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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춘차오

장춘차오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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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black,white> 야오원위안
姚文元

(1931 ~ 2005)
왕훙원
王洪文

(1935 ~ 1992)
장춘차오
张春桥

(1917 ~ 2005)
장칭
江青

(1914 ~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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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Zhang_Chunqiao_张春桥_20200418_035626.jpg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부총리
중화인민공화국 중앙문혁소조 소조원
정체 張春橋
간체 张春桥
한국식 독음 장춘교
영문 Zhang Chunqiao
출생 1917년 2월 1일
중화민국 산둥성 허쩌시
사망 2005년 4월 21일 (향년 88세)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국적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svg
학력 제남사립정의중학
직업 작가, 정치가
종교 무신론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상하이 1월 폭풍 사건의 주역2.3. 탈권현상과 2월 역류2.4. 문화대혁명 중반기2.5. 비림비공운동2.6. 1차 천안문 사태2.7. 몰락2.8. 말년
3.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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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 4인방의 일원으로 문화대혁명의 실질적 이론가. 문혁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부총리까지 올라갔으나 마오쩌둥의 죽음 이후 실각해 감옥에 갔고,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곧 사망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917년 산둥성 허쩌시에서 태어났다. 1932년부터 1934년까지 지난사립정의중학교에서 공부했고 1935년 상하이로 이주하여 추이완추 등의 문필가와 함께 <대만보>에서 문예활동에 종사했다. 이후 중국국민당에 가입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지난으로 돌아와 항일운동을 하다가 산동성장 한푸쥐의 적전도주로 산동성이 일본군에게 함락되자 1938년 옌안으로 이동, 비밀리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옌안에서 언론활동을 하였으며 국공내전 시기에 인민해방군에 들어가 천이 휘하에서 상하이에 입성했다. 1954년 상하이 해방일보 사장 겸 총편집을 맡았으며 1963년 상하이 시위원회 서기처 후보서기 겸 선전부장이 되었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 이후 신임 국가주석 류사오치 및 문화혁명 오인소조장 겸 베이징 시장인 펑전을 비롯한 온건파와 갈등을 빚고 있던 마오쩌둥이 당내 주자파를 색출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장춘차오는 상하이의 최고 실력자이자 유명한 극좌파인 상하이 시위원회 위원장 겸 상하이 시장 커칭스의 비서로 일하며 그의 측근이 되었고 캉성과도 연계가 있었다. 이 시기 마오쩌둥의 아내 장칭은 펑전을 조지기 위해 베이징 부시장 우한이 집필한 <해서파관>이 단간풍, 번안풍을 불러 일으키는 반동 문학이라고 공격하기 위한 문장가를 찾고 있었다. 장칭은 먼저 베이징의 문장가 리시판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리시판이 장칭의 요청이 억지라 여겨 거부하자 상하이로 내려가 마오쩌둥의 최측근으로 일하던 커칭스를 찾아갔다. 커칭스는 장춘차오를 장칭에게 소개시켜주었는데 장춘차오는 다시 해방일보 편집장인 야오원위안을 장칭에게 소개시켜주었다.

장칭은 1966년 2월 2일부터 20일까지 상하이에서 부대 문예공작좌담회를 개최, 문예계에 아직도 검은 세력이 문예계 17년을 독점하고 있으니 이제 우리가 그들을 독재해야 한고 주장했다. 회의 끝난 후 회의 기요를 정리했는데 장칭은 기요를 불만스럽게 여겨 천보다와 장춘차오에게 <린뱌오가 장칭에게 위탁하여 소집한 부대문예공작좌담회기요>를 작성하게 했다. 이로 인하여 장칭은 중앙군사위원회 문화혁명소조 고문, 해방군 문화공작 고문에 임명되었다. 장칭은 수시로 상하이를 들락이며 류사오치 일파에 대한 공격을 준비했고 장칭, 장춘차오, 야오원위안 세 사람의 합작은 1966년 10월 <신편 역사극 해서 파관을 평한다>라는 역사적인 논설로 이어졌고 이는 문화대혁명의 신호탄인 해서파관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2.2. 상하이 1월 폭풍 사건의 주역

