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 콥의 주요 수훈 /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역임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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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이저 리그 올센추리 팀 일원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이름 | 타이 콥 Ty Cobb | ||||||||||||||||||||||||||||||||||||||||||||||||||||||||||||||||||||||||||
포지션 | 외야수 | |||||||||||||||||||||||||||||||||||||||||||||||||||||||||||||||||||||||||||
득표수 | 777,056 | }}} |
올타임 MLBRank | |||||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0 -15px 0" | ※ 2022년 2월 ESPN의 패널들이 선정한 역대 메이저 리거 랭킹. 금지 약물 복용자들이 버젓이 선정됐고 기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평가와는 다른 부분들이 있으므로 참고용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 ||||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베이브 루스 | 윌리 메이스 | 행크 애런 | 타이 콥 | 테드 윌리엄스 | |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루 게릭 | 미키 맨틀 | 배리 본즈 | 월터 존슨 | 스탠 뮤지얼 | |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페드로 마르티네즈 | 호너스 와그너 | 켄 그리피 주니어 | 그렉 매덕스 | 마이크 트라웃 | |
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조 디마지오 | 로저 클레멘스 | 마이크 슈미트 | 프랭크 로빈슨 | 로저스 혼스비 |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 align=center><table width=100%><table bordercolor=#182d55>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영구결번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영구결번 | |||
<rowcolor=#ccac00> No.1 | No.2 | No.3 | No.5 | |
<rowcolor=#ffffff> 루 휘태커 | 찰리 게링거 | 앨런 트래멀 | 행크 그린버그 | |
<rowcolor=#ccac00> No.6 | No.10 | No.11 | No.16 | |
<rowcolor=#ffffff> 알 칼라인 | 짐 릴랜드 | 스파키 앤더슨 | 할 뉴하우저 | |
<rowcolor=#ccac00> No.23 | No.42 | No.47 | ||
<rowcolor=#ffffff> 윌리 호튼 | 재키 로빈슨 | 잭 모리스 | ||
기념자 | ||||
<rowcolor=#ccac00> COBB | COCHRANE | CRAWFORD | HEILMANN | |
<rowcolor=#ffffff> 타이 콥 | 미키 코크런 | 샘 크로포드 | 해리 하일만 | |
<rowcolor=#ccac00> MANUSH | JENNINGS | KELL | HARWELL | |
<rowcolor=#ffffff> 하이니 마누시 | 휴이 제닝스 | 조지 켈🎙️ | 어니 하웰🎙️ | |
코메리카 파크 외야 담장에 헌액된 명단이다. 성명으로 헌액된 인물들은 타이 콥과 같이 당시에 배번이 없었거나, 감독 및 캐스터 등 번호가 없는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
※ 1936년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이 생기자마자 처음으로 입성한 5명의 선수. | ||||
타이 콥 (98.23%) | 호너스 와그너 (95.13%) | 베이브 루스 (95.13%) | 크리스티 매튜슨 (90.71%) | 월터 존슨 (83.63%) |
※ 퍼센트는 투표 당시 투표율. |
1911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MVP | ||||
1911년 첫 수상 | → | 타이 콥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 | 트리스 스피커 (보스턴 레드삭스) |
냅 라조이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 1901년) | → | 타이 콥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1909년) | → | 하이니 짐머맨 (시카고 컵스, 1912년) |
1907년 ~ 1915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타격왕 | ||||
조지 스톤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 | → | 타이 콥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 | 트리스 스피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
1917년 ~ 1919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타격왕 | ||||
트리스 스피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 → | 타이 콥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 | 조지 시슬러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 |
1909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홈런왕 | ||||
샘 크로포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 | 타이 콥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 | 제이크 스탈 (보스턴 레드삭스) |
1907년 ~ 1909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타점왕 | ||||
해리 데이비스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 | → | 타이 콥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 | 샘 크로포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1911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타점왕 | ||||
샘 크로포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 | 타이 콥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 | 홈런 베이커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 |
1907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도루왕 | ||||
존 앤더슨 (워싱턴 세네터스) 엘머 프릭 (클리블랜드 냅스) | → | 타이 콥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 | 팻시 도허티 (시카고 화이트삭스) |
1909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도루왕 | ||||
팻시 도허티 (시카고 화이트삭스) | → | 타이 콥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 | 에디 콜린스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 |
1911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도루왕 | ||||
에디 콜린스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 | → | 타이 콥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 | 클라이드 밀란 (워싱턴 세네터스) |
1915년 ~ 1917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도루왕 | ||||
프리츠 마이셀 (뉴욕 양키스) | → | 타이 콥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 | 조지 시슬러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 |
보유 기록 | |
통산 타율 | 0.366 |
최다 타격왕 시즌 | 12회 |
최다 4할 타율 시즌 | 3회[1] |
최다 3할 타율 시즌 | 20회 |
연속 3할 타율 시즌 | 19년 연속[2] |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182d55><tablebgcolor=#182d55>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역대 감독 |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1대 조지 스탈링스 1901 | 2대 프랭크 드와이어 1902 | 3대 에드 바로우 1903~1904 | 4대 바비 로우 1904 | 5대 빌 아무어 1905~1906 |
6대 휴이 제닝스 ☆☆☆ 1907~1920 | 7대 타이 콥 1921~1926 | 8대 조지 모리아티 1927~1928 | 9대 버키 해리스 1929~1933 | 10대 델 베이커 1933 | |
11대 미키 코크런 ☆★ 1934~1936 | 10대 델 베이커 1936 | 11대 미키 코크런 1936~1937 | 10대 델 베이커 1937 | 11대 미키 코크런 1937 | |
10대 델 베이커 1937 | 12대 사이 퍼킨스 1937 | 11대 미키 코크런 1938 | 10대 델 베이커 ☆ 1938~1942 | 13대 스티브 오닐 ★ 1943~1948 | |
14대 레드 롤프 1949~1952 | 15대 프레드 허친슨 1952~1954 | 9대 버키 해리스 1955~1956 | 16대 잭 타이 1957~1958 | 17대 빌 노먼 1958~1959 | |
18대 지미 다익스 1959~1960 | 19대 빌리 히치콕 1960 | 20대 조 고든 1960 | 21대 밥 셰핑 1961~1963 | 22대 척 드레슨 1963~1964 | |
23대 밥 스위프트 1965 | 22대 척 드레슨 1965~1966 | 23대 밥 스위프트 1966 | 24대 프랭크 스카프 1966 | 25대 메이요 스미스 ★ 1967~1970 | |
26대 빌리 마틴 1971~1973 | 27대 조 슐츠 1973 | 28대 랄프 호크 1974~1978 | 29대 레스 모스 1979 | 30대 딕 트러세프스키 1979 | |
31대 스파키 앤더슨 ★ 1979~1995 | 32대 버디 벨 1996~1998 | 33대 래리 패리쉬 1998~1999 | 34대 필 가너 2000~2002 | 35대 루이스 푸홀스 2002 | |
36대 앨런 트래멀 2003~2005 | 37대 짐 릴랜드 ☆☆ 2006~2013 | 38대 브래드 어스무스 2014~2017 | 39대 론 가든하이어 2018~2020 | 40대 로이드 맥클렌던 2020 | |
41대 A.J. 힌치 2021~ | |||||
★: 월드 시리즈 우승 / ☆: 월드 시리즈 준우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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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82d55><colcolor=#ffffff>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No. COBB | |
타이러스 레이먼드 "타이" 콥 Tyrus Raymond "Ty" Cobb | |
출생 | 1886년 12월 18일 |
조지아 주 뱅크스 카운티[3] 내로우스 | |
사망 | 1961년 7월 17일 (향년 74세) |
조지아 주 애틀랜타 | |
학력 | 프랭클린 카운티 고등학교 |
신체 | 185cm / 79kg |
포지션 | 중견수 |
투타 | 우투좌타 |
프로입단 | 1905년 아마추어 자유계약 (DET) |
소속팀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1905~1926)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 (1927~1928) |
지도자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감독 (1921~19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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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前 야구 선수.
20세기 초 데드볼 시대에 크게 활약했던 전설적인 선수로, 다수의 수상실적과 기록으로 유명했다.
2. 선수 생활
2.1. 신인 시절
그가 선수 생활을 시작한 1906년은 첫걸음이 영 좋지 않았다. 시범경기를 위해 3월 9일에 팀에 합류했는데 30일에 아버지를 살해한 어머니의 재판때문에 조지아로 돌아갔고, 다음날 무죄 판결을 본다. 판결 후 며칠동안 어머니와 함께 한 후 (무슨 대화를 했을지 심히 궁금해지는 부분이다) 4월 7일에 팀에 다시 합류했는데 그때 걸린 편도염이 너무 심해서 마취도 없이 바로 절제수술을 받았다. #당시 메이저리그는 선후배 문화가 살벌하고 신인 괴롭히기가 심했고, 루키시절 타이 콥도 예외가 아니었다.[4] 데뷔 시즌부터 고참들한테 어찌나 자주 두들겨 맞고 괴롭힘당했는지 얼마 후 권총을 소지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의 성적에도 영향을 끼쳐 개막부터 6월 중순까지 .348을 유지하던 타율은 7월까지 3푼이나 하락하고, 7월 중순엔 콥이 아예 잠적해버렸다. 팀 수뇌부가 그를 발견했을땐 그는 신경쇠약에 걸려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고, 9월까지 44일을 쉬는 걸 허락받는다.# 정황상 수뇌부는 "사내자식이 그런 것도 못참고..."하고 혀를 찼겠지만 워낙 엄청난 재능이었기에 선처를 준 것으로 보인다. 결국 데뷔시즌 타율은 0.240으로 마감.
대신 1907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팀 감독이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다 몸에 맞는 공 기록자[5]이자 아이비리그 엘리트 출신으로 유명했고 메이저리그에서 나름 부드러운 코치 이미지였던 휴이 제닝스로 바뀌면서 이야기는 달라진다. 1906년 성적은 그저 그랬지만 압도적 천재인 타이 콥의 재능을 감독부임 전부터 알아본 휴이 제닝스 감독이 타이 콥에게 강압적이거나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고, 시즌 전부터 "니가 뭘 하든 나는 계속 널 주전으로 쓰겠다. 그러니 니가 하고싶은 방식대로 최선을 다해 야구해라"라고 말했고, 망할 뻔한 타이 콥의 인생은 바로 탄탄대로를 걷는다. 선배들이 타이 콥을 건드리는 일도 감독인 제닝스가 금지했다. 타이 콥은 그해 바로 타격왕을 차지하고 최고스타의 반열에 오른다. 타이 콥 폭력사건 직후 몇경기 선수출전을 해서 대타나 대수비를 했던 감독이 바로 이 사람. 그는 감독자리를 타이 콥에게 물려주고 감독을 은퇴할 때에도, "내 야구인생 최대 영광은 타이 콥이라는 선수의 감독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저 신인시절 그에게 기회를 주었을 뿐인데 이런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라고 인터뷰 한 바 있다. 무려 14년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감독을 했고, 지금도 역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감독 중 최다승 2위에 랭크되어 있는 프랜차이즈 레전드 감독이며, 후세에 영구결번 감독으로 선정되어 지금도 타이 콥과 함께 홈구장에 영구결번 상징용 유니폼이 걸려 있다. (단 그 시대에는 등번호가 없어서 진짜 결번을 할 일은 없는데, 그냥 등번호 생긴 뒤의 후배 영구결번 선수나 지도자들과 동등한 프랜차이즈 레전드라는 의미로 같이 걸어 주는 것이다.) 사구나 타이 콥의 스승인 것 이외에도 선수시절 커리어하이 시즌은 꽤나 화려해서 타이 콥의 4할 타자 선배[6]이기도 하며, 감독으로서는 미국식 스포츠 환호 제스쳐[7]인 "Ee-yah!"의 원조가 이사람이라는 것도 유명하다. 웃으며 "이~~야!"라고 외치며 주먹을 어깨근처에서 위로 높게 지르는 이 동작을 제닝스가 경기 중에 자주 하면서 별명조차 그것이 될 정도로 유명해져 "이~야 감독"이라며 미국 스포츠신문들에서 다뤘으며, 이후 야구뿐만 아니라 미국 스포츠 전체에서 선수나 코치나 팬들이 자기팀 선수가 결정적인 상황에 활약[8]을 했을 때 신이 나서 하는 동작이 되었다. 2012년 한국의 이만수 감독이 이 제스쳐로 흥장이라 불리며 미국 스포츠식 제스쳐를 한다고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적이 있지만, 그 원조[9]가 타이 콥의 스승 휴이 제닝스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의 감독 재임기간 성적만 따져도 WAR이 100을 가볍게 넘는 야구황제 타이 콥 덕에 이 동작을 할 일이 많았다고 한다.
몇년이 지나고 그가 수퍼스타가 될 쯤엔 고참들의 괴롭힘이 잦아들었고, 시간이 더 흘러서는 산전수전을 같이 겪으며 매우 친밀해졌다고 한다. 특히 관중폭행 사건때 발벗고 그의 편을 들어줄 때 콥이 매우 감동했다고 한다.#[10]
여기까지만 본다면 훈훈한 결말이긴 한데, 그를 괴롭혔던 고참들은 대다수가 모두 40-50대 초반이 되기도 전에 암, 결핵, 철도 사고, 장 질환으로 사망했다.# 콥이 74세까지 살며 19세기에 태어난 옛날 사람치고는 나름 장수한 것과는 대비된다.
