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로버트 오언 Robert Owen | |
출생 | 1771년 5월 14일 |
영국 웨일스 몽고메리셔 뉴타운[1] | |
사망 | 1858년 11월 17일 (향년 87세) |
영국 웨일스 몽고메리셔 뉴타운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사업가, 사회개혁가 |
정당 | 급진파 |
사상 | 사회주의 (오언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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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간은 환경의 창조물이다.
로버트 오언
로버트 오언
영국의 공장주, 사업가, 유물론자, 사회개혁가로서 처음으로 사회주의라는 개념을 만들었고 최초의 협동조합을 창시하였다.
2. 생애
2.1. 출생과 유년기
로버트 오언은 1771년 웨일즈 변방의 몽고메리셔(Montgomeryshire)의 평범한 소도시인 뉴타운(Newtown)에서 일곱명의 자식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오언의 아버지는 철물점 주인 겸 지역의 우체국의 국장이었다.유년기 시절 그는 특별히 사회적, 경제적 어려움이 없었고, 남는 시간에 여러가지 책을 읽는 것을 즐겼다. 그는 소설, 문학, 시, 역사, 종교, 철학 등 다양한 방면을 가리지 않고 책을 읽었다. 특히 종교 서적을 많이 읽었고, 신학에 대하여 주변의 이웃들과 논쟁하는 것을 즐겼다. 그는 책을 읽고 신학 논쟁을 했으며, 또래 아이들과 축구, 달리기, 춤 등 육체적 활동을 즐겼고, 클라리넷 같은 악기를 잘 연주하여 주변에서 인기와 평판이 좋았다. 오언은 어려서 부터 정신적으로 조숙했고, 신체적으로 아주 빠르고 민첩하며 지치지 않는 체력을 가졌었다.
어린 시절 그가 받은 교육은 그 당시 유행하고 있던 랭커스터 교육[2]가 전부였다. 학교에서 성적이 좋던 오언은 고작 7살에 교장선생이 었던 딕니스(Mr.thickness)가 추천하여 다른 아이들을 가리치는 교사 노릇을 하면서 용돈벌이를 했다. 오언은 이러한 부실한 학교를 혐오했는데, 그가 2년간 학교에 있었던 것을 허송세월이라고 할 정도였다. 어린시절의 그가 보더라도 이런 랭커스터식 교육 시스템은 굉장히 결함이 많았고 교육 역시 아주 기본적인 읽기와 쓰기, 사칙연산 등 내용이 정규교육에 비하여 부실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유복하지는 못할지라도 객관적으로 오언의 경제적 사회적 환경도 그렇게 나쁘지 않아서 그는 자유롭게 책을 읽고, 놀러 다니고, 주변인들과 논쟁하면서 즐거운 유년기를 보냈다는 것은 확실하다.
2.2. 소년 도제 오언
1780년 2년간의 학교 조수 생활을 끝 마친 오언은 겨우 10살 소년이었지만, 10살이 되면 스스로 생계를 책임지는 당시의 관습대로 일자리를 찾기 시작하고 곧 옆집 이웃이 경영하는 포목점 겸 야채가게에서 직원으로 채용되어서 기본적인 장사 기술을 익힌다. 그는 마을에서 조수로 일하고 1년 뒤 런던에서 일하는 형의 연락을 받는다. 오언의 형이 런던으로 상경해서 하이 홀본(High Holborn)이란 사람에게서 가게를 넘겨받았으니 일을 도우러 오라는 것이었다. 마침 지루한 시골에서 벗어나고, 더 큰 세계를 보고 싶었던 그는 형에게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곧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서 단 돈 40실링만을 가진채로 웨일즈 고향을 떠나 런던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싣는다.런던에 도착한 오언은 모종의 사정으로 형의 가게에서는 일을 할 수가 없었고, 대신 스탬포드에 있는 부모님의 지인 맥거포그 씨가 운영하는 거대한 포목점에서 일자리를 구한다. 11살이던 촌뜨기 오언은 런던이라는 대도시에서 거대 포목점의 소년 도제(교육)로써 일을 시작하였고 소년 도제 오언의 연봉은 1년차는 무급, 2년차는 8파운드, 3년차 10파운드였다. 이때부터 그는 스스로 생계를 부양하기 시작하고 부모나 친척으로부터는 어떠한 도움도 받지 않았다.
