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당의 의장을 맡고 있는 미국의 정치인에 대한 내용은 앤드루 양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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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대 UN주재 미합중국 대사 앤드루 잭슨 영 주니어 Andrew Jackson Young Jr. | |
<colbgcolor=#030427><colcolor=#ffc224> 출생 | 1932년 3월 12일 ([age(1932-03-12)]세) |
미국 루이지애나 주 뉴올리언스 | |
재임 기간 | UN주재 미합중국 대사 |
1977년 1월 30일 ~ 1979년 9월 23일 | |
애틀랜타 시장 | |
1982년 1월 4일 ~ 1990년 1월 2일 | |
부모 | 아버지 앤드루 영 시니어 어머니 데이지 영 |
배우자 | 진 칠즈 (1954년 결혼, 1994년 사별) |
자녀 | 슬하 4명 |
학력 | 하워드 대학교 (B.S.) 하트퍼드 대학교 (신학 / BDiv) |
종교 | 개신교 (회중교회) |
의원 선수 | 3 (하원) |
의원 대수 | 93, 94, 95 (하원) |
지역구 | 조지아 제3구 |
소속 정당 | |
약력 | 연방 하원의원 (1973~1977 / 조지아 3구) 주UN 미국대사 (1977~1979) 애틀랜타 시장 (1982~1990) |
1. 개요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가, 목사, 외교관, 정치인. 지미 카터 행정부의 주 UN대사와 애틀랜타 시장직을 역임했다.2. 생애
2.1. 흑인 민권운동 경력
1932년 뉴올리언스에서 태어났다. 흑인 민권운동가라고 하면 떠오르는 인상과 달리 아버지는 치과의사, 어머니는 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으며, 동북부의 명문 신학 대학교인 하트퍼드 대학교에서 신학 석사 학위까지 딴 엘리트였다.[1] 하지만 자신의 출신 성분 때문에 같은 흑인들이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고, 대학교 때부터 흑인 민권운동에 뛰어들었다.1957년, 남부를 떠나 뉴욕시로 이주했고, 청소년을 위한 기독교 전도 TV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명성을 얻었지만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1960년대 남부로 돌아와 살해협박을 받으면서까지 민권운동을 벌였다. 앤드루 영의 흑인 민권운동 경력은 그야말로 전설로 평가받는데, 그는 마틴 루터 킹의 측근이자 친구였다. 둘의 나이 차이는 3살에 불과했고 루터 킹은 영을 자신과 동등한 흑인 민권운동의 동지로 받아들였다. 마틴 루터 킹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그가 있었는데, 1968년 킹 목사가 암살당할 때도 동행 중이었다.
이런 명성을 얻어 1970년 흑인이 다수 거주하는 애틀랜타 시내를 관할하는 조지아 5구의 하원의원으로 출마하나 백인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면서 큰 표차로 공화당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하지만 2년 후 절치부심해 다시 하원의원으로 출마했고, 이번에는 당선되었다. 앤드루 영은 재건시대 이후 남부에서 당선된 최초의 흑인 하원의원이었다고 한다. 이후 3번이나 내리 재선에 성공하며 원내 흑인 민권 세력을 대표하였다. 또 인종차별 철폐에 앞장선 조지아 주지사 지미 카터 대통령과도 친한 관계를 유지했다.
