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1972년 대통령 선거 경선 후보 | ||||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0044C9,#0044C9> 정당 | 이름 | 비고 | |
민주당 | 조지 맥거번 | 당선 | ||
민주당 | 휴버트 험프리 | |||
민주당 | 조지 월리스 | |||
민주당 | 에드먼드 머스키 | |||
민주당 | 헨리 M. 잭슨 | |||
민주당 | 윌버 밀스 | |||
민주당 | 셜리 치점 | |||
민주당 | 테리 샌포드 | |||
민주당 | 존 린지 | |||
민주당 | 유진 매카시 | |||
민주당 | 샘 요티 | |||
민주당 | 밴스 하트케 | |||
민주당 | 팻시 밍크 | |||
민주당 | 프레드 해리스 | |||
민주당 | 월터 펀트로이 | 1 | ||
민주당 | 웨인 헤이스 | 1 | ||
민주당 | 칼 스톡스 | 1 | ||
전당대회 대의원 확보만을 위해 홈스테이트에만 출마한 "Favorite Son" 후보 | ||||
1972 · 1976 · 1980 · 1984 · 1988 · 1992 · 1996 · 2000 · 2004 · 2008 · 2012 · 2016 · 2020 · 2024 |
제37대 로스앤젤레스 시장 새뮤얼 윌리엄 요티 Samuel William Yorty | ||
<colbgcolor=#00923f><colcolor=#ffffff> 출생 | 1909년 10월 1일 | |
미국 네브래스카주 링컨 | ||
사망 | 1998년 6월 5일 (향년 88세) | |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
정당 | (1973년 이전) (1973년~1988년) | |
종교 | 개신교 | |
가족 | 베티 헨젤 (배우자/1938년 결혼) | |
재임기간 | 제37대 로스앤젤레스 시장 | |
1961년 7월 1일 ~ 1973년 7월 1일 | ||
연방하원의원[1] | ||
1951년 1월 3일 ~ 1955년 1월 3일 | ||
서명 | ||
군사 경력 | ||
복무 | 미국 육군[2] | |
1942년 ~ 1945년 | ||
최종 계급 | 대위 | |
주요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 태평양 전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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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정치인, 제37대 로스앤젤레스 시장 및 연방하원의원을 역임하였다.2. 생애
네브래스카주의 링컨에서 독일계 미국인 아버지와 아일랜드계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윌리엄 J. 브라이언 지지자였던 그의 아버지 덕분에 청소년 시기부터 정치에 관심을 가졌다.부모가 별거 후 이혼하자 고작 80달러를 가지고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했고 노동을 하면서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와 야간학교에서 공부했다. 민주당 소속으로 정계에 입문한 그는 1937년부터 1941년까지 캘리포니아 주 하원의원을 지냈다. 정치 경력 초반에 요티는 친노조적이고 진보적인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미국 공산당과 연결된 노동조합 조직의 지원을 빌미로 반미활동위원회에서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힐 뻔하자 그는 열렬한 반공주의자로 전향해 캘리포니아 반미활동위원회 창설을 주도한다.1940년에 민주당 소속으로 하이럼 존슨을 상대로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하려 하지만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낙선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 육군 항공대로 태평양 전선에서 복무하였다. 전후 1950년 미국 중간선거에서 연방하원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복귀했다. 리처드 닉슨의 부통령 취임 때문에 발생한 상원의원 보궐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였지만 록펠러 공화당원 토머스 키클에게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민주당 경선에서 린든 B. 존슨을 지지했지만 존 F. 케네디가 대선후보로 선출되자 닉슨을 지지해 민주당원들에게 충격을 주었다.[3]
그렇게 민주당 내에서도 배신자로 몰리며 잊혀지나 싶었으나 로스앤젤레스 공화당 소속 현직 시장인 노리스 폴슨이 시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자 시장 선거에 도전하였다. 평범한 선거였다면 당내 경선을 뚫기도 어려웠겠지만 로스앤젤레스 시장 선거는 출마 희망자라면 누구나 경선 없이 출마할 수 있었다. 서민 출신인 요티는 부유층의 아바타이자 보수주의자로 여겨진 폴슨과 달리 시내 소수 이익집단 청산을 내세웠다. 1960년의 배신으로 인한 민주당 조직의 지원 거부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현직 주지사 팻 브라운도 거침없이 비판하는 포퓰리즘적 선거운동을 하면서 인기를 얻었다. 또한 요티는 미국 3위 인구의 도시[4]에 알맞은 도시 헌장 개정과 고속도로 확장을 요구하는 등의 실용적인 공약들도 제시했다. 그와 대비되게 폴슨은 억지 네거티브만 시전한데다 토론회를 후두염 때문에 망치는 실책들을 연발하며 지지율을 더 잃었다. 선거에서 가장 큰 쟁점이었던 시내 쓰레기 소각장 문제도 기존에 젖은 쓰레기/마른 쓰레기 분류에서 젖은 쓰레기/캔과 병/마른 쓰레기로 분리수거 시스템을 개편하자는 요티의 제안이 더 호응을 얻어 요티는 결선투표에서 흑인과 히스패닉의 압도적 지지로 폴슨을 3%p차로 꺾고 로스앤젤레스 시장에 당선되었다.
