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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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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tgomery Bus Boycott, 1955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Rosaparks_bus.jpg
재연 사진[1]

1. 개요2. 당시 상황3. 클로뎃 콜빈(Claudette Colvin) 사건4. 로자 파크스 사건5. 로자 파크스 재판, 그리고 보이콧의 시작6. 보이콧7. 1년 만에 본 결실

1. 개요

At the bus stop on this site on December 1, 1955, Mrs. Rosa Parks refused to give up her seat to boarding whites. This brought about her arrest, conviction, and fine. The boycott began December 5, the day of Parks' trial, as a protest by African-Americans for unequal treatment they received on the bus line. Refusing to ride the buses, they maintained the boycott until the U.S. Supreme Court ordered integration of public transportation one year later. Dr. Martin Luther King Jr. led the boycott, the beginning of the modern Civil Right Movement. (the rest omitted)
1955년 12월 1일, 이 자리에 있던 버스 정류장에서, 로자 파크스 여사는 백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녀는 체포되었고, 유죄 판결을 받아 벌금이 선고되었습니다.[2] 보이콧은 파크스 여사의 재판날인 12월 5일, 흑인들이 버스에서 받는 불공평한 대우에 대한 항의로서 시작되었습니다. 버스 승차를 거부하는 그들의 보이콧은 미국 대법원이 1년 후[3] 대중교통에서의 흑백 분리 금지를 명령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보이콧을 이끌었고, 이는 현대 시민 운동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후략)
- 옛 클리블랜드 가 정류장[4] 위치에 세워져 있는 기념판
1955년 로자 파크스 체포 사건으로 인해 촉발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운동. 이 사건을 시작으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이름이 미국에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본격적으로 인종차별 폐지 운동에 불이 붙었다.

2. 당시 상황

흑인에게 눈뭉치를 던져도 된다는 것을 모르는 아이는 없었다.
- 빌 브라이슨
1950년대 미국은 21세기의 사람들이 보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인종차별이 자행되던 곳이었다. 흑인과 백인은 기차, 학교, 병원, 음식점, 호텔, 미장원, 극장, 수돗가, 심지어는 교회신문 부고란, 장례식에서마저 분리되었다. 특히 로자 파크스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살던 앨라배마는 미국 남부에 위치해 인종차별의 최전선을 달리던 곳이었다. 대놓고 밤이면 KKK가 야간 행진을 하고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교회에 폭탄을 집어던질 정도였다.[5]

대부분의 미국 남부 지역에서는 1870년대, 그러니까 링컨이 노예 해방령을 내려 법적으로 흑인들도 선거권을 가지게 되자 그 직후부터 흑인이 선거에 참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온갖 수를 썼다. 일부러 인두세를 올려 이를 못 내는 흑인들은 체납자라고 선거권을 박탈했고 문맹 검사를 빙자해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난이도의 읽기와 쓰기 시험을 치게 했다. 백인에게는 “고양이의 철자를 쓰시오” 같은 아주 간단한 문제를 냈지만 흑인에게는 미국 헌법을 분석하라던가 심지어 라틴어를 읽고 해석하라는 척 봐도 일부러 곯려주려는 문제를 냈다. 당연하지만 이 시험에 합격한 흑인은 거의 없었고 어쩌다 그런 문맹 검사를 통과하여 투표를 하러 갔던 흑인이 투표소 앞에서 사람들이 뻔히 보는 중 공개적으로 총에 맞아 살해당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흑인들에 대한 린치나 사법 차별도 만연했다. 앞서 언급된 투표권을 행사한 흑인이 살해당한 사건에서 흑인을 도와준 백인 목사도 그날 밤에 의문사당했다. 범인들은 대놓고 죄를 공인 것마냥 떠벌렸지만 백인 판사나 백인 배심원들 그 누구도 아예 이 사람들을 처벌하려는 의지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고작 13분의 재판 후 이들은 무죄 판결을 받았고 범인들은 표창과 포상금을 받는 등 영웅 대접을 받았으며 의문사당한 백인 목사와 그 친족들은 역적 취급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이는 약과였다. 남부에서는 에멧 틸이라는 흑인 소년이 백인 여자에게 휘파람을 불었다는 이유로 그날 밤 그 여자의 남자 형제들 두 명에게 살해당한 일이 있었다. 이 사건 역시 흐지부지 종결되었다.

