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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23 12:57:11

1959년 루산회의

문화대혁명의 전개 순서
1959년 루산회의 해서파관 사건
펑더화이 실각 펑전 실각
1. 개요2. 배경3. 전개
3.1. 초기 회의의 진행3.2. 펑더화이의 반박3.3. 비판의 가중3.4. 마오쩌둥의 반격3.5. 펑더화이의 몰락
4. 결과5. 참고문헌

1. 개요

1959년 7월 2일부터 8월 1일까지 진행된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와 연이어 8월 2일부터 8월 16일까지 진행된 8기 8중전회를 합쳐서 부르는 말. 중국 역사상 중요한 루산회의가 수차례 있었기 때문에 본 문서는 1959년 루산회의로 쓰도록 한다.

국방부장 펑더화이대약진 운동을 비판하다가 실각했고, 대약진 운동은 계속 폭주하게 된다.

2. 배경

잘 알려져 있듯이 흔히 제2차 5개년 계획이라 불리는 대약진 운동이 시작되면서 7년 안에 영국을 초월하고 15년 안에 미국을 따라잡겠다는 황당무계한 목표를 가지고 갖은 허황된 계획이 실시되고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중공 내부에서도 상당한 비판이 제기되었으며 1959년 6월, 자신의 고향인 호남성 상담현을 시찰한 마오쩌둥은 자신의 부모의 묘비와 어머니가 자주 다니던 절조차도 토법고로와 인민공사의 땔감과 재료가 되어 사라진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사방에서 굶주림과 냄비와 식칼을 가져다가 고철을 만들고 있다는 농민들의 탄원을 들은 마오쩌둥은 탄식하면서 공동식당에서 배를 채울 수 없다면 없는 것이 낫다, 음식 낭비에 불과하다고 대약진에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였고, 일부 속도조절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대약진 자체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고 정치국에 대약진을 지지하는 강경파 상하이 시장 커칭스, 쓰촨성 서기 리징취안, 부총리 탄전린 등을 끌어들이면서 영향력을 제고하였다. 이 때문에 국가경제위원회 주임 보이보, 국가계획위원회 주임 리푸춘 등 실무관료진들과 현장의 참사를 본 마오쩌둥의 비서 후차오무, 천보다 등은 이러한 움직임에 비판적이었으나 감히 마오쩌둥에게 직언할 용기를 내진 못하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이만하면 자기가 좌경 오류는 충분히 잡았다고 자신하고 있었고, 다음 수확 때는 높은 식량 생산량을 거둘 것이라고 자신하면서 시도 지었다.

3. 전개

3.1. 초기 회의의 진행

루산회의는 원래 1958년 이래의 경험을 총정리하고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논의한다는 다소 여유로운 목표를 가지고 시작했기 때문에 초기 분위기는 매우 부드러웠으며 '신선회의'라고까지 불렸다. 천윈과 덩샤오핑은 건강 문제로 참여하지 못했다. 7월 1일, 마오쩌둥은 과거 쑹메이링의 저택이었던 구링전 허둥루 9호에 있는 2층 저택 메이루에 짐을 풀고 마침 비교적 근처인 난창에 살고 있던 전 부인 허쯔전을 불러오는 등 다소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다른 정치국원들도 회의 이후 관극 관람, 산책 등을 하면서 시종 여유로운 분위기였다.

하지만 다음날부터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7월 3일부터 7월 10일 사이에 동북, 화북, 서북, 화동, 중남, 서남 6개조로 나누어 개별토론이 이루어졌고, 주로 국내 정세에 관련된 18개 문제를 이야기 하였다. 이중에서 대약진의 피해가 극심했던 중남조에서 대약진에 대한 비판이 쏟아져나왔다. 중남조 조장인 광동성 제1서기 타오주와 광서성 제1서기 유건훈, 하남성 제1서기 오지포는 작은 잘못을 크게 부풀려 얘기하고 있다고 비판 의견을 잠재우려 했지만 일선의 과장이 심각한다는 것은 솔직히 다들 아는 것이라서 7월 4일, 호남성 제1서기 저우샤오저우와 호북성 제1서기 왕런중이 공공식당, 인민공사, 경제불균형, 식량문제 등을 비판하면서 주로 과장보고와 공공식당 문제를 비판했다. 하지만 광동, 광서, 하남은 낙관적인 평가에 동조하였다. 펑더화이는 총 7차례 발언했는데, 북대하회의 이후 당내에 좌편향 현상이 벌어지고 있으며, 좌편향이 우편향보다 교정하기 어렵다고 지적하며 비판을 쏟아냈다.
집단지도체제로 한다는 결정에 반대하고, 한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있소. 조직의 위신을 높이지 않고 개인의 위신을 높이는 것은 위험합니다. (...) 마오쩌둥 주석과 당 중앙의 위신을 남용해서는 안됩니다. 작년에 무턱대고 하달된 마오 주석의 의견에는 문제가 적지 않았소.

