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g Takeover 배드 브레인즈 (1982) | Rise Above 블랙 플래그 (1981) |
New Direction 고릴라 비스킷 (1989) | Hard Times 크로-맥스 (19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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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드코어 펑크 (Hardcore Punk)는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에 걸쳐 형성된 펑크 록를 기반으로 한 음악 장르이자 언더그라운드 무브먼트를 의미한다. 음악 장르와 함께 무브먼트라고 한 이유는, 이것이 음악 장르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커뮤니티 방식을 부르는 면도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나 음악적으로 급진성을 내세웠고 폐쇄적인 커뮤니티 안에서 번식했다.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 국내 음악 평론가들[1]의 무지에 의해 뉴 메탈과 동일시되는 오해를 사기도 했지만 직접적인 관련성은 적다.
1.1. 음악적인 부분
음악적으로는 보다 강하고 빠른 무시무시한 공격성의 펑크라고 보면 어느 정도 맞다. 모든 음악은 클럽에 모인 모두가 함께 울부짖고 외치기 위해 가사가 단순하고 선동적이며, 자신의 내면적, 정치적, 사회적, 개인적인 메시지, 인생 방식을 주 내용으로 삼아 강하게 어필한다. 원래는 빠르게 달리는 면에 집중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쿵쿵 하는 식으로 낮고 무거운 박자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는데 이는 브레이크다운, 또는 빗다운이라고 주로 불렸다. 이러한 음악적 특성은 나중에 뉴 메탈 쪽에도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나중에 콘이나 림프 비즈킷 등의 밴드가 하드코어라는 소리가 나오는 개드립의 구실이 되었다.백인들이 (악기를 가지고) 하는 힙합이라는 비유를 쓸 수도 있을 것이다.[2] 랩을 한다는 게 아니라, 음악이 가지는 문화적 상징성 차원에서 말이다. 참고로 백인 힙합 그룹인 비스티 보이즈는 원래 하드코어 펑크 밴드로 출발했다. [3]
여러 장르에 영향을 받거나 영향을 주어, 수많은 하위 장르를 탄생시켰다. 대표적으로 헤비 메탈이 하드코어 펑크에 영향을 받아 탄생한 것이 스래시 메탈이다. 반대로 하드코어 펑크가 메탈에 영향을 받아 만들어 진 것이 메탈코어다. 그리고 하드코어 펑크가 더 과격하게 변한 크러스트 펑크, 거기서 극단적으로 변한 그라인드코어가 있다. 사실 잘 따져보면 포스트 록부터 얼터너티브 록, 매스 록, 노이즈 록, 그리고 이모까지, 현대의 록 음악 역사에 알게 모르게 크고 작은 수많은 영향을 준 장르이기도 하다. 팝 펑크의 직접적인 뿌리도 하드코어이다.
다만 음악적으로는 단순한데다 좁은 커뮤니티 때문에 세를 넓히는데는 힘들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었으며, 결국 1980년대 중반 여러 사건들이 겹치면서 서서히 영향력이 축소되었다. 밴드 대부분이 단명했으며, 마이너 스렛은 하드코어를 그만두고 후속 밴드 푸가지를 통해 포스트-하드코어로 장르를 갈아타는 등 일부는 음악 활동을 이어가기도 했다. 하지만 원조 하드코어 밴드들이 끝날 무렵인 1980년대 중반부터 다른 지역에서 다른 성향으로 하드코어를 이어가는 흐름을 끝없이 나왔고, 그 덕에 상업적 성공을 이뤘는지, 또는 문화적으로 큰 영향력을 끼치는지 아닌지 여부와 상관없이 현재까지도 하드코어는 죽지 않고 이어져오고 있다.
1.2. 커뮤니티적인 부분
수많은 마이너한 음악 장르를 포함하여 어느 서브컬처가 다 그렇듯이, 하드코어 펑크도 비주류라는 특성 때문에 안으로 뭉치고 힘을 합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하드코어 밴드와 리스너들은 서로를 가족으로 여기며 세계 그 어느 곳에 있더라도 하드코어라는 카테고리 하나로 동질감을 느끼고 연대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그런 정신을 브라더후드/시스터후드라고 부른다. 그런 정신을 기반으로 하기에 모두가 서로가 서로에게 친구고 동지처럼 여기기도 한다. 따라서 개런티 없이 해외로 자비로 날아가서 공연하는 경우도 잦고, 인종이 다르고 국가가 달라도 같은 레이블에서 음반을 낸다든지, 같은 세계의 사는 자들끼리의 교류가 깊다.
이런 클럽 우선주의 식의 분위기 특성상 하드코어 밴드는 죽었다 깨나도 메이저로 갈 수가 없으며, 메이저로 가는 식의 사고방식도 그들에게 존재할 수가 없다. 예나 지금이나 '셀아웃', 그러니까 변절자들에 대한 경계가 극도로 심하다.
이런 면은 70년대 런던 펑크 때부터 있었던 부분이긴 하다. 하지만 80년대 메이저 락 시장이 팝 메탈과 스래시 메탈이 주류가 되자, 자리를 잃은 펑크 록 밴드들이 언더그라운드로 들어가면서 서로 의지하며 동질감을 형성하다 보니 하나의 커다란 커뮤니티가 생성된 것이다.
한편 이런 커뮤니티 속에서도 이단적인 밴드들이 출연하기도 했다. 비트 해프닝은 하드코어 팬덤에서 출발했지만 이내 독자적인 노선을 개척한 케이스다.
2. 변천사
하드코어 펑크의 역사는 특정 지역의 씬을 중심으로 특정한 성향의 하드코어가 발전한 사례가 많다. 위에서 설명했듯 좁은 커뮤니티 안에서 성정한 음악이기 때문에, 특정 지역 씬에서 보이는 지역색이 강하다. 그래서 시간적 흐름에 따라 서술하되, 특정 지역들을 중심으로 서술하기로 한다.2.1. 80년대
70년대 미국과 영국 각각에서 여러 펑크 록 밴드들이 큰 인기를 끌었고, 어느 록 음악 장르의 역사에서 그렇듯 이는 '더 빠르고, 더 과격하고, 더 시끄럽게' 만들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이러한 시도는 빛을 발해 70년대 말에 하드코어 펑크를 탄생시켰는데, 이 시기에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하드코어가 등장한 곳으로 여겨지는 장소는 크게 2군데로, 하나는 미국 서부 해안의 캘리포니아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 동부 해안의 워싱턴 D.C.이다.보통 이렇게 두 지역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지만, 캐나다 밴쿠버의 D.O.A. 또한 비슷한 시기에 하드코어 펑크를 들고 나와서 창시자 중 하나로 여겨진다. 이들의 1981년도 앨범 Hardcore '81은 하드코어라는 장르 이름이 생긴 이유로 추정된다.
2.1.1. 하드코어 펑크의 시작, 워싱턴 D.C.
배드 브레인스의 1982년 뉴욕 CBGB에서의 라이브.[4]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이미 이 시기부터 모슁이나 스테이지 다이브 같은 과격한 하드코어 공연의 관객 문화가 완성되어 있었다.
워싱턴 D.C.의 경우 배드 브레인스가 등장하면서, DC 뿐만 아니라 동부 해안 전체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배드 브레인스의 경우 캘리포니아 밴드들에 비하면 펑크 록의 잔재를 완전히 떨쳐내버리고 '하드코어'라는 장르만의 성향을 정립한다. 배드 브레인스는 영상에서 볼 수 있듯 전 멤버가 흑인이었으며, 흑인으로서의 정체성 때문인지 래스터패리교에 심취하였고 종교의 사상이나 정신을 음악에 담기도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성향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하드코어에 레게나 덥을 점점 더해갔다.
그렇지만 배드 브레인스가 초창기에 보여준 음악은 그 어떤 예전의 펑크 록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강렬함이 있었고, 특히 빠르게 달리다가 박자가 바뀌며 느리고 무겁게 변하는 부분은 이후 하드코어의 음악적 특징의 핵심인 브레이크다운의 시초와도 같다. 래스터패리교의 정신과는 별개로, 그들의 곡 Attitude에서 전한 '긍정적인 마음의 태도(PMA, Postive Mental Attitude의 줄임말)' 또한 이후의 많은 밴드들에 사상적인 영향을 주었다.
배드 브레인스와 함께 워싱턴 DC 씬을 상징하는 밴드로는 마이너 쓰레트가 있다. 당시 십대 후반이었던 이안 맥카이(Ian Mackaye)가 이끌었던 이 밴드는, 대표곡 Straight Edge에서 약물에 의존하지 않고 똑바로 살아간다는 메시지를 전달했고, 이는 하드코어 씬 내의 가장 큰 문화 중 하나인 스트레이트 엣지를 탄생시킨다.[5] 스트레이트 엣지란 마이너 쓰레트의 메시지처럼 술, 담배, 마약, 그리고 기타 자기파괴적인 행동을 하지 않고 맨정신으로 똑바로 생각하면서 살아간다는 뜻으로, 이후 미국 전역과 전 세계에 급속도로 전파되어 하나의 무브먼트를 이룬다.[6][7] 스트레이트 엣지 외에도, 마이너 쓰레트는 빠르게 쿵딱쿵딱 달리는 리듬으로 1분 내외의 짧은 시간에 모든 것을 폭발시켜버리는, 하드코어라는 이름에 걸맞은 음악을 들려주며 선구자 역할을 확실히 했다.