이러한 차별은 버스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1900년 제정된 앨리배마 주 몽고메리의 도시 법령(City Ordinance)에 의거하면흑인들도 이런 기가 막힌 짓거리를 가만 보고만 있고 싶지는 않았지만 당시는 KKK가 대놓고 날뛰던 시대였고 흑인의 인권 따위를 고려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그러던 1954년 5월 17일 미국 대법원은 이른바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Brown vs. Board of Education) 사건의 최종 판결을 만장일치(9:0)로 선고했다.
공공 교육기관에서의 '차별론'은 인정되지 않는 것을 확인한다. 아이들은 피부색에 관계없이 같은 교육기관을 다녀야 한다.
이 판결은 반격의 서막이었다.

3. 클로뎃 콜빈(Claudette Colvin) 사건

사실 로자 파크스 사건으로부터 8개월 전인 1955년 3월 2일 클로뎃 콜빈(Claudette Colvin)[10]이라는 흑인 여자아이가 백인에게 자리 양보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다른 승객들이 보는 앞에서 수갑이 채워져 체포당한 사건이 이미 있었다. 그녀는 NAACP[11] Youth Council의 일원이였으며 로자 파크스도 당시 NAACP의 몽고메리 지부 비서이자 고문(advisor)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에 몽고메리의 흑인 지도자들은 그녀를 구심점으로 삼아 보이콧 운동을 벌이려고 했지만 문제는 콜빈이 15살의 나이에 백인 남성과의 혼외 성관계로 아이를 가진 미혼모였다는 것.[12] 당시는 사회 전체가 보수적이던 50년대였고 도덕적인 면에서 고려했을 때 그녀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우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따라서 지도자들은 보이콧 운동을 조금 뒤로 미루기로 계획하고 일단 후일을 기약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후술될 브로더 대 게일(Browder vs. Gayle) 사건에서 핵심으로 부상했으며 닉슨 등의 지도자들도 몽고메리의 버스운행 제도가 불합리하다는 것을 알고 철폐하기 위해 MIA(Montgomery Improvement Association: 몽고메리 발전 위원회) 조직을 창설하는 등 노력하고 있었다.

4. 로자 파크스 사건

파일:1280px-Rosa_Parks_Bus.jpg
사건이 일어난 차량의 모습. 모델은 GM사에서 1940년에서 1969년까지 생산한 "Old-Look" Transit Bus 내셔널 시티 라인즈로 차량번호 2857. 사건 당시 차량의 시리얼 번호는 1132번이다. 현재는 헨리 포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파일:diagram.jpg
당시의 내부 구조도. 당시 로자 파크스가 앉았던 자리가 표시되어 있다.

1955년 12월 1일 목요일 약 오후 6시 무렵 시내 백화점에서 재봉사로 일하던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는 고된 하루 일을 마치고 시내에 있는 클리블랜드 가(Cleveland Avenue) 정류장에서 버스에 탑승했다. 그녀는 운임을 내고 11번째 좌석, 그러니까 백인석과 흑인석 가운데인 ‘아무나 앉을 수 있는 좌석’ 중 첫번째 좌석에 앉았다. 처음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이 많이 타더니 결국 버스가 만석이 되었다. 이후 백인들이 타자 운전기사 제임스 블레이크(James F. Blake)는 가운데 좌석 앞 줄(백인석 바로 뒤에 위치한 줄)부터 백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라고 요구했다.[13] 당시 중간석 앞자리에는 파크스를 포함한 흑인 네 명이 앉아 있었고 이들은 모두 일어나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운전기사 제임스 브레이크는 "댁들 모두 자리를 비키는 게 좋을 거요(Y'all better make it light on yourselves and let me have those seats[14])."라고 재차 강요했고 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파크스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15]
운전기사: "Why don't you stand up?" (손님은 왜 안 일어나요?)
파크스: "I don't think I should have to stand up." (일어나야 할 이유가 없다고 보는데요.)
운전기사: "Are you going to stand up?" (자리에서 일어날 거요?)
파크스: "No, I'm not." (아니오.)
운전기사: "Well, if you don't stand up, I'm going to have to call the police and have you arrested." (글쎄, 일어나지 않는다면 경찰에 신고해서 잡아가라 하는 수밖에....")
파크스: "You may do that." (그럼 그렇게 하시죠.)[16]

그렇게 해서 파크스는 체포되었다. 경찰이 그녀를 끌고 가는 동안 그녀는 경찰관에게 물었다.
파크스: "Why do you push us around?" (왜 우릴 이렇게 취급해요?)
경찰관: "I don't know, but the law's the law, and you're under arrest." (나도 몰라요. 하지만 법은 법이고, 당신은 체포 상태에요.)
파일:fingerprint-parks.jpg
부보안관 D.H.래키(Lackey) 경위가 그녀의 열 손가락 지문을 찍었고 머그샷#을 찍었다. 그녀의 죄수번호는 7053번이었다.

