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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9 11:40:06

난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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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당진시에 있는 난지도에 대한 내용은 난지도(당진)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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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지도 저자도 잠실도 무동도


1. 서울에 있었던 섬
1.1. 역사
1.1.1. 보이스타운
1.1.1.1. 노래하는 섬
1.1.2. 쓰레기 매립지
1.1.2.1. 난지도 사람들
1.1.3. 월드컵공원 조성
1.2. 관련 문서
2. 인천에 있었던 섬3. 충청남도의 섬

1. 서울에 있었던 섬

1.1. 역사

파일:난지도_지도.jpg

蘭芝島

상암동 영역 중 난지도 지역은 원래는 한성부 성저십리가 아닌 고양군 하도면 덕은리(지금의 고양시 덕양구 덕은동)의 일부였으나 1911년에 경성부로 편입되었다가 1914년에 다시 고양군 소속이 되었다. 1949년서울특별시로 편입. 상암동 문서 참조.

이곳은 유명한 신혼여행지로 이름을 날릴 만큼 풍경이 아름다운 섬이었다.[1] 섬의 이름도 난초()가 많이 자란다고 해서 난지도였다.

1.1.1. 보이스타운

1950년대에 목사이면서 보이스카우트 지도자인 황광은(1922~1970)이 6.25 전쟁 때 전쟁고아가 된 아이들[2]을 난지도에 모아서 보이스타운이라는 공동체를 만들었다. 1951년에 만들어서 1955년까지 존속했는데[3], 전쟁으로 서울 시내에 넘치는 불량청소년(과 불량 청소년이 될 위험이 있는 아이들)을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4]데다가 강 한가운데에 있어 자연 감옥이나 다름없는 섬[5]에 한 데 모아놓았으니 서울시 입장에서도 땡큐였다. 거기에다가 보이스타운의 또다른 이름을 소년공화국으로 지은 것처럼 민주시민교육도 시켜주니, 나중에는 서울시에서 특별시 안의 특별시로 인정해주었다고 한다.
1.1.1.1. 노래하는 섬
동화작가이기도 했던 황광은이 보이스타운을 바탕으로 노래하는 섬이라는 장편동화를 썼다. 처음에는 대여섯 명 정도의 전쟁고아가 모여살고 이따금씩 도시의 물품을 전해주는 아저씨[6]가 다녀간다는 내용의 단편이었으나, '노래하는 섬'에 이르러서는 300명(!)이 넘는 아이들이 모여사는 공화국이 되었다.[7] 노래하는 섬에는 (소년)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언론의 자유가 있었고 이것이 비판으로 끝나지 않고 소년정부가 비판을 받아들여 문제점을 수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독재자 쌍칼도 비록 시장 선거 때 선거운동하면서 뇌물공여, 야권후보 탄압 등을 저질렀을지언정 선거 자체는 민주적으로 시행했고, 투표 결과 주인공이 시장이 되자 임기를 마치고 물러났다.

1.1.2. 쓰레기 매립지

1978년 서울의 쓰레기 매립장으로 지정되었다.[8] 산업화로 서울이 급속히 팽창하는 동안 난지도에 15년간 산업폐기물, 건설 폐자재, 생활 쓰레기 등 9200만 톤을 버려 90미터 높이 언덕 두 개로 변했다.[9]
파일:4gWwgmY.jpg 파일:U35iiHI.jpg

쓰레기 적재량은 계속 늘어나서 하루에 트럭 3천 대 분량의 쓰레기가 버려졌고 마침내 기자 대피라미드의 33배에 이르렀다. 당시에는 쓰레기 소각처리가 일반적이지 않아서 쓰레기 대부분이 직매립되었다.

이 쓰레기 매립장은 서울특별시뿐만 아니라 인천, 부천, 광명, 안양, 구리 등 인근 도시에서 배출되는 쓰레기들도 매립되었고, 안양시, 시흥시, 광명시 등지는 안양 평촌에 있던 매립지와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안산 시화매립지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성남시분당구에 위치한 자체 매립지를 이용했었다.

인류학자 중에는 후손들이 난지도를 발굴한 다음에 20세기 사람들은 라면만 먹고 살았을 것이라고 논문을 쓸 것이라는 농담을 하는 사람도 흔히 있다. 가장 흔하게 나오는 쓰레기가 라면 봉지라고. 또한 1990년대 이전에는 돼지우리처럼 지저분한 방이나 장소를 흔히 '난지도 같다.'하고 빗대어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난지도가 폐쇄되고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표현이 생명력을 잃은 듯.