소년 도제 오언의 고용주 였던 맥거포드는 엄격했으나 친철했고, 철저했으나 정직하고 선량하며, 부유하나 허영이나 사치따윈 없는 옮은 사업가라는 평판을 듣고 있었고 오언은 이런 사업가를 첫 주인으로 만난 것을 행운으로 여겼다. 맥거포드의 포목상은 귀족과 부유층만을 상대하며 항상 대금을 현금으로만 주고받는 고급 포목점이었으며, 오언은 거기서 큰 사업에 적합한 제대로되고 체계적인 사업기술과 감각을 기르게 된다. 맥거포드의 상점에서 오언은 아침 10시에서 오후 4시 까지만 일하고 나머지는 자유시간이었고, 그 외 시간은 자유로운 편이라 오언은 이 시간에 책을 읽거나, 도시를 돌아다니던가 아니면 맥거포드 부부와 함께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가는 등 여러 문화를 배우고 익혔다.스탬퍼드 소년 도제시절 오언은 처음으로 종교에 회의감을 느끼게 된다. 그 이유는 그가 나고 자란 뉴타운과는 달리 스탬퍼드라는 대도시에서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등 도시전체가 그다지 종교적이지 않은 모습을 보였으며, 무엇보다 그의 주변인들이 보인 종파적 활동이 그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의 고용주인 맥거포드 부부가 맥거포드 씨는 장로교, 맥거포드 부인은 성공회 신자라서 서로 종파가 달랐기 때문이다. 오언은 어느때는 맥거포드 씨를 따라 장로교 교회를, 어느때는 맥거포드 부인을 따라서 성공회 교회를 갔고, 종교의 교리 차이로 부부끼리 논쟁을 하고, 다른 교회에 가는 것은 오언입장에서는 무척이나 이상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충격을 받게 된 후 오언은 안식일도 지키지 않는 신실하지 못한 도시분위기에 물이 들었는지, 종파나 교리같은 것에 연연하면서 서로 옮고 그름을 따지며 편을 가르고 있는 종교계 상황에 회의를 느꼇는지 그다지 종교에 열성적이지 않게 되었다.
3년간의 도제 생활을 마친 오언은 진로탐색과 휴식을 위하여 맥거포드의 포목점을 그만두게 된다. 맥거포드가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서 그의 밑에서 계속 일하라고 권하였으나, 오언은 정중히 거절하고 그의 고향인 뉴타운으로 귀환한다. 오언은 고향에서 짧은 휴식을 취하고 다음 취직처를 찾으로 런던으로 다시 떠나게 되고, 전 고용주 맥거포드의 추천으로 포목상인 플린트앤파머라고 하는 곳에서 조수생활을 시작한다.
플린트앤파머 포목점은 맥거포드의 포목점과는 전혀 다른곳이 었다. 플린트앤파머의 손님들은 계급이 낮은 사람들이었고, 모든 거래는 그 자리에서 현금으로 즉시 이뤄 졌으며, 밤낮없이 손님이 몰려들어서 흥정같은 것은 전혀 할 수 없을 정도로 혼잡하며, 동급 상품을 파는 다른 상점에 비해서는 휠씬 저렴하게 상품을 구매가능한 곳 이었다. 어떤 고객이 그곳에서 흥정을 하려고 한다면 직원들은 그를 상대하지 않고, 바로 다음 사람들을 보러 갈 정도였다. 플린트앤파머에서 오언은 그야말로 혹사 당했는데, 새벽일찍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정돈을 하고, 가게를 정리하며 8시부터 밤 11시 까지 정신없이 몰려드는 손님들을 상대해야 했다. 점심저녁 식사는 조수들끼리 교대로 움직이면서도 아주 간편한 것만 잽싸게 집어서 입에 우겨넣고 차를 마시는 것으로 끝이었고, 그 이후에는 10시 또는 12시까지 밤 늦게까지 손님을 상대한 후 새벽 2시까지 장사를 하느라 어수선해 진 가게내부를 정리해야 하는 것이었다. 몇 개월 후 그는 비쩍 말랐고, 기력이 쇠하였으며, 일을 끝내면 계단 난간을 붙잡으면서 침실로 간 다음에는 기절할 듯이 자야했다.
