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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16:23:50

소나타 악티카

<colbgcolor=#00008b><colcolor=#f0f8ff> 파일:SA_firstinline_logo_web-800.png
파일:Sonata Arctica 2024.jpg
결성 핀란드, 케미, 1995년 겨울
출신지 핀란드 파일:핀란드 국기.svg
장르 파워 메탈, 프로그레시브 메탈, 심포닉 메탈, 멜로딕 메탈(멜로딕 헤비 락)[1]
활동 기간 1995년 ~ 1996년 (이름 없음)
1996년 ~ 1997년 (Tricky Beans)
1997년 ~ 1999년 (Tricky Means)
1999년 ~ 현재 (Sonata Arctica[2])
구성원 토니 카코 (보컬, 키보드, 1996[가입시점]~)
토미 포르티모 (드럼, 1995[가입시점]~)
헨릭 클링엔베리 (키보드, 2002~)
엘리아스 빌야넨 (기타, 2007~)
파시 카우피넨 (베이스, 2013~)
레이블 Atomic Fire Records 파일:독일 국기.svg
Avalon Label(アヴァロン・レーベル, 아발론 레이블) 파일:일본 국기.svg
1. 소개2. 커리어3. 라이브
3.1. 보컬 역량에 관해
4. 다른 밴드와의 관계5. 구성원6. 디스코그래피7. 기타

[Clearfix]

1. 소개

핀란드파워 메탈 밴드. 1995년 겨울 핀란드 북부의 도시 케미(Kemi)에서 결성되었다.

원래는 트리키 빈스(Tricky Beans)라는 이름의 하드 록 밴드였으나 1997년부터 스트라토바리우스의 영향을 받아 트리키 민스(Tricky Means)로 이름을 바꾸고 파워 메탈의 길로 들어선다. 밴드의 이름은 나중에 소속 레이블의 권유에 따라 소나타 악티카(Sonata Arctica)로 바뀌었다. 데뷔 당시 토니 카코를 제외한 모든 멤버들이 10대라는 점에서 파워 메탈 리스너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혜성 같은 신인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데뷔했다.

일본에서도 인기가 많은 편이라 이들의 곡 중에서 Silence 앨범 수록곡 Black Sheep이 한때 리듬게임 기타프릭스&드럼매니아 시리즈에 판권곡으로 수록되기도 했다. 라이브 앨범 3장 중 2장(Songs Of Silence, For The Sake Of Revenge)이 일본에서 한 라이브를 담은 앨범일 정도.

2010년 1월 12일 멜론 악스에서 공연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취소된 흑역사가 있다.메탈의 불모지 한국

작곡/작사 담당인 보컬리스트 토니 카코가 제일 좋아하는 동물이 늑대이다보니 7집과 11집을 제외한 모든 앨범에 늑대가 주인공인 "늑대 노래"[5]가 있다. 스토커를 소재로 한 가사[6]도 많은 편. 6집까지는 암울한 가사를 가진 곡이 상당했으나 8집을 기점으로 밝고 희망찬 곡의 비중이 크게 늘었다.

초기 작품에선 스트라토바리우스식 멜로딕 파워 메탈이 두드러지며, 헬로윈의 계보를 잇는 모던 멜로딕 파워 메탈계에서 프로그레시브의 영향을 받아 등장한 밴드로서 당시 등장했던 수많은 양산형 프록/파워 메탈계의 원조가 되는 밴드. 파워 메탈이라고 말할 수 있는 앨범은 1~4집과 8집, 11집 정도이며 그 외의 앨범은 파워 메탈적인 요소가 적고 락 또는 프로그레시브적인 경향이 많이 들어간다[7]. 그런 만큼 8집 및 11집을 제외한 후기 앨범들은 일반적인 파워 메탈을 싫어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나름의 인기가 있으나 파워 메탈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평이 많이 박하다.

2. 커리어

밴드는 1995년 겨울~1996년 초에 걸쳐 마르코 파시코스키[8]와 베이시스트 펜티 페우라가 기타리스트 야니 리마타이넨과 드러머 토미 포르티모, 보컬 토니 카코를 차례로 영입하면서 핀란드 북부의 도시 케미에서 결성되었다. 밴드의 첫 리허설은 1995년 12월 20일에 진행되었는데, 당시에는 밴드에 토니 카코와 토미 포르티모가 없었다. 1996년 5월 29일 첫 번째 공연을 선보이기 직전까지도 밴드에는 이름이 없었으나 보컬인 토니 카코가 트리키 빈스(Tricky Beans)[9]라는 이름을 떠올려냈고, 그게 밴드의 첫 이름이 되었다. 트리키 빈스 시절의 장르는 마르코 파시코스키에 따르면 메가데스와 스핀 닥터스(Spin Doctors)[10]를 섞어놓은 하드 록이었다. 토니 카코는 마르코에게서 밴드가 무슨 음악을 하는지 전해들었을 당시에 끔찍한 조합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1997년 밴드의 세 번째 데모인 Peacemaker를 발표한 후, 밴드는 스트라토바리우스의 음악에 반한 끝에[11] 하드 록에서 파워 메탈로 음악성을 바꾸게 된다. 그러는 김에 토니는 밴드의 이름을 이전보다 덜 우스꽝스러운 이름인 트리키 민스(Tricky Means)로 바꾸기로 했는데, 마르코는 새 이름은 도대체 뭔 의미로 지은 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토니 젖꼭지 밴드보다 덜 우스꽝스러운 건 사실이긴 한데 세 번째 데모 발매 후 금전적으로 부담을 느낀 마르코는 세 번째 데모를 내는 대신 라플란드의 스키 리조트에서 공연을 돌았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는 밴드 멤버들에게 투어를 돌며 돈을 벌자고 제안했으나 토니가 이제 막 새로운 스타일을 적용했으니 데모도 새로 내야 한다며 아직은 투어를 돌 때가 아니라고 하자 마르코는 그럼 자기는 다른 일을 하겠다고 말하고는 11월 28일 Hepolahti에 있는 학교에서의 공연을 끝으로 밴드를 떠났다. 마르코는 당시에는 라이브 공연은 물론이고 모여서 연습을 할 때조차 드물었고 밴드에 목표라는 게 없었다면서 자신의 첫 번째 탈퇴 사유를 해명했다.