마이너 쓰레트의 리더 이안 맥카이와 기타리스트 제프 넬슨은 어떤 음반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본인들의 음반을 직접 내기 위해 디스코드 레코드(Dischord Records)를 직접 설립했고, 이는 현재까지 운영 중이다. 후술할 80년대 중반 DC의 포스트-하드코어 밴드들의 음반도 여기서 나왔고, 이안 맥카이가 이끈 90년대 인디 록의 영웅 푸가지의 모든 음반도 여기서 나왔다. 그 외에도 Lungfish, The Nation of Ulysses, Jawbox, The Make-Up, Q and Not U, Black Eyes 등등 DC 지역 내 여러 걸출한 하드코어/포스트-하드코어 밴드들을 오늘날까지도 발굴해오고 있다.
1982년 디스코드 레코드에서 나온 더 페이스와 보이드의 스플릿 앨범[8] 또한 DC 하드코어 씬의 주요 명반으로 손꼽힌다. 더 페이스는 (이후에 DC 하드코어에서 자주 보이는) 미묘한 멜로디 센스가 특징이고, 보이드는 당시 다른 밴드들과 비교하면 좀 더 빠르고 과격한 매력의 하드코어를 들려주었다.
2.1.2. 또 다른 발생지, 캘리포니아
블랙 플래그의 1980년도 라이브. 이 때는 밴드를 상징하는 보컬리스트 헨리 롤린스가 아니라, 론 레예스였다.[9] 해당 영상은 80년대 초 캘리포니아 하드코어 씬을 다룬 다큐멘터리 '서부 문명의 몰락(The Decline of Western Civilization)'에 나오는 장면이다. 캘리포니아의 경우 영상에 나오는 블랙 플래그 뿐만 아니라 더 점스, 그리고 미들 클래스[10] 등의 밴드들이 80년대에 들어서기 전인 70년대 후반부터 펑크 록의 뿌리에 충실하면서도 좀 더 거칠고 시끄럽게 만들려는 시도를 했다. 블랙 플래그의 활동에 대해 자세한 내용을 읽고 싶다면 밴드 항목을 참조.
블랙 플래그의 보컬 중 한 명이었던 키스 모리스는 탈퇴 후 자신의 밴드 서클 저크를 시작하고, 이 또한 지역 대표 하드코어 펑크 밴드 중 하나.[11]
로스앤젤레스를 중심으로 한 남부 캘리포니아에 블랙 플래그가 있었다면,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한 북부 캘리포니아에는 데드 케네디스가 있었다. 데드 케네디스는 처음에는 완전한 하드코어라고 말할 수는 없는 펑크 록에 가까웠으나, 활동하며 하드코어로 거듭나게 된다. 프론트맨 젤로 비아프라[12]의 풍자적으로 막 지껄이는 듯한 개성적인 보컬은 강한 인상을 주었다. 그들은 그 어떤 밴드들보다 강한 과격 좌익 정치 사상으로 무장했었고, 현대 대중문화의 상업성을 극도로 경계하며 자신들만의 레이블을 세워 활동하는 등 비타협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이들의 대표곡인 Nazi Punk Fuck Off는 이후 펑크 밴드들이
캘리포니아에서 빼놓으면 안 될 하드코어 펑크 밴드 중 하나가 디센던츠(Descendents)로, 심각하고 진지한 분위기의 하드코어 밴드들 사이에서 이상하리만큼 가볍고 즐거운 분위기의 하드코어를 들려주었고 가사 또한 사랑 타령이나 개인적인 잡소리를 담아서 상당히 튀는 존재가 되었다. 1982년 나온 1집 Milo Goes to College는 비슷비슷한 성향의 밴드가 가득했던 당시 하드코어 씬의 음반들 중에서 강한 개성을 뽐냈고, 이 덕에 밴드는 인기를 얻는다. 밴드의 앨범 표지는 항상 보컬 밀로 아커만(Milo Aukerman)을 캐릭터로 재밌게 그려놓은 밴드의 마스코트이다.[13] 이렇게 하드코어 펑크를 좀 더 대중적이고 즐길 수 있게 다듬으려 한 노력이 바로 팝 펑크를 낳는 뿌리가 된다.
디센던츠 외에도, 배드 릴리전과 소셜 디스토션[14]도 하드코어를 개성적으로 다듬어서 이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두 밴드 모두 원래는 거친 하드코어 펑크를 연주했다. 배드 릴리전은 진지한 정치/사회적 메시지[15]를 담으면서도, 연주와 보컬라인 전부에서 풍부한 멜로디와 화음을 적극 이용하여 훨씬 멜로딕한 하드코어를 발전시켰다. 이렇게 빠르면서도 멜로디 라인이 살아있는 하드코어를 '스케이트 펑크'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서 90년대에 팝 펑크와 함께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다. 소셜 디스토션은 하드코어에 로커빌리와 컨트리 뮤직의 요소를 대폭 수용하여 '카우펑크(Cowpunk)'라는 독자적인 하위 장르를 만들었다.
디센던츠, 배드 릴리전, 소셜 디스토션 등의 캘리포니아 지역 밴드들이 깔아놓은 '멜로디 가득한 하드코어 펑크'의 음악적 씨앗은, 90년대에 같은 지역인 캘리포니아를 기반으로 한 그린데이와 오프스프링, blink-182 등이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두며 이루어낸 팝 펑크 유행의 뿌리가 되었다.
70년대 후반부터 캘리포니아에서는 스케이트보드의 인기가 점점 더 높아지고 있었다. 수어사이덜 텐덴시즈(Suicidal Tendencies)는 이러한 스케이트보드 문화를 하드코어와 접목시킨 첫 주자이다. 밴드는 뮤직 비디오나 여러 매체 노출에서 끊임없이 스케이트보드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고, 스케이트보드를 즐기는 사람들도 점점 하드코어와 펑크를 좋아하게 되었다. 스케이트보드 문화는 록 음악, 특히 펑크 록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를 이루고 있는데
이후 밴드는 좀 더 발전한 연주과 작곡력을 갖추고 스래시 메탈의 음악적 요소를 대거 받아들였는데, 이렇게 '스래시 메탈과 하드코어 펑크'의 조합으로 탄생한 하위 장르를 크로스오버 스래시라고 한다.[16] 이 외에도 캘리포니아의 대표적인 크로스오버 스래시 밴드들로는 D.R.I.[17]와 Cryptic Slaughter 등이 있다.[18]
2.1.3. 보스턴 하드코어
상단에 서술했듯 마이너 쓰레트에 의해 시작된 스트레이트 엣지는 전국으로 전파되었는데, 이때 그 바통을 바로 건네받은 곳이 매사추세츠 주의 보스턴이다. '보스턴 크루'라고 스스로를 부르는 이들은
이 시기의 보스턴 하드코어 씬은 80년대 초에 등장한 캘리포니아와 DC 지역의 밴드들과 시간 차가 얼마 나지 않지만, 그 사이에도 하드코어를 좀 더 과격하고 격렬하게 발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밴드들로는 SS 디컨트롤, DYS, 네거티브 FX, 갱 그린, 그리고 Jerry's Kid 등이 있다. 이들이 82년에 다 같이 발표한 합동 컴필레이션 앨범인 This Is Boston, Not LA는 이 시기 보스턴 씬을 한 번에 담고 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상당수는 엣지를 포기하고 일반인으로 돌아갔으며, SS 디컨트롤이나 갱 그린 같은 밴드들은 하드코어를 버리고 그 당시 유행하던 하드 록 같은 음악으로 변절해버리면서 악명 높은 보스턴 크루도 사라지게 된다.
보스턴은 80년대와 90년대를 거쳐 현재까지도 미국에서 하드코어의 명소로 손꼽히는 곳이다. 특히 훌륭한 스트레이트 엣지 하드코어 밴드들이 거듭해서 나오며 보스턴 스트레이트 엣지라는 간판을 이어가고 있다.
2.1.4. 미국의 다른 지역들
이렇듯 하드코어 펑크는 특정 지역에서 특정한 성향의 밴드가 다 같이 나오는, 어떠한 단체적인 흐름 같은 느낌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그 어떤 흐름에도 안 속하고 독보적인 개성을 자랑하는 밴드가 있었으니, 바로 미스피츠였다. 공포 영화를 테마로 한 컨셉(화장, 가사 등등)을 내세워서는 하드코어 펑크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빠르고 과격하게 연주했으나, 또 독특하게 옛날 미국 팝 음악을 연상시키는 고전적인 멜로디 라인을 갖춘, 역사를 통틀어 비슷한 그 어느 밴드도 없는 독보적인 개성이었다.[19] 뉴저지 출신인 이들은 다른 지역 씬의 밴드들과는 달리 딱히 지역색이 강한 씬에 소속되어 있지도 않았다.
이들은 단순히 유명한 하드코어 펑크 밴드를 넘어, 미국 80년대 대중문화 전반에서 눈에 띄는 아이콘으로 현재까지 기억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미스피츠 밴드 항목으로.