해서파관 사건5.16 사건으로 이어졌고 베이징 제1서기 겸 베이징 시장, 중앙서기처 서기 펑전, 총참모장 뤄루이칭, 중앙판공청 주임 양상쿤, 정치국 후보위원, 중앙선전부장 루딩이 등이 숙청당했다. 마오쩌둥은 새롭게 문화혁명을 영도할 소조를 조직할 것을 요구했고 이로 인하여 중앙문화혁명소조가 설립, 마오쩌둥의 비서 출신인 천보다가 소조장을 맡게 되었다. 이때 부소조장이 된 장칭이 장춘차오를 소조원으로 추천하여 중앙문혁소조에 영입하였고 장춘차오는 다시 야오원위안을 천거하여 소조에 들였다. 이후 제2부조장이 되어 중앙문혁소조 상하이 위원회를 이끌며 학생운동에 대한 보고를 연일 마오쩌둥에게 올렸다. 이때 장칭을 위해 장칭의 1930년대 상하이 시절 활동 자료들을 색출하여 압수하는 임무도 맡았었다.

1966년 6월, 상하이의 노동자들이 왕훙원을 중심으로 공총사를 조직하여 움직임에 나서자 수습을 위해 상하이에 파견되었는데 상하이 시위원회를 반동이라고 비난하던 장춘차오는 장칭, 야오원위안과 함께 왕훙원의 행동을 지지했다. 12월 18일, 칭화대학의 조반파 홍위병 우두머리인 콰이다푸를 만나 "자네들과 같은 혁명 소장들이 물에 빠진 개를 두들겨야 한다는 루쉰 선생의 정신을 발양하여 그들을 내쫓아 버리고 어설프게 중간에 멈춰서는 안될 것이네."라고 발언하여 류사오치덩샤오핑 타도를 주문했고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이 중앙위원회에서 자산계급 반동노선을 견지하면서 아직도 투항하지 않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비난하는 군중대회가 열렸고 국가주석인 류사오치와 그의 부인 왕광메이는 비투회에 끌려나가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비참하게 조리돌림을 당했다.

12월 말, 장춘차오는 야오원위안과 상하이 조반파 홍위병들을 이끌고 상하이 시위총부를 습격, 1967년 1월에 완전히 장악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상하이 1월 폭풍 사건이다. 마오쩌둥은 이를 두고 "이는 한 계급이 다른 한 계급을 뒤엎은 위대한 혁명이다."라고 크게 칭찬했으며 전국적인 탈권 현상이 불어닥쳐 당부와 군부대들이 홍위병들의 습격을 받고 당과 군의 간부들이 납치되어 구타당하고 조리돌림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해졌다. 장춘차오는 의기양양하게 마오쩌둥에게 상의도 하지 않고 상하이 코뮌을 수립했는데 이것은 그의 큰 실수였다.

2.3. 탈권현상과 2월 역류

파일:1967년장춘교.jpg
1967년 4월의 장춘차오

마오쩌둥은 상하이 1월 폭풍으로 조반파가 득세한 것은 기뻐하였으나 중앙문혁소조가 자신과 상의없이 멋대로 일을 처리하고 또 장칭, 캉성, 천보다 등이 서로 권력을 차지하려고 아웅다웅하는 꼴을 보고 크게 못마땅해했다. 2월 10일, 마오쩌둥은 천보다와 장칭을 불러 크게 질책했는데 이 소식이 군부에 전해지면서 군 원로들은 크게 고무되었다. 당시 군부는 구회작 사건, 경서빈관 대소동 등의 연이은 사건으로 중앙문혁소조와 끊임없이 대립하고 있었는데 예젠잉, 쉬샹첸, 녜룽전, 천이, 주더 등 원수들은 홍위병들이 군부대까지 공격하여 닥치는대로 무기를 약탈하고 간부들을 조리돌리며 군의 지휘계통도 반동이라고 무력화하려는 시도에 대해 근본적 질서를 뒤집는 난폭한 행동으로 보아 크게 경계하고 있었고 펑더화이, 허룽을 비롯한 원로들까지 조리돌림당하는 것을 보고 격분한 참이었다.

