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공화국 시절 깃발 | 제4공화국 시절 깃발 |
1. 개요
각급학교 대상 평시 안보의식 고취 및 전시 징병을 위해 운영한 학생조직. 교련과 더불어 학교병영화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각 대학교의 총학생회를 없애고 불온 학생들의 통제를 위해 세운 조직이라 학도호국단 간부들은 사실상 박정희 정권에 부역하던 청년들로 대학교 졸업 후에는 재벌기업, KBS 등 주요 유관기관에 특채되었기 때문에 당시 이들을 비하하는 호돌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2. 역사
1949년 9월 대통령령 제186호 '대한민국학도호국단규정'으로 제정되었고 중(등)학교 이상의 재학생들 및 교직원들을 대상으로 학도호국단이 조직되었으며 문교부장관의 감독하에 있었다.[1] 1950년 5월, 1951년 8월, 1957년 3월 세 차례에 걸처 법령이 일부 개정되었다가 4.19 혁명 이후인 1960년 5월 해당 법령이 폐지되었다.그러다가 1975년 6월 대통령령 제7645호 '학도호국단설치령' 및 문교부령 제363호 '학도호국단설치령시행규칙'이 시행되어 고등학교 이상의 재학생들 및 교직원들을 대상으로 부활했으며 1980년 2월 설치령은 전부개정, 설치령시행규칙은 폐지되었다가 1985년 3월 설치령도 폐지되었다.
3. 폐지 이후
학도호국단 설치 근거가 되는 설치령 및 시행규칙은 1985년에 폐지되었지만 이후에도 교육부에서 전시관계법령안 중 하나인 '학도호국단설치에관한임시조치령안('(3급 비밀)을 준비해두고, 각 지역 교육청들을 거쳐 매년 3월 전국 고등학교에 '전시 학도호국단 운영계획' 공문(대외비)을 내려보냈다. 즉, 전시나 그에 준하는 상황 시 대통령긴급명령을 통해 당해 명령을 발령시킨 뒤 학도호국단을 부활시켜 운영하겠다는 것이다. 간략히 내용을 설명하면 충무 3종사태[2]가 발동 시 학생들에게 단원으로서 활동임무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며 충무 2종사태[3] 시 학교에서 학도호국단 조직을 운영하며 편성은 각 학교는 교내 규모 등 상태에 따라 연대 혹은 대대 제대로 편성되며 연대 또는 대대장은 학교의 장이 맡게 되어 있다. 그 밑으로 대대[4], 중대, 소대, 분대로 군의 제대편성과 동일하게 이뤄졌다.2001년 5월 기준으로 전시에 학도호국단은 긴급복구사업 지원, 민방공 지원, 경계지원 등의 민방위 활동을 하며 특히 실업계(현 전문계) 학생은 "필요시 방위산업체 및 국가기간산업 등 전쟁과 직접 관련이 있는 산업체의 생산활동을 지원"하며 여학생은 각 지역별로 구급활동, 유아보호 및 군병원 등에서 간호활동을 지원한다. #
2005년 '교육희망'이라는 주간언론에서 전시 학도교육단 운영계획(2005년 충무 3200 교육시행계획/ 문서번호 충남교육청 총무-5)을 단독입수하여 폭로했는데 이에 대해 교육부의 윤병만 비상계획담당관은 "시대변화에 따라 내용을 점차 완화해가고 있지만 전시상황에 대비한 것이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다”면서 “우리나라가 처해 있는 입장이 휴전 상태이므로 학도호국단 편성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 2006년 5월 한겨레21에서 교육부에 '2001~2006년도 (학도호국단) 운영계획과 관련 회의록 및 장차관 결재문서 등'에 대해 정보공개를 청구했으나 교육부는 '해당 문서는 내용 누설 시 국가안전보장 등 유해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며 비공개 통보했다. #
그러나 2005년 5월 결원시 전시 학도호국단 편성 대상에 포함시키도록 한 중학교 3학년을 편성 대상에서 아예 제외하였고 '좌경학생에 대한 특별지도를 실시하고 교원 및 교직단체에 대하여는 특단의 대책을 강구한다'는 문구는 삭제하였으며 학생들에게 단번(일종의 군번)을 부여하는 내용도 삭제하였다. 대신 교육부는 학생동원을 자발적인 참여 쪽으로 개선하고 학도호국단 편성도 학교 단위에서 개인 거주지역 단위로 변경하였다. #
