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허벨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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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칼 허벨 | |||||||||||||||||||||||||||||||||||||||||||||||||||||||||||||||||||||||||||||||||||||||||||||||||||||||||||||||||||||||||||||||||||||||||||||||||||||||||||||||||||||||||||||||||||||||||||||||||||||||||||||||||||||||||||
헌액 연도 | 1947년 | ||||||||||||||||||||||||||||||||||||||||||||||||||||||||||||||||||||||||||||||||||||||||||||||||||||||||||||||||||||||||||||||||||||||||||||||||||||||||||||||||||||||||||||||||||||||||||||||||||||||||||||||||||||||||||
헌액 방식 | 기자단(BBWAA) 투표 | ||||||||||||||||||||||||||||||||||||||||||||||||||||||||||||||||||||||||||||||||||||||||||||||||||||||||||||||||||||||||||||||||||||||||||||||||||||||||||||||||||||||||||||||||||||||||||||||||||||||||||||||||||||||||||
투표 결과 | 86.96% (3회) |
칼 허벨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MLB 월드 시리즈 우승반지 |
1933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 | ||
1933 | 1934 | 1935 |
1936 | 1937 | 1938 |
1940 | 1941 | 1942 |
1933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MVP | ||||
척 클라인 (필라델피아 필리스) | → | 칼 허벨 (뉴욕 자이언츠) | → | 디지 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
1936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MVP | ||||
개비 하트넷 (시카고 컵스) | → | 칼 허벨 (뉴욕 자이언츠) | → | 조 메드윅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
1933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다승왕 | ||||
론 와네키 (시카고 컵스) | → | 칼 허벨 (뉴욕 자이언츠) | → | 디지 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
1936년 ~ 1937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다승왕 | ||||
디지 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 → | 칼 허벨 (뉴욕 자이언츠) | → | 빌 리 (시카고 컵스) |
1933년 ~ 1934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평균자책점왕 | ||||
론 와네키 (시카고 컵스) | → | 칼 허벨 (뉴욕 자이언츠) | → | 사이 블랜튼 (피츠버그 파이리츠) |
1936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평균자책점왕 | ||||
사이 블랜튼 (피츠버그 파이리츠) | → | 칼 허벨 (뉴욕 자이언츠) | → | 짐 터너 (보스턴 비스) |
1937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탈삼진왕 | ||||
반 멍고 (브루클린 다저스) | → | 칼 허벨 (뉴욕 자이언츠) | → | 클레이 브라이언트 (시카고 컵스) |
뉴욕 자이언츠 등번호 10번 | ||||
결번 | → | 칼 허벨 (1932) | → | 와티 클락 (1933) |
뉴욕 자이언츠 등번호 11번 | ||||
프레디 피츠시몬스 (1932) | → | 칼 허벨 (1933~1943) | → | 영구결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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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d5a1e>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No. 11 | |
칼 오웬 허벨 Carl Owen Hubbell | |
출생 | 1903년 6월 22일 |
미주리 주 카시지 | |
사망 | 1988년 11월 21일 (향년 85세) |
애리조나 주 스캇스데일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미커 고등학교 |
신체 | 183cm / 77kg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좌투우타 |
프로 입단 | 1926년 아마추어 자유계약 (DET) |
소속팀 | 뉴욕 자이언츠 (1928~1943) |
기록 | 노히트 노런 (1929.05.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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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활동했던 투수. 스크류볼로 전설적인 위치에 올랐으며, 1930년대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명투수다. 기자협회 투표가 시작된 1931년 이후 MVP를 2번 수상한 투수는 100년이 넘는 MLB 역사에서 그와 할 뉴하우저(1944, 1945) 2명 뿐이다.2. 선수 경력
2.1. 독립리그부터 디트로이트 타이거스까지
1923년, 20살 때 독립리그 팀인 오클라호마 시티에 입단한 칼 허벨은 '레프티 토마스'라는 좌완 투수를 만났다. 레프티 토마스는 허벨에게 스크류볼을 전수해줬다. 그 당시 스크류볼은 '페이드어웨이'라는 이름으로 타자의 눈 앞에서 사라지는 마구 취급을 받았고, 크리스티 매튜슨이 간간이 던지는 공이었다. 스크류볼과 강력한 패스트볼이 합쳐지면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는데 허벨에겐 강속구가 없었다. 대신 커브를 던질 줄 알았고, 팔이 돌아가는 고통을 참아내며 스크류볼을 마스터하게 되었다.1925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가 허벨과 2만 달러에 계약했다. 그러나 당시 감독 겸 선수였던 타이 콥이 스크류볼의 위험성을 미리 알고 마이너리그로 내려가 다른 구종을 연마하라고 3년 동안 마이너리그에 박아두었다.[1]
2.2. 뉴욕 자이언츠
1928년, 뉴욕 자이언츠가 그를 주목했고 당시 자이언츠의 명감독 존 맥그로가 그를 보고 크리스티 매튜슨이 생각난다며 그를 영입했다. 맥그로는 허벨에게 스크류볼을 던져도 된다며 허락했고,[2][3][4] 25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마운드를 밟을 수 있었다. 그 시즌 7월부터 합류했고, 20경기(14선발) 10승 6패 ERA 2.83의 호성적을 올렸다.1929년 본격적으로 전성기가 열렸다. 이 시즌 성적은 39경기(35선발) 268이닝 18승 11패 ERA 3.69를 기록했는데, 이 시즌 5월 8일 피츠버그 파이리츠와의 경기에선 1볼넷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9회 처음 두 타자가 전부 실책으로 출루했음에도 실점 없이 마무리하며 경기를 끝냈다고.