2.2. 주 유엔 대사
1977년, 지미 카터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앤드루 영은 뜬금 없이 UN 대사에 임명된다. 카터 대통령이 표방하는 "인권 외교"의 일환으로 앤드루 영이 미국의 외교를 대표하는 UN 주재 미국 대사에 임명된 것이다. 임명 당시에도 외교와 전혀 상관이 없는 흑인 목사가 도대체 미국 외교를 어떻게 대표하냐며 논란이 많았지만 일단은 상원 표결을 받고 UN 대사로 인준되는데까지는 성공한다.하지만 외교 경력이 전혀 없었던 탓에 실수를 거듭했다. 그는 역대 최악의 주 UN 미국 대사로 종종 평가받는다. 앤드루 영은 UN대사로서 반 이스라엘, 친 아프리카, 제3세계주의 외교를 표방했는데, 첫번째로 미국의 외교적 이익은 생각하지 않고 툭하면 인권을 들먹이는 태도로 욕을 먹었으며, 두번째로 즈비그니에프 브레진스키 국가안보보좌관의 대소련 강경 외교 노선과 상충하는 면이 많아서 많은 국가들이 미국의 외교 노선이 무엇인지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1978년 7월, 프랑스 언론 르 마르탱 드 파리(Le Matin de Paris)와 소련의 인권 탄압에 대한 인터뷰를 하던 도중, "우리 미국도 소련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이유로 억울하게 수감된 사람들이 많다"는 실언을 했다. 이는 남부에서 부당하게 체포된 흑인 민권운동가를 의미하는 것이었는데, 흑인 민권운동가로서는 나름 일리가 있는 발언이었을지는 몰라도 UN대사로는 아주 부적절한 발언이었기 때문에 비판받았다. 해외 언론 앞에서 소련이나 미국이나 다 독재국가다라는 발언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이 발언의 여파로 하원에서 탄핵안까지 올라갔지만, 일개 발언 가지고 UN 대사를 짜르는건 무리라는 반응이 많아서 결국 부결되긴 했지만 앤드루 영의 위신은 크게 추락했다.
게다가 짐바브웨에 관련해서도 로버트 무가베를 지지해 미국 우파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앤드루 영은 이언 스미스를 파시스트라고 부르고 무가베의 흑인 정권 수립을 지지했고, 제시 헬름스나 해리 F. 버드 주니어 같은 남부의 보수파 의원들은 앤드루 영이 흑인 민권운동 경력 때문에 미국의 국익을 생각하지 않고 지나치게 인권만 따진다며 비판했다.[2]
1979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외교 위기가 불거지자, 앤드루 영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와 접선을 시도했다. 그런데 미국은 팔레스타인 측이 이스라엘의 주권을 인정하지 이전까지 PLO를 비롯한 팔레스타인 독립 단체와 선제 교섭을 하지 않는 방침을 트루먼 행정부 이후 계속 유지해왔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메나헴 베긴 총리까지 공개적으로 이를 비판할 정도로 외교적인 문제가 되었다. 카터 대통령은 앤드루 영에게 사퇴를 요구하는 방식으로 사실상 영을 경질했으며, 영은 불과 2년 반 만에 불명예스럽게 UN 대사 자리에서 물러났다.
앤드루 영의 좌충우돌 행보는 카터 행정부가 내세운 "인권외교"의 참담한 실패를 상징하는 것으로 널리 받아들여진다. 카터 행정부를 전후해 논란이 어느정도 있을지언정 능력은 확실한 외교관들[3]이 UN대사를 맡으며 냉전을 미국의 승리로 이끌었다는 점과 대비되어 더욱 그런 평가가 두드러지는 면도 있다.
2.3. 애틀랜타 시장
1979년 불명예스러운 UN대사직 은퇴 이후, 1981년 애틀랜타 시장 선거에서 마틴 루터 킹 유족들의 추천을 받아 공직 복귀를 시도했다. 애틀랜타 내에서는 기반이 있었던 영은 유대인 커뮤니티의 지도자이자 조지아 주 하원의원을 지낸 시드니 마커스(Sidney Marcus)를 55% 대 45%로 꺾고 시장으로 선출되었다.UN대사로 지내며 여러모로 무능한 행보를 보여 처음에는 우려를 샀지만, 정작 애틀랜타 시장 직을 지내면서는 UN 대사를 지낼때와는 딴판으로 매우 유능한 시정을 펼쳤다. 700만 달러의 사업을 애틀랜타에 유치했고, 임기 말에는 1996 애틀랜타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유치했다. 진보좌파 성향이었음에도 친기업 정책을 펼쳐 애틀랜타에 많은 대기업 본사와 사업을 들여왔고 흑인 민권도 크게 신장시켰다. 1985년 시장 선거에서는 무려 80%대의 득표율로 재선할 정도로 능력을 확실하게 입증받았다.