미시건 주 디트로이트에서도 하드코어 펑크 씬이 생겨났고, 이 지역의 자랑으로는 네거티브 어프로치(Negative Approach)가 있다. 그들이 발표한 동명의 EP는 80년대 초 하드코어 펑크 황금기의 명작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명작으로, 하드코어 펑크에 관심이 있다면 꼭 들어볼 필요가 있다. 소닉 유스의 서스턴 무어는 "80년대 초 디트로이트 하드코어 씬은 미국 펑크 전체에서 진정한 중심점"이라고 표현했다. 한편 네바다 주 리노에서는 7 Seconds라는 밴드가 나왔는데, 이들은 더욱 과격하고 무서운 음악을 하려 했던 전반적인 경향과는 달리, 밝고 긍정적인 멜로디와 분위기를 하드코어에 더하려 했다. 이러한 성향은 후술할 유스 크루나 스트레이트 엣지 하드코어 밴드들에 큰 영향을 준다.
2.1.5. 포스트 하드코어로의 진화
마이너 쓰레트는 1980년대에 활동을 시작했지만 3년만인 1983년에 해산하게 되는데, 이는 갈수록 심해지는 하드코어 씬의 배타성과 폭력성에 리더 이안 맥카이가 지친 탓이었다. 그는 자신이 시작한 스트레이트 엣지가 점점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지는 걸 보고 이를 바로잡으려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었다.[20] 거듭된 불상사에 그는 하드코어 씬에 염증을 느끼고 하드코어를 떠나게 된다. 거기다 배드 브레인스까지 장소를 뉴욕으로 옮기면서, 세상에서 가장 먼저 하드코어를 시작했던 워싱턴 DC 씬은 그렇게 끝나게 된다.그 사이 미국의 다른 지역에서는 하드코어를 좀 더 음악적으로 발전시키려는 시도가 점점 등장한다. 이러한 움직임을 포스트 하드코어라고 한다. 대표적인 밴드들로는 허스커 두나 미니트맨(밴드) , Saccharine Trust 등등이 있다. 블랙 플래그의 기타리스트 그렉 진이 본인들의 음반을 내기 위해 시작한 독립 음반사인 SST 레코드에서 이런 밴드들을 발굴해서 발표했다. 포스트-하드코어가 들려준 거친 사운드로 포장한 감수성은 얼터너티브 록 등 수많은 인디 록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현재는 포스트-하드코어라는 용어가 좀 더 대중적인 보컬이 있는 멜로딕 메탈코어 밴드들을 가르키는 용어로 더 많이 쓰이고 있지만, 원래 포스트-하드코어라는 용어는 말 그대로 하드코어 이후의 하드코어, 즉 기존의 하드코어의 음악적 영역을 뛰어넘는 시도를 한 하드코어를 가리킬 때 쓰는 용어이다. 그러한 음악적 시도로는 (밴드마다 특색이 다양하지만) 예를 들면 감성적인 멜로디, 복잡한 박자 변화와 곡 구성 등이 있고, 기존 하드코어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요소였다.
80년대 초반의 1세대 하드코어 흐름과 더불어, 80년대 중반의 포스트-하드코어 흐름은 전 세계의 인디 록에 가늠할 수 없는 수준의 영향을 주었다. 과격하게 폭발하는 감성을 들려준 밴드들은 얼터너티브 록에, 소음에 가까운 신기한 기타 연주를 들려준 밴드들은 노이즈 록에, 박자를 갖고 노는 시도를 했던 밴드들은 매스 록에, 이러한 온갖 시도를 합쳐 록 음악을 한 차원 높이려고 했던 포스트 록까지...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과 데이브 그롤, 소닉 유스, 슬린트, 스티브 알비니 등등 뮤지션들은 하드코어를 엄청 좋아했고, 그래서 몇몇은 이를 음악적 바탕으로 삼았다.[21]
얼마 있지 않아, 1980년대 중반 워싱턴 DC에서는 새로운 성향의 밴드들이 많이 등장하게 된다. 이들은 좀 더 개인적인 감정을 담은 내용의 가사를 썼고, 음악도 거기에 맞게 좀 더 멜로디가 중시하고 감성적인 음악을 선보인다. 이 때의 밴드들로는 이안 맥카이가 마이너 쓰레트 이후 시작한 엠브레이스나 라이츠 오브 스프링, 댁 나스티 등이 있으며, 이들은 이후 등장할 이모의 시초로 여겨진다.[22] 이 시기 DC 밴드들을 가르키는 레볼루션 서머(Revolution Summer)라는 용어가 있다. 기존의 하드코어 씬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음악 내적으로나 음악 외적으로나 하드코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혁명적인 시도를 한 밴드들이라는 뜻이다.
이안 맥카이를 중심으로 이러한 밴드 멤버들이 뭉쳐서 만든 DC씬 포스트-하드코어 슈퍼밴드가 바로 푸가지. 푸가지는 90년대 언더그라운드/인디 록의 영웅으로 성장한다.
2.1.6. 뉴욕 하드코어
애그노스틱 프론트의 1988년 뉴욕 CBGB에서의 라이브. 중간에 보컬 로저 미렛이 마이크를 넘기는 어린 소년은 당시 13살이었던 그의 동생 프레디로, 이후 매드볼에서 보컬을 맡으며 뉴욕 하드코어 씬의 행동대장이 된다.
배드 브레인스가 뉴욕으로 활동지를 옮긴 이후로, 그곳에서 그들을 보고 영감을 받은 이들이 하드코어 밴드를 시작한다. 원래 뉴욕에도 하드코어 펑크를 연주하는 밴드가 얼마든지 있었으나, 배드 브레인스의 이사 이후 폭발적으로 뉴욕의 씬이 성장하기 시작한다.[23]
뉴욕 하드코어의 본격적인 스타트를 끊은 밴드는 바로 애그노스틱 프론트. 애그노스틱 프론트는 스킨헤드 밴드를 자처하며 머리를 빡빡 깎고 닥터 마틴을 신고는, 연대와 단결 같은 메시지를 강조했다. 이들의 데뷔 EP인 United Blood와 첫 LP인 Victim in Pain은 뉴욕 하드코어 역사의 이정표와도 같은 앨범으로, 단순히 뉴욕 지역에서 하드코어 펑크를 연주하는 게 아닌 '뉴욕 하드코어'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1집 이후부터는 스래시 메탈을 많이 접목시킨 크로스오버 스래시 성향의 하드코어 펑크를 들려주었다.
크로-맥스 또한 애그노스틱 프론트와 마찬가지로 스킨헤드였고, 그러면서도 메탈의 음악성을 흡수하여 굉장히 육중한 하드코어를 선보였는데 이후 하드코어의 흐름을 뒤바꿔놓는다. 아래의 We Gotta Know는 1986년에 나온 이들의 1집 The Age of Quarrel의 첫번째 트랙인데, 시작하자마자 빠르고 날카롭게 달리는 기존의 하드코어가 아니라 이들만의 무겁게 깔아뭉개는 사운드를 곧바로 느낄 수 있다. 여담으로 당시 크로-맥스는 모터헤드나 베놈 같은 헤비 메탈/스피드 메탈 밴드들의 공연에 오프닝으로 여러 번 같이 공연했다. 이 때 안 그래도 타 장르에 적대적인 메탈헤드들이 무대에 스킨헤드들이 올라오는 걸 보고 처음에는 야유를 하다가, 그들이 공연을 시작하고는 모두들 압도당해서 인정했다는 일화들이 자주 전해진다.
이 외에도 현역으로 활동 중인 식 오브 잇 올, 그리고 브레이크다운, 킬링 타임[24], 리웨이, 워존과 아웃버스트 등이 묵직한 80년대 뉴욕 하드코어 밴드들이다. 애그노스틱 프론트는 40년이 넘게, 그리고 식 오브 잇 올은 30년이 넘게 활발히 활동해오며 현재까지도 앨범을 내고 부지런히 투어를 돌고 있다.[25] 다른 많은 밴드들도 그만큼은 아니지만 종종 공연을 하고 있다. 식 오브 잇 올의 Step Down 뮤직비디오를 보며 다양한 모쉬 동작을 따라해보자.[26]
시간이 지나며 뉴욕 하드코어는 점점 더 메탈 사운드를 많이 받아들였고,[27] 하드코어 펑크를 빠르게 과격한 방향이 아닌 느리고 무거우면서 과격한 방향으로 진화시켰다. 빠른 파트 사이사이에 나오는 느리고 무거운, 쿵쿵 발길질하는 듯한 부분이 바로 브레이크다운이 되었다. 이는 빗다운 하드코어나 메탈코어로 가면서 더더욱 두드러지게 발전한다.
뉴욕 하드코어의 묵직한 사운드는 하드코어 펑크를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이들은 하드코어 펑크를 '더 빠르게 달리는 펑크 록'이라는 말로 설명하는 것을 더 이상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현재까지도 수많은 후배 밴드들이 80년대 중후반에 이들이 들려준 그 음악을 계속 들으면서 연구하고, 따라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반대로 스래시 메탈 밴드 중에서 메탈의 묵직한 사운드에 펑크와 하드코어의 리듬을 접목시킨 밴드들도 있다. 뉴욕 출신의 앤스랙스나 뉴클리어 어썰트 같은 스래시 메탈 밴드들은 이 시기 뉴욕 하드코어를 음악적 양분으로 많이 흡수했다. 80년대 중반 뉴욕 스래시 메탈 밴드들이 펑크 성향을 많이 띄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당시 하드코어 펑크와 메탈은 서로를 까고 적대적으로 대하면서도, 동시에 서로가 서로를 참고하며 영향을 주고받은 애증의 사이라고 할 수 있다.