1930, 1931, 1932년을 각각 17승 ERA 3.87, 14승 ERA 2.65, 18승 ERA 2.50으로 마감했고, 1933년 31세 때 몬스터 시즌을 보내게 되었다. 7월 2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경기에선 18이닝을 혼자 무실점으로 틀어막고 팀이 1:0으로 승리해 최장 이닝 완봉승[5] 기록을 새로 썼으며 4경기 연속 완봉을 포함해 45 1/3 연속 이닝 무실점 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 이 시즌 완투가 22회, 완봉이 10회였는데 이 중 5번의 완봉이 1-0 완봉승이라 이 부문 역시 최고 기록을 세웠다.
1933년 메이저리그에서 역대 최초로 열린 올스타전에도 내셔널리그 소속으로 참가했다. 원래는 선발 투수로 내정되어 있었는데, 하필 이틀 전 그 18이닝 완봉승을 해버린터라 7회에 올라와 두 이닝을 던지고 내려갔다. 예전부터 베이브 루스와 맞붙고 싶어했던 허벨이었지만 8회에 루스가 교체되며 맞대결은 성사되지 못했다.
시즌 최종 성적은 45경기(33선발) 308.2이닝 23승 12패 ERA 1.66. 다승왕, 평균자책점왕 타이틀을 차지했지만 탈삼진 부문에선 2위를 기록해 삼관왕 달성엔 실패했다. 그래도 그 시즌 리그 MVP를 차지했다.
1933년 월드 시리즈에선 1, 4차전에 선발 등판했다. 1차전에선 9이닝 2실점 무자책 완투승, 4차전에선 11이닝 1실점 무자책 완투승을 거두며 종합 20이닝 무자책, 0.00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그 시즌 뉴욕 자이언츠가 월드 시리즈 왕좌에 오르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그리고 그 다음 시즌인 1934년에도 21승 ERA 2.30으로 맹활약했다. 올스타전이 백미였는데, 이번엔 제대로 내셔널리그 선발 투수로 등판했다. 첫 타자에게 안타, 다음 타자에게 볼넷을 내줘 시작부터 무사 1, 2루의 위기에 몰렸고 타석엔 그토록 상대하고 싶었던 베이브 루스가 들어섰다. 허벨은 스크류볼을 활용해 베이브 루스를 삼진으로 잡아냈고, 이어서 루 게릭-지미 폭스-알 시몬스-조 크로닌까지 5명의 타자를 연속 삼진으로 잡아내는 절정의 투구를 선보였다. 이 5명은 모두 후에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정도로 뛰어난 타자들이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더욱 대단한 기록이었다. 도합 2,218홈런 9,385타점을 기록한 이 5명은 모두 허벨의 스크루볼에 방망이도 맞추지 못했다.
MLB 역사의 명장면으로 남은 허벨의 1934년 올스타전 5타자 연속 탈삼진.
이 날 허벨은 3이닝 6탈삼진을 기록하며 올스타전 최다 탈삼진 기록을 새롭게 썼다.
1936년 전반기엔 10승 6패로 시작하더니, 이후 16연승을 질주하며 시즌을 26승 6패 ERA 2.31로 마감했다. 역대 투수 최초로 두 번째 리그 MVP도 만장일치로 수상했다.[6] 1937년 8연승을 추가하며 24연승을 달성했고, 그 시즌 159탈삼진을 기록하며 시즌 탈삼진왕에 올랐다.
1933년부터 1937년까지 5시즌 연속 20승 이상을 기록하는 대기록도 달성하게 되었다. 이때 붙은 별명이 'Meal Ticket'. 1936년, 1937년 연속으로 내셔널리그 1위에 오르는데 큰 공헌을 해서 '식권'이라는 식으로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허벨이 뛸 당시 내셔널 리그의 평균 타율이 3할이 넘을 정도로 극 타고투저였다. 그 타고투저에서 스크류볼 하나로 전성기 10년 동안 엄청난 활약을 보였다는 거 자체 만으로도 대단한 선수였던 셈.