다음날인 2월 11일 회인당에서 열린 정치국 회의에서 군 원로들은 문혁소조에 전에 없는 분노를 토해냈고 2월 16일 회의에는 당의 원로인 국무원 부총리이며 정치국 위원인 탄전린은 장춘차오가 상하이 시위원회를 파괴한 것을 호되게 질책했다. 장춘차오는 군중과 상의해서 일을 처리했으며 군중이 자체적으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반박했지만 탄전린은 격노하여 장춘차오를 몰아붙혔다.
"말끝마다 대중, 대중 하는데 도대체 대중이 무엇인가? 이 나라를 이끄는 지도부는 여전히 당이다! 당신은 당의 지도력을 무시한 채 하루종일 대중이 어떻게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교육하고, 자유로워져야 하는지 떠들고 있다. 이게 다 무엇인가? 이것은 형이상학이야! 당신들의 목적은 나이 든 간부들을 숙청하는 것이다. 원로 간부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쓰러뜨리려 하고 있다. (...) 고위 간부의 자제들이 너나없이 모두 박해를 받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반동적인 혈통론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 이번 이들은 당의 역사상 가장 잔혹한 투쟁이다. (...) 만약 내가 처음부터 이런 꼴을 보려고 살았다는 것을 알았다면 애당초 혁명에 참가하지도 않고, 공산당에 가입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 예순다섯살까지 살지도 않았을 것이며, 지난 41년동안 마오쩌둥 주석을 따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간단히 해석하자면

"이 시키들아 니놈들이 철없는 어린애들 선동해서 국가 행정기관을 마비시키고 군부인사까지 욕보이냐? 부끄러운 줄 알아라!!"라는 뜻이다.

여기에 천이가 문혁소조야 말로 흐루쇼프라고 빈정대는 초강경 발언을 쏟아내자 장춘차오, 왕리, 야오원위안은 이날 회의록을 정리하여 장칭에게 보고했고 장칭은 이를 다시 마오쩌둥에게 보고했다. 마오쩌둥은 문혁소조의 편을 들어 군 원로들을 질타했고 원로들은 실각하였다. 이로 인하여 국무원과 중앙위원회는 완전히 무력화되고 문혁소조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문혁의 광기는 최고조를 달렸다. 이어 7.20 사건이 발생하자 장춘차오는 7월 31일, 마오쩌둥에게 노동자들이 민병대를 조직할 것을 허락해달라고 청하며 왕훙원을 비롯한 상하이 노동자들을 조직하여 10만명의 민병대를 양성했다. 그리고 정적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며 상하이에서 대대적인 유혈사태를 일으켰다. 이렇게 촉발된 전면내전의 시기가 중국을 휩쓸었으나 1967년 8월의 주중 영국 대표부 점령 사건의 여파로 중앙문혁소조의 왕리, 관펑, 치번위 등이 숙청당하고 계급대오 정돈과 5.16 반혁명 조직 숙청이 시작됨에 따라 문혁 최대의 광기는 종식되었다.

2.4. 문화대혁명 중반기

파일:닉슨주은래장춘교.jpg
1972년 닉슨-마오쩌둥 회담 중의 장춘차오. 왼쪽에 저우언라이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있다.