3. 그가 남긴 기록들
은퇴 당시 타이 콥이 갖고 있던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1위 기록은 무려 90개. 이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이 생기자 당연히 수백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처음으로 입성하여 최초의 5인중 한 명이 된다. 그것도 전체 226표 중 무려 222표를 얻어, 5명 중 확고한 1등으로. 더불어 이 시기쯤에 현대 야구 선수들은 기본기가 부족하다면서 불평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보냈다.[11][12]통산 타율 .366[13][14] 통산안타 4189개[15]의 대타자. 더불어 야구 역사상 유일무이한 8관왕을 한 타자로 1909년 8관왕[16]을 기록했는데 내용이 다음과 같다.
타율 | 타점 | 출루율 | 득점 | 장타율 | 도루 | 안타 | 홈런 |
.377 | 107 | .431 | 115 | .571 | 76 | 216 | 9[17] |
타격왕은 통산 12번(모두 데드볼 시대이다.[18])으로 역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전체 1위. 그가 데드볼 시대에 풀타임으로 뛰었던 게 1907~1919년이다. 즉 13시즌 동안 1번 빼고 다 해먹었다는 뜻. 그 시기에 아메리칸 리그 원년의 대스타 냅 라조이, 역대 최고의 외야수 트리스 스피커, 역대 최고의 교타자 에디 콜린스, 맨발의 천재타자 조 잭슨, 라이브볼 시대 원년의 4할 타자 조지 시슬러 등 엄청난 타격 천재들이 아메리칸 리그에 모여 있었지만 트리스 스피커가 2인자의 한을 풀고 1916년[19]에 타격왕 한번 차지한 거 말고는 없었고, 최소 몇번은 타격왕이 되고도 남을 실력이었던 그들은 커리어 중 상당한 타이틀을 데드볼 시대의 정복자였던 타이 콥에게 빼앗겼다.[20] 게다가 1910년의 타이틀이 70년 뒤에 냅 라조이에게 돌아갔는데[21] 타이 콥 입장에서 그거 안뺏겼으면 통산 12회에 9년연속 타격왕을 차지했을 것이다.[22] 하지만 공식적인 타격왕은 타이 콥으로 12번의 타격왕이 맞는 기록.[23]
MLB MVP라는 걸 정하는 제도가 없던 메이저리그가 1911년 처음으로 MVP의 개념에 맞는 시상을 하기로 정하자마자[24] 처음으로 받은 사람이 바로 타이 콥이다.[25][26] 그가 데뷔(1905년)한지 한참 지나서 생겼다 해도 메이저리그 역사에 손꼽히는 최고 레전드라는 타이 콥이 그 이후 수상을 못해 총 한번 밖에 못 받았다는게 납득이 안 갈 수도 있겠으나, MVP제도는 1911년 생긴 이후 1914년까지만[27] 있다가, 1차 세계대전 발발로 세계적인 분위기에 맞춰 미국내 경제적 분위기 역시 어수선해지자, 스폰서의 홍보 효과가 없다고 판단하여 4년만인 1915년부터 다시 없애 버렸던 제도이다. 1차 대전이 끝나고 세계 정세가 어느 정도 정리된 1922년에 아메리칸 리그에서 다시 생겼다.(내셔널 리그는 1924년에 다시 생겼다.) 당시는 이미 타이 콥은 베테랑을 넘어 감독 겸 선수였다.[28] 사실상 타이 콥 전성기에 꾸준히 MVP제도가 있었다면 그보다는 훨씬 많이 수상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타이 콥 자신은 Chalmer's Award 제정 이전까지 당시 미국 야구계가 타격왕을 MVP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과 냅 라조이와 갈등이 생겨서 그렇게 되었다 생각했을 뿐, MVP를 못 받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타격왕을 했던 시즌마다 MVP를 받은 것과 같이 생각했고 다른 이들도 그렇게 생각했다.[29]
심지어 상술된 8관왕 성적은 그의 타율 커리어 하이가 아니다. 그는 데드볼 시대와 라이브볼 시대 모두에서 4할 타자를 해본 야구 역사상 유일한 선수[30]로, 남들은 평생 한번도 못 해보는 4할 타율을 그는 3번이나[31] 기록했다.[32][33] 3번의 4할 뿐만 아니라, 트리플 크라운(상술된 1909년 8관왕)[34]까지 해본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역사상 독보적인 최고의 레전드[35]이며 데뷔시즌인 1905년(당시 만 18세 시즌)을 제외하면 단 한번도 .316 이하로 타율이 떨어지지 않은 대타자이다. 무려 23년 연속 3할로,[36] 이 또한 메이저리그 역대 1위.
19세이던 두번째 시즌과 은퇴시즌을 제외하고 20년 연속 .334이상의 타율을 기록했다. 발도 빨라서 통산 도루 3위인 897개에 .[37] 은퇴시즌의 타율도 .323으로 웬만한 타자의 커리어 하이 수준. 그렇다고 선구안이 나쁜가 하면 그것도 아니라서 데드볼 시기에 뛰었음에도 통산 출루율이 0.433에 24시즌 동안 뛰면서 한시즌에 삼진을 50개 이상 당한게 1907년밖에 없다. 그외 시즌 삼진은 전부다 50개 미만으로 통산 BB/K가 1.8이 넘는다. 거기다가 중견수로 수비도 준수해서 24시즌 뛰면서 기록한 어시스트가 392개로 통산 2위의 기록. 그가 은퇴하고 나서야 태어났던 한참 후배인 윌리 메이스가 나오기 전까지의 메이저리그 중견수 중에 수비 + 타격 커리어로 그에게 비교될만한 선수는 없었다. 19세기말부터 데드볼시대를 거쳐 라이브볼시대 초기까지 봐도 중견수로써 꽤 했다고 볼 수 있다.[38] 지금도 그의 타격 커리어와 비교되는 몇몇 타격 본좌 외야수들, 즉 베이브 루스, 윌리 메이스, 테드 윌리엄스, 행크 아론 등과 비교할 때 수비 본좌이기도 한 윌리 메이스를 제외하면 수비가 타이 콥보다 우수한 선수는 없다.[39]
통산 117개의 홈런밖에 기록하지 못한 콥이었지만 데드볼 시대였던 당시 기준에서는 홈런타자의 반열에 있었다.[40] 메이저리그 역대 통산 3루타 1위 샘 크로포드는 1907년에 홈런 7개로 홈런왕이 되었으며, 타이 콥과 같은 데드볼 시대에 뛰었고 4년 연속 홈런왕[41]을 하여 진짜 별명이 '홈런'이었고 그 업적을 인정받아 베테랑 위원회 투표로 명예의 전당에 갔던 존 프랭클린 '홈런' 베이커[42]는 통산 96홈런 밖에 치지 못했다.[43] 콥은 홈런왕은 1회밖에 기록하지 못했지만 홈런 2위를 3번이나 더 했고, 10위 안에 든 게 11시즌이나 된다. 선수 말년에 라이브볼 시대가 오게 되었는데, 당시 투수에서 풀타임 야수로 전향한지 얼마 안 되어 혜성처럼 빛나던 베이브 루스와 홈런능력을 비교하며 놀리던 기자에게 자신이 더 위라는 걸 보여주겠다며 바로 다음날 홈런을 쳐 버린 일화도 있을 정도의 선수로, 타이 콥의 전성기가 데드볼이 아닌 라이브볼 시대였다고 해도 그가 별거 아닌 선수가 되었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타이 콥은 라이브볼 시대에도 감독 겸 선수의 신분으로 타격왕에 3번[44]이나 도전했었으며, 데드볼 시대만의 4할 타자가 아니라 라이브볼 시대의 4할타자이기도 하다. 라이브볼 시대인 1922년 35세의 나이로 4할 타율을 기록하였다. 더 설명할 필요없이 그는 선수생활 말년이자 라이브볼 시대가 자리잡았던 1920년대 중후반, 즉 1924년~1928년까지 30대 후반~40대 초반의 나이로 타율 3할4푼을 넘게 치고 은퇴했다. 심지어 플레잉 매니저(선수 겸 감독)까지 하고 있었다.[45]
'마지막 4할 타자'라는 말만 듣고 9번이나 장타율 1위를 차지하고, 4차례의 홈런왕에 빛나는 테드 윌리엄스를 교타자로 치부하는 것이 제대로 된 평가[46]가 아니듯, 콥을 그저 데드볼시대에 한정된 똑딱이 타자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콥의 통산 OPS는 .945에 달하며, 11번이 넘는 타격1위를 차지하는 동안 8번의 장타율 1위와 10번의 OPS 1위를 차지하였다.[47] 단순히 홈런이 적은 대신 타율이 높았던 토니 그윈같은 유형의 선수가 아니라, 그라운드 전 지역으로 공을 날려대면서 베이스를 휘젓고 다니는, 고전적인 형태의 야구의 황제라 불릴만했다.[48] 그의 통산 최다안타기록은 1985년에 돼서야 피트 로즈에 의해 경신되었으며, 최다 득점 기록은 2001년에 리키 헨더슨이 넘어설 때까지 73년동안 유지되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타이 콥의 기록은 후손들에게 재조명됐다.
또한 콥은 24년간 선수생활을 하면서 8번의 장타율 1위를 기록하였는데 역대 4위의 수치에 해당한다. 892개의 도루로 메이저리그 통산 도루 4위를 기록할 만큼 빠른 발과 주루감각이 그의 장타 기록에 큰 몫을 하게 한 것이다. 타이 콥은 통산 3루타가 297개로 메이저리그 올타임 2위고, 2루타는 723개로 올타임 4위다. 거기다가 도루자는 178개에 불과하여 통산 도루 성공률이 무려 83.3%나 된다.
다만, 포스트시즌 성적은 페넌트레이스 성적에 비해 안 좋은데 디트로이트가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1907~1909년 3년 동안의 포스트시즌 타율은 0.262밖에 안 된다. 참고로 1907~1909년동안 정규 시즌 타율은 0.350-0.324-0.377순. 아무리 날라다니는 괴물이었어도 나이가 어렸던 것 때문인지 정규시즌 성적을 생각하면 굉장히 저조한 성적.[49] 소속 팀도 우승 등정에 매번 실패해서 정작 우승 반지는 껴보질 못했다. 본인도 뭔가 조짐을 느꼈는지, 후에 다른 팀의 팔 길쭉한 순둥이 신인을 보고는 프런트를 찾아가 "무슨 수를 써서든지 저 녀석 데려와야 된다"고 강변했으나 씹힌 적이 있다.[50]
4. 연도별 성적
타이 콥의 역대 MLB 기록 | ||||||||||||||||||
<rowcolor=#ffffff> 연도 | 팀 | G | PA | H | 2B | 3B | HR | R | RBI | SB | BB | SO | AVG | OBP | SLG | OPS | fWAR | bWAR |
1905 | DET | 41 | 164 | 36 | 6 | 0 | 1 | 19 | 15 | 2 | 10 | 23 | .240 | .288 | .300 | .588 | 0.1 | 0.2 |
1906 | 98 | 394 | 113 | 15 | 5 | 1 | 45 | 41 | 23 | 19 | 40 | .316 | .355 | .394 | .749 | 2.7 | 2.6 | |
1907 | 150 | 642 | 212 | 28 | 14 | 5 | 97 | 119 | 49 | 24 | 55 | .350 | .380 | .468 | .848 | 7.0 | 6.8 | |
1908 | 150 | 633 | 188 | 36 | 20 | 4 | 88 | 108 | 39 | 34 | 42 | .324 | .368 | .476 | .844 | 6.3 | 6.2 | |
1909 | 156 | 655 | 216 | 33 | 10 | 9 | 115 | 107 | 76 | 48 | 45 | .377 | .431 | .517 | .947 | 9.7 | 9.9 | |
1910 | 140 | 597 | 194 | 35 | 13 | 8 | 106 | 91 | 65 | 64 | 46 | .382 | .455 | .549 | 1.004 | 10.3 | 10.6 | |
1911 | 146 | 656 | 248 | 47 | 24 | 8 | 147 | 127 | 83 | 44 | 42 | .419 | .466 | .620 | 1.086 | 11.0 | 10.7 | |
1912 | 140 | 610 | 226 | 30 | 23 | 7 | 120 | 83 | 61 | 43 | 30 | .409 | .456 | .584 | 1.040 | 9.1 | 9.2 | |
1913 | 122 | 504 | 167 | 18 | 16 | 4 | 70 | 67 | 51 | 58 | 31 | .389 | .466 | .534 | 1.000 | 7.2 | 7.4 | |
1914 | 98 | 415 | 127 | 22 | 11 | 2 | 69 | 57 | 35 | 57 | 22 | .368 | .466 | .513 | .979 | 5.4 | 5.6 | |
1915 | 156 | 701 | 208 | 31 | 13 | 3 | 144 | 99 | 96 | 118 | 43 | .369 | .486 | .487 | .973 | 9.8 | 9.5 | |
1916 | 145 | 637 | 201 | 31 | 10 | 5 | 113 | 68 | 68 | 78 | 39 | .370 | .451 | .492 | .943 | 7.8 | 8.0 | |
1917 | 152 | 672 | 225 | 44 | 24 | 6 | 107 | 106 | 55 | 61 | 34 | .383 | .444 | .570 | 1.014 | 11.5 | 11.3 | |
1918 | 111 | 474 | 161 | 19 | 14 | 3 | 81 | 62 | 34 | 41 | 21 | .382 | .440 | .515 | .955 | 6.5 | 6.5 | |
1919 | 124 | 548 | 191 | 36 | 13 | 1 | 92 | 67 | 28 | 38 | 22 | .384 | .428 | .514 | .942 | 5.8 | 5.5 | |
1920 | 112 | 495 | 143 | 28 | 8 | 2 | 87 | 63 | 15 | 58 | 28 | .334 | .416 | .451 | .867 | 3.2 | 3.3 | |
1921 | 128 | 582 | 197 | 37 | 16 | 12 | 124 | 101 | 22 | 56 | 19 | .389 | .452 | .596 | 1.048 | 6.6 | 6.7 | |
1922 | 137 | 613 | 211 | 42 | 16 | 4 | 99 | 99 | 9 | 55 | 24 | .401 | .462 | .565 | 1.026 | 6.3 | 6.7 | |
1923 | 145 | 648 | 189 | 40 | 7 | 6 | 103 | 88 | 9 | 66 | 14 | .340 | .413 | .469 | .882 | 5.1 | 5.5 | |
1924 | 155 | 727 | 211 | 38 | 10 | 4 | 114 | 79 | 23 | 85 | 18 | .338 | .418 | .450 | .867 | 5.2 | 5.4 | |
1925 | 121 | 492 | 157 | 31 | 12 | 12 | 97 | 102 | 13 | 65 | 12 | .378 | .468 | .598 | 1.066 | 5.4 | 5.6 | |
1926 | 79 | 273 | 79 | 18 | 5 | 4 | 48 | 62 | 9 | 26 | 2 | .339 | .408 | .511 | .918 | 1.5 | 1.7 | |
DET 통산 (22시즌) | 2806 | 12136 | 3900 | 665 | 284 | 111 | 2087 | 1811 | 869 | 1148 | 652 | .368 | .434 | .516 | .950 | 143.2 | 144.9 | |
<rowcolor=#ffffff> 연도 | 팀 | G | PA | H | 2B | 3B | HR | R | RBI | SB | BB | SO | AVG | OBP | SLG | OPS | fWAR | bWAR |
1927 | PHA | 133 | 574 | 175 | 32 | 7 | 5 | 104 | 93 | 22 | 67 | 12 | .357 | .440 | .482 | .921 | 4.2 | 4.4 |
1928 | 95 | 393 | 114 | 27 | 4 | 1 | 54 | 40 | 6 | 34 | 16 | .323 | .389 | .431 | .819 | 1.7 | 1.9 | |
MLB 통산 (24시즌) | 3034 | 13099 | 4189 | 724 | 295 | 117 | 2243 | 1944 | 892 | 1249 | 680 | .366 | .433 | .513 | .946 | 149.3 | 151.0 |
파란색은 팀 내 역대 1위. 빨간색은 MLB 역대 1위.
