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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1-29 23:12:44

김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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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약 10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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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②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③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 함.
④ 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⑤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⑥ 하시(何時) 하지(何地)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⑦ 하시 하지에서나 매 초회(招會)에 필응함.
⑧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⑨ 1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⑩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함이다.
5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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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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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군부 수뇌
대만총독
④ 매국노
⑤ 친일파 거두
적탐(밀정)
⑦ 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
조선혁명선언 황옥 경부 폭탄사건 }}}}}}}}}
파일:김방우(1935년).png
1935년 2월 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왕수산(王秀山), 김광호(金光湖)
전방우(全邦佑), 김광명(金光明)
우경호(禹慶浩)
출생 1914년 11월 3일[1]
경상북도 영천군 청경면 오류동
(현 경상북도 영천시 고경면 오류리)[2]
사망 미상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난징으로 가다2.3. 의열단원으로서2.4. 검거 이후
3.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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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1914년 11월 3일 경상북도 영천군 청경면 오류동(현 영천시 고경면 오류리)의 빈농가에서 아버지 김정범(金廷範, 1891 ~ ?)과 어머니 박수옥(朴手玉, 1892 ~ ?) 사이에서 1남 1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누나 김영희(金永姬, 1911 ~ ?)[3]가 있었고, 19세 되던 1932년 2살 연하의 배태분(裵太粉, 1916 ~ ?)과 혼인하여 슬하에 아들 김복태(金福泰, 1933 ~ ?)를 두었다.

아버지 김정범은 빈농이었으나 일찍이 첩(1896 ~ ?)을 들여 정실부인인 박수옥과는 별거하였고, 농사일을 그만두고 첩과 함께 대구부 동운정에서 고물상을 경영하며 생계를 꾸렸다. 이 때문에 김방우는 11살 때까지 고향 영천군에서 친어머니와 함께 살다가, 11살 되던 1924년에서야 아버지가 첩과 함께 살던 대구부 동운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동인동) 497번지에 본적을 두고 살았다.

11살 때 대구역 구내 매점에 고용되어 3년 간 일하면서 밤에는 사립야학강습소 보통과에 다니며 주경야독하여 14살 되던 1927년 졸업하였다. 그해 일본인 구와타 마사타케(桑田昌士)의 심부름꾼으로 고용되어 6개월 간 일했고, 대구부 서성정1정목(현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1가) 해광의원(海光醫院)에서 심부름꾼으로 2년 간 일했다.

17세 되던 1930년 상경하여 경기도 경성부에 살던 누나 집에서 약 6개월간 동거하다가, 다시 대구로 돌아와 대구부 경정1정목(현 대구광역시 중구 종로1가) 만경관(萬鏡館)의 신발 지킴이로 2년 간 일했다. 19살 되던 1932년에는 배태분과 혼인하고 부인과 함께 상경, 경성부 낙원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 경성부 경운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운동) 등에 거주하면서 인사동 경성(京城)까페 사무원 보조, 아세아까페 사무원 등으로 일했다.

그러다가 누나 김영희가 1933년 2월 자형(姉兄) 노석연(盧錫衍)과 함께 봉천으로 출국하자 부인과 함께 귀향하여 본가인 경상북도 달성군 달서면 내당동(현 대구광역시 서구 내당동) 448번지에 거주했는데, 얼마 뒤 노석연으로부터 '만주에 오면 돈벌이가 될 수 있으니 들어오라'는 편지와 여비 20엔을 받고 만주에 가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해 4월 29일 대구를 떠나 경성부, 평안북도 신의주부, 봉천성 안동현을 거쳐 봉천에 도착했다.

2.2. 난징으로 가다

이후 노석연이 경영하는 미화당(美化堂)간판점[4]에 거주하면서 1933년 5월 말 일본인 데라시타 하루이치(寺下春一)의 소개를 받고 봉천 서탑 인근의 일본군 비행장 기관부 청소원으로 일주일 간 일하다가 그만두고 백송(白松)까페 안내원으로 일했다. 이때 노석연으로부터 간판점을 자주 드나들던 의열단원 김수길(金壽吉)[5]과 친해지게 됐는데, 1933년 9월 중순에 김수길로부터 '중국 난징시에 있는 중국군관학교에서 조선인을 모집하여 급료를 주면서 비행술과 기타 군사교련을 시켜준다' '자신은 중국군관학교 출신으로 중국군관학교에 입학할 조선인 학생을 모집하여 보내기 위해 온 것이다, 만일 (김방우가) 지원하게 되면 소개해주겠다'며 중국군관학교에 지원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이때 노석연은 이미 지난 8월 중순에 간판점을 접고 남경으로 떠난 상태였고[6], 그 또한 고민하다가 일주일 뒤에 김수길이 다시 찾아오자 지원해서 가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 뒤 김수길의 지시[7]에 따라 앞서 떠난 노석연이 간판점을 접은 뒤 누나에게 매도금 차 건넨 100엔을 여비로 삼아 누나와 조카 노성팔(盧成八, 1929 ~ ?) 모자와 함께 봉천성 영구현(營口縣)[8]대련을 거쳐 일본 기선 츠츠미야마마루(塘山丸)를 타고 상하이로 갔으며, 그해 9월 말 상하이에 도착했다.