플린트앤파머에서의 노예생활에 질린 오언은 곧 새 직장을 찾기로 한다. 오언은 곧 새 직장을 찾게 되는데 부모님의 지인이었던 헵틴스톨씨가 추천해 준 새터필드 포목상에 취직하게 된 것이다. 새터필드 포목상은 맥거포드의 포목상과 같이 상류층 손님을 상대하는 고급 상점이었으며, 숙박과 식사, 세탁을 제공하며, 연봉으로 40파운드를 제시했다. 새터필드 포목상의 고객들은 공장주, 지주, 상인 등 상류층이었고, 새터필드가문 역시 상류층이었으므로 오언은 플린트앤파머 시절보다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새터필드 모폭점이 마음이 들었던 오언은 여기서 18살 까지 일하게 된다.
11살 부터 시작된 포목점 생활에서 오언은 좋은 옷감을 구분하는 안목을 가지게 되었고, 맥거포드, 플린트앤파머, 새터필드 라는 세 포목점 모두 사업적 측면에서 배울 것이 많고, 개성적인 면이 있었으므로 오언은 사업상 어떠한 상황에서도 적응할 수 있는 대처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18세의 오언은 상류층, 중류층, 하류층 등 모든 유형의 고객을 상대하는 법을 배웠으며, 회계장부를 쓸 줄 알았고, 어느 옷감이 좋은 옷감인지 나쁜 옷감인지 구분할 줄 알았으며, 당시 영국의 직물 산업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배웠고, 무엇보다도 그 당시 사회초년생 치고는 두둑한 보수를 받아서 새 사업을 시작할 수 있던 상태였던 것이다.
2.3. 청년 사업가 오언
1789년 18세 오언은 새터필드 포목점에서 나와서 자신이 직접 새로운 사업을 하기로 결심한다. 1789년의 영국은 안밖으로 많은 변화를 겪고 있었는데, 옆 나라 프랑스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유럽 대륙의 정세가 크게 요동쳤고, 경제적으로는 기술혁신으로 산업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도시가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었고, 이 혼란스러운 시대에 편승한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가진 발명가, 사업가들이 우후죽순으로 튀어 나왔으며, 산업의 고도화로 토지를 기반으로한 모직물귀족이 쇠퇴하고, 어쩔 수 없이 도시로 온 노동자라는 계급, 공업 자본을 바탕으로한 신흥 면화귀족들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혼란스럽지만 어찌 됐든 간에 도시, 자본, 공업이 급격하게 성장하는 시기에 오언은 18세라는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소년 도제 시절 익힌 여러 사업적 능력과 그 동안 모은 자본, 마지막으로 약간의 운으로 경제적으로 성공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2.3.1. 초기 사업
18세에 청년 사업가가 되기로 결심한오언은 어니스트 존스라는 발명가와 함께 동업하게 된다. 어니스트 존스는 오언의 전 직장이었던 새터필드 포목점에 여성용 옷을 만들 때 사용하는 철제 틀을 만들어 납품하는 기계공이었다. 어니스트 존스는 오언에게 동업을 제안하는데, 오언이 자본을 대면 자신이 새 방적기을 만들어내서 팔아 보자는 것이었다. 존스는 사업이 성공하면 그 이익은 반반씩 나누어 공평하게 가지자는 조건이 걸었다. 오언은 존스의 아이디어가 괜찮다고 생각하고 동업제안을 수락한다.오언은 그 동안 자신이 모은 100파운드를 사업을 위한 자본으로 삼고, 존스가 기계를 만들기로 결정한다. 동업을 하기로 결정한 오언과 존스는 작업장을 빌리고, 부품과 원료를 구하며, 일꾼들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오언은 공장장일이 처음이었으나 곧 익숙해 지고 능숙하게 공장일을 관리하기 시작한다. 오언은 공장의 규칙을 만들었고, 부서를 조직하였으며, 기계들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알게 되었다. 사업은 순탄하게 잘 돌아가기 시작했고, 오언과 존스는 짧은 시간에 많은 이득을 거둘 수 있었다.
