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紡績機[1] / Spinner동물과 식물에서 추출된 섬유를 가공해 실을 만드는 기계. 의복 산업의 3대 축 중 하나다.[2]가장 초보적인 방적기는 가락바퀴로 이미 신석기 시대부터 존재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방적기인 물레는 그 기원이 정확하지 않으나, 한국의 경우 청동기 이후 가락바퀴의 출토량이 감소하여 그때부터 물레가 사용되었음을 추정할 뿐이다
18세기의 산업 혁명기에 직조의 자동화가 가능해지면서 실에 대한 수요도 폭등했다. 자연스럽게 한 번에 여러 가닥의 실을 뽑을 수 있는 제니 방적기가 개발됐고, 이를 수차와 연결해 자동화시킨 신형 방적기가 개발됐다. 이에 따라 실의 생산량이 급등하자, 여기에 맞춰 또 다시 신형 직조기가 개발됐다. 이런 식으로 방적기와 직조기가 서로 영향을 미치며 개량되는 순환이 전개됐다. 그 결과, 섬유/의복산업은 산업 혁명의 핵심적인 한 축이 됐다.
2. 종류
- 물레
누에고치로 명주를 만드는 작업 수작업으로 로프를 만드는 작업 페달이 달린 물레 사용법
최초의 기계화된 방적기. 그 기원이 정확하지 않으나 동아시아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경우 청동기 이후 가락바퀴의 출토량이 감소하여 이때부터 물레가 전래되었다고 추정한다. 물레가 전래되지 않은 지역에서는 아직도 가락바퀴를 사용하기도 한다(...)
꼬인 실이 감기는 실패 부분과 실패를 돌려주는 바퀴 부분으로 나뉜다. 계속 균일하게 원료인 섬유를 넣어줘야 양질의 실을 뽑아낼 수 있다. 현대화된 물레는 페달을 이용해 일정한 속도로 실패를 돌려줄 수 있어 가락바퀴보다 훨씬 빠르게 실을 뽑아낼 수 있다.
- 제니 방적기
영국의 방적업자 겸 목수였던 제임스 하그리브스가 만든 방적기.[3] 한 사람이 한번에 8가닥의 실을 뽑아낼 수 있도록 고안된 기계. 이 기계의 탄생으로 방적 효율은 8배로 올랐으며, 이렇게 시작된 '기계에 의한 대량생산'은 산업 혁명의 신호탄이 되었다.[4] 정작 하그리브스는 제니 방적기의 영향으로 실의 가격이 하락해 다른 방적업자들로부터 원한을 샀고, 쫓겨나듯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야 했다.
- 수력 방적기
가발제조공이었던 리처드 아크라이트가 개발한 방적기. 제니 방적기의 경우, 실의 대량생산은 달성했지만 동력을 인간의 신체로 확보한다는 한계가 있었다. 반면에 아크라이트가 만든 신형 방적기는 인력이 아닌 수력으로 가동됐다. 따라서 한 번에 뽑을 수 있는 실의 개수는 제니방적기보다 적었지만, 그 차이를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실을 뽑아내는 속도가 빨랐다.
3. 여담
- 1700년대 초 영국의 원면 수입은 500톤 정도에 불과했었지만, 제니 방적기를 시작으로 여러 방적기가 개발되고, 그 방적기를 이용한 공장들이 대량으로 건설되면서 1800년대에 들었을 때 원면수입은 25,000톤까지 늘어났다.
- 사실 수력방적기를 최초로 발명한 지역은 서구가 아니라 중국이다. 원나라 때 작성된 <왕정농서>라는 책에 축력과 수력으로 움직이는 방적기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만 중국에서는 발달된 방적기가 생산하는 실의 생산량에 조응할 직조 기술까지는 마련되지 않았던지라, 근대적인 섬유/의복산업이 탄생하지 않았다.
- 방직기와 자주 혼동된다. 방적기는 실을 뽑아내는 기계이고, 방직기는 실로 직물을 짜는 기계이다.
[1] 적(績)은 섬유를 가공해 실을 잣는다는 의미.[2] 의복은 방적기가 실을 뽑고, 직조기가 천을 짠 후, 재봉기가 용도에 맞게 옷을 재봉하는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3] 일화에 따르면 어느날 하그리브스의 딸이 물레를 넘어뜨렸는데 그 이후에도 온전히 작동하는 것을 보고 하그리브스가 여러 개의 방추를 사용한 기계를 고안해냈다고 한다. 그래서 딸의 이름인 제니를 붙였다.[4] 이 점으로 말미암아, 카를 마르크스는 제니방적기를 산업 혁명의 핵심요소 중 하나로 높게 평가했다.[5] 하지만 크롬턴은 이 방적기로 그렇게까지 큰 돈을 벌지 못했다고 한다. 이유는 당시에는 이 방적기에 대한 특허를 취득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인데, 그 때문에 크롬턴은 이 방적기를 공개하지 않고 파괴하는 것도 고민했지만 몇몇 제조업체가 이 방적기를 사겠다는 제안을 해서 방적기를 공개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고 한다. 그렇게 방적기를 산 업체들에 의해 뮬 방적기의 양산이 이뤄지게 되었는데, 정작 크롬턴은 이들로부터 뮬 방적기에 대한 로열티를 단 한 푼도 받지 않는 것을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