마르코의 탈퇴 이후 야니는 자신의 중학교 동창이자 토미 포르티모의 이웃인 얀네 키빌라티에게 같이 밴드를 할 마음이 있느냐고 물었다. 얀네가 베이스를 빌리고 첫 연습을 함께한 후, 토니는 잘 왔다며 그를 환영해 주었고 그렇게 그의 밴드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들이 Tico Tico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네 번째 데모에는 Mary-Lou, UnOpened, 8th Commandment, FullMoon이 수록되었다. 데모 녹음 당시 야니, 토미, 토니의 엄청난 실력을 본 아흐티 코르텔라이넨(Ahti Kortelainen)은 이런 데모를 그냥 썩히는 것은 멍청한 짓이라며 그들이 원한다면 자신과 연줄이 있는 Spinefarm Records에 데모와 추천서를 보내겠다고 했다. 토미가 기억하기로 그들은 "맘대로 해요(Whatever)."라고 답했고 아흐티 코르텔라이넨은 밴드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데모인 FullMoon을 Spinefarm Records로 보냈다.

밴드의 회상에 따르면 Spinefarm과의 계약은 사기 당한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아흐티가 토니에게 Spinefarm에서 밴드의 곡을 컴필레이션 앨범에 싣고 싶어 한다며 당시 Spinefarm 소속 매니저였던 Ewo Pohjola의 번호를 줄지 묻자 토니는 당연히 그래도 된다고 했고 그 다음날 Ewo에게서 전화가 왔다. 3집까지 계약하는 건 어떻겠냐는 말에 토니가 즉각적으로 동의하면서 계약이 체결되었다. 이후 Spinefarm은 그들에게 밴드명을 Tricky Means에서 다른 것으로 바꿀 것을 요구했다. 당시 멤버들은 3년 간 지켜온 이름을 갑자기 바꾸라는 말에 당황했지만 곧 "소나타 악티카(Sonata Arctica)"가 그들에게 매우 잘 어울리는 이름임을 깨닫고 수긍했다. 밴드가 Spinefarm과 계약했다는 소식을 토니에게서 전해들은 마르코는 한동안 분노했으며 잠깐이지만 밴드를 위해 연주할 기회가 돌아온다면 절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집을 발매하기 전, 밴드의 데뷔 앨범은 스트라토바리우스의 티모 톨키가 프로듀싱할 것이고 당시 나이트위시의 보컬 타르야 투루넨이 게스트 보컬로 참여한다는 루머가 기사화되었으나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12] 밴드는 1999년 7월 15일 그들의 데뷔 싱글인 UnOpened를 발매했다. 그러나 이 싱글의 초판본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는데, 싱글에 수록된 UnOpened는 원래보다 훨씬 느렸고 그 탓에 보컬인 토니 카코의 목소리도 이상하게 들렸다. 야니가 말하길 마치 발정난 소 울음 소리(...) 같았다고.[13] 재미있는 건 일본 레이블인 Marquee에서 이 버전을 듣고도 그들과 계약하기를 원한 것.

프론트맨인 토니 카코를 제외한 모두가 10대였을 때 발매된 이들의 데뷔 앨범 Ecliptica는 스트라토바리우스를 연상케 하는 화려한 멜로디와 쏜살 같은 스피드, 그리고 청량감으로 파워 메탈씬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마침 이들의 전성기인 2000년대 초반은 당시 그들의 롤 모델이었던 스트라토바리우스가 쇠퇴할 즈음이었기에 그들과 유사한 음악성을 보여준 소나타 악티카는 파워 메탈 팬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게 된다.