2.1.7. 유스 크루
DC에서 마이너 쓰레트가 시작했던 스트레이트 엣지는, 상술했듯 보스턴으로 이어지나 굵고 짧게 불태운 후 끝나게 된다. 이를 다시 80년대 중반에 이어받은 곳이 한창 폭발적으로 발전하고 있던 뉴욕 하드코어 씬이었다.
그 첫 주자는 유스 오브 투데이(Youth of Today)였다. 그들은 뉴욕 하드코어 씬에서 출발한 만큼 격렬하게 폭발하는 사운드는 기본옵션으로 장착하고 있었고, 여기에 밝고 긍정적인 분위기를 더해서 점점 무겁게 흘러가던 뉴욕 하드코어와는 다른 흐름을 탄생시킨다.[28] 이후 이들과 생각을 같이 하는 동료 밴드들이 여럿 나왔고, 유스 오브 투데이의 크루라는 뜻에서 유스 크루(Youth Crew)라는 말로 그들을 묶어서 부르게 된다. 이후에는 이 시기의 씬에 국한되지 않고 이러한 음악적 성향 전반을 묶어 부르는 말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즉, 유스 크루라는 말은 빠르고 파워풀한 음악적 특성에 주로 스트레이트 엣지와 긍정적인 메시지를 담은 하드코어의 하위 장르를 뜻하는 일종의 장르명으로 볼 수 있다. 유스 크루는 1988년 ~ 1989년에 전성기를 맞는다.
고릴라 비스킷은 힘차게 달리면서도 멜로디 센스를 더한 유스 크루 하드코어를 선보였다. 그들의 유일한 정규앨범인 Start Today는 하드코어 입문작으로도 손색이 없으며, 고릴라 비스킷은 현재까지도 하드코어 팬들의 최애 밴드 중 하나이다. 유스 크루는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하려는 경향이 강했는데, 그에 비해 저지는 다른 밴드들과는 차별화되는 좀 더 심각하고 진지한 분위기를 냈다. 유스 크루 자체가 뉴욕 하드코어 씬에서 나온 만큼 주로 뉴욕과 그 주변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했으나, 서부 해안의 캘리포니아에서도 유니폼 초이스(Uniform Choice), Chain of Strength, Insted 등 이들과 음악적으로나 사상적으로 궤를 같이 하는 밴드들이 여럿 나왔고 결국은 미국 전역으로 확대된다.
유스 크루 밴드 중 일부는 스트레이트 엣지와 긍정적인 마음가짐 뿐만 아니라 동물권 존중과 채식주의 사상도 전파하는데 힘썼고, 또 인종차별에 반대하며 맞서는 것도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주제였다. 이렇듯 다양한 윤리적/도덕적 메시지를 전파하며, 유스 크루 밴드들은 좀 더 나은 미래와 세상을 만드는 것을 꿈꿨다.
2.1.8. 영국과 유럽의 하드코어 펑크
영국은 70년대부터 섹스 피스톨즈 같은 밴드들이 활약했던 펑크 록의 종주국이었고, 따라서 미국 못지 않게 혁신적인 하드코어 펑크 씬을 갖추며 장르의 역사에 큰 이바지를 했다. 다만 음악적 경향이 미국의 하드코어와는 다소 달랐다. 과격하다는 점은 똑같지만 미국 밴드들은 에너지가 폭발하는 듯한 분위기였던 것에 비해, 영국 밴드들은 좀 더 거칠고 어둡고 지저분한
영국 하드코어 펑크의 대표주자는 단연 디스차지(Discharge)였다. 이들이 미친듯이 반복해대는 특유의 드럼 비트는 '디스차지의 비트'라는 뜻에서 D-beat라고 부른다.[29] 반복되는 D-beat, 더럽고 지저분한 기타 톤, 파괴적인 기타 리프, 그리고 급진적 정치 사상은 크러스트 펑크라는 하드코어 직계 후손 장르를 탄생시킨다. 디스차지와 The Exploited, GBH 등의 초기 크러스트 펑크 밴드들이 활동한 전성기인 1982년의 영국 하드코어 펑크 씬을 UK82라는 용어로 부르기도 한다.
또 다른 특징이라면, 미국 밴드들도 정치적인 이야기를 많이 하긴 했지만 밴드에 따라 개인적인 감정부터 음식 타령까지 다양한 주제에 대해 다룬 반면에, 영국 밴드들은 대부분 더 익스플로이티드처럼 무정부주의나 반파시즘 같은 좌익 정치 사상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80년대 초의 하드코어 펑크 밴드들이 본격적으로 이름을 날리기 전부터, 영국에서는 Crass, Rudimentary Peni, Conflict 같은 아나코-펑크 밴드들이 활동하며 그러한 사상적 기반을 마련했다.
영국의 하드코어 펑크 씬이 낳은 여러 밴드들은 의외로 80년대 중후반에 그라인드코어와 데스 메탈 씬으로 이어지게 된다. 영국 그라인드코어와 데스 메탈의 대표주자인 네이팜 데스와 볼트 쓰로워 같은 밴드들은 원래 하드코어/크러스트 펑크 씬에서 출발했었다.
디스차지의 D-비트와 크러스트 펑크는 북유럽으로 전파되었고, 스웨덴에서는 Anti-Cimex와 The Skitslickers[30] 등, 핀란드에서는 Riistetyt 등, 걸출한 D-비트/크러스트 펑크 밴드들이 여럿 나왔다.[31]
이렇게 유럽의 일부 밴드들은 가죽자켓 입고 머리를 닭벼슬처럼 세우고 지저분한 크러스트 펑크를 하고 있는 동안, 또 다른 밴드들은 누구보다 빠른 속도만을 목표로 달리는 하드코어 펑크를 만들고 있었다. 그들은 가능한 한 악기를 빠르게 연주하려고 노력했고, 드럼 연주에서는 특히 블래스트비트를 애용했다. 이들이 이렇게 탄생시킨 미칠듯한 속도의 하드코어 펑크를 스래시코어(Thrashcore)나 패스트코어(Fastcore)라는 명칭으로 부른다. 영국의 Heresy와 Ripcord, 네덜란드의 Lärm 등등이 대표적인 80년대 유럽 스래시코어 밴드들이다.
2.1.9. 일본의 하드코어 펑크
북미와 유럽에서 시작된 서구권 문화예술은 전 세계로 퍼지면서,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가장 먼저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데 하드코어 펑크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일본도 서양과 거의 동시대라고 해도 될 정도로 큰 시간적 차이를 두지 않고 하드코어 펑크를 흡수해서 독자적인 씬을 발전시켰다. 일본은 주로 상단의 영국과 유럽 하드코어 펑크, 그러니까 크러스트 펑크와 D-beat 성향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일본 하드코어 펑크는 서구의 음악에서 영향을 받음과 동시에, 같은 시기의 북미와 유럽 밴드들을 뛰어넘는 스피드와 과격성으로 전세계에서 충격을 주었다. 그라인드코어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네이팜 데스 또한 S.O.B. 같은 초과격 일본 하드코어 펑크에 큰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했고, 라이브나 스튜디오에서 S.O.B.와 Gauze의 커버를 하기도 했다.[32]
일본 하드코어 펑크가 남긴 유산은 무조건 과격하게 달리는 것 뿐만이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초창기 일본 하드코어 펑크 밴드 중 하나로 여겨지는 G.I.S.M.은 특히 NWOBHM을 연상시키는 헤비 메탈 풍의 화려한 솔로와 연주를 선보였는데, '서양의 문화예술을 받아들여 자기네들만의 나름대로 재해석하여 재창조'하는 일본의 센스을 하드코어 펑크에서도 발휘했다. G.I.S.M.의 임팩트는 막강했다. 그 결과 일본은 디스차지의 크러스트 펑크를 기반으로, 모터헤드의 남성미 넘치는 질주감, 헤비 메탈 기타리스트들의 영혼이 담긴 독주 등등을 잘 조합하여 다른 나라에는 없는 일본풍 하드코어 펑크를 완성시킨다. 이러한 성향을 버닝 스피릿(Burning Spirit)이라고 하며, 처음에는 이런 밴드들을 부르는 용어였다가 이제는 하나의 장르 이름으로 안착했고 Death Side가 대표 밴드로 꼽힌다.
2.2. 90년대
2.2.1. 메탈코어
90년대 하드코어를 송두리채 흔들어놓았던 문제의 트랙인 어스 크라이시스의 Firestorm.[33] 아래는 가사이다.