1969년 3월 대통령령 제3818호로 제정된 비상기획위원회[5] 규정이 1998년까지 제 10조(자원동원실) 6항 정부기능담당관의 보좌업무로 포괄적으로 포함되어 있다가 1999년 5월 규정 전부개정으로 제 11조(동원기획국) 5항 8목에 명확히 '학도호국단의 운영에 관한 사항' 으로 명시되었고 2005년 3월 24일 규정 일부개정으로 제 11조(동원기획국) 항목에서 '학도호국단'이라는 단어가 자취를 감추었으며 2008년 2월 규정 타법폐지로 해당 규정 자체가 사라졌다.[6] 평시에는 실체가 없는 조직이 된 셈이지만 아직도 병력/인력 동원을 규정하는 전시관계법령들, 특히 학도호국단설치에관한임시조치령 계획안이 사라지지 않는 한 학도호국단이 아예 없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7]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와 인권운동사랑방 등은 '18세 미만 청소년들을 전쟁에 동원할 준비를 갖추는 것만으로도 명백한 인권침해'라 주장하였고 교육부는 전쟁동원이 아닌 민방위 활동이라고 반박하였지만 교육부의 반박에 대해선 병역법 제83조 전시특례에 전시/사변, 동원령이 선포되었을 때 국방부장관이 병역판정검사 실시대상자의 연령변경 및 검사항목 간소화를 할 수 있으므로 남학생들의 경우 곧바로 현역병으로 동원될 수 있다는 의미다. 거기에 민방위기본법 제18조를 보면 1항에서는 고등학생의 경우 민방위에서 제외되지만 2항에서 1항에 따라 제외된 자라 할지라도 지원을 하면 민방위에 소속될 수 있게 되어 있고 이미 혼란한 상황 속에서 과연 국가가 지원을 통해서만 민방위에 소속되게 할지조차 의문인 상황에 상황이 계속 나빠지면 민방위도 예비군이나 현역병으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여학생이면 몰라도 남학생까지 단순한 민방위 활동일 뿐이라고 교육부가 주장하는 건 맞지 않다. 2005년 6월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출하였으나 각하되었다.
4. 여담
- 1975년 6월 동국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강모씨가 학도호국단 창단식이 열린다는 사실을 알고 창단 반대시위준비를 하던 중 경찰에 검거되어 긴급조치 제9호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고 서울형사법원은 동년 12월 23일 강씨에게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 자격정지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이로부터 38년이 지나 재심을 받을 수 있었는데 2013년 6월 27일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1부에선 '(당시 재판부가) 헌법에 명백하게 위배되는 긴급조치 제9호를 위반한 혐의로 유죄판결을 내렸다며 사법부가 잘못된 법률을 가리지 못하고 피고인에게 유죄를 선고해 헤아릴 수 없는 힘든 세월이 있었고 이에 대해 너무 늦게 무죄선고를 하여 사죄드린다'고 밝히며 강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
[1] 다만 소관부처는 문교부가 아닌 국방부였다.[2] 군의 데프콘3과 동일[3] 군의 데프콘2와 동일[4] 학교가 연대로 편성 시, 대대로 편성되었을 때는 중대부터.[5] 처음에는 단순히 국가안전보장회의 산하로 해당 위원회를 두었으나 1984년 8월 법률 제3745호 비상대비자원관리법이 제정되며 위원회 규정이 해당 법의 하위규정으로 시행근거가 만들어졌다.[6] 규정 폐지사유는 정부조직법이 개정되어 비상기획위원회 기능이 행정안전부로 통합되었기 때문이라고 함[7] 참조. 이 기사는 2020년 5월 수정되었다고 나오지만 최초 작성은 2006년 6월이므로 혼동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