펑더화이의 이러한 발언은 간보를 통해 마오쩌둥에게도 보고되었다. 이는 펑더화이의 강경한 발언이 편집된 버전이었으나, 그럼에도 마오쩌둥은 상당한 불만을 품었다. 여기에 펑더화이와 흐루쇼프가 음모를 꾸몄다는 내용의 밀고장이 마오쩌둥에게 전달되었고, 마오쩌둥은 연락원을 보내 소조 회의를 감시하게 하였으나 리루이의 증언에 따르면 펑더화이는 계속 거침없는 발언을 쏟아냈다.
스탈린의 권력은 절대였소.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소. 그러므로 실수를 범했소. 국내에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은 없습니까? 위대하신 분이 뭔가 말하면, 그것이 신의 계시처럼 되지 않습니까?

마지막 소조 토론회 날인 7월 10일의 회의에서 마오쩌둥은 각 지역 고위 간부들을 소집한 회의에서 열손가락 중 실패는 하나에 불과하고 아홉 손가락은 성공이라면서 1958년의 성과는 대단했다고 자화자찬했다. 그는 인민공사는 공산주의 실현의 증거가 아니며, 오로지 고도의 합작조직에 불과하니 인민공사에 지나친 기대를 걸면 안된다고 경고한 후 다른 사람들의 발언을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회의장에서 퇴장했다. 이는 자신의 의견에 대한 반박을 듣지 않겠다는 경고였고, 회의장에 남은 중공 지도자들은 침묵에 빠졌다.

하지만 펑더화이는 대약진의 좌경 오류가 너무 심하다고 여겼고, 용감하게도 마오쩌둥이 자신의 고향에서 일어나는 일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는데, 농촌 상황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마오쩌둥에게는 상당한 도전이었다.

3.2. 펑더화이의 반박

7월 12일 펑더화이와 좌경 노선의 실수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저우샤오저우와 논의를 한후 다음날 7월 13일 아침 일찍, 마오쩌둥을 찾아가 면담을 요청했으나 마오쩌둥이 막 수면제를 먹고 잠든 상황이라 만남을 거절하자, 이에 펑더화이는 기왕 그렇게 된 김에 편지를 써서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면 마오쩌둥이 이해할 것이라 여겨 그날 저녁을 먹은 후 자신의 숙소인 176호관에서 밤을 새워 편지를 작성, 7월 14일 오전 6시에 완성한 후 태극권 체조를 한 다음에 비서 왕승광을 불러서 편지를 마오쩌둥에게 전달하였다.

펑더화이의 편지는 일단 총노선은 옳았으며, 식량공급부족 문제는 이미 바로잡혔으며, 전국적 지질검사를 하게 되었고, 인민들이 공업기술을 터득했으며, 간부들이 단련되었다는 칭송으로 시작하였으나, 천연자원과 노동력을 낭비하였다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불균형(비례실조)으로 인하여 도농, 계층간 긴장이 고조되었으며 대약진 운동에 만연한 좌경 분위기를 손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장풍조로 인해서 각 지역, 각 부문이 신뢰할 수 없는 실적을 공포해 당의 위신을 추락시키고 있으며, 소자산계급이 지나친 열광으로 한걸음에 공산주의로 비약하려는 좌적 착오를 범하고 있으니, 이 때문에 오랫동안 형성해온 대중노선과 실사구시 정신이 없어지고 있고, 좌경 오류는 우경 오류를 제거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지적하였다. 전체적인 논조는 부드러웠으나 펑더화이는 분명히 마오쩌둥에게 책임이 있다고 강력하게 지적하고 나섰고, 마오쩌둥이 펑더화이의 간언에 그냥 발광한 것은 아니었다. 이에 대해서는 펑더화이가 류사오치가 후계자가 된 상황에 불만을 품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냐중에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에게 이 문제를 추궁당한 펑더화이는 자신이 주석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었고, 주석에게만 보여주려고 한 것이라고 변명하였다.

