭이 마오쩌둥의 큰 질책을 듣게 되자 군원로들이 2월 역류를 일으켜 문혁소조를 무력화하려 했으나 야오원위안은 장춘차오, 왕리 등과 함께 군 원로들의 저항에 대해 장칭에게 보고했고 장칭은 가장 과격했던 천이의 주장을 지목하며 군 원로들을 공격해야 한다고 마오쩌둥을 부추겼다. 이에 마오쩌둥이 문혁소조가 잘한 것이 97%라고 옹호하면서 거꾸로 군원로들이 실각했다. 2월 역류 이후 1967년 가을, 마오쩌둥의 지시를 받고 장춘차오와 함께 상하이로 가서 9차 당대회 소집준비사업과 소집 기간 등의 문제를 조사하였다.

2.4. 문화대혁명 중반기

파일:문혁시기요문원.jpg

그러다가 1967년 7월, 7.20 사건이 터져 쉬샹첸 등에게도 책임이 추궁되고 주더까지 난타를 당하는 등 군부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문혁소조는 홍위병들에게 인민해방군으로부터 무기를 탈취하라면서 전면적 내전을 선동하는 등 권력의 절정을 달렸으나 1967년 8월, 탈권현상의 폭주가 심해져 주중 영국 대표부 점령 사건이 일어나 중국의 외교적 지위가 추락하면서 중국은 혁명외교를 중단, 군부에 다시 힘을 실어주면서 안정화에 들어갔다. 1967년 11월, 야오원위안은 천보다와 함께 <10월 사회주의 혁명이 열어 놓은 길을 따라 전진하자>를 집필하여 계속혁명론을 주장했지만 1968년 여름에 터진 광서성 유혈사태로 마오쩌둥이 격노하게 되면서 인민해방군이 나서서 홍위병들을 진압하게 되었다. 1968년 5월 야오원위안은 마오쩌둥에게 보내는 문서에서 계급대오 정돈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는 1968년 10월 중공중앙 8기 12중전회에서 공식용어로 채택되었고 문화대혁명은 공식적으론 종결되었다. 야오원위안은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1968년 홍기 2호에 혁명은 학생들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앞장서야 한다는 논설을 발표하면서 홍위병들의 활동을 중단시켰고 상산하향 운동을 실시하여 홍위병들을 우루루 시골로 쫓아내버렸다.

1969년 4월 1일부터 4월 24일까지 열린 9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 출석, 중앙위원회 위원 겸 정치국 위원에 선출되었으며 린뱌오가 부주석이자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자리매김하자 장춘차오와 함께 린뱌오가 발표할 정치현안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중앙문혁소조의 주요 구성원들이 전부 정치국원이 되었으나 정치국에서 실무를 맡은 것은 캉성, 장칭 정도였으므로 중앙문혁소조의 발언권은 오히려 약해졌으며 1969년 9월에는 중앙문혁소조가 활동을 전면중단하였다. 1970년대부턴 린뱌오와 천보다의 연합이 내세우는 <천재론>에 맞서 경쟁했으며 1970년 8월 24일부터 9월 6일까지 강서성 루산에서 중국공산당 제9기 중앙위원회 제2차 전원회의가 열리자 국가주석직 부활을 주장하는 천보다 숙청에 가담했다. 1970년 11월 6일 중앙조직선전조가 조직되어 기존의 문혁소조를 대체하여 중앙조직부, 중앙당교, 인민일보사, 홍기사, 신화사 본사, 중앙라디오사업국, 광명일보사, 중앙편역국 등 중앙기관의 사업과 공회조직, 청년단조직, 부녀연합회조직 및 5.7간부학교를 관할하게 되자 캉성, 장춘차오, 장칭과 함께 조원이 되어 천보다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1971년 4월 15일부터 7월 31일까지 국무원 주최로 열린 전국교육사업회의에 출두, 8월 13일에 장춘차오와 함께 중공 건국 이후 17년 동안 마오쩌둥의 무산계급 교육 노선이 제대로 관철집행되지 않았으며 자산계급이 무산계급을 독재하고 신중국 건국 이후 양성된 대학생들의 세계관이 대체로 자산계급적이라고 평가한 <전국교육사업회의 요지>를 제출하여 중공중앙의 비준을 받았다.

