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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4 16:48:08

박문희(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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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약 10조
①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②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③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 함.
④ 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⑤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⑥ 하시(何時) 하지(何地)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⑦ 하시 하지에서나 매 초회(招會)에 필응함.
⑧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⑨ 1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⑩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함이다.
5파괴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④ 각 경찰서
⑤ 기타 왜적 중요기관
7가살
조선총독 이하 고관
② 군부 수뇌
대만총독
④ 매국노
⑤ 친일파 거두
적탐(밀정)
⑦ 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
조선혁명선언 황옥 경부 폭탄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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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박문희.jpg
이명 박문형(朴文憙)·박문희(朴文禧)·박문희(朴文喜)
출생 1901년
경상남도 동래군 동래면 복천리
(現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사망 미상
본관 밀양 박씨
가족 아버지 박용한, 어머니 김맹련
남동생 박문호, 박문하
여동생 박수정, 박차정
학력 동래보통학교 (졸업)
동래고등보통학교 (졸업)
서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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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독립운동가.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박문호, 박차정은 그의 동생들이다.

2. 생애

1901년경 경상남도 동래군 동래면 복천리(현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에서 부친 박용한(朴容翰)과 모친 김맹련(金孟蓮) 사이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박용한은 대한제국 탁지부 지사였고, 형제로 남동생 박문호, 여동생 박수정(朴首貞)과 박차정, 남동생 박문하(朴文夏)가 있었다. 이중 박문호와 박차정은 그와 함께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으며, 박차정의 남편은 김원봉이다. 여기에 조선청년동맹(朝鮮靑年同盟) 동래지부 집행위원장을 역임한 박일형(朴日馨)은 그의 숙부다.

박문희는 동래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동래고등보통학교 역시 졸업했다. 그러나 1918년 1월 부친 박용한이 일제의 식민통치에 분노를 금치 못해 유서 한 통을 남기고 자결했다. 박문희는 이에 큰 충격을 받고 일제에 대한 깊은 반감을 품었다. 그는 동래복음전도관[1]에서 기독교에 귀의했고, 전도관 형제들의 권유에 따라 1919년 봄 서울 경성성서학원에 진학했다. 그는 서울에서 3.1 운동에 참여했고, 경기도 안성교회, 경남 통영교회, 서울 독립문교회 등지에서 전도사로 활동했다.

1924년 6월, 대구 미션스쿨 신명여학교 출신 이도령과 결혼했다. 그 후 1925년 전도사를 사임한 그는 동래에 내려가 경남청년연맹을 설립하고 청년 운동을 펼쳤다. 1926년 1월 동래(東萊)에서 사상단체 혁파회(革派會)를 조직하고 서무부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9월에는 정우회(正友會) 집행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1927년 일본 니혼대학으로 유학을 가서 공부하다가 1928년12월에 귀국한 그는 신간회 동래지회에서 간부로 활동하다 1929년 6월 신간회 복대표대회에 부산구 복대표로 참가하여 중앙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하자 신간회 상무집행위원으로서 이를 지원하고 확산시키고자 노력하다 그 해 12월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었다.

1930년 1월 18일, 그는 신간회 간부 이주연(李周淵) 등과 함께 종로경찰서 유치장에서 단식투쟁을 벌였다. 그러다 1월 28일 신간회 회장 김병로(金炳魯)의 교섭으로 다른 간부들과 함께 석방되었다. 그 후 4월 8일 신간회 평양지회 주최 대강연회에서 <내외 정세와 신간회의 당면임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다 경찰의 제지로 중단되고 평양경찰서에 체포되었다가 훈방 조치되었다. 또한 5월 경상남도 지방 순회강연 중 울산에서 <신간회의 역사적 의의> 등의 강연을 한 후 울산경찰서에 체포되어 1주일 구류 처분을 받았다. 5월 27일 석방되어 부산으로 향한 그는 11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재선임되었지만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간의 분쟁이 격화되는 것에 회의를 느껴 12월 23일 신간회를 탈퇴했다.

1932년 8월 중국으로 망명한 박문희는 매부 김원봉과 여동생 박차정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했다. 그는 단원들과 함께 난징의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했고 9월에 귀국하여 서울과 경상남도 등지를 오가며 비밀리에 조선혁명간부학교 1기 입교생을 모집했다. 그 결과 10월 초순경 문길환(文吉煥)·김영배(金永培)·이무용(李懋庸)·신병환(愼秉桓) 등 5명을 먼저 난징으로 보냈다. 10월 말 난징으로 가서 김원봉을 만난 그는 1933년 입교생을 추가 모집하기 위해 다시 귀국하여 단원을 모집했지만 4월 20일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졸업한 뒤 국내로 들어와 활동하던 1기생 이무용, 문길환, 김영배 등이 체포되면서 그들의 배후로 지목되었다.

결국 1934년 2월 3일 일본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34년 6월 19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언도받고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36년 6월 19일 형 집행 만기로 출소했다. 이후 부산에서 동아일보사 동래지국을 경영한 그는 1950년 6월 6.25 전쟁을 피해 피난가던 중 실종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박문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부산 온천중앙성결교회 전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