5.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블랙잉크 | 그레이잉크 | HOF 모니터 | HOF 스탠다드 | |
타이 콥 | 151 | 417[51] | 445 | 75 |
HOF 입성자 평균 | 27 | 144 | 100 | 50 |
- JAWS - Center Field (2nd)
career WAR | 7yr-peak WAR | JAWS | |
타이 콥 | 151.0 | 69.0 | 110.0 |
중견수 HOF 입성자 평균 | 71.2 | 44.6 | 57.9 |
6. 더티 플레이어
정말 엄청난 성적과 더불어 유명한 것은 그의 성격으로 좋게 말하면 승부욕이 너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강하고, 나쁘게 말하자면 더티 플레이어[52]라는 평을 받은 선수로, 핏 퍼스트(feet-first) 슬라이딩은 내야수들의 악몽이었다.무릎을 노린다거나 일부러 주루 경로(basepath)에서 벗어나 내야수를 노리고 슬라이딩한다는 평이 있지만 이는 과장된 내용이다. 물론 콥이 성인군자는 아닌 만큼 사심이 들어간 거친 슬라이딩이 전혀 없었다고 말하긴 힘들 것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콥은 자신의 경로를 철저히 지켰고, 높은 슬라이딩도 공을 떨어뜨릴 목적으로 글러브를 노렸다. 사실 현장의 선수들에게 있어선 두려운 주자일 뿐이었지만 이게 매스컴과 팬들에게 비춰지면서 더티 플레이어란 이미지가 어느 순간 생겨버렸다고. 콥 본인은 선수들이 자신을 두려워하는 건 오히려 좋은 일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여기서 나아가 매 경기마다 스파이크를 날카롭게 갈고 나온다는 식으로[53] 더티 플레이어 이미지가 점점 굳어져가자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아메리칸 리그 국장 벤 존슨에게 보낸 타이 콥의 편지를 살펴보면 뭉툭한 스파이크를 도입하고 매 경기마다 스파이크가 지나치게 날카롭진 않은지 심판들에게 검사하게 하자는 제안을 한 내용이 있다.
그의 동료였던 샘 크로포드[54]는 "콥은 누구에게도 일부러 스파이크질을 하지 않았다."라는 말을 했다. 내야수가 무신경하게 주자의 베이스패스에 들어서 있다면 그건 내야수의 책임이라는 정론이었다. 그 시절의 내야수들도 이런 취지의 말을 했다. 1루수 조지 번스는 "대중들은 그가 스파이크로 남을 찍기 위해 돌진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주자가 베이스를 터치하기 위한 길목을 막아서고 있다면 스파이크에 찍히더라도 반론하기 어렵다."라고 말했으며, 시카고 컵스의 유격수 조 팅커는 1910년에 이런 말을 했다. "왜 월드 시리즈에서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가 나에게 스파이크를 들이밀지 않았냐는 질문을 자꾸 하는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난 주자의 권리(baserunner's right)를 숙지하고 있었고, 그래서 내 위치를 지켰다. 그 때문이다."
1912년, 당시 홈으로 쇄도하던 타이 콥 |
콥의 이런 면모는 그의 몸을 사리지 않는 허슬 플레이로부터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콥은 결코 몸을 사리는 법이 없는 겁없는 선수였는데, 디트로이트 프리 프레스를 그의 무모한 플레이를 두고 제정신이 아닌 수준이라고 했을 정도.
"이 자국들은 엘리베이터나 난간을 타면서 생긴 게 아닙니다." 콥은 1958년 뉴욕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다리에 생긴 흉터들을 보이면서 씨익 웃으며 말했다. "주루선상의 공포라고 불리기도 합니다만, 사실 상대 선수들이 그냥 무서워하기만 했던 건 아니었죠."
"콥은 내색 한 번 하지 않았습니다." 타이거스의 유격수였던 찰리 오리어리(Charley O’Leary)가 말했다. "야수들이 팔꿈치, 무릎, 스파이크로 찍더라도 우는 소리, 어필 한 번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스파이크에 찍혀 다쳐도 웬만해선 경기에서 빠져 쉰다거나 하지 않고, 이닝이 끝나면 곧장 클럽하우스로 뛰어들어와 스스로 치료했고, 또 다음 이닝이 시작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필드로 뛰어나가곤 했습니다."[56]
또 1912년에는 뉴욕 하이랜더스와의 뉴욕 원정 시리즈에서 시리즈 내내 자기를 야유하는[57] 관중을 자신의 분이 풀릴 때까지 두들겨 패서 무기한 출장 정지 처분을 받은 적이 있다.[58] 러커(Lucker)란 이름의 관중이었는데, 경기 초반부터 콥에게 집요하게 욕설을 퍼부었다. 때문에 콥은 당시 하이랜더스의 구단주 프랭크 패럴에게 관중 퇴장을 요청하려고 상대 덕아웃을 방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패럴은 없었고, 그대로 경기를 진행하다 동료에게 무슨 말을 듣더니 갑자기 관중석으로 난입했다고. 사실 관중 난입은 요즘에야 보기 힘든 일이지만 당시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일어나는 일이었다. 콥의 사례가 큰 파장이 됐던 건 접촉 이전에 누구에게도 제지되지 않은 일방적인 폭행이었고, 더군다나 폭행을 당한 팬이 산업재해로 양손을 잃은 장애인이었기 때문이다.[59]콥의 소속팀 디트로이트는 콥의 징계를 듣고 "아 우리 그럼 야구 못해 배째!!"라는 식으로 드러누워서 실제로 이후 경기를 동네에서 야구할 줄 아는 사람들로 꾸려서 했는데, 경기 결과가 24:2라는 처참한 수준으로 나오자 리그가 망가질 것 같아 겁먹은 총재가 항복하고 10경기 출장 정지로 감형시켜주기도 했다. 참고로 이때 디트로이트의 선발투수 앨런 트레이버스(Allen Travers)는 그냥 야구 좀 할 줄 아는 동네 신학생이었고, 트레이버스는 8이닝 24실점 완투패[60] 로 역대 투수 최다실점이라는 기록을 작성하고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메이저리그 경기를 마감했다. 그리고 포수는 48세 코치인 디콘 맥과이어가 하게 되고, 감독 휴이 제닝스[61]가 대타로 출동하는 등 야구 역사를 통틀어 봐도 손에 꼽힐 최악의 막장경기였으며, 때문에 실책도 남발해서 이날 디트로이트는 7실책을 기록했으며 덕분에 선발 트레이버스의 24실점 가운데 10실점이 비자책점이었다. 사실 정식으로 프로에 들어온 선수들 중에서도 저정도 이상으로 못하는 경우가 의외로 적지 않은 데다가, 아예 1군 경기 한번 등판 못하고 커리어가 끝나는 케이스까지 있는 걸 감안하면, 트레이버스는 나름 할 만큼 했다.
7. 비극적인 가정사
타이 콥의 성격이 그렇게 사나웠던 건 천성이 그랬다고 단순히 생각할 수 있지만 성년이 되기 전 겪은 비극적 가정사와 그 직후 이어진 고참들의 괴롭힘 탓이라고 볼 수도 있다. 타이 콥의 아버지 윌리엄 허셜 콥(1863~1905)은 많은 매체들에서 다뤄진 모습과 달리 전형적인 신사였고, 집안도 당대 조지아 기준으로 엘리트 부유층 가문이었다. 당시로선 매우 드물던, 인종 차별을 비판하는 영국계 백인 가정에서 자랐고,[62] 그 영향을 받아 윌리엄 역시 남부 지역 주의회 상원, 교육자로 활동하며 인종 차별을 비판하던 인물이었다. 어머니 아만다 칫우드 콥(1871~1936)은 유복한 가정(upper-middle-class)[63]에서 자란 아가씨였다고 한다. 세간에는 윌리엄과 결혼할 당시 아만다의 나이가 12세로 알려진 바 있는데 이는 일부 스포츠 작가들의 첨부한 자극적인 소설에 불과하고, 결혼 허가서를 볼 경우, 둘의 결혼 시기는 1886년 2월로(타이 콥이 그해 12월에 태어났다.), 그 당시 아만다의 나이는 15세였다. 물론 지금 기준으론 어린 나이지만 당시 미국에서 15세에 시집가는 건 그렇게 심각한 나이도 아니었다. 윌리엄 역시 당시 20대 초중반의 젊은 청년이었고. 사실, 둘에 관계에 대해 현재까지 전해지는 사실 대부분은 사실이라고 부르기엔 근거가 빈약하다. 이후 설명할 어떤 사건 직후, 말 붙이기 좋아하는 언론들이 추측한 루머에 불과하다.그 사건이란, 타이 콥의 프로 데뷔(1905년 8월 30일 데뷔경기) 전인 1905년 8월 8일 저녁, 아만다가 쏜 총에 윌리엄이 쓰러져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아만다는 출장간 남편이 이렇게 일찍 돌아올 리가 없었고, 집에 들어온 남자를 당연히 불법침입자라 여겨 자기보호(정당방위)를 위해 총으로 쏴 죽였다고 주장했다.[64] 이후 최종적으로 그녀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확실한 사실은 여기까지지만, 마을의 유명인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부였고, 부인 아만다의 미모의 출중했기에 이후 언론과 호사가들에 의해 이런저런 이야기가 따라붙었다. 아내의 부정한 행각을 눈치 챈 타이 콥의 아버지가 외도의 현장을 급습하기 위해서 출장을 간 척 한 뒤 한밤중에 침실 창문으로 기어오르다가 아내가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는 식의 내용이 매우 그럴 듯해서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 아버지와의 유대가 깊던 타이 콥은 이 사건 때문에 평생 아만다를 증오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65] 1936년 아만다 사후, 타이 콥은 그녀를 아버지의 무덤 옆에 안치했다. 어찌됐든 이제 막 소년 티를 벗으려고 하는 민감한 시기에 그런 일을 겪은데다, 이후 바로 메이저리그로 진출해 고참들에게 찍혀 괴롭힘을 받기까지 했다. 어찌보면 비뚤어지는 게 자연스럽게 여겨질 상황.