스트라토바리우스의 색채가 강했던 1~2집에서는 음악성이 단조롭다든지 깊이가 없다든지 하는 비판이 늘 있어왔고, 이러한 비판들에 따라 3집부터 프로그레시브적인 요소를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자신들만의 음악을 선보였다. 4집 앨범인 Reckoning Night에 이르러선 이전 앨범들보다 프로그레시브적인 면을 더욱 강화했고 퀸의 영향을 받아 오버더빙을 다양한 곡에 적용하기 시작했으나, 당시까지는 그래도 프로그레시브적 요소와 파워 메탈적 요소가 균형을 이루고 있었으며 여전히 '파워 메탈'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음악성을 보였기에 많은 구 팬들은 지나치게 프로그레시브하거나 락적인 느낌이 드는 일부 트랙만을 나쁘게 바라볼 뿐 앨범 전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음 작품인 Unia를 기점으로 두 요소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곡의 분위기는 이전과 달리 지나치게 어둡고 우울해졌으며, 달리는 걸 멈추고 발라드와 미드 템포 곡으로 앨범을 가득 채웠다. 전반적으로 파워 메탈스러움이 줄었고 헤비해졌으며 기타의 비중이 이전보다 감소하면서 키보드의 비중이 늘어났다. 이런 변화가 데뷔 때의 전형적인 파워 메탈의 쾌감을 없애버렸기 때문에 상당수의 구 팬들이 당황하고 실망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밴드는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대신 변화를 이어갔다[밴드의입장].

6집 The Days of Grays에서는 5집의 어두움과 헤비함은 그럭저럭 유지하였으나 프로그레시브함이 조금 줄어들었고 서사성과 서정성 위주로 음악성을 선회했다. 심포닉 요소의 도입을 시도하면서 키보드의 비중이 5집보다도 늘어났으며 박력과 메탈다움이 줄어들어 또 한 번 호불호가 크게 갈리게 되었다. Unia 팬 중에서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 이후 7집 Stones Grow Her Name에서는 토니가 '연주하기 쉽고, 대중들이 즐기기 쉬운 단순한 음악'에 흥미를 갖게 됨에 따라 지난 두 앨범과는 전혀 다른 단조로운 아레나 록 음악을 선보인 결과 소악이 4집까지 보여준 파워 메탈을 사랑하는 팬층과 Unia 및 TDoG 시절의 어둡고 복잡한 음악을 사랑하는 팬층 모두에게 배신감을 안겨주고 말았다.

파워 메탈로의 회귀를 선언하며 로고도 예전의 것으로 돌려놓은 8집 Pariah's Child에서는 초창기의 멜로딕 파워 메탈과 5~7집의 음악성을 융합했는데 팬들 사이에서는 밋밋한 믹싱과 완전한 회귀라고 보기 힘든 어중간함으로 호불호가 갈렸다. 이는 2010년대에 발매된 이들 앨범에 공통적으로 제기된 문제.

Pariah's Child 발표 후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갑자기 뜬금없이 1집 Ecliptica를 현재의 라인업으로 재녹음하여 밴드 15주년 기념으로 10월 24일에 발매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팬들은 충분히 예전 버전도 좋은데 굳이 재녹음을 해야하냐는 의문을 표했고, 차라리 새로운 곡을 작곡해서 새 앨범을 내는거 더 낫겠다는 둥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의견을 표했다. 결국 2014년 10월에 나온 Ecliptica 재녹음 앨범은 안 좋은 녹음 상태라이브에서나 할 법한 애드립이 군데군데 섞여있다와 엉성한 믹싱, 원래보다 낮아진 음역과 속도감 등으로 대다수의 팬들에게 욕만 얻어먹었다[15]. 그나마 건질만 한 건 트리키 빈스 시절 곡을 리메이크한 일본반 보너스 트랙 "I'm Haunted" 정도.

또한 Pariah's Child 발표 이후 밴드의 역사와 일부 곡의 해석을 담은 "Sonata Arctica Book"을 내놓았다. 2015년 해당 책의 영어 버전이 e북으로 출간되었으나 2024년 현시점에선 합법적인 루트로는 구할 방법이 없어 일부 팬들이 PDF 파일을 아카이브해 두었다.

2015년 9월 12일에 이들을 위한 헌정 앨범인 "A Tribute to Sonata Arctica"가 나왔다. 헌정 앨범에 참여한 밴드로는 산드리아, Van Canto, Stream of Passion, Timeless Miracle 등이 있다. 다만 몇몇 곡을 제외하면 팬들의 평가는 많이 좋지 않은 편.

2016년 10월 7일에 9집 앨범 The Ninth Hour가 발매되었다. 각종 인터뷰에서 '따뜻한 믹싱을 원했다' '느리고 부드러운 느낌을 원했다'는 식으로 말한 만큼 이전 앨범들에 비해 느리고 말랑말랑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결과물로 나왔다. 믹싱 상태가 이상한 것 같다는 의견이 리뷰어 및 일반 팬들 사이에서 쏟아져 나왔으며, 결국 참지 못한 어느 한 팬이 앨범에 수록된 모든 곡을 리마스터해 유튜브에 업로드하기까지 했다(...).[16] 판매량이 영 시원치 않았는지 이 앨범을 끝으로 국내에는 더 이상 라이센스반이 나오지 않고 있다.

2019년 9월 6일에 10집 Talviyö가 발매되었다. 메탈의 색채가 거의 소멸되어 락의 색채만이 남았으며, 믹싱은 더욱 악화되어 라이브를 듣는 게 차라리 나을 지경에 이르렀다. 토니 카코의 보컬 역량도 성대 결절이 의심되는 수준으로 쇠락한 상태[17]이다. 파워 메탈은 커녕 메탈이라고 하기도 힘들다보니 극소수의 팬을 제외한 절대다수의 팬들은 이 앨범을 최악의 앨범으로 본다. 팬들은 6집 The Days of Grays부터 본격화된 키보드의 비중 증가와 줄어든 기타 솔로, 그리고 5집부터 서서히 믹싱이 부드럽고 따뜻한, 원래 하던 파워 메탈과는 거리가 먼 쪽으로 변해가는 고질적인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고 불만을 표하고 있다.