Street by street / Block by block / Taking it all back
The youth immersed in poison / Turn the tide - counterattack
Violence against violence / Let the roundups begin
A firestorm to purify the bane that society drowns in
No mercy / No exceptions / A declaration of total war
The innocent's defense is the reason it's waged for
Born addicted, beaten and neglected
Families torn apart, detroyed and abandoned
Children sell their bodies, from their high they fall to drown
Demons crazed by greed, cut bystanders down
A chemically tainted welfare generation
Abslolute complete moral degeneration
The youth immersed in poison / Turn the tide - counterattack
Violence against violence / Let the roundups begin
A firestorm to purify the bane that society drowns in
No mercy / No exceptions / A declaration of total war
The innocent's defense is the reason it's waged for
Born addicted, beaten and neglected
Families torn apart, detroyed and abandoned
Children sell their bodies, from their high they fall to drown
Demons crazed by greed, cut bystanders down
A chemically tainted welfare generation
Abslolute complete moral degeneration
80년대 유스 크루 밴드들을 통해 이어져 오던 스트레이트 엣지는 90년대에도 그 횃불을 넘겨받게 되었는데, 이를 폭발시킨 것이 업스테이트 뉴욕 지역 시라큐스의 어스 크라이시스(Earth Crisis)였다. 이들의 스트레이트 엣지 메시지는 "약물 없이 똑바로 살아보자!" 정도가 아니라, "약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이 썩어빠진 세상을 다 때려부수자!"에 가까웠다. 거기다가 그들은 (역시나 80년대 유스 크루 때부터 이어져온 정신인) 세상의 모든 동물들은 제각기 소중한 생명이기 때문에 존중하자는 메시지도 전파하는데 힘썼다. 이러한 그들의 사상은 '비건 스트레이트 엣지'라는 말로 요약된다.
어쓰 크라이시스의 메시지만큼이나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은 바로 그 음악이었다. 기존의 80년대 하드코어에서도 브레이크다운이라는 요소가 분명히 있었지만, 빠르게 달리다가 전환되며 쾌감을 더하는 장치로 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어쓰 크라이시스는 느리고 무겁게 쿵쿵하고 찍어대는[34] 메탈릭한 연주[35]를 전면에 내세웠고, 이는 새로운 차원의 하드코어였다. 이것이 바로 지금 메탈코어라고 알려진 음악의 원형이다.
어스 크라이시스의 음악과 메시지는 급속도로 전파되어 그들에게 영향을 받은 수많은 밴드들을 탄생시킨다. 그 결과 여기에 대한 부작용으로, 비건 스트레이트 엣지들의 도를 지나친 폭력과 사상 강요가 90년대 하드코어 씬을 넘어 사회 전반까지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스트라이프의 대표곡 Blistered의 뮤직비디오. 1분 32초 부분부터 나오는 브레이크다운을 들어보면, 현대의 메탈코어가 어디서 온 것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어쓰 크라이시스와 스트라이프, 그리고 여기에 스냅케이스까지 더해서 90년대 빅토리 레코드 소속 밴드 중 제일 인기가 많았던 3인방으로 뽑힌다. 마치 스래시 메탈 빅4 같은 느낌이다. 90년대 어지간한 인기 하드코어 밴드들은 십중팔구 빅토리 레코드 소속이었다. 빅토리 레코드는 2000년대 이모 붐 시기에 테이킹 백 선데이나 썰스데이 같은 밴드들의 음반을 내며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하지만, 이후 경영난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회사에 매각되었다.
이 와중에, 미국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에서는 이런 흐름과는 달리 자기 나름대로 메탈과 하드코어를 조합하는 밴드들이 있었다. Integrity, Ringworm, In Cold Blood 같은 밴드들은 하드코어의 에너지에 익스트림 메탈의 어둡고 사악한 사운드를 덧댄 사운드로 특유의 독특한 분위기를 자랑했다. 90년대 클리블랜드 하드코어 씬은 다른 시기와 지역의 씬에서 찾아보기 힘든 개성 덕분에 컬트적으로 추앙받고 있다.
메탈코어의 흐름에 같이 묶기 어려웠던 또 다른 개성적인 메탈코어 밴드로는 컨버지(Converge)가 있다. 컨버지는 단순하게 드륵드륵하는 브레이크다운으로 일관하는 수많은 메탈코어 밴드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소리를 지르다 못해 절규하는 듯한 비명 소리에, 뒤틀리고 꼬인 멜로디 연주, 복잡한 박자까지 적극 이용하여 듣고 있으면 정신이 산만해지는(...) 그들만의 특이한 메탈코어를 연주했다. 이렇게 복잡하고 꼬인 메탈코어를 매스코어라는 용어로 부른다. 컨버지 외에도 딜린저 이스케이프 플랜이나 Botch 등이 같은 시기에 활동하며 매스코어라는 장르를 널리 알리고 정착시켰다. 컨버지는 2000년대에 이후 발표하는 앨범마다 극찬을 받으며, 힙스터들이 가장 사랑하는 메탈코어 밴드의 위치에 올랐다.
90년대 중반 코네티컷 주에서 등장한 헤이트브리드(Hatebreed)는 메탈코어 흐름의 정점과도 같았다. 1997년 나온 그들의 1집 Satisfaction is the Death of Desire는 메탈코어의 교과서 같은 명작일뿐만 아니라, 90년대 하드코어 전체를 대표하는 명작으로 손꼽힌다. 이후 그들은 2000년대에 더 큰 상업적 성공을 이루며, 하드코어 장르 역사상 가장 성공한 밴드로 남아있다. 그들의 출세곡 I Will Be Heard는 노래방에도 있다!
또한 플로리다 주에서 나온 샤이 훌루드[36], 그리고 Poison the Well, Strongarm 같은 메탈코어 밴드들은 무겁게 찍는 것에 감성적인 멜로디 연주나 클린 보컬라인을 더하려고 했다. 이러한 시도는 요즘의 메탈코어하면 떠오르는 멜로딕 메탈코어의 시초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메탈코어는 이러한 90년대 원류 메탈코어 흐름과는 거리가 먼 음악을 가리키고, 그러한 성향의 음악에 대해서라면 메탈코어 항목을 참조.
2.2.2. 90년대 뉴욕 하드코어
원래 뉴욕 하드코어가 80년대 중후반부터 무겁게 쿵쿵 찍는 스타일을 발전해왔는데, 90년대에는 그게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이에 따른 묵직한 그루브, 그리고 힙합의 영향을 받아 그루브에 맞춰 리듬감 있게 내지르는, 마치 랩 같은 보컬라인이 90년대 뉴욕 하드코어의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90년대 뉴욕 하드코어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밴드에는 단연 매드볼[37]과 바이오해저드가 있다. 매드볼과 바이오해저드 같은 밴드들은 로드러너 레코드에 들어가서 TV에 뮤직비디오도 나오고 전 세계로 투어를 다니는 등 나름 주목할만한 상업적 성공도 거두었다. 이 외에도 Visions of Disorder, Merauder 등이 90년대 뉴욕 하드코어 스타일을 굳히는 데 큰 역할을 했다.
90년대 뉴욕 하드코어 밴드들의 쿵쿵 찍는 그루브 사운드는 빗다운 하드코어(Beatdown Hardcore), 줄여서 빗다운이라고 부르는 하위 장르의 생성으로 이어진다.
90년대 뉴욕 하드코어 씬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DMS 크루의 존재이다. 애그노스틱 프론트는 스킨헤드 밴드로 출발했고, 닥터 마틴 스킨헤드라는 의미에서 친구들과 함께 DMS라는 이름의 크루를 만들었다. 말 그대로 Doc Martens Skinhead의 줄임말이지만, 역두문자어로 Drugs Money Sex, Dirty Money Syndicate 등등 변형이 생겼으며 매드볼도 Droppin' Many Suckers나 Demonstrating My Style 같은 앨범 제목에서 이 말장난을 써먹었다. 이 집단은 깡패 같은 가오를 잡으며 다른 세력들과 갈등을 일으키거나 실제 범죄자들인 갱스터들도 연루되는 등, 흉흉한 이야기들이 다수 전해진다.
2.2.3. 수많은 사상이 충돌하던 시기
1998년 네바다 주 리노에서 스트레이트 엣지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한 청소년을 폭행하여 살해한 일이 발생하자, 폭스 뉴스에서 이를 다루며 어스 크라이시스의 보컬 칼 뷔크너를 출연시켜 인터뷰를 가졌다.
칼 뷔크너 : 실망스러운 점은, 매체들이 오직 일부 이상한 사람들이 엮인 그런 종류의 사건에 대해서만 보도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앵커 : 하지만 그런 점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가?
칼 뷔크너 : 그렇지만, 당신네들 시청자들이 알 필요도 있는 것이, 스트레이트 엣지는 25년이 넘게 존재해왔고 전세계적인 무브먼트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다. 그 중 여럿은 음악인, 영화 제작자 등 예술인들이다. 그들은 정말 생산적이다. 그들은 자식을 둔 부모이기도 하다. 그러한 점에서 또한 그들의 대부분은 법을 준수하는 시민들이며, 긍정적으로 삶을 살고 있다. 리노와 솔트레이크 시티에서 일어나는 그런 일들은 매우 드문 것이다.
여러 하드코어 밴드들은 음악만큼이나 전달하는 메시지와 사상을 중요시했다. 90년대에는 수많은 밴드들이 음악으로 자신들의 사상을 펼쳤는데, 생각보다 꽤나 복잡하고 어지러운 상황을 유발했다.앵커 : 하지만 그런 점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가?
칼 뷔크너 : 그렇지만, 당신네들 시청자들이 알 필요도 있는 것이, 스트레이트 엣지는 25년이 넘게 존재해왔고 전세계적인 무브먼트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다. 그 중 여럿은 음악인, 영화 제작자 등 예술인들이다. 그들은 정말 생산적이다. 그들은 자식을 둔 부모이기도 하다. 그러한 점에서 또한 그들의 대부분은 법을 준수하는 시민들이며, 긍정적으로 삶을 살고 있다. 리노와 솔트레이크 시티에서 일어나는 그런 일들은 매우 드문 것이다.