그러다가 1971년, 마오쩌둥의 신임을 잃어가던 린뱌오와 린뱌오의 아들 린리궈571 공정이라 불리는 발악적인 쿠데타를 기도했다가 실패한 후 외국으로 도주하다가 비행기가 추락하여 사망하는 9.13 사건이 일어났다. 대단한 충격을 받은 마오쩌둥은 총리인 저우언라이에게 실권을 주어 상황을 정돈하게 했으나 1972년 12월에 이르러 문화대혁명의 권위가 너무 약화되었다고 여겨 사실 린뱌오는 극좌주의자가 아니라 극우주의자라고 입장을 선회했다. 야오원위안은 이에 영합하여 1973년 인민일보, 해방군보, 홍기의 극좌주의 비판을 중단시키고 홍기에서 린뱌오의 표면적인 극좌현상만 가지고 본다면 급소를 명중할 수 없다고 지적하며 비판의 화살을 극좌주의에서 극우주의로 돌렸다.

2.5. 비림비공운동

1973년에 접어들면서 저우언라이가 실권하자 마오의 후계자 자리를 노리던 장칭은 자신이 통제할 수 있고 또 잘생겨서 자신의 마음에 들었던 왕훙원을 중앙위원회 부주석으로 선출함으로 공식적인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공인받으려고 했다. 야오원위안은 캉성, 장춘차오와 함께 이 작업을 원조하였다. 이에 마오쩌둥은 1972년 12월 28일 왕훙원을 후계자로 지목했고 1973년 8월 24일부터 8월 28일까지 열린 10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왕훙원에게 자신의 표를 대신 투표하게 하는 등 다시 문혁소조에 힘을 실어주기 시작했다. 야오원위안은 다시 중앙위원에 선출되었으며 8월 28일의 2차 전원회의에서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73년 11월, 장칭은 저우언라이가 인민대회당과 베이징의 호텔 및 공공장소들을 불건전한 예술품과 가구로 장식하게 허용했다고 마구 비난했다. 이는 데탕트 분위기에 따라 구미의 외교관과 정치인들이 베이징을 방문하게 되자 저우언라이가 외교 수단의 일환으로 그들이 방문할만한 곳을 국제적인 감각에 따라 치장한 것이는데 장칭은 이를 두고 저우언라이가 반동이라고 비난한 것이다. 이때 야오원위안은 장칭의 명령에 따라 공작조를 조직하여 베이징 시내 곳곳의 '불건전한 예술품'을 조사했고 700여 점의 예술품과 장식품을 압수한 다음에 '혁명적' 예술품으로 대체했으며 압수한 물품 중 200여점으로 흑화 전시회를 열었다. 그외에도 1973년 여름 뮤지컬 영화 <정원사의 노래>를 보고 공산당원이 아닌 정원사가 학교 선생이 되었다는 점, 노래 가사에 '문화가 없이 어떻게 우리가 혁명의 큰 책임을 더맡을 수 있나요?'란 대목을 두고 문화대혁명에 대한 공격이라고 비난했다.