2021년, Nuclear Blast 창업자의 새로운 회사인 Atomic Fire로 소속 레이블을 옮겼다.

2023년, 소속 레이블인 Atomic Fire가 Reigning Phoenix Music의 자회사가 되었다.

2024년 3월 8일에 파워 메탈로의 회귀를 다시 한 번 선언한 11집 Clear Cold Beyond가 발매되었다. 이전부터 계속 지적되었던 문제들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고 전성기 시절을 연상케 하는 분위기의 빠른 템포의 곡을 많이 수록한 결과 많은 팬들에게서 8집과 동등한 또는 그보다 조금 나은 앨범이 나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가장 대세인 의견은 첫 4개 앨범과는 비교할 수 없고 7번째로 좋은 앨범이라는 것. 일각에선 돈 때문에 열정 없이 만든 것 같다거나, 소악답지 않게 멜로디가 약하다거나, 작곡이 너무 단순하고 보컬에서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등의 불만이 나오기도 했다. 그래도 팬덤 바깥이자 이번 앨범의 목표층이라 볼 수 있는 파워 메탈 서브레딧에서의 반응이 꽤 긍정적인 건 고무적이라고 볼 수 있겠다.

국내 노래방에 있는 곡으로는 TJ미디어에 Blank File(20050)과 Full Moon(20742)이 수록되어 있으며, 금영엔터테인먼트에는 Blank File(60432), Full Moon(60934), San Sebastian(60850), Weballergy(60710)이 수록되어 있다. 부르다 목나가는건 일상다반사

3. 라이브

초창기에는 라이브 실력이 영 좋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다. 다른 멤버들의 연주력에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고, 순전히 보컬인 토니 카코가 파워 메탈 밴드의 프론트맨치고 초고음을 힘겨워하는 것은 물론 라이브에서의 기복이 상당히 심했기 때문이다. EP "Successor"에 수록되어 있는 Fullmoon 라이브의 삑사리는 파워 메탈을 좀 들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하다.

보컬이 키보드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했던 1999년이나 키보디스트를 따로 구하면서 보컬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된 2000년에는FullMoon 부르다가 삑사리 낸 게 이 시절이긴 하지만 보컬이 연주 전체의 속도감을 줄일 정도는 아닌 역량을 보여줬다. 그러나 2001년경 보컬 컨디션이 독감 때문에[18] 전체적으로 나빠지면서 2003년부터 일부 곡의 보컬 음역대와 속도를 토니 카코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낮추는 고육지책을 택했다. #그놈의 독감만 아니었어도...

라이브 경험이 어느 정도 쌓인 시점인 2004년은 토니 카코의 최전성기였다고 해도 될 만큼 라이브 실력이 뛰어난 해였다. 이 시절의 라이브 공연 중 일부는 컴필레이션 앨범 "The Collection"에 보너스 트랙으로 수록되었다. 그러나 토니 카코의 전성기는 짧았다. 원래부터 목이 약했던 것인지, 아님 무리를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2000년대 후반부터 토니 카코의 고음역대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카코는 고음을 이전보다 줄이고 자신의 강점이라 할 수 있는 감정 표현과 연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토니 카코와 밴드는 이때까지만 해도 국내에서의 악명에 비해 준수한 라이브 실력을 보여줬으나 201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토니 카코의 음역대가 더욱 빠르게 줄어들었다. 결국 The Ninth Hour 월드 투어 후반에 갑자기 알 수 없는 이유로 토니의 목 상태가 완전히 맛이 가버리면서 상황이 심각해졌다. 나머지 멤버들의 연주력 자체는 쇠퇴하지 않았지만 토니가 초고음은 커녕 어렵지 않게 낼 수 있어야 하는 수준의 고음조차 버거워하고 있으니 라이브 실력을 좋게 평할 수가 없게 되어버린 것.

사태의 심각성 탓인지 밴드는 2019년부터 2022년까지 어쿠스틱 앨범을 내고 어쿠스틱 투어를 돌았다. 토니의 목은 2022년이 되어서야 조금이나마 회복된 모습을 보였다. 전성기 시절만은 못하지만 Talviyö 시절에 비하면 선녀 같은 수준. 토니 본인이 밝힌 바에 따르면 혀에 힘이 너무 들어가 성량이 줄고 고음을 낼 수 없게 되었었다고 한다.

2024년 11집을 발매한 이후의 라이브에선 11집 트랙에 한해 음원과 별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나은 라이브를 선보였다. # 다만 영상의 The Cage, FullMoon 등을 들어보면 알겠지만 전성기 시절의 곡을 2000년대 초중반처럼 부르는 건 아예 불가능해 보인다. The Cage에선 무리하게 고음을 올리다가 삑사리를 내기도 한다... 2024년 유럽 투어에서 오랜만에 "My Land"를 불렀다. 과거에 비해 역량이 많이 쇠퇴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예 못 들어줄 수준까진 안 갔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 듯. 2025년 3월 말에 있을 일본 공연에서는 San Sebastian과 Wolf & Raven을 부를 예정이다. #음역대를 얼마나 낮춰놓을지 기대된다

첫 번째 라이브 앨범인 Songs Of Silence(2002)에서는 보컬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게 확연하게 느껴지는데 결국 나중에 토니 카코가 인터뷰에서 도쿄 라이브 당시 몸상태가 안 좋았다고 밝혔다.