90년대 가장 중요한 하드코어 밴드는 상단의 어스 크라이시스였고, 그들의 영향 덕에 90년대 하드코어 씬의 중심에는 스트레이트 엣지가 있었다. 상술했듯 어스 크라이시스(와 동료 90년대 메탈코어 밴드들)는 강한 스트레이트 엣지 마인드를 가졌는데, 이걸 따라한 일부 과격분자들은 여기에 너무 몰입해서 자신들의 배타적인 사상을 강요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공연장에서 술이나 담배를 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폭행하는 등
어스 크라이시스의 사상은 그냥 스트레이트 엣지가 아니라 비건 스트레이트 엣지였다. 이에 심취한 일부 하드코어 청자들은 '하드라인(Hardline)'[38]이라고 자신들을 이름짓고는, 비건 스트레이트 엣지 사상을 사이비 종교에 가까울만큼 광적으로 숭배했다. 그 결과 개독 꼴통마냥 자연과 인간에 대해 보수적인 성향을 보였다. 스트레이트 엣지에 따르면 금욕주의에 따라 살아야 하기 때문에 술, 담배, 마약과 더불어 포르노와 자위도 안 된다는 등, 동물권을 비롯하여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은 중요하기 때문에 낙태는 금지해야 한다[39]는 등, 자연의 질서를 유지해야하기 때문에 동성애는 용납할 수 없다는 등... 어느 분야에서건 극과 극은 통한다는 걸 다시 상기시켜준다.
스트레이트 엣지/하드라인 광신도들이 개독 같은 행동을 보여주는 동안, 실제 기독교 신자들도 하드코어 밴드를 만들어 활동했는데[40] 큰 사건사고는 일으키지 않았음에도 크리스천이라는 것 자체로 하드코어 씬에서 논쟁거리가 되었다. '하드코어를 한다는 놈들이 기독교를 믿는다고?' 같은 부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에 대해 샤이 훌루드의 보컬이었던 채드 길버트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채드 길버트 : 우리는 Strongarm과 비슷한 스타일이다. 하지만 그들은 크리스천이라는 이유로 핍박받는다. 사람들은 거기에 대해 듣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하드코어에서는 생각하는 걸 말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하다. 종종 공연에서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로 그들을 조롱한다. 하지만 그런 건 마음이 닫힌 것이고, 하드코어가 아니다. 그런 사람들은 씬에서 없어져야 한다.
80년대 중후반 유스 오브 투데이의 멤버들은 채식주의와 정신 수양 등에 관심을 가졌고, 힌두교, 특히 헤어 크리슈나 사상에 심취했다.[41] 그들 덕에 스트레이트 엣지 하드코어 청자들 중 일부는 그들을 따라 헤어 크리슈나 사상을 믿게 된다. 그러한 사상을 담아 크리슈나 컨셉의 하드코어 밴드를 결성했는데, 이러한 몇몇 밴드들은 '크리슈나코어(Krishnacore)'라고 불렸다. 이렇듯 90년대 하드코어는 다양한 장르가 등장하며 황금기를 누린 찬란한 시기임과 동시에, 다들 자기만의 사상으로 치고 박고 싸우던 다소 기묘했던 시기로 기억되고 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90년대 하드코어에서 그립지 않은 것 딱 한 가지는, 공연에서 곡 사이에 10분씩(...) 연설을 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2.2.4. 이모(Emo)로의 진화
80년대 하드코어 펑크 밴드들이 좀 더 음악적인 진보를 꾀하며 포스트-하드코어를 만든 것처럼, 90년대 하드코어 밴드들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기존의 하드코어를 넘어보려고 했다. 90년대 초에는 이미 스매싱 펌킨스 같은 얼터너티브 록 밴드들이 큰 인기를 누리고 있던 때였고, 이들은 그런 부드러운 멜로디를 하드코어에 점점 흡수시켰다.
그러한 시도는 하드코어의 에너지를 이용하면서도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멜로디를 전면적으로 내세우는 음악[43]을 탄생시켰다. 이러한 성향은 감성적인 하드코어라는 뜻에서 이모셔널 하드코어(Emotional Hardcore)라고 불렸는데, 이를 더 줄여 이모코어(Emocore), 더 줄여서는 마침내 잘 알려진 이모(Emo)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이러한 90년대 이모 밴드들로는 Texas is the Reason과 Saves the Day, The Get Up Kids, Lifetime, The Promise Ring 등이 있다. 지미 잇 월드 또한 90년대 대표적인 이모 밴드 중 하나였고 2000년대에 더욱 크게 성공했다.
90년대 이모 밴드들은 대다수가 원래 하드코어 밴드를 하던 사람들에 의해 결성되었고, 그래서 이모를 연주했지만 여전히 하드코어 밴드들과 함께 공연을 하거나 투어를 돌았고, 하드코어 레이블에서 음반을 내는 등, 하드코어 씬의 일부로서 같이 성장했다.
몇몇 밴드들은 하드코어와 펑크의 폭발하는 에너지를 절제하면서, 오히려 더 섬세한 감성을 살리는 쪽으로 이모를 발전시켰다. 이러한 성향의 음악을 미드웨스트 이모(Midwest Emo)라고 부르는데, 이 장르를 정립한 밴드들이 주로 미국 중서부 지역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붙은 이름이다. 거칠고 과격한 연주 대신 부드러운 기타 아르페지오 연주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미드웨스트 이모에서 유명한 밴드로는 해당 장르의 창시자 중 하나인 Sunny Day Real Estate, 그 외에도 Mineral, Penfold, The Gloria Record 등이 있다.
미드웨스트 이모 밴드 중 하나였던 Cap'n Jazz의 멤버들은 이후 아메리칸 풋볼이라는 밴드를 새로 시작하는데, 밴드가 남긴 동명의 앨범은 청량하고 정교한 악기 연주와 복잡하면서도 부드러운 박자의 흐름 같은 매력으로 미드웨스트 이모를 넘어 매스 록에 큰 영향을 주었고, 90년대 인디 록 대표작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렇게 좀 더 팝적이고 대중적으로 서정성을 더하는 밴드들이 있었던 반면, 일부 밴드들은 불안하고 처절한 느낌의 감성을 담은 이모셔널 하드코어를 연주했다.[44] 그들은 여전히 거칠게 몰아치는 연주를 하면서 좀 더 어두운 감성의 기타 리프와 멜로디를 사용했고, 드럼은 힘 있게 달린다기보다는 우당탕탕 정신없이 깨지는 듯한 느낌에 가까웠으며, 무엇보다도 보컬은 목이 찢어질 듯 처절하게 외쳐댔다. 이렇게 탄생한 음지의 이모셔널 하드코어를 스크리모라고 한다. Orchid와 Saetia 등이 이 시기 대표적인 스크리모 밴드로 여겨진다.
이모와 스크리모라는 용어 둘 다 2000년대에 상관없는 밴드들에게도 쓰일 정도로 남용되었고, 특히 소리만 좀 지른다 싶으면 냅다 스크리모라고 부르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2.2.5. 90년대의 유럽 하드코어
90년대 유럽의 하드코어 씬은 미국의 복제 클론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미국에서 유행하는 밴드들을 따라하기에 바빴다. 미국에서 비건 스트레이트 엣지 메탈코어가 나오면 얼마 뒤 유럽에도 나왔고, 미국에서 뉴욕 빗다운 밴드가 나오면 얼마 뒤 유럽에도 나왔고, 또 미국에서 유스 크루 리바이벌 밴드가 나오면 얼마 뒤 유럽에서도 나오는 등... 하는 식이었다.
90년대 유럽 하드코어 씬에서 가장 주목받았던 지역은 누가 뭐래도 스웨덴의 우메오(Umeå) 시였다. 미국의 하드코어에 빠진 젊은이들은 그 음악과 더불어 진보적인 사상에도 관심을 가졌고, 이곳에도 스트레이트 엣지와 비거니즘이 빠르게 전파된다. 리퓨즈드[45]는 우메오 하드코어 씬을 전세계에 알린 장본인으로, 자신들에게 영향을 준 미국 밴드들의 음악에서 여러 단계 더 앞서나간 음악성으로 화제가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리퓨즈드 항목을 참조. 리퓨즈드 외에도 우메오 하드코어 씬에는 Shield, Abhinanda, Doughnuts 같은 밴드들이 있었다.
90년대의 비건 스트레이트 엣지는 미국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화두였다. 유럽의 각국에서 비건 스트레이트 엣지를 자처하는 밴드들이 여럿 나오던 와중, 두드러지게 씬이 발전하던 또 다른 곳은 벨기에의 서부 베스트플란데런 지역이었다. 이 곳의 우편번호는 8로 시작하는 4자리수, 그러니까 8000대였는데, 여기서 이름을 따와서 이 지역 씬을 H8000라고 부른다.[46] H8000 밴드들은 역시나 강력한 비건 스트레이트 엣지 마인드를 장착하고는, 그만큼 강력한 메탈코어를 구사했는데 데스 메탈에 필적할 정도의 극단성이 특징이었다. Congress, Liar, Arkangel 같은 밴드들이 H8000 씬을 이끌었다.