8. 은퇴 이후 개인사
8.1. 사업과 투자
야구 외적인 능력 또한 매우 출중해서 은퇴 이후 시작한 사업이 대성공해서 돈은 무지무지하게 벌고 안락한 말년을 즐겼다. 언제나 타격 최상위권에서 내려오지 않던 슈퍼스타 타이 콥은 당연하게도 메이저리그 전체 연봉 1위의 선수였지만, 당시는 지금처럼 메이저리그 최고 선수라고 해서 야구로 번 돈으로 평생을 아무것도 안해도 부자로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는데,[66] 그는 선수생활 동안 번돈으로 사업과 투자에서 좋은 성과를 올려 갑부가 된 것이다. 선수시절 상대를 관찰하고 분석하는 능력은 일상에서도 그대로 적용이 되어, 젊을 때 코카 콜라와 디트로이트의 제너럴 모터스 주식을 고르는 탁월한 선택을 했다.사업가로서 역량도 뛰어나서 은퇴 후 츄잉껌과 가터벨트 등 여성용 속옷사업으로 큰 돈을 벌었고 그 돈을 주식과 부동산에 투자해 재벌급으로 큰 부자가 되었고 가족과 유럽여행도 하고 사냥, 골프, 폴로, 낚시 등을 즐겼으며 주식과 채권 거래로도 돈을 벌었다. 가난하게 살래야 가난하게 살 수 없을 정도. 선수 생활 당시에 관계를 맺었던 코카콜라사의 주요 주주이기도 했으며 남긴 재산도 엄청나서 무려 1178만 달러를 남겼는데 현재 값어치론 거의 1억 달러에 달한다. 그리고 이런 성공에 힘입어 고향의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학비 지원을 펼치거나 병원을 지어 기증하는 등 사회 기여도 많이 했다. 그 외에 자신이 선수나 감독시절 아끼던 야구선수 후배들 중 은퇴 후 병이 들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선수들에게 수술비 등 경제적으로 지원했다는 증언들도 있다.
8.2. 가족
콥은 아들들에게는 매우 엄격한 아버지였다고 한다. 아들이 셋이었는데 모두 자신처럼 훌륭한 운동(야구)선수가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큰아들 타이 콥 주니어는 프린스턴 대학에 가서 야구가 아니라 테니스를 해서 아버지를 실망시켰다. 거기에다가 대학에서 낙제로 퇴학까지 당하자, 타이 콥이 불같이 화를 내고 직접 (아들이 머무르던) 하숙집에 쳐들어가 손수 큰 아들을 블랙스네이크 채찍으로[67] 인정사정없이 갈겼다고 한다. 자신의 자서전을 같이 집필한 앨 스텀프한테 전해준 일화인데, 콥은 그때를 회상하며 "크게 손을 봐줬지. 피와 눈물을 좀 흘렸다만, 그 후 타이러스(아들)는 다시는 낙제하는 일이 없었어."라며 자랑했다고 한다.출처그 이후로 프린스턴에서 퇴학당한 큰 아들을 예일 대학으로 보냈는데, 거기서 학교 테니스 클럽 캡틴도 하고 성적도 좀 나아지나 했으나, 술 먹고 깽판을 부리는 바람에 법정 소송까지 끌려갔고 비록 소송비용은 대줬으나 그렇게 큰 아들과 인연을 완전히 끊었다고 한다.[68] 더군다나 타이 콥 주니어의 아들 허셜 콥은 저 개차반 아버지에 의해 심한 가정폭력을 받았다. 허셜의 말에 따르면 어린 나이였음에도 '내가 다음날 살아있을 수 있을까?' 의문을 품었던 때들이 많았다고. 이런 손자의 보호막이 되어주었던 게 바로 할아버지 타이 콥이었다.[69] 또 기대가 높아서 엄격하게 대했던 아들들에 비해서, 딸들은 비교적 오냐오냐 했다고 한다. 비록 이혼을 한번 했지만 어찌됐든 자식들에겐 좋은 아버지였던 듯하다.
이후 1961년, 1남[70] 2녀와 며느리, 두 사위, 손자, 손녀 앞에서 74세를 일기로 애틀랜타에서 영면하였다.
9. 베이브 루스와의 관계
베이브 루스와 함께.[71] |
타이 콥은 야구를 전쟁과 같은 것으로 봤고 승리에 대한 갈망, 자기 능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선수였다. 특히 이후 등장한 베이브 루스란 존재는 그의 야구 철학을 정면에서 부딪쳐오는 유형의 선수였다. 콥은 루스 식의 '한방 야구'보다 안타를 치고나가 빠른 발과 뛰어난 판단력으로 베이스패스를 지배하는 야구, 즉 타율과 도루 및 심리전을 포함한 작전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야구야말로 진정한 야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이 타격왕과 도루왕을 엄청 많이 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72] 하지만 대중들은 루스의 시원한 홈런포에 열광했고, 그런 대중들의 반응에 콥은 굉장히 분노했다고 한다. 그래서 툭하면 루스를 '반검둥이'[73]라고 놀렸고, 베이브 루스가 50홈런을 칠 때도 타이 콥은 4할도 못 치면서 잘난 척한다며
하지만 둘은 은퇴 이후엔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콥은 데뷔 초기부터 연이 있던 스포츠 작가 그랜틀랜드 라이스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야구를 하면서 본 최고의 타자가 누구냐는 질문에 주저없이 베이브 루스의 이름을 꺼냈다. 루스의 힘과 선구안의 조합은 누구도 가지지 못했다고. 또한 더 나이가 들어 뉴욕 타임스와의 특별대담에서 "다시 감독이 되어 당신이 아는 모든 선수를 다 쓸 수 있다면 외야수로 누굴 고르겠냐"고 묻자, "좌익수는 조 잭슨, 중견수는 트리스 스피커, 우익수는 베이브 루스를 쓰겠다."라고 답했다.[75] 대타자가 대타자를 알아보는 눈은 속일 수 없나보다.
여담으로 루스의 등장과 더불어 '라이브볼 시대'가 열리면서 시원한 홈런을 때리는 강타자들이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콥은 30대 중반을 넘긴 노장이었고(단순히 노장으로 끝이 아니라 감독 겸 선수였다) 타격폼을 수정하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그러던 어느날 경기에 앞서 한 기자가 콥에게 루스에 대한 칭찬을 하자 열이 받은 콥은 그날 경기에서 홈런을 3개 때렸고 그 다음날 경기에서 다시 2개의 공을 담장 너머로 날려버렸다. 사실 그 타격폼으로도 라이브볼 시대인 1922년에 4할을 친 게 타이 콥이다.
10. 승부 조작 혐의
1926년 트리스 스피커와 함께 승부조작 혐의에 연루된 적이 있는데, 당시 혐의를 제보한 사람은 콥이 선수 겸 감독을 맡고 있던 타이거스에서 투수로 활동한 적 있는 더치 레너드였다. 다소 꺼림칙한 요소는 레너드가 감독이었던 콥에게 악감정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어찌됐든 콥과 스피커의 청문회가 열렸는데 웃긴 건 레너드가 당시 신변에 위협을 느낀다는 이유를 대며 증언 자체를 거부했고, 당연히 유일한 제보자가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으니 둘은 무혐의를 판정받았다.사실 이 판결은 케네소 랜디스 커미셔너에 의해서 나왔는데, 그 당시에도 의심스러운 정황은 있었지만 워낙에 두 사람이 슈퍼스타이고 또 조작 시비가 터지면 문제가 될 것 같아서 넘아가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많았다. 콥에게만 불만이 있었다면 애꿎은 트리스 스피커를 걸고 넘어질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것 때문에 인디언스의 감독겸 선수였던 트리스 스피커는 워싱턴 세네터스로 이적하게 된다. 그리고 콥도 일단 팀으로 복귀했지만 곧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로 이적해 코치 겸 선수로 2년을 더 뛰다가 은퇴했다. 당시 필라델피아의 레전드이자 젊을 때 라이벌 중 한명이었던 에디 콜린스도 코치 겸 선수로 함께 뛰었다.
11. 인종차별주의자라는 후대의 오해
1956년 월드 시리즈에서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에이스 투수 돈 뉴컴[76]과 인사하는 타이 콥. 옆에 있는 어린이가 친손자 허셜 콥이다.[77]
명백하게 그는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었다. 타이 콥의 성격이 워낙에 거칠다는 오해가 후대에 커지는 바람에 일어난 오해이지만 실제로 타이 콥은 당대의 야구선수들 중 가장 인종적으로 평등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아직도 수많은 야구팬들의 개인블로그나 야구커뮤니티, 심지어 유튜브나 그 외 팬사이트 등에 후대의 작가들이 자극적으로 재창조한 내용에 기반한 잘못된 내용들이 적혀있다. 농담 조금 섞어서 사실을 밝히면 콥은 인종차별을 이유로 내세워서 흑인을 골라 두들겨 팬게 아니고 자기가 심기 불편할 때마다 이놈저놈 다 두들겨 패고 보니 콥에게 맞은 사람 중에 흑인도 끼어있더라가 더 정확하다.
콥이 인종차별주의자였다는 비판 대부분이 순혈 영국계 앵글로색슨 상류층 가문의 백인[78]이라는 점과 조지아 주[79] 출신의 다혈질이란 이미지와 몇몇 사건을 각색해 연결지은 것에 불과하다. 백인과 싸웠음에도 후대의 작가들이 확인도 하지 않고 멋대로 상대방을 흑인으로 단정짓곤 했다. 실제로 흑인과 싸운 적이 없는 건 아닌데, 타이 콥이 흑인이 아니라고 설명하는 이 블리처 리포트의 기사에서도 그가 최소 네 명의 흑인과 다툼이 있었다는 내용의 문서를 갖고 있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기사에서 보이듯이 싸움의 원인은 인종 문제와 전혀 상관이 없었고 그냥 콥이 원체 많이 싸우는 성격이다보니 흑인도 거르지 않고 싸운 것 뿐이다. 막상 따지고 보면, 흑인이 술에 취해 먼저 시비를 걸거나 타이 콥이 훈련시간에 쉬는데 갑자기 뒤에서 떠밀어서 넘어뜨린다던지 하는 악질적인 장난을 친 사건이 많았다. 근데 이건 백인들도 한 적이 있고, 타이 콥은 백인들도 두들겨 팼다. 인종으로 차별하지 않고 자신을 건드린 사람들은 누구나 평등하게 폭행한 것. 대표적인 예가 클리블랜드 호텔에서의 사건인데, 당시 연루된 콥 포함 3인은 전부 백인이었다.
또한 콥은 니그로 리그에서 활동하던 선수들과도 친분이 있었는데, 바비 로빈슨(Bobby Robinson)은 "콥이 나를 대하는 태도에서 어떤 편견도 보지 못했다."고 말한 바 있으며, 대부분의 선수들에게 천시받던 흑인 볼보이를 감싸준 일화도 있으며, 훈련장 청소일을 하던 흑인에게 타이 콥이 악수를 청하며[80] 청소해주는 것에 대하여 감사 인사를 청한 미담도 있다. 콥의 고용인이었던 흑인 알렉스 리버스(Alex Rivers)는 이후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콥의 이름을 따 짓기도 했다.
그리고 콥이 인종과 관련해 공식적으로 남긴 말은 흑인 선수 로이 캄파넬라와[81] 윌리 메이스에 대한 찬사,[82] 그리고 이런 말이 전부다.
"(흑인이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답하며) 확실히 아무 문제 없습니다. 그들이 존중받지 못할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닌데 그들을 배척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 어떤 백인도 유색 인종보다 비신사적으로 행동해도 될 권리는 없다는 걸 말씀드립니다. 덧붙여 내 생각에 이것은 야구에 한정되는 말이 아니라 전 사회 계층에도 적용될 수 있는 말입니다.
Certainly it is okay for them to play. I see no reason in the world why we shouldn't compete with colored athletes as long as they conduct themselves with politeness and gentility. Let me say also that no white man has the right to be less of a gentleman than a colored man, in my book that goes not only for baseball but in all walks of life."
Certainly it is okay for them to play. I see no reason in the world why we shouldn't compete with colored athletes as long as they conduct themselves with politeness and gentility. Let me say also that no white man has the right to be less of a gentleman than a colored man, in my book that goes not only for baseball but in all walks of life."
그가 1962년에 사망했을 땐 흑인 언론에서 그가 인종적 평등에 대해 호의적으로 말했다는 걸[83] 칭찬하는 부고가 실렸다.
이는 타이 콥의 가문은 증조할아버지가 조지아 주 역사 교과서에도 나오고 지금도 그의 고향에 가문의 성을 딴 콥 카운티가 있을 정도로 명망이 높은 상류층이었기에 서민들은 중학교도 못 나오던 시기 타이 콥은 고등학교까지 졸업하면서 시대의 평균적인 의식 수준보다 훨씬 나은 식견을 갖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타이 콥이 은퇴 후 사업과 투자에 쉽게 성공한 것도 기본교육이 잘 되어 있던게 크다. 야구플레이 스타일만으로 판단해도 확신할만큼 천재적인 지능이 있기도 했지만, 교육 수준의 영향이 더 큰건 부정할 수 없는게, 당시 은퇴 후 망하는 선수들도 많았고 사업이나 투자를 잘 못하던 선수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 중학교는 커녕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나온 선수들[84]도 많았다. 가난한 사람은 글이나 읽으면 다행이었던 시절이었고, 독학으로 글 읽는 것만 겨우 배운 선수들도 많았다.