2005년 도쿄 라이브를 담은 라이브 앨범인 For The Sake Of Revenge(2006)에서는 훨씬 나아진 모습을 보였다. 이후 연륜이 쌓이면서 과거와 같은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세 번째 라이브 앨범 Live In Finland(2011)에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라이브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대신 믹싱이 조금 아쉽다

3.1. 보컬 역량에 관해

앞서 언급하였듯 보컬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의 연주력은 쇠퇴하지 않았다.


2016년까지의 토니 카코의 보컬 음역.

토니 카코는 2016년까지는 최소한의 수준으로는 기량을 유지했으나, 앨범 발매 이후 있었던 The Ninth Hour 월드 투어를 기점으로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만다.[19]

토니 카코의 역량이 급격하게 쇠퇴한 원인을 추측하기는 쉽다. 토니 카코 본인이 옛날부터 얘기했듯이, 그는 초창기에 티모 코티펠토를 따라하려고 했다. 코티펠토보다 기본적인 음역대가 살짝 낮은데도 말이다. 2012년 인터뷰에서 밝히길, 토니 카코는 1집을 비롯한 초창기에는 투어를 계속해서 다니고 나이를 먹다보면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달라지고 음역대가 좁아질 거라는 걸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원래 했어야 할 것보다 한 옥타브를 올려서 곡을 작곡했으며, 작곡 당시에도 스튜디오에서조차 부르기 버거웠다고 한다.

또한 토니 카코는 라이브 실력이 한창 물올랐던 시기에 유난히 라이브에서 창법에 스크래치를 자주 넣었다. 스크래치를 많이 넣은 것 자체도 문제지만 그보다 큰 문제는 그가 살면서 보컬 레슨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그간 보여준 창법이 완전히 독학의 결과물이었다는 것. 이런 창법을 자신이 버거워하는 초고음역에서 지속하려고 하니 목이 광속으로 망가져버린 듯.인터뷰에서는 목 안 망가뜨리고 오래 노래하기 위해서 언젠가는 레슨을 받아야겠다고 하는데... 결국 다 망가지고 나서야 받았다

토니 그 자신도 자기 목이 빠른 속도로 맛이 가고 있다는 걸 느끼긴 했는지, Unia부터 고음을 줄이고 서정성을 살리는 쪽으로 방향성을 바꿨으나 효과는 예정된 파멸을 조금 미루는 수준에 그쳤다. 결국 토니 카코는 2017년을 끝으로 고음역과 힘을 잃어버렸다. 이후 시간이 흐르며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Talviyö를 녹음할 때보다 나아진 것일 뿐 상태가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상황이다.휴식기를 가지는 게 차라리 나았을지도

2020년대에 들어선 목이 더 망가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 듯 창법에 스크래치를 최소화했고 적당히 힘을 뺀 채 자신이 쉽게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고음만 내고 있다.

4. 다른 밴드와의 관계

상술한 것 같이, 같은 나라 출신 밴드인 스트라토바리우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밴드의 리더이자 보컬인 토니 카코는 스트라토바리우스의 "Visions"를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 스트라토바리우스 커버도 꽤 한 듯. 라이브 앨범 Songs Of Silence에 수록된 False News Travels Fast의 뒷부분에 스트라토바리우스 노래를 이은 적이 있으며 스트라토바리우스 및 랩소디와 함께한 투어에서 스트라토바리우스 티를 입고 Black Diamond를 부르기도 했다. # 밴드 초기 라이브에서 UnOpened의 인트로를 스트라토바리우스의 Years Go By와 믹스한 적도 있다.

이외에도 많은 밴드의 곡들을 커버했다. 2000년에는 스트라토바리우스 라이브 투어의 서포트 밴드가 되어 동행하기도 했으며, 스트라토바리우스의 보컬 티모 코티펠토가 2집 Silence에 보컬로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스트라토바리우스의 앨범 Destiny의 보너스 트랙인 Cold winter night에는 소나타 악티카의 기타리스트가 참여 하기도 했다. 또한 소나타 악티카 3집앨범 Winterheart's Guild에는 스트라토바리우스의 키보디스트 옌스 요한슨이 참여한다. 이후 야니가 소나타 악티카를 나간 뒤 스트라토바리우스의 멤버들과 Cain's Offering으로 함께 협업하게 된다.

나이트위시와도 꽤 친한듯. 토니 카코가 나이트위시의 리더 투오마스 홀로파이넨과의 관계가 친밀하여 한 때 투오마스가 밴드의 방향성 문제로 고민할 때 함께 여행을 하면서 고민을 나누기도 했으며[20], 2004년과 2005년에는 같이 라이브 투어도 다니고 Symphony Of Angels란 이름의 한정판 라이브 앨범도 냈다.베이시스트/보컬인 마르코 히에탈라와는 Northern King라는 4인조 보컬 유닛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북유럽 메탈의 슈퍼스타 유닛이라는 명칭답게 상당히 고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토니 카코는 항상 이 자신의 음악적인 첫 사랑이며 (소악이 아닌 자신의) 음악성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밴드라고 인터뷰했으며, 데빈 타운센드의 팬이라고 밝힌 적도 있다.