1967년 문혁소조 숙청 이후 마오쩌둥은 관료 조직의 회복과 더불어 군부 지지 확보에 나서며 문화대혁명을 중단시켰다. 장춘차오는 이 시기 5.16 분자 색출 운동을 구실로 상하이에서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했다. 1969년 4월 1일부터 4월 24일까지 개최된 중국 공산당 제9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정치국 위원에 선출되었다. 이 시기부터 장춘차오는 문화대혁명의 종식을 주장하는 린뱌오, 천보다와 강렬하게 대립하기 시작했다. 문혁소조가 무력화되고 소조장 천보다의 발언권이 약화되자 장춘차오는 "이제 남은 것은 계속 혁명을 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다."라고 발언하였으며 1969년 4월 9차 당대회 정치보고 준비작업에서 경제 우선을 내세운 천보다에게 계급투쟁 우선을 주장하며 공격했다. 마오쩌둥은 장춘차오의 보고를 채택함으로 천보다는 패배했다. 천보다는 중앙위원회 부주석 겸 국방장관 린뱌오와 연합하여 소위 상하이방이라 불리는 장춘차오 세력을 견제하고자 했다.

1970년 5월, 항저우에서 휴식을 취하던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을 국가수반으로 지명하는 헌법 2조를 삭제하기 위해 헌법개정소조를 꾸릴 것을 지시했다. 마오쩌둥은 자신은 더 이상 국가주석을 맡을 생각이 없으며 국가주석직이 존치된다면 린뱌오를 시키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린뱌오는 자신이 국가주석직을 맡을 생각은 없지만 중국과 같은 큰 나라에 상징적 국가원수가 없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주장하며 마오쩌둥이 국가주석을 맡아야 한다고 했다. 이에 마오쩌둥은 헌법에 국가주석직은 존치하되 국가주석은 자신이나 린뱌오가 아닌 둥비우를 시키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지시했다. 한편 천보다와 오법헌, 이작붕 등 린뱌오를 지지하는 군인들은 마오쩌둥이 국가주석직 부활을 원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장춘차오와 캉성은 마오쩌둥은 국가주석직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에 장춘차오는 이들을 저격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끊임없이 마르크스주의마오쩌둥 사상을 떠들어 대는 이들이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다가 1970년 8월 루산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제9기 중앙위원회 제2차 전원회의에서 국가주석직 부활과 천재론을 주장하며 린뱌오의 위치를 굳히려고 했다. 장춘차오는 헌법에서 천재란 표현을 삭제하자고 주장했고 이에 린뱌오와 천보다는 상하이방을 견제할 좋은 기회라 여겼다. 마오쩌둥이 린뱌오를 떠보기 위해 장칭과 장춘차오를 비난한 것도 린뱌오가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 8월 23일, 린뱌오는 상하이방과 그들의 후원자인 장칭을 겨냥해 "마오쩌둥 주석은 천재이기 때문에 헌법에 마오쩌둥 주석의 지도적 지위를 규정하고 마오쩌둥 사상을 규정해야 한다."고 한시간이나 연설하며 마오쩌둥을 칭송했고 린뱌오의 측근들과 장칭, 장춘차오를 싫어하던 군 원로들은 린뱌오를 지지했다. 8월 24일, 천보다가 <천재론>이란 논문을 제출했다. 천보다는 주석의 천재성을 부정하는 음모가와 반동분자를 축출해야 한다며 장춘차오를 겨냥했고 이어 국가주석직 부활을 주장했다.