로스앤젤레스 시장에 당선된 요티는 공약대로 시의 재활용 시스템을 개편하고 지금까지도 LA 시민들이 이용중인 로스앤젤레스 컨벤션 센터, 로스앤젤레스 동물원, 반스달 예술 공원을 건설해 높은 지지도를 얻었다. 그래서 1965년에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장남 제임스 루스벨트의 도전을 쉽게 제치고 재선에 성공하였다. 그는 대도시 시장답지 않게 우익대중주의 성향이었어서 강제 인종 통합 버싱과 페미니즘에 적대적이었다. 그러다 와츠 폭동[5]이 터지자 요티의 리더십도 시험받게 되었다. 요티는 LAPD의 폭동 강경 진압 중 벌어진 살인을 비호했고 민권 운동가들과 폭동에 개입한 "공산주의자"들을 비난해 흑인들의 증오를 받게 되었다. 1966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팻 브라운을 상대로 도전하지만 38%의 득표를 받고 낙선하였다. 게다가 베트남 전쟁 옹호를 위한 베트남 방문과 로널드 레이건 주지사 당선 축하행사 참여로 민주당 지지층 내 신뢰도는 바닥을 쳐버렸다. 1968년 대선 기간 로스앤젤레스에서 로버트 F. 케네디가 암살당하고 요티가 휴버트 험프리 지지를 거부하자[6] 당내 그의 지지도는 더 떨어졌다.
1969년 시장 선거에서 요티는 톰 브래들리에게 여론조사에서 밀려 낙선할 것이라고 예측되었다. 요티가 브래들리가 범죄에 온건하고 그가 당선되면 흑인우월주의자들이 도시를 점령하게 될 것이라고 흑색선전을 하자 겁에 질린 백인 표심이 요티에게 집결해 역전승에 성공하였다. 닉슨이 베트남 전쟁에서 점진적으로 철수하려 하자 강경한 찬전파던 요티는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경선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뉴햄프셔 프라이머리부터 고작 6%를 얻어 추진력을 상실해 얼마 지나지 않아 후보직에서 사퇴하고 그의 지지자들은 조지 월리스를 지지하게 되었다. 사퇴한 이후로는 당내 진보파 조지 맥거번 지지 거부 운동을 벌이다 그가 대선후보가 되자 공화당으로 당적을 바꾸었다.
1973년에는 브래들리와 리턴매치를 해서 4선을 시도하지만 큰 표차로 낙선했다. 8년 후인 1981년에 법과 질서 회복을 외치며 시장 복귀를 시도하였지만 현직 시장 브래들리에 비해 선거자금이 1/10도 안되는 열세였고, "흑인 후보에게 몰표를 주는 흑인들은 인종차별주의적이다." 라는 망언까지 해서 8년 전보다 더 큰 격차로 패배했다. ## 정계 은퇴 후로는 법조계에서 종사하다가 1988년 뇌졸중을 앓던 중 폐렴으로 사망하였다.
3.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1973 | 입당 | |
| 1973 ~ 1988 | 입당 정계 은퇴 사망 |
4.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36 | 캘리포니아 주 하원의원 선거 | 캘리포니아 64구 | | - (-%) | 당선 (1위) | 초선 |
1938 | 캘리포니아 주 하원의원 선거 | - (-%) | 재선 | |||
1950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캘리포니아 14구 | 47,653 (49.35%) | 초선 | ||
1952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캘리포니아 26구 | 157,973 (87.95%) | 재선 | ||
1954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캘리포니아 | 1,788,071 (45.50%) | 낙선 (2위) | [7] | |
1961 | 로스앤젤레스 시장 선거 | 로스앤젤레스 | [[무소속(정치)| 무당파 ]] | 275,249 (51.45%) | 당선 (1위) | 초선[결] |
1965 | 로스앤젤레스 시장 선거 | 392,775 (57.93%) | 재선 | |||
1969 | 로스앤젤레스 시장 선거 | 447,030 (53.26%) | 3선[결] | |||
1973 | 로스앤젤레스 시장 선거 | 335,857 (43.66%) | 낙선(2위) | [결] | ||
1981 | 로스앤젤레스 시장 선거 | 148,193 (32.23%) |
5. 여담
- 스페인 내전에서 인민전선 지원을 지지했다. 하지만 당시 미국 정치인 대다수는 국민전선에 대한 우호적 중립 노선을 지지했다.
- 인종문제에서 정치적으로는 보수반동적이었지만 의외로 시 공무원들의 인종분리를 철폐했고 최초로 여성 보좌관[11]을 둔 로스앤젤레스 시장이었다.
- 서민적인 소탈한 면모를 가지고 있었고 엘리트주의를 혐오했다. 언행도 거칠어 다른 정치인들과 진보주의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1] 캘리포니아 14구(1951-1953),캘리포니아 26구(1953-1955)[2] 미국 공군의 전신인 미국 육군 항공대로 복무[3] 케네디의 종교인 천주교와 케네디의 아버지인 조지프 P. 케네디의 막대한 재산이 민주당과 국가에 잘못된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명분이었다.[4] 당시 미국 제 2의 도시는 시카고였다.[5] Watts riots, LA 폭동 이전 최대 규모의 도시 인종 폭동이었다.[6] 닉슨과의 밀약으로 차기행정부에서 요티가 중책을 약속받았다는 설도 있었으나 닉슨은 당선 후 그를 어떤 직책에도 임명하지 않았다.[7] 전임자 리처드 닉슨 사임(부통령 취임)[결] 결선투표[결] [결] [11] 마리온 W. 라폴레트(Marion W. La Follette). 로버트 M. 라폴레트와의 관계는 불명이며, 이후 캘리포니아 주의원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