5. 구성원

6. 디스코그래피


EP
라이브 앨범
컴필레이션 앨범
재녹음 앨범
어쿠스틱 앨범

7. 기타


[1] 2~3집 시절에 토니 카코가 인터뷰에서 자신들을 파워 메탈 밴드보단 멜로딕 메탈 밴드로 생각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2005년에는 자신들의 음악은 파워 메탈보단 빠르게 편곡된 하드 록 또는 팝 록 메탈에 가깝다고 말하기도 했다. 2010년에는 밴드는 자신들의 음악을 멜로딕 록이라고 부른다고 말했으며 의도적으로 락에 가까운 음악을 했던 7집 시절에는 자신이 정할 수 있다면 밴드의 장르를 멜로딕 헤비 락이라고 하고 싶다고 했다. 8집에 이어 또 다시 파워 메탈로 회귀한 11집 발매를 앞두고 진행된 인터뷰에서는 드래곤포스가 하는 '엄청나게 빠르고 격렬한' 파워 메탈에 비하면 자신들은 옛날부터 파워 메탈이 아닌 축에 속했으며 토니 본인은 소나타 악티카를 파워 메탈 밴드보단 멜로딕 메탈 밴드에 가깝게 여긴다는 것을 밝혔다.[2] 국내 라이센스반에선 주로 "소나타 아티카"로 표기되었으나 실제 발음은 소나타 알티카 내지는 악티카에 가깝다.[가입시점] 토니 카코는 밴드 공식 홈페이지 프로필에서 자신이 1996년에 합류한 원년 멤버라고 밝혔다. 이상한 건 8집 시절 출간된 책에서 토니와 같은 시기에 들어왔다고 언급된 토미가 자신은 1995년 11월쯤 밴드에 합류했다고 말했다는 것. 아마 '합류 의사를 표한 게' 아직 병역 의무를 수행중이던 1995년 11월~12월쯤이고 실질적으로 합류한 시점은 전역한 후인 1996년인 게 아닌가 싶다. 토미 포르티모는 자신이 1995년 11월쯤 합류했다고 하나, 8집 시절에 출간된 책에는 1995년 12월 20일에 있었던 밴드의 첫 연습은 보컬과 드러머가 없는 상태로 진행됐으며 토미가 토니 카코와 같은 시기에 합류했다고 적혀있다. 토미의 기억과 Sonata Arctica Book에 적힌 정보 모두 오류가 없다고 가정한다면 토미 포르티모가 합류 의사를 표한 게 1995년 11월이고 실질적으로 밴드의 일원이 된 건 1995년 12월 말 ~ 1996년 초인 듯.[가입시점] [5] 1집 FullMoon, 2집 Wolf & Raven, 3집 The Cage, 4집 Ain't Your Fairytale, 5집 It Won't Fade(토니가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이 곡은 야니와의 불화를 소재로 한 곡이기도 하다.) 및 The Vice, 6집 The Last Amazing Grays 및 In My Eyes You're A Giant, 8집 Blood, 9집 Among the Shooting Stars, 10집 Message From the Sun 및 The Raven Still Flies With You.[6] "Letter To Dana", "Shy", "The End of This Chapter", "Don't Say a Word" 등. 2024년 싱글 "Dark Empath" 발표 당시 토니 본인이 밝힌 것에 따르면 작사하기 재미있는 주제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7] 다만 토니 카코를 비롯한 멤버들은 자신들의 음악은 파워 메탈도, 프로그레시브 메탈도 아닌 멜로딕 메탈(멜로딕 헤비 락) 내지는 빠르게 편곡한 하드 록이라고 생각하였듯, 항상 멜로디와 서정성이 강조된 하드 록을 작곡하되 편곡의 중심을 파워 메탈에서 프로그레시브 메탈로, 프록에서 (어찌 보면 진짜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하드 록으로 변경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작곡 자체는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지만 편곡 방식이 전성기 시절과 달라지고 토니 카코 본인이 점점 늙어가면서 음역대가 줄어듦은 물론 취향이 밝고 부드러운 쪽으로 변해감에 따라 대부분의 팬들에게 약빨이 먹히지 않게 된 것이다.[8] 당시엔 기타리스트였다.[9] 2001년 토니 카코는 인터뷰에서 과거 밴드의 자작곡이었던 "Tricky Beans"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했으나 8집 시절에 출간된 책에서 마르코 파시코스키가 한 말에 따르면 토니의 유두(...)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토니가 자신의 젖꼭지를 잡으면서 Tricky Beans라고 했다고...[10] 미국의 얼터너티브 록 밴드이다.[11] 밴드의 프론트맨인 토니 카코는 본래 스트라토바리우스의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Visions를 듣고 마음을 바꿨다.[12] 토미 포르티모에 따르면 타르야 투루넨이 게스트로 참여할 곡은 "My Land"였다. 다만 얘기만 나왔을 뿐 확정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기사를 본 토미의 친구들이 타르야에게 친구의 앨범에 게스트로 참여해 주기로 해서 너무 기쁘다고 하자 타르야가 당황했다고.