이에 장칭과 장춘차오는 마오쩌둥에게 린뱌오의 행동은 영수를 속이기 위한 뿌리 깊은 음모가들의 비열한 시도라고 맹비난했다. 이에 마오쩌둥은 갑자기 국가주석직 부활 주장에 대해 분명한 반대를 밝히고 8월 31일 <나의 의견>이란 글을 발표, 천보다를 가짜 마르크스주의자, 스파이, 반역자, 출세주의자로 맹비난하며 실각시켰다. 이는 복합적인 원인이 있었는데 린뱌오의 야심에 대해 마오쩌둥이 경계하면서 마오쩌둥-린뱌오의 알력이 심해지고 있었던 것도 있었고 장춘차오는 이미 문화대혁명의 상징으로 장춘차오를 타도하는 것은 문화대혁명을 부정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또한 마오쩌둥은 경제적 안정을 주장하는 천보다의 방법론에 동의하지 않았고 군구 개편 사업을 하면서 린뱌오의 숙청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1970년 11월 6일, 당중앙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중앙문혁소조를 대체하는 중앙조직선전조가 설립되자 장춘차오는 조원이 되어 언론을 장악하고 중앙에서 공개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1971년 4월 15일부터 7월 31일까지 국무원 주관으로 열린 전국교육사업회의가 개최되자 장춘차오는 야오원위안과 함께 마오 주석의 무산계급 교육 노선이 제대로 관철 집행되지 않았고 자산계급이 무산계급을 독재했으며 신중국 건국 이후 건설된 학생들의 세계관이 자산계급적이이라는 <두 개 평가>를 제출하였다. 이 평가는 8월 13일 중공중앙에 의해 <전국교육사업회의 요지>란 이름으로 채택되었고 상산하향 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한편 권좌에서 밀려나버린 린뱌오는 계속되는 마오쩌둥의 압박을 견디지 못했고 그의 아들 린리궈571 공정이라 불리는 쿠데타를 기도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마오쩌둥과 더불어 장춘차오, 야오원위안, 왕훙원, 장칭 등도 표적이 되었으나 비현실적이었던 571 공정은 실현에 옮겨지지도 못했고 린뱌오 일가는 비행기를 타고 도주하다가 몰살당한다. 9.13 사건 이후 1971년 12월부터 1972년 2월까지 열린 전국계획회의에 참석한 장춘차오는 7가지 제도의 회복과 7가지 지표의 장악을 규정한 저우언라이의 회의 요지에 대해 문건이 너무 길어 발부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반대하였으며 유명무실한 정치에 대한 비판은 곧 문화대혁명 반대라고 주장하여 요지 채택을 결렬시켰다.

2.5. 비림비공운동

9.13 사건에 이어 1972년 천이 원수가 사망하자 마오쩌둥은 상당히 실의에 빠져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이에 장칭은 격렬히 반발하며 왕훙원을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삼기 위한 공작에 들어갔다. 린뱌오 사망 이후 한동안 극좌주의자를 공격하던 마오쩌둥도 1972년 말에 이르러 문화대혁명의 권위가 너무 약해졌다고 판단하여 사실 린뱌오는 극좌주의자가 아니라 극우주의자였다고 말을 바꾸어 문혁 강화로 노선을 갈아탔으며 12월 17일, 극좌적 사조에 대해 적게 비판하라고 지시하는 한편 12월 28일, 왕훙원을 후계자로 삼았다. 장칭은 장춘차오, 왕훙원, 야오원위안과 함께 당내 투항주의자들을 상대로 한 공개 투쟁과 군중 동원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계획은 이미 죽은 린뱌오를 겨냥하면서 동시에 저우언라이도 잡자는 것이었다. 1973년 7월 4일, 장춘차오는 왕훙원과 함께 마오쩌둥을 만나 저우언라이가 미국을 상대로 확고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이에 마오쩌둥은 "결론 단 네마디다. 큰 문제는 토론하지 않고 작은 일만 매일 올려보낸다. 이러한 흐름을 바꾸지 않으면 수정주의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라고 저우언라이를 비난했고 린뱌오가 국민당처럼 공자를 숭배했다는 발언 역시 얻어내게 되었다. 이를 구실로 4인방은 비림비공 운동을 전개하여 저우언라이가 유가를 숭배하고 법가를 배척한다는 식으로 마구 비난했으나 주자파 드립 때와 달리 저우언라이에 대한 공격은 군중의 호응을 조금도 얻어내지 못했다.

장춘차오는 1973년 5월 20일부터 31일까지 진행된 중공중앙 사업회의에서 당규약개정소조를 이끌게 되었으며 중국공산당 규약과 10차 당대회 정치보고 작성을 맡았다. 1973년 8월 24일부터 8월 28일까지 베이징에서 개최된 중국 공산당 제10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장춘차오는 9차 당대회와 문화대혁명을 긍정하고 린뱌오를 반당집단으로 비난하는 정치보고를 작성했다. 10차 전대의 결과로 장춘차오는 중앙위원회 위원 겸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중앙위원회 부주석이 되었으며 저우언라이 및 그를 지지하는 예젠잉을 온갖 꼬투리를 잡아 맹비난했다.