1974년 1월, 마오쩌둥이 저우언라이를 현대판 공자라고 공격하면서 비림비공운동이 시작되었다. 홍기, 인민일보, 해방군보 등이 일제히 저우언라이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야오원위안은 1974년 4월에 1973년 10월에 있었던 헨리 키신저와의 회담에 있어서 저우언라이와 예젠잉이 우경적 오류를 범하여 주권을 상실하고 나라를 욕되게 한 회담을 벌이고 투항주의적 자세를 보였다고 맹비난하며 저우언라이가 마오쩌둥을 대체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풍경호 선박 사건>을 일으켜 외국 선박을 구입하여 운송력을 증강시키려 하던 국무원의 결정을 비판하며 양노사상, 추종주의, 매판자산계급사상자들의 독재라고 비난했다. 여기에 마오쩌둥이 노쇠하자 그 뒤를 잇고자 했던 장칭의 난동으로 중국의 상황은 더욱 개판 오분전이 되었다. 장칭은 당과 군을 장악하려 했으며 방광암으로 죽어가던 저우언라이를 내쫓고 장춘차오를 총리로 삼으려 했다. 또한 덩샤오핑의 복권도 막으려 했다. 마오쩌둥은 자신의 부인의 행태에 불만을 가지고 더 이상 장춘차오, 왕훙원, 야오원위안과 어울리지 말라고 경고했으나 장칭은 듣지 않았다. 결국 마오쩌둥은 정치국 회의에서 분노를 터트리며 장칭, 왕훙원, 야오원위안, 장춘차오를 묶어 사인방이라 불렀으며 그들이 긁어 부스럼을 만든다고 비난했다.

덴마크 총리 폴 하틀링과 접견한 후 마오쩌둥으로부터 레닌이 왜 자산계급에 대해 독재를 시행해야 한다고 했는지에 관한 글을 쓰라고 주문받자 1975년 3월 1일 <홍기> 3호에 <린뱌오 반당 집단의 사회적 토대>를 게재하여 린뱌오 집단의 출현은 우연이 아니며 심각한 사회계급적 토대가 있다고 지적, 전면적인 독재와 계속된 혁명을 주장했다. 1975년 9월에는 덩샤오핑의 정돈 사업을 방해하기 위해 수호전 필화사건을 일으켜 마오쩌둥이 수호전의 108호걸이 탐관오리만 반대하고 황제는 반대하지 않았으니 송강은 투항주의자이며 수정주의자라고 비판한 것을 들먹이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2.6. 덩샤오핑 공격과 1차 천안문 사태

1976년 1월 저우언라이가 사망하자 대대적인 추모 열풍이 중국을 휩쓸었는데 저우언라이를 싫어하던 사인방은 장례식을 간소화한다는 구실로 추모활동을 탄압했으며 추모활동의 언론보도를 금지했다. 또한 저우언라이의 후계자로 여겨지던 덩샤오핑을 타도하기 위해 '우경번안풍 반격'을 호소하며 당내 자산계급을 색출하자는 구실로 덩샤오핑을 맹렬히 공격하여 전국적인 반발을 샀다.

1976년 3월 28일, 난징에서 난징대학의 학생과 교수들을 중심으로 저우언라이 추모식을 열었는데 시민들이 대대적으로 호응하면서 "누군가 저우언라이를 반대하면 그를 타도할 것이다.", "대야심가, "대음모가 장춘차오를 타도하자."라고 표어를 붙히는 난징 사건이 일어났다. 이 소식에 놀란 야오원위안은 베이징에 난징 사건이 파급되는 것을 막기 위해 베이징의 정황에 주의를 돌리게 하는 한편 난징의 군중을 강제로 진압하게 했다. 1976년 4월 5일, 천안문에서 베이징의 시민들이 저우언라이 추모 집회를 열고 사인방의 추모 탄압에 대해 항의시위를 벌이자 인민일보사를 시켜 이를 불순분자들의 반혁명 폭동으로 왜곡보도하게 했으며 거짓자료를 수집하여 마오위안신을 통해 마오쩌둥에게 보고하여 덩샤오핑의 2차 숙청을 일으켰다. 병석에 누워있던 마오쩌둥은 마오위안신에게 인민일보 기자들의 현장보도를 공개발표하는데 허용했는데 야오원위안의 조작으로 현장보도는 천안문 사태를 "현 시기 덩샤오핑을 비판하고 우경번안풍을 반격하는 큰 방향을 돌려세우려고 망령되게 시도했다고."고 비난했다.

