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군 친위대와 러시아인 교관들. 1897년 촬영. |
1. 개요
주한러시아군사고문단은 러시아 제국이 구한말 한국에 파견한 군사 고문단이다. 1896년부터 1904년까지, 실질적으로는 1898년까지 조선군 및 그 후신인 대한제국군의 훈련을 맡았다.아관파천을 계기로 일본의 영향력을 제거한 고종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민영환을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을 파견하여 러시아 주둔군과 군사고문단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니콜라이 2세는 이에 화답하며 1896년 하반기부터 드미트리 푸챠탸 대령을 단장으로 하는 고문단을 파견, 청일전쟁과 갑오개혁으로 인해 말 그대로 증발한 조선의 군사력을 복구하고자 했다.
단장 푸챠탸 대령은 비단 병사 조련 외에도 전방위적인 국방개조를 구상했다. 그는 최소 3년, 최장 10년에 걸처서 군사학교를 통한 장교와 부사관 육성, 군병원 및 조병창의 설치, 근대적 행정체계 등을 도입하고자 했다. 이때 러시아군 교관들에게 훈련받은 친위대 장병들은 이후 대한제국군의 근간이 된다.
그러나 군사고문단의 파견을 계기로 한국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한 일본 및 영국과 미국 등 기타 국가 외교관들의 견제가 이어졌다. 또한 아시아주의 등에 경도된 한국 내 친일 관료들, 그리고 독립협회가 이들에게 호응하여 정치적 공격을 가하면서 고문단의 운영에는 차질이 빚어졌다. 또한 러시아 내부의 대 한국 외교노선이 변화하면서 고문단은 서서히 유명무실화되었다. 단장 푸챠탸와 기술자 렘노프를 비롯한 일부는 이후에도 한국에 남았으나 1898년부로 대다수의 고문단은 한국을 떠났다. 남은 이들 역시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며 귀국했다.
주한러시아군사고문단의 계획은 미완으로 끝났으나, 대한제국군에 러시아식 편제와 계급체계 등의 유산을 남겼다. 해방 이전까지 한국 군사사에 주요 군사교범으로 쓰이는 보병조전 등에도 이들의 영향이 남았다.
2. 역사
3. 기타
장병들이 케피모 대신에 피스 헬멧을 착용하던 시절의 모습이다. 제대에 러시아군 장병이 함께 선 것으로 볼 때 장교 외에 러시아군 사병들도 참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4. 출처
- 서인한, 《대한제국의 군사제도》
- 러시아 소장 근대한국문서
- 한국 근대 사료 DB
- Русские офицеры – исследователи Кореи конца XIX — начала XX в.в.
- Русские военные инструкторы в Корее и Китае в конце XIX в.