마오쩌둥은 그의 편지에 엄청난 불만을 품었고 화가 나서 그냘 밥을 먹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회의 중에 입다물고 있다가 갑자기 이런 편지를 보내는 저의가 불순하다고 여겼고, 즉시 류사오치와 저우언라이를 불러 편지를 보여주었다. 마오쩌둥으로부터 수차례 가스라이팅을 당했던 저우언라이는 남을 공격해서 자신을 높이려는 의도가 보인다고 펑더화이를 비판했고, 류사오치도 야심이 보이는 편지라고 동조했다. 이에 마오쩌둥은 회의를 연장할 것을 결정하고 7월 16일에 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를 소집하였다. 병으로 참석하지 못한 천윈도 참석했으나 덩샤오핑은 여전히 병원에 있어 참석하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팽덕회동지의 의견서'라는 제목으로 펑더화이의 편지를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회람시켰고, 당외 뿐만 아니라 당내에서도 우파분자들이 대약진 운동을 비판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당에 분열이 생기면 자신이 다시 정강산에 들어가 새로운 공산당을 세우고 새로운 홍군을 만들어 투쟁할 것이라고 지도자들을 위협했다. 그리고 정치국 상무위원회 외에도 여러 소그룹에 펑더화이의 편지를 회람시켰다.

3.3. 비판의 가중

정치국 상무위원회 내부에서 펑더화이에 동조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주더가 농민들에게 사유지를 인정해주고, 공공식당에서 억지로 밥을 먹게 하지 말자고 하는 온건한 비판을 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7월 19일,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정치국 후보위원, 중앙서기처 서기 황커청, 후난성 제1서기,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저우샤오저우가 펑더화이에 호응하고 나섰다. 황커청은 전국각지의 식량 부족 사태를 지방에 식량을 공급하면서 직접 확인한 사람이라서 식량이 남아돌아간다는 허위선전이 개구라임을 매우 잘 아는 사람이었고, 펑더화이에게 지방의 사정이 심각하다고 직언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저우샤오저우도 현지지도에서 후난성의 참담한 상황을 목격한 인물이었고, 마오쩌둥으로부터 후난성의 기후엔 맞지도 않는 2기작을 하지 않는다고 질책을 받은 바도 있었다.[1] 두 사람은 펑더화이의 편지는 표현이 좀 거칠지만, 정신이 좋다고 옹호하였고, 마오쩌둥의 새로운 정치비서이며 과거 수전부 부부장을 지낸 리루이 역시 동조하였다. 그리고 제1기계공업부장 자오어루(趙爾陸), 산동성 제1서기 타오루자(陶魯茄), 전력공업부 부부장 류란타오, 농업부장 랴오루옌(廖魯言) 등도 펑더화이의 의견이 옳다고 여겼다.

여기에 반해 허룽, 타오주, 천보다는 펑더화이가 작은 과오를 과장하여 인민들의 기를 죽이고 있다고 반발하고 나섰다. 펑더화이는 개인 서한을 정치국에 회람시키는 상황에 위기를 느끼고 7월 18일, 중앙판공청에 자신의 편지를 철회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때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7월 21일 화동조 회의에서 외교부 부부장, 정치국 후보위원 장원톈이 나섰다. 소련에서 교육받았으며 마오쩌둥 대신 한때 당을 영도한 적도 있던 장원톈은 펑더화이의 평가조차도 너무 달콤한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마오쩌둥이 입으로는 당은 대중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실사구시해야 한다고 했으나 정작 자신의 말을 실천하고 있지 않다고 지적하면서, 목숨을 잃는 한이 있어도 잘못된 점이 있으면 마오쩌둥이 바로잡아야 한다고 정면으로 비판했다.[2] 이에 커칭스와 안휘성 제1서기 쩡시성(曾希聖), 산동성 제1서기 수둥(舒同)이 반발하고 나섰다.