마오의 죽음이 다가오면서 장칭의 행동이 너무 극단으로 치닫게 되자 야오원위안조차 장칭의 일부 행동에 대해서는 발을 빼기도 했지만 탕산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탕산 하나쯤 없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망언을 하는 등 덩샤오핑 비판에 열을 올렸으며 마오쩌둥 사망 직전인 1976년 8월 11일자 인민일보에도 '덩샤오핑을 깊이 있게 비판하며 지진에 대처하고 재해를 구조하자'라는 괴이한 사설이나 올리고 있었다.

2.7. 최후의 발악

파일:모택동시신앞정치국원들.jpg
마오쩌둥의 시신 앞에 선 정치국원들. 왼쪽에서부터 장춘차오, 왕훙원, 장칭, 화궈펑, 마오위안신, 야오원위안, 천시롄, 왕둥싱.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4인방과 국무원 총리 대리인 화궈펑, 예젠잉, 샤오징광을 비롯한 군부가 마오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대립하게 되었다. 9월 9일 마오쩌둥의 장례절차를 정하기 위해 소집된 정치국 회의에서 장칭은 덩샤오핑 공격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고 왕훙원, 장춘차오, 야오원위안이 동조했다. 하지만 당 부주석인 예젠잉이 가장 필요한 것은 화궈펑을 중심으로 뭉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기선을 제압당했고 4인방도 화국봉을 중심으로 단결하자고 외칠 수밖에 없었다. 이후 4인방은 주요 안건에 대해 자신들에게 보고하라고 지시를 내리는 등 화궈펑과 격렬하게 대립했다. 9월 16일, 인민일보에 마오쩌둥의 유언인 <천천히 하라, 서두를 것 없다, 과거의 방침에 비추어서 하라>가 발표되었고 야오원위안은 즉각 국영통신사인 신화사에 전화하여 국경절 보도에서 과거의 방침에서 비추어서 하라를 '기정 방침대로 하라'로 왜곡보도할 것을 지시했다.

9월 18일, 천안문 광장에서 열린 마오쩌둥 추모대회에 참석한 야오원위안은 9월 19일 신화사에 전화를 걸어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각 성과 시에서 개최되는 추도회에 대해 언급할 때, 중요하게 강조할 것이 있다면 중복되어도 상관없다. 예를 들면 '기정 방침대로 하라'이다. 이 말이 강조되어 있다면 모두 보고하고 없다면 그와 비슷한 말이라도 집어넣도록 하라."

야오원위안은 9월 20일, 23일, 30일에도 잇달아 전화해 신화사의 다짐을 받아냈다. 이로 인하여 9월 말까지 인민일보 등 6개지에서 기정 방침대로 하라란 마오쩌둥의 유언을 선전한 기사가 236개 게재되어 마오쩌둥 추도회 관련 기사의 60%를 차지했다.