1992년 말엽에 수용 한계량에 도달하였고 동년 11월 2일부터는 일반 쓰레기의 매립을 금지하였다. 이후로는 건축 및 산업 폐기물들이 매립되다 1993년 포화 상태에 이르러 1993년 3월 19일 17시 기준으로 완전히 폐쇄되었다. 이후 서울의 쓰레기 매립지는 경기도 김포군 검단면(현 인천 서구)에 조성된 수도권 매립지로 이전하였다.[10] 다만 폐쇄된 뒤에도 단 한 차례 쓰레기를 매립한 적이 있었는데, 그 쓰레기는 바로 삼풍백화점의 잔해였다. 사실상 지금 난지도 안에 백화점 한 동이 통째로 들어있다고 보면 된다. 다른 매립지에 자리가 없어서 난지도 위에 덮을 수밖에 없었다고. 삼풍백화점 잔해 정리 과정에서 사람의 유해가 나와 유족들이 공분한 적이 있었다. #[11]
1.1.2.1. 난지도 사람들
파일:Ip54OMj.png

21세기 시점에서는 묻힌 사실이지만, 쓰레기 매립지가 된 난지도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전성기 때에는 거의 7백여 명이 거주했고 매립장 폐쇄가 된 1993년까지는 4백여 명이 거주했다. 이들은 쓰레기에서 쓸만한 자재를 골라 팔아서[12] 생계를 꾸렸다. 당시 그곳을 취재한 기사에 의하면, 사람들이 살던 가건물들은 당연히 무허가인 데다가 외부인 출입도 금지된 곳이라 경찰력도 미치지 않았고, 사람이 죽어도 쓰레기더미에 묻어버리면 그만이라 무슨 일이 벌어져도 알 수 없는 곳이었다 한다. 그래서 당시 난지도에 산다고 하면 더러운 일을 하는 극빈층[13]으로 분류했기 때문에 이들 가정의 자녀들도 학교에서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 이 난지도 주민들은 쓰레기서 나오는 메탄가스로 난방과 취사를 하기도 했다고.

난지도 현지 주민들도 그렇지만, 인근의 성산동, 망원동, 수색동, 멀리는 강건너 가양동 주민들도 난지도 매립장 때문에 적지 않게 고통을 겪었다. 특히 난지도 소각장이 가동되는 시간대에는 반드시 창문을 꽁꽁 걸어잠가야 했는데, 여름철엔 매우 힘들었다고 한다.

1981년 유재순 기자[14]가 난지도를 무대로 한 <난지도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논픽션을 내서 한때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적이 있다. 또한 1980년대 중반에 정연희가 <난지도>라는 소설을, 이상락이 <난지도의 딸>이라는 소설을 써내기도 했다. 1990년대에 KBS에는 이를 소재로 난지도 특집 다큐멘터리를 2부작으로 제작하기도 하였다. 만화가 강지훈도 난지도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1988년 7~8월호 소년중앙에 연재한 2부작 단편만화 "나는 왜 안줘요"[15]를 그리기도 했는데 이 만화에선 난지도는 배경이지 줄거리는 리더스 다이제스트 항목에도 나온 미국에서 실제로 있던 안전을 위하여 꽉 눌러야지 열리는 약병을 못 열어 죽은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넣은 작품이었다. [16]

이러한 생활 방식을 취하는 사람들은 전 지구적으로 보면 현재진행형이다. 특히 서방 세계(한국이나 일본도 포함)의 쓰레기를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 같은 제3세계에다 팔아넘기는 사업이 국제적으로 횡행하고 있는데, 이런 나라에서 쓰레기산을 뒤지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

1.1.3. 월드컵공원 조성

파일:Iy1ShxE.jpg
월드컵대교 건설 이전의 사진이다.
오른쪽 끝에 있는 아파트는 성산시영아파트이다.
파일:WtKiNrP.jpg
난지도공원 전경

매립지의 폐쇄 이후, 서울시는 해당 구역을 생태공원으로 조성하기로 계획해 쓰레기 산을 덮고 공원 건설을 시작했고, 2020년까지 안정화 작업에 돌입한 상태다. 방벽은 오염 하수가 한강에 스며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두껍게 둘러쳤으며 쓰레기에서 발생하는 메탄가스 및 다른 혼합물로부터 나오는 에너지는 인근의 월드컵 공원과 서울월드컵경기장 시설의 열에너지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현재 월드컵 공원은 평화의공원, 하늘공원, 노을공원, 난지천공원, 난지한강공원(한강시민공원 난지지구)의 5가지 테마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이 중 본래의 쓰레기 매립부지에 해당하는 구역은 난지도 제1매립지에 들어선 노을공원과 제2매립지에 조성된 하늘공원이다.
또한 난지도 주변에는 디지털미디어시티가 조성되어 업무지구와 주요 언론 및 방송사의 핵심시설이 자리잡고 있다. 또한 주변 지역도 아파트 단지로 재개발되었다. 강변북로 건너편에 난지한강공원도 조성되어 있다.