2.3. 00년대, 그리고 현재
펑크 록이나 메탈 등등 20세기에 생겨난 다양한 록 음악 장르들처럼, 하드코어도 21세기 들어서는 새로운 하위 장르가 생겨나는 일은 크게 없다. 대부분의 밴드들은 예전에 정립된 스타일에 충실하게 음악을 선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는 하드코어가 죽었다는 뜻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이미 수많은 스타일이 다 나왔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다 쌓인 덕에 다양성이 공존한다는 장점도 있다. 메탈코어 밴드와 유스 크루 밴드, 파워바이올런스 밴드를 한 공연에서 함께 볼 수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상기한 것처럼 헤이트브리드는 21세기 들어서 가장 성공한 하드코어 밴드가 되었다. 2000년대 초에 결성된 테러(Terror)[47]는 올드스쿨 뉴욕 하드코어의 공식을 지키면서도 트렌디한 사운드로 선보였고, 헤이트브리드와 함께 21세기 메탈릭 하드코어의 쌍두마차격인 밴드가 되었다. 헤이트브리드와 테러는 꾸준히 새 앨범을 내며 미친듯이 전세계를 계속 투어 돌고 있다. 테러의 보컬 스캇 보겔(Scott Vogel)은 하드코어 정신으로 꽉 차 있으며, 무대 위에서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스테이지 다이브와 모쉬를 부추기는 것으로 유명하다.[48] 다음 내용을 보며 그가 전파하는 하드코어 정신을 가슴에 새겨보자.
스캇 보겔 : 하드코어란 지구 반대쪽에 있는 사람을 처음 만나고는 마치 그 사람을 평생동안 알고 지낸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하드코어란 돈이 없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연주도 못하고 가사도 못 알아듣겠다고 말하는 밴드를 보기 위해 8시간 동안 운전해서 가는 것이다. 하드코어란 전화요금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나올 거라는 것이다. 하드코어란 장거리 여행이고, 투어를 돌며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다. 하드코어란 선생님으로, 우리 모두가 평등하며 피부색이나 성적 지향은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려준다. 하드코어는 동물은 우리가 마음대로 죽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마음을 열고 모든 것에 질문하라는 걸 가르쳐준다. 하드코어란 방 안에서 모슁하는 것이다. 하드코어란 에너지고, 감정이며 분노다. 하드코어란 새로운 밴드를 들었을 때 등골이 짜릿해지는 그 느낌이다. (원문)
상기했듯 새로운 장르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21세기 하드코어 씬에서도 특정 시기에 특정 스타일이 트렌드가 되며 주목할만한 흐름을 만든 적이 여러 번 있다. 2000년대 중반에는 유스 크루처럼 빠르고 올드스쿨한 스타일에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스트레이트 엣지 하드코어 밴드들이 다수 나오며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다. Have Heart, The First Step, Champion, 그리고 Bane[49] 등이 그러한 흐름을 이끌었으며 대부분이 몇 년 가지 못하고 해체했지만, 그들이 21세기 미국 하드코어 씬에 남긴 영향은 아직까지 유효하다.[50]
2010년대 초반에는 Title Fight, Basement, Citizen, 그리고 Touche Amore 등 이모/포스트-하드코어 밴드들이 하드코어 씬에서 두각을 들어냈는데 이 때의 흐름을 '이모 리바이벌'이라고 부른다. 이 밴드들은 하드코어 씬을 넘어서 다양한 층의 팬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2010년대 중반부터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깔아뭉개는 스타일의 메탈코어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Knocked Loose, Code Orange, Jesus Piece, Harms Way 등 이러한 성향의 밴드들이 현재진행형으로 성장하며 인기도를 높이고 있다.
턴스타일(Turnstile)의 2022년NBC(미국 방송) 토크쇼 투나잇 쇼에서의 라이브. 턴스타일은 밝게 통통 튀는 개성적인 하드코어를 하는데, 그래서 하드코어에 익숙하지 않은 청자들도 거부감 없이 쉽게 듣고 즐길 수 있는 매력이 있다. 그 덕에 그들은 2022년 가장 주목받는 하드코어 밴드 중 하나가 되었다.[51] 또한 2022년에는 소울 글로의 Diaspora Problems 역시 평단의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성공한 하드코어 펑크 앨범이 되었다.
3. 주요 밴드
- 블랙 플래그 (Black Flag)
- 배드 브레인스 (Bad Brains)
- 마이너 스렛 (Minor Threat)
- 디스차지 (Discharge)
- 데드 케네디스 (Dead Kennedys)
- 미스피츠 (Misfits)
- 수어사이덜 텐덴시즈 (Suicidal Tendencies)
- 네거티브 어프로치 (Negative Approach)
- 애그노스틱 프론트 (Agnostic Front)
- 식 오브 잇 올 (Sick of it All)
- 크로-맥스 (Cro-Mags)
- 매드볼 (Madball)
- 바이오해저드 (Biohazard)
- 유스 오브 투데이 (Youth of Today)
- 고릴라 비스킷 (Gorilla Biscuits)
- 인사이드 아웃 (Inside Out)
- 헤이트브리드 (Hatebreed)
- 테러 (Terror)
- 더 익스플로이티드 (The Exploited)
- 리퓨즈드 (Refused)
3.1. 한국의 밴드
한국의 밴드[52]- 13 스텝스(13STEPS)
- 더 긱스(The Geeks) [53]
- 바세린 (Vassline) [54]
- 올 아이 해브(All I Have) [55]
- †띵즈 위 세이(Things We Say)
- 극도 (Gukdo)
- †파인드 더 스팟(Find The Spot)
- †도깨비어썰트 (Dokkaebi Assault)
- 서울 돌망치 (Seoul Dolmangchi)
- †쟈니로얄 (Johnnyroyal)
- †아얌 (Arryam)
- †조인 더 서클 (Join The Circle)
- †셸백 (Shellback)
- †티어 가스 (Tear Gas)
- †데드 청스 (Dead Chunks)
- 노 셸터 (No Shelter)
- †번 마이 브릿지스 (Burn My Bridges)
- 턴 포 아워 (Turn For Our)
- †노 익스큐즈 (No Excuse)
- 옥토풀페 (Octopoulpe)
- †스완 이터 (Swan Eater)
- 플러쉬!! (Flush!!)
- †석규 (Cerkkyu)
- †리애니메이터 (Reanimator) [56]
- 나후 (NAHU)
- 싱크 투 라이즈 (Sink To Rise)
- †싱클레어 (Sinklair)
- †반란 (Banran)
- 스컴레이드 (Scumraid) [57]
- 더 키치스 (The Kitsches)
- 슬랜트 (Slant)
- †배드 아이돌즈 (Bad Idols)
- 스파이키 브랫츠 (Spiky Brats)
- †토끼좆
- †여피 킬러 (Yuppie Killer)
- †월드 인 암즈 (World In Arms)
- †채드버거 (Chadburger)
- KJR47
- †애니멀 앤썸 (Animal Anthem)
- 컴배티브 포스트 (Combative Post)
- †아가리 (Agari)
- †더 냅 (The NAP) [58]
- 베티 애스 (Betty Ass) [59]
- 투데이 스팟 (TodayXSpot)
- †가새다리
- †ICBM
- †앵그리 피스츠 (Angry Fists)
- †포르노테리움 (Pornoterium)
- †패러사이트 (Parasite)
- †붓보이스 앤썸 (Bootbois Anthem)
- †버스터 (Buster)
- †익스플로드 (The Explode)
- †킥스카치
- †아작
- †가가멜 SS
- †나이트하울러
- †오발탄 (OBALTAN)
- 고로쇠 (KOROSE) [60]
- 마터스 (MARTYRS)
- 믹스 블러드(Mixed Blood)[61]
- 포고어택