오언은 존스와 사업을 하던 중 맥거포드로 부터 연락을 받게 되었다. 내용은 맥거포드가 오언에게 사업자금을 대 주어 가게를 차리고, 사업이 잘 될시에 맥거포그의 자본으로 설립하고 오언이 운영하는 가게의 지분을 오언에게 넘기기로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너무도 굉장히 좋은 조건이었고, 단숨에 부유한 포목상 주인이 될 기회였던지라 오언도 이 제안에 대해여 깊게 생각했지만, 결국에는 오언은 맥거포드의 제안을 거절하는데, 이는 존스와 하는 사업에 집중해야 했고, 나중에 있을 존스와의 불화가 그 때에는 깊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업은 순탄게 잘 되고 있었지만, 몇 달 가지 않아서 오언과 존스는 불화를 빚게 되는데, 오언은 존스가 기계공으로써는 우수하지만, 사업상 동업자로 삼기에는 여러가지로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고, 존스는 존스대로 어떤 자본가에게 새로운 사업 제안을 받은 것이 원인이었다. 이러한 불화속에 오언과 존스는 서로의 사업관계를 청산하기로 마음먹었고, 존스는 오언의 사업지분을 매입하고, 매입의 대가로 여섯대의 뮬 방적기, 실감개, 완제품 실 포장기계 등을 오언에게 넘기기로 하였고, 오언은 이 제안에 수락했다. 이렇게 청년사업가 오언의 첫 사업은 끝이 났다.
오언은 곧바로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앤초츠 레인의 큰 공장부지를 임대한다. 오언은 존스에게 받은 기계로 사업을 시작하려 하지만 존스의 사업은 곧 망해버렸기 때문에 약속했던 뮬 방적기 6대 중에 고작 3대만이 오언에게 넘겨졌다. 오언은 3명은 직원을 고용해서 3대의 기계를 조작하도록 했으며, 나머지 존스에게 받지 못해 남아돌고 있던 방적기 3대분의 공장부지에는 새로운 임대자를 받아들여서 세를 받아서 수익을 창출했다. 조방사 1파운드를 12실링에 매입하여 면화실을 만들었으며, 면화실 1 파운드 당 22실링으로 판매하였다. 오언은 주당 6파운드라는 이익을 얻게 되었다.
이 시기 오언은 세인트 앤즈 광장의 할 늙은 과부의 집에 머물렀다. 오언은 이 집에서 방칸을 빌렸고, 고객을 맞이할 사무실은 다른 사업자들과 같이 번갈아 가면서 사용했다. 주간 하숙비는 반 기니금화[3] 였고 집은 낡았지만 깨끗했고, 식사는 빵과 치즈, 푸딩, 버터와 에일맥주 등 다채롭게 잘 나왔다. 이렇게 식사가 잘 나오고 배불리 먹다 보니 오언은 이렇게 잘 해주고도 집주인이 남는게 있을까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오언은 앤초즈레인의 공장이 완성되고 나서는 공장 경영에 집중하기 위하여 공장에 기숙사를 짓고 거기서 지내기 시작한다.