3.4. 마오쩌둥의 반격

사실 마오쩌둥은 펑더화이에게 의심을 품고 있었다. 루산회의 직전 펑더화이는 바르샤바 조약기구 시찰을 위해 동유럽과 소련을 돌아보고 6월 12일에야 귀국한 상황이었다. 소련 여행 중 펑더화이는 니키타 흐루쇼프와 만났는데, 펑더화이가 귀국하자마자 흐루쇼프는 중소협약을 취소하고 중국에 핵기술을 제공하기로 한 것을 파기하는 한편, 인민공사 계획에 대해 전례없는 비판을 퍼부었다. 펑더화이는 여독으로 인하여 루산회의에 참석하지 않으려 했으나 황커청의 설득 때문에 루산회의에 참석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정황에 대해서 마오쩌둥은 흐루쇼프와 펑더화이가 음모를 꾸몄다고 여겼다. 그리고 펑더화이와 친밀하고 소련과 깊은 관계가 있는 장원톈이 동조하고 나선 것 역시 마오쩌둥에게는 수상한 정황이었다. 과거에 마오쩌둥은 리루이가 대약진 운동을 세차례나 비판했을 때는 오히려 크게 고마워했는데 펑더화이의 비판엔 급발진했다는 점에서 이미 펑더화이에게 큰 불만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7월 23일, 마오쩌둥은 맹공을 퍼부었다. 그는 펑더화이의 서신이 우경기회주의의 강령이라면서 황커청, 저우샤오저우 등과 반당그룹을 형성하고 계획적이고 조직적이며 철저한 준비와 목적성을 가지고 활동했다고 오로지 자신을 공격하려 한 것이지 대약진의 방향성을 개선할 의도 따윈 없었다면서 참석자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신랄한 어조로 펑더화이를 공격했다.
지금 당 안팎의 사람들이 우리를 공격하는 데 모두 합류했습니다. 그러나 당의 외곽에 있는 몇몇은 우파분자들이며, 지금 우리 당의 안에 있는 몇몇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파분자들입니다. 나는 당내의 동지 여러분께 충고 한마디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느 길로 가고 있는지를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위기의 순간에서 동요되면 안됩니다. 우리 동지들 중 일부는 폭풍우에 휩쓸려 냉정함을 잃은 채 동요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파분자는 아니지만 우파분자와 아주 가깝게 접근해있습니다. 30km 가까이에 접근해 있는데, 그건 아주 위험한 거리입니다.

마오쩌둥은 흥분한 어조로 무엇이든 얻으려면 앞에 좀 잃게 되어 있는데 이것을 가지고 동요하는 것은 우경 부르주아지 사상의 영향이며, 제국주의와 국내 자산계급의 압력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균형의 상실로 물자 부족 현상이 일어났다는 것도 거짓말이며 돼지고기, 채소, 머리핀, 비누가 없는 것을 두고 균형의 상실이라고 하는데, 시장에 물자도 부족하고, 식량도 부족하고, 농업, 공업, 상업, 교통도 모두 힘에 부치며, 인심까지 긴장하는 등 그냥 모든 것이 부족한 것이지 균형의 상실과는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마오쩌둥은 남이 자신을 범하지 않으면 자신도 범하지 않지만, 남이 자신을 범하면 반드시 그 사람을 범한다고 복수를 천명하였다.

그리고 펑더화이 옹호자들을 군사 구락부, 후난 집단으로 공격하면서 "만약 정부가 망해야 할 것이라면 나는 다시 농민들을 이끌고 정부 타도에 앞장서겠다. 만약 인민해방군이 나를 따르지 않는다면 나는 다시 홍군을 찾아 나서겠다. 물론 인민해방군이 나를 따르지 않을리 없다."라고 폭탄발언까지 던지며 '당상황제'로의 지위를 과시하였다. 마오쩌둥은 과거 커칭스가 600만톤의 철강을 생산하겠다고 하자 이를 1070만톤으로 올린 것과, 산동성에서의 인터뷰에서 인민공사가 좋다라고 발언한 2가지 실수가 있다고 아주 궁색하게 자신의 책임을 일부 인정했으나, 참석자들에게 각자의 책임을 분석하라고 요구했다. 엄청난 비판을 받은 펑더화이는 엄청나게 참혹한 심정이 되었고, 휴식 시간에 마오쩌둥이 잠시 얘기를 하자고 그를 불러내자 "이미 다 말했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시겠습니까? 더는 드릴 말씀 없습니다."라고 울분을 참지 못하고 상기된 얼굴로 대화를 거절했다. 리루이의 증언에 따르면 회의가 끝난 후 펑더화이는 마오쩌둥에게 어째서 개인 서한을 회의에서 공개했냐고 항의했고, 마오쩌둥은 대답 대신에 펑더화이를 싸늘하게 노려본 다음에 퇴장했다고 한다.