상해 도착 후 프랑스 조계지 내 법대마로(法大馬路) 중국여관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김수길이 말한 하비로의 명성사진관에 찾아갔으나, 곽헌대라는 사람은 없다는 말을 듣고 돌아왔다. 3일 뒤 상하이에 올 때 탔던 일본 배에서 만난 중국 학생 진원생(陳元生)의 도움을 받아 그 부근에 있는 평안여관으로 숙소를 옮기고 이튿날 재차 곽헌대를 찾았으나 여전히 찾을 수 없었다.

그동안 여비로 삼았던 100엔을 거의 다 썼기에 노석연의 본가에 200엔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부치고 기다리고 있다가, 5일 뒤 여관으로 진유일(陳惟一)이라는 자가 찾아와 어디서 온 누구이며, 누구의 소개로 왔는지,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를 묻더니 마찬가지로 프랑스 조계지 내에 있던 어느 여관으로 안내하였다. 그곳에서 반치중(潘致中)이라는 자를 데리고 나왔고, 곧 함께 기차표를 끊어 난징에 도착하여 아침 식사를 한 뒤 자동차로 난징 교외 강녕진(江寧鎭)[9]에 도착했다. 1933년 10월 초의 일이다.

2.3. 의열단원으로서

그는 동행한 반치중과 함께 일주일 간 견학을 하면서 지휘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10]에 2기생[11]으로 입학하였다. 이때 의열단 가입서약서에 서명하면서 본적, 성명, 연령, 이전 직업, 자산처 유무 등을 기록해 제출했고, 또한 진유일의 지시로 본적은 경상남도 부산부, 자산은 500엔으로 처자식이 없는 왕수산(王秀山)이라는 사람의 가짜 가입원서를 꾸며 따로 제출하면서 최종적으로 의열단원이 되었다.#

이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서 중국혁명사, 세계정세, 마르크스 경제학, 유물철학·유물사관, 변증법, 의열단사(史), 조선정세, 삼민주의, 사회과학, 정보학, 조직선전법 등으로 이뤄진 정치과(政治科)와 전술학, 진중요무령(陣中要務令), 유격대 조직법, 폭탄 제조사용법, 《보병조전(步兵操典)》, 기관총학, 교통교범, 폭파교범, 사격교범, 간이 측도학, 축성교범, 중기관총경기관총 조종법, 유도 등으로 이뤄진 군사과(軍事科)의 과목 및 야간 훈련 등을 이수한 뒤 1934년 4월 20일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한 달간 상부의 지시를 기다리다가, 그해 5월 19일 교관 석정(石正)으로부터 상하이로 파견되기로 했다는 사실을 들었고, 이튿날 다른 교관인 김준(金俊)과 함께 난징으로 가서 김원봉을 만나 구체적인 활동 지시[12] 및 여비 20위안을 받고 그날 밤 기차를 타고 상해로 갔으며, 5월 21일 상해에 도착했다.[13]

혁명공작의 사명을 띠고 상해에 파견된 그는 첫날 밤을 프랑스 조계지 내 하비로의 단화(壇和)여관에서 묵은 뒤 그 다음날 아침 이상구를 만났고, 이상구의 지시로 또 그 이튿날에 프랑스 조계지 라파예트로(辣斐德路) 정운리(停雲里)에 6위안의 월셋방을 얻어 살았다. 처음에는 무위도식하는 것이 좋지 않아 구직 활동을 하려 했으나, 이상구로부터 혁명공작에 대한 서적을 읽으며 계속 연구하면서 동지를 규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중국어일본어를 잘 몰랐던 그는 독서하는 것은 얼마 안 가 포기하고 동지 규합에 진력하기로 했다. 그러다가 그해 6월 말 안정득(安貞得)과 황훈(黃薰)이 이상구를 찾아와 상해에 동지 원세홍(袁世弘)과 노숭도(魯崇道)가 와 있으므로 길 안내를 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그는 이들을 영길리(永吉里)의 북평공우(北平公寓)로 데려다 주었고, 이튿날에는 안정득과 함께 국내에 잠입하라는 지시를 받은 원세홍과 노숭도를 중국 기선 정생호(定生號)에 타도록 안내했다.