[1] 주로 임진모의 영향이 크다.[2] 후술할 배드 브레인스라는 오직 흑인들로만 구성된 하드코어 펑크 밴드도 있다.[3] 힙합으로 진로를 변경한 이후에도 간간히 하드코어 펑크 성격이 진한 곡도 발표했다. 하지만 그러다보니 롤링 스톤스의 키스 리처드가 그랬듯 흑인음악 특유의 그 롤링과 그루브를 살릴수 없어서 좀더 공격적인 방향으로 진행된 것이 하드코어 펑크의 형태.[4] 밴드는 워싱턴 DC 출신이었지만, 이 시기에는 활동 거점을 뉴욕으로 옮긴 상태였다.[5] 첨부된 동영상에서 그들이 연주하는 곡 Out of Step의 가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I don't smoke/don't drink/don't fuck/At least I can fucking think"[6] 하지만 이를 시작한 이안 맥카이는 스트레이트 엣지는 강압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선택으로, 무브먼트 따위가 아니라고 분명히 밝혔다.[7] WWE 스타 중 한 명인 CM 펑크가 한 때 스트레이트 엣지 기믹을 활용했다. 복부에 스트레이트 엣지 문구를 문신하기도 했다. 그 또한 펑크 록과 하드코어의 팬으로 유명하다.[8] 레코드판이나 카세트 테이프 등 아날로그 음반 매체는 주로 두 면(A 사이드와 B 사이드)에 음원을 나눠 녹음했는데, 이런 특징 때문에 두 아티스트가 음반 하나에서 각각의 면에 음악을 넣은 형태의 음반이 많이 나왔다. 아무래도 음반 제작과 홍보가 어려운 언더그라운드 인디 밴드들이 자주 그랬다.[9] 헨리 롤린스는 원래 DC 하드코어 씬에서 S.O.A.라는 밴드를 하던 인물로, 블랙 플래그의 동부 해안 투어에서 이들과 만나 무대에 시험삼아 올라봤는데 케미가 좋아서 밴드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때 고민하던 그에게 서부로 가서 블랙 플래그와 함께하라고 격려해준 사람이 바로 절친 이안 맥카이.[10] Rate Your Music에 하드코어 펑크 장르로 등록된 음반들 중 시기상으로 따지면 가장 첫번째인 것이 미들 클래스의 Out of Vogue이다.[11] 참고로 밴드 이름인 Circle Jerks는 '남자들이 모여 개인이나 서로의 손으로 수음 하는 것'을 의미하고, 이들의 첫 음반 이름은 Group Sex...[12] 젤로 비아프라는 밴드 활동 초기에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전력이 있다. 지금은 자기 관리에 실패하여 비만 중년아저씨가 되어버렸다.[13] 여담으로 그의 꿈은 과학자였고, 학업을 위해 밴드를 접기로 하면서 냈던 1집 Milo Goes to College(밀로가 공부하러 대학 간다는 뜻)가 큰 반응을 얻으며, 그는 이후 학업과 밴드를 병행하며 활동했고 결국은 분자생물학자가 되었다.[14] 소셜 디스토션이 1982년에 유스 브리게이드와 함께 나선 투어의 기록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Another State of Mind는 80년대 하드코어 씬의 흔적을 생생히 다룬 기록임과 동시에 음악 다큐멘터리 영화로도 유명하다.[15] 보컬 그렉 그래핀(Greg Graffin)은 코넬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인텔리. 코넬 대학교 뿐만 아니라 UCLA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16] 수어사이덜의 전성기인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까지의 베이시스트는 현재 메탈리카의 로버트 트루히요이다.[17] 원래는 텍사스 출신이었고 블래스트비트를 적극 활용하는 등 엄청나게 빠르고 정신없는 하드코어 펑크를 했으나, 캘리포니아로 옮기면서 점점 메탈에 가까워진다.[18] 이런 밴드들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수어사이덜의 홈타운이었던 캘리포니아의 베니스 지역에서도 Beowülf와 Excel 등 크로스오버 스래시 밴드가 여럿 나왔다.[19] 그래서 이들만의 독자적인 성향에는 호러 펑크라는 이름이 붙었다.[20] 밴드 해산 후 1984년에 그의 동생 알랜 맥카이가 공연장에서 관중 한명에게 폭행당하는 일까지 발생한다.[21] 앞에 나온 아티스트들처럼 거칠고 시끄러운 펑크 록 장르를 연주한 밴드들 이외에도, 관련 없는 듯한 아티스트들도 하드코어에 영향을 받은 경우가 꽤 많다. 예로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이 초창기 포스트 펑크를 연주하다 80년대 후반에 본격적인 슈게이즈로 넘어가게 된 것에는 허스커 두나 다이노소어 주니어 같은 밴드들의 영향이 있었다고 밝혔으며, 요 라 텡고도 미스피츠 같은 밴드들을 좋아했다.[22] 하지만 이안 맥카이는 이모라는 말에 대해 "살면서 들어본 가장 멍청한 말(...)"이라고 표현했다.[23] 비스티 보이즈가 이러한 80년대 초 뉴욕의 하드코어 펑크 밴드 중 하나.[24] 이 밴드 또한 2007년에 한국에 방문한 적이 있다.[25] 식 오브 잇 올은 2011년과 2017년, 한국에 총 두 번 방문하여 공연했다. 두 공연 다 한국의 타운홀레코드 주최.[26] Step Down의 뮤직비디오에서 다양한 모쉬 동작이 나오며 장난스런 이름으로 자막이 덧대지는 연출은, 노브레인이 바다사나이 뮤직비디오에서 따라하기도 했다.[27] 이는 상단에 나온 크로스오버 스래시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실제로 애그노스틱 프론트, 크로-맥스나 리웨이 등 상당수 뉴욕 하드코어 밴드들은 크로스오버 스래시로도 분류된다.[28] 그들의 목표는 SS 디컨트롤의 스트레이트 엣지 사상과 7 세컨즈의 밝고 즐거운 모습을 합치려는 시도였다.[29] 디스차지의 음악은 미국에서 스래시 메탈이 생기는 데도 영향을 준다. 메탈리카는 그들에게 헌정하는 의미에서 디스차지 커버곡을 앨범에 싣기도 했다.[30] 이는 스웨덴어로 된 이름이고, 이를 번역한 영어 이름은 The Shitlickers로도 알려져 있다.[31] 의외로 멜로딕 데스 메탈 밴드인 아치 에너미(밴드)의 리더 마이클 아모트는 북유럽 크러스트 펑크의 팬으로, 크러스트 펑크 밴드 커버곡들로만 채워 앨범을 내기도 했다. Anti-Cimex의 When the Innocent Die 커버. 또한 앳 더 게이츠의 보컬 토마스 린드버그 역시 북유럽 크러스트 펑크 마니아로, Disfear와 Skitsystem 같은 크러스트 펑크 밴드를 직접 하기도 했다. 이 두 밴드는 80년대 이후, 90년대 ~ 00년대 북유럽 크러스트를 대표하는 밴드이기도 하다.[32] 네이팜 데스 외에도 Brutal Truth나 Extreme Noise Terror 등등 굵직한 그라인드코어 밴드들은 모두 일본 하드코어 펑크를 존경하고 음악적인 영향을 받았다.[33] 음반에서는 영상처럼 다음 트랙인 Forged in Flames와 한 트랙으로 합쳐져 있다.[34] 이를 영어로는 chugga-chugga라고 주로 표현하는 듯.[35] 인터뷰를 보면, 그들은 하드코어보다는 주로 카르카스나 슬레이어 같은 메탈 밴드들로부터 더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36] 샤이 훌루드의 초창기 보컬 채드 길버트는 탈퇴 후 뉴 파운드 글로리를 결성한다.[37] 위의 애그노스틱 프론트 서술에서도 나오듯, 매드볼의 보컬 프레디는 AF 보컬 로저 미렛의 동생이다.[38] 1990년에 나온 Vegan Reich의 앨범 Hardline의 이름에서 따왔다.[39] 또 다른 사람들은 "스트레이트 엣지란 개인의 선택과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다!"라며 여성의 선택권을 지지했다. 똑같이 엣지더라도 다른 논리로 다른 의견을 갖게 된 것이 재미있는 부분.[40] 메탈코어, 특히 멜로딕 메탈코어 밴드들 중에 많았다. Strongarm 등... 실제로 2000년대 인기를 얻은 메탈코어 밴드들 중 상당수는 크리스천이다.[41] 이들 외에도 크로-맥스의 멤버들 역시 헤어 크리슈나를 믿었고, 89년에 나온 그들의 2집 Best Wishes의 음반 표지도 그러한 사상을 담고 있다.[42] 로드러너 레코드로 들어가서 노 다웃과도 투어를 도는 등 나름 성공했다.[43] 이러한 점에서 상단의 포스트-하드코어는 물론이고 팝 펑크와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44] 둘 다 하드코어를 서정적으로 다듬으려 했다는 점은 똑같지만, 둘의 방향성은 아예 달랐고 음악 내적/외적으로 접점도 거의 없기에, 이모라는 말을 공유하지만 사실 큰 관계가 없다고 보는 게 맞다.[45] 사이버펑크 2077에 등장하는 가상의 밴드 '사무라이'의 노래도 맡았다.[46] 발음은 헤잇-싸우전드 정도로 한다. 그러니까 Hate라는 단어를 H8로 쓴 것. Sk8처럼, '-에잇' 발음으로 끝나는 말을 8으로 대체하는 유치한 말장난이다.[47] 그러나 테러의 멤버들은 90부터 여러 하드코어 밴드를 하던 베테랑들이었다.[48] 유튜브 댓글란이나 인터넷 이곳저곳에서 거기에 관한 유머를 가끔씩 볼 수 있다.[49] 90년대 중후반에 결성한 밴드로, 2000년대 미국 하드코어 씬에서 스트레이트 엣지 큰형님으로 든든하게 버텼지만 2016년에 결국 마지막 공연을 하고 해체했다.[50] 2019년 여름에 열린 Have Heart의 10년만의 재결성 공연은 아마도 하드코어 역사상 가장 큰 공연이었을 것이라고 한다.[51] 이들의 2021년작 GLOW ON은 무려 메타크리틱 92점을 기록하여 그 해 가장 비평적으로 성공적인 앨범 중 하나가 되었다.[52] † 표시는 현재 해체했거나 수년간 활동이 없는 밴드[53] 초기에는 유스 크루적인 음악적 면모를 많이 보였다.[54] 정규 1집까지만 하드코어 펑크였고, 2집부터는 쭉 메탈코어이다.[55] 부산의 하드코어 밴드이다.[56] 파워바이올런스 밴드이다[57] 한국에서(보단 외국에서) 가장 유명한 D-beat 하드코어 펑크 밴드이다.[58] 광주광역시의 하드코어 밴드[59] 광주광역시의 스케잇 펑크 밴드이지만 사운드적으로 하드코어적인 면모를 많이 보인다.[60] 초록불꽃소년단의 베이시스트 양정현이 있는 파워바이올런스 밴드이다.[61] 전직 아구선수 맷 랜들이 2014년까지 활동한 밴드. 그 이후 활동은 불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