그 외에, 난지도 개발을 대비하여 서울 지하철 11호선이 계획되었지만 IMF로 인해 무산되었다. 이후 2024년 대장홍대선이 민투심 통과로 그 자리를 대신할 모양으로 건설을 앞두고 있는 중. 홍대입구-통일전망대선도 계획에 있으나 아무 진전이 없다.

이 난지도 에너지/침출수 재생처리장은 서울특별시가 아닌 이웃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현천동에 지어놨는데 남고양IC마곡대교 사이로 가다보면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고양시에서 때만 되면 시설 폐쇄 압박을 한다.

1.2. 관련 문서

2. 인천에 있었던 섬

청라도, 율도 등 여러 섬들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1980년에 매립됐다.

3. 충청남도의 섬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도비도항과 서산시 대산읍 대산항 맞은 편의 섬. 난지도(당진) 문서 참고.


[1] 1950년대까지만 해도 시발택시 타고 남산 올라가는 것이 일반적인 신혼여행으로 인식되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는 온양온천도고온천수도권에서 제법 인기있는 신혼여행지였고, 항공편이 발달한 1980년대부터 제주도 신혼여행이 흔해졌다. 신혼여행을 해외로 나가게 된 1989년 이후로 홍콩, , 하와이 등이 인기 있었다가, 2000년대 들어서 유럽이나 북아메리카로 범위가 확대되었다.[2] 여기에 감화원 출신의 소년들, 부랑아들도 모여있었다. <노래하는 섬>의 독재자(?) 쌍칼, 평양에서 피란와서 보이스타운까지 흘러들어온 주인공과 함께 했던 도마칼곰보장님 모두 거리의 부랑아들이었다.[3] 6.25 전쟁 기간에는 제주도에도 있었다.[4] 이 때 서울시의 경계와 상관없이 시가지가 형성된 곳은 사대문 안과 밖 일부 지역에다가 서울역에서 영등포에 이르는 경부축선 뿐이었다. 그리고 시내라고 할 때엔 당연히 사대문 안을 의미했다.[5] 이 때의 난지도는 샛강조차도 배 타고 건너야 하는 그야말로 강 한가운데의 섬이었다. 섬 밖에서 들어오는 배가 떠나면 섬에서 나갈 방법이 없는 것. 빠삐용의 그 섬을 생각하면 된다.[6] 황광은 자신을 모티브로 한 인물. 그런데 이 아저씨가 섬 아이들이 키우는 물오리를 야생동물인 줄 알고 사냥총으로 쏴 죽인다는 내용이 나오는 걸 봐선 자기 자신을 모티브로 하되 미화하지는 않았다.[7] 실제로 보이스타운의 또다른 이름이 소년공화국이었고, 여기서 철저하게 시킨 것이 민주시민교육이었다. 황광은 본인이 대광고등학교 교목이던 시절, 4.19 혁명 때 시위대에 합류하려는 학생들을 위해 기도하고 학생들과 함께 나아가기도 했다.[8] 난지도가 쓰레기 매립장으로 지정되기 전에는 서울시 쓰레기 매립장은 구의동(현 강변 테크노마트 부지. 링크), 장안동, 상계동에 있었다. 방배동, 압구정동에도 소규모 쓰레기 매립지가 있었다고 한다.[9] 정확히는 해발 8미터 저지대였는데 최고 높이 해발 98미터로 변모함.[10] 재밌는 사실은 이전 부지가 매립되고 없어진 난지도와 멀지 않은 곳이며, 서울특별시의 난지도와 이름이 같다는 점이다. 아래 2번 항목 참조.[11] 이후 미국에서도 폐쇄된 매립지가 재사용되는 사건이 있었다. 2001년 3월에 폐쇄된 뉴욕의 프레쉬 킬스 매립지(Fresh Kills Landfill)에 9.11 테러로 붕괴된 세계무역센터 잔해가 매립되었던 것.