12. 기타
- 상대팀에 대한 사전분석을 매우 철저히 했다. 덕분에 상대팀 내야수들 한명 한명의 위치와 습관을 잘 파악하고 있었고,# 이는 그의 주루플레이에 큰 보탬이 됐다. 그 결과는 어마어마한 수의 득점과[85]과 도루[86]. 통산 홈스틸도 54회로 압도적인 역대 1위.[87]
- 사이 영이 타이 콥에 대해서: "그의 문제는 인생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거야. 지나치게 인생을 힘들게 살아가고 있어."#
- 한국 야구팬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타이 콥도 의외로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다. 당시 대선배인 크리스티 매튜슨, 후배 조지 시슬러 등과 함께 장교로 참전했고 미국 내에서도 화제가 되었는데, 훈련 중 매튜슨이 독가스를 마시고 후유증으로 고통의 세월을 보내다 10년도 못 가 죽은 것과 달리, 타이 콥도 훈련 중 독가스는 마셨고 당시에는 훈련 직후 죽을 것 같다고 호소했다고 하나 건강에 큰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이는 조지 시슬러도 마찬가지.[88] 어찌되었건 나라를 위해 참전도 했기에, 그런 연유로 현대의 한국 야구팬들, 혹은 미국 야구팬들 생각처럼 당시 타이 콥은 미국 스포츠계에서 별로 인성이 크게 나쁜 이미지[89]가 아니었다. 지금은 거친 이미지지만 당시는 좋게 보면 "자존심과 근성이 강한 스타선수", 나쁘게 봐도 "너무 도도한 일류 선수" 정도의 이미지에 가까웠다.
- 1946년. 예순 살이었던 콥은 양키스타디움에서 열리는 올드스타들의 자선경기에 초청받아 타석에 들어섰는데, 당시 양키스의 주전 포수였던 베니 벤고에게[90] "이봐 젊은이. 내가 힘이 없어 방망이를 놓칠지도 모르니 뒤로 물러나 앉게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게 포수가 뒤로 멀찍이 물러자가 콥은 번트를 대고 총알같이 1루로 뛰어나갔다.[91][92][93] 대중의 관점에서 보면 나름 코믹한 일화고, 아웃됐어도 당연히 그 누구도 비웃지 않았을 고령이었지만, 노인이 돼서도 야구를 조금도 가볍게 보지 않았던 그의 지독한 승부욕과 진지함을 보여주는 일화.[94]
- 메이저리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타자이니 만큼 그의 일대기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는데 콥 역할을 맡은 토미 리 존스의 연기가 압권이다. 물론 앨 스텀프(Al Stump)란 작가가 쓴 전기의 탈을 쓴 픽션이 기반인만큼 허구가 대부분이다.
- 아역배우 타이 심프킨스의 이름이 타이 콥에서 따온 것이다.
- 1955년의 인터뷰
사망은 1961년이었지만 댓글란에 보면 이때 이미 암투병 중이었고 분명히 술이나 처방약에 취해 저렇게 횡설수설했을 거라고 한다. 대충 간추려서 번역을 하면 다음과 같다:
"캅 선생님, 현역시절 최고의 순간은요?"
"어... 그러니까... 필라델피아 원정경기였는데요. 더블헤더였고. 정규시즌 우승이 걸린 경기였죠. 9회초 2사 1루였는데... 제가 홈런을 치는 활약에 힘입어 동점이 됐죠. 그렇게 11이닝까지 가서 제가 결승 득점을 했는데... 또 동점이 되는 거에요... 그러더니 17이닝까지 가서 끝나더군요..."
- 은퇴 이후 30년이 지난 1958년에 한 기자와 한 인터뷰도 있었는데, 이 기자는 "당신이 요즘 시대에 활동했다면 어땠을까요?" 하고 묻자 콥은 "3할 1푼은 쳤겠지." 라고 답했다. 당연히 이 기자는 콥의 전성기 시절을 떠올리면서 매우 놀란 표정과 함께 정말이냐고 물었으며[95] 콥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나이 72살에 3할 1푼이면 됐지, 더 바랄 게 있겠나?" 라고 패기에 넘치는 답을 말했다. 즉, 은퇴한 지 30년 넘은 노인네의 몸으로 선수를 다시 시작해도 3할 1푼은 친다는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인 것.[96] 타이 콥 다운 자신만만함을 엿볼 수 있는 일화다. 상술되었다시피 타이 콥은 라이브볼시대인 40대에도 3할 1푼을 넘게 쳐 보고 은퇴했다.[97]
- 사운드가든은 타이 콥의 명성과 반대되는 그의 악평에 대해 풍자하는 노래인 'Ty Cobb'이라는 노래를 발표했다.
- 위에서도 볼 수 있듯, 대표적인 5툴 플레이어형 타자로 고타율을 유지했던지라[98], 체격이 작다는 오해가 있는데 이 사람의 키는 185cm로 월터 존슨과 같다. 월터 존슨이 투수들 중 키가 큰 편[99][100]이었음을 감안하면 타이 콥도 타자들 중에서는 키가 가장 큰 인물이었다는 것.
- 타격폼이 독특하다 못해 상당히 희한했다. 왼손과 오른손이 떨어져있는 자세로 배트를 세운 뒤 이리저리 흔들다가 타격 시에 손을 붙여 빠르게 회전하며 타격을 했다.
[1] 에드 델라한티, 로저스 혼스비와 동률.[2] 규정타석을 고려하지 않으면 23년 연속이다.[3] 조지아주에는 19세기초에 타이 콥의 조상의 성을 따서 지은 콥 카운티(Cobb County)가 있다. 지역명을 정할만큼 부와 명예와 권력을 다 갖춘 조지아의 대지주 집안으로, 타이 콥 역시 부잣집 도련님으로 성장했었다. 그가 콥 카운티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죽은 뒤에는 조상들이 묻힌 그 곳의 가족묘에 묻혔다. 그의 자서전에도 콥 카운티를 만든 조상 할아버지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타이 콥의 집안인 Cobb 가문은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전 18세기부터 영국(잉글랜드)에서 이주하여 조지아에 터를 잡고 가문을 이뤄 주변 영국계 가문들과 교류해온 지역 유지 명문가이며, 타이 콥 역시 전형적인 순혈 잉글랜드계 미국인(English-American)이며, 흔치 않은 상류층 출신 운동선수였다.[4] 메이저 리그의 시초인 내셔널 리그는 무려 19세 중후반에 시작했고, 당시의 인권개념은 20세기 중반보다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다. 그에 따른 구단 선후배문화도 생지옥이었는데, 오줌을 먹이기도 하고 선배들 앞에서 니가 먹을 오줌 싸보라고 바지와 속옷을 벗기기도 하고, 현대라면 중범죄에 해당할 별의별 비윤리적인 신고식이 메이저리그에 횡행했다. 당시 메이저리그에서는 일반적으로 후배는 선배 눈만 잘못 쳐다봐도 뺨을 맞았으며, 집합해서 빠따 패는 것도 메이저리그가 원조이다. 에디 콜린스의 경우는 필라델피아 시절 당대처럼 선배가 후배 맨날 때리던 시절 기준으로도 심하게 후배들을 때려서 후배들 꼴이 거의 누더기가 되니 구단이 말리려 한 적도 있었는데, 그 시즌에 팀 성적이 올라 월드시리즈 우승을 하니까 착한 폭력이랍시고 방치했다(콜린스 본인은 후배들에게 야구를 가르치다가 못할 때 좀 때린 정도라고 주장했다. 그렇게 6년 동안 패면서 3번이나 우승하고 연봉 올려주는 시카고로 이적했다). 대신 자팀 선배에게만 얻어맞으며 예우를 갖춰야하고, 타팀 선배에게는 예우하는 게 원래부터 없었던 것은 맞다.[5] 287개를 기록했으며, 명예의 전당에 베테랑 위원회로써 헌액됐다. 투표로 헌액되지는 못했지만, 감독자격 헌액이 아니라 선수자격 헌액이었다. 선수시절 유격수로 나름 한가락 했던 야구인. 원래는 세계 최다 사구 기록자였으나 21세기 대한민국의 최정이 이 기록을 깨 버린다.[6] 1896년 4할1리를 기록했다. 그것도 유격수로. 거기다가 몸에 맞는 공을 51대나 맞으면서 세운 대기록이다. 미국 야구 역사상 16명뿐인 4할타자라는 점에서 의외의 대타자다. 팀 동료이자 19세기 대표 레전드 중 하나인 윌리 킬러가 1897년에 4할2푼4리를 기록했는데, 그것보다 빠르다.[7] 한국의 야구인 이만수 감독 제스쳐의 원조가 이 사람이다.[8] 야구에서 이 동작이 나오는 경우는 주로 역전 적시타나 터프홀드, 터프세이브 등 아슬아슬한 경우가 많다.[9] 사실 한국처럼 미국야구계도 과거 제닝스 감독 시절 이전까지 감독은 근엄하고 무게가 있고 약간 보수적이어야 한다는 편견의 분위기가 있었다. 그가 이런 신나는 제스쳐로 주목받고, 근엄하거나 무겁기보다 가볍게 선수들과 소통하는 감독이라는 이미지를 만들며(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심판에게 항의해야 하거나 부당한 상황이 왔을 때는 매서웠다고 한다. 타이 콥 폭력사건 직후 시기에 본인이 선수 출전하거나 할 때 사건도 유명한데, 가뜩이나 선수가 부족한 상황에 누군가 다쳐 다음 공수교대 때 교체해야 할 상황이 오자, 심판이 공수교대해야 할 상황 전에 다가와, 교체할 선수 없어뵈는데 어떡할 거냐고 미리 묻자 쳐다보지도 않고 "당신이 알거 없잖아"라고 말했다가 열받은 심판과 싸울뻔한 적도 있었다. 상황이 대충 넘어가고 공수교대 때가 되자 감독 본인이 교체선수로 나갔다.), 미국야구계에도 신바람 야구같은 개념이 생겼고, 다양한 스타일의 지도자들이 각자의 특징에 따라 주목받기 시작했다. 코치를 선수로 쓰느라 3루 주루코치할 사람이 없어서, 혹은 그냥 직접 작전 지시를 해야겠다고 판단해서 감독 자신이 주루코치를 하다가, 역전 적시타 상황에 "이~야!"를 외치다가 사진이 자주 찍혀 스포츠 언론에 화제가 된 적도 있다. 하지만 감독의 그런 유쾌한 측면을 진지하고 예민한 성격인 타이 콥은 오히려 좋아하고, 리스펙했다. 게다가 선수 끝나고 변호사가 되려고 아이비리그 코넬대학교 로스쿨을 다니다가 감독 제의를 계속 받아 법 공부와 코치를 병행하던 걸 할 수 없이 그만둔 엘리트라서 무식한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50대초반에 감독을 은퇴하고도 변호사가 못된 걸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법보다 야구가 더 좋았다고 한다.[10] 폭행사건 후 그 전엔 그냥 넘어갔던 관중의 욕설과 유리병 투척이 금지되었으니, 모든 결과가 좋았다. 이미 관중이 투척한 유리병이 심판의 뒷통수를 가격한 적도 있었는데 이제서야 조치가 이루어진 것이다.[11] 한 기자가 70살이 넘은 타이 콥에게 인터뷰를 신청해서 "(전성기적 기준으로) 지금 리그에서 뛰신다면 어느 정도 치실 것 같나요?" 라는 질문에 "한 3할 1푼 정도?" 라 답했다. 기자는 의아해하며 "4할도 3번이나 치신 분이 3할 1푼이라니요?!" 라고 되묻자 "이 친구야, 내 나이 70에 그 정도면 됐지 더 이상 뭘 바라는 겐가?"(즉, 지금 쳐도 3할은 친다는 뜻이다.)라고 대꾸한 바 있다.[12] 1936년 당시 현역으로 뛰던 유명 투수들로는 디지 딘, 칼 허벨, 레프티 그로브 등이 있었다.[13] 시대별 MVP급 타자들의 커리어 하이 수준의 타율이다. 예컨대 2000년대 중~후반 MLB를 양분했던 알버트 푸홀스의 타율 커리어 하이는 03년 .357, 알렉스 로드리게스의 그것은 96년 .358이다. 근데 타이 콥의 커리어 하이는 .419이다.(라이브볼 시대 커리어 하이는 .401)[14] 메이저리그 기준타수(=5천타수)를 만족한 타자들 중 메이저리그 전체 1위. 2위인 로저스 혼스비의 타율 0.358과 8리 차이가 난다. 거의 1푼 수준인데, 더 놀라운 건 3위부터는 모두 3할4푼대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독보적인 타격왕이라 할 수 있는 수준이다.[15] 메이저리그 전체 2위. 1위는 도박왕의 4256개.[16] 이때 타이 콥은 고작 만 22세 시즌이었다. 풀타임 3년차에 데뷔 5년차였다. 다른 메이저리그 레전드 중에 이 나이에 메이저리그에 데뷔하거나 더 늦게 데뷔한 경우도 많다.[17] 시대가 데드볼 시대인지라 이런 개수의 홈런 수로도 홈런왕이 되는 것이 가능했다. 사실 당시에 이건 적은 것도 아니다. 당시 7홈런 홈런왕도 있었다.[18] 라이브볼 시대에는 선수 겸 감독을 하며 타격왕을 못 했다. 그래도 라이브볼 시대에도 한번 4할을 쳐서 타격왕을 할 뻔 했지만 더 높은 타율을 기록한 조지 시슬러에게 타격왕을 빼앗겼다. 타이 콥은 그때부터 조지 시슬러를 재능있는 후배로 인정했다.[19] 타이 콥이 특별히 못한건 아니었다. 이 해 처음 타격 2위를 했을 뿐이다. 타이 콥은 데드볼 시대에 풀타임 13년간 슬럼프 시즌이라는 거 자체를 한번도 겪어 본 적이 없다. 