2.8. 몰락과 말년

하지만 예젠잉, 샤오징광 등 군장성들이 화궈펑에게 4인방 체포를 강력히 제안하면서 화궈펑은 4인방 체포의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1976년 10월 6일 오후 3시, 화궈펑과 얘기가 된 정치국원 왕둥싱이 중앙경위대 부주임 장요사에게 지시하여 8시 반에 장칭을 체포할 것을 지시했고 사인방의 나머지 인물들도 8시를 기해서 체포하도록 하였다. 장춘차오와 왕훙원이 먼저 체포되었고 야오원위안은 나타나지 않아 체포조가 자택을 급습할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8시 15분, 야오원위안의 전용차가 회인당에 도착하였고 왕둥싱은 즉각 체포 명령을 내렸다. 야오원위안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행동조에게 포위되었다. 야오원위안은 당황하여 측근들을 불렀지만 회인당 바깥에서 대기하던 측근들이 오지 못하여 체포되었다.[1] 야오원위안은 대기실로 연행되어 중앙 경호대 경호국 부국장으로부터[2] 격리심사를 통보받고 중난하이의 지하실에 수감되었으며 곧 베이징 친청 교도소로 이감되었다. 10월 12일, 정치국은 장춘차오, 야오원위안, 왕훙원울 상하이에서 맡았던 당내외 직무로부터 해임했다. 상하이에선 4인방 지지자들이 무장봉기를 준비했으나 베이징은 상하이 출신 유력인사들을 현지에 보내 해산을 설득했고, 이들은 결국 해산했다. 이때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여 주목을 받은 인물들이 바로 나중에 주석을 지내는 장쩌민, 주룽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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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11월에 재판에 회부된 야오원위안

1976년 12월 10일, 인민일보는 야오원위안 천안문 사태에 관해 거짓 보도를 지시한 것에 대한 증거를 중앙에 제출하였으며 중공중앙은 이를 바탕으로 <왕훙원, 장춘차오, 장칭, 야오원위안 반당집단의 죄증>을 공산당 전체에 전달했다. 1977년 1월 야오원위안이 작성한 <린뱌오 반당집단의 사회적 토대를 논함>에 대해서도 비판이 행해졌다. 1977년 7월 16일부터 21일까지 소집된 당 중앙위원회 제10기 제3차 전원회의는 화궈펑을 중공중앙 주석, 중공중앙 군사위원회 주석으로 보궐 선거하고 왕훙원, 장춘차오, 장칭, 야오원위안을 반당 집단으로 결정하여 당에서 제명하고 당 내외 모든 직무를 취소시켰다.

체포 4년 후인 1980년 11월 2일, 야오원위안은 최고 인민 감찰원에 의해 최고인민특별법정에 기소되었다. 재판정에 끌려나온 야오원위안은 재판정에서 기죽은 모습으로 아프다고 동정을 구하며 죄목을 대부분 인정했다. 1981년 1월 25일, 법정은 야오원위안에게 징역 20년과 정치권리 박탈 5년을 선고했으며 베이징 친청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1994년부터 신병 치료를 위해 상하이의 자택과 교도소를 오갔으며 1996년 10월 6일, 형기 20년을 모두 채우고 만기출소한 후 두 딸이 살고 있는 상하이에서 경찰의 엄중한 감시를 받으며 살았다.

야오원위안은 석방후 당에 반성문을 제출하고 복당을 청원했으나, 공산당은 복당을 거부했다. 또한 문화대혁명 시절에 대한 회고록을 집필하고 출판하려고 했으나, 당은 검열 후, 당의 권위를 해칠 수 있다고 판단, 출판이 금지되고 원고는 압수되었다. 그리하여, 할일이 없어서 석방 1개월 전에 사망한 아내의 묘소를 자주 참배했고 서예, 역사공부를 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2005년 4월 장춘차오가 암으로 사망한 이후 유일하게 생존한 사인방의 일원이었으나 장춘차오가 죽은지 8개월 만인 2005년 12월 23일, 상하이에서 지병이었던 당뇨병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신화통신은 2006년 1월 6일이 되어서야 “린뱌오, 장칭 반혁명집단 사건의 주범인 야오원위안이 2005년 12월 23일 병으로 사망했다”고 보도했으며 장례식이나 매장 장소에 대해서는 보도하지 않았다.

3. 여담

4. 참고문헌


[1] 결국 나타나지 않아 자택에서 체포했다는 기록도 있다.[2] 장춘차오와 왕훙원은 예젠잉과 화궈펑에게 격리심사를 통보받았으나 왕훙원이 예젠잉의 목을 조르며 저항하는 등 난동이 있자 안전을 위해 야오원위안은 경호국 부국장이 통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