여기에 저우언라이가 암에 걸린 것이 확인되고 1973년 2월 덩샤오핑이 복권되자 장칭은 덩샤오핑을 난타하는 한편 죽어가는 저우언라이를 대신하여 장춘차오를 새로운 국무원 총리로 앉히려 했다. 이 과정에서 영화 <개척자> 상영금지 사건, 영화 <해하> 상영금지 사건 등의 무리수도 계속 두었으며 <풍경호 선박 사건> 등을 일으켜 덩샤오핑과 저우언라이를 양노사상 소유자로 몰았다. 1974년 10월 4일, 마오쩌둥이 덩샤오핑을 제1부총리로 선포하자 10월 18일에 창사에서 휴식을 취하던 마오쩌둥에게 비행기를 타고 베이징에서 온 왕훙원이 덩샤오핑 임명안을 반대하고 장춘차오를 차기 총리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마오쩌둥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그들의 도가 지나친 행동에 화가 난 마오쩌둥도 장칭을 불러 더 이상 왕훙원, 장춘차오, 야오원위안을 만나지 말라고 했으며 정치국 회의에서 그들과 장칭을 묶어 사인방이라고 비난했다. 장칭은 자아비판을 해야 했으나 건강이 매우 나빠진 마오쩌둥은 더 이상 정치 일선에서 활동하기 어려웠고 장칭은 계속 막나갔다.

1974년 11월 19일, 마오쩌둥은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에 쑹칭링을 포함시키라고 지시하는 한편 장춘차오를 국무원 부총리로 삼을 것을 지시했다. 1975년 1월 5일에 장춘차오는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주임에 임명되어 선전업무를 주관했다. 장춘차오는 군의 인사 임명권을 장악하려 했지만 덩샤오핑과 예젠잉의 견제로 실패했다. 1975년 2월 5일 성립된 중앙군사위원회 상무위원에도 임명되었다.

2.6. 1차 천안문 사태

1975년 1월 8일부터 1월 10일까지 열린 당 중앙위원회 제10기 2차 전원회의에 출석한 장춘차오는 헌법 개정 보고를 했으며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국무원 부총리가 되었다. 이 2차 전원회의에서 덩샤오핑이 중공중앙 정치국 상무위원, 중공중앙 부주석으로 선출되어 정돈사업을 실시하자 장춘차오 등은 이것이 수정주의의 공범인 경험주의이며 교조주의보다 위험하다고 연일 비난했다. 1975년 2월 22일, 야오원위안과 함께 인민일보를 통해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무산계급 독재를 논함>이라는 33개 조목의 어록을 발표했으며 3월 1일 정치부 주임좌담회를 개최, 덩샤오핑이 이윤, 상금, 물질 자극과 같은 수정주의를 추구하면 류사오치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4월 1일, 마오쩌둥이 레닌이 무엇 때문에 자산계급에 대한 독재를 해야 하는지 대한 글을 쓰라는 지시에 따라[1] <자산계급에 대한 전면적인 독재를 논함>을 발표하여 자산계급의 모든 토성을 쳐부수자고 주장했다.

그런데 방광암에 걸려 죽어가던 마오쩌둥이 장칭을 내칠 것이라 여겨 캉성이 갑자기 장칭과 장춘차오를 공산당의 배신자였다면서 비난하고 나섰다. 그는 마오쩌둥의 비서 낸시 탕과 왕하이룽에게 장춘차오와 장칭의 부정부패에 관한 정보원을 소개시켜주며 마오쩌둥에게 전해달라고 했지만 마오쩌둥은 장칭을 당장 숙청할 생각도 없었고 캉성은 1975년 12월에 사망, 캉성의 고발은 흐지부지하게 묻혔다. 그의 고발은 4인방이 덩샤오핑의 사주로 덮어씌워버렸다.