2.3. 부상, 그리고 은퇴
칼 허벨이 그렇게 경계했던 부상은 1938년에 찾아왔다. 24경기 179이닝 13승 ERA 3.07로 그 동안의 커리어에 비해선 조금 부진하더니, 시즌 후 팔꿈치에 부상이 와 수술을 받게 되었다. 수술의 후유증과 나이 등의 여파로 스크류볼의 위력은 떨어졌고, 1939년부터 1942년까지 4년 연속 11승을 기록하며 힘이 약간 떨어진 모습을 보였다. 그래도 15시즌 연속 두 자릿수 승리라는 대기록을 세웠다.1943년, 41세 때 4승 ERA 4.91로 크게 부진한 끝에 은퇴를 선언했다. 커리어 최초 4점대 평균자책점, 한 자릿수 승리를 기록한 시즌이었다.
칼 허벨의 커리어 최종 성적은 535경기 3590.1이닝 253승 154패 ERA 2.98. 통산 평균자책점이 3,000이닝 이상 던진 좌완 투수 중 역대 2위다.[7]
3. 명예의 전당 입성
은퇴 후 1944년 등번호 11번은 뉴욕 자이언츠의 영구결번으로 남았고, 1947년 86.96%라는 높은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8]3.1.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블랙잉크 | 그레이잉크 | HOF 모니터 | HOF 스탠다드 | |
칼 허벨 | 51 | 252 | 174 | 51 |
HOF 입성자 평균 | 40 | 185 | 100 | 50 |
- JAWS - Starting Pitcher (44th)
career WAR | 7yr-peak WAR | JAWS | |
칼 허벨 | 67.5 | 47.3 | 57.4 |
선발투수 HOF 입성자 평균 | 73.9 | 50.3 | 62.1 |
4. 은퇴 이후
은퇴 이후로도 자이언츠의 프런트로 이동해 1977년까지 프런트에서 활동했다. 프런트에서 물러난 후엔 스카우터로 전향해 유망주들을 찾아다녔고, 1985년 82세의 나이까지 아이들이 야구하는 모습을 지켜봤다고 한다.1988년, 애리조나의 스콧데일의 한 병원에서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5. 기타
* 스크류볼 그립은 속구 그립과 비슷했지만 던질 때 팔을 위 사진처럼 꺾어서 던졌다. 그래서 은퇴 이후 팔이 완전히 돌아가 버려서 차렷 자세를 하면 손바닥 위치에 손등이 가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손과 팔의 타고난 유연성이 매우 뛰어나 그나마 이 정도에서 그친 것이라고 하며, 유연성 덕분에 스크류볼을 자주 사용했지만 부상을 잘 안 당해서 전문가들도 신기하게 여겼다.
[1] 하술할 부상 항목을 보면 타이 콥의 염려는 과학적인 근거가 충분했다고 볼 수 있다.[2] 스크류볼이 투수의 팔에 위험하다는 얘기에 "크리스티 매튜슨도 스크류볼을 던졌는데 괜찮았다"며 허락했다고 한다.[3] 그런데 크리스티 매튜슨은 스크류볼을 던질때 마다 고통을 참지 못하여 경기당 10개 내외로 던졌다. 반면 칼 허벨은 밑에도 나와있듯이 스크류볼의 개수를 조절하지 못했고 결국 팔이 뒤틀려버렸다.[4] 김형준 기자가 출판했던 저서에 따르면 강속구가 없는 칼 허벨의 입장에서는 불가피했던 측면이 있었다고 한다.[5] 18이닝 동안 무사사구, 6피안타, 12탈삼진.[6] 이는 내셔널리그 역사상 유일한 만장일치 투수 MVP이다. 아메리칸리그도 데니 맥클레인이 유일하다.[7] 1위는 화이티 포드의 2.75다.[8] 이 당시에는 명예의 전당 선수가 넘쳐나기도 했고 첫 번째 헌액에 대해 후하지 않아서 당시에 3~4번째 만에 헌액됐으면 상당히 빨리 헌액된 것이다. 로저스 혼스비, 조지 시슬러, 모데카이 브라운, 냅 라조이 같은 대 선수들도 2수 이상이 걸려 헌액되거나 베테랑 위원회를 통해 헌액됐다.[9] 사첼 페이지가 딱 이랬었다.[10] 일명 5대장이라 불리는 투수들이 있다. 칼 허벨, 제리 쿠스먼, 테드 라이언스, 앤디 페티트, 데이브 맥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