7월 23일과 7월 26일, 장원톈은 결점을 지나치게 많이 말한 과오를 범했다면서 펑더화이의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고, 황커청은 펑더화이가 우경분자라고 공격하면서 입장을 바꾸었다. 저우샤오저우도 지지를 철회하고 자신의 사상이 낙후되고 이해가 부족했다고 자아비판했다. 7월 26일, 마오쩌둥은 국가계획위원회 부국장 이운중의 편지에 <한통의 편지에 대한 평론>이란 제목을 붙여 펑더화이를 다시 조리돌렸으며 장원톈에게 어째서 펑더화이의 군사집단에 어울렸나면서 끼리끼리 논다고 조롱하였다.

3.5. 펑더화이의 몰락

마오쩌둥이 살기등등하게 독설을 퍼붓자 정치국은 모두 펑더화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펑더화이의 편지는 연막을 치고 독기를 내뿜는 것으로 평가되었고, 펑더화이는 장비가 아니라 위연이라고 모욕당했다. 장원톈은 펑더화이의 부사령관, 펑더화이의 정치위원이라고 공격당했고, 9천 글자 중에서 대약진의 실적에 대해서 겨우 270여 글자만 말하고 과오에 대해서 8300글자를 말했다고 성토당했다. 7월 26일 회의에서 린뱌오가 폭언을 퍼붓기 시작했다.
펑더화이 동지. 루산에 오자마자 당신은 혁명을 일으켰는데, 뭔가 배경이 있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최근에 소련과 동유럽을 방문했소. 흐루쇼프는 당신을 높이 평가하고 있소. 도대체 무슨 말을 한거요?

이에 안색이 변한 펑더화이가 강력하게 반발했다.
어리석은 소리 마시오. 외국어는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내가 어떻게 흐루쇼프와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단 말이오? 통역을 찾아내서 조사해보면 될 것 아니오?

7월 31일과 8월 1일에 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가 연속으로 소집되었다. 마오쩌둥은 펑더화이의 세계관이 맑시즘이 아니라 경험주의, 주관 유심주의적 경험주의라면서 그가 자신과의 관계에 있어 3할만 협조적이고 7할은 비협조적이었다고 난타했다. 이에 펑더화이가 자신과 주석의 협력관계는 5대5 아니었냐고 항의했지만 마오쩌둥은 묵살하였다. 펑더화이는 "마오 주석, 옌안에서 주석님은 나를 40일 간에 걸쳐서 매도했습니다. 이번에 내가 20일간 주석님을 매도하는 것도 안된단 말입니까?"라고 항변했다. 펑더화이, 황커청, 장원톈, 저우샤오저우는 반당집단으로 지목되었으며 마오쩌둥과 대약진의 총노선에 도전한 것으로 규정되었고, 펑더화이는 자신의 모습에 따라 당을 개조하고, 세계를 개조하려 한 위선자이며 음모가, 야심가로 타도당했다. 이미 펑더화이의 지위를 위협하고 있던 린뱌오는 "펑더화이는 아주 큰 개인적 야심과 개인적 욕망을 품고 위대한 한 영웅이 되려고 혁명에 참가한 사람이다. 마오 주석은 진정한 대영웅이다. 펑더화이도 마오쩌둥은 영웅이라고 느끼고 있다. 두 영웅은 병립하지 못한다. 그래서 펑더화이는 마오 주석을 반대하게 되어 있다. 이는 하나의 규율이다."라고 펑더화이를 공격하고 마오쩌둥을 숭상하였다.

8월 2일, 마오쩌둥은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소집하고 "실적이 아주 크다. 문제는 적지 않다. 전도는 밝다."라면서 펑더화이를 우경 기회주의자로 규정하고 우경 기회주의가 당의 지도기관을 향해 광분하여 공격하고 있으며, 결론을 노선착오, 지도기관의 착오로 끌고 가고 있다, 6억 인민이 치열하게 달려가고 있는 사회주의 사업을 향해 돌진하면서 과오와 결점을 찾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과 펑더화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참가자들을 위협하기까지 했다. 마오쩌둥의 선포 이후 린뱌오, 커칭스, 리징취안, 왕런중, 타오주, 뤄루이칭 등이 일제히 펑더화이를 물어뜯었다. 펑더화이는 8월 7일, "내가 마오쩌둥을 끌어내리려 한 야심가라고 내가 말하는 것을 당신들이 듣기를 원하지만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변호사의 변호 없이 당신들은 나에 대해 법정에서처럼 심판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는 객관적으로 사실을 밝히고 시비를 가리기 아주 어렵다."라고 항변했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펑더화이는 자아비판도 해야 했으나 마오쩌둥은 이마저도 부정직하고 진실하지 않으며 기만적이라고 깎아내렸다. 그리고 펑더화이와 그 지지자들에게 "내가 보기에 동지들은 고추를 먹는 법을 배워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고추의 매운 맛을 어떻게 알겠소?"라고 빈정댔다.