5. 로자 파크스 재판, 그리고 보이콧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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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 직후 촬영된 로자 파크스의 머그샷
로자 파크스가 체포된 날 밤, WPC(Women's Political Council) 소속 조 앤 로빈슨(Jo Ann Robinson)이라는 여자가 이하 내용의 전단을 뿌렸다.

(원문 출처: 위키백과)
Another woman has been arrested and thrown in jail because she refused to get up out of her seat on the bus for a white person to sit down. It is the second time since the Claudette Colvin case that a Negro woman has been arrested for the same thing. This has to be stopped. Negroes have rights too, for if Negroes did not ride the buses, they could not operate. Three-fourths of the riders are Negro, yet we are arrested, or have to stand over empty seats. If we do not do something to stop these arrests, they will continue. The next time it may be you, or your daughter, or mother. This woman's case will come up on Monday. We are, therefore, asking every Negro to stay off the buses Monday in protest of the arrest and trial. Don't ride the buses to work, to town, to school, or anywhere on Monday. You can afford to stay out of school for one day if you have no other way to go except by bus. You can also afford to stay out of town for one day. If you work, take a cab, or walk. But please, children and grown-ups, don't ride the bus at all on Monday. Please stay off all buses Monday.
또 다른 여성이 백인을 위해 버스 좌석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당하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는 흑인[17] 여성 클로뎃 콜빈이 체포된 이후로 두 번째입니다. 이런 일은 중단되어야 합니다. 흑인들에게도 권리가 있습니다. 이들이 버스에 타지 않는다면, 버스를 운행할 수 없습니다. 버스 승객들의 75%는 흑인들이지만 우리는 체포되거나 빈 자리를 두고서도 서서 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체포에 맞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이는 계속될 것입니다. 다음 차례는 당신이 될지도 모르고, 당신의 딸이나 어머니가 될 지도 모릅니다. 재판은 월요일에 열릴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모든 흑인들에게 체포와 재판에 항의하는 뜻에서 월요일에 버스를 타지 말 것을 요청합니다. 직장, 시내, 학교, 어디를 가건 간에 버스를 타지 마십시오. 만약에 버스 외에 갈 방법이 없다면 하루 정도 학교를 빠지는 것 정도는 감당할 수 있을 겁니다. 또 하루 정도 시내에 가지 못하는 것 정도도 감당할 수 있을 겁니다. 직장에 가신다면, 택시를 타시거나, 걸어 가십시오. 하지만 노소를 막론하고 월요일에는 버스를 타지 마십시오. 제발 월요일에는 버스를 타지 마십시오.

다음 날(12월 2일 금요일) 위에서 언급한 MIA의 회의가 교회에서 열렸다. 새로 뽑힌 주최자는 그 유명한 마틴 루터 킹 목사였다. 16-18명의 참석 인원들은 회의 끝에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제시했다.이후 이들은 이러한 요구 조건이 해결되기 전까지 버스를 타지 말자는 공문을 내리고[18] 월요일[19]부터 보이콧을 실행하기로 했다. 몽고메리의 각 흑인 교회에서 일요일 예배에 보이콧 동참을 홍보하라는 지시 사항도 있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12월 3일부터 보이콧이 시작되었다. 실제로 토요일 당시 버스를 사용했던 흑인은 극소수였다.

12월 5일 로자 파크스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판결 결과는 벌금 10달러에 법정 비용 4달러, 즉 14달러였다. 당시의 1달러는 지금의 7-8달러에 해당하니 100달러 이상의 벌금을 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당시 흑인들에게는 거의 폭탄 수준이었다. 당연히 파크스는 항소했다.

같은 날 홀트 스트리트 침례교회(Holt Street Baptist Church)에서 보이콧을 계속할 것인지를 두고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당시 킹 목사는 연설을 통해[20] 참석자들로부터 열광적인 찬성을 이끌어냈다.