1976년 1월, 저우언라이가 사망하자 4인방은 장례식을 검소하게 치른다는 구실로 추모활동을 탄압했으며 추모 보도를 금지했다. 1976년 3월 2일, 장칭은 12개 성, 자치구의 책임자들을 불러 회의를 열러 <풍경호 선박 사건> 관련 자료를 배부하며 덩샤오핑을 한간, 매판자산계급과 지주자산계급의 대표자, 국제자본주의의 대리인으로 맹공격했다. 장춘차오도 덩달아 독점자산계급, 매판자산계급, 대내수정주의자, 대외투항주의자로 공격했다. 4인방의 횡포가 끝을 보이지 않자 전국적으로 장칭과 장춘차오를 타도해야 한다는 분노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급기야 1차 천안문 사태가 벌어지기에 이르렀다. 4월 5일에 소집된 정치국 회의에서 장춘차오는 덩샤오핑이 너지 임레와 같은 인물이라고 맹비난했다. 마오위안신은 덩샤오핑을 비판하는 마오쩌둥의 지시를 전달했다.

저우언라이가 죽은 후 총리 자리는 덩샤오핑도 장춘차오도 아닌 화궈펑이 차지했지만 덩샤오핑의 정돈 사업에 불만을 품고 있던 마오쩌둥은 1차 천안문 사태의 배후에 덩샤오핑이 있으며 덩샤오핑은 파시스트라는 4인방의 비난에 덩샤오핑을 다시 실각시켰다. 1976년 여름, 마오쩌둥은 정치국원들을 불러 모아서 "장칭을 도와서..."라고 말했는데 뒷말에 대해서 장춘차오와 왕훙원은 "홍기를 들고 가도록."이라고 했다고 주장했고 나머지 정치국원들은 "과오를 교정하도록."이라고 했다고 주장했다.

2.7.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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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의 시신 앞에 선 정치국원들. 왼쪽에서부터 장춘차오, 왕훙원, 장칭, 화궈펑, 마오위안신, 야오원위안, 천시롄, 왕둥싱.

결국 1976년 9월, 마오쩌둥이 사망했다. 마오쩌둥이 죽은 후 중국은 4인방과 마오쩌둥의 조카 마오위안신과 화궈펑예젠잉, 샤오징광, 쉬스유 등 군부측으로 나뉘어 대립했다. 9월 16일, 인민일보 사설에 마오쩌둥이 화궈펑에게 전달한 당부 중 앞의 <천천히 하라, 서두를 것 없다>, <과거의 방침에 비추어서 하라>가 화궈펑의 지시로 발표되었는데 4인방은 문혁 지속과 자신들의 집권 정당화를 위해 2항을 <기정 방침대로 하라>로 왜곡했다. 이어 해방군보, 홍기도 4인방에 의해 왜곡된 유언을 발표했다. 9월 19일, 마오쩌둥의 시신 보존을 위한 정치국 회의에 참석한 장춘차오 등은 마오쩌둥의 문서와 서적류 일체를 장칭에게 양도할 것을 요구했다. 화궈펑이 거절하자 장춘차오는 마오위안신을 불러 마오쩌둥의 비서 장위펑의 문서 등록을 돕게 하자고 제안했고 결국 문서를 몰래 빼돌려 자신들에 대한 비난을 여럿 삭제, 수정해버렸다. 그리고 9월 22일과 9월 28일 판공실 공작원들을 상하이로 파견해 마천수, 서경현 등 상하이시 당위원회 간부들에게 전쟁 준비를 지시했다. 10월 2일, 화궈펑이 장춘차오에게 언론에 공포된 마오쩌둥의 당부와 자신이 받은 당부가 틀렸다고 항의하는 문건을 보냈으나 장춘차오는 장칭과 상의하여 이 문건을 전달하지 않았다.