[12] 쓰레기 분리배출이 없던 시절이다. 재생이 되는 폴리에틸렌 등의 열 가소성 플라스틱과 고철로 팔수 있는 철, 녹여서 주괴를 만들면 소소한 수익이 나오던 알루미늄 캔류 등이 주 수입원이었다.[13] 그런데 이 속에서도 빈부의 격차는 있었다. 가장 많이 버는 사람들은 쓰레기차 한 대를 통째로 넘겨받아 자기네 식구들끼리 캐는 부류, 가장 못 버는 사람들은 남들이 다 캐고 남은 쓰레기에서 캐는 부류였다.[14] 2022년 현재 JP뉴스 발행인으로, 전여옥이 '일본은 없다'로 표절한 '하품의 일본인'을 쓴 사람이다.[15] 이 작품에서 난지도 사람들이 쓰는 속어가 몇 개 등장하는데, 폴리에틸렌 등의 열가소성 플라스틱은 ‘물렁이’, 고철 캔은 ‘알챙이’라고 부르고, 쓰레기차 한 대를 통째로 넘겨받아 자기네 식구들끼리 캐는 부류는 ‘개인차’, 남들이 다 캐고 남은 쓰레기에서 캐는 부류는 ‘뒷벌이’라고 부른다고 한다.[16] 원래 집이 찢어지게 가난하고 아버지도 병으로 일찍 여의 홀어머니와 두 동생과 같이 난지도에서 고물을 주워 팔던 딸아이 나래가 이를 안타깝게 여긴 동네 목사의 주선으로 소녀가장으로 방송을 타고 이어 아역 연기자로 대박을 거두게 된다. 돈벌고 인기가 많아지니 나래는 사람이 달라져서 난지도에 사는 걸 고역으로 여겨 돈모으면 집을 사서 하루라도 빨리 이사가려고 하는데 극중에 고물장수 알던 지인보고 이제 냄새나는 고물은 줍기 싫다라고 정색하며 말해 고물장수가 "사람이 변했군......"이란 말을 하기도 했다. 나래가 당시 큰 돈인 8만원(1980년대 후반 대졸자 월급이 4~50만원 정도였으니 지금 값어치론 6~70만원 정도)이나 주고 약을 사오는데, 극중 엄마 병에 효과가 있음에도 영어로 된 약병 설명글을 알 리가 없어 눌러서 돌리는 뚜껑을 못 열고 엄마는 홀로 아퍼하며 병을 던지고 몽둥이로 치며 약병을 열려다가 그만 죽고 마는 이야기였다. 나중에 사람들이 발견할 때 이미 식은 시체였고, 약만 먹으면 충분히 살 수 있었는데....안타까워하며 나중에 방송국에서 온 딸아이는 엄마 시체를 부여안고 미치도록 통곡한다. 한글로 적지 않아 문제라고 할 수도 없는데 엄마는 까막눈이라서 한글도 못 읽었다. 게다가 원래 먹던 약이 있었고 그거라도 있었다면 살 수도 있었는데, 하필 비싸고 좋은 약이 생겼다고 그건 갖다 버려서... 딸아이는 차라리 방송 안타고 연기자가 안 되었으면 가난하게나마 엄마는 계속 살 수 있었다 통곡하고, 주인공이었던 강고추(역시 고물상에 편모 슬하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남겨준 트럭이 있어 고물수급 및 운반은 더 쉬웠다. 물론, 당시 국딩인 고추가 운전은 못하고 홀어머니가 운전했다.)는 쓴 눈물을 흘리고 고추가 자기도 방송 나오고 싶다라고 안달하여 결국 그 목사가 또 방송국에 어찌 알아봐서 고추와 두 동생도 방송에 나올 기회를 잡지만 엄마가 저리 죽은 나래를 보고 고추나 두 동생 또한 가난해도 우린 엄마가 계시는 게 좋다라고 하여 착잡한 얼굴로 고추도 방송에 나오지말자고 한다. 하지만, 방송차량이 취재하고자 와서 지나가던 길에 멈춰 "강고추라는 아이 집 아니?" 라는 질문에 놀라서 고추가 모른다고 한다. 그러다가, 지나던 할아버지가 "이놈아,너가 고추잖아!"라고 하자 기겁하고 아니라며 달아났고 취재차량이 쫓아오자 사람살려라고 외치며 셋이 달아나서 방송취재진이 멍때리며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