12월 7일 FBI존 에드거 후버 국장은 "흑인들 사이에서의 동요(Agitation among Negroes)"를 인지하고 지도자인 킹 목사에 대해 "비판적 정보(Derogatory Information, 즉 흠집을 낼 만한 정보)"를 찾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6. 보이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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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콧 당시 한산한 버스 내부.
보이콧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실제로 버스를 애용하던 흑인들이 버스를 타지 않아 몽고메리의 수송 체계는 그야말로 심각한 적자에 시달렸다. 버스 회사 측에서 시 의회에 흑인 지역의 노선 구간을 폐지해 달라는 요청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먼 거리로 인해 차를 타야 할 경우 흑인들은 택시를 타거나[21] 카풀을 했다. 카풀도 지원자들이 상당히 나왔으며 일부 인종차별에 비판적인 백인 주부들[22]이 흑인 하인들을 직장에 태워주는 일도 있었으며 정해진 시간에 일정 노선을 도는 '공동 수송차(셔틀 차량)'도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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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풀
이에 정부에서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는데 12월 8일 이후 모든 택시 회사들에게 "45센트 이하의 금액을 받는 운전수는 해고할 것"이라는 지시가 내려왔고 지역 자동차 보험 회사들에게도 "흑인을 태워주는 카풀 차량은 보험금을 지불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흑인 지도자들은 영국의 금융 회사인 로이드 사에 연락을 넣었고 로이드는 이들의 제안을 수락해 보험 비용을 대신 지불해 주었다.[23] 또 자동차가 아닌 탈 것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걷는 것은 기본이고 자전거부터 시작해서 노새말이 끄는 마차까지 온갖 탈것이 동원되었다고 한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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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다 보니 러시 아워 때는 인도(sidewalk)가 북적북적했다고 한다. 비가 오는 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몽고메리 외부의 흑인 사회에서도 지지를 보냈다. 흑인 교회들은 새 신발 혹은 쓸 만한 중고 신발들을 몽고메리 흑인들에게 보냈고[25] 지지를 위한 모금도 실시했다. 버스 보이콧에 동참하는 뜻에서 버스를 타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고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유사한 보이콧 운동이 일어난 곳도 상당수 있었다.

7. 1년 만에 본 결실

1년 동안 몽고메리에 거주하던 흑인들은 백인들의 집요하고 치졸한 방해를 감수하면서 보이콧을 지속해 왔다. 버스 회사는 1년 내내 엄청난 적자를 봐야 했고 러시 아워가 될 때마다 두 발로 걷거나 자전거에 마차까지 타고 목적지로 향하는 흑인 군중은 일상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1956년 12월 20일 연방지방법원과 대법원은 몽고메리에서의 일련의 인종차별 및 분리 행위와 법령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림으로서 백인 사회는 백기를 들게 되었다.