오늘날 애틀랜타가 미국 남동부에서 가장 큰 도시로 성장하고 있는데에 앤드루 영의 역할이 어느정도 있다는 분석이 많다. 외교관으로서는 영 아니었지만 애틀랜타 시장으로서는 아주 좋은 평가를 받았고, 1993년 역사학자, 도시학자, 정치학자 등을 상대로한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일리노이 대학교가 발표한 미국 역대 최고의 시장 목록에서 15위에 선정되기도 했다.[4]
2.4. 이후의 삶
애틀랜타 시장 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1990년 조지아 주지사 직에 출마하려고 했으나 선거 캠페인이 부실해 경선에서 탈락했고, 그 후로는 정계에서 물러나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1996년 하계 올림픽 때 공동 의장을 잠깐 맡아 성공적으로 올림픽을 개최하기도 했다.시장직에서 물러난 이후 몇차례 논란을 빚었다. 전세계 전쟁의 배후에 유대인이 있다는 발언을 해 물의를 빚었으며, 2008년에는 월마트의 이권을 대변하는 단체의 대표를 지내 진보좌익 진영에게 비판받았다. 게다가 월마트가 영세 상인들을 어렵게 하는게 아니냐는 기자의 비판에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우리 흑인 커뮤니티를 해치는 사람이다. 처음에는 유대인이었고 그 다음에는 한국인이었고 이제는 아랍인들이다"[5]라는 영세상인+유대계+한국계+아랍계 그랜드슬램 비하 발언을 해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6]
고령에 접어든 현재는 흑인 민권운동의 원로 취급을 받고 있으며, 몇차례 방한해 남북 관계에 대한 강연을 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반유대주의 논란을 빚어온 앤드루 영이지만 2020년 상원의원 선거에서는 흑인 커뮤니티에게 유대인 존 오소프를 지지해야한다고 호소해 그가 당선될 수 있도록 도왔다.[7] 같은 해의 조지 플로이드 사망 항의 시위를 지지했지만, 일부 흑인들의 약탈, 방화 행위를 비판하며 폭력 시위는 인종주의자들을 돕는 것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3. 선거 이력
<rowcolor=#ffc224>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70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조지아 5구 | | 58,394 (42.63%) | 낙선 (2위) | |
1972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72,289 (52.83%) | 당선 (1위) | 초선 | ||
1974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69,221 (71.60%) | 재선 | |||
1976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96,056 (66.67%) | 3선[8] | |||
1981 | 애틀랜타 시장 선거 | 애틀랜타 | 65,798 (55.13%) | 초선[결] | ||
1985 | 애틀랜타 시장 선거 | 47,745 (81.44%) | 재선 |
4. 여담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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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는 마틴 루터 킹과 같다.[2] 그나마 이때는 무가베가 본색을 드러내기 전이라 참작 여지가 있다. 하지만 앤드루 영은 무가베가 최악의 독재자로 드러난 이후에도 계속 무가베를 지지했으며 심지어 현재까지도 무가베의 독재 정권이 흑인을 해방시켰다며 옹호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3] 진 커크패트릭, 대니얼 패트릭 모이니한, 조지 H. W. 부시, 윌리엄 스크랜턴, 버논 월터스 등. 외교 관련 경력이 없었던 앤드루 영에 비해 이들은 모두 상원의원이나 CIA 부차장, 정치외교학 교수 등을 지낸 중량급 인사였고 UN대사로서 나름대로의 업적을 남겼다.[4] 참고로 역대 최고의 시장은 피오렐로 라과디아 뉴욕시장, 최악의 시장은 W. H. 톰슨 시카고 시장으로 선정되었다. 유명 정치가 중에서는 존 린지 뉴욕시장이 역대 최악 16위, 샘 요티 LA 시장이 역대 최악 9위, 데니스 쿠시니치 클리블랜드 시장이 역대 최악 7위에 선정.[5] You see those are the people who have been overcharging us, and they sold out and moved to Florida. I think they've ripped off our communities enough. First it was Jews, then it was Koreans and now it's Arabs.[6] 이때 한국계 커뮤니티는 앤드루 영을 상대로 거액의 소송을 냈다가 취하했다.[7] 조지아 주 같은 미국 남부주는 흑인의 투표율이 민주당 후보 당선을 좌지우지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딥사우스 주에서는 존 벨 에드워즈, 앤디 배쉬어, 로이 쿠퍼 같은 온건주의자가 아닌 이상 존 오소프 같은 백인들이 민주당 당적을 달고 이기는게 쉬운 것이 아니다.[8] 1977.01.29. 주UN대사 취임을 위해 사임[결] 결선투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