[13]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나 관련자들이 추측하기론 아마도 샘플 레이트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고 한다. 이 실수 덕분에 UnOpened의 초판본은 수집가들이 구하려고 애쓰는 물건이 되었다.[밴드의입장] 토니 카코의 인터뷰에 따르면 본인들이 30줄일 당시 과도하게 길었던 Reckoning Night 투어 이후로 모든 힘을 다 써버린 것처럼 느껴져 더 이상 20대처럼 젊었을 때 체력을 갖고 미친 듯이 노래할 수 없겠다고 느껴 음역을 낮췄다고 한다. 7집 시절인 2012년 인터뷰에서는 한 가지 음악만 하는 것을 지루하게 느끼기 때문에 계속 노선을 바꾸고 있는 것이라는 걸 똑같은 음악만 계속 하는 밴드는 쉽게 질린다는 식으로 간접적으로 밝혔고 9집 시절의 인터뷰에선 자신들만의 음악을 하는 대신 스트라토바리우스를 따라하려고 한 게 가장 후회스럽다는 걸 암시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래도 당시엔 그렇게 '뇌를 빼놓고 만든 것 같은 빠른 파워 메탈'을 작곡하는 게 재미있었다는 듯.[15] 다만 소나타 악티카 본인들에게는 정말 억울한 비판인데, 자기들과 계약한 일본 쪽 레이블 'アヴァロン・レーベル(아발론 레이블, Avalon Label)'이 원곡들과 똑같은 연주를 해서 리메이크한 곡을 재발매하라고 강권해서 밴드에서 재해석할 권한도 없이 발매한 것이라고 한다. 이는 80년 이후 쇠퇴해서 유럽에서조차 부업을 해야 밥벌이를 해먹고 살 정도의 밴드가 대부분이 되어버린 메탈 음악 시장의 음악인들이 일거리를 거절할 여지가 부족한 환경으로 인해 부득이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16] 해당 팬 리마스터 버전은 2024년 기준으로 대부분이 저작권 문제로 내려간 상태다.[17] 사실 보컬 역량은 The Ninth Hour 월드 투어 후반부터 급격하게 쇠락하고 있었는데, Talviyö 이전에는 그게 수면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18] 우습게 보면 안 되는 것이, 독감은 일반 감기와 달리 호흡기에 지대한 손상을 입히며, 위산 역류, 구토, 호흡기 질환 등의 몸이나 목이 아픈 것은 성대에 무리가 가게 하는 치명적인 질환이 된다. 당장 독감, 성대, 보컬에 대한 단어를 영어로 연관지어 검색하면 독감, 위산 역류, 구토가 치명적이라고 수도 없이 강조하는 자료가 대부분이다.[19] 다만 토니 카코의 보컬 역량이 쇠퇴하였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전성기 시절에 소나타 악티카에서 보여주었던 고음 위주의 파워 메탈 기준에서고, 카코 본인의 솔로 프로젝트인 힘멜크라프트의 곡들처럼 중저음이 중심이 될 때는 여전히 준수한 모습을 보인다.[20] 이 때 투오마스는 기타리스트 엠푸의 불만과 베이시스트 사미 반스카의 성실성 문제로 인해 밴드 활동을 힘들어했으며 Wishmaster 투어를 마치고 나이트위시를 해체할까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나 토니 카코와 여행을 다녀온 뒤 밴드 활동을 계속하기로 다짐하여 베이시스트를 마르코 히에탈라로 교체하고 보다 헤비한 사운드로 Century Child를 발매하여 성공가도를 달리게 된다.[21] 1집 시절에는 라이브 공연을 할 때 키보드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불렀으나 미코 하르킨의 합류를 기점으로 라이브에선 키보드를 연주하지 않는다.[가입시점] [23] 이때부터 노래다운 노래를 작곡하기 시작했고 작곡가로서의 자신을 발전시켰다고 한다. 여기서 프로그레시브 록 음악을 연주하기도 했다고.[24] 원래는 힘멜크라프트가 자신의 밴드라는 것을 비밀로 하고 싶어 했으나 레이블에서 그러면 앨범을 홍보할 수가 없다며 설득한 끝에 자신의 이름만은 공개하기로 했다.[가입시점] [26] 엄마가 비싼 드럼 세트가 망가질까봐 그걸 연습실로 옮기지 못하게 막았다고(...) 한다.[27] 단, 10집 Talviyö와 어쿠스틱 어드벤처 1 & 2는 파시 혼자서 믹싱한 게 아니며 Mikko Tegelman과 협업했다.[28] 4집의 "My Selene".[29] 본인의 성격이 원래 말수가 적고 개인사를 털어놓고 싶어하지 않는 성격이다보니 다른 멤버들이 그를 도우려했을 때 연락을 끊고 잠적해버리는 등 다른 멤버들을 존중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이 성격은 탈퇴 이후 활동에서도 발목을 잡아 2024년 2월, 소악에서와 똑같은 이유로 Insomnium에서 방출당하고 말았으며 아네트 올존과의 The Dark Element 3집 제작에도 문제가 생겼다. 아네트 올존은 3집 제작에 긍정적이지만 야니가 연락을 아예 받아주지 않고 있다.[30] 토미의 회상에 따르면 재결합을 제안했을 당시 마르코가 '그때(밴드를 탈퇴한 때)는 내가 미쳤었나보다'라고 했다고.[31] 마르코가 호텔 로비에 1시간 일찍 왔음에도 그냥 자기 방으로 가버려 다른 멤버들을 약 25분간 기다리게 한 것에 대해 사과하길 거부한 순간 본격적인 갈등이 시작됐다. 