2.3.2. 드링크워터
오언은 엔초즈레인의 공장을 운영하면서 새로운 기회를 찾기로 한다. 그리고 그 기회는 오래지 않아서 왔는데 바로 부유한 무역상이자 맨체스터의 거대 면화공장의 주인이었던 드링크워터가 자기 공장을 운영해줄 새로운 공장장을 찾는다는 이야기 였다. 드링크워터는 자본은 많은 무역상 겸 경영자였지만, 기계와 공장운영에는 서툴렀고, 그가 고용하던 전임 공장장인 조지 리라는 사람이 떠나면서 공장운영은 난항을 겪게 되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객적으로 자신의 공장을 대신 경영해줄 숙련된 전문 공장장을 뽑으려고 한 것이다.오언은 이 소식을 듣고 바로 드링크워터를 만나러 갔고 면접을 본다. 드링크워터는 새파란 20살 젊은이가 찾아온 것에 적잖이 놀라면서 면접을 하며 여러가지를 질문하였다. 어려보이는데 나이가 어떻게 되냐, 평소 몇번 술을 먹으며, 몇번 취하냐 등을 물었고 마지막으로 연봉으로 몇 파운드를 원하냐고 물었다. 오언은 즉시 연봉 300파운드를 불렀는데 드링크워터가 놀라면서 지금까지 여기 면접 온 모든 사람 연봉 전부를 합쳐도 300파운드는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오언이 무슨 자신감으로 300파운드를 불렀는지 물었다. 오언은 자기가 어리지만 번듯한 공장의 경영자라고 설명하면서 1년간 300파운드 이상의 실적을 올리는 자기 공장의 실적서를 보여주었다. 오언 공장의 실적을 본 드링크워터는 납득하면서 마지막으로 오언을 추천해 줄 인사들이 있냐고 물었고, 오언은 자신을 추천해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맥거포드, 플린트, 파머, 섀터필드를 들면서 이들이 자신을 추천해줄 것이라고 설명했다. 드링크워터는 며칠후에 연락을 준다면서 오언을 내보냈고 며칠 후 오언의 채용을 결정하였다. 드링크워터는 오언의 채용을 결심하면서 오언이 경영하는 엔초즈레인의 자산까지 매입하였다. 이렇게 20살 나이에 오언은 연봉 300파운드에 500명의 직원을 거느린 공장장된 것이다.
드링크워터의 공장장이 된 오언은 공장을 손보기 시작한다. 오언은 인수인계 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였으나 일을 시작해야 했다. 공장 원료를 구입하고, 전임자가 남겨 놓은 공장과 기계 도면을 봤으며, 기계를 효율적으로 재조정하며, 직원들을 교육시켰고, 기계를 작동시켜서 실을 뽑아내고, 그 실을 포장하며, 포장된 실을 시장에 팔거나 납품하고, 직원들에게 임금을 주며, 회계장부를 썻다. 그가 처음 공장을 손보던 6주 동안 그는 새벽에 일어나서 공장에 제일 일찍 출근했으며, 밤늦게 까지 공장일을 진두지휘하면서 가장 마지막으로 퇴근하였다. 몇개월이 지난 후 그는 자신의 임무와 위치를 확립했으며, 공장을 가동하면서, 모든 업무 부서에 명령하고 지도할 준비를 마쳤다.
그는 공장의 수익성을 개선하려고 하였다. 그는 더 얇고 가는 실을 만드는 방법을 알아냈고, 1파운드당 120타래에 불과라던 실을 1파운드당 300타래로 늘리는데 성공했다. 또 그는 공장에 공급되던 면화의 원산지를 서인도, 남아메리카에서 미국으로 바꾸었다. 그가 서인도나 남아메리카의 면화를 쓰지 않고, 미국 조지아 시아일랜드 면화를 사용한 것이 우연인지 계획이었지는 의문이나 결과적으로 미국산 면화는 공장에서 생산된 실의 질을 크게 끌어 올렸다. 이렇게 생산된 오언의 면화는 질이 좋아서, 다른 공장에서 생산한 실보다 10% ~ 50%나 높은 가격에 팔렸다. 이렇게 사업이 번창하자 오언은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생산된 실의 포장지에 자신의 이름이 인쇄하여 넣었다.