타이 콥이 처음 슬럼프를 겪은 건 라이브볼 시대 원년인 1920년이다. 라이브볼의 사용으로 메이저리그 전체 타율이 올랐으나(특히 로저스 혼스비는 이 시즌부터 각성해서 내셔널리그 최고 타자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타이 콥은 타율이 오르지 않고 오히려 떨어져 타율 3할3푼대를 치며 비교적 부진한 시즌을 보냈는데 , 1921년 다시 3할8푼대로 타격왕 직전까지(당시 타격왕은 본인이 이끌던 디트로이트 팀 선수였던 해리 하일만, 휴이 제닝스는 타이 콥에게 그를 중용하라는 말을 남기고 감독을 그만두었었다.)가며 타율 2위로 화려하게 재기했고, 1922년 만35세의 나이로 4할을 치며 라이브볼 시대에도 전성기가 끝나지 않았음을 알렸다. 이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령 4할 타자 기록이다. 당시 신분이 감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지 시슬러나 베이브 루스가 없었다면 다시 MVP를 탔을 지도 몰랐던 시즌.[20] 조지 시슬러는 라이브볼 시대가 오고 나서야 타격왕 타이틀을 얻었으며, 4할을 치고 타격 2위를 했던 조 잭슨과 타격 2위만 3번을 한 에디 콜린스는 결국 타격왕을 한번도 못 하고 은퇴했다. 트리스 스피커 역시 타이 콥과 경쟁하면서 타격 2위만 3번을 했다. 그래도 에디 콜린스는 도루왕쪽에선 타이 콥을 제치고 몇번 차지했다. 조지 시슬러도 콜린스처럼 도루를 잘하는 선수라 타이 콥, 에디 콜린스와 경쟁하며 도루왕 타이틀을 차지하곤 했다.[21] 70년 뒤를 떠나, 당시에도 냅 라조이와 타이 콥의 소속팀 직원들이 나서서 메이저리그 사무국에 찾아가 논쟁을 벌이기도 하고 기자들이 매일같이 두사람을 인터뷰시도 하려고 싸울만큼 큰 사건이었다. 당시 타격왕에게 상을 주던 메이저리그 스폰서 회사가 두 사람 모두에게 상품을 주며 끝났다.[22] 사실 이 기록에는 2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 냅 라조이는 마지막 더블헤더에서 8타수 8안타를 쳤는데 그 중에서 6개는 번트안타였다.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 감독이 타이 콥을 정말로 싫어해서 신인 3루수를 기용하고 그에게 깊은 수비를 지시했기 때문. 둘, 타이 콥은 당시 타격왕 타이틀을 지키기 위해 일부러 마지막 경기에 나오지 않았지만 어쨌든 .385 대 .384로 타격왕을 수상했는데, 1981년에 당시 기록원들이 3타수 2안타 경기를 두 번 셌던 것이 발견되어 그의 시즌 타율은 .383이었던 것으로 정정되었다. 통산 타율도 .367에서 .366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메이저리그 사무국인 MLB.com에서는 다른 모든 야구 스탯 사이트들과는 달리 1910년 타율 .385와 통산 타율 .367을 모두 인정하고 있다.[23] 단, 2020년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 과거 기록을 대폭 재검토하면서,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에 타이 콥의 1910년은 계속 타격왕으로 인정하면서도, 1914년 타격왕 기록을 규정타석 미달로 처리하고, 당시 타격 2위이던 에디 콜린스(그해 MVP)를 그해 타격왕으로 수정하였다.(분명 그 전해까지 계속 1914년 타격왕은 타이 콥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렇게 되면 타이 콥 야구인생 최고의 대기록인 19년 연속 3할기록이 깨지고, 다른 연속 3할기록자들의 연속 3할기록 순위 항목도 대폭 수정되게 될 수도 있다. 특히 콜린스는 이를 통해 출루율까지 2위에서 1위 출루율왕으로 수정되었으므로 콜린스와 콥, 당대 레전드 두 사람의 블랙잉크가 크게 바뀔 수도 있다.[24] 사실 그 MVP가 생긴 것도 타이 콥 때문이었다. Chalmers라는 자동차 회사(사장 이름이 Hugh Chalmers)에서 지원하는 상이 그전까지 있었다. 그러나 MVP개념이 아니라 리그별 타율 1위에게 상을 주는 제도였었다. 즉 그냥 타격왕(부상으로 자동차를 주었다고 한다.)상뿐이었는데, 상술된 1910년의 타이 콥과 냅 라조이와의 타격왕 논쟁 발생 후, 이것이 꽤 부정적인 갈등으로 이어져(당시 그냥 두 사람 모두에게 상품을 줬다고 한다.), 상의 가치와 Chalmers사의 홍보 효과가 퇴색될 것이 우려되자 팀 기여도가 가장 높은 선수에게 주는 상으로 바꾸게 되었고 이것이 메이저리그 MVP의 전신이다. 당시 이름은 Chalmers Award. 이후 1920년대에 부활했을 때 상 이름은 MVP가 아니었다. 의미말고 진짜 MVP라는 이름의 상은 1930년대부터 생긴다.[25] 이때가 그 .419라는 말도 안 되는 타율 커리어하이를 기록한 시즌이다. 당시 아메리칸 리그 연속 안타 신기록인 40경기 연속 안타 기록도 세웠다.[26] 이 MVP 시즌과 타격 8관왕을 기록한 1909년의 퍼포먼스는 1920, 1921, 1923년의 베이브 루스, 1924, 1925년의 로저스 혼스비, 1927년의 루 게릭, 1941년의 테드 윌리엄스, 1956년의 미키 맨틀, 1967년의 칼 야스트렘스키, 2018년의 무키 베츠, 2022년의 애런 저지와 함께 비약물 타자가 리그 전체에 압도적인 영향을 끼쳤던 단일 시즌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27] 아메리칸 리그 1912년 수상자 트리스 스피커, 1913년 수상자 월터 존슨, 1914년 수상자 에디 콜린스.[28] 사실 그해 타이 콥도 다시 MVP를 받아보려고 매진하여 526타수 211안타라는 어마어마한 기록으로 4할을 넘게 쳤는데, 조지 시슬러가 585타수 246안타라는 미쳐버린 기록으로 4할2푼을 넘겨 MVP를 수상하면서 못 받았다. 당시 타이 콥이 1911년에 세워 가지고 있던 40경기 연속 안타 기록도 시슬러가 41경기로 깨 버렸다. 물론 이는 아메리칸 리그 기록으로 내셔널 리그 및 메이저 리그 최고 기록은 당시에도 1897년 윌리 킬러의 44경기 연속 안타였다. 조 디마지오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조지 시슬러와 윌리 킬러가 각 리그 최고 기록자였다. 지금도 내셔널 리그 기록은 킬러의 것이다.[29] 간단히 말해서 이렇게 보면 된다. 타이 콥은 18세이던 1905시즌에 데뷔해 1928년까지 선수생활을 했다. 그리고 이 중 MVP란 제도가 존재했던 것은 7년차(24세)부터 10년차(27세)까지 4년, 그리고 18년차(35세) 이후부터였다. 즉 그의 커리어 중 전성기 대부분을 포함한 13년간 MVP란 상 자체가 없었다.[30] 역대 메이저리그에서 4할을 해 본 타자는 총 16명인데, 데드볼 시대에 기록해본 선수가 11명, 라이브볼 시대에 기록해본 선수가 6명이다. 합이 17명인 이유는 타이 콥이 데드볼 시대와 라이브볼 시대 모두 4할을 기록하는 바람에 중복되기 때문이다. 진짜 괴물[31] 내셔널 리그 조상이자 대선배이며 19세기에 무려 통산 100홈런을 넘긴 대타자 에드 델라헌티, 후배이자 역대 최고의 2루수 로저스 혼스비까지 3명만이 가지고 있는 대기록. 두명이 내셔널 리그 선수라서, 아메리칸 리그 선수로는 타이 콥이 유일하다.[32] 더 무서운 건 3번의 4할 타율 시즌 중 1시즌은 타율 2위였다는 것이다. 그때가 라이브볼 시대인 1922년으로 당시 1위는 조지 시슬러의 .420이었다. 반대로 1911년에 .419로 타격왕 겸 MVP를 차지할 때는, 훗날 타이 콥이 히팅 마스터라 인정한 맨발의 조 조 잭슨이 신인의 몸으로 .408이라는 대기록을 세워 4할타자가 되었으나, 타이 콥 때문에 타격왕이 되는데 실패했다. 타이 콥의 스승 휴이 제닝스도 선수시절인 1896년 .401이라는 대기록을 세웠으나, 제스 버켓이라는 선수가 2년 연속 4할이라는 위대한 기록과 함께 .410을 치는 바람에 타격왕을 빼앗겼다.[33] 4할이 희귀함에도 불구하고(메이저리그 통산 24회, 16명) 나올 때는 꼭 같은 해에 2명씩 나오는 경우가 많다. 유일하게 1894년 내셔널 리그에서는 무려 4명이 4할을 친 적도 있다.(휴 더피, 에드 델라헌티, 샘 톰슨, 빌리 해밀턴) 시슬러와 타이 콥이 아메리칸 리그에서 4할을 쳤던 1922년, 내셔널 리그에서도 로저스 혼스비가 4할을 치며 3명의 4할 타자가 나왔다.[34] 프로야구 역사에서 4할과 트리플 크라운을 다 해본 사람은 내셔널 리그의 휴 더피와 로저스 혼스비, 아메리칸 리그의 타이 콥과 테드 윌리엄스까지 단 4명 밖에 없다.[35] 그가 은퇴하고 통산 장타율 6할, 통산 OPS 10할의 위대한 타자 행크 그린버그라는 레전드가 나왔지만, 야구 황제 타이 콥에 비견되지는 못했다.[36] 다만 이 중 4시즌은 현재 프로야구 기준 규정타석 미달이다. 하지만 이것은 현대야구 기준(3.1타석 비율)으로 본 것일 뿐 당시의 기준은 달랐고 이에 따라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는 1906년과 1926년, 1928년 3시즌 기록을 제외한 20시즌의 기록을 규정타석 3할로 인정하고 있었다. 즉 원칙적으로는 1907~1925년까지 19년 연속 3할이었다. 나머지 시즌은 1914년 시즌으로 이때 그의 기록이 현재기준으로 볼때 규정타석 미달이었으나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100여년간 규정타석으로 인정해왔는데, 2020년 과거 기록을 대폭 재검토 후 규정타석 미달로 수정하고, 당시 MVP 겸 타격 2위 에디 콜린스를 타격왕으로 수정하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공식 19년 연속 3할이라는 야구 역사상 손에 꼽는 대기록이 11년 연속으로 대폭 축소될 상황에 처했다. 1918년의 경우는 얼핏 규정타석 미달로 보이지만 아니다. 1차대전으로 인한 단축시즌이라 규정타석이 적었다. 한 팀당 120여 경기를 치렀다.[37] 통산 도루 성공률도 80%를 기록했는데 주의해야 하는 기록이다. 당시에는 도루자가 기록된 시즌이 있다 없다 했는데, 타이 콥의 도루자 기록된 시즌만 살펴보면 동시대 리그 도루 성공률인 65.05%보다 낮은 64.67%다. 동시대 평균이 안되는 레전드로서는 낮은 스탯. 이로써 도루자가 기록되지 않은 시즌을 보정하지 않는 fWAR에서 많은 이득을 취한다. 참고로 2010~18시즌까지 리그 도루 성공률은 72.38%.###[38] 사실 타이 콥이 타격에 비해 수비는 에러가 조금 있던 편이라, 당시 수비 자체로는 더 뛰어났던 트리스 스피커가 있어서 스피커를 최고의 중견수로 쳤었다. 사실 스피커도 당대에 타격으로 워낙 최강이던 4할타자 타이 콥이 있어서 주목을 덜 받아 그럴뿐, 타격 자체도 탑급으로 뛰어났던 선수며, 타이 콥의 라이벌 소리도 오래 들었던 사람이다. 수비나 타격이나 탑급으로 비슷하다. 괜히 타이 콥 다음의 MVP 수상자가 트리스 스피커인게 아니다. 최초의 5인은 못 되었어도 바로 다음해에 저 유명한 선배 사이 영과 함께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사람이 바로 트리스 스피커다. 냅 라조이까지 그 해에 단 3명만이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39] 원래 외야 수비는 중견수를 가장 수비 잘하는 선수로 배치한다.[40] 당시 홈런 117개면 현대로 치면 470~500홈런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만약 콥이 현대에서 똑같은 성적을 냈다면 4000안타-500홈런-800도루라는 말도 안되는 성적을 기록했을 수도 있다.[41] 1911년부터 1914년까지 홈런왕을 했다.[42] 사이 영(본명은 덴튼 영)이나 베이브 루스(본명은 조지 허먼 루스)와 마찬가지로 본명 대신 별명 '홈런'을 등록명으로 썼고 MLB 홈페이지 등에서도 이를 반영해 그냥 '홈런 베이커'로 표기하고 있다. 현대 야구에도 치퍼 존스나 버스터 포지같은 사례가 있다.[43] 이와 흐름을 같이 하여 투수쪽에서는 메이저리그 통산 방어율 1위 에드 월쉬가 완봉승을 11회나 하고 완투를 44경기나 한 시즌도 있었다. 그 정도로 투수의 시대였다.[44] 처음에는 자기팀 후배인 해리 하일먼에게 빼앗기고, 그 다음은 조지 시슬러에게 빼앗겼다. 