당시 마르코가 상습적으로 지각하는 것에 환멸감을 느낀 토니는 진심으로 소악을 떠나는 것을 고려하며 마르코에게 '네가 밴드를 나가는 게 맞겠냐, 아니면 내가 나가는 게 맞겠냐'고 물었다고 한다.[32] 2집의 "The End Of This Chapter"의 후속곡으로 스토커 테마의 케일럽 사가(Caleb Saga)의 일부이다. Sonata Arctica 공식 책에 적힌 내용에 따르면 야니가 소악 역사상 최고의 노래라고 생각하는 곡이다. 토니는 4집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소악의 대표적인 명곡 중 하나로 생각한다고.[33] 야니가 소나타 악티카에서 작곡 및 작사한 유일한 곡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달의 여신 셀레네와 그녀의 연인 엔디미온에 대한 곡이다.[34] "The EP("Don't Say a Word") was also released in Japan September 22, at the same time when Korea was first to release the Reckoning Night album."[35] 과거 토니 카코가 인터뷰에서 밝힌 것에 따르면 5집의 늑대 노래이자 야니 리마타이넨을 저격하는과의 일에 대한 곡이다.[36] 덕분에 이 앨범을 계기로 프로그레시브 메탈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이 앨범은 프로그레시브 메탈 팬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갈리는 편인데, Sonata Arctica Book에서 야니가 지적했듯이 곡들 간의 유기성이 떨어지며, 세세한 부분들이 프로그레시브 메탈에서 주로 볼 수 있는 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기 때문. 그렇다보니 Prog Archives에 등재 요청이 두 번 올라왔을 때 한 번은 프록의 영향을 받은 앨범일지는 몰라도 프록 메탈 앨범이라기엔 모든 곡이 100% 프록인 게 아니라서 거절당했고, 또 한 번은 5명 중 세 명의 반대로 "이건 프로그레시브 메탈이 아니다"라는 결론과 함께 기각되었다.[37] 토니 카코도 이 앨범을 통해 음악성을 바꾸면서 더욱 큰 밴드가 될 수 있었던 기회를 날려버린 게 후회스럽기는 한지 2024년에 Unia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 앨범을 내기보단 그냥 휴식기를 가지면서 솔로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게 더 현명한 행동이지 않았을까 싶다는 뉘앙스의 발언을 한 적이 있다. #[38] 트리키 빈스 시절 데모 곡 "BlackOut"을 리메이크한 곡이다. 원곡인 BlackOut은 정전 탓에 텔레비전이 꺼지는 바람에 좋아하는 여성이 출연하는 TV 쇼를 못 보게 되자 절규하는(...) 내용이다.[39] 밴드 공식 책에 담긴 내용에 따르면 원래는 헤비사우르스에게 줄 생각으로 만든 곡이었으며 가사도 익룡에 대한 것이었다고 한다.[40] 8집의 'Take One Breath', 9집의 'Fly, Navigate, Communicate'와 더불어 원래는 토니의 솔로 앨범을 위해 만들어진 곡이었다. 소나타 악티카의 곡들 중 손 꼽히게 헤비한 곡이다.[41] 처음에는 보너스 트랙일 예정이었으며 빠른 속도의 파워 메탈 곡이었으나 나중에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바꿨다고 한다.[42] 파시는 이전부터 믹싱 엔지니어로서도 활동했던 인물로 2011년 라이브 앨범 "Live In Finland"의 믹싱을 담당한 것이 바로 그이다.[43] 11집 발매를 앞두고 진행된 인터뷰에서 Talviyö 녹음 당시 보컬에 많은 문제를 겪고 있었다는 걸 밝혔는데, 성대 결절 같은 질병이 있었던 건 아니고 혀에 힘이 너무 들어가서 성량이 부족해지고 고음을 내기가 어려운 문제가 생겼었다고 한다. #[44] 아시아판 앨범 커버에 욱일기가 그려져있어 음악 외적으로 논란이 될 만한 일을 만들지 않던 소나타 악티카의 유일한 오점으로 여겨진다.[45] DVD판은 3월 31일 발매.[46] 토니 카코의 말에 따르면 앨범 내 수록곡의 이름이 아닌 것을 앨범명으로 삼고 싶었기에 직접 사전을 뒤져가면서 흥미로운 단어를 찾았다고 한다. 덕분에 "소나타 악티카 이클립티카"라는 발음하기 까다로운 이름을 지을 수 있었다고.[47] The End of This Chapter(2집), Don't Say a Word(4집), Caleb(5집), Juliet(6집), Till Death's Done Us Apart(9집), The Last of the Lambs(10집), Dark Empath(11집)가 여기에 속한다. 케일럽 사가는 인터뷰에서 토니가 13일의 금요일 시리즈 같은 옴니버스물에 가깝다고 밝힌 적이 있으며 11집의 세 번째 싱글인 "Dark Empath" 공개 당시에도 사건 발생순으로 이어지는 연속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똑같은 스토커 테마를 공유하는 곡들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