4. 결과

1959년 8월 16일에 8기 8중전회가 끝났다. 회의는 <펑더화이 동지를 두목으로 하는 반당집단의 착오에 관한 결의>를 통과시키고, 펑더화이, 황커청, 장원톈, 저우샤오저우를 직무에서 해임시키고 그들의 당내 직무를 보류시켰다. 펑더화이는 국방부장, 중군위 부주석, 황커청은 총참모장 겸 서기처 서기, 장원톈은 외교부 부부장, 저우샤오저우는 호남성 제1서기에서 해직당했다. 국방부 부부장 리다(李达)와 샤오커(萧克)도 해임당했다. 후임으로 린뱌오가 국방부장 겸 중군위 제1부주석, 총참모장 겸 중군위 비서장에 공안부장 뤄루이칭, 후임 공안부장에 셰푸즈가 임명되었다. 이러한 결정은 8월 18일 ~ 9월 12일, 중군위 확대회의, 8월 24일, 전국외사회의, 1959년 9월 17일, 중화인민공화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9차 회의에서 잇달아 비준되었다. 후임 호남성 서기로는 저우샤오저우를 비판하고 마오쩌둥에 대한 충성을 확인한 화궈펑이 선출되었다. 이러한 결정은 9월 17일에야 국방부장에 새로 린뱌오가 임명되었다는 것이 발표되면서 조금 공개되었을 뿐이었는데, 이는 흐루쇼프의 미국 방문에 맞춰서 내놓은 것으로 소련을 겨냥한 것이었다.

또한 회의는 <당의 총노선을 보위하고 우경기회주의를 반대하기 위한 투쟁>이라는 문건을 통과시키고 우경기회주의의 공격을 격퇴하는 것이 당의 주요 전투 임무가 되었다고 선포했다. 9월 9일, 마오쩌둥은 전국외사회의, 중앙군사위원회 합동회의에서 "절대로 조국에 등을 돌리고, 외국과 내통해서는 안된다. 중국공산당원이 외국의 당조직을 파괴해서도 안되며. 동시에 당중앙을 배반하고 외국의 도발을 받아들여서도 안된다."라고 하면서 가오강 사건을 언급하며 펑더화이와 흐루쇼프가 내통했다는 의심을 드러내었다. 반우경 투쟁은 강화되어 당원의 3%가 중점비판대상, 4.4%가 방조 비판대상이 되었고, 9.3%의 시, 국장 급 이상 간부들이 적발, 비판당했다. 대약진운동은 계속 가속화되었다.

당연히 대약진운동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고 펑더화이는 1962년의 조사 책임자로 임명되어 조사 결과인 '팔만언서'를 제출함으로 자신의 비판이 정확했음을 증명했다. 하지만 군의 새 수장이 된 린뱌오는 펑더화이의 복권에 반대했고 마오 역시 펑더화이를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이로 인해 중국공산당의 제도적 규범과 위신은 더욱 흔들리게 되었고, 이는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는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된다.

5. 참고문헌


[1] 후난성은 마오쩌둥의 고향이었지만 마오쩌둥은 평생 육체노동을 하지 않아 후난성의 농업 조건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결국 후난성은 대약진운동 당시 인구의 8%가 아사하는 최악의 참사가 발생한다[2] 로드릭 맥파커는 아예 펑더화이는 조연이고 장원톈이 진짜 배후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하지만 펑더화이는 나중에 이를 부정하였다. 1998년에 중국 군사과학원에서 편찬한 <모택동과 팽덕회>에 따르면 장원톈은 오히려 마오쩌둥이 흐루쇼프와 그의 관계를 추궁할지도 모른다고 회의에 참가하지 말라고 조언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