오언이 이렇게 공장을 안정적으로 안착시키는 사이에 그의 고용주였던 드링크워터는 공장일에 일체 간섭하지 않았다. 그는 오언이 공장을 경영하는데 딱히 간섭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도움을 주지도 않았다. 드링크워터는 공장에 수익이 잘 나는가만 신경을 썻고 실제 소유주로써는 1년에 한두번 자신의 동업자, 투자자들에게 공장을 견학시켜려 오는 것이 전부였으며, 그런 일 빼고는 자신의 영지에서 은거하면서 오언에게 공장을 맡기다 시피 했다. 몇 개월이 지나 오언이 경영하는 맨체스터 공장에서 큰 수익이 나기 시작하자 드링크워터는 그에게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노스위치에 있는 면화공장까지 맡겼다, 오언의 성공적으로 공장을 이끌어 나갔으며 이 성과에 만족한 드링크워터는 첫해에 400파운드, 두번째해에 500파운드, 그 이후부터는 해마다 자신의 공장 지분 일부를 양도하여 동업자로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한다. 당시 평범한 공장 노동자들의 연봉이 50파운드에도 휠씬 못미쳤던것을 본다면 오언은 20대 초반에 이미 일반인에 십수배에 달하는 연봉과 아마도 수천 파운드의 가치가 있을 동업자증명서까지 가진 성공한 사업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오언은 공장이 정비되고, 수익이 개선되며, 드링크워터의 확실한 신뢰를 얻은 오언은 자신의 위치를 확실하게 확립하자, 자신이 진짜 하려던 일에 시작한다. 그는 공장 기계와 노동자들을 재배치했고, 노동자들의 노동 환경을 개선하고, 그들에게 도덕적 소양을 함양시키도록 노력하였다. 오언은 환경이 인간을 만든다는 자신의 철학을 시험해본 것이고 결과적으로 공장 생산량이 늘어나자 훌륭한 환경이 훌륭한 인간을 만든다는 자신의 신념에 확실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만사가 잘 되나 싶었지만 1792년 오언은 갑작스럽게 드링크워터를 떠나야 하였다. 그 이유는 드링크워터가 오언과 한 동업약속을 어겼기 때문이었다. 드링크워터는 새뮤얼 올드노라는 사람과 자신의 딸의 혼인을 추진하였다. 새뮤얼 올드노는 유명한 모슬린 천 사업가였고, 당대 최고의 기업가였던 리처드 아크라이트[4] 의 동업자로 그 명성이 영국 전역에 퍼져있을 정도로 명성이 자자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당시 새뮤얼 올드노는 막대한 채무에 시달리고 있었고 급하게 돈이 필요한 상태였다. 이런 이유로 새뮤얼 올드노는 빚을 갚고, 자신의 사업을 확장하기 위하여 자금이 필요했고, 드링크워터에 접근했던 것이다. 드링크워터 또한 자신의 딸을 유명한 사업가에게 시집보내는 것이 나쁠것이 없으므로 양측의 이해가 맞았으므로 자연스레 약혼이 성사되었다.
새뮤얼 올드노는 드링크워터의 방직공장을 자신의 휘하로 두길 원했지만, 그 과정에서 오언이 동업자약속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해가 맞았던 드링크워터와 달리 오언이 동업자가 되면 자신에게 맞춰줄리가 없었음으로 올드노는 드링크워터를 설득했고, 드링크워터는 오언과 동업자 약속을 파기하겠다고 통보했다. 이 통보를 받자 오언은 분노를 감추지 않고 드링크워터 앞에서 수천달러짜리 동업자 증명서를 찢어서 불태워 버리고는 공장장일을 그만두겠다고 선언 하였다. 드링크워터는 오언을 잃고 싶지 않았으므로 공장의 지분대신에 더 많은 연봉을 제시하여 오언을 잡아두려 했지만 오언은 단호했고, 드링크워터와의 인연은 이렇게 끝이 났다. 이때 드링크워터에서 4년을 일했으므로 오언의 나이는 24살이었다.
2.4. 뉴레크의 주인 오언
드링크 워터에서 나온 오언은 곧바로 새로운 일을 찾기 시작한다. 여러 동업자, 투자자를 만나고 새로운 사업 아이디어를 생각하면서 바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그리던 중 오언에게 좋은 기회가 왔는데 그것이 바로 뉴레너크 공장이 매물로 나왔다는 소식이었다.