해리 하일먼은 팀 내에서 타이 콥의 뒤를 이은 후배로 도루왕 겸 타격왕으로 활동하였으며, 1923년 4할을 치며 또다시 타격왕을 했고 타이 콥은 그를 아꼈다. 먼 훗날 은퇴한 해리 하일먼이 실력을 저평가받아 명예의 전당 투표에 계속 떨어지다가, 50대의 나이에 폐암으로 죽게 되고 베테랑 위원회나 기대해야 할 입장이 되자, 이를 안타까워 한 타이 콥(당시 타이 콥은 단순한 레전드 야구인이 아니라, 사업에 성공한 부자였었다.)은 사비로 뉴욕 타임스에 "하일만을 명예의 전당으로"라는 캠페인 광고를 냈고, 그는 고인이 된 그해 은퇴 10여년만에 투표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다.[45] 1921년부터 1926년까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감독 겸 선수였다. 한국으로 치면 백인천 감독이 1982년에 했던 것과 같은 방식이다.[46] 정확히 말하면 테드 윌리엄스는 장타, 교타, 선구안 모든 것이 완벽했던 완성형 타자다. 타율 4할을 기록하던 시즌에 출루율이 5할 5푼, 장타율이 7할 3푼, OPS가 무려 1.280에 육박한 고타율과 OPS를 겸비한 퍼펙트 히터였고 지금까지도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메이저리그 역대 통산 출루율 1위다.[47] 라이브볼 시대가 열리고도 서른 중반의 나이로 세차례 ops 1을 달성하였다. 베이브 루스가 슬럼프 시즌을 보내던 1925년, 한국 나이 40살에 아메리칸 리그 OPS 1위를 했을 정도. 즉 라이브볼 시대에 그 유명한 전성기 베이브 루스를, 프로 21년차였던 말년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OPS로 이겨봤다는 이야기다.[48] 콥이 전성기를 보낼 때 다른 타자들의 평균 타율은 2할 4,5푼을 맴돌았다.[49] 사실 이 당시의 포스트시즌이래봤자 월드시리즈가 전부였으니 당해년도 우승팀의 투수진을 상대했다는 점과 극단적인 스몰 샘플임을 감안할 시 아주 이해가 안 가는 수준은 아니다.[50] 실제로 그가 상대전적이 약했다고 할 만한 투수는 월터 존슨 뿐이었다고 봐도 될 정도다. 그리고 그는 디트로이트 이상의 약팀인 워싱턴 세네터스에서 뛰면서도 기어코 반지를 수집해내기도 하였다.[51] 역대 1위. Black Ink는 역대 2위인데, 1위가 베이브 루스이다. Black Ink와 Gray Ink와 HOF 모니터, HOF 스탠다드를 모두 더한 수치도 타이 콥이 역대 1위다.[52] 이것은 후대에 나온 이야기이기에 신뢰성에 문제가 있다. 타이 콥이 했던 플레이들을 사후에 언론에서 평가한 것 중 일부가 한국인들에 의해 편집되어 한국에 들어오면서 타이 콥이 혼자 현대 기준을 적용받아 더티 플레이어였던 것처럼 더 왜곡된 부분이 많은데, 당대의 선수들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 선수들의 플레이와 야구 문화에 비교하면서 더티 플레이로 몰아간 측면이 크다. 그동안 야구에서 수정한 규정들과 변화한 야구 문화도 고려되지 않고 차라리 야구 관중들과 싸운 부분이라면 몰라도, 야구 경기 자체에서 일단 타이 콥이 한 플레이 중 한국 넷상에서 더티 플레이라고 규정한 많은 행위들은 당대 다른 선수들의 언론 보도 사례에도 많이 나오며(부상을 입을 만한 태클 사례는 당대와 그 이후 시대의 유명 선수들에게도 흔했다.), 결정적으로 과거는 물론 현대의 미국 야구 전문가들조차 타이 콥을 눈에 띄게 더티 플레이를 했다고 (한국 야구팬들처럼) 규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1990년대부터 인터넷 보급과 함께 한국에 메이저 리그의 문화가 급격히 들어오는 과정에서, 20세기 초 레전드 타이 콥이 한국에서는 베이브 루스보다는 많이 덜 유명하다 보니 일부 매니아가 몇몇 미국 넷상의 소수 자료만 접한 뒤 만든 편견이 퍼져서 현재까지 고쳐지지 않고 이어져 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에서는 엄연히 당대 야구 황제 이미지이지 더티 플레이어 이미지가 아니고 한국만 그렇게 되어있다.[53] 콥은 평생 그런 시늉조차 해본 적이 없다.[54] 상술한 대로 역대 3루타 1위이며, 명예의 전당에 베테랑 위원회로 추천받아 헌액된 선수이다. (역대 3루타 분야 2위가 콥이다.) 콥과 동료긴 했지만 까칠했던 콥과의 개인적 관계는 썩 좋지 못했다. 대부분의 팀 동료가 그랬긴 했지만. 물론 끈끈한 우정이 약했을 뿐 콥이 크로포드 이외에 많은 선수들에게 받은 존경과는 별개의 문제다. 콥은 동시대 거의 모든 선수에게 존경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항상 일반적인 선수들이 생각하는 근성 그 이상을 야구 인생 내내 보여주어서 사생활의 성격을 떠나 야구 선수로서는 모범이 되었기 때문.[55] 위의 매우 유명한 사진 속 포수 폴 크리첼(Paul Krichell)은 1950년대, 선수로서가 아니라 뉴욕 양키스의 스카우트로서 루 게릭을 발굴한 것으로 유명했던 시기에 이 사진에 대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사진이 다소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하게 찍혔다고 말했다. 그때 성질이 뻗쳐서 콥과 싸웠고 그로 인해 둘 다 심판에게 벌금을 선고받았는데, 어찌됐든 사실은 콥은 무릎을 노리고 들어온 것이 아니라 글러브를 쳐 공을 떨어뜨리려고 했다고. 또 크리첼은 이런 말을 했다. "제 잘못이 없다고 보진 못하겠네요. 그건 제 실수였습니다.(It was really my fault.) 주루 경로 옆이 아니라 길목에서 버티고 있었거든요." 실제로 사진을 면밀하게 관찰하면 포수가 홈플레이트를 정면으로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콥과 크리첼의 당시 충돌은 선수들 개개인의 인격 탓보다는 선수 보호보다는 '포수는 당연히 홈플레이트를 육탄 방어하고, 주자는 이를 바디체킹이든 핏 퍼스트 슬라이딩이든 뭐든 해서 뚫는 것이 프로다'라는 인식이 더 일반적이던 올드스쿨 시대의 영향을 두 선수가 모두 받아서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56] 그러나 사실 메이저리그 최고의 스타였던 타이 콥이 규정타석을 못 채우거나 주전선수 치고 타석이 적었던 시즌이 적잖게 있던 건(데뷔초부터 스타였던 타이 콥은 24시즌 커리어 중 전경기 출장 시즌이 3시즌 밖에 없다), 첫째로는 (싸움질 같은) 사고를 쳐서 출장을 쉬거나 한 적이 있기 때문이고, 두번째로는 경기 중에 저 짓하다가 다쳐서 쉬던 경기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좀 다쳐도 웬만하면 경기를 나갔던 근성 넘치는 일류 선수였음에도, 몇경기라도 쉬지 않을 수 없을만큼 다쳐서 타석수가 부족한 시즌이 있었다는 걸 보면 얼마나 심하게 많이 했는지 알 수 있다. 사고나 불필요한 부상으로 출전을 못하고 날린 경기가 커리어 전체에서 최소 수십경기에서 100경기에 육박한다. 멀티히트 경기를 밥먹듯이 하던 그가 조금만 그런 행동을 줄였어도 후세의 피트 로즈가 그의 최다안타 기록을 못 깼을 것이다. 67개 차이인데, 타이 콥 기록만 봐도 전성기면 50경기만 더 시켜도 70안타는 컨디션 나쁠 때도 최소한 기본으로 치고도 남고, 웬만하면 80안타는 넘길 사람이다.[57] 무슨 욕에 뚜껑이 열렸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콥의 인터뷰에 따르면 어머니의 부도덕함과 피부색에 대한 욕설을 들은 것으로 보인다.[58] 사실 현대법이 적용될 상황이었으면 당장 감옥에 갈 일이었다. 비장애인도 아니고 장애인을 무차별 폭행하여 얼굴뼈가 잘못될 정도로 만들었기 때문에 단순히 폭행죄와 상해죄만이 아니라 살인미수 혐의로도 피소되어 합의도 못하고 감옥에 갔을 가능성이 높다.[59] 한참 두들겨 패고 있을 때 옆의 관중이 "그만해요. 저 사람은 팔이 없는 사람이라고요."라고 말하니 "두 발이 없대도 신경 안 써!"라는 콥의 발언이 자주 인용된곤 한다.[60] 애시당초 이 경기 자체가 디트로이트 구단의 항의 차원에서 벌어진 일이라 트레이버스 외의 투수는 준비하지도 않은 것으로 보인다.[61] 유격수 출신으로 메이저리그 통산 최다이자 세계 프로야구 통산 최다 몸에 맞는 공 기록(287개)을 보유한 걸로도 유명하다. 그는 사실상 1903년에 은퇴한 후 코치 생활을 하다가 타이 콥이 3년차 신인이던 1907년부터 디트로이트의 감독을 하던 사람이었다. 사실상 타이 콥의 메이저리그 인생을 함께한 인물이며 (나중에 껄끄러워졌지만) 소중한 은사. 타이 콥을 처음으로 풀타임 주전으로 기용한 것도 휴이 제닝스였다. 감독이 된 이후에도 팀 선수가 부족한 상황이 오면 몇년에 한번씩 경기에 출전하곤 했는데 감독생활 중 총 5경기에(10타석) 대타나 대수비로 출전했고, 그래서 사실상은 그냥 감독이지만, 원칙적으로는 플레잉 매니저(감독 겸 선수)였으며 나이 50에도 선수생활을 한 사람이 된다. 심지어 감독이 되었던 1907년에는 40이 다 된 나이에 유격수나 2루수 대수비도 했었는데 선수생활을 쉬던 사람인 관계로 역시나 실책을 저질렀다. 그래도 1918년에는 50살의 나이로 1루수 대수비로 출장해 실책없이 2아웃을 잡아냈다. 그가 1920년 감독을 그만두고, 1921년부터 팀 감독을 했던 게 타이 콥이기도 하다.(콥은 진짜 감독 겸 선수였다.) 타이 콥에게는 은사이자 선후배 감독이라는 특이한 관계.[62] 윌리엄의 할아버지, 즉 콥의 증조부 대에서는 이로 인해 살던 마을에서 쫓겨나기도 했다.[63] 지금은 계급 차별 반대 여론 문제로 단어 사용이 줄었지만, 영미 문화권에서는 자본주의가 강하게 자리잡기 시작한 19세기부터 경제 및 정치, 문화적으로 상류층을 upper class, 중산층을 middle class, 저소득(하류)층을 lower class라고 오랜기간 불러왔다. 언론에서 사용한 호칭이 upper-middle class라면 upper toward middle일지 middle toward upper일지는 모르지만 정치적 권력 같은 것만 약했을 뿐, 경제적으로는 굉장히 부유하게 잘 사는 가정이었다고 쉽게 간주할 수 있다.[64] 지금도 미국의 일부 주에서는 자기 집에 무단침입한 사람 혹은 그렇게 간주될 사람(예를 들어 가족이더라도 이 경우처럼 문이 아니라 창문으로 집에 있는 사람 몰래 들어 와서 집에 있는 사람이 분간할 수 없는 경우)을 쏴 죽이는 것은 한국과 달리 순수 정당방위로 인정되어 무죄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저때는 100년 전이라 치안이 지금보다도 안 좋았던 시절이므로 더더욱 그랬다고 한다.[65] 물론 타이 콥이 그 후 모친인 그녀를 한번도 직접 안 만났다고 했던 건 사실이다. 사건 이후 그녀가 다른 사람과 재혼을 했는데 그렇게 새로운 가정을 차렸기 때문일 수도 있고, 순수한 증오였을 수도 있기에 둘 중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지만..[66] 물론 타이 콥이 적극적인 협상을 통해 야구선수들이 이전보다 더 많은 돈을 받는 시대가 된건 맞지만 당시 미국 경제상황과 비교할 때 평생 먹고살 떼돈까지는 아니었다. 19세기 때 선수들 수입은 막장급이었고, 20세기 초에도 타이 콥 수준까지는 못 되지만 후보선수급은 아닌 선수들도 대기업 회사원보다 못 벌었다. 야구로 최고가 되면 평생 먹고살 수준의 돈을 벌게 된 건 타이 콥의 본좌라인을 잇는 라이브볼 시대 본좌 베이브 루스 이후 부터라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67] 참고로 뱀가죽이 아니라 손잡이가 없는 채찍의 일종이다. 몬태나주와 와이오밍주에서 전통적으로 쓰는 채찍인데 이렇게 생겼다. 더 사족을 붙이자면 황소에게 쓰는 거라고 한다.[68] 그리고 그 이후에 큰 아들 타이 콥 주니어는 나중에 정신을 차렸는지 의대에 붙어서 의사가 됐으나 아버지 타이 콥은 죽을 때까지 아들을 보지 않았다.[69] 손자가 쓴 "Heart of a Tiger: Growing Up with My Grandfather, Ty Cobb"이란 회고록 2014년에 출판된 바 있다.[70] 아들이 셋이었는데 그 중 둘은 아버지 타이 콥보다 먼저 사망[71] 자세히 보면 키가 188cm나 되는 투수 출신 베이브 루스에 비해도 키가 별로 작지 않다. 