그 뒤에는 이상구와 연락을 유지하면서 의열단 본부의 지휘를 기다리다가, 1934년 8월 24일 일본영사관에 검거되어 취조를 받았다. 다만 앞서 의열단 본부에서는 7월 중순에 상해 주재 일본영사관에 구직 운동을 의뢰해 두었는데, 그해 10월 8일 조선인이 경영하는 식당 경성관(京城館)에 고용되면서 무사히 방면되었다. 그러다가 남경에서 의열단원으로 상해에 오게 되었다는 것이 발각되어 1934년 10월 15일 상하이 일본영사관 경찰서에 검거되었다.

얼마 뒤 안정득(安貞得)이 검거되었고, 국내에 이미 잠입해있던 홍가륵 또한 11월 11일 충청남도 아산군 온양면(현 아산시 온양동)에서 검거되었다.

2.4. 검거 이후

1935년 2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14]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37년 2월 15일 출옥한 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자세히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김방우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3. 참고 문헌



[1] 양력 12월 19일.[2] 1934년 12월 12일 신문조서[3] 이명 김송자(金松子), 김영애(金永愛).[4] 봉천 서탑대가(西塔大街)3정목 1구-3에 있었다.[5] 이명 곽장호(郭章灝).[6] 이때 경상북도 상주군 출신의 노숭도(魯崇道, 본명 정해룡鄭海龍, 1910 ~ ?), 전라도 출신의 유적(劉敵, 본명 최영석崔英錫, 1911 또는 1912 ~ ?) 등이 함께 난징으로 갔다.[7] 봉천성 영구현(營口縣)에서 중국 또는 영국 배를 타고 대련(大連)을 거쳐 상하이에 도착하면, 프랑스 조계지 하비로(霞飛路)에 있는 명성(明星)사진관으로 가서 곽헌대(郭憲大)를 만나 "봉천에 있는 김수길의 소개로 온 사람"이라는 것을 밝히면 곽헌대가 중국군관학교로 안내하여 입학시켜 준다.[8]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잉커우시.[9] 현 중화인민공화국 장쑤성 난징시 장닝구(江寧區).[10] 표면상의 이름은 중앙육군군관학교로, 의열단장 김원봉중화민국과 조선의 공동 공작에 의하여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한다는 조건 하에 장제스와 교섭한 결과 1932년 9월에 창립하였다. 경비는 장제스로부터 매년 몇 만원씩 보조를 받았다.[11]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는 이미 1933년 9월 16일에 개교하여 1기생이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당시 학교 교관으로 있던 왕현지(王現芝), 대부(隊附)로 있던 김세일(金世一), 양진곤(楊振崑), 진유일(陳唯一), 인쇄인으로 있던 진가명(陳嘉明), 그리고 김방우를 모집했던 김수길(金壽吉) 등이 1기생이었다.[12] ① 프랑스 조계지 내 망지로(望志路) 북영길리(北永吉里)에 있는 모처에 가서 투숙하고자 하는 숙소 명칭을 메모해서 이상구(李相求)에게 건네주도록 부탁하고, 이상구가 찾아오면 누나와 동거하는 사실을 언급하여 누나와 면회하도록 하고, 누나에 대해서는 그동안 천진에서 아편장사를 했다고 둘러대서 안심을 시킬 것. ② 그리고 이후에는 이상구와 함께 프랑스 조계지 내에 함께 거주하면서 공작활동을 전개할 것. ③ 누나에게는 기회가 되면 학교에서 배운 것과 국제 정세 등을 들려주어 공산주의를 선전하고, 누나의 친구 중에 글을 알고 똑똑한 사람이 있으면 난징시로 보내주거나 직접 지도할 것. ④ 그때 그때의 정황과 자기의 행동을 약품 '페놀프탈레인'에 알코올을 용해하여 쓰고 (가성소다를 바르면 글자가 나타남) 남경 성내 기망가(奇望街) 우체국에 '이실(李實)' 앞으로 보낼 것. ⑤ 혁명에 대한 좋은 서적이 있으면 이상구와 상의하여 구매 후 발송할 것.[13] 한편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김방우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졸업 후 바로 상하이로 파견된 것이 아니라 1934년 6월 남경 적선사(積善寺)로 이동하여 의열단군관학교 남경분교 학원연구반(學員硏究班)에 입학하였고, 학원연구반에서 김원봉으로부터 항일투쟁의 활동 방법과 수단 등을 교육받고 의열단 지부와 조직망 확충, 조직원의 활동거점 확보 등을 지시받았다고 기재되어 있다. 이는 김방우의 신문 조서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데, '의열단군관학교 남경분교 학원연구반'이 아무래도 조선 내 특무공작을 위한 추진체로 설립된 조직이기 때문에 김방우가 신문당할 때 고의로 이 사실을 언급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14] 당일 안정득과 함께 공소권 포기 신청서도 제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