[1] 사건 종결 후 재연을 위해 찍은 사진이다. 앞에 앉은 여성이 로자 파크스, 뒤에 앉은 백인 남자는 당시 사건 보도를 맡은 UPI 기자 니콜라스 크리스(Nicholas C. Chriss)다.[2] 벌금으로 14달러가 책정되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무시무시한 액수였다(1955년의 1달러=2016년의 8.86달러 정도). 특히 경제적으로 열악하던 흑인들에게는. 2019년 기준으로 한화로 환산하면 대충 15만원 정도.[3] 정확히는 381일 동안 보이콧이 계속되었다.[4] 로자 파크스가 자리 양보를 거부한 정류장. 현재는 정류장이 없어졌다.[5] 킹 목사가 사역하던 교회도 이런 테러를 당해 여자 성가대원 4명이 숨졌다. 이외에도 킹 목사의 집에까지 누군가 폭탄을 던져 백인 경찰과 흑인들 사이에서 흑-백 충돌이 터질 뻔한 일도 있었다. 다행히 이 테러는 킹 목사 집 문만 산산조각나는 것에서 그쳤고 킹 목사가 직접 나타나 흑인들을 설득한 끝에 폭력사태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았다. 당시 경찰서장은 "킹 목사가 당시 나와 백인 경찰들의 목숨을 살렸다"고 훗날 회고했다.[6] 당시 몽고메리 버스의 좌석 개수는 36개였다.[7] 정확히는 흑백혼혈(이른바 "컬러드(Colored)") 및 아시아계를 포함한 모든 유색인종.[8] 보통 법령은 일방적으로 지시만 하는 식이고 왜 지켜야 하는지 이유까지 포함하지는 않는데 위의 법에서는 정말 조문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9] 이 과정에서 흑인이 내리면 버스 기사가 요금만 먹튀하고 흑인이 다시 타기 전에 버스를 출발시켜 버려 골탕을 먹이는 경우도 상당했다.[10] 1939년 9월 5일생으로 현재 생존해 있다. [age(1939-09-05)]세.[11] 전미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 National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 1909년 성립된 미국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인종차별 반대 단체. NAACP Youth Council은 NAACP의 청소년 산하 지부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12] 클로뎃 콜빈은 1939년생이었다. 아이 아버지의 신원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13] 운명의 장난인지 당사자들도 정작 당시에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두 사람은 악연이 있었다. 약 12년 전인 1943년 당시 버스를 타고 가던 파크스는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요구를 받았고 이에 불응한 그녀는 버스에서 내렸다. 당시에는 비가 오고 있었고 운전기사가 다시 타라고 했지만 파크스는 이를 거부하고 비를 맞으며 다음 버스를 기다렸다. 그런데 당시 자리를 양보하라고 요구한 운전기사도 블레이크였다. 블레이크는 이 사건 당시 경찰 측 증인으로 섰고 이후에도 19년간 버스 운전을 계속하다 2002년 89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숨졌다. 로자 파크스 사건에 관해 그는 '파크스라는 여자에게 개인적으로 나쁜 감정은 없었지만 그녀가 한 일은 조례를 어긴 것이었고, 나는 그녀를 체포하게 해야만 했다'는 말을 남겼다.[14] 직역하면 '영리하게 행동해서 나에게 자리를 양보하라고.' 정도.[15] 훗날 파크스의 자서전(My Story)에 의하면 사람들의 말과는 달리 당시 42살밖에 되지 않은 그녀는 그다지 피곤하거나 지친 것도 아니었다고 한다. 다만 70년대에 나온 책 중에는 파크스 본인이 "그날 나는 무척 피곤했고 앉고 싶었다"고 술회했다고 명백히 적은 책도 여럿이다. 자서전 등에 실린 개인의 회고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뀌는 것(대개는 미화, 과장된다) 자체는 별로 드문 일이 아니다.[16] 출처: 파크스의 증언, Eyes on the Prize (1987, 인종차별 반대운동에 관한 TV 시리즈)[17] 원문에는 Negro라고 나와 있는데 당시 니그로라는 말은 차별적인 말이 아니었다.[18] 이는 딥 사우스(Deep South)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딥 사우스는 흑인 화장실 차별 철폐를 위해 일어났던 1950년대 미시시피 주에서의 보이콧 운동을 말한다.[19] 12월 5일 월요일은 로자 파크스의 재판이 열리는 날이었다.[20] 고작 20분밖에 주어지지 않았다고 한다.[21] 흑인 택시는 한 번 태워줄 때마다 당시 1인당 버스비였던 10센트만 받기로 합의를 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택시비는 싼 편이 아니니까.[22] 아무리 유색인종 차별이 극심한 시기였다고 해도 모든 백인들이 다 그런 차별을 일삼는 꼴통인 건 아니었다. 당시의 흑인민권운동에는 백인 여성들이 상대적으로 백인 남성들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지지를 보이는 경향을 보였다. 인종차별뿐만 아니라 남녀차별이 심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차별의 경험이 많았던 백인 여성들이 백인 남성들에 비해 훨씬 흑인들에게 더 공감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23] 아이러니한 것은 한때 이 회사가 흑인 수송선의 보험 회사였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외국인 노동자들 및 흑인들, 무슬림들과의 갈등으로 마찰이 잦지만 당시 영국은 미국보다 약 100년 정도 일찍 흑인 차별을 의회에서 폐지하였다.대신 인도인들과 중국인들을 부려먹었지[24] 웃기게 들리겠지만 당시는 1950년대였다. 불과 십여 년 전에도 전장에선 기병이 돌아다녔다.[25] 당시 신발은 쉽게 살 수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함부로 신고 다니는 게 아니었다. 맨발로 걸어다니는 아이들도 흔했다. 게다가 이들은 직장이나 학교로 갈 때 몇 마일(1마일=1.6킬로미터) 이상 걷는 일도 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