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30427> 미합중국 제37대 주영미국대사 존 W. 데이비스 John W. Davis | |
<colcolor=#ffc224> 출생 | 1873년 4월 13일 |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 클락스버그 | |
사망 | 1955년 3월 24일 (향년 81세) |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 | |
국적 | 미국 |
정당 | |
학력 | 워싱턴 앤 리 대학교 (B.A./L.L.B.) |
종교 | 개신교 |
가족 | 사촌[1] 사이러스 밴스 |
경력 | 연방 하원의원 (1911~1913 / 웨스트버지니아 1구) 제15대 법무부 송무차관 (1913~1918) 제37대 주영미국대사 (1918~1921) 대통령 선거 민주당 후보 (19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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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정치인. 변호사. 1924년의 민주당 대선후보였다.2. 생애
웨스트버지니아 출신. 우드로 윌슨 정부에서 법무부 송무차관과 주영미국대사를 지낸 바 있다. 주영미국대사 시절 일화가 있는데 평소 미영관계를 매우 중시하고 영국의 보수성을 옹호하던 데이비스가 주영대사로 갔을때 영국 총리가 다름 아닌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였다. 로이드 조지는 이 시기 인민예산으로 불리는 대규모 복지정책을 수립하고 있었고, 데이비스는 이에 충격을 받고 일기에 "로이드 조지 총리의 정책은 너무 리버럴하고 리버럴해서 나같은 미국 민주당원에게는 너무 충격적이다."라는 감상을 남겼다. 실제로 주의 권리와 인종분리 제도를 옹호하는 등 남부 민주당원으로서 민주당 보수파에 속하는 인물이었다.1921년 1월 9일, 조지 하비에게 주영미국대사직을 넘겨준 후 싱크탱크 외교관계위원회(ECR) 회장을 지내고 록펠러 재단 이사를 역임하는 등 정치권과 다소 거리를 두고 있었으나 1924년의 정치 상황이 데이비스를 다시 정치판으로 끌어들인다.
1924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갑작스레 민주당 후보로 선출되었지만 현직 대통령이던 캘빈 쿨리지에게 패배한다. 그가 민주당 후보가 된 사연이 조금 웃픈데 원래 1924년 대통령 선거의 유력 후보는 윌리엄 깁스 매커두와 뉴욕 주지사 앨 스미스였으나 둘의 승부가 하도 박빙이라 투표를 무려 백번 넘게 해도 결판이 나지 않자 타협 끝에 3위였던 데이비스가 103번째 투표에서 후보로 선출되었다. 부통령 후보는 찰스 브라이언.[2]
그렇게 힘들게 후보가 되었으나 본선에서 데이비스는 완전히 망했다. 쿨리지 대통령의 인기가 괜찮았던데다가 보수적인 데이비스에 반대한 진보표가 공화당 탈당파 로버트 라폴레트에게 이탈한 결과 28.8%라는 치욕적이란 말도 부족한 대참패를 당했다. 이는 민주당 역사상 최저득표로 후대의 조지 맥거번이나 월터 먼데일도 근처에도 가지못한 엄청난 기록(...). 다만 단단한 남부가 굳건히 민주당을 지지했기에 선거인단은 136명이나 얻었다.
대선 과정에서 KKK 비판에는 찬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오히려 당내 진보파였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이 남부표를 의식해 반대한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 참고로 그의 대선 맞상대 캘빈 쿨리지는 이 문제에 말없이 침묵만 지켜서 일각의 비판을 사기도 했다.
대선 참패 이후로도 데이비스의 경력은 끝나지 않았다. 데이비스는 민주당원임에도 같은 민주당 출신의 루즈벨트와 트루먼의 뉴딜정책에 반대했고 1936년과 1940년, 1944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을 지지했다.
사실 미국에서는 정치인으로서의 데이비스보다는 법조인으로서 더 유명한데, 법무부 송무차관을 지낸 이후에도 변호사로 활발히 활동했으며 연방 대법원에서 송무차관과 개인 변호사 시절을 합해 총 140건을 수임하였으며 20세기 이후 송무차관을 역임한 법조인으로서는 역대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하지만 개인 이념때문에 민주당 당적을 유지하고 있었음에도 루스벨트-트루먼 행정부의 뉴딜 정책에 계속 반발해 JP 모건 등 거대 기업의 법률 고문을 맡아 이들을 대리하는 역할을 주로 맡았다.
대표적으로 1952년에는 트루먼 정부의 국가 비상 사태를 이유로한 철강 공장 압류 정책에 반대해 대법원에서 승소를 이끌기도 했다.(Youngstown Sheet & Tube Co. v. Sawyer 사건) 하지만 말년에는 역사적인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사건과 연계된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인종분리 정책을 옹호하다가 패소를 맛봤다.(Briggs v. Elliott 사건)
3.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필요시 선거인단) | 당선 여부 | 비고 |
1910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웨스트버지니아 제1구 | | 20,370 (48.88%) | 당선 (1위) | 초선 |
1912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24,777 (44.97%) | 재선 | |||
1924 | 미국 대통령 선거 | 미합중국 | 8,386,242 (28.82%, 136명) | 낙선 (2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