결국 선수를 친 것은 군부였고 10월 6일, 4인방은 기습적으로 체포되었다. 8시에 마오 선집 출판에 관해 논의하기로 한 정치국 회의에 출석하기 위해 서류가방을 안고 회인당에 출근했던 장춘차오는 자신의 의자가 없어졌고 예젠잉화궈펑이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는 것을 보고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으나 행동조의 기습으로 체포되고 화궈펑으로부터 격리심사를 통보받았다. 장춘차오는 "이렇게 빨리 움직이다니."라고 중얼거리며 순순히 끌려나갔고 10월 12일, 상하이에서 맡았던 당 내외 모든 직무에서 해임하고 공작조를 파견, 상하이의 지도부를 개편하여 장춘차오 석방을 위해 궐기하려던 상하이의 민병대와 상하이 지도부를 진압했다. 또한 10월 18일, <왕훙원, 장춘차오, 장칭, 야오원위안 반당집단 사건에 관한 통지>를 현급 당 조직에 발부하여 4인방 비판 투쟁 전개를 지시했다. 장춘차오는 중난하이 지하실에 수감된 후 법적 조치 없이 베이징 친청 교도소로 이감되어 4년 간 갇혀 있었다.

1976년 11월 15일부터 19일까지 중국 공산당은 전국선전사업좌담회를 개최, 사인방의 범죄의 증거를 전당에 전달함으로 사인방이 당과 국가의 권력을 탈취하려고 음모와 죄행을 저질렀다고 공포했다. 1977년 1월, 이론계가 장춘차오의 논설 <자산계급에 대한 전면적인 독재를 논함>을 지명해서 비판함으로 문화대혁명의 이론적 배경을 부정하였다. 1977년 7월 16일부터 21일까지 당 중앙위원회 제10기 3차 전원회의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는 화궈펑을 중공중앙 주석, 중공중앙 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선출하는 한편 왕훙원, 장춘차오, 장칭, 야오원위안 반당집단에 대한 결의를 채택하여 이들을 모두 당에서 제명하고 당 내외 모든 직무를 취소시켰다. 1977년 9월 19일, 덩샤오핑은 교육부에서 담화를 발표, 장춘차오와 야오원위안이 작성한 <교육 전선에 대한 두 개의 평가>를 뒤집고 대학생 모집 사업을 실시하여 중국의 대학 교육 제도를 회복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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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특별법정에 회부된 장춘차오

1980년 11월 2일, 특별법정에 기소된 장춘차오는 비참한 몰골로 나타나 재판 내내 침묵을 지켰고 1981년 1월 25일, 장칭과 함께 사형과 집행유예 2년을 섣고받았다.

2.8. 말년

1981년 1월 25일, 사형과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장춘차오는 베이징 친청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1983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1991년에 옥중에서 병사했다는 잘못된 소문이 돌아 바깥에서는 장춘차오가 죽었다고 기정사실화했었지만[2] 생존이 확인되었다. 1997년 2월 다시 18년형으로 감형되었다. 1998년 1월 질병을 이유로 가석방된 후 상하이의 병원에서 경찰의 엄중한 감시를 받으며 은둔생활을 했다. 이후 홍콩을 통해 <옥중의 장춘차오>란 책을 펴냈고 마오쩌둥의 당부를 조작했다는 혐의에 대해 화궈펑이 자신들을 타도하기 위해 하잘 것 없는 시시한 문제를 과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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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장녀 장웨이웨이와 사진을 찍은 장춘차오

2005년 4월 21일, 베이징에서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5월 10일, 신화통신이 그의 죽음을 보도했다. 8개월 후 야오원위안도 당뇨병으로 사망하면서 4인방은 모두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3. 참고문헌


[1] 해당 지시는 1974년 12월 26일 4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있었다.[2] 예컨대 산케이 신문사에서 출판한 모택동 비록도 1991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기술했었으며 한국 언론보도에서도 사망설이 많이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