오언은 뉴레너크를 구입하였고, 공장의 주인이 된다. 뉴레너크 주인 시절의 오언은 경제적으로 성공하고, 자기의 뉴레너크 공장에서 자신의 교육, 사회 실험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노동자들에게 높은 임금, 도덕성 주입, 정규 교육, 기업 복지를 시행한다. 2.4.1. 뉴레너크의 주인이 되다
뉴레너크는 스코틀랜드 사업가인 데이비드 데일이 운영하는 공장으로 데이비드 데일은 공장 경영자 겸 자선사업가로 지역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이 있는 유력한 인물이었다.2.4.2. 오언씨, 우릴 내버려 두시오
2.4.3. 뉴레너크를 떠나다
2.4.4. 뉴하모니
2.5. 사회운동가 오언
2.5.1. 노동자들과 함께하다
2.5.1.1. 노동교환소와 노동조합
2.5.2. 실패
2.6. 노년기 오언
2.6.1. 노망난 노인
2.6.1.1. 심령술에 빠지다
2.6.1.2. 식지 않은 열정
2.7. 최후
3. 사상
오언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주장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귀족이나 자본가에 의한 독재와 다를게 없다고 보아 부정적으로 보았다.[5]그는 영국의 노조 운영 방식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그는 각 직업별 노동조합을 하나로 묶어 전국노동조합연합을 만들고 그들 스스로가 자주적인 경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후대에 아나키스트들이 주장하는 노동자 자주 경영을 앞서서 주장한 것이다. 또 전국등가노동교환소를 설립해 협동조합들이 자본주의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자본주의자이기도 했다. 또 그는 대안화폐를 지지했는데, 1844년 오언의 제자들은 흑자도산을 불러올 수 있는 외상거래가 아닌 현금거래, 품질이 좋은 생필품 유통을 규칙으로 하는 생활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이를 로치데일 협동조합이라고 한다.
최초로 자신의 사상에 사회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하였고 그래서 최초의 근대적 사회주의자로 불린다. 또한 생시몽, 푸리에와 함께 3대 공상적 사회주의자이다. 협동조합을 통한 사회주의를 지지했기 때문에 전세계 협동조합 설립운동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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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 당수 | 에드 밀리밴드 · 해리엇 하먼 · 제러미 코빈 | ||||||
국회의원 | 제59대 노동당 국회의원·제59대 신 페인 국회의원·제59대 사회민주노동당 국회의원 | ||||||
기타 | 조지 갤러웨이 · 켄 리빙스턴 | ||||||
그 외 인물 | 로버트 오언 · 조지 버나드 쇼 · 존 러스킨 · 카를 마르크스* · 토니 클리프* | ||||||
관련 주제 | 연성좌파 · 강성좌파 · 군주국의 공화주의 (일부)** · 데일리 미러 · 레드 월 · 모멘텀 | ||||||
영국 정치 관련 문서 (사회주의 · 자유주의 · 보수주의) * 영국에서 사회주의 활동이나 저술 등을 하였으나, 영국 국적을 가지지 않았다. ** 영국 사회주의자들의 평균적인 경향이지 전부는 아니다. 키어 스타머를 비롯한 중도좌파적 사회주의자 일부는 군주제 유지를 지지하기도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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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사회주의 관련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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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 포이스 뉴타운[2] 19세기 초 교육가 조지프 랭커스터(Joseph Lancaster)가 만든 교육방법이자 학교이다. 남녀를 불문하고 반을 만들고 먼저배운 아이가 나중에 배우는 아이를 교육시켰다. 학비는 1년에 겨우 4실링이 전부였고, 교사 교용비나 학교시설 등 큰 비용이 필요치 않았다.이 때문에 좋은 반응을 받았지만, 정규 교육시스템 없이 어린이가 어린이를 교육시킨다는 명백한 한계와 교회 교육과 정규교육 과정을 지지했던 영국 상류사회에서 견제를 받아서 사라진다.[3] 1기니금화는 21실링 = 약 1파운드 다.[4] 수력 방적기를 발명하여 면화 생산성을 크게 향상시키고, 많은 돈을 벌었다. 하지만 그의 수력방적기는 특허권논란에 휘말렸고 결국 특허를 박탈당했다.[5] 마르크스와 엥겔스 역시 오언의 사상을 부정적으로 보고< 공산당 선언>에서 그를 ‘유토피안 사회주의자’라고 비판하였다. 다만 엥겔스는 그의 이론이 가치가 있다고 존중해주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