얼굴 사진만 보면 별로 안 커 보이는 영국계 미국인 타이 콥의 키는 185cm(6피트 1인치)였다. 170cm대 선수가 많았던 당시로서는 타자로서 매우 큰 체구로, 지금으로 치면 190cm대 타자에 해당한다. 그리고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 이 사진을 통해 라이브볼과 데드볼 시대의 타격법의 차이를 알 수 있다. 루스는 배트 끝을 손을 붙힌 채로 잡고 있지만, 콥은 두 손을 띄어놓은 채로 컨택에 집중한 타격법을 가지고 있다[72] 사실 야구가 처음 정립될 당시를 기준으로 본다면 틀린 말도 아니다. 그 시점엔 펜스를 넘어가는 홈런은 그야말로 예외적 상황에 불과했으니. 실제 당시 미국 야구인들과 야구팬들도 슈퍼스타 홈런왕 베이브 루스에게 환호하면서도, 최고의 야구에 대한 생각에 있어서는 평균적으로 타이 콥의 그것과 아직 비슷했다. 야구에 대한 사상혁신은 2차대전 이후 40여년간 데드볼 시대를 넘는 라이브볼 시대 역사가 쌓이고 새로운 스타들이 나오면서 조금씩 끊임없이 변화하며 일어났던 것이다.[73] 타이 콥이 특별히 인종차별주의자라서 그랬다기보단 당시 미국 사회에선(특히 마초적 성향이 더 강한 메이저리그 내에선) 일상적인 욕이었다. 언론 매체에서조차 흑인 멸칭을 자연스레 쓰던 시절이었다.[74] 생각보다 예민한 성격을 지녔던 루스는 그때마다 큰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물론 루스 역시 자기가 단타를 노린다면 6할은 칠 수 있을 거라는 둥 설전을 펼쳤다.[75] 1루수로는 루 게릭, 2루수 에디 콜린스, 3루수는 벅 위버, 유격수는 호너스 와그너를 골랐다.[76] 메이저리그 최초의 사이영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흑인 투수 중에서 3번째로 메이저리그 데뷔를 했는데, 첫번째 선수는 부진하여 통산 10승도 못하고 은퇴했고 두번째 선수는 니그로리그 레전드로 유명한 사첼 페이지이지만 메이저리그 데뷔 당시는 40대 초중반의 중년 야구인이라 뉴컴처럼 선발 에이스를 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다. 뉴컴은 40년대말에 데뷔할 때부터 괜찮게 해서 50년대부터 완전히 리그 최고의 선수였다. 하지만 이 1956년 월드 시리즈 7차전에서 져 버렸고, 이후부터 급격한 하락세를 타서 망조가 들어 금방 은퇴해버렸다. 투수인데 경기 준비 시간에 방망이를 들고 있는 사진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듯이, 투수를 하면서도 평소 타격 연습을 즐겼고, 투수 중에서는 타격 성적이 좋았다. 나중에 투수로 망하자 일본에 가서 타자로 활동했다.[77] 당시는 흑인 메이저리그 진출이 허용된 후임에도, 아직도 흑인 선수하고 몸이 닿는 것도 재수없다고 피하는 백인 야구 원로들이 어느정도 존재하던 미국사회였다. 하지만 타이 콥은 그때는 커녕 젊을 때조차 그런 태도를 가진 적이 없고, 은퇴 뒤에 야구를 보러 갈때도 뛰어난 흑인 선수들에게 항상 대선배이자 아버지뻘인 자신이 먼저 인사를 청하고 악수를 했다. 흑인선수들과 찍은 사진이 많다.[78]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했기에 초기 미국인은 전부 순혈 영국계 앵글로색슨이었을 거라는 후세인들의 편견이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콥 가문은 공교롭게도 그 편견과 일치하는 케이스다. 미국 독립 전부터 아메리카 영국 식민지에 순혈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인 가족이 이주하여 자리잡은 집안이었다. 그야말로 정통 영국계 가문이다.[79] 무려 18세기 건국13주 소속에다가, 남북전쟁때 흑인 노예를 찬성하던 남부군이었고, 흑인노예가 많던 농업지대가 많은 지역이라 인종차별이 전통적으로 강하다. 게다가 순혈 영국계 미국인 비율이 계속 높은 지역. 그러나 콥 가문은 무려 조지아 귀족으로 불리던 영국계 미국인 대지주 집안임에도, 이와 정반대였다.[80] 진짜 당대 인종차별주의자들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지금은 인종차별주의자들도 흑인과 공적인 자리에서 악수 수준의 신체접촉하는 걸 거부하는 짓은 죽어도 못하지만, 그때 미국은 몸에 살짝만 닿아도 난리를 치는 인간들이 수도없이 많이 쳐널렸었다. 당대 백인이 흑인에게 먼저 악수를 청하는건 현대의 악수와는 차원이 다른 리스펙의 태도이다. 이는 다른 선수들이 나중에라도 구단 관련 흑인 노동자들을 무시 못하게 하는 효과를 타이 콥이 노린 의도일 확률이 높다. 단, 다른 팀 구장에서 비슷한 계층의 흑인 노동자가 타이 콥을 약올리려고 밀쳐서 때린 적은 있다.[81] "역대 최고의 포수 중 하나"[82] "내가 돈을 내고 볼 가치가 있는 유일한 선수" 당시 타이 콥은 60대 노인이었다.[83] "Ty Cobb Backed Negroes." Los Angeles Sentinel, August 3, 1961, B11.[84] 조 잭슨은 아예 글을 못 읽어서 자기 이름 쓰는 법도 몰랐다. 그래서 사인을 못하니 도장에 이름파서 들고 다닌 것이다.[85] MLB 통산 2위의 2243 득점. 오직 리키 헨더슨만이 그의 위에 52점 차이로 존재하고 있다[86] 이 역시 루 브록과 리키 헨더슨이라는, 타이 콥 본인이 야구하는 모습도 못 본 후배들이 나오기 전까지 2위였다. 아메리칸 리그 기준으로는 1위. 지금은 메이저리그 통산 4위[87] 2위는 33개의 맥스 캐리.[88] 혹자는 당시 군대갈 나이가 한참 지난 매튜슨이 당시 입대전에 이미 폐에 크거나 작은 감염질병 같은 게 있는 상태에서 모르고 훈련받다가 가스가 이를 악화시켰고 의료발달도 덜 된 시대에 면역력이 약한 상태에서 손쓰지 못하고 제대로 회복이 안된 게 아닌가 추측한다.[89] 다른 선수들이라고 해서 싸움질을 안한게 아니었다. 지금처럼 큰 폭력상해사고치면 다시는 선수 못하고 이런 시대가 아니었으며, 술집에서 일반인 패는 폭력사고는 다반사에, 감독 코치나 선배가 평소 일반인이나 기자들이 다 보는데서도 후배 선수들한테 욕설하는건 기본이고 뺨 때리기 정도까지 남 보는데서 했으며, 뻑하면 어두운데로 끌고 가서 기합주고 방망이로 때리고 걷어차고 그러다가 병원 실려가서 입원하고 신문 나오는 것도 많았고 구단의 힘으로 묻혀서 썰만 도는 건 더 많았다. 일본 프로야구나 한국 프로야구 80년대 초창기 폭력은 귀여운 수준으로, 당시 메이저리그는 2차대전 이후 시대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만큼 엄청 무식한 시대였다. 지금 메이저리그가 선후배 군기 같은 거 없이 동등해보인다고 해서 원래 그랬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신문에 나올만큼 신인 신고식 문화도 이상한걸 먹이거나 하는 등 악질적으로 몹쓸 것들이 많았고, 스포츠 선배가 후배 군기잡고 기합주고 개패듯 패는 문화는 미국이 동양보다 훨씬 원조였다. 단지 일본을 필두로 동양에 다 퍼지고 나서 자기네는 고친 것 뿐이다. 오히려 타이 콥은 후배를 갈구지 않았고, 사생활에서도 남이 먼저 시비 안 걸면 안 때렸으니 당시 기준으로는 젠틀한 편.[90] 당시 살인자 타선으로 유명한 양키스의 주전 포수로, 1923년, 1927년, 1928년에 우승반지 획득[91] 그는 현역선수 시절에도 기습번트를 잘 대는 편이었다. 사실 그의 타격방식은 빠른 스피드를 활용하는 탁월하고 다양한 배드볼 히팅에 가깝다고 분석된다. 그가 선구안 위주로 승부하던 선수는 아닌게 4천안타를 넘게 치면서도 볼넷은 1249개 밖에 안 되었고, 타율 4할을 기록하던 시즌에도 출루율 5할을 기록한 적은 없다. 삼진이 357개밖에 안 되는 걸로 기록되어 있으나, 배드볼 히터였던 것도 있고 메이저리그는 1913년부터 삼진이라는 것을 기록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1905~1912년까지 그가 당한 삼진은 남아있는 기록으로 정황상 삼진으로 확정되는 것 외에(당시는 현대로 치면 낫아웃 출루에 해당되는 상황들이 많았다) 기록되어 있지 않아 빼서 저렇게 적게 나온 것이다.[92] 1912년까지는 '삼진'이라는 규정없이 세번째 스트라이크가 들어가면 타자가 1루로 바로 달리고, 포수가 1루에 공을 던져서 아웃시키는 게 규정이었다. 사실 우리가 스트라이크아웃 낫아웃이라고 알고 있는 것도 정식명칭이 아니고, 정식명칭은 'uncaught third strike'인데, 원래 포수가 세번째 스트라이크를 빠뜨리면 타자주자가 자연스럽게 1루로 살아갔기 때문이다. 규정에서 세 번째 스트라이크를 포수가 포구하면 바로 아웃되는 삼진규정을 추가하여 만들면서, 이미 있던 저 포구 실패 상황은 없어지지 않도록 따로 처리하게 한 것이다.[93] 다만 삼진을 공식 기록으로 쓰지 않는 시대의 영향으로 볼삼비가 과대평가 되었을 수는 있지만 삼진을 많이 당하는 타자는 결코 아니었다. 1913년 이후의 기록 기준으로도 단일 시즌 삼진이 50개를 넘기지 않았고 이 시기 출루율도 .442이다. 선구안이 좋은 타자가 볼넷보다는 본인이 안타를 쳐서 출루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으면 배트를 내밀어서 출루했다고 결론을 내는게 더 공정한 평가일 것이다. 사실 소위 말하는 배드볼히터들도 출루율이 상대적으로 낮을 뿐 선구안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100개의 볼넷을 골라내는 대가로 200개의 삼진을 당하는 타자보다 50볼넷-50삼진을 기록하는 배드볼히터가 선구안이 더 좋다고 볼 수도 있다. 다만 그 좋은 선구안을 볼을 골라내는 데에 사용하기보다 자기 컨택 능력을 믿고 최대한 존을 넓힌 뒤 그 존에 들어오는 볼을 구분해서 다 쳐내는 방향으로 사용하는 것일 뿐.[94] 상단의 사이 영이 그를 정확히 평가한 셈이다.[95] 후술되었지만 콥은 40대 나이에 3할 5푼을 쳤던 타자다.[96] 물론 기자는 전성기 시절을 기준으로 한 말이겠지만.[97] 만 40세 시즌 기록이 3할5푼7리이니 40대에도 3할 1푼은 우스운 수준. 또한 상술된대로 30대때 3할3푼이나 친 시즌에 왜 내가 이것밖에 못했냐며 슬럼프를 느꼈던 선수다.[98] 대신 통산 2루타나 3루타도 최상위권인만큼 당대 기준에서는 슬러거였다. 데드볼 시대에 15년이나 뛰었고 40대 중반까지 선수생활을 했음에도 통산 장타율도 5할이 넘는다.[99] 근데 진짜로 키가 더 큰 레전드 투수인 사이 영이 있다. 후대에 월터존슨만 파워 피쳐고, 롱런한 사이 영은 기교파라는 이미지가 생겨 사이 영이 좀 작을 것 같은 이미지가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사이 영은 월터 존슨보다 체격이 큰 188cm의 거구에 엄청난 파워피쳐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두 사람과 찍은 사진을 봐도 사이 영이 더 크다. 파워피칭 기반에 40대에 나이 먹을 수록 기교를 늘려 이닝을 늘려간거지, 19세기에는 엄청난 구위를 이용해 맞던 말던 꽂아서 삼진이건 땅볼이건 만들어냈다. 오히려 왜소한 체격(173cm)임에도 파워피칭을 한 사람은 사이 영보다 선배인 "작은 증기기관"(The Little Steam Engine) 퍼드 갤빈이다.[100] 퍼드 갤빈은 진짜 이름이 제임스 갤빈인데, 키가 작고 어깨도 안 넓은데 뚱뚱해서 몸매가 운동선수 같지 않았다. 그래서 현대 한국야구의 유희관 이미지의 미국 선수였는데, 그 외모로 인해 아마추어 시절부터 푸딩같이 생겼다고 별명이 푸딩 pudding이었고, 이를 줄여서 퍼드(pud)가 선수명이 되었다. 근데 유희관과 달리 퍼드 갤빈은 키 180대 선수들을 압도하는 놀라운 구속이 가능한 몸이었다. 그래서 제구보다 파워피칭으로 승부했고, 최초의 300승 대투수가 되어 야구인들이 놀라워하며 프로에서는 작은 증기기관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은퇴하고 훗날 염소 고환 추출물(스테로이드 성분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을 가공한 약물을 선수시절 주사로 맞았다고 신문인터뷰에서 밝혔다. 물론 이 시대에는 금지약물이란 개념이 없던 시대였기에 이것으로 갤빈이 폄하받을 이유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